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20 07:39:38
차이콥스키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남자의 이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여자의 이름은 안토니나 밀류코바.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고 후자는 종종 동성애자인 남편에게 과하게 집착한, 천재 남성 곁에 으레 존재하기 마련인 ‘악처’ 정도로 종종 회자된다. 안토니나가 ‘천재 남편’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뒷받침하고 그의 ‘사생활’ 스캔들까지 두루 관리해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감정도 사랑보다는 집착에 훨씬 가까웠다. 여러 모로 안토니나는 동시대 관객에게 ‘교훈’을 줄 위치에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실제로 영화는 왜 지금 다시 안토니나와 그녀가 차이콥스키와 맺은 관계를 다시 조명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기괴한 관계에서 우리는 이중 위계를 거스르는 한 여인의 편집증적 의지를 엿볼 수 있고,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안토니나는 음악가를 꿈꿨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 유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시대적 한계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콥스키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남성이었기에 재능을 펼치는 데 제약도 없었다. 그저 동성애 ‘추문’을 방지해줄 아내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가 실패한 건 바로 이 역할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남편에게 바친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태양’인 차이콥스키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집착적 애착은 예술‧젠더의 위계를 거슬러 남편에게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안토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신혼 초의 안토니나가 빨간 산호 목걸이를 차고 차이콥스키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차이콥스키는 산호가 진짜냐고 묻는다. 안토니나는 부끄러운 듯 혹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일부 진짜 산호가 섞여 있다고 답한다. 차이콥스키는 ‘내 아내가 가짜 산호 목걸이를 차다니!’라고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웃어넘긴다. (차이콥스키에게는 그저 ‘가짜’이기만 했지만) 진짜와 가짜가 섞인 안토니나의 산호 목걸이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혼재임을 가늠케 한다. 그녀는 정말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대리 충족하는 수단으로 그의 아내 지위를 욕망한 걸까? 숱하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끝까지 지킨 데서 정말 행복을 느꼈을까? 상대를 절망시키고 넌덜머리 나게 하는 집착을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할 이 물음은 우리가 연인에게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뒤흔든다. 당신은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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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정신의 유효함을 되묻는 팽팽한 범죄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고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 '강인구(하정우)'. 그는 막무가내로 '혜진(추자현)'과 결혼한 후 여러 사업을 벌여 가정을 지탱하지만 이내 한계에 봉착한다. 그런 인구에게 학교 동창 '응수(현봉식)'는 한 가지 사업 아이디어를 준다. 수리남에서 버려지는 홍어를 국내로 공급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이에 곧장 수리남으로 넘어간 인구는 나름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어간다. 어느 날, '첸진(장첸)'이 이끄는 중국 삼합회와 갈등을 빚게 된 그는 한인 교회 목사 '전요환(황정민)'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안도할 틈도 없이 인구는 그의 홍어에 코카인을 숨겼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로부터 전요환이 그의 사업을 마약 거래에 이용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이에 국정원의 전요환 체포 작전에 협력하기로 한 인구는 다시금 수리남으로 향한다.
사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은 언제나 거대한 적을 마주하고 있다. 이야기의 끝이 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끝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를 두고 등장인물과 관객들이 눈치 싸움을 벌이는 그런 긴장감은 효과가 크지 않다. 오로지 결말이 이르는 과정으로 승부를 봐야 하기에 팔 한쪽을 쓸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항상 단점이지는 않다. <덩케르크>에서 영국군이 민간인의 도움을 받아 퇴각한다는 것,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결말을 안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흥미가 없다는 평을 듣지는 않는다. 핵심은 그 과정을 어떻게 그려내어 모두가 아는 결말에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윤종빈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실화를 각본을 바꾸는 재주다. 드라마는 수리남에서 마약 사업을 펼치던 조봉행 검거 작전과 작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민간인 K 씨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는데, 문자 그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좋다. "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정 대목을 길게 늘어놓다가도 한 순간에 감정을 집약시켜 분출시키는 솜씨는 (그 자체로도 극적이지만) 실화를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1화를 보자. 1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홍어다. 홍어에는 인구 아버지의 부성애가 담겨 있고, 그 가족애를 물려받은 인구 역시 홍어를 즐겨 먹는다. 더 나아가 홍어는 인구 부자가 공유하는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아내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홍어회를 먹듯이, 가족과 함께 더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겠다며 인구는 홍어를 잡으러 수리남으로 떠난다. 그래서 1화는 예상과 달리 전반적으로 꽤나 밝다. 전요환 목사의 등장이 거슬리기는 하나 인구의 꿈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사업이 더 커지고 한 층 더 잘 살 수 있게 되려는 찰나에 홍어는 절망의 원천이 된다. 