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0-18 00:59:38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페달을 밟던 여름들
영화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드랭블루아
- 같은 선에 서있는 앙토니와 아신. 같은 계층인 두 사람
- 앙토니의 짝눈, 외모 변화가 가지는 의미
- 아빠의 바이크, 자켓의 의미. 엔딩 해석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And Their Children After Them, 2024)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페달을 밟던 여름들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성장, 로맨스
러닝타임 : 145분
감독 : 뤼도릭 부케르마, 조란 부케르마
출연 : 폴 키르셰, 앙젤리나 워레스, 질 를르슈, 사이드 엘 알라미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1992년 여름 동부 프랑스. 기어가는 벌레, 날아가는 파리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숲속 호수. 그 근처를 맴돌고 있던 15세 소년 앙토니는 지루함을 느낀다. “심심해 죽겠어.” 앙토니의 말 한마디가 정적을 깬다. 앙토니와 사촌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보트를 훔쳐 강너머 누드비치로 향한다. 앙토니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의 세상에 편입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 수상 소식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큰 관심을 받은 영화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다양한 계층 갈등과 소년의 사랑, 성장을 담고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한 이야기다.
한여름에 만난 첫사랑과 설렘, 일탈과 만취의 짜릿함, 무모한 걸 알면서도 내뻗어보는 주먹, 바이크를 타고 시원하게 내달려보는 숲길, 그 아래 흐르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록 음악. 이 영화엔 청춘의 치기와 여름의 낭만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 전복시키는 무거운 현실의 불편함도 함께 담겨있다.
앙토니는 특별할 것 없는, 사실 평범하다기엔 조금 모자란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다. 제철 공장에서 일했던 아빠는 술독에 빠져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고 집안 경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엄마는 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힘이 없는 두 부모는 바이크와 여행이라는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한껏 휘둘리고 있다.
아직 어린 앙토니는 이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고향을 떠나 텍사스로 가고 싶고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부촌인 드랭블루아에 사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하지만 앙토니는 몇 번의 여름을 지나며 알게 된다. 타고난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테파니는 앙토니와 사촌을 드랭블루아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앙토니의 집에서 드랭블루아까지 가려면 꼭 바이크가 필요하다. 앙토니는 파티를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아빠 몰래 바이크를 훔쳐 타고 파티에 가기로 결심한다. 바이크를 끌고 나오는 앙토니를 발견한 엄마는 앙토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기곰, 인생이 언제나 재밌는 건 아냐.”
앙토니는 엄마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엄마를 뒤로하고 사촌과 함께 바이크를 타고 파티로 향한다. 모르는 얼굴들 사이를 헤매던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 약을 한번 들이켜고는 아주 조금 그들의 세상에 녹아든다.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앙토니는 파티에서 스테파니 무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약을 먹고 스테파니를 따라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스테파니 무리가 무시하는 유색인종 아신에게 발을 걸기까지 하며 그들과 친해지려 한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붙여준 담배를 물고는 금방 파티 주최자 시몽과 함께 사라지고 앙토니가 한 발자국 다가가 키스를 시도하자 그를 밀쳐내며 거리를 벌린다. 앙토니는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파티가 끝난 후 남은 건 도난당한 바이크의 빈자리뿐이다.
앙토니는 소외된 집안의 아들, 스테파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엔 가난한 집안과 잘 사는 집안이라는 계층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어린 앙토니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스테파니에게 사랑을 표현하지만 매번 다른 이유로 실패한다.
앙토니와 스테파니가 들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두 사람은 앙토니가 살고 있는 가난한 동네와 스테파니가 살고 있는 부유한 동네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앙토니는 가난한 동네엔 나체족 집시들이 캠핑카에 모여 살고 있다고 운을 뗀다. 이때 스테파니는 자신도 어릴 때 할머니와 잠시 그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 스테파니의 아빠가 담장을 쳐서 들판에 있는 나체족을 안 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스테파니와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음을, 그 동네에 사는 앙토니와 스테파니 또한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앙토니와 아신은 파티에서 처음 만난다. 앙토니는 부잣집 백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아신에게 발을 걸며 자신은 그와 다른 계층의 사람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앙토니에겐 슬픈 일이지만 사실 앙토니와 아신은 ‘소외된 사람’이라는 같은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계층은 두 사람의 아빠 세대부터 이어진다. 앙토니와 아신의 아빠는 제철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였고 노동자와 이민자로 상위층보단 하위층에 속한 삶을 살아왔다. 아빠들과 다른 시대를 살아온 앙토니와 아신은 이런 접점이 없어 일찍 친구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오해했을 뿐이지, 결국 두 사람의 삶은 비슷한 길로 흘러간다.
