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20 07:39:38
차이콥스키가 결코 떨쳐내지 못할 이름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남자의 이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여자의 이름은 안토니나 밀류코바. 주지하다시피 전자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음악가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고 후자는 종종 동성애자인 남편에게 과하게 집착한, 천재 남성 곁에 으레 존재하기 마련인 ‘악처’ 정도로 종종 회자된다. 안토니나가 ‘천재 남편’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뒷받침하고 그의 ‘사생활’ 스캔들까지 두루 관리해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감정도 사랑보다는 집착에 훨씬 가까웠다. 여러 모로 안토니나는 동시대 관객에게 ‘교훈’을 줄 위치에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실제로 영화는 왜 지금 다시 안토니나와 그녀가 차이콥스키와 맺은 관계를 다시 조명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기괴한 관계에서 우리는 이중 위계를 거스르는 한 여인의 편집증적 의지를 엿볼 수 있고,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안토니나는 음악가를 꿈꿨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 유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능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시대적 한계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콥스키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남성이었기에 재능을 펼치는 데 제약도 없었다. 그저 동성애 ‘추문’을 방지해줄 아내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가의 아내’가 된 안토니나가 실패한 건 바로 이 역할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이 남편에게 바친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태양’인 차이콥스키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집착적 애착은 예술‧젠더의 위계를 거슬러 남편에게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안토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신혼 초의 안토니나가 빨간 산호 목걸이를 차고 차이콥스키와 함께 길을 걷는 장면이 나온다. 차이콥스키는 산호가 진짜냐고 묻는다. 안토니나는 부끄러운 듯 혹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일부 진짜 산호가 섞여 있다고 답한다. 차이콥스키는 ‘내 아내가 가짜 산호 목걸이를 차다니!’라고 혀를 차며 마찬가지로 웃어넘긴다. (차이콥스키에게는 그저 ‘가짜’이기만 했지만) 진짜와 가짜가 섞인 안토니나의 산호 목걸이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혼재임을 가늠케 한다. 그녀는 정말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꿈을 대리 충족하는 수단으로 그의 아내 지위를 욕망한 걸까? 숱하게 손가락질받으면서도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끝까지 지킨 데서 정말 행복을 느꼈을까? 상대를 절망시키고 넌덜머리 나게 하는 집착을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할 이 물음은 우리가 연인에게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뒤흔든다. 당신은 정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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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펜서’라는 미래
민주적 제도로 선출되지 않은 근현대 국가의 왕족 중 다이애나 스펜서만큼 전 세계적 이목을 끈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81년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1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두 명의 아들을 낳고 1996년 이혼한 그녀는, 이혼 후 1년 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외도, 왕가 사람들과의 불화, 비극적 죽음 등 다이애나 스펜서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왕실을 둘러싼 권위와 절제라는 암막을 뚫고 나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왕실의 고상함·비밀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다정함·활력·봉사활동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쨌든 그녀에겐 ‘왕실의 의무’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스펜서〉는 왕실의 권위에 짓눌려 질식해가는 다이애나 스펜서가 자신을 되찾아나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왕실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한 별장이다. 별장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별장에 들어갈 때부터 그렇다. 여왕을 포함한 모든 이는 별장 입구에서 몸무게를 재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으며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는지를 ‘1.4kg 증량’으로 추후에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다이애나에겐 누군가의 ‘위트’로 시작된 이 ‘전통’이 버겁기만 하다. 매 식사에 입을 옷이 정해져 있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보고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왕실의 의무, 권위, 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모든 일에 그녀는 숨이 막힌다.
다이애나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할수록, 그녀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사슬도 더 강해진다.* 그리고 끝내 다이애나가 ‘미쳤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다. ‘미쳤다’라는 혐의는 통제되지 않는 여성을 굴복‧소외시키는 가장 손쉽고 강력한 방법이다. 그녀가 왕실의 권위와 의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해왔던 모든 저항과 이로 인한 균열이 광기의 징후와 그 파괴적 결과물로 독해되기 시작한다. 다이애나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 8세에 의해 간통‧근친상간 혐의를 받고 처형된 앤 불린의 환영을 마주하는 장면도 이 연장에 있다. 앤 불린의 환영은 다이애나에게 왕실의 의도를 체현하지 못하는 여자는 실제적 혹은 상징적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아왔음을 일깨워준다. 다이애나의 첫째 아들 윌리엄의 말(“모두를 위해 잠깐 마음을 꺼줘”)도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어린이에서 소년으로 성장 중인 그는 어머니가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다이애나에게 ‘마음을 끄고’ 자신의 곁에 머물러달라고 애원한다.
다이애나가 윌리엄의 요청에 따라 마음을 끄고 왕실의 질서에 굴복해야만 할까? 그때 다시금 앤 불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앤 불린의 환영은 다이애나에게 도망치라고 말한다. 아들이자 왕자인 윌리엄은 ‘마음을 끄고’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왕비인 동시에 자기 의지를 가진 여성이었던 앤 불린은 도망가라고 조언한다. 연대하는 자의 목소리가 피를 나눈 자의 목소리보다 강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앤 불린과의 조우 이후, 다이애나가 춤을 추는 장면, 자전거를 타는 장면, 어딘가를 향해 뛰는 장면이 뒤따른다. 춤, 자전거, 달리기는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위다. 움직이는 자는 어딘가에 묶여 있을 수 없다. 다이애나가 그러했듯이.
영화는 사슬을 자르고 나온 다이애나의 움직임이 어디로 귀결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그녀가 내면의 죽음을 거부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그 큰 용기 덕에 어떤 가능성을 얻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 가능성의 크기는 그녀가 두 아들을 위해 들른 햄버거 가게 직원에게 자신을 ‘다이애나’가 아닌 ‘스펜서’로 소개하는 장면에서 가늠할 수 있다.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아닌 자기 내면에 솔직한 ‘스펜서’가 품은 가능성의 크기 말이다.
