CINELAB2024-05-02 12:24:36
자비에 돌란 왕가위 영화 영감의 원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5월 15일 개봉
자비에돌란, 왕가위, 라이언 맥긴리, RM 등
전세계 아티스트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예술가
낸골딘(Nan Goldin)
세계적인 아티스트 낸골딘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5월 15일 개봉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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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목소리를 내는 프랑스 여성 영화 앵그리 애니
앵그리 애니는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2023년 개봉작 '슬기로운 아내 수업'과 연결 선상에 있다. 비록 장르는 드라마와 코미디로 다르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다.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이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이요 삶의 목적인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남녀 관계에서 성적 결정권이 남성에게만 있는 것은 결혼 전이나 후나 동일하다.
원치 않는 임신과 원하는 임신이었을지라도 남편이 원치 않아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는 그리고 죄악이라 여겨지는 결정을 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죄책감과 고통 가운데 살지만, 합법적으로 수술을 받을 수 없어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배 속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영화는 성에 있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받아야 하며, 피임에 의한 자유로움을 어필한다. 피임에 의한 무분별한 성생활이 영화의 주제라기 보다 남녀가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가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중 여성의 특성과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여성 잡지를 정작 남성이 아닌 여성이 읽는다는 아이러니함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성의 결정권은 여성이 바라는 영역이지만, 이러한 주제를 다룬 영화 관람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앵그리 애니 시사회 역시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세 네명의 남성 관객이 있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희망의 작은 불씨처럼 보였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고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대해줘야 함을 어려서부터 알아가고 배워가길 바래 8사 아들과 함께 시사회에 참석했다.
남편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라는 등식을 가진 아내에게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운동에 참여하며 자신과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이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것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간다.
가정을 내팽개친다는 조롱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가사 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피력하며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자리로 간다.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켰다고 안도할 즈음 자신과 동일한 상황 안에서 목숨의 힘이 점점 약해져 간 친한 친구의 일을 경험하며 애니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결정이 달라진다.
나 또한 애니와 비슷한 일을 겪은 뒤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결정을 내리는 선택이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즈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왜 유독 너만 이렇게 하냐?"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란 나는 더 이상 이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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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일상화
미국이 '인디언'이라 부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내쫓아 땅을 빼앗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은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런 이야기들 중에 <포카혼타스>나 <늑대와 춤을>, <라스트 모히칸>과 같이 잘 알려진 영화와 애니메이션도 있다. 차별받고 학살당하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나아가서 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싸워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물론, 그것들이 품고 있는 무서운 '내적 식민지화'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미국의 원죄나 다름없다. 위의 이야기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어떻게 학살되고 차별받고 쫓겨났는지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려던 백인들이 그들을 구원했다'라는 메시아적 서사를 덧씌운다. 이 개념은 정말 여러 군데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단 아메리카 원주민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타잔>과 <라스트 사무라이>등으로 그려지고 최근엔 <아바타>까지 그 서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비판한다며 열광한다. 결국 그 식민지도 백인이 구원한다는 이야기인데. 한국으로 비유해 보자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해 일본과 싸우던 항왜를 주인공으로 해서, 항왜가 조선 여인과 사랑도 하고 조선을 구했다는 식의 스토리가 되는 셈이다.
서양의 이런 메시아 서사는 기독교의 예수 스토리에서 영향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간의 편에서 구원을 돕는다. 결국, 신인 자신을 희생해 인간을 구원한다. 이 기독교식 구원 이야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은 신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다.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는 이런 메시아 서사를 백인과 식민지의 관계로 풀어놓아서, 얼핏 보면 식민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는 이야기 같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식민지인 자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짙게 깔려있다. 결국 그들을 구원하는 건 그들에게 감화된 제국인, 백인이니까.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기존의 '백인이 식민지를 구원한다'는 서사를 깔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흑역사와 원죄를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뉴욕 백인들의 끔찍한 과거까지. 그는 그것을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과 이상하게 인연이 없는 감독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흔한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학살'에 대한 스토리가 아니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동안 백인 구원서사로 점철되어 왔던 이야기들의 민낯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살인의 일상화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족은 백인들에 의해 바위 투성이인 오클라호마로 쫓겨가 어쩔 수 없이 그곳에 터전을 잡는다. 하지만 거기에서 석유가 터지며 상황은 반전된다. 백인들이 내쫓고 그들의 땅이라고 이름 지어준 곳에서 석유가 터졌으니, 백인들의 법으로 오세이지족의 석유가 된다. 여타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무조건 백인의 법을 무시하고 무식하게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던 것과 달리, 오세이지족은 그 법을 살려 석유가 자신들의 돈이 되도록 한다. 물론, 그 돈을 온전하게 다 쓰지 못하도록 백인들이 또 복잡한 절차를 만들긴 했지만.