바이크 사건 이후 앙토니와 아신은 오해를 쌓아간다. 앙토니에게 앙심을 품은 아신은 바이크를 불태워 돌려주고 화난 아빠에게서 도망친 앙토니는 다른 바이크를 타고 그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겁먹은 아신은 오줌을 지리고 앙토니를 반드시 죽일 거라 다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있는 바닥을 보면 중앙에 그어진 선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두 사람을 충돌시키거나 그들의 다름을 표현하는 경우엔 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팽팽한 대립이 일어나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앙토니와 아신을 같은 선 위에 나란히 세워놓는다. 앙토니와 아신이 같은 선 위에서, 같은 계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연출은 이후 96년에 앙토니의 아빠 파트리크가 호수로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실감한 파트리크는 삶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호수로 걸어들어간다. 이때 위에 있는 달빛이 물에 반사되어 마치 파트리크가 그 달빛 위를 걸어가는 듯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아신은 그걸 지켜보다가 파트리크가 사라지자 그가 걸었던 달빛 방향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그를 구하려 한다. 물이 깊어지자 뒤돌아 빠져나오긴 했지만 아신 또한 파트리크와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다.
앙토니는 짝눈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92년, 사촌은 “네 짝눈 때문에 여자들이 도망친다”라고 앙토니에게 장난 어린 디스를 한다. 앙토니는 그에 딱히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헛소리 말라는 듯 받아칠 뿐이다. 이때 앙토니는 앞머리를 길게 길러 자신의 짝눈을 반쯤 덮어두고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앙토니에겐 외적인 변화가 생긴다. 사춘기를 상징하는 여드름의 흔적이 점점 옅어지고 머리는 점점 짧아진다. 그러면서 앙토니는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다. 그는 마지막 여름이었던 의가사 제대 직후 스테파니에게 차였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짝눈을 제대로 의식하고 만져본다. 정말 짝눈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토니의 짝눈은 그의 외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가진 가난, 그의 계층을 상징하기도 한다. 짝눈을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던 92년의 앙토니는 자신의 가난과 집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테파니에게 끝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도전하고, 아신과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
94년 여름. 16세의 앙토니는 머리를 조금 짧게 자른다. 앙토니는 여전히 스테파니에게 구애를 하긴 하지만 스테파니가 받아주지 않자 이전에 자전거 앞을 막아세웠던 바네사를 찾아가 관계를 가진다. (바네사는 이웃사촌으로 앙토니와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때의 앙토니는 자신을 쫓아오는 무언가에서 도망치거나 사랑하는 것을 쫓는 모습을 보여준다.
96년 여름. 18세가 된 앙토니는 군 입대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는다. 재회한 앙토니와 스테파니는 육체적 관계를 나누지만 구경꾼들에 의해 중단된다. 스테파니는 바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앙토니는 헤드라이트를 따라 멀어지는 스테파니를 지켜보고만 있다.
98년 여름. 앙토니는 오랜만에 사회로 나와 사촌과 그의 아내, 아신, 스테파니를 만난다. 사촌은 부유한 뒤립씨 딸 클레망스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아신도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있었다. 두 친구를 만난 후 앙토니는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드랭블루아에 가던 날처럼 아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스테파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우리의 사랑은 네 상상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희망의 불을 꺼버린다. 계층을 넘기 위한 앙토니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앙토니는 짝눈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계층, 현실을 확실히 인식한다. 그리고 지금껏 애써 품어온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듯이 훔친 아신의 바이크를 돌려주겠다는 연락을 남긴다.
아빠의 바이크, 자켓이 의미하는 것
앙토니는 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낀다. 시원한 바람과 그 뒤를 따라오는 새로운 삶을 향한 설렘. 그는 바이크를 타고 스테파니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달린다. 앙토니의 아빠도 언젠간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바이크를 타고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끼던 삶.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계층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아들은 아빠의 자켓을 입고 언젠가 아빠가 달렸을 그 숲길을 달린다. 그들(어른들)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세상이 변해 누드 비치는 누드 비치가 아니게 되었고 도시를 이끌었던 제철공장은 문을 닫는 변화가 생겼지만 사람들 간의 계층은 여전히 견고하다.
앙토니가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 파티에 가던 날처럼 계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즐거운 인생을 살면 좋을 텐데, 엄마의 말처럼 인생이란 언제까지나 즐거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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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주 차, 위클리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지난 한 주, 국내외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정리해 보는 '위클리 뉴스' 차례가 왔습니다!그럼, 지난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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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짐프 OST 마켓 런칭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영화음악가 데뷔 프로젝트 마켓 '짐프 OST 마켓'.
6월 5일까지 공개 모집을 하며, 산업 관계자들과 매칭 성공 시 총 지원금 2억 5천만원에서 최대 5천만원의 음악 제작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서울국제영화제, 6월 개막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올해 19회를 맞이한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에코버스'라는 슬로건 하에 6월에 개막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총 73편의 환경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고, 개막작은 시릴 디옹 감독의 '애니멀'이다.
더불어, 영화제 상영작 전 작품을 온라인 상영하며, 메가박스 성수에서 오프라인 상영도 한다고 한다.
이준혁, <범죄도시3> 합류
ⓒ 배우 이준혁 인스타그램
배우 이준혁이 영화 <범죄도시3>에서 새로운 빌런을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범죄도시3>는 6월말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며, 인천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고 전했다.
<범죄도시2>에 이어 <범죄도시3>도 이상용 감독이 맡아 연출하게 되었다.
에무시네마, 2022 '별빛영화제' 개최
ⓒ 에무시네마 인스타그램
에무시네마 루프탑에서 진행하는 '별빛영화제'가 올해도 개최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5월 19일을 시작으로 <녹색광선>, <플립>, <해변의폴린느> 등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다.