유폐된 과거‧현재로부터 벗어나 ‘스펜서’라는 미래로 나아가는 그녀의 여정이 불의의 사고로 너무 짧게 끝나버렸다는 게 아쉽다. 나는 영향력 있는 실존 인물이었던 스펜서에게 어떤 공과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스펜서가 왕실의 권위‧품위와 여성 혹은 전통과 여성이 맺는 관계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의 영역을 극적으로 넓혀줬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펜서의 삶을 담은 책 《나, 다이애나의 진실》에 나오듯, 그녀는 “새로운 시대의 윤리”를 열었다. 여전히 강력한 권위와 전통의 질곡 속에서, 많은 사람이 다이애나가 스펜서로 나아가는 과정의 감동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감독이 다이애나의 고통을 어떻게 조명할지 많이 고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영화에는 다이애나가 왕실 구성원과 있는 자리에서 거북함을 느끼는 장면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대신 홀로 있을 때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다이애나의 표정과 감정을 그만큼 밀착하여 담는다. 얼굴 클로즈업 장면마다 절망과 고독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영화를 본 후, 기자 출신의 작가 앤드루 모튼이 쓴 《나, 다이애나의 진실》을 읽었다. 다이애나가 책을 낸다는 걸 왕실이 알아서는 안 됐기에 간접 인터뷰, 비대면 인터뷰, 서신 교환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비밀리에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다이애나의 삶을 포괄적·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만, 시종일관 다이애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쓰인 책이어서 이 책만으로 그녀의 성취와 그 위상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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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로 시작되는 괴기한 컷들의 나열, <롱레그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출처 : CJ CGV
30년간 계속된 일가족 연쇄 살인 사건.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생일이 14일이라는 것과
'롱레그스'라는 서명이 적힌 암호 카드뿐.
영원히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에 남다른 능력의 FBI 요원 '리'가 투입되고
지금껏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암호를 해석하는데...
모든 프레임에 악마의 단서가 심어져 있는 지난 10년간 가장 무서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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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미스터리 중독자답게 <롱레그스>는 개봉 전부터 꽤나 기대하고 있던 영화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많이 감상하고 리뷰하게 되면서 생긴 신념 아닌 신념이 있는데, 바로 ㅡ 기대할수록 기대를 반감하게 되는 작품을 만나게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이런 느낌의 포스터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롱레그스> 또한, 내가 딱히 선호하지 않는 '악마' 소재를 중점으로 마케팅하고 있었기에, 포스터 자체의 느낌은 너무나도 내 스타일인 세련된 호러처럼 보였음에도 스릴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믹스된 영화가 나온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감상해야지, 라고 마음 먹었다. 다시 말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의미 없는 '이렇게 하면 무섭겠지?'라는 가벼운 의도로 디자인된 컷들과 근본적이고 일차원적인 불쾌감을 일으키는 사운드로만 공포감을 이끌어가는 선택은 생각보다 더욱 실망이었다. 그럼에도 여타 작품들에 비해 확실히 인상 깊었던 부분들이 있어,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포인트1. 미장센
출처 : CJ CGV
위 장면들은 모두 영화 초반, 주인공 '리 하커'가 모종의 사건을 해결하고 능력을 인정 받은 직후 '롱레그스' 사건에 투입되면서 나오는 컷들이다. 정제되고 차분한 톤에 꽉 찬 색감, 프레임 안에서 완벽하게 배치된 사물이 매우 아름다웠다. 인물의 무빙과 자세 또한 조화로웠다. 특히나 첫번째 장면에서는 숫자가 적힌 메모의 위치에 맞추어 증거물들을 정리하는데, 주인공이 사건에 몰입하여 시간이 경과되는 몽타주 시퀀스를 완벽하게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처럼 위 컷들이 마음에 든다면...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겠다.
놀랍게도 정말 딱! 저 두 컷만 그렇다.
그래서 대표 스틸컷으로 홍보된 걸까? 나머지 장면들은 거의 모두 애매한 인물샷과 롱샷으로 이루어진다.
출처 : CJ CGV
또 다른 특징으로는 4:3 비율과 16:9 비율이 적절하게 섞여, 극중 각기 다른 시점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 있다. 이 부분은 관람하면서 딱히 거슬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레트로한 호러 장르를 살리기에 매력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4:3 비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었다.
첫 번째 스틸컷을 자세히 보면 각 모서리들이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카메라의 뷰파인더 모양 같기도 한 이 프레임은 극중 리 하커가 FBI 내에서 잠재적인 능력을 평가 받는 특이한 테스트를 진행할 때 나온 화면과 같은 모양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해당 그래픽이 주요하게 사용되어 나에게 이미지가 각인 되어 있었고, 심지어 테스트를 받는 리 하커가 빔 프로젝터로 송출되는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의 구도가 관객이 영화 스크린을 바라보는 모습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어? 이거 오프닝이 떠오르네? 중요한 장면인가보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고 해당 장면도 스토리 진행을 위한 개연성 부여일 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도 살짝 김이 샜다.
포인트2. '롱레그스'의 의미
제목을 장식하는 키워드일수록 의미 없는 단어는 없기 마련이다. 감독의 마음이란 그렇다. '롱레그스'는 극을 관통하는 빌런이자, 오프닝에서 위압감을 조성하는 의문의 등장인물로 나오며, 대사로도 언급된다. 심지어 '롱레그스'의 얼굴을 오프닝 시퀀스의 점프 스케어로 활용하여 트랜지션 되고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이 정도로 중요한 역할들이 부여된 '롱레그스'라는 키워드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로 뻗어 나갈까 기대가 됐다. 그러나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큰 의미는 없다고 한다. 그저 단어가 흥미롭고 어감이 좋아서, 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다시금 김이 샜다. 아, 이 감독님 그저 괴기스러운 이미지의 향연이 좋을 뿐 어떠한 깊은 사유에서 은은한 기괴함이 연출될 수 있는지 크게 고민하지 않으시고 작품을 만들었다는 걸 확신했다.
