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24 08:46:46
하얼빈 | 자욱한 담배 연기로 써 내려간 참회록
<하얼빈>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 대한의군은 일본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지만, '안중근'(현빈) 장군은 일본군 소좌 '모리 다쓰오'(박훈)를 비롯해 사로잡은 포로를 풀어주라고 명령한다. 만국공법에 따른 의로운 선택이었으나 이 결정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풀려난 모리가 곧바로 일본군을 이끌고 역습을 가해 안중근의 부대원을 전멸시킨 것. 그로 인해 안중근은 대한의군 동료들에게도 의심받고, 본인도 자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안중근은 좌절하지 않고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 각자의 이유로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못한 동료들도 모은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사살해 먼저 죽은 동료들의 몫까지 해내기 위해. 하지만 일본군은 밀정을 통해 의거 계획을 입수하고, 모리 소좌가 안중근을 필사적으로 추격하기 시작한다.
안중근의 참회록
독립운동과 참회. 두 단어를 합치면 한 인물이 떠오른다. 윤동주 시인이다. 흔히 그의 시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시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에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적극 항거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떳떳한 삶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하니까. '참회록'의 끝이 대표적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사실 두 단어는 연관성이 곧바로 보이는 조합이 아니다. 독립운동은 보통 뜨겁게 느껴진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된 의사와 열사의 용기로 가득한 단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은 오히려 공감하기 쉽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선망의 대상일 때, 그는 그들처럼 되지 못한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기 때문. 때로는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가 더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민호 감독의 신작 <하얼빈>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장군이 주인공인데,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안중근을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윤동주 시인처럼 약점이 많은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의 내면에 가득한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을 원동력 삼은 의거를 쫓는다. 그렇기에 <하얼빈>은 연말 상업영화로서는 다소 의아하면서도, 쉬이 잊지 못해 곱씹어 볼 영화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참회
참회. 윤동주의 <참회록>처럼 <하얼빈>을 관통하는 감정선이다. 모든 캐릭터는 각자 뼈 깊숙이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 우덕순은 어릴 적 자기 자신의 언행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박점출'(정우성)과 공부인은 동생, 남편 대신 전사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가 있다. 김상현은 눈앞의 쾌락을 이기지 못한 스스로가 한스럽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은 누구도 지키지 않는 국제법을 따른 대가로 동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회한이 있다.
<하얼빈>은 크고 작은 서로 다른 후회와 회한이 모여 어떻게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전반부에서는 제각기 연해주와 만주의 추위만큼 뼈아픈 한을 토해낸다. 후반부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일본군과 일제에게 그 한을 되갚아 주는 지를 보여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때,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총성을 울린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독립운동가들에게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해낸다.
이러한 참회의 서사는 한 소품에 집약되어 있다. 바로 담배다. 정확히는 담배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독립운동가들은 끝없이 담배를 피운다. 두 명 이상이 실내에서 모이면 그 순간 바로 라이터나 담뱃불부터 찾는다. 기차 1등석에서도, 회의실에서도, 안가에서도, 기차역에 숨어서도 그들은 연달아 담배를 피운다. 4D 영화가 아닌데도 스크린에서 담배 냄새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카메라는 흡연하는 사람보다 담배 연기 그 자체에 집중한다. 실내 공간에서는 햇빛, 전등 같은 광원을 카메라 정면에 위치시킨다. 자연히 배우 얼굴은 잘 안 보인다. 모자도 쓰고, 머리도 길다 보니 대부분 검은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다. 이때 어두운 배경과 여러 실루엣 사이로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치 지난 전투에서, 지난 임무에서 남은 후회와 반성을 담배에 담아 태워 날려 보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이.
인간 안중근과 장군 안중근
담배 연기처럼 인물들 사이를 떠도는 참회는 때로는 답답하지만, 그만큼 절절하고, 또 뭉클하다. 참회가 모이고 모여 인간 안중근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때문. 신아산 전투가 끝난 직후, 안중근은 대한 의군 동료들 사이에서 밀정으로 의심받는다. 승전 후 사로잡은 일본 소좌 모리를 포함해 전쟁포로 모두를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기 때문. 모리는 풀려나자마자 안중근 부대의 은신처를 기습해 독립군을 학살해 버린다.
겉보기에 안중근의 선택은 이상적이거나,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힘겹게 찾아낸 밀정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밀정을 처결하지 않는다. 대신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창섭의 말마따나 고결하다. 그의 신념이 결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나비효과를 낳았기 때문.