영화에서 계속 그려지는 풍경은 굉장히 기이하다. 개척시대에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과 백인들이 너무 즐겁게 융화되어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세이지족이 백인들을 하인으로 부리고 있다. 백인들은 친절하고, 그들의 말을 배우고 같이 사업을 하며 술도 마시고 결혼도 한다. 오세이지족도 마냥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백인들의 집, 문화와 많이 동화되어 있다. 이런 풍경을 그리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정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에서, 오세이지족은 너무 일찍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그냥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백인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 부분이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 중 하나인데, 끔찍한 연쇄살인이 너무도 평범한 일상과 평화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연상시킨다.
<큐어>는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끔찍한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에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것이 최면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두가 살인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살인의 일상화'로 공포를 주는 작품이다. 발랄한 아침음악과 함께 아침 일상을 하는 도중, 마치 옷을 개듯 사람을 죽이고 다음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 하지만 <플라워 킬링 문>은 더욱 무섭다. 왜냐하면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는 백인들은 최면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최면
사람들은 보통 권력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권력은 오히려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드러낸다. 언론은 무언가를 일부러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을 과시한다. 검찰은 기소하지 않음으로 그 힘을 과시한다. 촌지를 받은 선생님은 잘못한 학생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보여준다.
오클라호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 중 하나가 된 오세이지 족이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백인들이 세운 거대한 미국이라는 국가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실상 권력은 백인들이 쥔 셈이었다. 그곳의 백인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특히 오세이지족과 가장 친한 그들의 대변자 윌리엄 킹(로버트 드니로)부터, 그곳 보안관까지. 그 마을의 백인들은 범죄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권력을 드러낸다.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최면보다도 더 강력하다. <뜨거운 녀석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글에서도 언급했듯,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며 스스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인식조차 없어진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그래서 무섭다. 오세이지 족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일상 속에서 죽이는 백인들은 그들이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현대에도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미디어 역시 최면이다. 사람을 이야기에 빠트리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서사의 당위성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해진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영화라는 최면 안에 녹여서, 그것이 '영화를 즐기는 재미'속에 들어가도록 두지 않는다. 이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또 범죄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당혹스러울 정도로 영화라는 형식을 깨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최면에서 깨는 '레드선' 주문을 들은 것처럼,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였고 현실이라는 것을 마주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피지배자
오세이지 족은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사람들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그들을 구하러 오는 FBI가 주인공처럼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오세이지 족과 결혼하는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했다. 더군다나 '잘생김의 서사'를 피하기 위해,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의치를 넣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가며 열연을 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선 오세이지족의 억울함, 스스로 개척하고 구원하는 힘이 더욱 강조되었다. 영화 내내 오세이지 족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이 영화가 오세이지 족과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의 모든 피지배층을 대변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미국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은 지배층인 백인이었지만, 미국 흑인들의 목숨을 건 꾸준한 저항이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여성운동 또한 권력층인 남성들이 변화해야 하지만,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정도라도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국이 1919년 독립선언을 한 이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백인에 의해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을까? 피지배층은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해왔던 길이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여도, 당장은 힘이 없는 자의 몸부림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기존의 메시아 서사처럼 지배층의 누군가가 감화되어 싸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현대의 오세이지 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작의 저자 인터뷰에 따르면 오세이지 족의 석유는 고갈되었지만, 7개의 카지노를 운영하며 자체 헌법으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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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얼핏 보면 '이전에 하던 백인이 인디언 죽이는 이야기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역사의 이야기며, 그동안 백인 구원 서사를 통해 백인들이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다.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달하는 거장의 발걸음도 묵직하고, 범죄의 희생자였지만 피해자처럼 살지 않고 백인에게 무릎 꿇지 않는 오세이지 족의 당당함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한국 제목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는데, 원작 소설의 첫 페이지를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인 <플라워 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할 정도로 커다란 달 아래에서 코요테들이 울부짖는 5월이 되면 자주달개비, 노랑데이지처럼 키가 좀 더 큰 식물들이 작은 꽃들 위로 슬금슬금 번지면서 그들에게서 빛과 물을 훔쳐가기 시작한다. 작은 꽃들의 목이 부러지고 꽃잎들은 팔랑팔랑 날아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땅속에 묻힌다. 그래서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은 5월을 '꽃을 죽이는 달 Flower-killing moon'의 시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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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없이 맞이하는 황혼의 순간
준비없이 맞이하는 황혼의 순간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 리뷰
출처: 다음 영화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에-또한 마지막이기도 하고- 그 어떤 사람도 능숙하거나 잘할 수는 없다. 다만 익숙해지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 속 노부부 역시 피할 새 없이 다가온 이 첫 황혼의 순간을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하며 인생의 새로운 위기에 봉착한다.