'롱레그스' 캐릭터의 시그니처 또한 배우의 개인적인 연구에서 도출되었다고 한다. 아, 여기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력은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작년 상반기에 관람했던 <드림 시나리오>에서도 독특한 연기력과 캐릭터를 소화하는 능력이 돋보였던 배우였기에 <롱레그스>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궁금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감상했고,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검색하던 도중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아, 여기서 니콜라스 케이지 나왔었지? 그럼 대체 누구로?' 기존에 정착된 배우의 이미지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연기력으로 롱레그스를 소화했음은 아무런 여지 없이 인정한다.
다시 돌아와서, '롱레그스'라는 캐릭터의 기묘함이 유지되는 데에는 그의 제스처, 목소리 톤, 반복적인 말버릇 등이 있는데 이 모든 요소들이 배우의 개인적인 연구와 도전정신에서 구축되었다는 사실 ㅡ 특히 배우의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 본인을 깜짝 놀래키기 위해 사용하셨던 특징들에 영감 받았다고 한다 ㅡ 은 감독이 직접 탄생시킨 '롱레그스' 고유의 서사가 없을 거라는 추측에 힘을 더 실어줬기에 배우 개인에게는 감탄하게 되면서 작품 전체에는 실망하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포인트3. 성경 구절
출처 : CJ CGV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에서 성경 속 설화나 특정 구절을 인용하는 연출 방식을 매우 좋아한다. 인간의 역사 속 깊은 순간부터 함께 해 왔고, 커다란 기둥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인간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담아내는 '영화'가 그러한 요소를 활용할 수록 풍부하고 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롱레그스> 또한 악마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성경이 안 나올 수가 없었으나, 특히 아래와 같은 구절을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And I stood upon the sand of the sea, and saw a beast rise up out of the sea,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upon his horns ten crowns, and upon his heads the name of blasphemy.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요한계시록 13장 1절
: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적그리스도(국가권력)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선지자(종교권력)이며, 이적을 행하는 영적능력을 사탄에게 부여 받는다. 타락한 종교권력인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숭배하게 만든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게 만든다. 두 짐승은 동맹 관계에 있다고 추론된다. 또한, 둘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로 연합전선을 펼친다. ... 이마에 있는 참람된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증오심을 나타낸다.
나는 믿고 있는 종교도 없거니와,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어서 알음알음 검색을 통해, 여러 매체를 통해, 혹은 지인을 통해 궁금한 점이 생기면 연관된 내용과 의미를 찾아보고는 한다. 위 내용 또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롱레그스>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상징 이미지와 맞아 떨어지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영화에서는 역삼각형의 숫자 6이 3번 쓰여 있는 그림이 살인 사건의 해결을 이끄는 근거로서 제시된다.
보통 서구권에서 불길함을 의미하고, 악마의 숫자로 일컬어지는 '6'은 악마/사탄, 적그리스도(예수 반대파), 거짓선지자를 의미하는 숫자 '666'으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 내내 인용되는 '요한계시록'이 갖는 의미와 연관 짓는다면 말 그대로 '악마' 그 자체의 명을 받아 살인을 행하는 '롱레그스'(거짓선지자), 그리고 롱레그스의 명을 다시금 받아 인형을 전달하고 살인을 행했던 '리의 엄마'(적그리스도). 이 세 인물이 모여 미제로 이어지던 살인 사건이 완전해졌다고 생각한다면, 위 문양을 통해 리 하커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사건의 실마리를 드디어 풀어 나가게 되었다는 개연성이 완성되기는 한다.
따라서, 각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그들의 실질적 위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흥미로울듯 하다.
You're dirty and sweet, oh yeah
넌 더럽고 달콤해
Well you're slim and you're weak
좋아 넌 날씬하고 가녀리지
You've got the teeth of the hydra upon you
넌 히드라의 이를 가졌지
You're dirty sweet and you're my girl
넌 음란한 달콤함 그래서 내 여자야<롱레그스>의 시작은 위 가사를 인용한 장면으로, 끝은 실제 노래가 흘러 나오며 마무리된다.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톤이 이 노래로 설정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성경 구절로 해석한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어쩌면 이 노래의 화자는 청자를 보살피고 끔찍이 여기는 '위'에 위치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악마' 그 자체의 입장에서 영화가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아랫층'의 사람, 땅보다 밑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인물, 적그리스도, '리의 엄마'로서 살인 사건이 진행되었다...라는 스토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석해보았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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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야"
씨네랩으로부터 언론배급시사회를 초청받아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개봉 전 <웬디>를 관람하였다.
피터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6월 30일에 개봉한 영화 <웬디>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인 '피터'가 아닌 '웬디'의 시선으로 바라본 '피터팬'을 그려낸 작품이다.
<웬디>의 감독 벤 자이틀린은 어린 시절부터 재미와 자유를 추구하는 피터팬을 꿈꿨지만, 영화 <비스트>를 연출한 후 삶 전체가 바뀌는 경험을 하여 이를 계기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바로 '피터팬'을 각색한 <웬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든 싫든 성장하고 변화하게 되며,
이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어린 시절 품었던 확신들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 벤 자이틀린 감독
기찻길 옆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살고 있는 웬디에게는 쌍둥이 남자 형제인 더글라스와 제임스가 있다. 이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의 마음 속에는 호기심과 모험심, 수갈래로 뻗어나가는 꿈들이 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모험에 대한 꿈을 꾸던 날 밤, 웬디는 기차를 타고 있는 소년 '피터'를 발견한다. 더글라스, 제임스와 함께 기차에 탄 웬디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로 살아갈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웬디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낯설다'였다.
내가 어렸을 때 관람하고 지금 어렴풋이 기억하는 영화 <피터팬>의 분위기는 동화같은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웬디>는 동화라기보다는 '야생', '거칠다', '생생하다', '스릴 넘친다'라는 단어들이 더 어울리는 영화이다.
어른들이 없는 세상 속에서 어린 아이들은 여기저기를 모험한다. 동시에 방황한다.
여러 사건사고를 겪는 아이들이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서툴다. 불안정하다.
마치 알게 모르게 점점 몸과 마음은 자라지만, 아직 내면에 '아이로 남고 싶다'라는 생각이 존재하여 생기는 불협화음같다.
