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4-05-16 22:40:24
지배종인 인간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리뷰
진화한 유인원(Ape)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행성. 유인원은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인간들은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아바타: 물의 길> 조쉬 프리드먼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이다. 평균제작비 약 100억(홍보비 추가 총제작비는 약 125억)이 드는 한국 상업 영화를 20개 이상 만들 수 있는 대작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리부트(Reboot)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리부트 영화의 유행을 가져왔다. 놀런 감독은 오래되어 폐기 수준에 있던 배트맨의 캐릭터에 새롭게 스토리를 입혀 대박 흥행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가 시도되었고 혹성탈출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마동석의 <범죄도시> 성공으로 시리즈 영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별 독립된 영화는 유명감독의 대작 영화일지라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예측가능성이다. 경험을 토대로 제작비 규모와 개봉 시기를 정하기가 쉽다.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등 영화 초반의 빌드업 과정을 과감하게 줄이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면 흥행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 시리즈 영화는 스핀오프(번외 편)와 프리퀄(전사)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어 확장성도 크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할 수 있는 지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태양계 행성의 지배종이 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결국 문명을 잃어버리게 될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 크기가 감동을 다르게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방구석 1열이 아닌 극장에서 보는 주된 이유다. 우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 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마치 실제 유인원들이 영화에 출연한 듯 얼굴에 나타나는 섬세한 감정표현, 거대한 숲이 된 고층 빌딩, 프록시무스 군단의 거처인 폐기된 크루즈선 등을 큰 화면에서 실감 나는 영상으로 즐겼다.
러닝타임은 다소 긴 145분이다. 이 정도의 상영시간이라면 놀라운 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 중간에 피로도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옥에 티를 찾자면 그렇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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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웨어 스페셜>,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선물하는 아빠의 편지
영화에 대한 내 소감부터 말하자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울었다.
영화 속에 담긴 현실과, 이를 마주한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울었다.
하도 많이 울고, 감정소비를 심하게 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영화의 여운을 즐기지도 못하고, 슬픈 감정을 추스르느라 바빴다.
'눈빛'만으로도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다. 눈빛과 표정만으로 대사를 전달하고, 행동을 보여주고,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는 배우가 있다.
<노웨어 스페셜>의 주인공 '존' 역할을 맡은 제임스 노턴이 내겐 그런 배우로 다가왔다.
눈앞에 닥친, 그리고 곧 다가올 현실을 바라보는 제임스 노턴의 눈빛과 표정은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렸다.
영화는 암에 걸려 살 날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청소부 '존'과 그의 4살짜리 아들 '마이클'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은 자신이 떠나고 혼자 남겨질 아들을 위해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기로 한다.
존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아들'을 위한 인생 최대의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신중하려고 한다.
마이클에게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선물하려고 한다.
"아직 어린애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고요. 훌륭한 애라고 칭찬도 많이 들어요.
사랑이 많고 다정한 아이예요. 행복한 어린아이죠.
저 아이에겐 평범한 가족이 필요해요.
아빠, 엄마가 있는 사랑이 넘치는 집과 전 가져본 적 없는 기회들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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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마이클의 새 입양가정을 찾아주려고 하지만 역시나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여러 가정을 찾아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이클의 반응을 살펴보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아들에게 남은 시간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더 고민되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존의 눈에는 자꾸 엄마와 함께 있는 마이클 또래의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사실 마이클의 엄마는 마이클을 낳고 얼마 후, 존과 마이클을 떠났다. 아이를 낳고 책임져야 하는 자신의 인생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존은 계속 마이클에게 '평범한 가족', '아빠와 엄마가 있는 집'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나는 이 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처음에 존은 아들에게 '아빠가 곧 죽는다'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직 아들이 너무 어리기에. 죽음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기에.
- 애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걸 원치 않아요.
아직은 아니에요. 너무 어리다고요.
새 가족과 자기 주변에 또 그런 일이 생기고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건 애답지 않잖아요.
이런 이유로 '기억상자'에 훗날 아빠를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담을 것을 권유하는 사회 복지사의 의견을 거절한다.
하지만 마냥 숨길 수만은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마이클이 죽은 딱정벌레를 발견하고 아빠에게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고 묻는다.
존은 조금 주저하다가 그 딱정벌레는 죽은 것이라고, 죽는다는 것은 몸은 그대로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아들은 아빠의 의도와는 다르게 죽음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 트럭은 짐을 잔뜩 싣고 여기저기 다니고, 사람들은 일하러 가거나 친구 만나러 멀리 갈 때 차를 타고 다니잖아.
마이클, 나중에 다른 마을에 가서 다른 집에서 살아 보고 싶어?
- 우리 집이 좋아.
육교 위에서 수없이 많은 차들이 도로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며 존은 마이클에게 다른 집에서 살아 보고 싶냐고, 넌지시 물어본다.
마이클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우리 집이 좋다고 말한다.