뉴욕 브루클린, 이스트 빌리지 아파트에는 은퇴한 교사 루스(다이안 키튼 분)와 화가 알렉스(모건 프리먼 분)가 살고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어려워진 알렉스를 위해 40년 동안 머물러 온 집을 팔기로 결심하는 루스. 부동산 중개인인 조카 릴리(신시아 닉슨)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매물로 내놓지만 집 보러 온 사람을 맞이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일들이 쉽지가 않다. 한편, 정든 집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은 알렉스는 집 안 곳곳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잠긴다. 결국 루스는 알렉스와 함께 직접 살 집을 찾아 나서지만 파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집 고르기. 집을 사는 것도 파는 것도 모두 어려운 루스와 알렉스는 과연 이 아파트를 무사히 떠날 수 있을까?
언뜻 보면 그저 두 노부부가 이사를 하며 겪는 좌충우돌 고군분투기처 같은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은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이 저희도 모르는 새 다가온 노년의 시기를 극복하며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여는 과정을 보여준다. 루스와 알렉스를 힘들 게 하는 가장 큰 벽은 바로 본인들을 그저 ‘노인네’로 만드는 현실. 집 사고파는 일을 도와주는 릴리는 시종일관 두 사람을 세상 물정 모르는 늙은이 취급하며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그들이 만나는 젊은 사람들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 폭탄 테러 위협과 애완견 도로시의 입원까지. 우아하게 맞이할 줄 알았던 노년, 현실적이라기보다 다소 영화적인 이 모든 사건들은 두 사람의 삶을 의도적으로 혼란에 빠트려 두 사람을 시험한다.
출처: 다음 영화
그리고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달리는 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그들이 돌아본 건 40년을 함께 한 과거. 살고 있는 집 곳곳에 스며든 두 사람의 그리운 기억들은 잊고 있던 그 시절 그 마음을 상기시켰다. <유스>(2015)에 등장하는 노년의 영화감독 믹 보일(하비 케이틀 분)은 이렇게 얘기한다. ”저 산을 봐봐. 젊었을 때는 이렇게 모든 게 가까워 보여. 미래니까. 반대로 이렇게 봐봐. 늙으면 모든 게 이렇게 멀게 보여. 과거니까.” 그렇다. 루스와 알렉스가 그 과거를 잊어버릴 뻔한 건 그 순간들이 단지 너무 멀리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미래가 두 사람을 지치게 만들 때 두 사람은 눈을 돌렸고 멀리 있어 돌아보지 못했던 과거는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며 그들을 묵묵히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루스와 알렉스의 태도과 행동이 모두 옳다고 할 수만 없다. 젊은이들은 노인네를 기계치로 안다고 성질을 내는 알렉스는 결국 메일 한 통을 제대로 못 여는가 하면 현관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다른 집주인의 부탁에도 두 사람은 막무가내로 들어간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치는 일도 있고 사실 전처럼 몸이 아주 건강한 것도 아닌 게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건 그들 역시 이 시기가 낯선 처음이기 때문이다. 노년의 지혜는 젊은 시절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들 자신에게 노년에 대해 조언해 줄 이들은 사실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출처: 다음 영화
더불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된다.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이 부드러운 브라운톤의 화면을 통해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든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덕분이다.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브루클린 역시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꼭 가고 싶은 사랑스러운 장소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인간적이고 따스한 순간에 존재하는 루스와 알렉스. 차갑고 냉정하며 복잡함으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세상과 상관없이 둘만의 세상에 살아가는 노부부의 시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응원하게끔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과거가 현실의 상황을 기적처럼 바꾸진 못한다. 아무리 다정하게 두 사람을 바라봐도 우리가 직접 도울 수는 없다. 결국 매 순간순간 도전이 되는 인생의 황혼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건 두 사람의 몫. 곁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두 사람은 이 모든 시기를 견딜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의 원제는 <Ruth & Alex>. 사실 꼭 멋질 필요까지도 없다. 단 두 사람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되니까 말이다.
