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5 20:56:06
영화의 핵심은 연기력이에요.
영화 <미스 슬로운>리뷰
다른 언어를 쓰는 배우에게 전율을 느끼기는 몇 배로 어렵다. 말과 글은 다르기 때문에 그 갭은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첫 장면부터 슬로운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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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렇게 짜릿한 영화는 처음이다. 그냥 전부 다 짜릿했다.
스릴러보다 스릴넘치고 액션보다 짜릿하며 수사극보다 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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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선언을 할 때도, 위기에 처하고 선을 넘고 팀원들과 분열이 일어나고 궁지에 몰릴 때조차 나는 시종일관 '슬로운이니까!' 하며 조마조마하긴 커녕 절대적으로 그를 신봉하고있었다. (장담컨데 내가 보아왔던 작 중 그 어떠한 인물보다 슬로운에 대한 신뢰만큼은 절대적으로 높았을 거다. 아마 저기에 내가 있었더라면 뭐가 됐던 미스 슬로운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장렬히 전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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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 동안 슬로운은 내게 절대적인 리더였고 정신적 지주였다. 중간에 정말 '지진'이 일어 쓰나미가 덮쳤다 해도 나는 별 걱정없이 편안하게 슬로운의 행보를 관람했으리라.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대사 중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라는 슬로운의 대사가 있다.
이 대사가 영화 '미스 슬로운'의 구심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로비의 핵심이 통찰력이라면,
제시카 차스테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영화의 핵심은 연기력이다.
사실 영화를 구성하고 작품성을 이끌어내는 요소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작용하는 방법이 무수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연기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를 가장 잘 보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영화를 가장 몰입해서 보았을 때인 것 같다.
그 몰입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인물들의 연기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몰입을 넘어 이입하게되면 사실상 이외의 요소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200% 수행해주는 배우. 덕분에 캐릭터만큼은 정말 인상깊게 남을 듯 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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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모던걸 모던보이는 다 독립군이 되는 것일까?
또다시 김남길 때문에 본 영화로 실망을 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한 사람의 리뷰를 시작한다,,, 김남길이 나온 작품을 찾다가 대학원 시절 학기말 페이퍼를 제출하기 위해 그 교집합을 찾던 중 발견한 작품이었던 영화 《모던보이》. 일제강점기 영화 중 모던걸, 모던보이를 테마로 한 작품이 무엇이 있을까 찾다가 발견한 작품이었다. 정말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잠이 들 정도였는데 쓰고자 했던 페이퍼의 방향과 너무나도 일치해서 꾸역꾸역 분석하면서 봤던 영화였다.
영화 《모던보이》 시놉시스
1937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단짝친구 신스케와 함께 놀러 간 비밀구락부에서 댄서로 등장한 여인 조난실에게 첫눈에 매혹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꿈같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행복도 잠시.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에서 폭발하고, 그녀는 해명의 집을 털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난실을 찾아 경성을 헤매는 해명. 그가 알게 되는 사실은 그녀가 이름도 여럿, 직업도 여럿, 남자마저도 여럿인 정체가 묘연한 여인이라는 것! 밀려드는 위기감 속에서도 그녀를 향한 열망을 멈출 수 없는 해명. 걷잡을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선 그는 또 어떤 놀라운 사건을 만나게 될 것인가! 사랑과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위험천만한 추적이 펼쳐진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조명하다
모던보이 영화의 의의라고 한다면 그동안 다양한 매체에서 경성의 거리를 조금 낭만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존재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을 극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받았던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인물군상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친일파와 독립군의 일부만 선택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모던보이에는 이렇게 역사에서 배제되었고 망각된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대중들에게 상기시키고 공식 영삭의 틈을 메꿔주는 문화적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알고보니 독립군, 갑자기 독립군이 된 그들
나름 의의가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영화 《모던보이》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점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알고보니 독립군이었고, 갑자기 독립군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 속 모던보이와 보던걸들을 보면 일부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유행을 쫓고 신식의 것을 몸에 두르느라 세상 정세에는 관심도 없는, 즉 독립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판하는 대중가요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대부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던보이나 모던걸이라는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인의 영향으로 독립에 투신하는 경우로 그려지는 거시 대부분이다. 영화 《모던보이》 역시 로라이자 조난실은 알고보니 독립군의 주요 요원이었고, 조난실을 사랑한 이해명은 그녀의 죽음으로 갑자기 독립군이 된다. 