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2024-05-16 22:40:24
지배종인 인간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리뷰
진화한 유인원(Ape)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 행성. 유인원은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인간들은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연출하고, <아바타: 물의 길> 조쉬 프리드먼이 각본을 썼다.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이다. 평균제작비 약 100억(홍보비 추가 총제작비는 약 125억)이 드는 한국 상업 영화를 20개 이상 만들 수 있는 대작이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리부트(Reboot)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리부트 영화의 유행을 가져왔다. 놀런 감독은 오래되어 폐기 수준에 있던 배트맨의 캐릭터에 새롭게 스토리를 입혀 대박 흥행을 가져왔다. 이후 많은 리부트 영화 시리즈가 시도되었고 혹성탈출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한국에서도 마동석의 <범죄도시> 성공으로 시리즈 영화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별 독립된 영화는 유명감독의 대작 영화일지라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예측가능성이다. 경험을 토대로 제작비 규모와 개봉 시기를 정하기가 쉽다.
캐릭터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등 영화 초반의 빌드업 과정을 과감하게 줄이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 관객을 몰입하게 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이 형성되면 흥행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 시리즈 영화는 스핀오프(번외 편)와 프리퀄(전사)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어 확장성도 크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망할 수 있는 지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태양계 행성의 지배종이 된 유한한 존재인 인간.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으로 결국 문명을 잃어버리게 될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화면 크기가 감동을 다르게 한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한다. 영화를 방구석 1열이 아닌 극장에서 보는 주된 이유다. 우리는 용산 CGV 아이맥스 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마치 실제 유인원들이 영화에 출연한 듯 얼굴에 나타나는 섬세한 감정표현, 거대한 숲이 된 고층 빌딩, 프록시무스 군단의 거처인 폐기된 크루즈선 등을 큰 화면에서 실감 나는 영상으로 즐겼다.
러닝타임은 다소 긴 145분이다. 이 정도의 상영시간이라면 놀라운 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 중간에 피로도를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옥에 티를 찾자면 그렇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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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켄 로치 감독이 1936년생이니까 2023년 기준 87세이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아마도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영화 <지미스 홀, 2014년>을 보여주면서 은퇴 선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뭔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을 가지고 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간다. 이후 영국 북동부 지역의 낙후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까지 3부작으로 구성된 연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 '그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 포스터
복지 수당 받기 더럽게 힘드네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다니엘의 부인은 오랫동안 앓았다. 평생 목수로 일했지만, 남은 것은 늙고 쇠약해진 몸뚱이와 간병으로 기울어진 가정뿐이다. 다니엘은 정부에 복지 대상자로 신청해 수당을 받으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빙글빙글 여기저기 돌다가 자기네들이 설정해 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나마 신청할 수 있는 복지 사업은 서류를 컴퓨터로 제출해야만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진짜 심각한 지병이 있어서 일하기도 어려운데, 자꾸 근로 능력이 있는데 복지 수당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노인 대상 복지 체계만 이런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혼자 양육해야 하는 케이티도 마찬가지다. 소통되지 않는 원칙과 각종 서류들, 증빙이 되는 번호들, 성실하지 못해 복지 대상자가 되었다는 따가운 시선들 등 모든 장애물을 넘고 넘어가야 겨우 복지 수당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포스터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라네요 : <미안해요 리키, 2019>
제인네 가족은 아빠, 엄마, 오빠, 제인. 이렇게 네 식구가 같이 살고 있다. 아빠는 택배 일을 하시고,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계시다. 두 분이 맞벌이를 하시기 때문에 제인은 학교가 끝나면 혼자 빈 집에 들어와서 엄마가 요리해 놓은 음식을 먹고, 숙제를 한다. 오빠 셉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은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택배 일이나 요양보호사 일은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직종을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고 한다. 회사의 보호를 받아야 할 때에는 자영업자로 내몰리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 유연성을 발휘하려 할 때에는 노동자로 당겨진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 사이에 묶인 제인의 아빠와 엄마는 더 많은 근로를 요구받고, 혹사를 당한다. 혹사당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포스터
똑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저는 난민이에요 : <나의 올드 오크, 2023>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2016년 난민법을 제정하였다. 2024년부터는 한국의 이주민 비율이 공식적으로 5%를 넘기 때문에 '다문화 국가'에 진입한다. 사실 미등록 이주민들이 빠진 수치이기 때문에 이미 5%는 진작에 넘었다. 난민법에는 재정착 희망난민제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정부가 직접 난민 캠프로 가 그 곳에서 한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태국의 난민 캠프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미얀마 출신의 가족들이 이 제도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만약 재정착 희망난민제로 한국에 들어온 난민 가족들을 버스에 태워 인구 유출이 심각한 문제인 지역에 정착하도록 보낸다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 더럼 지역으로 버스가 들어온다. 이 버스에는 시리아 난민 캠프에 살던 가족들이 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야라는 동네 사람들의 혐오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올드 오크 사장님 TJ는 마음이 불편하다. TJ는 야라의 카메라는 수리하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해 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나누며 둘은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된 TJ와 야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는 영화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있지만, <나의 올드 오크>는 공간명이 제목이 되었다. 물론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름을 넣는 것으로 지어졌다. 앞선 두 영화가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나의 올드 오크는 인물들이 만나서 대화하는 장소가 강조된다. '올드 오크'라는 펍은 원래 40년 동안 단골로 다녔던 사람들이 '우리의 공간'이라고 여기는 곳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 '우리가 아닌 자'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쉽고, 서운하고, 화가 난다. 그래서 쉬이 내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돈은 없는데, 돈 들어갈 곳은 많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일은 부지기수며, 인생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사람 인(人) 글자가 바로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뉴캐슬어폰타인 - 선더랜드 - 더럼 순으로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의 배경이 이동한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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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 아는 당신의 정체는