홍어에서 마약이 검출되자 밑바닥에 시작해 빛을 보는 듯했던 인구의 삶은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마치 순간적인 킬패스로 상대팀의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다소 길고 지루하다고 느껴질 찰나에 1화의 결말은 곧장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게 만든다.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이 돋보이는 연출적 특징은 다른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작중 전요환이 체포될 것이라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드라마는 그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힘을 준다. '변기태(조우진)'을 비롯한 전요환의 측근들 중에 누가 국정원의 언더커버일지 시청자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인다. '데이빗(유연석)'이 화장실에서 들어오거나 핸드폰을 사용하는 장면 등은 짧은 힌트가 진짜 힌트일지 아닐지를 고민하게 만들면서 자연히 반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수리남>의 화법은 그 내용 덕분에 더 인상적이다. 특히 캐릭터들의 믿음을 다루는 대목이 흥미롭다. 인구는 노력하고 열심히 산다면 더 좋은 미래가 올 거라는 희망만을 붙잡은 채 지구 반대편 수리남으로 향했다. 이 믿음은 인구만의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인 인구 아버지를 지탱했던 힘이었고, 국정원 요원으로 임무에 충실하면 세상을 더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창호의 신념이었다. 심지어 전요환도 비틀린 방식으로나마 같은 희망을 공유한다. 그간 축적한 자본을 고스란히 재투자해 마약의 생산, 제조, 유통을 단번에 처리할 낙원은 그 믿음의 현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향한 낙관으로 가득한 믿음의 알맹이는 다르다. 특히 믿음을 실천에 옮길 수단이 분기점이다. 믿음을 현실로 불러올 때 그 수단이 될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일견 동일해 보이는 희망을 두 부류로 나누어 대비시킨다. 구체적으로 보면 인구의 믿음은 창호의 신념, 요환의 희망과는 결이 다르다. 국정원과 전요환은 기본적으로 인구를 수단적으로 이용한다. 작전을 위해 인구의 사업을 파괴하고 그의 목숨이나 처지에도 부주의했던 국정원이나 첸진과 그를 저울 위에 놓고 무게를 재던 전요환의 모습은 목적 만을 우선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아무리 돈을 최우선으로 좇는다 하더라도 죽은 친구의 가족과 기일을 먼저 챙기는 인구와의 결정적 차이다. 더 나아가 세 인물 간의 관계 변화를 설명하는 기제이다. 인구와 국정원이 결국 다시 협력하게 된 계기는 창호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인구를 한낱 장기판의 말이 아니라 파트너로 대하기로 합의한 이후부터다. 반면에 전요환은 설령 인구를 마약 사업의 파트너로 삼겠다던 말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인구에게 그가 체스판 위의 졸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한다. 마약으로 통제되고 있는 신도들의 모습,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붙잡아 두는 잔악함 때문에 인구는 끝내 설득되지 않는다. 이처럼 드라마는 믿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구와 요환의 대립뿐만 아니라 인구와 창호의 갈등도 부각해 자칫 평면적일 뻔했던 이야기의 흐름에 변주를 주는 데 성공한다.
이에 더해 서로 다른 믿음 간의 충돌이 그저 개인의 욕심과 열망의 충돌에 국한되지 않고 시대정신에 대한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례로 전요환은 자신의 교회, 자신의 종교가 마약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작중 수리남으로 향한 한국인들은 요환이나 인구처럼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목표를 기어코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이들에게 요환의 존재는 한국에서의 실패로 믿음이 약해진 세계에 침투하는 새로운 형태의 희망이다. 사업 초기에 인구가 요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의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곧장 그에게 도움을 청했듯이. 달리 말해 요환은 목표 지상주의라는 종교의 화신인 셈이며, 또 시대정신의 무용함을 맛보고도 이를 왜곡된 방식으로 반복하는 실패의 굴레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실제 사이비 종교의 작동 메커니즘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요환은 종교가 마약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인구와 요환의 갈등, 창호의 변화와 요환의 파멸은 그저 두 개인의 갈등 이상으로 읽힌다. 목표를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동행과 상생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향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일 대 일 승부로 끝이 나는 본작의 결말은 기대만큼 쾌감이 강렬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비인간적으로 통제당하는 여성과 아이들에게서 가족을 겹쳐 보며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인구에게 목사를 사칭하는 전요환이 직접 붙잡히는 이미지가 필요한 이유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수리남>의 마지막 디테일 때문에 새로운 시대정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메시지가 부정당하는 듯한 인상이 남는 것이다. 요환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인구는 동두천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의 끝은 핵심 삼인방, 인구, 요환, 창호의 이야기를 완결하는 데에 열중한다. 정작 그 결말을 가능케 한 결정적 계기인 요환 휘하 교회 신도,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행방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이 구출이 되었는지 아니면 수리남에서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예전 아버지들의 모습을 빼닮은 인구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위해 여성과 아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저 수단으로 소비되어 버린다. 영화의 장르나 실화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여성 캐릭터의 절대적 수가 부족한 것보다는 그들을 활용하는 태도가 일관성 있던 메시지의 설득력을 마지막 순간에 떨어뜨리며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렇게 윤종빈 감독과 넷플릭스의 첫 만남도 숱한 짤과 밈을 남기는 임팩트와는 별개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 채 막을 내리고 만다.
A(Acceptable, 무난함)
재미와 서스펜스, 메시지까지도 전부 잡았다. 그저 블론세이브가 찝찝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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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인연들이 떠나가기 전에 잘해주자!