모던보이라는 컨셉을 전면에 놓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 《모던보이》 역시 알고보니 조선의 독립을 그리기 위해 하나의 장치로서만 활용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영화가 넘어야할 민족주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그 당시 실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온상을 그려내기 보다는 우리가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바라는 것을 투영시키는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는 지나간 과거지만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이기에 현재와도 같은 과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에게 민족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그들의 삶이 비극적이면서도 독립을 위해 살신성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런 민족주의가 영화 스토리의 틀을 정해버리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은 왜 영화 속에서 다 죽어야 하는 것일까? 폭탄 날리고 집에 돌아와서 행복하게 살 잘면 안되는 것일까? 왜 그런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크게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분석용으로는 꽤나 분석할 거리를 제공했던 영화 《모던보이》. 일제강점기 시기에 관련된 영화 작품에 대한 공부용(?)으로는 추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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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8마일' 리뷰
래빗은 디트로이트에서 자랐다. 낙후된 동네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떠났다. 여차저차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보니 친구들도 집도 그대로였다. 기댈 곳은 트레일러 한 칸짜리 엄마 집.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공장에서 푼돈을 벌면서 희망을 품는 건 랩배틀이다. 고된 출퇴근길 속에서도 노트와 연필을 놓지 못한다. 랩이 유일한 해방구이자 돌파구다. 가사를 적을 종이와 펜, 기억할 머리만 있으면 어디서나 뱉을 수 있다. 랩배틀이 좋은 건 배틀 상금도 있다는 거다. '언젠가는 이걸로 뜨겠지' 하는 기대는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랩을 하는 건 일상을 토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X같은 내 인생."이라고 어떻게든 뱉어내야 속이라도 풀린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함정이다. 성공을 위한 길에는 왕도가 없다. 방법보다 중요한 게 마음가짐이다. 디트로이트 길거리엔 사람들도 없다. 폐허가 된 건물들과 담벼락에 낙서들 뿐이다. 래빗은 버스를 타고 동네를 지나 공장으로 간다. 출퇴근길에서 보이는 건 이런 모습들 뿐이다. 낙후된 환경 속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은 입안에서 거칠게 씹힌다. 씹어 삼키기에 무거워 토해내는 수밖에는 없다. 래빗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종이에 쓰고 또 쓴다. 글자는 겹쳐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써내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 풀릴지는 몰라도 래빗은 안주하려 들지 않는다. 트레일러 집조차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래빗은 안다.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란 걸. 그렇지만 버텨야 한다. 가진 재능을 믿고 깡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힙합은 소외된 자들의 것]
래빗이 일하는 뉴 디트로이트 공장은 전과자나 복지 받는 사람이나 일하는 곳이라고 엄마의 남자친구가 말한다. 불안정한 직장에 트레일러 집, 냉장고에 우유도 떨어진 이 삶은 하루하루가 사투다. 모두의 관심 밖에서 일상을 채우는 건 음악뿐. 후드를 뒤집어쓰고 비트로 세계를 채운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 평론가는 한 영상에서 힙합을 기성세대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음악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처럼 그 당시의 힙합은 소외된 이들의 무기였다.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공고한 틀 바깥 어딘가를 떠도는 이들의 문화였다. 별다른 장비 없어도 할 수 있었기에 유행처럼 퍼져나갈 수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힙합은 소외된 이들의 무기였다.
[디트로이트 지역번호, 313]
디트로이트 사람들은 313을 연호한다. 폐허 같은 이 동네의 지역번호. 떠나고 싶은 곳이지만 동시에 자란 터전이기도 하다. 이곳을 무력하게 밀려나서 떠나서는 안 된다. 이 지옥 같은 동네가 내가 자란 곳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그 동네를 부정해도 말이다. 부정당하는 건 출신뿐만이 아니다. '백인의 랩' 또한 부정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눈다. 압박감 속에서 래빗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무대에서도 밀려난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마음을 다잡게 되는 건 능력의 여부가 아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은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좋아하는 걸 하겠다는 의지는 추진력이 되어준다. 래빗은 무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무대로 이끌린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건 수많은 관중이 바라보는 스테이지가 아닌 주차장이었고,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던 공터였다. 쌓아 올린 실력이 어디 도망가진 않는다. 실력을 믿고 마이크를 들어야 한다.
[일보 전진에서 일동 전진으로]
일대일로 붙는 랩배틀의 묘미는 결투라는 점에 있다. 나의 우위를 드러내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규칙에 맞춰서 가사를 써야 한다. 정해진 규칙 아래에서 두 결투자의 위치는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결투는 일종의 게임이기도 하다. 랩 게임에서 의미 있는 원투 펀치는 무엇일까? 비트가 시작되면 온갖 인신공격 가사들이 쑤셔온다. 정신을 빼놓는 가사들은 그저 눈속임용이다. 증명해야 하는 실력은 상대를 까내리는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나 숨겨진 의미에 있다. 래빗의 랩 게임에서 그의 실력에 더해졌던 마지막 한 조각은 진정성이었다. 피부색으로 의심을 받던 진정성은 그가 겪은 삶의 곡절을 가사로 담아내어 인정받는다.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가짜들과 다르게 진짜의 삶을 살았노라 선언한다.