거리두기 해제하자, OTT 성장세 주춤
15일 아이지에이웍스에 따르면 지난달 주요 OTT 모바일 사용자 수가 올해 1월 대비 7~23% 떨어졌다고 밝혔다.
주요 OTT의 사용자의 경우, 넷플릭스는 7.7%, 디즈니+는 23.7%, 웨이브 11.9%, 왓챠는 12.6% 하락하였다고 한다.
해외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3월 예정
ⓒ 오스카 공식 홈페이지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와 ABC에 따르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2023년 3월 12일에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전세계 200개 이상의 지역에서 ABC를 통해 생방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닥터 스트레인지 2>, 5억 5천만 달러 돌파
ⓒ 네이버 영화
9일, 디즈니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5억 5000만 달러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2022년 개봉작 중 11번째로 높은 흥행 기록을 세웠다.
Neon, <브로커> 북미 판권 계약
ⓒ 네이버 영화
<기생충>의 북미 배급을 맡았던 Neon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브로커>의 북미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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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걱정이나 해 - 소녀의 성장에 등장하는 소년들에 관하여
니 걱정이나 해
소녀의 성장에 등장하는 소년들에 관하여
청춘들의 성장에는 항상 애처로움이 수반된다. 정서적인 성장에도 세상에는 즐거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신체적인 성장에도 실제로 성장통이라는 고통이 뒤따라온다. 성장통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청소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인간사에 존재하는 희로애락을 깨닫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에도 사용된다. 고통을 수반한 성장을 묘사하는 데 있어 가장 극적인 장치는 소중한 존재의 사망이다. 아예 고아로 성장한 해리 포터가 가장 감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부모님이 모욕당하거나 가족이나 다름없는 위즐리 가문이 공격당하는 순간이다.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가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순간은 아마도 볼드모트와의 대결을 앞두고 스스로 부모님의 기억을 지우는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존재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 프로타고니스트 자신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프로타고니스트의 성별에 따라 성장담이 극명히 갈리는 점은 되짚어볼 문제다. 소녀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대개 소년들이며(죽음을 앞둔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담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다) 소녀들은 죽기 전에 소년들의 앞날을 걱정한다. 가끔은 소리치고 싶을 정도다. 야, 니 걱정이나 해.
죽음을 앞둔 소녀의 이야기라면 바로 몇몇 영화들이 떠오른다. <나우 이즈 굿>, <디어 마이 프렌드>(
한드 아님), <미드나잇 선>(트와일라잇 사가 아님), <안녕, 헤이즐>... 그리고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소년들이 소녀의 성장에 (가끔은 쓸데없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꽤나 모지리다. 최근 개봉한 <베이비티스>는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했다. 죽음을 앞둔(혹은 앞두지 않아도) 소녀들은 왜 그렇게 소년과 데이트를 하고 싶어하며, 술을 마시고 싶어하고,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걸까. 그리고 소녀들은 왜 동성 친구라곤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가장 큰 문제점은 소녀의 성장을 메인으로 다루는 것처럼 홍보하고서는 기실 소녀의 죽음으로 가장 혜택받거나 성장하는 것은 언제나 소년들이라는 점이다. 밀라(엘리자 스캔런 분)는 우연히 마주친 모지스(Moses, 모세라고 번역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 발음이 모지스니 뭐.. 어쨌든 토비 월레스 분)에게 반한다. 모지스가 잘생기거나 좀 멀쩡한 소년이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모지스는 본인의 가족에게서도 접근금지 명령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취향의 문제지만 <미드나잇 선> 속 찰리(패트릭 슈왈츠제네거 분)에 비해 모지스는 외모 경쟁력도 떨어지고 <안녕, 헤이즐> 속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처럼 밀라에게 헌신적이지도 않으며 <디어 마이 프렌드> 속 캘빈(에이사 버터필드 분)이 스카이(메이지 윌리엄스 분)에게 하듯이 밀라를 따르지도 않는다(캘빈은 최소한 갈곳없는 불량배는 아니었다).밀라는 죽어가지만 온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며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은 밀라의 유치(베이비티스)가 다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밀라는 모지스를 만나고서야 머리칼을 모두 잃어버리며 죽을 결심을 하고서야 유치를 온전히 잃어버린다. 하지만 밀라의 새로운 머리칼과 영구치는 영원히 자라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밀라가 정서적으로 성장하더라도 물리적인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모지스는 애초에 성인이지만 극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정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라는 모지스가 자신 없이도 언젠가는 성장할 것을 믿고 있다. 자신의 혈연에게서도 배척당한 모지스는 믿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밀라의 가족들로부터도 멸시받지만 이런 모지스를 유일하게 감싸는 건 죽어가는 밀라다. 밀라의 예정된 죽음은 밀라 자신의 성장을 촉발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밀라의 가족에게 동정심을 유발시켜 밀라를 거쳐 모지스의 방패막으로 작용한다. 밀라가 죽을 예정이 아니었다면 밀라의 아빠인 헨리(벤 멘델슨 분)와 엄마인 안나(에시 데이비스 분)는 불량소년인 모지스를 어떻게든 밀라에게서 떼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라가 곧 죽을 것을 알기에 헨리와 안나는 밀라가 좋아하는 모지스를 억지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밀라는 술을 마시고 구토하여 옥상에서 정신을 잃은 자신을 두고 떠난 모지스를 미워하지 못하는데 이는 밀라가 아닌 모지스에게 성장 촉매제로 활용된다. 모지스는 그런 자신조차 용서한 밀라를 통해 타인을 아끼는 마음을 배운다.