시놉시스
멧은 암에 걸린 자신의 아내인 니콜을 절친한 친구인 데인과 함께 간병하고 있다. 암이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니콜은 자신의 버킷리스트들을 적는다. 6개월간의 시간이 그녀에게 남았는데 그 시간 동안 많은 목표를 이루고 딸인 몰리와 이비에게도 작별 편지를 남긴다. 멧과 니콜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오해가 있었던 걸까?
니콜에게 있어 갑작스럽게 다가온 암은 너무나도 놀랐을 것이다. 항암제를 먹어도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서 이미 말기로 발전한 니콜은 자신이 못해봤던 것들을 하나씩 해보기 시작한다. 먼저 반지의 제왕 책 다 읽기와 파란 머리로 염색하기, 퍼레이드 걸 되보기 등등의 목표들을 이루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왜 니콜이 암에 걸렸을까? 그 이유는 바로 남편인 멧과의 다툼부터 시작되었다. 멧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가는 기자 일을 했고 불륜도 저질렀지만 니콜의 부모님과 니콜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니콜 또한 뮤지컬 배우이면서 피터라는 무대 감독과 불륜을 저질렀고 노트북에 적혀있는 메일 때문에 멧에게 발각되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거칠게 다투기 시작했고 니콜은 암에 걸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멧은 사실 가족들을 먹여살리려고만 했지 직접 가족과 함께 있어본 적 없는 가장이면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니콜이 말하길 가족과 함께 있어달라는 요구도 무시하고 그저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멧이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니콜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딸인 몰리도 그런 아빠를 싫어했으며 이비가 놀다가 다쳤는데도 그렇게 보살피지 못했다.
어쩌면 니콜이 암에 걸린 건 멧이 자초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니콜이 죽고 난 후 멧은 아버지로서 사명을 다하는데 진정한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한다. 그 이후로 니콜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 위해 글로 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데인도 불쌍하기 그지없다. 사실은 니콜의 절친한 친구였음에도 멧이 니콜과 결혼하고 난 후 그저 멧에게 조언만 해주는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니콜이 암에 걸렸을 때 제일 니콜을 간병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결국 멧의 빈자리를 데인이 계속 대신해 줬는데 너무 착했고 멧에게 이용만 당한 것 같이 느껴진다.
데인은 그런 자신을 위해 자가용을 타고 사람이 드문 한적한 사막의 산으로 올라가 등산을 하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어느 중년의 여자를 만나고 그 중년의 여자도 자살도 계획해 봤고 인생이 힘들었는데 데인에게 따뜻한 수프를 건네면서 말벗이 필요하다면 전화를 달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건네준다. 어쩌면 데인은 그렇다 할 직장도 없었고 멧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혼자라는 기분은 데인도 마찬가지로 느끼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서 실화라고 하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저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보살피는 멧의 심정과 쓸쓸한 빈자리를 지키고 있는 니콜과 그 자리를 메꾸어주는 데인의 심정까지를 보여주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가족의 소중함과 지금 있는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여운을 남긴다. 떠나가면 붙잡을 수 없는 게 인연인지라 필자도 지금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지금의 인연들이 떠나가기 전에 소중히 대하자!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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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운디네>: 인어공주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면?
도시개발 전문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관광 가이드 운디네가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실연당한 후 절망한 그녀 앞에 나타난 산업 잠수사인 크리스토프로 인해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린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랑 영화 <운디네>가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에 이어 12월에 열린 유러피언 필름 어워드에서도 여자연기자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며 올해의 마지막 아트영화로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일수록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는 모티프와 배경지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일 때가 많다. 올해 11월에 개봉한 캐나다 이민자의 현실을 그린 영화 <안티고네>는 그리스 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의 딸 ‘안티고네’ 이야기를 모티프로 해서 만들어졌고, 내년 1월 개봉을 앞둔 북유럽 로맨스 영화 <블라인드>도 안데르센 동화 ‘눈의 여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런 모티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영화를 표면적으로만 감상하기 쉽다. 더구나 영화 <운디네>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감독은 문학, 예술, 사회, 역사, 정치의 영역을 넘나들며 영화를 매우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 <운디네>를 200% 즐기기 위해 영화에 대한 두 가지 맥을 짚어본다.
영화 <운디네>는 운명이라 여겼던 남자로부터 실연당한 여인 ‘운디네’ 앞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운명에 관한 드라마로 독일 ‘운디네’ 설화에 기반하고 있다. 운디네는 본디 물의 정령으로 인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 영혼을 얻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다시 물로 돌아가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지녔다.
운디네 설화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기에 여러 문학과 예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와 푸케의 중편 소설 “운디네”가 있다. 특히 독일 전후 작가로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운디네가 간다”(<삼십 세>에 수록, 문예출판사)는 영화 <운디네>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감독은 바흐만 작품에서 남성 판타지인 운디네 설화를 남자 주인공이 아닌 운디네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바흐만의 소설 속에서 배신은 남자들이 저지른다. 여성의 관점에서 이 저주를 끊는 것이 올바른 내러티브 방식이라 보았다”라며 여성의 관점을 강조했다.
영화 <운디네>에서 운디네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죽이고 물로 돌아오라는 운명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 앞에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과연 그녀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것이 <운디네>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 중 하나이다.