그리고 이러한 불협화음은 웬디의 불안한 시선을 통해 잘 전달된다.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랐고, 감탄한 점은 아역배우들의 연기였다.
'웬디' 역할의 데빈 프랑스, '피터' 역할의 야슈아 막, '더글라스' 역할의 게이지 나퀸, '제임스' 역할의 개빈 나퀸 등 모든 아역배우들이 영화와 하나가 되는 연기를 선보였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섬이 주요 배경이기에 아역배우들이 영화를 이끌었는데, 이질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이 섬에서는 희망을 잃으면 늙게 된다. 더 이상 아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섬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모두 희망과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이었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쌍둥이 형제 중 제임스는 항상 함께 하던 더글라스가 섬에서 없어지자, 깊이 절망한다.
"희망을 버리면 안 돼. 그게 널 늙게 하는 거야."
웬디는 제임스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제임스는 결국 희망을 잃고 점점 노화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 나는 수없이 많은 꿈과 희망을 가졌다가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꿈을 하나둘씩 포기한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 동안 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오곤 했었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이 '나 스스로 나의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주체적이고 활동적인 웬디는 용맹하게 모험을 주도한다. 노화가 시작된 제임스를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이어나간다. 희망을 잃고 어른이 된 사람들에 대항하고, 바닷 속 '어머니'의 존재를 깨닫기까지의 모든 여정의 주체는 '웬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야."
웬디는 '자연스럽게 나이가 드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늙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웬디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간 웬디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레 늙어가며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피터는 섬에 계속 남아 있는다. 피터는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란 것이다. '나이 듦'의 가치를 깨달은 웬디와 상반되는 결정을 하였다.
"마법은 피터의 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부터 피터의 이야기는 잠자리 이야기에 그쳐 있다."
웬디가 겪은 '피터가 사는 섬'에서의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가 되어 웬디의 아이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희망과 꿈이 가득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모험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불어넣는 '잠자리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 또다시 피터가 탄 기차가 찾아온다. 어린 웬디를 닮아 강한 모험심과 호기심을 간직한 웬디의 딸은 이 기차를 탄다.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웬디의 딸이 '나이 듦'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과연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지, 아니면 영원히 어린 아이가 되어 그곳에서 살아갈지.
'잃어버린 꿈과 희망, 그리고 동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 영화였다.
어린 시절 나는 정말 무수한 꿈을 가진 아이였으며, 항상 희망찬 아이였다. 하지만 커가면서 자연스레 이 꿈과 희망들은 사라졌다. 포기했다기보다는 '사라졌다'라고 표현해야 적절한 것 같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점점 현실을 깨닫고 이에 적응해가며 자연스레 내가 가진 (조금 무모하다고도 생각되는) 꿈은 사라져갔다.
이런 꿈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되어 현실에 치여 힘들게 살아갈 때 문득 떠오르곤 한다. '아 그땐 이런 꿈을 가졌었지', '그땐 참 순수했지', '어릴 땐 겁도 없었다' 등의 생각처럼 말이다. '어렸던 나 자신'이 그립다기보다는 '어릴 때 내가 가졌던 순수한 꿈'이 그리운 것 같다. 순수했던만큼 많은 열정을 가졌고,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종종 그립다.
하지만 '피터'가 나타나서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는 섬에 가자는 제안을 한다면 거절할 것 같다.
현실세계에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많이 힘들고 버티기 어렵다. 언제 진짜 어른이 될지도 불확실하다. 마냥 불안정한 시기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면적으로)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마냥 순수하기만 하던 꿈이 아닌, 앞으로 살아가며 '진짜 이루고자 하는', '진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지게 된다. 이 꿈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 속의 '웬디'처럼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가며 얻는 지혜만큼 값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피터의 섬'에서 겪는 일들이 아무리 재미있고 뜻깊다 해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어린 아이들보다는 다소 지친 현실을 살고 있거나 때때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혹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를 겪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이 모험을 하며 우리는 여러 감정을 겪고 이를 통해 또다른 교훈을 배우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또다른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피터의 섬 안에 줄곧 있으면서 이런 흥미진진한 모험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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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만화에서 소녀 들어내기
* 영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대와 성장에 관해 다루면서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해진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들을 평생 사랑해 왔다”는 셀린 시아마처럼, 나 역시 나(라는 여자애)는 어떻게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쓰인 영화와 책들에 둘러싸여 자라왔기 때문이다. 냉장고 속 여자들. 똑똑하고 의견이 있으면 ‘발암캐’가 되고, 멍청하면 아이캔디가 되는 여자들. 아무도 이름을 모른 채 퇴장당하는 여자들. 결국 주체적 섹시함에 복무하거나 가정과 모성에 귀속되는 선택을 내리는 바람에 롤모델로 삼을 수 없어진 반쪽짜리 알파 피메일들. 나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줄 알고 경계를 내리고 한껏 몰입한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가 나를 내쳤던 기억들. ‘이 이야기는 너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무심한 축객령에 찬물 맞은 듯 깨어났던 경험이 모여 다른 이야기에도 더 각박하고 의혹 서린 눈길을 보내게 만든 건 내게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면,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은 10대 여성의 존재감을 아예 뺏어버릴 정도로 뻔뻔하거나 무신경하지는 않다. 대신 <태풍클럽>이 채택하는 ‘소년'과 '성장'이란 키워드 속 소녀의 위치는 비난받기 어려운 선에 모호히 또 간신히 걸쳐 있다. 소녀들이 표류하고 타자화되고 젠더 폭력에 노출되되 투명하게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화내고 원망할 줄 알며, 욕망하고 좌절하고 춤도 춘다. 다만 그 소녀들이 발화하는 언어와 몸짓은 지극히 중년 남성의 - 언제나 ‘현대’의 소년소녀들과는 동세대가 될 수 없으며, 자기의 10대는 잊은 지 오래고, 한 번도 여성이어본 적 없는 - 관점에서 상상되고 있다.