<베이비티스>는 밀라의 성장담인가, 모지스의 성장담인가. 밀라의 가족을 통해 벌어지는 일들은 밀라가 아니었다면 모지스는 겪을 수 없었던 일들이다. 밀라가 초대했기에 모지스는 자신의 동생을 겨우 만나볼 수 있었고 밀라의 이웃 토비의 출산 순간을 통해 생명 탄생의 과정을 목도한다. 토비의 출산은 밀라의 예정된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사건인데 하필 밀라의 생일파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미묘하게 탄생과 소멸의 순간을 오가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편적으로 해석해서 밀라의 생일은 밀라가 주인공이어야 함에도 결국 타인의 사건으로 인해 방해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특히나 밀라의 마지막 생일임을 감안할 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밀라가 순식간에 텅 빈 집에 모지스와 함께 놓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밀라는 생일에도 죽음에도 모지스 이외에는 함께할 이가 없는 것이며 이는 밀라의 성장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에 기여할 뿐이다. 밀라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모지스를 돌봐줄 것을 부모에게 강요하듯 약속을 받아내는데 밀라의 유산은 결국 모지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모지스는 밀라의 생일로 인해 자신의 원 가족을 만나볼 수 있었고 밀라의 사망으로 인해서는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밀라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한발 나아간다는 증거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정서적인 성장에 대한 묘사 부족으로 인해 유치 소실이라는 물리적 성장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밀라가 모지스를 이용해 죽으려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이유는 밀라가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지스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밀라는 모지스에게 헤어커트를 부탁하던 영화 초반으로부터 별반 성장한 모습이 없어보인다.
엘리자 스캔런의 이전작 <작은 아씨들> 속 베스와 밀라는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타고나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일견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베스는 놀라울 정도로 이미 성숙한 인물이었다. 베스가 죽고 조(시얼샤 로넌 분)는 "베스는 우리 중 가장 착한 아이였어"라고 회상하며, 베스는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의 유럽여행을 망칠까봐 에이미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인생 1회차를 이미 초반 20년이 되기도 전에 응축된 형태로 살아낸 베스는 그렇기에 타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죽음으로서 타인의 성장에 자양분이 될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의 죽음이 다른 캐릭터의 성장에 이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베스의 죽음에 가장 영향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 가족인 여성 캐릭터들인 점이기 때문인데 이들은 이미 베스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베스에게 베풀고자 했던 이들이다. 모지스는 밀라의 삶의 끝자락에 무임승차한 인물이며 밀라에게 베풀기보다는 밀라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만 한 인물이기도 하다. 밀라는 자신이 살지 못할 삶을 모지스를 통해 살고자 했기에 "겁이 없어 보이는" 모지스를 동경하고 사랑했는데 이는 불량배들이나 갈 법한 클럽에 짙은 화장을 하고 들어가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밀라가 모지스와 같은 삶을 동경했던 이유는 본인이 진정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몸이 약한 밀라에게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의 경험이 밀라를 성숙시켜주지는 못한다.
밀라의 삶과 죽음은 결국 밀라의 주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이들이 겪는 삶의 변화 혹은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밀라의 주변인이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밀라의 죽음이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헨리와 안나는 위태로운 부부생활을 이어가는데 밀라의 상태는 이들을 잇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이들을 끊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 이들이 밀라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밀라가 모지스와 성관계를 맺었는가다. 밀라가 겪은/겪었어야 할 삶의 단계를 통해 헨리와 안나는 자신들의 삶이 나아간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밀라가 겪지 못한/못할 단계들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밀라의 생일에서 안나가 오랫동안 치지 않던 피아노를 밀라의 부탁으로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밀라의 삶이 안나에게 옮겨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내켜하지 않지만 안나는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는데 이는 밀라의 유언으로 인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안나와 헨리가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게 될 것을 암시한다. 모지스가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신체적으로 성장하고도 그에 맞는 성장 단계를 겪지 못했음을 암시하는데 밀라를 통해 이 단계를 통과할 수 있는 패스권을 얻는다.
함께 언급했던 영화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미드나잇 선> 속 케이티(벨라 손 분)는 햇빛 속으로 한발짝 내딛지만 이것은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며 찰리에게 단순히 슬픈 연애 서사 한 조각을 선사할 뿐이다. <디어 마이 프렌드> 속 스카이로 인해 캘빈은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나우 이즈 굿> 속 테사(다코타 패닝 분)는 그나마 아담(제레미 어바인 분)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긴 하지만 굳이 아담이 필요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거스터스의 헌신으로 인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의미있음을 깨닫는 <안녕, 헤이즐> 속 헤이즐(쉐일린 우들리 분)을 제외하면 위 작품들 속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들로 인해 이득을 얻거나 불필요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들을 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케이티는 찰리와 연애하는 대신 대학에 갈 수 있었고 스카이는 캘빈보다는 친구들이나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테사도 마찬가지다. 헤이즐은 소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보다 다른 소설을 읽을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밀라에게 나는 여전히 말해주고 싶다. 야, 니 걱정이나 해.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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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둘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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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전원이 타겟이 된다’
제76회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지난 21년에 촬영을 마치고 2년동안 개봉이 미뤄지며 24년도에 와서야 개봉을 알렸는데요.