나중에는 마이클이 '입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존은 애써 담담하게 입양은 다정한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이클도 은연중에 아빠와 함께 여러 새로운 가정을 찾아가고, 만나보는 이 과정들이 단순히 놀러가는 것은 아님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이클은 대답한다. 자기는 아빠랑 살고 싶다고.
많은 대사도 없는 장면이다.
소파에서 존이 자고 있고, 마이클은 그런 존에게 조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담요를 덮어준다.
서툴게 담요를 덮어주는 손길에 잠에서 깬 존은 그런 마이클을 꼭 안는다.
정말 이별이 코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존은 마이클이 훗날 볼 수 있는 '기억상자' 속에 아빠를 떠올릴 수 있는 물건들을 담는다.
차에서 발견한 엄마의 장갑, 아들이 막 태어났을 때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아들이 아빠의 생일날 준 빨간색 초 하나, 아빠와 아들의 손을 대고 그린 그림, 그리고 나중에 운전면허를 땄을 때 읽으라고 쓴 편지와 같이 아들이 한 해 한 해 커가면서 차근차근 볼 편지 등의 물건을 담는다.
존이 자신의 사정을 아는 친한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되는 것이라고. 공기 중에서 남은 사람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한참 전에 사별한 남편의 칫솔을 최근에서야 버렸다고.
아직 마이클은 온전히 그 감정을 이해하진 못 했을 것이지만, 존은 마이클에게 이별의 인사를 건넨다.
- 아빠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네 주변의 공기 속에서, 널 따뜻하게 감싸는 햇살 속에서.
널 적시는 빗속에서도 널 지켜볼거야.
(아빠가 죽어도) 너는 아빠에게 말할 수 있어.
아빠는 안 보일 테지만 너의 말을 들을 수 있어.
공기 속에서, 햇살 속에서, 빗속에서, 마이클이 있는 모든 공간에서 계속 그를 지켜볼 것을 약속한다.
아마 마이클은 이런 아빠의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 그리고 아빠의 물건들을 오래오래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항상 그의 주변에 있는 아빠처럼, 그도 항상 아빠의 존재를 상기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이 아빠를 그리워하며 찾는 어느 순간에 존은 바람이든, 빗방울이든, 눈부신 햇살이든, 그 어느 것을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대답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존과 마이클이 찾아간 수많은 가정 중에 어릴 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친 사이에서 임신했다가 주변 어른들의 권유로 반강제로 아기를 없앤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임신을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아이는 꼭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입양아는 못 키우겠다고 떠났고, 그렇게 혼자 남게 되었다.
존의 결정은 그녀의 가정이었다.
그녀의 집에 마이클을 데려가고, 아들과 아빠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지막에 아빠에게 보내는 마이클의 눈빛은 마치 '아빠 걱정마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테니, 이런 시작을 선물해준 아빠는 걱정하지 말라고.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던 영화다. 2021년의 마무리에 생각나는 영화를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 이 영화가 먼저 생각날 것 같다.
영화를 보다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결정을 하려고 하는 존과 마이클의 이야기를 멀리 떨어져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조용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인지하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잔잔히 계속 찾아오는 파도가 더 눈에 아른거리듯이, 극장을 떠나서 집에 가는 시간 내내 그저 이 영화의 감상에 젖어 있었다.
영화의 이야기를 집까지 가져오며 누군가의 현실일지도 모를 이 상황들에 대해 혼자 곰곰이, 그리고 깊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의지와 결정으로 이 상황을 풀어헤쳐 나가는 아빠인 존, 존이 떠나고 그의 빈 자리를 종종 마주할 아들 마이클, 그런 마이클과 함께 새로운 시간을 쌓아갈 새 가정, 이런 이별을 수없이 마주했을 사회 복지사 등.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움, 벅참, 슬픔, 감동 등의 너무나도 많은 생각과 감정을 느꼈다.
가끔씩 그럴 때가 있다.
내 인생에서 먼저 떠난, 내겐 매우 중요한 존재였던 그 사람이 혹시 가끔씩 내 주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지.
보고 싶다- 라고 내뱉은 내 말을 듣고 혹시 내게 찾아와 주진 않았을지. 그리고 이런 내 말에 가벼운 대답을 해주진 않았을지.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조금의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공기 속에서, 햇살 속에서, 빗속에서 꾸준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전의 일들에 대해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는 내게, 그리고 항상 보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내게 일말의 대답을 해주었을 것이라고.
공기 속에서 항상 아들의 주변에 있을 것을 약속하며, 아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선물해준 아빠의 이별편지와 같은 영화인 <노웨어 스페셜>은 오는 12월 29일에 개봉한다.