어쩌면 <레옹> 류의 적극적 성애화나 <싱 스트리트> 류의 과소대표된 마스코트화보다는 좀 나은 대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자 사이의 대찬 어긋남은 여성 관객인 나를 거슬리게 하기 충분하다. 영화 속 주체인 특정 집단을 관객인 우리가 감독보다 잘 알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극중 서사나 연출에서 극도의 작위성과 허구성을 즉각 감지하고 말 때, 어떤 영화는 ‘의도된’ 해학적 연출로서 수용되고 이해받지만 또 다른 영화는 ‘감히?’라는 황당함과 분노를 더 짙게 남기기 때문이다. <태풍클럽>은 슬프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는 평단에서 주로 ‘움직임’과 ‘에너지’라는 (얄밉게도 반박하기 쉽지 않은) 단어에 의존해 뭉툭하게 예찬한 <태풍클럽> 클라이맥스의 나체 파티를 생각해보자. 당최 어떤 10대 여자들이 태풍으로 학교에 고립된 와중 동급생 남학우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일탈을 통해 고통과 자유를 한껏 감각하려 든단 말인가. 이상한 시대의 광기에 걸맞은 기행으로 이해하기엔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소마이 신지 전후의 남성 창작자들이 오염시킨 소녀 이미지, 청춘 이미지들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탓이다.
이 씬에서 여자아이들의 맞춰 입은 듯한 흰 속옷은 기묘한 미인대회를 연상시킨다. Barbee Boys의 暗闇で DANCE가 흘러나오며 수영복 차림으로 춤추던 흥겨운 오프닝이 제공한 생동감과 일말의 기대마저 퇴색한다. 같은 반 남학생 아키라가 물 아래에서 그애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구도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 무대 위 탈의한 친구들을 지켜보는 미카미의 시선은 카메라의 눈높이와 일직선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미카미의 등에 신중히 초점을 맞추다가 이내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무대 위로 (늘 달려 다니던 여자친구 리에처럼) 달려 나가 친구들의 광기에 합류하는 모습을 담는다. 정확히는 그가 무대로 ‘달려가는’ 움직임을 숏 바깥으로 밀어 잘라내고, 그가 무대 위에 올라 옷을 벗고 동참하는 순간부터를 흐릿하게 원경으로 담아낸다.
이 뻔한 대구란. 이 힘준 하찮음이란. 분명 나도 지나온 시기인데, 속으론 저것보다 더 미쳤으면 미쳤지 절대 더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화면 속 연유도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뇌에 공감하기보단 타성에 확 젖어버리고 만다. ‘50대가 상상한 10대의 청춘’의 대표적 표상 같은 이 씬에서 나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타자화를 감지할 뿐이다.
게다가 여자아이들 한 명은 동급생 남학우 켄에 의해 화상을 입었고, 태풍이 오기 직전 학교에 갇혀 도망다니다 옷이 찢기고 만 미츠코다(그리고 미츠코는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이 켄 앞에서 옷을 벗고 켄과 손을 맞잡고 춤추고 있다. 그러니까 이 탈의에서 연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몸짓이 애초에 ’가능한‘ 행위냐는 말이다). 모든 씬이 분절적이고 산만하게 이어붙어진 영화에서 오로지 켄이 미츠코의 옷을 벗기려고 쫓아다니는 시퀀스만이 매우 길고 연속적이고 자세하게 펼쳐진다. 이때 미츠코의 얼굴에 서린 건 오로지 닥쳐올 강간에 대한 공포뿐이다. 그 공포에 즉각 감응할 수 있는 관객으로선 미츠코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생생하다.
한편 오프닝에서 키 작은 남학생 아키라가 밤의 학교에서 수영복 입은 여자애들을 마주쳤다가 물속에서 질식한 사건은 켄-미츠코의 사건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키라는 ‘여자애들이 수영복을 벗기고 레인 로프로 목을 졸랐다’는 경위를 선생님 앞에서 털어놓으며 힘없이 실실 웃는다. 이 진술 자체가 영화에서 유일한 플래시백으로 처리되었기에, 실제로는 그저 관음하다 들킨 게 부끄러워 물속으로 숨었다가 숨이 막혔을지도 모를 아키라의 (깊은 소망이 담긴 듯한) 섹슈얼한 상상처럼 다가온다.
설령 아키라의 말이 진실이었다 해도 아키라의 얼굴에선 (미츠코와 달리) 방금 생사의 고비를 넘긴 아이의 공포나 ‘가해자’ 측인 여학생들을 꺼려하는 반응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선생님 역시 짓궂은 남학생을 혼내듯 장난스레 머리를 때리며 웃는다. 즉 아키라에게 여자애들이 자기 옷을 벗기고 괴롭혔다는 사실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오히려 페티시의 충족, 또래 이성에게서 성적 관심을 받았다는 만족감, 늘 친구 켄과 쿄이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자신이 그럴 만한 존재로 ‘승인’ 받았다는 훈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주변 남자아이들과 선생님 역시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런 미츠코와 아키라 간의 낙차를 영화는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켄이 미치코를 힘으로 제압하는 일련의 숏에 할애된 분량과 연속성 자체가 이 뚝뚝 끊기는 영화 내에서 이질적인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런 간극들에서 소마이 신지라는 남성 연출자의 둔감함 혹은 음험함이 여실히 느껴져 괴로웠다. 남은 평생 그 끔찍한 하루를 잊지 못할 미츠코의 트라우마가 상상되어 참담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다정히 응시하는 건 켄 쪽이다. 미츠코의 옷을 찢어 제가 낸 상처를 기어이 확인하고 순간 숨이 멎어버린 켄은 곧 책상 위로 엎어지고 물건을 죄다 떨어뜨리며 발버둥친다. 지울 수 없는 가해 사실의 무게를 뒤늦게 짐작한 이의 울음과 절망 정도로 자비롭게 이해하면 될까.