안중근 덕분에 목숨을 건진 모리는 군인답게 죽지 못했다는 수치심에 시달린다. 또 민간인을 학살한 자신과 다른 안중근을 보면서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결과 모리는 안중근 추격에만 열을 올리고, 결국 이토를 제때 지키지 못한다. 밀정에게 베푼 자비도 일견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지만, 종국에는 이 선택이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인간 안중근이 선택이 장군 겸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돕는 셈이다.
이처럼 안중근의 신념이 끝내 보상받는 전개는 그의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후대가 보기에 그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고결하다. 수감생활 중 일부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 3국이 상호 주권을 존중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하지만 <하얼빈>은 그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참회의 시기를 살펴보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의 사상과 신념까지도 감정적으로 감싸 안는다.
차갑게, 관찰하듯이
이처럼 이야기의 주제부터가 참회이다 보니, <하얼빈>은 타오르지 않고 냉정하다. 시작만 보더라도 차갑다. 안중근은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걸어서 연해주로 넘어가던 중, 얼음 위에 쓰러져서 못 일어날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 <하얼빈>은 이런 안중근을 그저 관찰한다. 별다른 부연 없이, 두만강 위에서 마치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안중근을 비춘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앞뒤 상황을 설명해 준다.
달리 말해 <하얼빈>은 관객이 주인공에게 몰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선택과 임무를 따라가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정적이고, 멀게 느껴진다. 우선 한번 구도를 잡은 카메라는 웬만해서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고정된 구도 안에서 인물의 동선을 담아낸다. 일본군과 추격을 벌일 때도, 만주 벌판을 누빌 때도 컷의 전환이 빠르지도, 많지도 않다.
또 멀리서 관찰한다. 때때로 클로즈업도 활용하지만, 감정적인 대목마다 일부러 한 발씩 뺀다. 절대 관객이 주인공과 함께 불타오르도록 만들지 않는다. 죽은 동료들 사이에서 안중근이 통곡하면서 괴로워할 때도, 마침내 이토를 쏴 죽이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거리감을 유지한다. 원거리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앵글로 안중근을 관찰할 뿐이다. 이는 과거 회상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냉정하게 타오르다
그 결과 <하얼빈>은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곱씹게 하는 힘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본군과의 전투 시퀀스만 봐도 그렇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육박전을 관찰하면서 승리의 쾌감보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함을 느끼게 한다. 이는 결국 자기 선택 때문에 겨우 살아남은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는 안중근의 죄책감, 속죄와 참회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겠다는 결심 모두에 강력한 설득력과 당위를 불어넣는다.
이는 장르와도 조화를 이룬다. <하얼빈>은 액션이 강렬한 <007>, <제이슨 본> 시리즈보다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클래식한 첩보물에 가깝다.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여러 인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아리송하게 만들며 서스펜스를 쌓는다. 기차 안에서 밀정을 찾아내고, 그를 역이용해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막으려는 일본군을 떨쳐내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을 연상시키는 시퀀스이면서도, 참회라는 모티브를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풀어낸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밀정은 누구인지. 그 배신자는 어떤 이유로 동료들을 버렸는지. 그리고 과연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참회할 수 있을지. <밀정>에 비하면 투박한 듯 우직한 연출 곁들여지면서 이 장면은 강렬한 서스펜스와 반전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렇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다. 같은 위인과 사건을 영상화한 <영웅>과는 정반대 되는 경험이다. <영웅>이 당장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역으로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면, <하얼빈>은 나라면 안중근처럼 선택할 수 있었을까 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혹여 밀정이 된 인물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모난 영화의 매력
위 장점이 모두 더해진 결과 <하얼빈>은 2시간 동안 힘 빠지거나 지루한 순간 없이 긴장감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고 나간다. 먹먹할 때도, 엄청난 흡입력을 뽐내는 순간도 있다. 다만 이는 상업영화로서 마냥 장점이라고 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힘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 때문.
감독의 전작과도 대조적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1시간 반 넘게 쌓아 올린 긴장감을 박 대통령 시해 시퀀스에서 모두 터뜨린다. 그에 반해 <하얼빈>은 그 긴장감을 터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끌고 가면서 가슴에 응어리지게 만드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이토를 죽인 후 곧바로 사형 집행 장면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두렵지만, 내심 홀가분한 안중근이 참회록에 마침표를 찍는듯한 인상을 남긴다.