래빗의 랩이 궁상맞은 하소연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끊임없이 얻어맞고 쓰러져도, 눈에 멍이 들어도 끝내 무대 위로 올라와서 마이크를 붙잡기 때문이다. 눈에 독기를 품고 마이크를 붙잡고 무대 위에서 상대를 노려보는 모습은 더 때려보라는 식이다. 무너져도 일어날 테니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태도가 힙합이다. 인정하고 한 걸음 더, 다음 단계에서도 인정하고 한 걸음 더. 이 영화가 얼마나 독한 영화냐면 래빗의 각오가 엔딩 시퀀스까지 이어진다. 무대 위에서의 시간과는 별개로 래빗은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해피엔딩과는 별개로 잔업이 남아있다. 스튜디오가 아닌 공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 랩 게임은 시궁창 같은 현실 속 소박한 승리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치열하게 일궈낸 소박한 승리는 무엇보다 값지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있다. 토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버텨내야 하는 상황에 시시때때로 부닥친다. 한 순간의 변화로 인생의 궤도가 극적으로 틀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흔치 않다. 우리들 또한 래빗처럼 승리를 거두고도 다시금 공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생긴다. 실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당장의 공과금, 밀린 월세, 할부를 갚아나가기 위해서는 소박한 승리로는 부족하다. 완주를 위해서는 게임 승리 너머의 생활까지 고려해야 한다. 진절머리 나는 삶이라도 말이다. 한스럽지 않게 뱉어낸다. Rap It. 래빗은 삶을 뱉어냈다.
사진 출처 : TMDB '8 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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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란 무엇인가
삶은 항상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인생이 버려지고 밟히고 피를 흘려도, 믿음을 덤덤하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은 온다.
희망이 온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다.
<쇼생크 탈출>은 침대 맡에 걸어두고 싶은 바로 그런 영화다. 언제나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작품이니까. 담담한 무기징역 수감자 레드(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은 절망이 가득한 쇼생크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한줄기 희망이다. 그가 짙은 회색빛 감옥에 덧칠해 나가는 희망이 서린 일상들은 자신뿐 아니라 쇼생크 모두에게 작은 빛을 전해준다. 그 빛은 이 영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비친다. 앤디가 탈옥 후에 갔다는 지와타네오가 어딘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희망한다. 그곳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절망과 희망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빛이 난다. 하지만 때론 절망은 희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엇이 절망이고 무엇이 희망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희망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등장하는 숫자에 절망과 희망에 대한 상징을 담아서,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도록 알려준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의 총알과 절망, 희망의 다른 얼굴
<쇼생크 탈출>에는 총알을 사용하는 세 번의 장면이 나온다. 총알은 곧 절망이다.
첫 번째는 앤디가 부인과 정남(情男)을 죽였다고 하는 총알이다. 하지만 장전하는 모습만 나올 뿐, 앤디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당시 앤디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고, 강에 버렸다고 하는 총도 나오지 않아 증거인멸로 죄가 가중되어 유죄가 된다. 앤디의 죄에 대한 이 모호한 설정은 영화 클라이맥스까지 계속된다. 앤디는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게 정말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실 그에게서는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보단, 모든 걸 체념한 무기력한 사람만이 보인다. 쇼생크의 첫날 다른 죄수들은 억울하다며 울고 난리 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앤디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앤디는 자책을 하고 있었다. 설령 자신의 기억대로 부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부인이 바람피우다 죽은 것은 자신이 부인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서였다고. 앤디는 부인과 정남을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앤디는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둔 셈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둔다. 마음속에 있는 절망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용서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알면, 자신을 묶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두 번째 총알은 앤디의 무죄를 증언할 증인을 죽인 총알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릴 수도 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 총알은 앤디를 가장 깊은 절망에 빠트린다. 살다 보면 '아, 이제 희망이 이루어지겠구나'와 같은 날이 온다. 그러나 희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희망의 결과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희망에 차올라서 모든 것을 망가트린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오든 절망이 오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은 절망의 얼굴로 바뀐다.
세 번째 총알은 교도소장의 권총 자살이다. 자신의 모든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교도소장은 절망의 끝에서 총알을 선택했다. 모든 죄수들에게 끝없는 절망을 주며 군림하던 그가, 사실은 자신에게 오는 절망은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고 뿌려놓은 절망의 씨앗들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분이었을 테니. 진짜 절망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은 절망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남에게 준 절망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두 개의 밧줄과 구원,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
<쇼생크 탈출>에는 두 개의 밧줄이 있다. 밧줄은 구원이다.