여기서 미성년 켄의 후회를 보며 불편하고 원치 않는 이해와 연민이 피어오르는 것까지가 ‘영화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인 것처럼 이야기하려면, ‘영화가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은/못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온당하다. 그러나 물론 1985년의 ‘고전 명작’을 이 시대에 구태여 다시 불러온 이들과 예찬으로 호응한 이들에게야, 여성 대상의 과잉 폭력 전시쯤이야 ’시대적 한계‘란 말로 적당히 무마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티끌 정도였을 테다. 켄이 미츠코를 좋아한 것처럼 미츠코도 리에와 사귄다고 알려진 미카미를 은밀히 좋아했지만, 켄이 한 것처럼 인기 많은 짝사랑 대상을 ”내 꺼야“라고 선포하거나 그애를 가지기 위해 미카미의 등에 불씨를 넣지는 않았다. 켄이 자길 다정히 맞아주는 가족의 부재에 슬퍼하며 “다녀왔습니다.“와 ”잘 다녀왔니?“를 끝없이 반복한 것처럼 리에 역시 엄마의 상시적 부재에 고독을 느끼지만, 리에는 엄마의 이불에 들어가 자위하듯 꼼지락거리며 기이한 연민을 자아낼지언정 켄처럼 문을 부숴가며 누굴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즉 어떤 집단의 고통은 외부의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방출되며 다른 집단의 고통은 스스로의 더 깊은 곳을 향해 수렴한다. 어떤 ‘이들’이 아닌 어떤 ‘집단’인 이유는 거기 성별에 의한 경향성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얘기하자면 영화가 이 명백한 차이를 본체만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다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중립적 관조의 태도를 자청하는 영화들이 곧잘 그렇듯 사실의 냉소적 재현은 곧 책임감 없는 방조로 이어지고, 감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이 소외되고 오해당하며 잘못 그려진다. 도덕적 판단을 일부러 유보하고 기준점을 흐려보겠다는 일종의 사회 실험을 야심만만하게 시도한 영화들이 늘상 그렇듯 그 기준이 적용되는 세계가 이미 불균형하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동등하지 않은 행위자들의 위치성이 재배열됨으로써 동등하지 않은 행위가 동등한 것처럼 잘못 전달된다. <태풍 클럽>은 이런 전형적인 착시의 수렁에 빠진 예다.
부서진 문과 헐벗은 채 우는 미츠코를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묻는, 미츠코의 “보고도 몰라?“란 말에 재차 ”모른다“고 답하는 멍청한 미카미는 (감독이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소년 장첸과 같은 어둠 속의 민감한 관찰자가 아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유이치나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명백한 폭력을 못 본 체하고 묵인하는 방조자일 뿐이다. 그러니 그애가 성숙을 두려워하며 ‘종을 넘어서는 개체‘가 되고자 할 때, 또래에게 깨달음을 주고 자기 죽음으로 불빛을 밝히려 하는 계몽자의 역할을 ‘감히’ 탐낼 때, 이미 몰입을 방해당한 관객은 같잖은 결기에 조소를 보낼 수밖에.
그러니 간절히 바란다. <태풍클럽>처럼 남성 청소년 호모소셜에서 향유되는 강간문화를 미숙하고 불안한 청춘의 성장과정쯤으로 이해해주는 영화가 불운한 명작으로 재소환되지 않기를. 남성 청소년의 또래 여성에 대한 극도의 폭력과 위악을 엄마 없이 자란 불쌍한 아이의 발악 정도로 정당화해주지 않기를. 또래 남성 앞에서 옷 벗고 춤추고, 자기들끼리 어설프게 입술 부비고, 성인 남자와 원조교제하려 드는 여성 청소년의 자학적 섹슈얼리티를 전시하면서, 시골에 유폐되어 성적으로 억압된 소녀들이 규범을 깨고 일탈로 해소하려 하는 건강한 해방처럼 감히 호도하지 말기를.
40년 전 작품이란 권위에, 덧입혀진 명성에, 화려하고 가식 없는 평단의 홍보 문구에 속아 기대했던 바는 좀 더 거창했다. 에드워드 양의 사려 깊은 관찰력도 <썸머 필름을 타고!>와 같은 편안한 산뜻함도 발견하지 못한 건 괜찮다. 그런 작품이 아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만과 혼란의 시대에 대한 은근한 향수와 동조를 감지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을 부른다. 그 시절엔 몬트리올이니 동경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 한들, 현대의 관객이 어떤 것을 정전 삼고 어떤 것을 버릴지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않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뇌하는데 얕잡아 보이고 무시되는 10대 시절의 광기와 고독을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이토록 선명한 폭력 앞에서 피식자의 입장에 곧장 이입되어 당황할 때 ‘나도 저랬다’며 열광하는 이들을 보는 건 역시 좀 입맛이 쓴 일이다. 소마이 신지가 관객의 정동을 잘 건드리는 연출자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가 상정한 청소년의 범주에서 어떤 소녀들은 처음부터 빠져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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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
첫 장면부터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프리다는 담담하면서도 위태한 표정으로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이 이렇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프리다의 얼굴을 비추거나 프리다가 쳐다보는 대상을 비춘다. 가족 중 누구도 프리다가 외롭게 느낄만한 행동을 하지 않지만, 프리다는 그 속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받는 아이인지, 가족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외숙모가 머리를 빗겨주는데 그 빗을 던져버리고, 일부러 신발끈을 못 매는 척 묶어달라고 하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하고, 아나가 가져온 배추를 자신이 가져온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프리다의 이런 행동들은 아이의 사소한 장난 내지 투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프리다의 행동이 모두 웃어넘길 정도의 것은 아니다. 프리다는 아나를 숲에 놔두고 돌아와 모른 척하거나, 아나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등 종종 선을 넘는 행동을 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프리다를 미워할 만도 하지만, 아나는 프리다를 미워하지 않는다. 팔을 다치고도, 물에 빠진 후에도 오히려 계속해서 프리다의 곁에 있으려 하며 자신과 놀아달라고 말한다. 또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가출하려는 프리다에게 자신은 프리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나의 사랑과 관심이 프리다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한밤중의 가출을 계기로 가족들의 진심을 확인한 뒤, 프리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족들과 화목할 것 같던 프리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이유를 묻는 가족들의 물음에 연신 모르겠다 답하며 서럽게 운다. 이 울음은 그렇게 확인하던 가족들의 사랑을 급작스레 깨닫게 되어 터진 울음으로도 보이지만, 그보다도 엄마의 죽음을 끝내 인정하고 받아들임고 동시에 터져 나온 울음으로 보인다. 외숙모가 생리통에 힘들어하자 불안해하고,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으며 “안 아프실 거죠?”라며 재차 되묻던 프리다의 모습에서 외숙모는 엄마처럼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느끼는 안정감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가족 중 가장 서먹해 보이던 외숙모와 프리다의 관계는 어쩌면 이때부터야 비로소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한 아이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적응해가는 고정을 카메라에 섬세하게 담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아이의 마음에 폭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불안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응시하던 프리다가 안정감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특별한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프리다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 영화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있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비슷하게 느낄 순간을 영화화하고 싶었고, 자신의 1993년의 여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된 카탈로니아의 가로트아 마을은 감독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며, 프리다가 가출했다 돌아오면서 “너무 깜깜해서 내일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의 경우, 감독의 경험을 그대로 살린 장면이다. 감독의 이런 자기 경험 투영은 영화의 사실감을 높였다.