배우들의 연기도 도드라지는 작품은 아니다. 눈에 띄는 캐릭터도 부족하다. 그나마 박정민의 우덕순 정도가 생동감 있다. 나머지 인물들은 예상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와 일본군 캐릭터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배우들이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역할 그 이상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하얼빈>의 흥행 성적은 더 궁금해진다. 의도한 분위기와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익숙한 클리셰나 흥행 공식은 과감히 내려놓은 영화이니까. 겨울을 배경으로 유사한 화법과 톤을 구사한 <남한산성>이 극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던 사례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오징어 게임 2>와 거의 동시에 개봉되는 <하얼빈>은 과연 관객들을 집밖으로 이끌 수 있을까?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어둠 속 담배 연기가 총구에서 피어오르기까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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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티는 삶에 대하여
라디오 진행자 이티안은 오늘도 대도시에서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하는 싱글맘이다. 그러나 이혼한 전남편와의 채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현재의 연인, 알코올 문제로 속썩이는 아버지 등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그를 옥죈다. 그것도 모자라 방송국에서의 구조조정 소식이 들려오며 위기가 목끝까지 차오르는데, 그는 두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1. 도시의 삶이란
이티안은 근래 과거 행복했던 순간들을 곧잘 떠올린다. 그만큼 그의 현실은 문제투성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기에.
대도시 사람들은 대체로 백조들이다. 시골 사람들이 보면 한없이 고고하고 도도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의 내부 사정은 다르다.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이들은 자신의 행복하지 못한 현재라도 유지하고자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티안의 전남편은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후처로 들어온 여자도 그의 화려한 겉만 보고 들어와 인플루언서로 살지만 허망한 유명세로 고통받는 여자일 뿐이다. 그렇게 허울만 좋은 인지도와 명예로 가득한 도시에서 행복이란 단어와 가까운 삶은 사는 인물은 이 영화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대체될 나의 자리, 항상 내 옆에 있어주지 만은 않은 나의 사람들, 그렇게 외로움에 침몰되는 게 도시의 삶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배달 일로 생계를 꾸리는 이티안의 사촌 동생의 힘든 일을 끝내고 시선이 위를 향하던 장면이다. 시선의 끝에는 그가 있는 골목과는 상반되는,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도시 속에서 가장 천대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도시라는 곳은 시야가 한정적인 곳이다. 모두가 위를 바라보기에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게 되고 끊임없는 비교가 당연한 곳이다. 다양한 꿈을 갖고 도시로 흘러들어오지만 이들도 모두 언젠가는 한 방향만 바라보며 획일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의 메시지는 '너무 위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옆자리, 내 주변인도 살펴보면서 살아가자'인 듯하다. 한 방향만 보고 살다 내 가족, 옆사람들의 고통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 내 삶은 붕괴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은 획일적인 사고, 내 삶을 지배하는 집착을 내려놓고 여유로운 태도로 버티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주변을 챙기며 내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또다른 좋은 날이 올 테니까.
3. 총평
특히 이티안 전남편의 후처의 가면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이 갔다. '가난해 보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현 사회의 구멍을 제대로 찌른 듯했다. 자존감을 부르짖지만 정말 보이는 자존감만으로는 그들의 삶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 자존감 마저 돈으로 가린 허세일 수 있지 않을까? 자기객관화는 우울이 동반되지만 그 우울을 가리기 위한 허울은 삶을 더욱 메마르게한다. 이티안 포함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우울을 가리는데 급급하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가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가뭄이라면 다시 천천히 물을 주면 된다. 이티안은 가물어버린 삶과 마음에 물을 주려 한다.
영화가 통속극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뻔하고 끊임없이 우울하지만 메세지 하나는 확실하다. 다양해 보이지만 똑같이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도시 속 사람들의 버티기 한 판을 그린 듯하다. 각기 다른 현실에 처한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동일한 감정, 외로움, 우울함을 그려냈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영화이다.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스토리지만 보편적인 스토리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노린 이야기이기에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 감정선은 나쁘지 않게 그려냈기에 그 흡인력으로 계속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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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사랑, 그리고 연대만이 살길!