난 MBTI를 좀 신뢰한다. 솔직히 신기하다. 난 INFJ인데, 나 통찰력이 뛰어난 거 맞는 것 같다. 또 심리학에 관심 있는 것도 맞다. 그래서 어제 은행에서 내 순번을 기다리다가 심리학 책을 읽었다. 또 목적과 의미가 있는 데에 열정적이라는 것도 완전 나에 대한 설명이다. 근데 사실 내가 만나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누군가가 어떤 유형인지는 관심 없다. 내가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 어떤 쪽인지 맞추는 게 그게 조금만 어렵나? 일단 다른 유형의 MBTI를 일일이 다 외우는 게 아니니까 사전 지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복잡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둘러보기를 쳐다보다 보면 N과 S 유형이 다른 것부터 시작해서 F와 J도 다르고 뭐 가지각색으로 특색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도 이거 다 외우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컴활 2급이라도 따서 졸업 조건을 맞추는 것도 급한데 이 말이지. 어쩌면 이기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실 나 편하라고 나의 유형만 외우고 다닌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내가 추구하는 나만의 개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딱 그거 아니면 MBTI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거 외에는 이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타인은 보통 좋은 사람이거나 적당히 좋거나 그저 그렇거나 안 좋은 인간이거나 뭐 그렇다.
분명 나만 이러지는 않겠지. 이런 걸 보면 MBTI과 과연 뭐를 위해서 만들어졌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가벼운 질답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자아성찰이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성향인걸 이해하면 미래에 배우자를 찾거나 직업을 가질 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쉬우라고 만들어진 MBTI도 사실 반론을 만들라면 충분히 있다. 마치 '혈액형 성격 테스트'와 유사할 것 같은데, 모두에게 있는 대략적인 특성을 예쁜 말로 포장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통찰력이 있거나 목적과 의미가 있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은 나 말고도 한 트럭이 있을 테니까. 어딘가에 분류되고 싶은 사람들의 특성을 이용했다고 하면 뭐라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이니 나는 어쩌면 나를 속임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 에이. MBTI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우리 모두 사람이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유행의 이면에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웃긴 마음이 이면에 깔려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다들 자기가 이렇다는 걸 아니까 세상이 말하는 다른 수작(?)에 넘어가고 싶지 않은 거지.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싶으니까. 이 심리테스트가 유행처럼 번졌던 2022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1940년대 미국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1970년대의 MBTI 매운맛인 '독심술'이다.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속여 돈과 명예를 가지려 한 남자 스탠튼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작품인가요?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스탠튼이다. 이 남자는 무언가를 불태우고 집 밖을 나섰다. 무작정 가출한 스탠튼. 그렇게 독립하면 뭐가 필요해? 당연히 돈이지. 뭐라도 하자 싶어서 서커스단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지나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지나의 남편은 독심술 전문가다. 신비롭게 암호화되어있는 책이 궁금했던 스탠튼. 지나를 이용해 마음을 눈치채는 독심술을 터득하게 되고, 뉴욕으로 상경해 좋아하던 몰리와 함께 사람들의 부와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영화는 이 스탠튼이라는 남자의 일대기를 다뤘다. 독심술을 어떻게 활용해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지를 묘사한다. 이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서커스단 내부의 치정이나 후반부 릴리스와의 대립이 영화의 주 소재다.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에 관한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거짓말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타인을 향한 거짓말이다. 주인공 스탠튼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 난 방금 젤리를 먹어서 손에 달콤한 냄새가 난다. 만약 스탠튼이 내 옆에 있었으면 '이 사람은 군것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 어떻게 알았지' 싶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아빠를 만난다면 내가 사준 신발을 보고 '아들이 뒤늦은 바람이 들었었군요'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스니커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나름 무난한 제품을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스탠튼은 이렇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말을 한다. 그 근거를 통해 사람에 대해 유추하는 것이 적중률이 높은 것이다. 근데 그게 거짓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 돈을 벌고 또 죽은 사람을 이용하며 마치 신기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철저히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달콤한 말로 타인을 속이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른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텐데, 이는 영화 안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인물들이 어떤 인물을 속이는지를 염두해서 보면 영화에 대한 감상이 넓어질 것 같다. 그게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하니까.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염두해야 할 한 키워드기도 한 것 같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미장센이다. 뭐랄까, 영화의 톤이 전체적으로 어둡다. 어두운 색감이 영화를 이끄는데 이걸 보는 재미도 충분하다. 솔직히 초중반부 영화 빌드업이 고루하다고 느낄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이 화면 예쁜 즐거움이 극을 이끌어가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원래 크리쳐 묘사 맛집이었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주장기가 빛을 본 셈이다. 특히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루니 마라가 눈밭에서 나타난 장면이 기억난다. 그런 청록색의 밤은 몇 시에서 찾을 수 있을까? 뭔가 태어나서 자주 본 적 없는듯한 뒷배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릴리스의 사무실과 어울리는 헤어-메이크업-코디, 검-빨을 활용했던 루니 마라까지 인물 코디 디자인도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꽤나 섬세한 사람일 것 같다.