처음 밧줄은 쇼생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브룩스의 구원을 도와주는 밧줄이다. 브룩스는 쇼생크에서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갇혀있어서, 쇼생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감옥에 길들여진' 죄수였다. 영화에 나오는 쇼생크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적인 간수도 비리투성이의 교도소장도 아닌, 그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절망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원래의 자신이 어떤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린 채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워 그 1미터의 절망으로 '길들이는'것처럼.
브룩스는 가석방을 받았지만 쇼생크에서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 지 알고 있었다. 동료에게 칼부림을 해서라도 절망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절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망이 곧 희망이다. 세상으로 내던져진 브룩스는 희망과 자유라는 절망에 빠지고, 그 구원의 길로 밧줄로 목을 매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자살함으로써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한다.
두 번째 밧줄은 앤디의 밧줄이다. 앤디 역시 그 절망에서 구원해 줄 도구로 밧줄을 손에 든다. 그러나 앤디는 영화에서 내내 나오듯 쉽게 절망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강한 사람이었고, 결국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탈옥이라 마음먹는다. 밧줄은 탈옥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다. 사실 구멍을 파놓은 지는 오래되었고, 단지 탈옥을 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마음먹기가 가장 힘든 법이다.
하지만 절망에 있을 때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을 꿈꾸며 절망에 저항하기보다는, 절망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으면 천국을 꿈꾸기보단 지옥에 적응하는 게 낫다고 여길수 있다. 그러나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길들여지느냐, 길들여지지 않느냐. 그 마음가짐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기도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밧줄이 '절망'으로 구원하느냐 '희망'으로 구원하느냐의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하나의 도구와 증거, 희망을 대하는 태도
<쇼생크 탈출>에는 단 하나의 탈옥도구와 증거가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출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절망과 희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앤디가 유죄를 선고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증거인멸이었다. 앤디가 강에 버렸다는 총이 발견되지 않아서. 총알을 발사하면 총알에 고유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으로 사용된 총알과 비교할 수 있어 정말 앤디가 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앤디는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총을 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증거를 없애버린 셈이었고, 총이 발견되지 않자 증거인멸로 더 형을 무겁게 받는 원인이 되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 절망에 취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신을 구원해주러 오는 손길을 스스로 내치고 더욱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실수나 작은 잘못으로 끝날 수 있던 것을 스스로가 더 키워간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을 때는 자포자기의 행동을 하기보단, 희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중요하다. 절망에 빠졌다고 느낀 그 순간이 진짜 절망이 아니다. 절망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진짜 절망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희망이 보인다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기쁨에 겨워하는 순간 희망은 오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순간적인 감정의 흔들림으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
앤디는 쇼생크에서 사는 동안 찾아온 수많은 절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번, 무죄를 입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손에 잡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교도소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어, 희망을 더한 절망으로 빠트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그 행동으로 탈옥용 굴을 판 것을 들킬 뻔했다.
앤디는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탈옥했다는 증거를 경찰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투고한 '쇼생크의 비리'에 진실함이 더해질 테니까.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묵묵히 계획을 실행했다. 우리도 삶에서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는 것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여성, 희망의 모습
<쇼생크 탈출> 에는 여성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곧 희망의 모습이다.
앤디의 부인은 사진조차 나오지 않는다. 또 가석방 심사원이나 숙소 관리인으로 여성이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다르다. 리타 헤이워드는 쇼생크 감옥 안 극장에서 매번 틀어주는 영화 <길다>의 히로인이다. 레드를 비롯한 수감자들은 리타 헤이워드가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컷에 엄청난 환호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죄수들에겐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그러기에 쇼생크 수감자들에게 리타는 희망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도 원래는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에서의 구원(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리타 헤이워드라는 허상은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수감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허락되는 여흥에 불과하다. 그 작고 하찮은 여흥이 그나마 수감자들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포스터에 숨겨진 구멍'은 구원을 주는 희망의 길이었다. 교도소장이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있을 리가 없는 포스터 속으로 팔이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교도소장에게 자신의 비밀을 훤히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성적 비유로의 여성이 아니라, 앤디를 지켜주고 구원한 여신인 셈이다. 물론 포스터가 계속 바뀌어 나중에는 리타 헤이워드가 아니라 라켈 웰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비현실적인 구멍, 구원, 그리고 희망과 카타르시스는 모두 그 안에 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로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서 희망이 시작한다고 말해준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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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에 성공한 앤디는, 친구 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쇼생크 수감자들은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경계한다. 그런 희망이 더 절망에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들다가 죽어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희망을 말한다. 레드도 절망에 길들여져 절망이 희망이 되었기에, 자살이라는 절망의 여행을 희망처럼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앤디가 희망에 대한 믿음을 레드에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가슴속에 간직한 희망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삶에서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둘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절망과 마주하지만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앤디처럼, 레드처럼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레드가 국경을 넘으며, 간직했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문득 내가 아이처럼 흥분해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흥분이리라.