또한 감독은 되도록 카메라를 한 장소에 두고 촬영하며, 배우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모르게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이 영화의 자연스러움을 배가 되게 했다. 특히나 프리다와 아나의 역할놀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장면 중 하나다. 여기서 프리다는 엄마를, 아나는 딸을 연기한다. 프리다가 연기하는 인물은 프리다의 엄마로 보인다. 엄마는 몸이 아프다며 딸과 놀아주지 않고 의자에 누워있는다. 이 장면은 프리다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들며, 둘의 역할놀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아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듣는 관객에게 몰입감을 준다. 프리다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그와 함께 느낀 감정은 아마도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좋은 영화는 구태여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영시코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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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6년 여교사가 당시 만 13세 남학생과 성관계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여교사는 2급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후 조기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시 남학생을 만나 관계를 가진 것이 적발되었고 최종적으로 7년 징역을 살았다. 더욱 충격(?) 적인 것은 여교사는 남학생과의 사이에서 딸 2명을 낳았다. 복역 중 첫째 딸을 낳고 가석방되었고, 두 번째 복역 중 둘째 딸을 낳았다. 출소 후 여교사와 남학생은 결혼하며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2017년 그들은 이혼을 했고, 2020년 여교사는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남학생과 두 딸이 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드 헤인즈의 신작 <메이 디셈버>는 위에 언급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래도 토드 헤인즈는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해외의 경우 아동 성범죄는 아주 심각한 범죄로 취급된다. 특히나 최근의 국내 경향으로는 이 영화가 개봉조차 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개봉을 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라는 명성과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지 않을까.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아동 성범죄라는 소재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인 건 분명하다.
우선 토드 헤인즈라는 감독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긴 감독은 아니라는 걸 밝혀야겠다. 기억도 잘 나진 않지만 <파 프롬 헤븐>, <캐롤>로 이어진 멜로드라마 감독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 사이사이엔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있지만 난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의 연장으로 <메이 디셈버>를 읽었다. 즉,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를 접근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더 이상의 멜로 드라마가 가능한가.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어원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글라스 서크로 상징되는 그 멜로드라마가 2024년에 가능하냐는 문제다. 멜로드라마는 아주 단순한 구성을 취한다. 남녀가 사랑하지만 어떠한 장애물이 그 사랑을 막는다. 더글라스 서크의 걸작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는 계급과 나이가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아주 오래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이 사랑을 가로막았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랑을 가로막을 게 없어서 죽을 병에 걸린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물론 간혹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같은 장애라는 요소나 혹은 <건축학개론>에서는 이 장르적 요소를 훌륭하게 지역 정치학으로 엮는 경우도 있다. 토드 헤인즈는 <메이 디셈버>에서 그들의 사랑을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둘의 나이차는 무려 23살이니까.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멜로드라마 장르 공식으로 이 영화를 풀어가진 않는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제 사건의 여교사 그레이시라기보단 그들에게 접근한 엘리자베스다. 그레이시와 조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그 영화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게 바로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실제 인물 그레이시를 관찰하기 위해 접근한다. 극중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인물을 고른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더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거만하다. 즉,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는 당연히 뒤따르는 문제가 생긴다. 엘리자베스와 관객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화를 진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관객들이 엘리자베스를 계속 쫓아가며 그녀가 얻는 사실과 힌트들로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할 것인가. 흔히 플롯을 구성할 때 아주 많이 쓰이는 방법이지만 토드 헤인즈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법적으로 그레이시는 아동 성범죄자다.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그레이시는 스물세 살 연하 남자를 서른여섯에 만났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당신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건 첨예한 문제다. 미성년자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할리우드 감독들과 배우들의 연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더군다나 미성년자다. 그것도 만 13세.
아마 단순히 나이차를 두고 그 연인들을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내면을 깊게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건 사기꾼이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토드 헤인즈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레이시와 주변 인물들을 만나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향과 관객들이 그레이시와 조를 따라가는 하나의 방향으로 총 두 개의 방향성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엘리자베스 쪽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똥과 함께 등장한다. 혹은 엘리자베스는 똥을 들고 등장한다. 여하간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시를 연기하려고 하는 점은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오만하다. 자신이 흥미로운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전 남편과 변호사 등을 만나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본다. 중요한 장면으로 그레이시가 조와 처음으로 섹스한 곳에 가서 자위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메리의 학교에 가서 연기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강의에서 엘리자베스는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엘리자베스는 배우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장면을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엘리자베스 본인을 당시 그레이시의 상황에 놓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레이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영화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엘리자베스란 인간은 자신의 배역을 위해 남의 남자랑 섹스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건 엘리자베스란 인간에 대한 일부의 이해다.