운디네 설화와 함께 알아두면 좋을 두 번째 감상 포인트는 1989년까지 동서로 나뉘었던 베를린의 역사이다. 베를린의 도시 개발 역사는 영화 속 박물관 투어 가이드로 일하는 운디네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언급된다. 페촐트 감독은 통일 이후 무분별한 도시 개발을 비판하며 베를린을 “자신의 역사를 계속 지워나가는 도시”로 규정한 바 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장벽은 빠르게 뜯겨져 나갔고 그 자리에 거대한 기차역과 번쩍이는 쇼핑몰이 “흉물스럽게” 들어섰다. 베를린의 과거는 신화와 동화가 살아 숨 쉬는 세계였지만 지금의 베를린은 과거를 무자비하게 지워버리는 공간으로 쉽게 옛사랑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현대적 욕망과도 오버랩된다. 따라서 동화의 세계에서 온 운디네가 현대의 베를린에서 버림받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그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 이것이 <운디네>의 영화적 긴장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아름답고 슬픈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동화적 상상력으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영화 <운디네>는 12월 24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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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더볼츠*>: 공허한 우울의 미로에서 널 구할 결심
어벤저스는 아이언맨으로부터 시작해 아이언맨으로 끝났다. 남아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인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든 어벤저스와 타노스의 핑거 스냅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CIA 국장으로 있는 발렌티나 알레그라 드 폰테인의 한마디가 인상적이다.
”어벤저스는 안 옵니다“
맞는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이 영화는 어벤저스에 대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어벤저스와 옷깃 한 번 스쳐봤을까 싶은 나머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엔드게임 이후 여러 시리즈와 영화를 개봉하며 빌드업을 쌓아온 마블의 첫 완성작이라고 볼 수 있는 썬더볼츠. 이들의 이야기는 무엇으로 시작될까.
공허함이라는 미로에 빠진 기니피그
IMDB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깔려있는 공허함이라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공허함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날 괴롭히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옐레나가 느끼는 공허함도 그러하다.
아이언 슈트와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와의 독특한 부자 관계를 가진 아이언맨, 페기 카터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속 깊이 지켰던 캡틴 아메리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로키와 얽힌 사연을 가진 토르까지. 어쩌면 이들이 겪었던 것도 일종의 공허함의 범위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어벤저스도 이러한 인간적인 문제들을 겪고 극복하며 진짜 히어로로 각성했다.옐레나를 포함해 이번 썬더볼츠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이 영화의 포인트다. 어벤저스는 각자 지닌 문제를 스스로 극복했었다. 하지만, 썬더볼츠의 구성원들은 대단한 기술 능력을 얻거나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식으로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허함에 직면하며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감정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위로한다. 옐레나를 선두로 썬더볼츠 인원들은 밥의 깊은 내면에 들어가 그를 그의 우울의 방에서 꺼내고자 애쓴다. 힘을 내야 해 따위의 위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살핀다. 거기서 같이 싸우고 같이 상처 입으며 우울의 미로에서 다 같이 나오려고 한다.
IMDB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각자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지니고 있고, 투덜거리면서 때로는 우울하다고 이야기하는 형 누나들이 두 팔 걷어 도와주는 모습이랄까. 나도 그랬었지, 너도 그랬었구나 하며 도와주는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줬던 감동과는 달리 좀 더 와닿는 감동이 아닐까 확신한다. 특히, 썬더볼츠가 우울의 미로와 방을 도장 깨기 하는 장면은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다.
위는 영화 내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다. 사실 공허함이라는 것을 주인공들만 느끼진 않을 터다. 그 주체를 마블과 마블 팬들로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하진 않다. 마블은 아이언맨부터 시작해 어벤저스 엔드게임까지 다시없을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지금의 썬더볼츠 까지, 스파이더맨을 제외하면 마블은 매 작품에서 혹평을 받았다.
관객 기대치에 못 미치는 영화로 하향곡선을 5년 이상 타왔다. 얼마 전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역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으니까.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과 비교되는 현재 위치에서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는 하는데, 팬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마블뿐만 아니라 마블 팬들도 나름 공허하지 않을까. 높아진 진입장벽은 늘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반 팬들에 대한 마블의 외연 확장은커녕 팬층 자체가 얇아졌다 과하게 해석하면, 지난 10여 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은 마블 영화를 보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을 관객들이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죽하면, 속는 셈 치고 또 본다는 말이 나올까. 더 이상 새로운 추억거리가 쌓이지 않으니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다. 이런 팬심을 아는지, 썬더볼츠의 엔딩 크레딧에선 셀프디스와도 같은 내용의 장면들을 넣어놨다.(물론, 극의 내용에 따른 극안에서의 반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완성도와 평가를 제쳐두고 마블 팬들의 마음이 어떤지 감독은 공감하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다.IMDB
이런 측면에서, 썬더볼츠는 마블과 팬들에게 은유적인 영화다. 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옐레나와 기니피그 장면이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는 등장인물들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자 마블과 마블 팬들까지 투영한 장치로 보였다.
썬더볼츠 주인공 각자가 결핍과 공허라는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마블 역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멤돌 뿐이며. 새로운 마블을 관람한 팬들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옐레나에 의해 실험실 미로에 갇힌 기니피그가 구출되는 장면에서는 소박한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옐레나를 선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썬더볼츠가 결성되는 모습을 통해 이 영화, 썬더볼츠가 어벤저스라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미로에서 마블과 마블 팬들을 꺼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독의 소박한 희망 말이다.