지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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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야
<지옥> 시즌1은 마치 재난 영화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특정인들에게 지옥의 사자가 고지를 하고, 죽는 날을 지정한 뒤 그 날이 되면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죄인이라고 지칭된 당사자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쯤 종교적인 인물인 정진수(김성철)가 등장한다. 그는 새진리회의 의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신의 의도로 포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살촉이라는 지옥 추종자들이 생겨나 또 다른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는 소도라는 집단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지옥> 시즌1은 지옥 고지와 시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그리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며 더 큰 혼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가 갑자기 중세 사회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연상시키며, 막을 수 없는 재난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종교적인 마음을 이용해 세력을 늘려가는 새진리회가 등장한다. 시즌1이 정진수 의장의 시연과 고지를 받은 갓난아이를 살리려는 현실적인 과정을 그려냈다면, 시즌2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사회와 갈라진 집단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정진수의 공포
시즌2에서는 부활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특히 시즌1 중반에 시연을 당해 지옥으로 갔던 정진수 의장이 시즌2 초반에 부활한다. 그의 부활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각 집단들이 그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부활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던 동안 새진리회는 새 의장을 뽑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고, 그 사이에 화살촉의 세력은 더 커졌다. 소도 역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 왔다. 정진수 의장의 부활뿐만 아니라, 시즌1에서 공개 시연을 당했던 박정자(김신록)도 부활하게 되면서, 두 부활자는 상반된 상황을 보여준다.
정진수 의장은 부활한 이후에도 불안한 상태를 지속한다. 그는 사실 지옥 고지를 받은 첫 번째 희생자였다.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고지를 받았던 그는 자신이 왜 죄인으로 지목되어야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가졌던 의문과 공포가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정진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죄 없이 시연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시간 강력한 공포 속에서 살아왔고, 그 공포는 그가 부활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를 부활한 메시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정진수는 전혀 그 위치에 갈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을 뿐이고, 다른 부활자들도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번 시즌2에서 등장하는 정진수는 시즌1에서처럼 안정적인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공포에 짓눌려 온전한 자신을 잃어버린 허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력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두 번째 감정] 각 집단의 혼란
부활자가 등장하면서 새진리회, 화살촉, 소도는 모두 바빠진다. 각자는 자신들이 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조직만이 유일하게 신의 의도를 따르는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소도는 새진리회와 화살촉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지만, 결국 그들도 신의 의도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을 가지고 활동한다. 시즌2에서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는데, 바로 정부다.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이수경 정무수석은 점점 혼란에 빠지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등 각 세력을 만나며 힘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혼란스러운 현재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각 세력이 가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국민은 공포 속에 살아가고, 각 세력들이 대립하면서 사회는 점점 무정부 상태로 흘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등장은 그나마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과 비교해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에서 혼란을 방치하고 있는 현 정부와는 달리, <지옥> 속 정부와 관료들은 적어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내부에서도 신의 의도를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각 조직 내에서도 방향성에 대해 갈등이 존재하며, 내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새진리회는 부활자 박정자를 이용해 신의 의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발표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화살촉과 소도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정진수 의장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이야기 말미에 닥쳐온 또 다른 재난은 이러한 혼란을 극대화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수습하려 할수록 더 많은 변수들이 등장하고, 이로 인해 내부 분열과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감정] 민혜진 변호사의 따뜻함
<지옥> 시즌2는 전반적으로 무척 어둡다. 마치 세상의 멸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분열과 혼란, 정치적 모략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혜진 변호사(김현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신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으며, 고지를 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지는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도 찾아온다는 점이다. 민혜진 변호사는 그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신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민혜진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마음과 측은지심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그 마음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일종의 모성애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을 보호하려 한다. 시즌2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반복된다. 그녀는 규모가 커진 소도라는 조직에 속해 있지만, 조직의 이익보다는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민혜진은 어떤 집단과도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사람 자체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시즌1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나, 부활자 박정자를 구출해 그녀의 아이들에게 데려다주는 과정 등을 통해,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도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이는 민혜진 변호사가 가진 따뜻함의 온기 덕분일 것이다. 결국 사회를 안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은 차가운 이성만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민혜진이라는 인물은 <지옥>의 세계관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보인다.