난민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5년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난민이 유럽에 몰려왔고, EU는 이들을 수용했다. 인도적 수용이긴 하지만 모두가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수용하는 난민의 수가 많아질수록 반이민 정서는 높아져 갔다. 경제 성장 둔화와 일자리 문제 등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이뤄진 수용이라는 점에서 내국인들의 분노가 커진 것. <나의 올드 오크>는 난민과 내국인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2016년 영국 북동부 마을로 관객을 데려간다. 그리고 연출을 맡은 켄 로치 감독은 전작과는 좀 다르게, 하지만 현시점에서 꼭 필요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영국 북동쪽 더럼에 위치한 폐광촌. 이곳에 낯선 차가 들어온다. 내리는 이들은 히잡을 쓴 시리아 난민 가족이다. 주민들의 싸늘한 시선이 모이고, 급기야 화가 난 한 주민은 이들을 보며 비아냥거린다. 난민 가족 장녀인 야라(에블라 마리)는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이를 본 주민은 카메라를 내동댕이친다. 마을의 유일한 술집인 ‘올드 오크’ 주인 TJ(데이트 터너)는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중재에 나선다. 이후 올드 오크를 방문한 야라는 TJ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TJ는 미안함을 담아 카메라를 고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과 연대를 시작한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나의 올드 오크>는 켄 로치 감독의 은퇴작이자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에 이어 발표한 영국 북동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감독의 시선은 노동자 계급으로 향해 있는데, 영국 북동부는 과거 철강, 석탄 산업이 번성했다가 쇠퇴 후 급격히 사회 경제 시스템이 무너진 곳이다. 켄 로치는 2014년 <지미스 호>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곳읠 실상을 목격하고 2016년 번복했다. 그리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발표, 그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나의 올드 오크>는 전작처럼 영국 북동부 지역의 문제와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사뭇 다른 지점이 있다. 바로 ‘희망’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도 사회 시스템의 변방에 위치한 이들의 연대와 작은 행복을 그리지만, 결국 비극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3부작의 갈무리 영화답게 희망을 그린다. 물론, 이 밝은 빛을 만나기 위해선 감독의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지난한 과정을 겪는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난민 가족이 들어온 후, 먹고 살기 힘들어진 상황에 놓인 주민들의 화살은 정작 정부가 아닌 이 가족들로 향한다. 약한자가 더 약한자를 공격하는 행태에 1980년대 이곳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승리로 이끈 것을 보고, 마을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TJ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간판의 마지막 철자인 K가 삐뚤어져 이를 나무 막대기로 고정시키지만 이내 원상 복귀되는 것처럼, 절망이란 삶의 늪에 빠져 모든 걸 다 내팽겨치고 술만 마시는 어른들에겐 희망은 없어 보인다. 이런 주민들은 혐오자가 아닌 또 한 명의 피해자인 셈이다.
TJ도 이들과 결은 다르지만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다. 과거 마을을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가족의 죽음과 경제적 힘듦이 겹치면서 그는 한발 물러선다. 돈이 없어 간판도 못 고치고, 건물 보험도 해지한 상황이니 그 또한 절벽 끝에 놓인 상황. 이때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노인 난민 가족은 과거 자신이 열정을 담아 일을 했던, 그리고 1980년 자기 부모 세대가 이룬 파업 성공의 열정을 다시 샘솟게 한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그 시작은 술집 뒤편에 마련된 공간이 열리면서 시작된다. 이곳은 1980년대 파업 운동 때부터 마을 커뮤니티 공간. TJ의 안내에 따라 공개된 이곳에는 과거 공동체 생활을 했던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 있고,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라는 문구도 보인다. 이 공간을 확인한 야라는 TJ와 난민에게 우호적인 이들과 함께 온 마을 사람들이 무료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든다. 저마다 생활의 궁핍함을 겪는 이들 모두와 함께 밥을 먹으며 공동체라는 인식을 심어주겠다는 생각의 결과물이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이 공간을 열면서 마을엔 생기가 돈다. 학교 내 싸움을 벌였던 주민, 난민 아이들도 함께 밥을 먹고,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던 마을 어른들도 마음의 문을 연다. 켄 로치 감독은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단순하지만 힘 있는 문구와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일수록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극 중 올드 오크 나무가 새겨진 피켓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의 올드 오크>가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적 완성도와 감흥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이전 작품에서 느껴졌던 비극, 즉, 국경과 민족을 넘어 작금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한 삶의 슬픔이 이 영화에서는 오롯이 다가오지 않았다. 비극 보단 희망과 연대라는 주제를 담고자 하는 그 의도가 되려 현실과의 거리감을 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그럼에도 켄 로치의 은퇴작이자 영국 북동부 3부작의 마지막 영화, 그리고 영국을 넘어 현 유럽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잘 담아낸 작품으로서의 의의와 의미는 강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86세 고령의 노 감독이 힘든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뭉치면 사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속담이 어느때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평점: 3.5 /5.0
한줄평: 먹어야 산다! 연대해야 산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 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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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산업에 진출 예정인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최근 게임회사인 일렉트로닉 아츠(EA)의 임원과 페이스북 부사장을 지냈던 마이클 버듀를 영입하며 게임 산업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버듀의 채용 소식을 처음 접한 블룸버그(Bloomberg)에 따르면, 넷플릭스가 내년 안에 비디오게임을 서비스 목록에 추가시키려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넷플릭스는 이러한 새 시스템에 대한 추가 요금을 부과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적 있죠.