마블이 지금까지 실험해온 엔드게임 이후의 여러 영화들처럼 그저 실험적인 시리즈로만은 남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미로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했는지 아닌지는 온전히 관객들이 평가하겠지만.마블, 부활했나?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썬더볼츠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지만, 높아진 진입장벽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계속 심해질 거다. 이제 마블 영화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몇몇 캐릭터의 쓰임이 아쉽다. 태스크마스터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블랙 위도우>편에 처음 등장하며 나타샤 로마노프와 대등한 수준으로 그려졌었는데, 극 초반에 너무 쉽게 사망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캐릭터를 등장시킨 이유를 잘 모르겠다.IMDB다음은 레드 가디언이다. 시종일관 영화의 분위기 메이커로 그려진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따지면 드렉스와 비슷한 인물이다. 힘도 세고, 나름대로 개그를 시전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썬더볼츠에서 계속 ”위 아 썬더볼츠“ 라고 힘주어 말하는 역할과 일부 코믹한 내용을 빼면 역시 어떤 맥락에서 이 캐릭터를 이해해야 할지 갸우뚱하게 된다.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블랙 위도우>에 등장했고 거기서 옐레나와의 관계는 다 설명했으니까 이 캐릭터는 이 정도로 사용해도 된다는 건가 싶었다.
IMDB
고스트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태스크마스터 말고 고스트가 극 초반부에 사망했다고 한들, 영화의 큰 흐름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태스크마스터 만큼 고스트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변을 내놓기가 어려운 애매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센트리. 밥이 센트리로 잘못 각성하는 부분에서 센트리 능력에 대한 설명이 부실했다.
검은색과 어둠을 특징으로 하는 센트리라서 그런 능력이 나온 것이라는 추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정도로 퉁치려고 한 거라면 감독의 섬세함이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밥의 가정불화 문제가 타노스 이상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센트리로 각성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게 맞나 싶다.
이런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소소하게 재미있는 장면들도 많았다.
특히, 여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극 초반 옐레나의 실험실 액션 장면은 누구나 알 수 있듯 올드보이의 장도리씬을 오마주 한 것으로 보인다. 마블에서 올드보이를 오마주 했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버키가 오토바이를 타고 유도탄득 한 손에 들고 질주하는 장면은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도 했다.
IMDB
모처럼 버키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그리고 스타크 타워를 향해 운전하는 버키에게 레드 가디언이 계획이 있냐고 묻는 순간에 타고 있는 차량을 냅다 건물 입구로 박아버리는 장면은 다크나이트 조커의 스쿨버스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짭-캡틴 아메리카 존 워커 전투씬의 한 장면은 스티브 로저스와 윈터 솔저가 도심에서 싸우는 장면을 오마주 했고. 센트리가 총알을 막는 장면에서는 매트릭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총알 멈추는 장면이야 많이 재생산된 거라서 이제는 오마주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스타크 타워에서 엘리에베이터로 움직이는 장면은 어벤저스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상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번 작품만으로는 과거의 추억과 영광을 원하는 마블을 구하기엔 힘에 부쳐 보인다. 그리고 마블 팬들을 새로운 챕터로 확실하게 이끌어 갈지도 확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블이 조금은 정신 차린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썬더볼츠이자 새로운 어벤저스가 어떤 이야기를 그려 나갈지 기대되는 작품이긴 하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기존 히어로 영화답지 않은 서사와 연출이 돋보인 영화였다. 속 시원한 재미는 없을지는 몰라도 깨알 재미는 충분하니 극장에서 보기에는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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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보다 느린 사람을 위한 사랑법
6★/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분실물: 어제’. 얼굴이 벌겋게 탄 한 남자가 경찰서에 들어온다. 부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신고 양식에 분실물을 적는다. 그가 잃어버린 건 ‘어제’다. 말 그대로다. 그는 어제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얼굴이 왜 발갛게 탔는지, 오늘이 왜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인지 알 길이 없다. 어제를 잃어버렸다는 남자도, 그를 바라보는 경찰도 아리송한 표정이다. 더 심각한 건 ‘어제’의 중요성이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하지메는 잘생긴 얼굴로 늘 여자가 먼저 다가오지만 얼마 못 가 결별을 통보받는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 그에게 운명처럼 한 여자가 다가온다.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가수 지망생 사쿠라코다. 아름다운 외모에 감미로운 목소리,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운명적인 이끌림. 하지메가 잃어버린 일요일은 그가 사쿠라코와 데이트하며 둘의 관계를 진지하게 발전시키기로 한 날이었다. 어쩌면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런 둘을 지켜보는 또 다른 여자, 레이카가 있다.