배우들의 연기와 액션 연출이 돋보이는 볼거리라는 호평과 뻔한 재난영화라는 호불호가 크게 갈린
평들이 쏟아졌습니다. 현재 한국의 여름을 겨냥한 여름 영화 <탈주>와 <핸섬가이즈>가 꽉잡고 있는 가운데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PROJECT SILENCE
개요: 스릴러 | 한국 | 96분
감독: 김태곤
주연: 이선균, 주지훈, 김희원
개봉: 2024.07.12.
배급: CJ ENM
시놉시스
붕괴 위기의 공항대교, 생존자 전원이 타겟이 되었다. 기상 악화로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공항대교. 연쇄 추돌 사고와 폭발로 붕괴 위기에 놓인 다리 위에 사람들이 고립된다. 이 때 극비리에 이송 중이던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군사용 실험견들이 풀려나고 모든 생존자가 그들의 타겟이 되어 무차별 공격당하는 통제불능의 상황이 벌어진다.
공항으로 향하던 안보실 행정관부터 사고를 수습하려고 현장을 찾은 렉카 기사, 그리고 실험견들을 극비리에 이송 중이던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책임연구원까지. 사상 최악의 연쇄 재난 발생, 살아남기 위한 극한의 사투가 시작된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
Love Lies Bleeding
개요: 범죄, 멜로/로맨스 | 미국, 영국 | 104분
감독: 로즈 글래스
주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티 오브라이언, 에드 해리스
개봉: 2024.07.10.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시놉시스
“멍청아, XX 사랑한다구!!” 1989년, 체육관 매니저로 일상을 보내던 무기력한 ‘루’ 앞에 보디빌딩 대회 우승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 ‘잭키’가 나타나고 둘은 0.001초 만에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는 ‘루’를 위해 상상초월 살인을 저지른 ‘잭키’! 폭력을 일삼는 가족으로부터 연인을 지키려는 ‘루’!
‘루’와 ‘잭키’의 숨 막히는 쇠맛 범죄 로맨스가 시작된다!
플라이 미 투 더 문
Fly Me to the Moon
개요: 멜로/로맨스, 코미디 | 미국, 영국 | 132분
감독: 그렉 버랜티
주연: 스칼릿 조핸슨, 채닝 테이텀, 우디 해럴슨
개봉: 2024.07.12.
배급: 소니픽쳐스
시놉시스
1960년대 우주 경쟁 시대, 거듭된 실패로 멀어진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 모으기 위해 NASA는 아폴로 11호 발사를 앞두고 마케팅 전문가를 고용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NASA의 달 착륙을 홍보하는 마케터 켈리 존스와 그녀가 하는 일이 거짓말이라며 대립하는 발사 책임자 콜 데이비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났지만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서히 한마음이 되어간다. 미션의 성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켈리 존스는 미 행정부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되고 실패도, 2등도 용납이 되지 않는 달 착륙 프로젝트를 위해 켈리 존스는 아무도 모르게 플랜 B, 즉 실패에 대비해 달 착륙 영상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인류 최대의 업적, 최초의 달 착륙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장 따뜻한 색, 블루
Blue Is The Warmest Color
개요: 드라마, 멜로/로맨스 | 프랑스 | 180분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
주연 : 레아 세이두,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
재개봉: 2024.07.10.
배급: 판씨네마㈜
시놉시스
피에르 드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의 일생>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아델' 앞에 어느 날 파란 머리의 화가 지망생 '엠마'가 나타난다. 단지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스치며 지나친 인연이지만, 그날 이후 '아델'과 '엠마'는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미지의 사랑을 꿈꾸는 '아델', 현실의 사랑을 이끄는 '엠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델'과 '엠마'는 서로에게 이끌린다. '아델'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엠마'로 인해 이전에는 몰랐던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되고, 평온하기만 했던 ‘아델’의 삶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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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 리뷰
다비드 뤔 감독의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는 할리우드에서 그려내는 신세대 뱀파이어 -인간 흡혈을 거부하거나, 인간 사회를 동경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와 달리 고딕풍 유럽 전설의 냄새를 잊지 않은 작품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라는 별칭까지 활용하며 지극히 전통적인지라 현대에 이르러선 오히려 잊히고 만 뱀파이어의 전승을 구현한다. 마늘을 기피하거나,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고 관 속에서 잠들며, 햇볕을 피해야 한다던가, 누군가의 장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은 뱀파이어에게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떠도는 자'의 운명을 삭제하고 범접 불가능한 초월자의 모습 대신 병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무게를 반감시켰다. 이에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가벼운 코미디로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작품처럼 인간 존재/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 위에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폰 쾨즈뇜 백작(토비아스 모레티)은 자신의 부인인 엘사(자넷 하인)와의 삶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다. 백작부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끊임없이 쾨즈뇜 백작에게 자신의 외모를 묘사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한 두 마디조차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햇볕에 스스로를 내맡겨 자살하지 않은 까닭은 그저 오래전 환생을 약속한 연인 나딜라 때문인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는 프로이트 교수(칼 피셔)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교수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여럿이지만, 그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화가 빅토르(도미닉 올라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환자의 꿈을 들으며 화폭에 옮긴다. 그런데 늑대인간과 관계를 맺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물의 모델은 동일한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 루시(코넬리아 이반칸). 빅토르는 눈을 감고도 루시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지만, 정작 루시는 빅토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못마땅해한다. 빅토르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즐겨 입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구불거리는 금발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문학은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성립한다.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이 그 간결한 예시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상정하며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없는 극단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는 죽은 자의 귀환을 이끌며 혼란을 발생시키는 두려운 자로 인간과 대비되었고,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원작은 앤 라이스의 소설이지만, 이 글에선 영화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에서 뱀파이어 루이와 레스타는 뱀파이어로의 삶을 선택하였음에도 끝없는 허무와 혼란에 방황하고, 클라우디아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착화된 시간 속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이렇듯 뱀파이어 세계와 인간 세계의 뚜렷한 대비는 독자/시청자인 우리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그 궤가 다소 다르다.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레이어는 분명히 겹쳐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이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은 뱀파이어/인간 세계의 대비가 아니라,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이란 사회를 꾸리는 종족이라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무엇이지 않던가.