마이클 버듀는 넷플릭스 입사 전, 페이스북 리얼리티 랩스(Facebook Reality Labs)에서 근무하며 오큘러스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이용한 게임 콘텐츠 개발을 진행한 적 있습니다. 또한 일렉트로닉 아츠(EA)의 임원으로 지내며 ‘심시티(SimCity)’와 ‘식물 대 좀비(Plants VS Zombies)’ 등을 운영하는 모바일 스튜디오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넷플릭스에서 그레그 피터스 최고집행책임자(COO)의 직속으로 일할 예정입니다. 블룸버그는 또 넷플릭스가 이미 게임 개발 관련 직원 모집을 진행하고 있어 수개월 안에 비디오게임 전담팀을 꾸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넷플릭스는 비디오 게임 진출을 통해 춘추전국시대에 이른 OTT 시장에서 새로운 가입자 확보의 기회를 마련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현재 국내의 쿠팡 플레이, 왓챠, 티빙, 웨이브의 성장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입될 예정인 디즈니 플러스의 존재까지 감안하면, 이는 좋은 시도라고 볼 수 있겠죠.
현재 넷플릭스의 경쟁사인 디즈니 플러스는 자체 콘텐츠를 지닌 기업들을 인수하는 전략을 나서고 있으며, 아마존도 최근 영화 제작사 MGM을 인수했죠. 그러나 게임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OTT 플랫폼은 없기에, 넷플릭스의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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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13구, Les Olympiads (2021)
자크 오디아르 감독
“사랑이든 인생이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화를 내든 울든 너의 틀을 벗어나서 비로소 찾게 되는 너의 자리가 좋은 거야.”
회색 빛의 집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뿜어낸다. 그 안에는 누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이 영화의 제목은 파리 외곽 비즈니스 지구인 라데팡스(La Défense)와 비슷한, 파리 외곽 주거 지역인 13구 (13th arrondissement) 를 뜻한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파리 13구의 에스플러네이드, 영화의 주인공인 중국계 프랑스인 에밀리가 거주하고 일하는 차이나 타운도 있다고 써있다.
영화의 시작은 수많은 집들을 보여준다. 입체적인 사각 면체 안의 수많은 방들, 쓸쓸한 집들에게서 번져 나오는 외로움들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저 시간만 흐를 것 같은 공간들 속에서, 구슬픈 목소리로 중국어 노래를 부르는 에밀리의 나체가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와 카미유는 룸메이트로 만났고, 처음 만난 날부터 즉각적인 육체 관계를 가진다. 박사 학위를 준비하면서 학교 선생일을 하는 카미유는 일에서의 스트레스는 ‘격렬한 섹스’로 풀어낸다고 에밀리에게 말한다. 파리 정치 대학을 졸업하고도 OTT 스트리밍 멤버십 가입을 권유하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에밀리는, 사실은 어딘가 조금 부서져 있고, 사랑과 자유 – 가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여자다.
그녀는 섹스를 할 때만,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녀에게 그것은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행위인 것 같고, 그녀가 가장 그녀 자신일 수 있는 순간인 듯하다. 그러나 카미유와 에밀리의 관계는, 카미유가 다른 여자친구인 스테파니를 집에 들이면서 틀어진다. 스테파니에게 집세를 내라는 둥, 카미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둥 하며 이간질을 하던 에밀리는, 카미유에게 화가 난 감정을 주체 못하고 일할 때 그것을 풀어내고 만다. 성적인 뉘앙스로 고객 응대를 했다는 것을 빌미로 회사에서 잘리고 만 에밀리. 설상 가상 카미유도 집을 나가 버려 그녀에게는 수입원이 사라진다. 그렇게 에밀리에게는 ‘어쩌면 필요했을지도 모를’ 변화의 시기가 찾아온다.