이쯤에서 이 영화가 스릴러, 범죄물이 아니라는 점을 일러둬야겠다. 〈1초 앞, 1초 뒤〉는 로맨스, 멜로, 코미디, 판타지 영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쟁취하기 위한 범죄, 끈적이다 못해 질척거리는 치정은 이 영화에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 멜로, 코미디 특유의 엉뚱한 웃음으로 가득하다(혹 낯설더라도 초반 30분만 넘기면 금세 적응된다!).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기막힌 상상력을 갖춘 영화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키워드는 바로 시간이다. 하지메는 늘 남들보다 조금 빨랐다. 이런 식이다. 친구들이 시험지에 이름을 쓰는 동안 6번 문제를 풀고 있고, 재밌는 연극을 봐도 남들보다 몇 초 빨리 웃는다. 우체국에서 집배원으로 일하다 과속을 하도 많이 해서 면허가 정지돼 내근직으로 바뀌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안타깝게도 그의 빠른 속도는 연애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늘 남들보다 빨라서 그런지, 밝고 쾌활해 보이는 하지메는 어딘가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과는 달리 늘 여유 있고 꿈 많은 사쿠라코에게 그가 온 마음을 빼앗겼다는 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레이카는 정반대다. 그녀는 늘 남들보다 조금 느렸다. 친구들이 시험지를 열심히 푸는 동안 겨우 이름을 쓰고, 재밌는 연극을 봐도 남들보다 몇 초 늦게 웃는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만 느릿한 동작 때문에 움직이는 대상은 찍지 못한다. 하지메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의 느린 속도 역시 연애에서 걸림돌이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마음을 전하지 못했고, 연락이 끊긴 그 남자를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는 레이카가 사랑해온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레이카는 하지메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하지만 하지메는 어릴 때 만났던 레이카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여러 여자와 짧게만 사랑하는 데 지친 남자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에게 말도 못 붙이는 여자.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 답은 시간에 있다. 하지메와 레이카는 남들과, 무엇보다 서로와 다른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한 번도 같은 시간을 살아간 적이 없다. 하지메는 늘 빠르게 앞으로 나갔고, 레이카는 종종 길을 잃으며 하지메를 좇았다.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하지메의 시간이 멈추고, 레이카의 시간만 흐르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남들보다 느린 사람들이 손해 보며 살아온 시간이 조금씩 모여 하루(24시간)가 되면 세상이 멈춘다. 그러나 모두의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니다. 레이카, 즉 남들보다 느리게 산 사람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선물처럼 주어진 이 시간에 레이카는 많은 것을 바로잡는다. 사기꾼 사쿠라코를 하지메에게서 떼어놓고, 어린 시절의 실현되지 못한 약속을 현실화한다. 레이카는 자신에게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하지메를 위해 쓴다. 하지메를 아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기분 좋은 몽글몽글함이 솟아난다.
하지메와 레이카가 만날 수 있도록 도착한 선물 같은 시간! 배려심이 가득 담긴 상상력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흐르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시간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시차’가 생긴다. 하지메와 레이카가 그러했듯 앞에 있는 사람과 뒤에 있는 사람이 나뉘고, 둘은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시차는 사랑에만 있지 않다. 영화의 상상력은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 무한히 적용할 수 있다. 느린 사람을 뒤에 남겨 두지 않고, 그들이 마음과 역량을 온전히 쓸 수 있도록 주어지는 시간의 멈춤은 드라마, 멜로, 코미디뿐 아니라 SF, 스릴러, 액션, 공포에도 쓰일 수 있다. 사랑뿐 아니라 우정, 연대, 저항, 평화의 이야기에도 활용 가능하다. 이 모든 장르와 이야기에서도, 느린 자를 위한 시간의 멈춤이라는 상상력은 엉뚱하고 따뜻한 〈1초 앞, 1초 뒤〉에서만큼이나 어울릴 것이다. 느린 사람을 위한 사랑법을 모두의 모든 것에까지 확장한다면? 〈1초 앞, 1초 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상상력을 품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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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분동안 숨 못쉬게 질문하는 마스터피스
마음이 찝찝하다. 왜? 방금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가격이 1000원이라 쌌기 때문에 내면의 변명을 대고 먹었다. 근데 맛을 보고 난 한 중간쯤에 '아놔'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냐면 난 오늘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었기 때문이다. 500원이라는 가격에 혹해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렸다. 밑도 끝도 없이 당뇨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건강검진에서 당뇨의 ㄷ자도 볼 수 없었지만 유달리 단 걸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화를 부를 것 같다.
근데 사실 이 불안감은 익숙하다. 왜냐하면 밤에 자기 전에 뭔가를 먹는 습성을 고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또 안 먹으면 뭔가를 입에 넣기 전까지 잠이 안 온다. 여러모로 나 자신에게 지는 듯한 나. 매일 밤이 될 때마다 작은 불안감이 든다. 이러다가 사고를 치면 어떡하지? 진짜 당뇨에 걸리면 어째? 강박증이라는 트리거가 의심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찜찜해진다. 어느덧 여름이다. 2022년이 되고 <매그놀리아>에 대해 쓰며 나 자신에게 뭔가 말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다. 콜린성 두드러기 때문에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같이 스테디 한 영화는 종종 생각이 난다. '올 때 XXX'라는 유명한 밈이 있지 않나. 그 아이스크림의 제품명처럼 이 영화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현대인의 공포로 자리 잡을 것 같다. 또 정식 개봉이 처음으로 이뤄진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맛집이 될 것이다. 아마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머릿속에 서늘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영화 정말 무섭고,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텅 비어버린 내면을 가진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 누구야? 극장에서 무슨 영화 볼 거야?"