다들 2021년을 꼭 이 영화로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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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러스처럼 스며들고, 사라지는 사랑
사랑은 언제 오는 걸까.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왔다가 가는 걸까.그건 정말 ‘온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일까. 우린 이 감정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져 버린 순간,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린 사랑이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우리 안에 들어왔다가, 어느 날 낯선 표정으로 우리를 갑자기 떠나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우리는 항상, 너무 늦은 이후에야 알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의학적 의미의 바이러스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바이러스처럼 겹쳐 놓는다. 한 사람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였을까? 진짜였다면, 그게 진짜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영화 <바이러스>는 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결국 다 지나가지만, 다 지나갔다는 걸 먼저 아는 쪽이 더 외로워진다. 더 외로워지는 사람이 사랑의 바이러스의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은 올 때도, 갈 때도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감정] 택선의 우울
택선(배두나)은 꽤나 부정적이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사랑 바이러스 감염 이전의 그녀는 무표정하고 삶의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귀찮은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의적이고, 냉소적이며, 따뜻한 말을 건네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 누군가가 그녀에게 “괜찮아?” 하고 물어도,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어딘가 무너져 있는 표정의 택선은 생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고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눈빛이 있었다.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녀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다. 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중, 동생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에 나간 그녀의 얼굴은 처음부터 짜증으로 가득하다. 소개팅에 늦었지만 사과조차 없는 남자, 수필(손석구)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내 일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고, 자신의 우산까지 가져가버린 별종을 바라보며 더 큰 우울감에 빠진다. 원래 우울함을 가지고 있던 택선은 수필을 만나도 오히려 우울이 증폭되어 버린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택선에게는 사랑 따윈 없을 것만 같았다. 영화는 행복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수필이 자신이 만든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택선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설정을 따른다. 이후 수필은 택선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감정은 어느새 그녀에게도 전염된다. 그렇게 택선은 강제적으로 ‘행복’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택선이 느낀 건 정말 바이러스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면 택선의 마음속에 원래 자리하고 있던 몽글몽글한 감정이 튀어나온 것일까.
[두 번째 감정] 택선의 사랑
그녀는 감염되고 나서도 처음엔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택선의 얼굴은 붉어졌고, 시선은 부드러워졌다. 스스로는 알지 못한 채, 행복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몸으로 티내기 시작했다.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몸은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긍정적인 생각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왠지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희망이 그녀를 이끌었다.
택선이 경험했던 모든 감정이야말로,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는 증거 아닐까.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이균 박사(김윤석)와 가까워지며 그녀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균은 그것이 감염 때문이라고 단정하며 택선을 밀어내지만, 서로를 향한 호감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가 재난 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이러스보다 두 사람의 감정 변화다. 이 사랑이 진짜인지, 아니면 병적인 착각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응원하게 된다.
그건 진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감염된 신경전달물질의 결과였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밝은 모습으로 웃던 택선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온전히 긍정의 세계에 몸을 맡기던 택선. 그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그게 진짜 택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울했던 택선이나, 공허했던 택선보다 더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다가가려 했던 그 모습이 가장 택선답게 느껴지니까.
[세 번째 감정] 택선의 공허함
치료가 끝났을 때,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아니, 무표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처음보다 더 고요하고 더 슬펐다. 감정이 없어졌다는 것은, 감정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모습은 이별을 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사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약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시간. 택선은 잠시나마 사랑을 느끼게 해줬던 수필을 추모하며, 그가 있던 장소를 다시 찾는다.
그곳에서 이균 박사를 다시 만난 택선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이균 박사는 조용히 되묻는다. “정말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 질문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택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살짝 달라진다. 조금 밝아진 그 표정은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아마도 택선은 자신이 느꼈던 사랑의 감정을 다시 떠올렸던 게 아닐까.
공허는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다. 무언가를 격렬히 사랑하고, 그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견디는 일,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택선의 감정을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6년 동안 창고에 있던 영화, 빛을 보다
<바이러스>는 장르적으로 정의하기 애매한 영화다. 예고편을 보고 기대했던 감정적 파국은 초반 10분에서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한없이 조용하고 모호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로맨스도 아니고, 재난도 아니며, 스릴러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6년간 창고에 잠들어 있었던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두나만큼은 이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 듯하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럽다가도, 금세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끝까지 버티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김윤석은 묵직하게 감정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고, 장기하는 첫 연기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손석구는 짧은 출연이지만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