나는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길 희망한다.
나는 내 친구를 만나 악수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태평양이 꿈에서 본 것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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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키퍼 | '존 윅'을 꿈꿨지만 닿지 못한 양봉업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정보기관도 당해낼 수 없고, 법 위에 있는 비밀 기관 '비키퍼'. 비키퍼의 전설이 된 요원 '애덤 클레이'(제이슨 스타뎀)는 기관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골에서 양봉가로 살아간다. 유일한 이웃이자 친구인 엘로이즈하고만 교류하면서 그는 조용한 은퇴를 즐긴다. 어느 날, 엘로이즈는 컴퓨터를 사용하던 중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농간에 당해 전재산을 잃고, 그 충격으로 자살한다.
이에 애덤은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속한 IT 기업과 CEO인 '데릭'(조시 허처슨)을 쫓기 시작한다. 애덤의 정체를 눈치챈 데릭의 조언자 '월리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전력을 다해 애덤을 막으려 한다. 한편, 엘로이즈의 딸이자 FBI 요원인 '자넷'(미니 드라이버)도 수사에 착수하면서 데릭의 악행은 비로소 전모가 드러난다.
이번 무림 고수는 무엇이 다를까
액션 스릴러 영화의 서사에는 이데아, 곧 이상향이 하나 존재하는 듯하다.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전설적인 킬러.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다시 활동에 나서고, 그의 존재와 위상을 미처 알지 못하는 애송이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우며, 복수를 향해 막힘없이 나아간다. <존 윅>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액션 영화가 차용하는 익숙한 이야기다.
<퓨리>,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이름을 알린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신작 <비키퍼>도 마찬가지다.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비밀 기관 '비키퍼'와 그 조직에서 은퇴한 요원 애덤 클레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액션 유니버스를 꿈꾼다. 특히 4편을 끝으로 자리를 비운 <존 윅> 시리즈의 빈자리를 정조준한다.
그러니 <비키퍼>의 당면 과제는 명확하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비키퍼>는 이 지점에서 예상외로 성공했고 의외로 실패했다. 미국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드라마 파트가 기대 이상의 쾌감을 가져다준다. 반면에 영화의 중심축이어야 할 액션은 정작 실망스럽다. 그 결과 <비키퍼>는 북미에서의 준수한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영화다.
시의성이 돋보이는 야심
<비키퍼>는 야심은 남다르다. 미국 사회에서 시의성이 두드러지는 범죄 이슈를 겨냥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사적 제재가 메인 플롯이기에 미국의 <시민덕희>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비키퍼>가 제작비 4,000만 달러로 북미에서만 6,500만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한 이유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기승이기 때문. 2022년 이후 미국인 중 15%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을 정도다.
단순히 범죄 조직만 소탕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비키퍼>는 빌런을 단순 범죄자가 아니라 IT 기업가, 미국 대통령 및 CIA 출신 관료 등으로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피해를 해결하지 못하는 미국 사회 시스템적의 모순을 폭로한다. 그렇기에 <비키퍼>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재미와 매력이 있다.
IT 기업은 보이스피싱 조직을 통해 막대한 범죄 수익을 창출한다. 이 수익의 일부는 미국 정치계로 흘러 들어가서 기업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리고 CIA를 비롯한 정부 관료는 이 카르텔을 은폐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애덤 클레이는 기업과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화끈한 액션으로 처단하며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의 울분을 풀어준다. 범죄 이슈와 기득권을 바라보는 미국 사회의 시각을 일부 맛볼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조준을 잘못했다
그러나 <비키퍼>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마지막까지 대상을 지속적으로 조준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정치, 경제 권력과 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폐해를 겨냥하는 듯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 대신 눈에 보이는 증상만 도려내고 만다. 장르적으로 본격적인 사회 고발 영화보다는 액션 영화 범주 안에만 남으려 하기 때문.
그러다 보니 소재도 굳이 깊숙이 다루는 대신 손쉬운 방식을 택한다.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분한 뒤, '시스템을 바로잡는 자'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단순한 권선징악 구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데릭은 순수 악으로, 월리스는 줏대 없는 변절자로, 미국 대통령인 데릭의 어머니는 무능하나 최소한 상식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애덤은 앞의 두 명만 확실하게 제거하고, 자넷과 FBI는 애덤의 속뜻을 파악한 뒤 은연중에 그를 도와준다.