두 번째. 엔딩이다. 이 글은 스포일러가 없는 글을 표방한지라 구체적으로 뭐라 적을 수는 없다. 또 영화를 보다 보면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뭘 생각했든 설마? 싶었을 것 같기에 엔딩은 참 곱씹어도 보기 괴로웠다. 치밀하게 설계된 영화의 내러티브가 일품인 작품이었다.
세 번째.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전에도 몇 번 있었다. <아이리시맨>이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하우스 오브 구찌>까지 당장 생각나는 예시는 이 작품들이 있다. 그럼에도 앞 예시의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 이유는 주인공 때문인 것 같다. 보다 더 비극적이고, 괴로우며 세게 비꼬아야만 하는 작품을 이끌고 갔던 건 브래들리 쿠퍼의 비주얼과 퍼포먼스 때문인 것 같다.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네. 난 난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살짝 잔잔한 구석이 있기도 하고, 얼핏 보기에 비주얼이 쉽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보는 분들은 커피와 박카스를 좀 마시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 외에는 영화가 어렵지는 않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3번의 세 번째 문항에서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에 대해 썼지만 다른 배우들도 연기가 좋다. 주인공 루니 마라가 연기한 몰리는 입체적인 사람이다. 오로지 사랑 하나만 보고 온 사람의 심경변화가 잘 드러나는 연기를 해야 한다. 좋은 배우답게 몰리 역을 잘 소화해낸다. 또 다른 좋은 퍼포먼스는 조연의 윌렘 데포다. 이 사람이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라이트하우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도 출연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현실주의적 연기법이었다. 뭐 둘의 연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우들도 좋았다. 케이트 블란쳇이나 토니 콜렛은 사실 좀 보던 느낌이긴 했지만.
6.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굳이 원작을 보고 가지 않아도 될 듯?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이 글을 쓰는 지금 2월 27일, 언제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볼지는 모르겠다. <더 배트맨> 개봉이 3일 정도 남아서 극장 상영관이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배트맨>을 보기 전에 극장에 가고 싶은 분들이라면 강추한다. 또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처럼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취향인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어쩌면 동화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잔혹하게 전개하는 맛이 일품이다. 또 아마 디즈니 플러스에도 올라올 것 같기 때문에 차후에 올라오는 영화를 OTT 유저들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루니 마라 예쁘게 나온다. 그녀의 팬들은 필견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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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일까?
* 이 글은 영화사 진진의 언론/배급 시사회에 참여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나는 이따금 노년의 나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머리가 희게 세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가 된 나 자신은, 글쎄, 어쩐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서른이 되어버린 나와 환갑이 되어버린 나의 부모님이 그렇듯, 내가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별 다른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노년은 언젠가는 온다. 나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될 거라는 소리다.
우리는 흔히 멋진 노년을 그리곤 한다. 선글라스를 멋드러지게 끼고서 타탄 무늬 스커트를 빼 입은 백발의 멋쟁이 할머니. 그게 내가 막연하게 그리는 할머니인 나 자신이다. 이 상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숨어 있다. '늙고 초라하고 평범한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위 '외롭고 사회에 뒤쳐지는' 슬픈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리다.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는 내가 아직 젊어서 가질 수 있는 오만이기도 하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하는 그 생각에는, '저렇게'에 해당하는 많은 노인들에 대한 멸시 혹은 측은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는 그런 늙음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처럼.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노인과 늙음에 대한 편견과 업신이 도사리고 있다. 국경 밖을 나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물론, '멋지게 늙고 싶다'는 소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멋진 노년'의 범주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삶이나 얼마든지 찬란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바로 이러한 노년의 '리즈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고독과 병듦
남편인 슈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 모모코의 삶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둘 뿐인 자식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다시피하고, 늙은 몸과 마음은 병들었다. 그녀의 벗이라고는 부산스러운 상상 친구들 뿐이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 불 꺼진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늘 하던 대로 텔레비전 앞에 앉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외로운 노인의 삶 그 자체이다. 이렇다 할 말동무도 없는 모모코는 우울하다. 더 이상 잠에서 깨지 않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하고, 언젠가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 붙이는 것은 빙하기 이전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왜, 이제는 화석이 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원시 생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수억 년 전 지층에 묻힌 그들의 처지에 자기 자신의 신세를 대입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때 찬란했을 역사를 지녔으나 이제는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에 그저 전시될 뿐인 삶은, 세상과 모모코 자신이 바라보는 '노인 모모코'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어제와 오늘의 찬란함
그런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정략 결혼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신여성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여인은 다름 아닌 모모코였다.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그와 귀여운 자식들을 낳아 삶을 이어나갔던 것도 바로 그녀였다.