이러한 전략을 위해 뱀파이어는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설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 광신도에게 사망했다는 연인 나딜라의 이야기나 성에 사는 귀족으로 이미지화된 쾨즈뇜 백작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며, 한 마리의 야생늑대처럼 빠르고 강하며 흡혈을 망설이지 않는 백작부인의 모습은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능력은 위계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물리법칙을 어기는 종족임에도 백작은 심리적으로 지쳐 상담을 필요로 하거나, 과거에 잃은 사랑을 기다렸으며, 백작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 인간 화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뱀파이어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뱀파이어의 흡혈 장면에서 선악을 논하지 않고, 범법을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뱀파이어의 고뇌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에 '뱀파이어'가 삽입되어 있고, 사건의 시작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폰 쾨즈뇜 백작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대상화된 타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주목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루시-혹은 루시의 욕망-다.
위에서 말했듯 루시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 긍정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은연중에 변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이중적 행태에 분노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와 폰 쾨즈뇜 백작이 만난다. 프로이트 교수의 집에 놓은 루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작은 그가 자신의 옛사랑 나딜라와 놀라우리만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빅토르가 캔버스 위에 상상 속 루시를 구현했다면, 폰 쾨즈뇜 백작은 기억 속 나딜라를 루시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모두 루시 앞에서 사랑을 논하지만, 루시라는 인물이 지닌 본연의 욕망(존재하는 그대로 사랑받고자 하는 소망)은 거듭 소외된다.
백작부인의 욕망 역시 영화 내에서 소외당하는 듯 보이나, 이는 백작부인 개인으로서의 소외라기보단 뱀파이어 종족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 보아야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백작부인은 '여성 뱀파이어'로서 영화 내에서 전통적인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폰 쾨즈뇜 백작보다 더 야성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을 전복하는, 완전한 괴물로서 기능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백작에게 요구하고, 루시와는 달리 치장에 매달림으로써 언뜻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존재로 나타난다. 즉 백작부인은 한 명의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문화 속 '여성 뱀파이어' 그 자체의 현현이기에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종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욕구(박일아)'를 끊임없이 소망한다. 백작부인은 그러하므로, 최은주(2010)의 표현과 같이 "결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개인이었고, 욕망을 이뤄내지 못한 육체는 끝내 소멸한다.
반면 루시는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굳이 '기나긴 여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루시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고달팠기 때문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물린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이트 교수의 침대에 놓인다. 그곳에서 흡혈 충동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는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자기 존재에 대해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다. 낯섦에 방황하지 않고 루시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긍정한다.
루시가 느낀, 기존의 정체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루이가 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루이가 허무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성 선택을 하였다면, 루시는 뱀파이어로서 더욱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뱀파이어 되기'와 '뱀파이어로 살기'를 선택한 셈이므로. 특히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피를 수혈하면 돌이킬 수 있다는 옵션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루시의 '뱀파이어 되기'는 일종의 선택지에 불과할 뿐 운명론적 관점에서 벌어지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시가 뱀파이어로 변했던 첫 번째 순간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순간, 루시는 쾨즈뇜 백작에게 선언한다. 뱀파이어로 살고 싶으며, 나딜라도 루실라도 아닌 루시로 살 것이라고.
이미지 출처: IMDb
많은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를 손쉽게 저버리고, 욕망을 발현하곤 한다. 그런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사회의 거부, 개인의 불순응, 종족의 본능 등의 사유로 '떠도는 존재'라기보다는 일부분 '정착이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루시의 욕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강정구, 김종회 (2011)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현실에 부재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창작물을 자아내는 일은 곧 "타자를 경유하여 인간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전달하고 싶었던 인간/인간사회의 단면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시가 힘을 얻었을 때, 공포로 가득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는 너(이혜정, 2020.)"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
참고문헌
강정구, 김종회 (2011). 뱀파이어라는 타자에 대한 상상. 비평문학(40), 7-30
박일아. (2013)."내면화를 통해 장르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뱀파이어 영화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9.1 pp.32-56
윤은애 (2010). 라캉(Jacques Lacan)과 여성의 히스테리적 글쓰기. 우리문학연구, 29, 327-363.