다음으로 등장한 엠버 스위트. 그녀는 화상 채팅으로 자신의 ‘성’을 팔고 있다. 동시에 30대 초반에 법대생으로 파리에 온 노라가 등장한다. 고향에서의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홀로 서기를 하기 위해 대학의 문을 두드린 그녀는 그러나, 신입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참석한 파티장에서 쓴 금발 가발 때문에, 포르노 모델인 엠버 스위트와 동일 인물로 오해를 받고 만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공공연히 그녀에게 야유를 보내고, 그녀는 휴학한 뒤 원래 했던 일인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자 카미유가 친구 대신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그와 처음 만난다.
여자를 좋아하는 카미유가 능력있고 매력적인 노라를 그냥 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에밀리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는 카미유의 문자에, 가능한 한 모든 욕을 섞어서 답변하는 에밀리. 그와 만나는 자리에서도 뻔뻔하게만 구는 그녀. 하지만 카미유는 그녀에게 노라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에밀리 또한 새 직장인 중국 레스토랑의 동료 웨이트리스들에게 알아낸, 데이트 매칭 앱에서 만난 남자들과의 잠자리 이야기를 한다. 업무 시간에도 잠시 집에 가서 그 행위를 하고 돌아오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워 보인다.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의 유산인 집에서, 카미유라는 룸메이트가 없이 살았던 에밀리는 일과 집에 눌려 박제된 사람처럼 매일을 살던 그런 여자였다. 카미유와의 일들이 없었다면, 그런 자신의 인생에 화를 내는 일도, 섹스에 눈뜨는 일도, 사랑을 찾으려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데. 노라에게 일어나는 변화도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 야유를 당한 노라는 직접 자신과 닮았다는 포르노배우 엠버 스위트와 유료 채팅을 시작한다. 그녀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노라, 야동 사이트에서조차 정직하게 자신의 본명을 쓰는 노라에게 엠버 스위트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털어놓고, 둘은 개인 스카이프 계정을 통해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 친구로 발전한다. 노라는 또, 카미유와 정기적인 성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인 고객의 통역을 위해 부동산 사무실에 들른 에밀리를 보고, 노라는 깨닫는다. 카미유에게 필요한 그녀는 노라 자신이 아니라는 걸.마음이 헛헛하고 추울 때, 매일이 그냥 어제와 같을 때, 나를 둘러싼 것들이 답답해 견딜 수 없을 때, 그럴 때. 섹스는 그저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할 수 있는 행위일 뿐일 때. 다들 어딘가의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지만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것 또한, 큰 용기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이 셋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그게
‘일’ 외에 ‘사랑’이라면, 방법이 섹스만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포스터 카피가 인상적이다. 서울도 파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미디어가 발달한 만큼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온라인/오프라인 구분이 명확하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는 건, 내가 서울을 난 10년 전보다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오랜만에 들른 서울에서 이 영화를 보며 감명 깊었던 것은, ‘아직 포기를 모르는’ 에밀리의 절제 없는 매력. 어디로 튈 줄 모르지만 자기 자신은 명확히 알고 있는 그녀의 당찬 모습이었다. 파리 13구 차이나 타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가 찾아가는 파리에서의 사랑 이야기. 단조로운 듯 해도 감각적인 Rone 의 음악이 영화와 잘 어울린다.
영화니까 비로소 가능했던 이야기일까? 나의 관점에서 에밀리와 노라, 엠버와 카미유는 모두 닮아있다. 그저 외로운,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현실에도 수많은 에밀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대부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이 계절이면 좋겠다.
..메마른 감성의 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를 바탕으로 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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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초적인 웃음이 필요할 땐 과거로 회귀할 것
가끔 옛날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또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90년대 영화들을 다시 찾아본다. 요새 영화들에서는 대단한 서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웬만한 서사들이 그 때까지 나온 영화들에서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년대 헐리웃 영화들은 90년대의 황금기스러운 느낌보다는 로맨틱 코미디, 원초적 코미디가 더 많았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트랜스포머'같은 대규모 프랜차이즈 영화들도 많이 등장했었지만 그런 영화들보다 그런 코미디 영화들을 즐겁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내 인생의 오글거리는 하이틴 영화들은 그 때 봤던 게 전부이지만 그 때 많이 보아서 지금 환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간에 요새 다시 향수에 젖고자 하는 미친 감성에 젖어 보았던 영화가 '화이트 칙스'였다. 굉장히 어설프지만 원초적인 웃음을 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봤었는지도 기억이 없는데, 참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한 영화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흑인에 대한 비하가 넘쳐나고, 그 비하가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당연시되던 사회였구나 다시 실감하게 된다.