<지옥> 이 훌륭하게 담아낸 혼란
<지옥> 시즌2는 현재의 정치적 혼란을 확장시킨 것처럼 보인다. 각 집단들이 균형을 잡고 나아가지만, 엄청난 혼란과 재난이 닥치면 그 균형은 쉽게 흔들린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 혼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겠지만, 국민 개개인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공허한 권력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지옥>에서도 다양한 인물들이 권력을 쥐려 하지만, 시즌2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사회를 안정시키거나 권력을 확립하지 못한다.
이 드라마는 매우 현실적인 재난을 다룬다. 지옥 고지와 시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고,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액션은 마치 실제 지옥에 온 것처럼 공포감을 자아낸다. 시즌2의 메시지는 시즌1보다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며, 관객들에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사회 고발적 성격을 지닌 종교적 문제를 다루며, 연상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더욱 확립했다. 다작을 해온 그에게 <지옥>은 여전히 대표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 배우는 시즌2부터 새롭게 이 역할을 맡았다. 시즌1의 유아인 배우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김성철만의 정진수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민혜진 역의 김현주 배우는 따뜻함을 감추고 있는 이성적인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박정자 역의 김신록 배우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며, 그녀가 보여준 절망과 고통의 감정은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였다.
<지옥> 시즌2는 사회적 혼란과 종교적 광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다양한 집단이 각기 다른 신념으로 움직이며, 그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민혜진과 같은 인물이 주는 작은 희망은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임을 일깨운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공포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복잡성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마치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시즌2는 단순한 드라마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반드시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다. 혼란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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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쯤 마음에 품고 있잖아요 지브리 남주. 최애 지브리 남주 고르기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자 지브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
항상 따듯한 분위기의 영상과 함께 아련하고 설레는 이야기들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는데요 오늘은 줄거리와 더불어 지브리 최애 남주를 선택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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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실패한 아들'의 분노
- 7★/10★
갈비, 잡채, 각종 전, 김치…… 정성스레 요리한 맛깔스러운 요리가 하나둘 식탁에 오른다. 창래와 누나가 종일 요리한 음식이다. 가족들이 격식 있는 옷을 갖춰 입고 식탁에 앉아 있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창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한 해 마지막 날의 저녁 식사, 그리고 어쩌면 영영 마지막일지 모를 가족의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엄마는 감동한 표정으로 음식을 둘러보고는 창래가 가위로 잘게 자른 갈비를 입에 넣는다. 그러나 바로 뱉어낸다. 위암 투병과 항암 치료로 몸이 극도로 허약해진 엄마는 자식들이 준비한 음식을 넘기지 못한다. 창래는 자책한다. 갈비를 이렇게 달게 요리해서는 안 됐다고, 이건 실패한 요리라고. 엄마가 그런 창래를 나무란다. 그렇지 않다고, 정말 잘 만든 요리라고. 그러나 엄마는 끝내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다. 창래가 옳다. 그의 요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죽임이 임박한, 극도의 고통을 겪는 엄마 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창래는 간병을 위해 뉴욕의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를 위해 요리하고, 병간호하고, 청소하고, 갈라지고 떨어진 거실의 내벽을 새로 칠한다. 창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수없이 해줬던 요리를 떠올린다. 부엌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엄마가 종종 차근히 설명해주었던 레시피를 천천히 복기한다.
엄마는 한국에서 실력 있는 농구선수였다. 아빠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그를 따라 미국으로 왔다. 창래가 엄마의 삶이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자 엄마는 부드럽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에게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아빠와 달리 엄마의 영어는 서툴다. 영어가 그녀의 모국어가 아님이 단번에 드러나는 발음이다. 그래서 엄마는 종종 창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카드사에 전화해 대금이 잘못 청구되었다고 묻는 일 같은 것들. 창래는 엄마가 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더 연습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어쩌면 게으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그 말에 북받친 듯 눈물을 보이고, 창래는 뒤돌아선 엄마에게 용서를 구한다.