이혜정 (2020). 내러티브 윤리학과 여성주의 주체 – 내러티브 윤리학은 여성주의 주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 철학연구, 127-148.
최은주 (2010). 「성별화된 몸, 그 의미와 잉여의 두께-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영미문화 제10권 3호 한국영미문화학회 27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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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전태일 혹은 제1의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
1977년 9월 9일. 청계피복노조는 건물 사무실에서 노동교실을 사수하기 위한 집단 농성을 벌였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이 분신한 후 결성된 노조로 전태일의 뜻을 이어 다양한 노동환경 개선 운동과 노동자 교육을 진행하던 단체다. 이들이 농성을 벌인 이유는 건물주가 9월 10일까지 노조 사무실과 노동교실을 비우라고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계약기간이 남았음에도 퇴거 통보를 받은 건 배후가 있는 정치적 탄압이었다. 당시 위정자들에게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의 이름은 노동운동‧민주화운동 세력을 상징하는 위협적인 이름이었는데, 청계피복노조가 이 둘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피복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의욕적으로 전개해나가는 게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활동가들이 1977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에게 노조는 무슨 의미였는지, 그날을 다시 기억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질문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다.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편견, 찢어지게 가난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 등 미싱을 돌리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던 이유는 많다. 그녀들은 평화시장에서 일을 시작한 계기, 학생이 아닌 노동자라서 겪어야 했던 설움, 열악한 노동환경, 노조를 만나 변화한 삶, 동료들과 맺은 우애, 투쟁을 결심한 계기 등에 관해 말한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몸이 부르르 떨리는 분노,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슬픔을 담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전태일의 수혜자가 아닌 동지였음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은 그녀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노조와 노동교실이 없었다면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 형편없는 노동환경에 내내 시달렸을 것이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투쟁 과정에서 투신, 자해 등의 다소 과격한 결의가 나온 건 이 때문이다. 전태일을 계기로 빼앗긴 삶을 조금씩 되찾아오던 그녀들에게 노조를 그만두라는 건 다시 전태일 이전, 즉 지옥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과정, 맥락은 사라지고 법적 처벌과 빨갱이라는 낙인만 남았다. 재판은 주먹구구식이었다. 1962년생 노동자를 성인 교도소로 보내기 위해 1960년생이라 조작한 것은 재판이 노조 와해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음을 보인다. 청계피복노조가 농성을 시작한 9월 9일이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인 ‘구구절’과 겹친다며 그들을 빨갱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에 정말 ‘빨갱이’가 개입했다면, 차라리 피복노동자에게 9월 10일까지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통보한 건물주가 그랬다고 주장하는 게 합리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법은 약자 앞에서 더 가혹하고 우스워진다.
법적 처벌과 빨갱이는 모두 핑곗거리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자기 삶을 기획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고도성장’을 위해서는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모범'이기에 자유, 권리를 요구하는 자들은 눈엣가시다.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탄압은 '뒷바라지하는 아내'와 '수동적 노동자' 말고는 여성에게 아무것도 허락할 수 없다는 체제‧위정자의 추악한 폭력성을 까발린다.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을 이끌었던 피복노동자들은 징역을 살았다. 함께했던 친구‧동지들은 흩어졌고, 이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세상이 자유롭고자 하는 여성 노동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50년이 흘렀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무대인사에 오른 피복노동자들은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일을 꺼내 영화 촬영에 응한 이유로 자신들의 싸움이 기록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했음을 공통적으로 꼽았다. 오랜 침묵을 거스르는 말하기의 사회적 의의를 믿은 것이다. 영화에 나타나듯, 1977년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들의 선택은 옳았다.
동시에 이들의 말하기는 젊은 시절의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치유와 화해의 시도이기도 하다. 삶에 깊이 새겨졌음에도 그렇지 않은 듯, 없었던 일인 듯 살아온 시절을 건너 환한 얼굴로 과거의 나와 대면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분들이 전태일이었어요”라는 한 남성 동료의 말처럼, 청계천피복노조의 여성 노동자들이 이제는 웃는 얼굴로 당당히 과거를 회상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계속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들이 제2의 전태일을 넘어 제1의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으로 거듭날 때 한국의 노동운동사는 더 풍부해질 것이고, 소리 내지 못했던 더 많은 삶에 다시 목소리를 부여할 것이며, 흩어진 동료들의 삶을 더 크게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뜨거운 응원과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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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미국/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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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사막처럼 건조한 염세주의자의 목소리
만드는 영화마다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코엔 형제는 퓰리쳐상 수상작가 코맥 메카시의 동명 소설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영화화했다. 미국 개봉 후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며 2008년, 제80회 아카데미상 8개 부문(작품상 포함)에 노미네이트되었고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석권하여 화제작이 되었다.
줄거리는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세 남자가 이끌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황량한 사막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모스는 영양 사냥을 하고 있지만 총알은 자꾸만 빗나갈 뿐 별로 수확이 없다. 한편 보이스오버로 에드 톰 벨 보안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자꾸만 흉악하게 변해간다는 그의 느릿느릿한 사투리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고 문장에는 수식어도 없다. 건조하다. 사막의 열기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증발해버린 듯하다.