준수하지만 킥은 없는 액션
단순한 스토리텔링은 액션에도 피해를 준다. 물론 제이슨 스타뎀의 액션은 여전히 호쾌하다. 빠르고 간결하며 데이비드 에이어 작품답게 잔혹하다. 적의 신체를 사정없이 절단하며 비키퍼 요원다운 위용을 드러낸다. 침투라는 모티브를 반복하는 액션 연출도 눈길을 끈다. 애덤은 경호원이나 FBI가 방어막을 치고 있어도 엘리베이터나 스케이트보드를 이용해 어떻게든 목표물에 접근해 낸다.
다만 시리즈를 지탱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는 <존 윅>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존 윅>은 다양한 스타일의 액션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건짓수(총+주짓수)라 불리는 특유의 사실적인 액션 스타일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언제나 확인 사살을 잊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강조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고, 이는 시리즈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반면에 <비키퍼>는 그런 대목이 없다. <비키퍼>라는 영화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통쾌하고 짜릿하지만, 그 이상의 플러스알파는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후반부로 갈수록 액션의 자극은 약해지고, 단점만 부각된다. 자연히 후반부로 갈수록 자극이 약해진다. 일례로 특정 각도가 반복되거나, 일부 스턴트가 맞기 위해서 기다리는 등의 몇몇 디테일한 아쉬움이 점점 눈에 자주 띈다.
<존 윅>의 아류작?
결국 <비키퍼>는 <존 윅>의 아류작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나름대로의 변주는 한계에 부딪히고, 차별화된 정체성도 보여주지 못하다 보니 <존 윅>의 영향력만 더 부각되기 때문. 비밀 결사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액션 세계관, 애덤을 모르는 젊은 빌런과 두려움에 떠는 늙은 보호자 등을 보면 <존 윅> 1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존 윅>만큼의 개연성이나 설득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존 윅은 개 한 마리 때문에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만 그에게 개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개는 단순한 애완견이 아니라, 살인을 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 그 자체를 상징했다.
반면에 애덤이 엘로이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난리를 치는 이유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비키퍼에서 은퇴한 그에게 엘로이즈는 친절한 이웃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 관계의 깊이나 중요성은 존 윅의 서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애덤의 집요함은 설득력이 없다. 영화는 이 간극을 위해 ‘시스템을 바로잡는 자’라는 설정을 강조하지만, 이는 설명조 대사만 도드라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처럼 <비키퍼>는 <존 윅>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데 끝내 실패한다. 물론 여전히 킬링 타임 영화로는 소구력이 있다. 돌비시네마처럼 음향이 좋은 극장에서 본다면 액션에 푹 빠진 채 105분을 보낼 수도 있다. 단지, <존 윅>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야심에 비해 완성도가 퍽 아쉬울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이데아에 닿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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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주차 <대사 한 줄, 영화 한 입>
“따따따! 따따! 따따따따!”
이 신호, 기억나시나요?산악 동아리 출신 백수 ‘용남’과 후배 ‘의주’가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 한복판에서
온몸을 던져 펼치는 오금저리는 재난 희비극
바로 영화 <엑시트>입니다.사실 아무도 942만 관객을 모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작품,
하지만 결국 해냈죠?아무도 예상 못했지만, 결국 해내는 그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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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빌 워 : 분열의 시대 | 늦은 개봉일이 야속할 경고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지속된 끝에 역사상 두 번째로 내전 상태에 돌입한 미국. 연방에서 독립한 주들의 시민군과 연방군이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는 가운데, 기자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 ‘새미(스티븐 핸더슨)’, 그리고 ‘제시(케일리 스페이니)’는 연방 정부의 수도 워싱턴 D.C.로 향한다. 내전 발발 후 일방적인 기자회견 외에는 속내를 밝힌 적 없는 '대통령'(닉 오퍼먼)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현실에 역사와 상상을 더한 경고문
2021년 1월 6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의회 인증일. 폭도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했다. 대선 패배 후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며 선거 결과를 바꾸려고. 폭동은 이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 의회가 1983년 미 의회의 상원 회의장에 폭탄 테러가 자행된 이후 40여 년만에, 그것도 자국민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오명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주의 선도자로 자처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의 국가라고 내세우던 미국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라서 특히 충격적이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대통령 선거 불복 선언, 그리고 QAnon발 딥 스테이트 음모론과 같은 낭설에 의해 파괴된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을 목격했으니까.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미국 사회가 상상도 못 했던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이하 <시빌 워>)는 이처럼 극심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에 역사적 맥락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였다. 종군기자의 시점에서 일부러 거리를 둔 채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관찰하며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발생가능한 미래를 경고한다. 하지만 <시빌 워>의 야심과 의도는 기대에 비해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영화보다 영화적인 현실이 <시빌 워>의 역할과 메시지를 이미 대신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
시작은 야심에 걸맞는다. TV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라도 선포하는 듯이 결연하게 승전 발표를 진행한다. 중계를 지켜보는 리의 방 밖, 도시 한복판에서는 폭발음이 들리며 내전에 휩싸인 미국의 현실이 보인다. 뒤이어 내전에 휩싸인 미국이라는 상상력에 부합하는 이미지도 연달아 펼쳐진다. 뉴욕에서는 난민들이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구호물품을 배부할 때 또 한 번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 이후로 <시빌 워>는 중반부까지 내전 상황임을 알 수 있는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정보가 부족하다. 내전의 구체적인 원인과 양상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듣고 알아서 짜 맞춰야 한다. 일례로 새미가 대통령 인터뷰를 위해 준비한 질문을 본 뒤 권위주의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연방정부가 미국 연방수사국을 해체하고, 반정부 시위대를 공습하는 등 폭정을 저질렀음을 유추해야 한다.