영화 곳곳에서 그녀는 그 앳된 시절을 회상하며 그것을 지금의 모습과 대비한다. 그 순진하고 열렬하던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모모코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인다. 인생의 동반자와 아이들을 위해 전념한 삶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쓸쓸하게 종착점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모코는 그 많고 많은 회상 끝에 그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심한다.
이미 죽은 남편이나 실망과 슬픔만을 안겨주는 자식, 혹은 그 어느 찬란한 젊은 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나아간다. 그것은 고립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쓸쓸한 노년'이라는 편견에서의 자주와 독립이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차마 의지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로소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모모코'라는 삶의 운전대를 잡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녀의 공상 안에서, 그녀는 더 이상 화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매머드이다.
겉보기에 그녀의 삶은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독거 노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모코는 모모코대로 혼자서 전진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충분히 '리즈 시절'이리라.
노년의 여인을 소재로 삼고 있는 만큼 영화의 전개나 구성은 매우 단조롭다.
무언가 스펙터클하거나 뚜렷한 기승전결을 바라고 감상한다면 이 영화의 재미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좀 슴슴한(싱거운) 집밥 같다. 흰 밥에 절임 반찬 몇 가지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밥이라고 내놓았나 싶다가도, 오래 씹고 음미하다보면 단맛이 난다.
그러다가 이따금, 짭짤한 무짠지를 아삭아삭 씹는 것같은 절묘함이 스크린을 감싼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연출이 바로 이러한 무 짠지 역할을 한다.
처음 스크린 너머로 매머드와 원시인을 보았을 때는 무척 당황했지만, 보다보면 그건 그것대로 별미다.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힐링' 일본 영화가 그다지 취향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 자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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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에서 보내는 응원
"나이 드니까 눈물만 많아져. 어쩐지 눈물이 나네." 같은 말에서는 괜스레 낙엽 냄새가 난다고, 그러니 내 입에서 나오기엔 좀 방정맞은 것 같다고, 아마도 십대쯤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들이 왜 저런 문장을 골랐는지 알 것 같은 순간들이, 가끔 그 비슷한 말이 슬쩍 떠오르는 날들이 있다. 이전에는 무심하게 넘어가던 일들이 실은 여상하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탓이다.
꽃 한 송이 피는 순간이나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아문 자리는 어쩜 그리 경이로운지. 남들 다 하고 사는 일 중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들이 많은지.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느낌을 즐기며 천문학 책을 읽어보는데 중력이나 관성 같은 개념은 어쩜 그렇게 신비로운지. 모두 다 이전에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두 번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 깨달음이 켜켜이 쌓인 자리에 무언가 와 닿았을 때, 그래서 물방울이 터지듯 눈물이 훅 고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어쩐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기실 이게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걸까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할 시간이 우리에겐 많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나이 드니까', '어쩐지'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시간을 그렇게 허덕허덕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에 수록된 단편을 읽다가 그렇게 "어쩐지" 울컥한 장면이 있다. 어떤 자매의 이야기였는데, 동생에게 생긴 큰 변화를 엄마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언니가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이었다. 버는 돈 대부분을 책과 영화에 쏟아내며 사는 자신의 존재는 엄마에게 어떨까 생각하는, 뭐 대략 그런 문장이었다. 전철 한가운데서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터졌다. 어쩐지 울컥하네. 그리고 마침 전철 한가운데였으므로, 종점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으므로 그 "어쩐지"의 정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건 내가 가진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정적인 것들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엄마도 아빠도 눈치를 주지 않건만 괜스레 눈치 보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십대 때처럼 대단한 입신양명을 꿈꾸는 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는 세간의 말에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세간'과 반대로 가는 삶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그 걸음조차 흔들리는 그대로 괜찮다고 끌어안아준다. 좋은 영화, 마음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찬실은 마치 어려운 날 함께 앉아있어 주는 친구처럼 따스하고 다정하다.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 정말 굉장히 운이 좋은 찬실이란 사람이 나오나 봐 ” 라고 생각한 한국인이 있을까? ( 내 친구는 자꾸 “ 찬실이는 복도 없지 ” 로 기억했다. ) 시놉시스를 볼 것도 없이 찬실이의 날들이 꽤나 박복하게 굴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제목이기도 하다.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프로듀서다. 즉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영화라는 형태에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할 때, 그걸 현실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기획과 제작부터 홍보와 개봉까지 전 과정에 손이 닿는 사람, 본인 말을 빌자면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다. 찬실은 예술 영화로서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감독과 오래 같이 일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영화 찍으며 평생 살 줄 알았다. 감독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갑작스럽게 실업자가 될 때까지는.