강이관 감독은 차갑고 낯선 정서를 아주 천천히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쉽게도 그 정서를 끝까지 관객에게 전이시키지 못한다. 감정은 있고, 질문도 있지만, 답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미지근함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여운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란 감정은 단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일까? 전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사랑은 단지 호르몬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생화학적인 반응에서 출발할 수는 있다.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같은 물질들이 감정의 방향을 잠시 바꾸긴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어가고, 견디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감염이 만들어낸 사랑이었다 해도, 그 안에 진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반응’이기 때문이다. 택선이 웃고, 두근거리고, 외로워했던 시간들은 모두 그녀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건 진짜였다. 단지 시작이 바이러스였을 뿐. 감정이란 건 그렇게 만들어진다. 원인을 따져 물어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가 던지는 사랑에 대한 질문이 궁금하다면, 지금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gV4P7Oz3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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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크리스찬 베일, 타이카 와이티티
장르: SF, 액션, 판타지
상영시간: 118분
개봉일: 2022.07.06
토르, 오락영화의 본질을 되새기다
MCU 영화 중 최초로 네번째 솔로무비를 갖게 된 '토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각각 은퇴와 사망으로 하차한 이후 '어벤져스 빅3' 중 유일하게 현역 히어로로 잔류한 '토르'의 행보는 세대교체로 이어질지, 새로운 플롯과 함께 영광스러운 은퇴식을 거행할지 귀추가 주목되어왔다. 특히 '토르4'의 타이틀이 <토르: 러브 앤 썬더>로 확정되고, 과거 히로인으로 출연했던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의 복귀가 예고되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마이티 토르'가 '토르(크리스 헴스워스)'의 뒤를 이어 히어로로 활약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쉬헐크'나 '케이트 비숍'처럼 현 시대상에 맞춰 젠더 스와프를 표방한 작품들이 MCU 내에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적어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이러한 의미부여성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다. 감독이 연출한 전작(토르: 라그나로크)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한 영상미와 코믹스러운 연출에 포커스를 두며 마블 영화는 본래 어린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오락영화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다른 MCU 작품들과 달리 어린아이들을 스토리에 적극 활용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극중 빌런 '고르(크리스찬 베일)'에 의해 납치된 아스가르드 아이들은 결말부에 썬더볼트로부터 힘을 얻어 괴수들과 직접 맞서 싸운다. 약자인 어린이들은 히어로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클리셰를 깬 부분이다. 최근 개봉했던 마블 영화들이 극중 설정만으로 관객에게 피로도를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 MCU의 흐름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액션오락영화라는 본질에 좀 더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시리즈의 연장 속 답보 상태에 놓인 토르
마블 영화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함이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의도였다면 본작의 스토리 흐름과 기획 방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현재 다면적으로 세계관을 확장 중인 MCU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페이즈4 내에서 아무 기능도 해내지 못한 채 그저 평이한 MCU 시리즈 홍보물에 가까울 정도로 보인다. 히어로물은 보통 트릴로지 정도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인데, '토르'는 무려 4편까지 제작되었다. 이는 신화적 성격이 강했던 1-2편과 달리 <토르: 라그나로크>를 시점으로 '토르' 솔로 무비의 스타일이 '코미디+스페이스 오페라'로 완벽하게 변화하였고,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행에 합류하면서 등장인물 중 가장 변화무쌍한 행적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고향인 아스가르드는 소멸되고,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으며 '엔드게임'을 끝으로 소행을 다했기 때문에 '토르'라는 인물의 다음 페이지를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작은 '토르'의 성장도, 인상적인 행보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MCU 시리즈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히어로 중 하나였던 '토르'의 본래 매력마저 선명하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토르> 시리즈는 주인공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매 편마다 기획의도와 명분이 뚜렷했다. 반면 이번 작품은 가만히 살펴보면 <토르: 라그나로크>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채 오히려 지금까지 빌드업해온 시리즈를 퇴보시키는 행보를 보인다. 존재감 강한 강력한 빌런의 등장은 '헬라'에서 '고르'로 대체되었으며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찼던 '토르'는 추가로 친구와 동생을 잃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의 모습 그대로로 등장한다. 판타지적 배경으로 등장했던 사카아르 행성은 옴니포턴스 시티와 섀도우 렐름으로, 핵심 무기(?)를 손에 쥐고 있던 '그랜드마스터'는 '제우스'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3편과 4편에서 겹쳐보이는 인물이나 장치들이 완벽하게 동일한 포지션에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작을 떠오르게 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스토리 면에서는 퇴보했고, '토르'의 서사보다는 히로인인 '제인'과 빌런 '고르'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 되면서 주인공은 이렇다 할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내내 붕 떠 있기만 하다. '토르'라는 인물 자체로서는 더 이상 써내려갈 성장담이나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시리즈물을 과하게 연장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점이랄까. 차라리 본작이 '토르'의 은퇴나 세대교체,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함께 꾸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맥없는 작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 의미 있는 복귀였나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는 단연 묠니르를 들고 9년만에 컴백한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토르> 1-2편에서 히로인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제작진과의 의견 충돌로 하차하면서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았다. 작중 설정도 '토르'와 '제인 포스터'가 사귀었다가 결별한 것으로 일단락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제인은 4편을 기점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단순히 히어로가 보호해야 하는 여주인공이 아닌 적과 대등하게 맞서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돌아왔다. 천문학자인 제인이 묠니르를 들고 근육질 몸매가 되어 적에 맞서 싸우는 장면은 본작의 제일 큰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마이티 토르'는 결과적으로 제인의 다음 페이지를 기약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고, MCU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기리는 일종의 선물 같은 존재였다. 이를 통해 갑작스러운 하차로 일전에 깔끔하게 마무리짓지 못했던 '토르'와의 러브스토리를 정리하고, 두 편이나 히로인으로 등장했던 '제인 포스터'라는 캐릭터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다만 '토르'와 '제인'의 9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 회상 장면들은 관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두 남녀의 애정을 전달하는데 역부족이었고, 작중 투샷으로 비춰지는 장면들도 애인보다는 전투 콤비로서의 성향이 더 강했다. 또한 '사랑'이라는 핵심 소재가 '고르'와의 대립이라는 또다른 주요 소재와 맞물리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토르와 제인의 애틋한 관계가 생각보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인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였던 캐릭터를 전투신에서 전면에 나서 싸우는 캐릭터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그 이상의 의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이티 토르'의 모습은 신선했다.)
