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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작가2024-05-11 21:05:50

고도로 발달된 모순은 정의와 구별할 수 없다

영화 [디피컬트] 시사회 리뷰/ 후기



*이 해석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디피컬트] 속 캑터스는 사회운동가다. 거리를 통제하기도 하고, 맨몸에 메시지를 적어 시위를 하기도 하고, 블랙프라이데이에 마트를 막아서기도 한다. 그러한 그녀의 소망은 지구의 환경이 나아지는 것.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환경 보호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 환경 염려증인 그녀는 자신이 환경오염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병적으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맹신한다.

 

사회가 변화하며 수많은 사회단체가 생겨왔지만, 그중 대부분은 캑터스의 이런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 모임 속의 수많은 인원들은 개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모였다. 브루노와 알베르가 그 대표격이다. 당장 빚에 허덕이고 개인 회생만을 바라고 있는 그들은 환경 문제 따위는 관심 없다. 그저 공짜 맥주와 감자칩을 받기 위해 회의에 참석하고, 활동을 통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고 꾀를 쓰고 있을 뿐.

과거 블랙 프라이데이에 캑터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알베르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활동에 앞장선다. 장인어른에게 돈을 빌려서 파산 직전의 브루노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향수를 선물한다. 아내의 진짜 냄새보단 비싼 브랜드가 주는 돈냄새가 좋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과 정의는 진심일까? 진심이 아니라 한들 우리에게 이들을 쉽사리 욕할 자격은 있을까? 우리 또한 그들처럼 살아가지는 않는가?


"브루노, 부자가 되고 싶니?"

기부를 받기 위해 찾아간 부잣집 할머니는 브루노에게 지폐를 보여주며 뭐가 보이냐고 묻는다. 숫자밖에 보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할머니는 지폐 속에 숨은 다리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사람은 모두 다리이며,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곤 낡은 박제 개 인형을 선물로 준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라, 이것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다.

영화는 정책, 환경, 금융 등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듯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디피컬트'한 문제들의 해결법은 의외로 '이지'하다. 그저 관심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진심을 경청하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 영화가 진짜 꼬집고 있는 것은 문제에 대처하는 척, 허울 뿐인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이중성이다.

 

"펌킨..."

"캑터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캑터스는 알베르를 그동안 알아왔던 닉네임으로 부른다. 알베르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지폐 이론'에 따르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닉네임은 숫자이고 실명은 다리를 뜻한다. 닉네임은 허례허식으로 치장한 정의의 모습, 즉 모순을 의미한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닉네임을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연출한 '허황된 꿈'이라는 해석이 맞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출조차 하지 않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에는 차 대신 사슴이 뛰어다니고...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소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감독의 강경한 태도가 엿보인다.

 

또 한 가지 짚어볼 것은 비영리단체의 할아버지다. (이름이 생각 안 남) 그는 사람들에게 줄곧 과소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그래 놓고는 정작 자신은 카지노에 출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엔딩 크레딧의 추가 장면에서 그는 결국 카지노 입성에 성공하고 잭팟을 터트린다. 어떻게? 수정액으로 신분증을 위조해서.

 

이 방법은 브루노와 알베르가 프랑스 은행에 잠입해 자신들의 개인 회생 서류에 승인을 받기 위해 꾀한 방법이었다.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호통을 치더니, 정작 자신도 그 방법을 사용해서 카지노에 출입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수정액으로 자신들의 진짜 욕망을 가리고 정의를 외치는 수많은 모순자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브루노가 그토록 거부하던 여인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결말처럼 말이다. 그 여성도, 브루노 자신도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래를 한 셈이다.

이런 식의 타협점이 과연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에 부합하는가?

 

한편, 엔딩 크레딧의 추가 장면에는 박제된 개 인형의 진실이 등장한다. 개 인형은 브루노에게서 알베르로, 알베르에게서 알베르의 조카에게 건네졌다. 그런데 인형을 갖고 놀던 조카가 열어본 인형 속에 돈 뭉텅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동생이 힘들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던 알베르의 누나는 돈을 박박 긁어 가슴속에 숨긴다. 개의 내면에는 결국, 돈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사람의 내면을 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도 내면에 돈을 숨기고 있었다는 모순. 그녀가 브루노에게 건넸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냐고 묻지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느냐고 물어보았다. 부자가 되려면 내면을 봐야 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말을 하던 할머니 자신도 사실은 돈이 더 우선적인 가치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지혜롭다고 자칭하는 노인들이 많은 젊은이에게 위선을 떨고 있음을 한 번 더 풍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한 편의 모순이다. 더할 나위 없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순. 치밀한 계산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모순은 얼핏 보아서는 정의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 세상에는 정의로 포장된 모순들이 즐비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진실을 보기 위한 노력뿐이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까.

 

*이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초청받은 시사회를 보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 담작가

출처 . https://blog.naver.com/shn0135/22344366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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