찬실이의 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OST 가사처럼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부대껴오는 것이다. 시간과 애정을 다 바쳐 사랑한 영화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고 때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기도 하면서 찬실은 씩씩하게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추려 언덕길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 문간방으로, 사각형도 오각형도 아니고 반지하도 1층도 아닌 방으로 이사한다. 생계를 위해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급브레이크 걸린 길에서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나.
찬실에게는 별로 여유가 없다. "한국 영화계의 보배"라며 찬실을 추켜세우던 영화사 대표는 ‘감독의 예술이었으니 프로듀서가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며 직업인으로서의 찬실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때마침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친다는 단편영화 감독 영을 보면서는 또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하다. 좋아하고 어쩌고 할 만큼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리고 정작 알아보면 그렇게까지 잘 맞지도 않지만 ("노올란?!"), 이 정도면 대충 업계도 맞겠다 사람도 다정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적당히 연애라도 해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조각배 같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던 찬실의 일상에 한 남자가 더 나타난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맘보 춤을 출 것만 같은 속옷 차림새에, 추위에 파르라니 떨면서도 콘셉트에 충실하게 머리카락까지 고슬고슬 만지작거리는 그는,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한다. 유령일까 환상일까 아니면 영화의 현신 같은 존재일까. 아무튼 그는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고, 찬실은 "이제 내가 미칬는갑다... 완전히 돌았는갑다..." 하고 서러워한다.
이 모든 주변인 틈바구니에서 찬실은 어떤 카테고리로 규정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뚜렷하게 계약서 찍힌 직업도 없고, 함께 서로를 보듬자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도 없고, 하다 못해 여태까지 해왔던 일조차도 없어졌지만 찬실은 늘 최선을 다한다. 장국영에게 고민 상담을 하거나, 영과 잘해보겠다고 도시락 싸들고 따라가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소피에게도 너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고, 더듬더듬 한글을 배우는 집주인 할머니 숙제를 도와드리거나 함께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그리고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도시 곳곳에 세금으로 조성한 공간을 저렇게 귀엽게 활용할 수도 있구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무시하고 오즈 야스지로(를 비롯해 '시네필'들이 좋아하는 감독)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렇게 유쾌할 수도 있구나. 빛날 찬 열매 실, "내하고 닮았나" 고민했던 모과처럼 단단하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모과 바로 뒤에 붙어나온 배, 사과, 곶감 등 영화 대박 기원 고사상의 과일들은 끝내 그녀의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찬실에게는 알찬 열매라면 으레 그렇듯 은은한 윤기가 돈다.
그러는 동안 장국영은 찬실에게 계속 묻는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영화를 "해나갈 수 있을까" 묻는 찬실에게, 찬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묻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영과 "잘될 수 있을까"를 묻는 찬실에게, 외로운 건 외로운 것일 뿐이니 상대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일련의 일들 끝에 찬실은 모든 걸 게워낸 사람이 물병을 더듬더듬 붙들듯 다시 영화를 잡는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찬실은 "하고 싶은 일"의 첫걸음을 떼어나간다.
영화 끝에서 찬실은 장국영이 메어주는 아코디언을 한 품 가득 끌어안고 희망가를 연주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시작과 끝에 어쩐지 쓸쓸한 바람 소리를 품고 있는 악기여서일까. 제목은 희망이라지만 어쩐지 절망적인 시대에 불리던 아득한 노랫말이어서일까. 그 장면은 어쩐지 눈물겹다.
이 영화에서 내게 "어쩐지" 눈물이 난 부분은 이 장면이었다. 차분한 연주 끝, 그동안 자기 일처럼 열을 내며 해준 장국영의 조언이 더 이상 찬실에게 필요치 않다는 걸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
"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그 차분한 인사는 마치 영화와 주고받는 말 같았다. 우리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영화에 있어 늘 외부자라고만 느꼈던 내게도 영화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었다. 우주 어딘가에서도 누군가가 담은 마음을, 때로는 택배 받듯 때로는 유리병 편지 받듯 건네어 받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오래오래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이따금 끄집어내어 살펴보는 것. 그게 영화와 나의 관계였다. 찬실처럼 프로듀서가 되고 감독이 될 일도, 영처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업을 두루 섭렵할 일도, 하다 못해 이미 폐간된 <키노> 지를 쌓아놓고 정성일 평론가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일도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영화는 선물처럼 가까이 와준다. 마치 이 영화, 찬실이 그랬듯.