황홀한 영상미, 그에 반하는 개그 남발
<토르: 라그나로크>로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 곳곳의 영역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이번에도 영상미로는 뒤지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였다. 특히 토르 일행이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옴니포턴스 시티'는 전지전능한 신들이 모인 쾌락의 공간답게 황금빛으로 물들인 장관으로 그려진다.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본다면 그 시각적 감동은 좀 더 클 것이다.) 마치 십여년 전 MCU 영화에 '아스가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느꼈던 황홀감과 비슷했다. 후반부 '고르(크리스찬 베일)'와 전투신이 펼쳐지는 쉐도우 렐름을 피폐한 흑백으로 처리한 것도 빌런의 스산함과 공포스러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화려한 컬러로 대변되는 '토르'와 흑백으로 표현되는 '고르'의 선명한 대비는 애니메이션 속의 클래식한 선악 구도로 느껴져 이 부분에서도 어린이들을 핵심 타겟으로 잡은 감독의 지향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영상미를 빼면 남는 것이 많지 않다.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개그성 장면들이나 대사들을 수없이 가미했는데, 문제는 의도한 코믹함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작의 핵심 플롯이 무엇인가. 병마와 싸우다 '마이티 토르'가 되어 마지막 생명력을 다 소진할 때까지 전투력을 불사르는 '제인', 그리고 신들의 외면으로 하나뿐인 딸을 잃고 신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스스로 악당이 된 '고르'의 이야기다.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내기보다는 진지하고 무겁게 접근해야 할 스토리라는 것이다. 제인과 토르의 사랑과 이별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르의 결말이 어물쩍하게 이뤄진 것처럼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웃으라고 넣은 장면과 대사들이 웃기지도 않고, 영화의 전반적인 톤 자체를 흐렸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큰 실책이 되었다.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마지막 쿠키영상에서 보았듯이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는 예고편을 날렸다. 시리즈의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다른 시리즈물에 등장할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토르에게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고르의 딸, '러브'가 생겼고 부녀가 함께 우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는다는 스토리라인이 추가되어 토르의 후속편을 기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영향일까. 더 이상 '토르'의 이야기가 크게 궁금하지는 않다. 한때 자신을 죽이려 했던 빌런의 아이를 갑자기 키우게 되고, 두 사람이 전투 콤비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토르'가 써내려온 이야기 중 가장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토르: 라그나로크>로 급상승되었던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본작으로 인해 다시 급락하게 되었으니 다음 작품을 내놓을 생각이라면 명분과 방향성이 확실한 스토리를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
믿었던 '토르'마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반응을 남김으로써 MCU의 향후 행보가 크게 위태로워질 듯하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완다비전>과의 연계성과 '멀티버스'라는 설정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확실한 리스크가 있었고, <이터널즈>는 신생 시리즈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크게 낮았다. 따라서 극명하게 갈렸던 두 작품의 평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존재하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많은 이들이 호평을 보장할 만한 시리즈였다. 페이즈3까지만 하더라도 마블 영화들은 절대적인 호평을 받는 추세였으나 페이즈4에 진입하면서 혹평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완성도를 구현하지 못하는 현상이 장기화된다면 제아무리 MCU라 할지라도 하락세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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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깊이
명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깊이
15살의 비교적 어린 나이지만 라라는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는 여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여성이 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동시에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발레 학교에서 레슨을 받는다. 학교를 옮겨 새로운 학교에서 새 출발을 꿈꾸고, 발레 수업 또한 시작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가 가야 할 길은 쉽지만은 않다. 다른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마한 발레 기술을 15살에 시작하려니 굳어있는 몸의 관절과 근육들이 말썽이고, 잔뜩 감긴 테이프 아래 발에는 연습 과정에서 생긴 멍 자국이 가득하다. 주변 환경 또한 녹록지 않다.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등교한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선생님은 라라가 눈을 감도록 시키고 반 여학생들에게 라라가 여자 화장실을 쓰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거수투표를 한다. 학교, 발레학교의 주변인들은 얼핏 보면 그를 차별 없이 대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언행과 시선에는 차별적인 태도가 미묘하게 묻어난다. 발레 학교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탈의실과 화장실을 같이 쓰며 그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들의 몸은 봤으면서 왜 네 몸은 못 보여주냐며 라라에게 아랫도리의 성기를 보여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이런 무의식(혹은 의식) 중에 차별을 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트랜지션 중인 사람이 겪을 만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신체적으로 변화를 겪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이런 따가운 관심은 라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를 힘들게 하는 건 라라의 신체 자체다. 라라는 트랜지션을 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아빠와 함께 그 과정을 밟아간다. 수술을 위해서 호르몬 요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상황에서 눈에 띄게 달라지는 신체적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라라를 초조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몸선과 여성성이 강조되는 발레에서 신체는 가장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라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 노력하지만, 호르몬 요법과 강도 높은 연습이 겹쳐지면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고야 만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보다 훨씬 큰 문제는 라라의 내면에 있다. 그 자신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은 라라와 외부세계 간이 아닌 라라와 그의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라라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피지만, 성기가 있는 부분은 절대로 보지 않는다. 