끔찍하고 찝찝한 살인사건
베테랑 형사 타카베는 한 사건이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다.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인했다. 그런데 그 살인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목에 X자를 그려 끔찍하게 살인했다. 경악하는 타카베. 첫 번째 피해자는 매춘부였다. 옷이 발가벗겨진 채로 피투성이인 시체를 바라보는 타카베. 벌거벗겨진 채로 도망갔다는 부사수의 말에 호텔 구석구석을 찾아보기로 한다. 소화전 문을 연 타카베. 가해자는 다 벗은 채로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 심문을 시작하는 타카베. 이 살인사건들이 더 끔찍한 건 가해자들의 기억이 죄다 사라졌다는 점이다. 왜 죽였는지, 피해자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잃어버린 범인들. 잔혹했던 범죄 수법이었는데 이걸 기억 못 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근데 이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피해자들이 만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우연처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점이다.
수사를 지속하는 타카베를 뒤로하고 카메라는 어느 해변으로 이동한다.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남자. 남자는 26살의 교사다. 교사인 남자는 뭔가 창백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교사에게 남자가 말을 건다. "오늘이 며칠이지?" "2월 26일이요." 교사와 남자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건네는 남자. 교사는 이끌리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대답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도와줘. 부탁이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교사는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서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남자의 이름이 마미야인 건 어렵지 않게 알았지만 남자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한 교사. 교사는 마미야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라고 답한다. 마미야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난 바다에 있던 적이 없다"라고 답한다.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라고 답하는 마미야. 금세 이야기의 화두는 교사의 아내로 향한다. 아내는 하는 일 없는 전업주부라고 답한 교사. 그 말을 듣고, 마미야는 라이터를 켠다. 그리고 말한다. "부인 이야기 더 해봐." 교사는 초점을 잃었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됐다. 가해자는 교사였다.
형사 타카베
타카베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아내가 있다. 아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아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카베는 아내를 사랑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집에 올 때마다 돌아가는 빈 탈수기는 아무렇지 않다. 쉬운 길도 잃어버리는 것도 별일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겪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타카베. 타카베는 친구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하나, 둘 씩 파헤쳐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신 왔다 간 듯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감정은 살기다. 이 영화는 살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연쇄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압도적인 서스펜스를 서서히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 전을 유지한다. 일단 첫 번째,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다카베의 아내가 어느 병원에서 책을 의사 앞에 낭독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발가벗고 있는 여자를 파이프로 무차별 폭행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물이 쏴-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귀염 뽀짝 한 노래가 들린다. 세상 졸려 보이는 타카베의 표정과 함께 'CURE'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배경음악과 장면이 대조되는 연출 방식은 거의 정석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25년 전 영화의 연출 방식이 지금까지 먹힌다는 걸 생각하면 이 영화가 가진 놀라운 지점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귀염 뽀짝 한 삽입곡을 지나고 나면 처음 가해자가 카메라가 잡힌다. 이 가해자가 처음 제시된 이후부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대사 작문이나 장소 설정, 연기 디렉팅까지 거의 신기가 들린듯한 탁월한 연출 능력을 선보인다. 별 것 아닌 거 같은 이미지에서 만드는 기괴함이라는 정서가 영화 전반을 이끄는데, 이것은 영화를 단순히 범인이 사이코패스여서 오는 공포감으로만 영화가 구성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처음 가해자는 옥내 소화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체였다. 타카베가 취조하는 장면이다. 이것도 타카베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심지어 모니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화면에 갇힌 가해자의 모습이 비친다. 확실히 답답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는 답변과 잘 어울린다. 사실 간단한 비유다. '관객이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직간접적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없다' 혹은 '타카베 역시 구체적인 무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메시지와 장면 구성이 이질적이지 않게, 꼼꼼하게 설계했다.