이민자와 인종 문제가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암시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D.C. 인근에서 제시는 흑인들을 집단 살해 중이던 군인에게 붙잡힌다. 이때 군인들은 그녀의 동행 중 홍콩 출신 기자만 골라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반항하지 않는 한 위협만 한다. "포틀랜드의 마오주의자"라는 대사와 연결시키면 비로소 인종 차별과 이민자 문제, 미중 대립 등이 내전을 격화시켰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주인공 일행의 여정을 따라가면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를 주축으로 한 '서부군', 동남부 지역 19주가 뭉친 '플로리다 동맹'이 분리 독립해 연방군과 내전 중이라는 현황도 제한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즉, <시빌 워>는 전쟁 영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마지막까지 전쟁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연히 초중반부까지는 내용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여정
흥미롭게도 <시빌 워>는 전쟁이 아닌 로드 트립에 나서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종군 기자인 네 주인공은 백악관으로 향한다. 내전 발발 이후 대통령과의 첫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서부군이 먼저 워싱턴 D.C.와 백악관에 당도한 나머지 그들은 계획한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한다. 이는 여정의 목적을 맥거핀으로 이용하고, 그 대신 여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로드 무비 작법에 정확히 들어맞는 전개다.
리, 새미, 조엘, 제시의 여정은 그 자체로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내전의 참혹함을 강조한다. 언제 어디서나 시체가 등장하고, 민병대와 군인이 전투를 펼치며, 무고한 시민 사이에서 폭탄이 터지는 불안정한 상황이 끊이지 않는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미국 달러 대신 캐나다 달러로만 물건을 살 수 있고, 그저 고향이 홍콩이거나 피부색이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내전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유도한다. 제시는 베테랑 사진 기자이자 롤모델인 리로부터 전쟁 지역에서 취재하는 법을 배운다. 총격적인 중인 군인들과 동행하면서 가장 생생하고 정확한 현장의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그런데 묘한 연출 때문에 이 과정은 내전이라는 맥락과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치열한 총격전에 우스꽝스러운 힙합 음악을 더해서 전투 중인 양 진영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 같은 블랙 코미디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마지막까지 주요 장면 대부분은 퓰리처상을 수상해야 할 것 같은 흑백 보도사진 구도로 구성된다.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 머물게 한다. 강렬한 음향 효과 덕분에 살 떨리는 현장감이 강조되고, 갈수록 전쟁 분위기가 짙어지는 후반부에서야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여지가 생겨난다.
영화라는 사진전
그러다 보니 <시빌 워>를 보다 보면 질문 하나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왜 하필 사진 기자 시점에서 내전을 다룰까?'라는 의문이다. 애초에 내전이라는 스펙터클 속에 관객을 빠트리고자 했다면, 극 중 등장한 인물 중 더 적합해 보이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이나 각 진영에 속한 군인들만 내세워도 내전을 충분히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전투 현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내전의 참혹함도 더 직관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사진 기자의 본질을 따져 본다면 <시빌 워>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 연출과 편집은 비로소 하나의 의도를 보여준다. 사진 기자는 언제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어떤 순간은 사진으로 남기고 어떤 순간은 흘려보낼지 필터링을 하는 게 그들의 업이다. 사건과 현장에 일부러 몰입도, 공감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누구보다 냉정하게 가치를 평가하고, 사진만으로 사건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시빌 워>는 일종의 사진전 같다. 내전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최소한의 설명만 붙는 보도 사진과 유사하다. 즉, 관객들이 미국의 두 번째 내전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즐기는 것은 애초에 목적이 아니다. 꼭 미국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전으로 표출될 정도로 양극화된 사회적 갈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면서 그 위험성을 곱씹게 만드는 게 본 의도인 셈이다.