특수 속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할 때 성기 부위에 테이프를 붙여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샤워를 할 때도 속옷을 입고 하며 성기를 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바람과 현실 간의 괴리 속에 라라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런 라라의 얼굴과 몸을 카메라로 따라가며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라라의 감정은 관객에게로 공유되고, 관객은 라라의 내면에 간접적으로 동화된다. 이 영화가 발레를 묘사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발레라는 춤 자체보다도 그녀의 신체와 내면에 초점을 맞춰, 발레의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들을 강조하기보다 반복적인 안무를 행하는 라라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이 영화가 보이는 발레 동작들은 하나의 무용이라기보다 동작의 반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동작을 수행하는 라라의 모습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나 공연 전날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연습하던 라라가 연습실을 빠져나와 쓰러지기 전까지의 모습을 타이트하게 보여주는 씬은 반복되는 안무를 통해 관객을 답답하게 만듦과 동시에 반복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에 좌절하며 고통받는 그의 내면을 체감하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제71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주목할만한 시선 부문)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을 포함해 유수 영화제 수상경력이 다수 있어 훌륭하게 평가되는 영화지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출품 당시에는 미국의 트랜스젠더 비평가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트랜스젠더 배우들의 입지 자체가 제한적인 환경에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 젠더 배우를 캐스팅한 것과 성기를 포함한 라라의 신체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조성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단순히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나, 후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제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루카스 돈트 감독은 18세 당시 우연히 읽게 된 기사를 통해 그를 알게 됐고, 그 내용에 대해 영화를 구상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처음엔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것을 거부하던 노라 몽세쿠흐는 감독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이 영화의 제작 허가를 포함해 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최종 단계까지 약 9년간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그는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영화 속 라라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영화의 시선과 방식에 대한 비판은 자칫 영화 속 이야기의 본래 주인공인 노라 몽세쿠흐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 인물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여타 영화들과 다른, 뛰어난 영화가 되는 지점은 오히려 바로 이 주인공의 내면과 신체를 바라보는 집요하고도 분명한 시선에 있다. <로렌스 애니웨이>(2012), <어바웃 레이>(2015), <대니쉬 걸>(2015)과 같은 최근의 트랜스젠더 캐릭터 중심 영화들은 트랜스젠더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캐릭터 곁의 가족과 연인 같은 중요한 존재에 함께 초점을 맞추거나 그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판타스틱 우먼>(2017)과 같은 예외의 영화도 있는데,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은 지점은 <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많은 영화들이 관객에게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를 소수자 곁에 배치시켜 관객의 공감대를 끌어내려 하는 반면, 이 영화 <걸>은 영화의 모든 초점이 라라의 관점에 맞춰져 있다. 그의 곁에는 그를 든든히 지지하는 아빠라는 존재가 있지만 아빠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라라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돕는 존재일 뿐 이 영화의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은 아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존재는 라라이며, 영화는 그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라라의 마지막 선택은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의 잘잘못은 중요치 않다. 자신의 신체에 해를 가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은 관객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진정 봐야 할 것은 그 과정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과 인내의 순간들일 것이다. 병원 침대에 앉아 유리창을 바라보는 라라의 얼굴이 반사되는 씬은 마치 라라가 카메라 렌즈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에게 라라 본인이, 감독이, 영화가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이런 삶을 봤는데 당신은 어떻게 느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지. 바로 이어지는 마지막 씬에서, 라라는 사뭇 달라진 헤어스타일에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어딘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불안정하고 고통받던 모습은 비쳐지지 않는다. 라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렇게 부정하던 자신의 신체를 이제는 받아들였을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스치는 중에 우리의 눈에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보이는 건 확신에 찬 듯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며, 그 속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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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하> 잘 만든 한국형 오컬트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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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사제들> 이후로 꽤 기대되는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었다.
오컬트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독의 디테일들이 매력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강동원에게만 비친다는 소문의 후광을 못보았다.
사바하에 대한 해석이 굉장히 많다. 그만큼 수용자로에게 많은 걸 던져주고, 인과관계를 엮기 좋은 영화다. 어떤 종교적 상징들은 굳이 수수께끼처럼 풀지 않아도 눈에 보인다.
사바하는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뜻을 같이 하는 진언이다.
불자가 아니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반야심경>의 마지막 경구도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못지 사바하'로, 무언가를 바라는 간절히 바라는 산스크리트어다.
그렇다면 뭘 바라는지가 중요하겠다.