그런 다음 엘리자베스는 카메라와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아주 인상적인 연기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딘가 부족한 연기라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부족한 연기를 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아니라 토드 헤인즈의 연출이다. 영화가 이끌고 온 서사와 카메라의 위치가 지금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절대적으로 관객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연기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본인이 찾던 결론에 도달한다. 그레이시가 어렸을 때 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비뚤어진 성관념이 생겼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핵심적인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사건이 인간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프로이트에게 배웠다. 최근 들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거나 프로이트는 사장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책을 보거나 의견을 들으면 결국 다시 프로이트 이론 안에서 그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본다. 프로이트의 일부 이론이 틀리거나 부정당할 수는 있지만 결국 다시 프로이트라는 점은 아직까지 분명하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가 함정을 파두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성추행의 결과로 그레이시가 조와 섹스를 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훗날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비웃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마치 삼류 연기자가 연기하는 에로 영화 같은 느낌이 풍긴다. 심지어 사실관계조차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걸 밝혀냈으며 인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부분을 밝혀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업적은 엄청난 것이지만. 하지만 분명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무엇의 항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그레이시와 조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그레이시와 조는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냉장고를 열고 소시지가 없다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심각한 음악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느껴진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은 조가 자려고 누워있는 그레이시 옆에 누웠을 때 그레이시가 냄새난다고 씻고 오라고 이야기한다. 극장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단순히 웃기는 장면은 아니다. 이 전 장면이 조가 TV를 통해 세수를 하는 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보았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그 장면과 이 장면은 같이 연결해야 한다. 조는 왜 깨끗하게 세수하는 여자를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일까. 그리고 그레이시가 씻으라고 말할 때 왜 상반신에 물만 살짝 묻히고는 마는 걸까.
조의 그런 심리에 대해 알 턱이 없지만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조와 그레이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더럽다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조는 자신이 더럽지 않다는 걸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더럽지 않기 때문에 씻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이는 추론이다.
내가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는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그레이시와 조가 마주치는 장면이다. 부엌에서 둘이 마주쳤을 때 쇼트의 배열이 약간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확신했던 것은 그레이시와 조의 대화를 샷 리액션 샷으로 이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조와 그의 아들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그레이시는 정면에 가까운 위치에 카메라가 위치하지만 조를 보여줄 때는 아들의 정면 가까운 곳에 카메라가 위치한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레이시와 조가 이야기를 해도 둘의 시선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영화가 그 시선을 일치시키는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전 남편을 만났을 때나 변호사를 만났을 때 완전히 일치시킨다. 또한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에서 시선은 일치한다. 시선을 일치시키는 문제는 보편적인 영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문법이지만 이러한 문법 자체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는 아들과 대화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 하지만 그레이시와 조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둘의 시선이 일치하는 부분은 영화 후반부에서 조가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리지 않았냐고 물을 때다. 조가 대화를 시도하자 카메라는 둘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이내 그레이시는 대화를 거부하면서 장면은 끝난다.
그레이시는 딸 메리의 졸업식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데 영향을 주고, 자신에게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게 된 이웃이 생기자 오열한다. 이따금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문제가 명확하게 어떤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레이시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앞부분 소시지가 없을 때의 음악과 딸 메리의 의상을 고르는 장면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레이시의 문제가 명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 부분으로 그녀를 추론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와 굉장히 서먹하다. 아버지를 만나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면 그 또한 추론할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린 알 수가 없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조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전 남편 대화를 살펴보면 전 남편이 당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건 그의 입을 통해 증언되기 때문이다.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그레이시를 보고 범죄자라고 일갈하며 그레이시는 당시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 그레이시는 조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별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 상태를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레이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거나 그레이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즉 36살의 여교사가 13살의 남학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섹스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고, 복역 후 그와 결혼을 했으며 이후로도 같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독백 연기도 아니고 마지막 장면의 엘리자베스의 오만함도 아니다.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이 왜 잊히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만 13살의 아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감정이 타인에 의해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이 범죄 행위가 되며 정상적인 성장을 밟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서야 자신의 10대를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장면은 조와 엘리자베스의 섹스다. 이 장면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레이시는 어떤 변화도 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화하는 건 조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나타나고 나서 조는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아니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조는 처음으로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렸던 거 아니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부인하는 그레이시의 행동과는 다르게 조는 그 손가락질에 대해 그레이시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조는 10대 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중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명백하게 자신의 역할을 위한 섹스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레이시의 입장에서 조를 품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영화는 마치 성기 삽입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연출했다.
하지만 조의 입장은 약간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했다. 이 또한 추론일 뿐이지만 천천히 다시 한번 살펴보자. 엘리자베스는 지금 서른여섯의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입장이다. 즉 당시의 그레이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 13세 이후의 삶을 다시 겪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의 편지를 꺼내보고 딸의 졸업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는 당시의 그레이시와의 섹스를 다시 해본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물론 추론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의 인서트로 계속 등장하는 나비와 애벌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비가 나온다.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인서트에서는 애벌레가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순서가 뒤집혀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므로 이미 나비가 된 조가 다시 애벌레부터 시작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밖은 부드러운 빛이 내리쬐고 안은 어두컴컴하다. 바깥은 녹음이 드리워진 공간이다. 이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처럼 느껴진다. 인상주의가 등장했을 때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리다 만 그림이거나 혹은 그림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작자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비판이 쏟아졌었다. 미술사 고전기에 원근법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모방이라는 아주 중대한 부분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세상의 비밀을 파헤친 것만 같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어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의 인상들을 그리면서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나는 이 점이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태도가 결국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멜로드라마의 감독 답게 토드 헤인즈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탁월하게 연출했다. 특히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화장해 주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모두 옆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빛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엘리자베스의 독백 장면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반면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느낌은 약하다. 즉 이 장면은 분명한 디렉팅이 들어간 것 같다. 이 순간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입을 맞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충동의 감정에 솔직했다면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얻지 않았을까. 물론 난 엘리자베스를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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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의 기대에 못미친 오컬트 블록버스터 / 퇴마록 애니메이션 / 원조 퇴마소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퇴마록"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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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필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지내던 동석이형을 건드린 깡패 ㅋㅋㅋ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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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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