이는 후반부 링컨 기념관 공방전, 워싱턴 D.C. 시가전, 백악관 공성전, 백악관 내부 전투를 <시카리오>나 <제로 다크 서티>처럼 영웅적 묘사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내전이라는 혼란상을 장르 영화로서 영위하는 대신 가까운 미래에 대한 경고로 활용한다. 언제 내전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회적 갈등의 개인적,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한 번쯤은 성찰하게 만드는 현실의 거울이나 다름없다.
사진전에 깃든 기자의 삶
제시와 리의 관계성은 사진전이라는 의도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제시는 이제 막 현장에 발을 내디딘 사진기자다. 그녀는 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정 하나를 앞세워 워싱턴 D.C.행 여정에 동행한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주유소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유소 주인은 피범벅이 된 남성 둘을 매달아 놓고 그들을 죽일지 말지 제시에게 묻는다. 예상 못한 상황에 제시는 그대로 주유소 주인 앞에서 얼어붙는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는 다르다. 주유소 주인을 두 남자 사이에 세운 후 차분히 사진을 찍는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제시에게 냉정히 종군기자의 덕목을 일러준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총알이 빗발치고 폭발이 난무한 전장이더라도 관찰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이 충고에는 뼈가 있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실수라는 말은 리의 실수 혹은 회한을 암시한다.
열정만 넘치는 제시와 냉정한 베테랑 리의 관계는 마지막 순간 다시 부각된다. 백악관 내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무리해서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한 제시. 그 순간 리는 몸을 던져 제시 대신 총알을 맞고, 제시는 쓰러지는 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의 희생 덕분에 제시는 대통령이 사살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자가 된다.
이는 리의 조언에 담긴 회한을 유추할 수 있는 힌트다. 리 역시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선배를 잃었고, 그 순간을 후회하지만, 직업적 사명감 때문에 계속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그래서 본인을 닮은 제시를 만류하면서도 도와주고, 끝내 그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닐까. 지친 자신을 대신해 제시에게 사명을 넘긴 것처럼도 보인다. 기자로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지만, <시빌 워>라는 사진전에 사용될 사진을 누군가는 찍어야 하니까.
영화보다 발 빠른 현실
안타깝게도 <시빌 워>는 영화 외적인 이슈로 인한 평가절하를 피할 수 없다. 우선 흥행을 고려한 선택이겠지만, 로드 무비를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로 포장한 포스터와 예고편이 아쉽다. 겉포장을 보고 커진 기대를 영화 본편이 충족하지 못하면 실망감은 배가되니까. 예고편과는 전혀 다른 전개와 결말 때문에 혹평을 피하지 못했던 <조커: 폴리 아 되>처럼. <시빌 워>가 그 다음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놀랍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4월 개봉한 미국과 달리 12월을 선택한 국내 개봉일이 특히 불운하다. <시빌 워>는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의 폐해와 그로 인한 부정적인 미래를 묘사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내란이라는 모습으로 최악의 미래가 이미 현실에 당도해 버렸다. 경고문이 너무 늦게 도착한 셈이다. 그 결과 1달 전이었으면 폐부를 찔렀을 메시지의 위력은, 진중하게 쌓아 올린 완성도가 무색하게도, 현실의 벽 앞에서 반감되고 만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포장지와 타이밍이 야속할 냉철한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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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6] 주눅들어있는 평범한 가장의 본 모습, 노바디
존윅의 각본가가 존윅 시리즈를 기획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영화 노바디 입니다.
전반적으로 존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집에 침투하는 적을 제압하는 액션 장면도 그렇고,
다양한 격투장면은 존윅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제작진의 인장이 확실히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조금 다른 점은 가족과 아빠의 가정 내 위치에서 소외당하는 모습을 넣어서 가족적인 감정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가족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죠.
다른 것 보다 액션이 좋습니다.
존윅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려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물론 있는 영화죠.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끝까지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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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주 최신 개봉영화(인질, 올드, 언더그라운드, 팜스프링스, 남색대문)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8월 3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인질 #올드 #OLD #언더그라운드 #팜스프링스 #남색대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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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씽2게더> 파이널 예고편
꿈꿔왔던 드림 스테이지! 씽 크루들은 빛나게 해낼 수 있을지 1월 5일 극장에서 확인해보자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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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쿠라우> 메인 예고편
미지의 땅 ‘바쿠라우’.
마을 족장 카르멜리타의 장례식 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총격으로 구멍 뚫린 물 수송 차량,
하늘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비행 물체,
마을 곳곳에서 시신까지 발견되며
주민들은 혼란에 빠지는데…
이곳에 절대 발 들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