영화는 종교계 이단을 파헤치고 다니는 박웅재 목사의 설교로 시작한다. 자신들의 믿음을 이단이라 하는 목사를 공격하는 집단도 보인다.
우리나라 종교는 큰 줄기가 몇 개 있다. 거기에서 뻗어나온 잔가지들이 굉장히 많아 해석에 따라 어디까지를 이단으로 볼 것이냐가 달려있다.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았다.
어찌됐든 박 목사는 이단을 찾아다니는 게 돈벌이다.
이번에 파고들어간 '사슴동산'은 불교의 한 종파처럼 보이지만 수상한 냄새가 난다.
강원도 영월에서 의문의 살인사건들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이들이 실종된다. 그리고 영월에는 '그것'이라 불리는 아이와 그 때문에 역시 숨어 지내는 금화가 있다.
금화는 16년 동안 감금되어 있는 쌍둥이 언니에게 밥을 준다. 그것이 죽어버렸으면, 그것이 없어졌으면 하며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중학생이다.
크리스마스날 그것의 밥에 농약을 타고 집을 나가려고 하지만, 다시 돌아와 밥그릇을 차버린다. 따뜻한 스웨터도 놓고 간다.
'광목'은 수많은 살인을 사주하고 직접 행하기도 했으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불안할 때마다 경전에 있는 그 문구들을 외워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건 아주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들었던 자장가.
'그것'은 얄궂은 소리를 내며, 뱀을 보내며, 갖은 수를 써서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쫓아낸다. 하지만 광목만은 예외다.
광목은 그것에게 다가갔다가 뱀 대신 그것의 손에 발목을 붙잡힌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광목은 금화를 납치하여 지금까지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방식으로, 팥과 부적을 두고 기도한다.
금화는 묻는다. 왜 죽어야 하냐고.
그리고 죽일 거라면 쌍둥이 언니도 같이 죽여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광목은 '그것'을 찾아간다. '그것'은 땅을 파고 파고, 끝없이 파내려가 무언가를 발견한 뒤 자신의 몸을 뒤덮은 털을 깎아내고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부처의 모습으로 그를 기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광목만을 기다렸다.
"나는 울고 있는 자니라. 너를 기다렸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광목에게 그것은 엄마의 자장가를 들려준다.
미륵이라 불린 김제석. 김제석은 소년 교도소에 있던 네 명의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
네 명의 아이들은 각자 미륵의 곁에 있는 사천왕이 된다.
1899년생 김제석이 태어난 땅에서 100년 뒤 그의 천적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사천왕들은 1999년생 여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김제석을 지킨다.
그러므로 교도소에서 네 명의 남자아이들을 살인병기로 쓰는 동시에, 너희들의 시궁창 같은 삶 또한 구원받으리라, 하고 아이들을 꼬셨을 것이다.
한때 김제석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신이라 불린 사나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선(善)이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목적없던 선에 목적과 욕망이 생긴다.
남의 손에 피를 묻혀 목적을 이루던 김제석은 시종일관 흰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와 광목을 총으로 쏜 뒤에는 동물의 털로 된 검은 옷을 입는다.
'그것'이 광목의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전복된 차에서 광목은 김제석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건네준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김제석은 불에 타고, 그때 하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불꽃이 터진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대신 죽어야 했던 슬픈 날이라는 박 목사의 말처럼, 김제석이 신이 되기 위해 수많은 99년생 여자 아이들이 죽어야 했던 날들이 끝났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유신론자에 가깝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화론을 믿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신이 어딘가에 있긴 한 것 같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니, 그 모습이 필시 건강한 백인 남자의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신이 있다면 외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장면들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신이 있다면 세상을 이렇게 두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곳이 신이 만든 지옥이라면 어떨까. 생로병사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지옥의 모습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행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도 비슷하다. 영원히 다시 태어나서 고통받고, 병들고, 죽기를 반복하는 지옥.
<무간도>에서 무간지옥을 죽지도 못하는 지옥이라 한 것처럼.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차라리 이 세계가 지옥이라 생각하면 지옥을 잘 즐길 방법을 찾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그보다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다시 안 태어나는 쪽이 좋겠다.
광목은 금화를 죽이려 하기 전에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 말한다. 미륵을 위해 희생했으니 말이다.
김제석은 사천왕의 순교로 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김제석을 죽이기를 바랐다. 광목은 믿음에 의지하여 구원받기를 바랐다.
티벳 승려의 예언은 적중했다. 1999년에 태어난 그것은 김제석을 죽일 광목을 기다렸다.
광목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 성자 나한처럼,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대신하여 김제석을 죽인다.
그것 역시 김제석의 죽음과 함께 죽는다.
광목의 본명은 정나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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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삶을 좀먹는다. 외로운 자는 잘못된 믿음에 빠지기도 쉽다.
어떤 악인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 우리는 나약하고, 지옥(같은 곳)에서 매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곳에 이유도 모른 채 내던져졌다.