1. 아무리 봐도 어색한 티가 나는 분장
영화는 두 재벌 상속녀로 위장하기 위해 흑인인 경찰이 백인으로 위장하는 분장을 감행한다. 참 누가 봐도 안닮았는데, 이걸 겉모습으로 알아채는 인간이 없다는 게 정말 웃긴 지점이다. 오히려 여자 치고 너무 운동 신경이 좋아서 수상함을 느끼지, 외양에서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인 '허무하게 웃기기'이다. 약간 밑도 끝도 없는 개그를 보고 나면 아니 저게 뭐야 하다가 막판 가서 와하하 웃게 되는 그런 시간차 공격 같은 개그들이 넘쳐난다. 지금에 와서 그 영화를 처음 보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처음엔 웃기 보다는 경악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장점인데, 처음부터 영화의 목적이 코미디이기 때문에 관객을 웃기려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 보인다. 물론 웃음의 소재가 다소 원초적이지만 가끔 이런 영화도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참 웃긴 건 이 영화도 유치한 건 매한가지인데, 왜 요새 만들어지는 코미디 영화에서 큰 감명을 받지 못할까. 이 영화도 그다지 작품성을 논하기는 조금 애매한 그저 오락 영화이고, 웃음의 코드가 대단히 고급스럽지도 않은데, 이 영화는 계속 보게 되면서 다른 코미디 영화들은 식상하다고 느낄까. 그건 나의 위선인가, 아니면 코미디 영화가 그만큼 발전이 더딘 장르인 것인가.
2. 웃음의 소재가 비하인 것은 조금...
영화의 가장 코믹한 캐릭터 중 하나인 라트렐이라는 농구선수가 나온다. 흑인인데, 백인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가 사실은 흑인 남자였다는 사실에 실망하는데, 포커스가 남자였다는 것때문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라서 실망했다는 지점이 '이건 요새 나오면 안되는 대사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흑인에게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둥 이런 대사들도 참 요새 나오면 논란 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그 시절이니 용인된 대사들이 참 많이 보였다. 주인공들이 모두 흑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흑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대사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걸 현재를 살아가는 흑인이 본다면 불쾌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헐리웃 영화에서 동양인들은 너드 혹은 전문직종으로만 그려지는 게 동양인 입장에서 세상 답답한 것처럼 말이다.
뭐,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뭔 불만이 많냐 싶을 수도 있지만 코미디라는 것이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고 웃기는 것은 생각보다 고급 스킬이기 때문에 그런 고급 유머를 구사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장면은 배출한.
이 영화의 명장면은 그 클럽에서 댄스 배틀하는 장면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뭐라고 그렇게 여러번 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끼리의 춤배틀인데, 어딘지 모르게 안무를 억지로 외운 것 같은 몸치 바이브들도 웃긴데, 다 같은 몸치이면서 누가 이겼네 졌네 하고 있는 것도 코미디 포인트였다. 그 다음에 주인공들이 백인 여성으로 위장하고서 세상 올드스쿨 느낌나는 춤을 추는 것도 재밌었지만 말이다. 뭐랄까, 그 배틀 장면은 허세에 점령당해 버린 남자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오글거리는데, 그래 어디까지 오글거리나 보자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되는 장면이다.