영상으로 보다 보면 닮아 보인다. 진짜다.
영화의 현신 장국영. 그를 우리가 길이길이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영화의 아우라가 있으니까. 이 영화에도 나온 <아비정전>의 옷차림이 그의 외적 시그니처라면, <패왕별희>는 그의 내적 시그니처였다. <패왕별희>에서 그가 맡은 데이는 철저하게 이야기 속으로 침잠한 인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가장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데이인데, 그럼에도 그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건 영화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의 극단에 서 있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쥬샨이다. 거친 현실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던 쥬샨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던 데이. 샬로는 그 사이에서 남편이었다 패왕이었다 하며 갈지자로 걸었다. 이야기 안에만 있고자 한 이에게 현실은 너무 거셌고, 현실을 바지런히 걷고자 한 이에게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었다. 끝내 현실은 이야기를 밀어내지 못했고, 이야기는 현실을 지우지 못했다. 공리와 장국영은 대척점에 있었지만 실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찍힌 대척점이었다. 현실과 픽션은, 삶과 영화는 그렇게 먼 것 같지만 멀지만은 않다.
이따금 <패왕별희>의 어떤 장면이 생각나는 이유. 장국영의 눈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 삶에 에너지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내가 찬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들여다보는 이유. 우리가 늘 이야기를 찾는 이유는, "사는 게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라는 찬실의 말에, 다른 이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서 비춰주는 찬실의 플래시에 녹아 있는지 모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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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키, 아파트] 좌표지평계를 고정하는 방법
<럭키, 아파트>
수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독립 영화계에서 유명한 작가나 감독님도 계실 것이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예쁘고 멋진 배우님도 계셨을 것입니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블랙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놓쳤던 일상의 무지개를 발견한 영화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쟁쟁한 작품들을 이기고 ‘전주시네마 프로젝트’ 마크를 당당하게 걸친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랜만에 독립영화의 색을 진하게 간직하면서 대중의 재미를 자극하는 요소로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흥미롭고, 실험적이며, 재미있습니다.
저는 오전 10시 30분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을 장맛비를 뚫고 50분 지하철로 이동했습니다. 의미심장한 장대비가 공간의 온도를 잠식하며 스산했죠. 피곤과 어려움이 몰려왔으나 영화가 시작하고 이어지는 서스펜스와 스릴이 긴장의 끈을 다시 잡게 해주었죠. 아마도 2011년 <모래>를 시작으로 <자, 이제 댄스타임>, <이태원>, <우리는 매일매일> 등 꾸준히 작품을 활동하시는 ‘강유가람 감독’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13년의 긴 세월이 전해주는 시나리오 자체의 재미와 계속해서 주어지는 인물의 과제, 입체적인 시점 자체가 좋았습니다. 관람하는 내내 이 작품은 이미 뼈대부터 탄탄하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독립 영화는 자신만의 강점과 특색이 매우 강력하게 확고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때론 대중의 반발을 살 수도 있고, 비난이나 불호를 받을 수 있죠. 본 작품을 관람하며 그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외된 모든 자들에 대한 시를 쓰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줄무늬가 화려한 얼룩말이 초원에서 죽지 않고 머나먼 땅으로 여행을 떠나는 영화 같았습니다.
극에서는 현재 2024년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논쟁거리가 가득합니다. 감수성이 매우 풍부하시거나 사회적인 논란에 예민하신 분이라면 관람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논쟁거리가 결국 ‘사람’이라는 실타래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시면 왜 그렇게 모질게 구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주제가 동시에 함께 다뤄지기 때문에 보시는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영화는 다른 색깔로 변신할 수 있는 카멜레온이 됩니다.
이제 이사를 하면 떡을 돌린다는 이야기는 늙어버린 추억의 전유물이 된 상황입니다. 이웃의 얼굴을 모르고 사는 경우는 당연한 것이죠. 그만큼 삶 자체가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그것을 느끼기엔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 부족하죠. 극의 전반부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노년층의 고독사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웃,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웃의 상태나 상황을 유심히 바라보기 이전에, 이미 우리 집 문 앞에 던져진 대출이자 통지서에 시선이 갈 뿐입니다. 그것도 지극한 일상이죠. 영화 전반부를 관람하며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카메라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너무 일상적인 소재인데, 어쩌면 우리 집 근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전해주는 평범함의 폭력이 어두운 아파트 복도를 따라 흘러갑니다.