나는 지옥의 수많은 미끼들ㅡ삶을 더 지옥으로 만들어주는ㅡ에 쉽게 중독되어 무지몽매해지기 일쑤이지만, 어쨌든 깨어있어야 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신이 되기를, 영원히 죽지 않기를, 부자가 되기를, 사랑받기를, 신은 우리의 바람들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끝무렵 박 목사의 내레이션이 인상 깊었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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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스타의 성공, 그리고 실패, 그리고 지금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베러맨> 포스터 [출처: 씨네랩, 네이버 영화]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슷하지만 다른
<베러맨>은 영국의 국민적인 가수로 유명한 로비 윌리엄스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영화이다. 포스터에도 쓰여 있듯, 퀸의 이야기를 그렸던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교되는 지점이 많다.
다만 <보헤미안 랩소디>가 퀸이라는 밴드와 음악 자체에 집중했다면, <베러맨>은 로비 윌리엄스라는 ‘한 사람’에게 훨씬 더 밀착한다. 그의 전성기와 몰락, 스캔들과 자학, 그 모든 내면을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 다시 연출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 낯설고, 동시에 신선하다.
또한 시대 배경 면에서도 둘은 확연히 다르다. 퀸이 70~80년대를 대표하는 락 밴드였다면, 로비 윌리엄스는 90년대 아이돌 그룹의 아이콘이었다. 록과 팝, 밴드와 아이돌, 창작자와 엔터테이너를 오가며 그는 훨씬 더 상업적이고 정제된 음악 산업을 경험했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특히 아이돌 그룹 Take That에서 시작해 솔로 가수로 나서는 과정에서 보여준 감정의 굴곡, 그리고 팀과 팬, 언론 사이에서 무너지듯 흔들리는 장면들은 오늘날 K팝 아이돌의 이야기와도 묘하게 닮아 있다. 그가 겪은 연애 논란, 멤버 간의 거리감, 끝없는 비교와 기대는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이야기가 “그들은 위대했고, 그래서 그 음악은 불멸이다”라는 찬양의 구조를 갖고 있다면, <베러맨>의 이야기는 “이 못난이는 이렇게 튀었고, 이렇게 망가졌고, 그럼에도 결국 나아졌다”라는 굴곡의 구조를 따라간다. 이 차이만으로도 두 영화의 결말이 남기는 감정은 전혀 다르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파격적인 그리고 극심한 반항과 방황
로비 윌리엄스는 어릴 때부터 스타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의 ‘성공’보다, 그가 감당해야 했던 정신적인 무게에 더 집중한다. 그는 무대 뒤에서 불안했고, 충동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자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방황할수록 커리어는 더 높아졌고, 성공은 커졌다. 수많은 히트곡과 팬, 엄청난 부와 명예, 언론과 대중의 관심까지 모두 쏟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동시에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사랑했던 사람들과 멀어졌고, 팀과도 어긋났으며,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밀려났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영화는 그의 파괴적인 선택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혼란스러운 내면은 종종 몽환적인 뮤지컬 연출로 표현되며, 그의 고통은 설명 대신 이미지와 리듬으로 조용히 전해진다. "성공 + 마약 = 슈퍼스타"라는 공식이 낭만처럼 소비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암울하고 무서운 공식인지,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보여준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로비 윌리엄스는 이 영화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CG로 구현된 침팬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침팬지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극 중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사람처럼 대하고, 관객만이 그가 사람 아닌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이 설정은 굉장히 기묘하지만, 동시에 강력하다. 그는 늘 퍼포먼스를 해야 했다. 가족 앞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팬들 앞에서도 언제나 “로비 윌리엄스”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원숭이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쇼를 위해 훈련된 존재, 웃고 춤추는 무대 위의 동물. 영화는 이 자조적인 고백을 상징으로 바꾸고, 침팬지라는 얼굴에 그를 담아낸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하필 침팬지였다는 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침팬지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이자, 동시에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다. 로비는 그 중간 지점에 오래 머물렀다. 모두가 그를 보면서도, 아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는 그를 얼굴 대신 침팬지로 보여준다. 낯설고 이상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잘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다 알지 못해도, 전해지는 것들
나는 로비 윌리엄스를 잘 모른다. 그의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놓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이 낯설고, 감정선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아 몰입이 끊기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특히 그의 음악을 잘 모른다면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분만으로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게 만들었다는 건 꽤 큰 성과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특히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노래는 로비의 곡이 아니라, 어릴 적 그가 가수라는 꿈을 품게 만들었던 곡이다. 영화 초반에 나왔던 장면과 조용히 연결되면서 이야기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끝으로 엔딩 크레딧에는 영화 속 장면과 똑같은 실제 사진이 이어진다. CG로 구성된 이야기에서 현실로 천천히 전환되는 순간이다. 마침내 현실의 로비 윌리엄스를 다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전환이 참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연히 실제 무대 영상들을 보게 됐다. 그가 했던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들이 영화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알면 더 재미있고, 몰라도 크게 방해되진 않는다. 로비 윌리엄스를 잘 아는 사람에겐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의미 있는 영화다.
<베러맨> 스틸컷 [출처: 씨네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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