같은 이민자지만 엄마와 아빠/누나/창래의 세계는 다르다. 학자인 아빠는 엄마가 겪는 문제를 겪지 않는다. 창래와 그의 누나 역시 엄마의 집요한 노력으로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다.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상승’한 데에 크게 만족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가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죽을 걸 알았어도 아들을 기숙 학교에 보냈을까? 그 시기가 아들과 함께할 마지막 시간임을 알았더라도? 창래를 향한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창래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으나 엄마와 그녀의 세계가 소외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창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 대한 아빠의 무지로부터 그녀를 옹호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창래의 귀환은 실패했다. 어머니는 그가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창래는 엄마의 세계로 회귀하지 못한다. 실패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coming home again)’이 ‘엄마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데서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창래에게 엄마/집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고정된 장소다. 그러나 실재하는 엄마/집은 창래의 기대와는 다르다. 엄마와 그녀가 꾸리는 공간인 집은 그녀의 상황과 욕망에 따라 매 순간 재구성되는, 생동하는 무언가다. 창래의 성공을 기뻐하는 동시에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데 아쉬움을 느끼는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보여주듯, 엄마의 욕망과 기대는 창래(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이되어왔다. 그녀의 욕망과 기대가 투영된 집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창래가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의 좌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창래가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 요리의 맛과 자신이 직접 요리한 음식의 맛이 다르다는 데 분노하며 책상을 내리친다. 저녁 식사를 망친 후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꽉 끌어안는데, 엄마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창래의 거친 포옹은 엄마에게 고통만 준다. 창래의 괴로움은 진짜다. 엄마를 향한 그의 마음도 진짜다. 문제는 창래의 진심이 젠더화된 가족의 의미망을 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엄마가 자기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듣지 않느냐는 누나의 말이 알려주듯, 창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수혜자다. 창래와 엄마가 오랫동안 기대온 이 관계망의 문법이 창래의 진심을 가로막는다. ‘엄마-아들’의 기존 관계망에서 아들은 엄마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할 때 발생하는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창래에게서,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개인에게 새기는 비참함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창래는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려는 ‘좋은 아들’이지만, 가부장적 가족주의 앞에서 번번이 가로막히는 ‘무능한 아들’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 창래는 그녀가 쓰던 물건을 무심하고 거칠게 쓰레기통에 담는다. 그는 여전히 분노한 상태다. 창래는 왜 엄마/집으로 돌아오려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조차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다.
우리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아무리 애절한 진심이라도 그 진심이 전달되는 구조적 통로에 문제가 있다면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한다. 창래의 의도하지 않은 무능은 ‘효도’와 ‘돌봄’ 어딘가에 내재한 공허함을 보인다. 이 공허함을 직시하지 않고 ‘진심’만을 강조하는 한, 우리는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밍 홈 어게인〉은 한국계 미국 작가인 이창래가 《뉴요커》에 기고한 동명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합니다. 아래는 에세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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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큐!! 극장판 / 쓰레기장의 결전 / 많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 쇼요와 켄마의 매력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끝나고 제대로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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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와. 늘 먹던 걸로?
::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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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 나의 마리아> 메인 예고편
50살, 순결함을 깨고 다시 태어나다!
곧 50을 앞둔 마트 캐셔 마리아.
집착하듯 성모 마리아상을 모아 마리아의 집은 성모 마리아상으로 가득하다.
50번째 생일 하루 전 날, 이상한 증상을 느껴 산부인과를 찾는 마리아.
무례한 의사는 “여전히” 경험이 없는지 질문하며 비웃듯 갱년기를 진단한다.
처방받은 호르몬 패치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어딘가 이상해지는 마리아.
불쑥불쑥 찾아오는 마리아의 조카 헬레나는 단번에 이모의 변화를 눈치채는데…
모든 감각과 머릿 속 공상이 생생히 살아나며 그동안과 다른 자유를 맛보게 되는 마리아.
그녀를 가두었던 순결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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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메인 예고편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끝
미혹의 선율에 몸을 맡기다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카린'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지독한 갈증을 느끼던 그녀는
처음 맡게 된 제자 '앙티'의 천재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