문득 모스의 눈에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어떤 물체가 들어온다. 망원경으로 보니 자동차들이다. 날렵한 동작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다가가니 멕시코인들끼리 대단한 총격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거래에 실패한 마약더미와 저만치 떨어진 나무 아래 앉은 채로 죽어있는 사내 옆에 돈가방이 놓여있다. 실패한 하루의 사냥과 대조적으로 돈가방은 그에게 큰 행운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상을 입고 물 한 모금을 원하는 한 명의 생존자를 뒤로한 채 돈가방만 챙겨 하우스 트레일러로 돌아온 모스는 생존자를 버려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다. 새벽에 물 한 통을 들고 다시 현장으로 가보니 그 생존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고 마약거래와 관계 있는 갱단이 도착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만 그들에게 발각되고 만 코스는 트럭을 버리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아내 칼라(켈리 맥도널드)를 친정으로 보낸 뒤 자신은 돈가방과 함께 달아난다. 그런데 가방에는 추적장치가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참혹한 범행현장에서 모스의 트럭을 발견한 보안관 벨, 갱단에게 고용되어 추적장치를 따르는 청부살인업자 쉬거, 돈가방을 든 모스 등, 세 남자의 쫓고 쫓기는 복잡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스크린은 거듭되는 살인으로 지옥 같은 이미지를 담아낸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우 문학적이다. 아마도 소설을 영화화했기 때문이겠지만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은유적인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힘입은 바도 클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 그 사막에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돌아서는 카우보이 모스는 무척 닮아있다. 불모의 사막에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로 장면이 바뀌어도 인간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관심이나 배려 등, 사랑을 표현하는 그 무엇도 담지 않는다. 기쁨의 웃음도 감동의 눈물도 배제한다. 그대신 건물들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건축한 건물들 속에서 하나, 둘, 잔인하게 죽는다.
그들의 죽음에 꼭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청부업자 쉬거의 의무는 그를 고용한 사람에게 돈가방을 찾아주고 가방을 훔친 모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가 필요해서,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어서, 혹은 그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 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무기, captive bolt pistol(혹은 cattle gun)이다. 이는 주로 가축을 도살하기 전에 고통을 덜어주고 피흘림을 막아 좋은 육질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쉬거는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 그에게는 효과적으로 그리고 단번에 상대를 죽임으로써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남기지 않는 효율성이 중요할 뿐이다.
쉬거의 앞에서 그에게 득이될 거래를 제시하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생명 부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쉬거에게는 두 번째 기회를 용납하는 관대함이 없으며 생명을 중시하며 가치판단을 하는 도덕적 잣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예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쉬거라는 인물은 절대적인 악, 혹은 악마로 그려진다.
쉬거의 추격을 받는 모스에게서는 자유의지를 가졌으되 많은 선택의 가능성 사이에서 계속 실수를 저지르는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절대적으로 악하지도, 또 선하지도 않다. 다만 어쩌다가 양심과 도덕을 무시하고 욕심을 따르는 잘못된 선택을 한 후 결국 댓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남은 용접공이기도 한 모스는 어쩌면 그를 따라붙은 쉬거라는 인간쯤이야 그가 물리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로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대개 운명을 만만하게 보듯이 말이다.
벨은 아버지에 이어 보안관직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악을 응징하겠다는 위대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에 그의 열정이 어쩌면 모두 말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루하루의 평화를 바라며 은퇴를 기다리고 있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가 모스의 뒤를 쫓는 이유는 같은 마을 주민을 보호해야겠다는 최소한의 의무감 때문이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벨은 그의 직업에 필요한 상식,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자꾸만 악해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는 도덕성,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경험으로 얻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건을 추리하는 전문가로서의 능력 등은 지녔으나 악에 맞서 싸우려는 열정과 끈기, 육체적 강인함 등은 없다. 악이란 끈질기게 싸워서 물리쳐야하는 대상인데도 말이다. 평화를 원한다고 악으로부터 피하면 피할 수록 악의 영역만 넓혀주게 될 뿐이다.
아무튼 악에 맞서 싸우기에 벨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고 또 나이만큼 지친 것 같다. 실력에는 도덕성, 전문성, 열정, 건강 말고도 신념 및 목표를 이룰 때까지 '지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은퇴 후 벨은 아내에게 그가 꾼 두 가지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꿈에서 벨은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준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두 번째 꿈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눈 덮인 산에서 말을 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머리를 숙이고 불을 든 채 벨을 지나쳐 앞서 갔다고 했다. 아마도 어둡고 추운 곳에 벨이 도착하기 전에 불을 피워놓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추측을 덧붙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벨처럼, 지켜야할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코엔 형제는 어쩌면 지독한 반어법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단정적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다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뜨겁고 건조한 사막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인생에 지친 벨 같은 노인들이야 점점 거세지는 악에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하더라도, 아직 기운 있는 젊은이들에게서만큼은 악을 상대하여 이겨내려는 끈질김, 열정들을 기대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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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태프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킹스맨 시리즈 프리퀄
1차 세계대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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