이는 다음 장면과도 이어진다. 바다에서 무언가를 그리는 교사. 해안가에서 그렇게 멍-때리고 있는데, 마미야가 교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모래사장 안에서 먼발치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냥 바다에서 사람들이 하는 대화다. 마미야는 교사에게 먼저 말을 건다. "여기가 어디야?" "XX 해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마미야가 사라진다. 다시 또 먼발치에서 카메라가 교사를 찍는다. 다시 등장하는 마미야. "오늘 며칠이지?" "여긴 어디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근데 더 이상한 건 이 질의를 하는 인물들의 자세한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얼핏 보면 바다에서 남자 둘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게 전부라 이상할 게 없다. 이상한 건 단 하나뿐이다. 마미야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은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게 쓱 묘사된다. 얼마나 쓱 묘사되냐면, 살인이 벌어지고 나서야 관객이 '아 이래서 이랬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런 상황을 차곡차곡 쌓아올라 후반부까지 이야기가 점점 폭주하게끔 만든다. 행동 하나, 하나 단적으로 잘라서 보면 ? 싶은 순간을 점점 차곡차곡 누적해서 광기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은 이 영화가 호러 분위기를 내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일상 속에 내재되어있는 두려움을 노린, 구로사와 기요시의 창의적인 발상이 뒷받침됐다고 볼 수 있다. 신기한 영화다. 조그마한 균열이 모여 목을 조르는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문장만 보면 러닝타임이 한 네 시간쯤 되려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11분이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 상영시간 안에 모든 에너지를 집약시켜 관객을 홀리게 만든다. 아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영화의 신에 홀려 연기 디렉팅, 청각 효과, 시각효과, 장소 섭외까지 저세상의 명작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무섭고 두려운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와 이거 미쳤다'라는 생각과 함께 숨을 굉장히 오랜만에 쉰다는 느낌이었다. 초중반부에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는 그냥 아예 눈을 뗄 틈도 없이 집중해서 봤다. 이는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몰입감이 왜 뛰어날까? 내가 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 역시 내면의 한 구석에게 정복당해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나 역시 살아오며 내면에 품고 있는 분노가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잠식당해서 끔찍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 했었다. 당연히 영화는 영화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는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일상적인 방식으로 일반적인 호러영화의 문법을 탈피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내면에 갖고 있던 분노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면이 주는 공포감보다 내면의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이 두려움이 영화를 이끌다 보니 평범한 일상이 제시돼도 너무 무섭다. '너 이거 무섭지?'가 아니다. '네가 무서워하는 거 알아서 일일이 말해라'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몰입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 단점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일본 송강호
글쓴이가 일본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야쿠쇼 코지 이 아저씨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바벨>에서도 본 적 있다. <세 번째 살인>이나 <도쿄 소나타>에서도 본 적 있다. 뭔가 일본의 거장들 픽을 몇 번 받으신 게 뭐랄까 우리나라의 송강호 배우가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느낌은 연기가 엄청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송강호 배우의 장점은 감정연기가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사도>에서 영조 역을 맡으며 "미쳐-서~"라고 톤을 변조하는 송강호 배우의 열연은 창의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연기였다. 이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면 긴장감이 한번 터지는 부분이 있다. 아마 영화를 본 후라면 잊히지 않을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때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압권이다. 물론 이 하이라이트 신의 연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톤을 왔다 갔다 하는 참는 연기가 극의 생기를 부여한다.
또 하기와라 마사토의 연기는 '돌아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울린다. 이 인물을 연기하는 난이도는 아마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텅 비어버린 내면이라고 하는 게 말이 쉬운 거지 사실 상상이 그렇게 잘 되는 모습은 아니다. 근데 글쓴이는 이 '텅 비었다'라는 속성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뭐 자기 이름도 모를 수 있고 얼굴도 모를 수 있다. 근데 이 사람은 최면으로 살인을 교사한 연쇄살인마다. 아닌 거다. 텅 빈 인물이 살인을 교사한다? 나머지는 다 비어있어도 내면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 가져야 할 연기 준비물이 있다. 순수한 척하는 연기다. 어찌 보면 이중적인 이 역할을 내면의 광기로 잘 소화해낸다. 이 두 배우의 연기가 극의 배경이 되어 전반적인 서스펜스를 이끈다.
마스터피스가 어울려
우리는 호러영화의 걸작 두 작품을 알고 있다. 바로 <곡성>과 <유전>이다. 전자 <곡성>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불행에 스며든 인간의 발악을 다뤘다. 이 발버둥은 참 여러모로 관객의 기를 빨아버린다. 뭐가 옳지? 선택을 고민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곡성>을 본 분이라면 이 영화의 엔딩을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난 아니라고 믿었지만 사실 미끼를 물었다는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는 <큐어>와 <곡성>이 오컬트 소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일상 속, 내면의 두려움을 다뤘다는 점에서 <곡성>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을 딱 골라서 유효타를 쳤다.
또한 이 <큐어>는 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을 이끄는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유전>역시 <큐어>의 후배 격인 영화다. <유전>의 공포 중 하나는 예상이 간다는 점이다. '설마 이렇게 되는 거 아니겠지?' 생각하면 바로 그게 이뤄진다. 근데 그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클리셰를 부수며 이뤄진다. 즉 운명론적인 관점이 작용한다. 이 <큐어>의 공포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뭔가 똑 부러지고 똘똘한다고 해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 다 좋다. 열심히 살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피할 수 있었냐? 아니다. 이는 인물들이 삶의 선택지를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선택지를 고른다는 건 당연히 단점이 딸려온다. 그러니까 이 단점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은 어찌 보면 인간에게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쓴 바와 같이 <유전>의 공포와 일맥상통한다. 아마 <유전>을 좋아하셨던 분 역시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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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최신개봉영화(경관의 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 피아니스트, 원샷)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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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피아니스트 #원샷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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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간 2.0>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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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500일의 썸머> 2021년 특별 예고편
운명적 사랑을 믿는 남자 ‘톰’
모든 것이 특별한 여자 ‘썸머’에 완전히 빠졌다.
사랑은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썸머’
친구인 듯 연인 같은 ‘톰’과의 부담 없는 썸이 즐겁다.
“저기… 우리는 무슨 관계야?”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도 잠시
두 사람에게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는데…
“우리 모두의 단짠단짠 연애담!”
설레는 1일부터 씁쓸한 500일까지
서로 다른 남녀의 극사실주의 하트시그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