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던 부랑자들을 한두 대 두들겨 팰 수 있을까. 물론 폭력은 나쁘지만 아쉬움이 있다. 왜 날 괴롭히던 애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었나?라는 아쉬움이다. 운동을 열심히 했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성인이 되고 나서 겪었던 몇 흑역사가 여기에서 온 것 같아 또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시간을 돌린다면 내가 내 힘으로 나 자신을 지킬 것이다. 맘에 안 드는 놈에게 찍소리 못하며 당할 바에 운동 열심히 하는 게 나 자신을 지키는 좋은 방법인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년시절은 서로 이어져있다. 당당하지 못하면 맘에 드는 이성에게 말 한마디 걸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 친해지고 싶은 상대와 오히려 안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 쉬웠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결국 나를 만드는 일이란 걸 윗 문단을 쓰며, 또 이 문장을 만들여 다시 한번 느낀다. 극복은 사람 살면서 정말 어려운 난관 중 하나다. 어쩌면 10대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가한 과제를 아직까지도 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솔직히 나한테 까부는 놈 한 방 쳤을 것 같다. 살면서 누구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아직도 난다. 때리지만 않는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때의 객기가 살면서 중요하다는 걸 미리 알았을 텐데 말이다. 이 소년 피니는 글쓴이보다 더 한 두려움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가면 쓴 남자가 관객과 소년을 납치했다. 탈출하는 방법은 이번 주 수요일에 극장에 가는 것이다. <블랙폰>이다.
연쇄 납치범
1978년 미국. 한 범죄자가 덴버라는 마을에 활개 치고 있었다. 죄목은 유아 납치. ‘더 그래버’라는 범죄자는 복면을 쓰고 덴버 마을 곳곳에서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범죄 수법 공통점은 납치된 곳 근처에서 검은 풍선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포에 떠는 마을. 그러나 남매 피니와 그웬에게 더 무서웠던 건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설명이 어려운 한 요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 혼자만 남게 된 후 아이들은 점점 받는 상처가 늘어났다. 걸핏하면 맞는 아이들. 오빠 피니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10대를 보내고 있던 피니. 이런 피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건 급우 로빈과 여동생 그웬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피니. 화장실에서 나쁜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피니에게 폭언을 하고 있었다. 맘에 안 드는 놈 하나 패고 있던 로빈은 화장실로 따라 들어와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나쁜 놈들을 모두 쫓아낸 로빈과 피니. 로빈은 피니에게 “이제 너 스스로가 너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한다. 순수한 근력은 셌지만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몰랐던 피니. 그런데 더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기를 지켜주던 친구 로빈이 납치됐다. 곧이어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 일어났다. 피니마저 그래버에게 납치됐다. 지하에 갇힌 피니. 탈출에 유용할 정보는 독방에 덩그러니 있는 고장 난 검은색 전화기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검은색 전화에서 울리는 의문의 전화벨. 통화 상대는 그래버에게 피살당한 친구들이었다. 피니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은 아이들과의 통화를 시작한다.
블룸하우스 발 호러영화?
블룸하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맞다. 호러 영화에서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회사가 제작한 영화는 적은 비용으로도 높은 효율을 뽑는 작품들이 많았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인시디어스>, <겟 아웃>, <해피 데스 데이> , <23 아이덴티티>, <위플래쉬>까지 이 제작사는 감독의 역량이 중요한 호러/스릴러 영화에서 좋은 타율을 선보였다. 그중에서 내 기억 속에 세 번째로 기억에 남았던 게 뭐냐? <살인 소설>이었다(첫 번째는 <위플래쉬> 두 번째는 <겟 아웃>). 스콧 데릭슨이라는 이름이 사실 생소하긴 하다. 나중에 마블에 입덕 하고 나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맡은 감독이었다고 하나 개인적으로는 그 작품마저 그렇게 인상 깊진 않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다시 <살인 소설>로 들어간다. 이 <살인 소설>은 글쓴이 개인적으로 저평가가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 기준으로 호러영화의 대표 격하면 <컨저링>이나 <쏘우>가 나오곤 하는데 이 두 작품보다 <살인 소설>이 밀린다 곤 생각 않는다. <살인 소설>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잘 활용한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기괴한 이미지를 삽입하는데 이 장면이 끌고 가는 공포가 후반부까지 쭉 이어진다. 또 어딘가 익숙하지만 살짝 변용한 톤이 중간중간 기억에 굉장히 강하게 남는다. 또 사운드 연출이 잘돼서 점프 스퀘어가 비교적 덜 식상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이 스콧 데릭센의 장기가 잘 들어가 있다. <살인 소설>을 봤다면 느껴지는 장면 장면들이 곳곳에 보인다. 약간 예전 비디오 돌려보는 듯한 시퀀스가 주요 장면마다 배치가 됐다. 또 사운드 연출이 인상 깊을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은 <블랙폰>이다. 당연히 전화기가 중요한 소재다. 띠리리링 하는 전화 효과음 설정이나 역시 비교적 덜 식상하게 만드는 사운드 연출까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스콧 데릭슨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의 연출 측면에서도 죽은 친구들과 피니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장면마다 죽은 친구들을 묘사하면서 피니에게 어떤 힘을 주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잘 묘사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볼 수 있었던 방법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인물의 시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잘 썼다. 이 턴에 이런 시점을 보여주면 영화가 박진감이 있고. 또 후술 할 에단 호크의 포스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이고. 이런 디테일을 잘 살렸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강점은 감독의 이런 연출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한 틴에이저
아마도 확실하게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지점이다. 이 영화는 중반부에 갑자기 장르를 비튼다. 철저하게 호러 톤을 유지하던 영화는 10대 소년의 내면이 주요 소재가 된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공포는 두 가지다. 학교와 집에서 겪는 공포다. 이 공포는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 공통점이 있다. '대안이 없어도 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피니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도 주인공은 살 만하다. 아버지가 허구한 날 여동생 허리띠 때려도 피니는 외롭지 않다. 누구보다 든든한 여동생이 있으니까. 학교에서 미친놈들이 괴롭혀도 별 일 아니다. 로빈이 구해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피니는 괴롭긴 해도 자기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꿀 필요도 이유도 못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맞닥뜨리는 공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냥 이 상황이 익숙한 것이다.