OTT 영화들은 성행하는데, 볼게 없다고들 한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과거로 가보시라고 추천한다. 지금보다는 확실히 영화들이 기술적으로 만듦새가 어색한 지점이 많긴 한데, 오히려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 내용이 더 새롭다. 그때에는 새로이 등장했던 서사여서 그런지, 요새 더 발전된 서사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투박한 서사가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90년대 영화들을 돌려보게 된다.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들이 참 많다. 음, 그런 의미에서 '화이트 칙스'는 곱씹을수록 좋은 영화라고까지 칭송하고 싶진 않지만 가끔 삶이 무료할 때 대책없이 웃고 싶을 때 꺼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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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감독] 테드 브라운
출연] 구스타보 두다멜
시놉시스]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는 테드 브라운이 시기적절하게 내놓은 희망적인 다큐멘터리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손바닥을 새기고, 수백명의 어린이에게 사인 요청을 받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그는 베네수엘라의 유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계적 성공을 거둔 지휘자다. LA 필하모닉,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그는 클래식 스타의 영향력을 건설적으로 발휘할 방법을 늘 고민한다. 여전히 불안정한 고국에서 그는 음악으로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스포일러 주의#
음악이 주는 치유의 메시지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베네수엘라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음악을 가르쳐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과연 음악 하나로 인성적 사회적 교육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에게는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이 가장 큰 도움이 될텐데 아무리 무상이라지만 문화적 교육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제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옳았다. 또래 아이들과 악기를 통해 합주를 하면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과의 협동심을 기를 수 있었고, 한 단체에 소속되어 동료로서, 그리고 선후배로서 악기를 서로 가르쳐주면서 사회성 역시 발달되었다. 또한, 불우한 자신의 가정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의 강점과 장점을 찾으며 자신의 환경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클래식을 연주하면서 그 음악 자체로도 심적 안정감과 힐링을 받으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교육 시스템이 어디있을까. 한 조사에 따르면 어두운 골목길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강도, 살인과 같은 중범죄부터 소매치기와 같은 경범죄까지 그 비율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마 엘 시스테마를 처음으로 만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음악이 가지는 힘이 지금 당장의 경제적 뒷받침을 되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치 체계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엘 시스테마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을 교육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과연 늦었는가
구스타보 두다멜은 지휘자로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다. 17살의 나이에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데뷔를 하고, 2004년 독일의 밤베르크 교향악단 주최로 열리는 지휘자 경연대회인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서 지휘자로서 성공가도를 쭉쭉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중견 지휘자들 빰치는 분주한 활동을 계속하면서 지휘자의 커리어를 알차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고향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와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그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고뇌하고, 더불어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불안정한 베네수엘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차베스 정권 당시에는 친정권적인 태도를 보이고, 마두로 정권에 들어오면서 부터 현 정권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에 대해 너무 뒤늦게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아닌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이 부분도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에서 꼬집는다. 하지만 과연 구스타보 두다멜의 입장에서 차베스 정권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하다.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엘 시스테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지원 중단을 검토했으나 빈곤 퇴치와 범죄 예방 그리고 사회 부흥 및 국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고 판단해 지원을 지속하며 해외 공연을 늘리면서 엘 시스테마를 해외에 알리는데 집중했다.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서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사회적 교육의 일환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왔던 두다멜에게는 엘 시스테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밝혀버리면 한 집단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마두로의 집권 이후 유혈사태와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유혈사태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입장이 뒤늦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정치성으로 이용되길 원치 않았던 그에 있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성명 발표로 인해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하나둘 다른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나라로의 이민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점차 단원들의 빈자리를 보여주면서 왜 그가 정치적 입장을 이제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무게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이 지휘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을 넘어서 단원들의 생계 역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동안의 비판에서도 침묵을 지켰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엘 시스테마부터 구스타보 두다멜의 이야기까지 베네수엘라의 현재 상황과 그의 행보에 대해서 다룬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찬란해보였던 행보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에도 엄청난 무게감이 있음을 잘 보여준, 그리고 미래의 그의 행보 역시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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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팬, 웬디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해석되다-영화 웬디
올해가 피터팬 탄생 110주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피터팬을 재해석한 웬디 라는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왔어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판타지 장르의 성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조금 다른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웬디가 중심 인물이 되어서 피터를 만나면서 한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어요.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에요.
나이 듦에 대한 생각과 아이와 노인을 대비시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섬의 풍경과 신비로운 고래의 모습이 눈길을 잡아두는 영화입니다.
단, 일반 판타지 물의 오락적인 성향은 적은 영화에요. 잔잔하고 진중합니다.
그래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조금 심심한 듯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들은 유명한 배우가 나오지는 않지만 웬디 역을 맡은 데빈 프랑스의 좋은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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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멸의 칼날 : 남매의 연> 예고편
혈귀의 습격으로 가족을 잃은 소년 ‘탄지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네즈코’마저 혈귀로 변해 버리고 마는데….
‘탄지로’는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리고 가족을 죽인 혈귀를 심판하기 위해-
‘귀살대’의 길을 가기로 결의한다.
혹독한 훈련 끝에 귀살대 대원으로 거듭난 ‘탄지로’는
복수의 칼날을 들고 목숨 건 사투를 시작하는데…
소년이여,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칼날을 들어라!
인간과 혈귀가 엮어낸 애절한 오누이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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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파이 캣> 티저 예고편
지상 최고 스파이를 꿈꾸는 집냥이 ‘마니’는
드래빌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도난사건 해결을 위해
쫄보 멍뭉이 ‘엘비스‘, 서커스돌 동키 ‘안톤’,
엉뚱한 흥부자 꼬꼬 ‘에디’와 함께 특급 비밀 작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한 순간,
범인으로 몰리며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과연 이들은 사건을 해결하고 스파이 어벤져스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