영화는 풀어도, 풀어도 끝나지 않는 기출 문제집입니다. 본 작품도 고독사에 대한 답안지는 전해주지만, 그것을 접근해 가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부딪힘’이란 문제는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선량한 마음을 동 대표를 시작한 누군가의 어머니는 사건이 지남에 따라 악인으로 변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아픈 다리를 들고 움직이는 주인공 선우는 눈초리를 맞기 시작하죠. 일상 속 문제를 해결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역할인 경찰 역시 본 작품 속 이야기는 단지 퇴근 전에 빠르게 해결하고 넘어가고 싶은 아픈 기억일 뿐입니다. 영화를 관람하시며 흥미롭게 보셨으면 하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특정한 이권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대적자가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전망 좋은 언덕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어딘가 날카로운 부분을 만들고 있었죠.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영화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시선과 점점 타들어 가는 담뱃불 그리고 빨갛게 눈을 아리는 경고등만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관람하며 영화 중반부 일어나는, 시나리오상 가장 중요한 대목, 미드 포인트 사건이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조심했습니다. 대게 영화는 6분의 2지점, 절반 지점에서 극의 방향성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본 작품은 중반부 사건 이후, 시점 자체의 변화를 꾀합니다. 전반부에서 다룬 고독사에 대한 묘사나 이웃과의 갈등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존재에서 눈앞의 존재로 옮겨 집니다. 지금까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주인공을 장내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으로 변신시킵니다. 극이 두 가지 이야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전반부 분위기나 주제를 끝까지 숨기거나 가져갔다면 너무 무리였을까 싶었습니다. 영화는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를 풀어가는 어려움이나 반전보다는 문자 그래도 거리적으로 전반부와 가까운 이야기를 선택하죠. 취향적으로 아쉬운 행보지만 그렇다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몰입도를 깨트리지는 않습니다. 중반부 이후 영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바라보시는 것도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는 선우와 희서는 계속해서 삐걱거리다가 결국 폭발합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인데 주인공끼리 서로 물고 뜯고 해하는 방식은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까지도 인간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약간의 행동이나 목소리의 톤 등으로 상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죠. 말로 전해야만 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을 우리는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당기시오/미시오 문’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릴 적 도덕 시간에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위치와 모습은 달라진다는 구절도 생각났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천대받거나 소외되거나 약자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교육받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존재하죠. 애초에 그런 것에서 자유롭고 태어나는 순간 사랑받는 것이 확정받은 진실이 있는데 말이죠. 영화가 가장 기초적으로 만들어둔 물질 만능주의와 자유에 대한 개념은 아파트 지하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애초에 문제는 해결하는 소소한 흥미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니까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고는 그 다음이죠. 말도 안 되는 인생 최대의 문제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드리고 도움을 받거나 조언을 구하는 과정은 그 어린 시절 작았던 흥미에서 시작합니다. 문제 자체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동일하다고 관람 중 생각했죠. 이집트 신화의 괴물처럼 우리의 삶을 탄생과 죽음 사이에 두고 의도치 않게 껴안은 문제가 얼마나 무거운지 재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졌습니다. 촬영은 물로이요, 연출과 편집, 특히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발색은 긴 여운을 안겨주기에 좋았습니다. 씁쓸하지만 가장 익숙한 이야기를 재치 있게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영화가 추구하던 욕 먹을 때 웃으려고 노력하는 굳은 미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온라인 영화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참석 후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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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진 운명과 자유의지의 싸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우리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꽤 많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주변의 여러 상황들, 성인이 되기 위해 해야 할 많은 것에 대해 다른 어른들에게 듣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방향성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진짜 맞는지, 선택을 했다면 그게 잘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결과가 어떤 식으로 펼쳐지든 그것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만이 온전히 알 수 있고 마지막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주변 어른들은 삶에서 해야 할 것들이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청소년기엔 자신의 경험으로 확고한 삶의 길이 있는 부모들과 의견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부모의 입장에선 자신의 자녀가 좀 더 안전하고 쉬운 길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딱 맞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과 얻고 싶은 결과는 다르다. 아이는 최대한 자신이 하고 싶은 길을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어가려고 한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그 길은 때론 올바르지 않아 보이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사춘기 시절 부모와 자녀 간에 의견충돌이 있기도 하다.
새로운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의 성장기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2018년에 개봉했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후속 편이다.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던 피터 파커(목소리: 제이크 존슨)가 아니라 마일스 모랄레스(목소리: 샤메익 무어)다.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에서 마일스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가 살던 세계의 피터 파커는 죽었고, 대신 거미에 물린 마일스가 스파이더맨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에게는 영웅을 해야 할 책임이 원래 피터에 비해 적다. 다른 세계의 스파이더맨과 다르게 마일스의 부모는 살아있고 대신 삼촌이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그가 영웅 역할을 해야 할 거라는 당위를 주진 않는다.
1편에서의 마일스는 우연히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가 해결하지 못했던 악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우주의 스파이더맨인 피터 B. 파커(목소리: 제이크 존슨)와 스파이더 우먼 그웬(목소리: 헤일리 스테인필드)과 힘을 합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왜 스파이더맨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1편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주요 인물들이 좀 더 궁극적인 갈등 속으로 빠져든다.