극에서 제시되는 납치라는 설정은 이 익숙함을 광폭하게 비틀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이 두 공포가 병렬적으로 제시되며 피니를 괴롭힌다. 일단 여동생과 로빈이 없는 환경은 첫 번째 공통점을 가진다. 또 그래버가 피해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영화의 어떤 장면과 오버랩되는 것은 절대 그냥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피니가 겪고 있는 공포를 좀 더 색다르게 표현했다. 그래야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 닿아있다. 또 이렇게 설정을 의도적으로 대치시켜야 인물이 두 공포 중 하나만 극복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엔딩에 인물들이 고르는 선택지에 탄력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이 후반부의 장르 변화가 아쉽다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호러 분위기를 에단 호크의 카리스마와 점프 스퀘어가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이게 뭐가 공포영화나?'라고 생각할 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새는데 엔딩은 거의 기름을 붓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호러 장르이기 이전에 피니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 주신다면 감상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니가 정말 겪어야 했던 공포는 자기 내면에 있다. 이렇게 찍어 누르는 세상 속에서 바꿀 생각을 않는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이 영화에 작동하는 굉장히 큰 공포일 지도 모른다. 이 공포야말로 소년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극복해야 했던 처음 관문이다.
앉아있기만 해도 무서워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에단 호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저씨 연기 잘하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래버에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그래버가 납치 수법을 관객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신이 있다. 이때 뭔가 엉거주춤하는 자세와 낮게 깐 목소리톤으로 관객들을 장악한다. 이 연기에는 살짝 페널티가 있다. 바로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빛과 표정연기로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시작한다. 가면을 잘 고른 감독의 공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에단 호크의 개인기가 빛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시퀀스는 그래버가 피니를 납치한 후가 중심이 된다. 이 그래버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극에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래버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피니에게, 또 관객에게 공포감을 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납치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바로 먹는 문제가 걸릴 것이다. 이 음식 주는 장면도 에단 호크는 두렵게 소화한다. 굉장히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살짝만 비틀어서 호러 분위기를 조성했던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 영화를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익숙한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이 잘 느껴진다. 바로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다. 카메라 워킹부터 목소리 톤까지 살짝살짝 바꿔가며 극을 이끄는 카리스마가 압도적이다. 이 영화가 10대 소년의 극복기를 다룬 것만큼이나 '호러 무드'를 품고 있는 이유는 이 배우의 충격적인 연기가 뒷받침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인물의 연기를 구경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한 재미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더 배트맨>의 리들러가, 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의 그린 고블린이 연상이 되는 엄청난 연기였다. 앉아있고. 서있고. 뭘 들고 있고. 내려놓고 있고. 뛰고. 몸싸움을 하고 단어 한 글자만 나열해도 장르가 되는 퍼포먼스 하나 만으로도 비싼 티켓값의 2/3은 구성한다고 보는 쪽이다.
굳이 옛날이야기를
영화를 보고 나서 느껴지는 뜨거운 무언가는 좋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1970년대 이야기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밀폐된 공간 탈출하 기다. 바로 호러영화의 근본으로 이어진다. 호러영화의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빌의 저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피비 랜 나는 복수극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귀신 씐 집이라는 소재 <엑소시스트>까지 미국 호러영화의 전성기는 197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쭉 이어졌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가 생각나는 빌런이나 특정 장르에 무언가 쓰였다는 점까지 아마 감독이 당시 호러영화에 대한 리스펙트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점도 있어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점도 있다. 바로 여동생 캐릭터다. 여동생 캐릭터에 어떤 코드로 읽힐 수 있는 몇 가지 설정이 있다. 이 코드가 무엇인지 쓰면 스포일러가 된다. 그런데 극을 보고 나서 딱 알 수 있는 건 이 설정은 사실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곁다리로 스윽 지나가는 느낌이다. 뭐 검은색-흰색의 색채 대비나 그래버가 쓴 가면이 영화의 특정 코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굳이 여동생 서사에 그런 소재들을 넣어 집중을 깰 필요가 있었는가? 는 의문점이 든다.
또 피니의 설정이다. 피니 이야기 물론 좋았다. 관객들도 뿌듯할만한 충분한 이야기 구성이었다. 그런데 이 피니와 블랙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살짝 인과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극에서 중요한 것이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헐겁다면 충분히 헐겁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여동생에게 부여한 설정 하나가 피니에게도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설명을 좀 더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