이번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여전히 마일스이지만 그웬이 상당히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 이번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그웬인 것은 그가 이번 이야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린다. 그웬은 그의 세계에서 스파이더 우먼으로 영웅 역할을 하고 있다. 경찰 서장인 자신의 아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그의 절친이었던 피터 파커는 잘못된 실험으로 죽었다. 그 과정에서 피터의 살인범으로 몰린 스파이더 우먼은 자신의 아빠에게 쫓기게 된다.
고립감을 느끼는 청소년 영웅, 스파이더 우먼과 스파이더맨
그웬은 아빠에게 자신이 스파이더 우먼이라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다. 그가 가진 두려움은 모든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부모가 알았을 때, 부모가 보일 반응.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진짜 모습에 실망하는 부모의 얼굴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결국 아빠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그웬은 경찰인 아빠가 당황스러워하고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절망한다. 이건 마일스에게도 똑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마일스도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지 못한다. 몇 번이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려고 부모의 앞에 서지만 이내 포기해버리고 만다.
마일스와 그웬이 겪는 절망감은 이내 고독감으로 옮겨간다.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고립된 느낌을 받고 그나마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우주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이건 마일스와 그웬만 겪는 문제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처럼 무수히 많은 다중 우주에 스파이더맨이나 스파이더우먼이 존재한다면 그 모두가 겪게 되는 감정이다.
영화에는 모든 스파이더 유니버스를 총괄 관리하는 흡혈귀 스파이더맨인 미겔(목소리: 오스카 아이작)이 등장한다. 그는 모든 스파이더맨이 겪는 좌절과 고통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몸소 겪었던 당사자다. 그러니까 그는 일어나야 할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어떤 불행이 오는지를 경험한 인물로, 이후 그런 일이 벌아지지 않도록 전체 다중우주를 관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일종의 운명론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훌륭한 건, 꽤 생각할만한 문제를 관객에게 던진다는 것이다. 미겔을 비롯한 모든 스파이더맨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 당연히 일어나야 세상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스파이더맨이 그런 운명론을 따르고 있을 때, 마일스는 그 운명론에 반기를 든다. "너의 삶은 이래야 된다" 라든가 "이게 너의 한계야"라는 식의 말이 마일스에게 전달되었을 때, 마일스는 그 수많은 운명론자들 앞에서 아니라고 외친다. 자신의 삶은 내가 만들어간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한다. 운명론자들과 대결을 벌이는 마일스는 자유의지론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운명론과 자유의지론 사이를 훌륭하게 파고드는 서사
마일스의 선택은 다른 모든 스파이더맨들이 선택하지 않았던 길이다. 스파이더맨들 중 정해져 있는 운명을 바꿨을 때 세상이 파괴되거나 혼란이 생기는 것을 목격한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들이 바꾼 일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마일스의 의견에 관객들이 따라가게 된다. 그건 불행을 보지 않으려는 감정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관객은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에 관객은 어떤 것이 진짜 옳은 일인지 한참을 고민하며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의견대립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영화 속 마일스와 그웬의 부모들은 정해진 길이 있고 옳은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일스와 그웬의 입장에선 자신이 선택한 길도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확고하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길을 보고 있는 부모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녀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자유와 선택을 부모에게 주장하기는 힘든 일이다. 마치 미겔과 마일스의 의견대립처럼 부모와 자녀의 의견대립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각 인물들의 선택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마일스의 선택이 불러올 파장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다음 편에서 확인해야 한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야기에서 던지는 질문은 꽤나 묵직하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중 우주나 시간여행의 서사에선 가능하면 알고 있는 미래나 과거를 바꾸지 않아야 현재가 혼란스럽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주인공 마일스는 다른 선택을 했고 다르게 보면 안정적인 시스템에 맞서 변화를 시도하려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작화나 화면 전환 그리고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르게 나오는 배경음악도 무척 훌륭하다. 마치 만화책을 움직이는 화면으로 보는 듯한 작화는 다양한 상황에서 변주되며 몰입감을 더해준다. 경쾌하고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 흐름도 이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영화의 서사와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무척 훌륭하기 때문에 극장 관람을 추천한다. 나는 운명론자일까, 아니면 자유의지론자일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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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부대 - 밝은 화면속에서 활동하는 음지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재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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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로드 된 영상입니다! :)
실력 있지만 허세 가득한 사회부 기자 ‘임상진’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취재하지만 오보로 판명되며 정직당한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었어요. 다 저희들이 만든 수법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의 제보자가 찾아온다. 자신을 온라인 여론 조작을 주도하는 댓글부대, 일명 ‘팀알렙’의 멤버라고 소개한 제보자는 돈만 주면 진실도 거짓으로,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불법은 아니에요. 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제보,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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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시작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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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과거를 숨긴 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한 가정의 가장 ‘허치’
매일 출근을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일과 가정 모두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아들한테는 무시당하고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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