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2024-06-26 14:49:10
잠시 길 잃은 당신을 위한 영화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리뷰
호텔방의 커다란 통창으로 시끄럽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도쿄를 한 눈에 담는 주인공 샬롯. 그러한 그녀를 비추는 씬을 극중 몇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빌딩숲 속 도로의 수많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 찬 창 밖의 모습과, 창틀에 걸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대비되며 그녀가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마치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조차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하다.
각 대학을 졸업해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요즘 필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의 불안에 공감하는 밥의 모습에서는, 가끔은 그 불안과 혼란을 그대로 전부 받아들여줄 수 있고 비록 자신조차 그 답을 다 알지는 못할지라도 "괜찮다. 너는 할 수 있을거다"라 말해주는 정서적 지지의 중요성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 필자가 가장 듣고픈 말이기에 그럴까.
그가 그녀에게 해주는 말들이, 단순히 나이가 좀 더 많은 인생의 연장자로서 해주는 조언이나 첨언이 아닌
샬롯이라는 사람 자체를 믿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일종의 고백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내내 샬롯과 밥의 감정이 사랑일까 아닐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키다리 아저씨와 주디일까,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일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랑에 대한 선호가 없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일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깊은 우정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스시집에서 삐걱대는 마지막 점심을 먹은 뒤 괜시리 어색해진 두 사람이 한밤 중 호텔 비상알람으로 인해 잠옷차림에 가운만 걸친 모습으로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우스웠던 점심식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곤, 필자는 두 사람의 마음이 사랑임을 겨우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그런 거 같다. 확인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말과 마음이 통하는 그런 거 말이다.
오래 전에 보고 묵혀두었던 이 영화가, 지금의 필자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Lost in Translation" ,
영화의 원제이다.
마치 통역 오류가 나듯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나의 생각과 진심을 상대에게 전하기가 어렵다고 해도,
나의 인생을 증명하는 그 통역의 과정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저 오류일뿐이니까.
오류는 언제는 바로 잡을 수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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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우리 영화 후기 - 15년간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속에서 얻은 첫사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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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기억하는 저우 샤오치는 수영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저우 샤오치에게는 과거에 특별한 사랑이 있었다. 바로 요우 용치라는 그녀에 대한 첫사랑이다. 고 3 시절에 저우 샤오치는 수영 선수이면서 싸움만 하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눈에 반한 전학생이 있었으니 요우 용치라는 여학생이었는데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그러나 둘이 친해질 무렵 수영부 주장인 샤크와 샤크의 무리들이 딴지를 건다.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샤크를 피해 요리조리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와 가깝게 지낸다. 하지만 요우 용치는 어머니와 함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멀리 떠나버리게 되고 시간이 흘러 자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를 잊고 pc방 카운터 알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자우 샤오치의 친구가 삼수를 하게 되면서 아이폰에 찍힌 대학 사진 속에 요우 용치가 대학생으로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요우 용치를 만나기 위해 자우 샤오치는 재수를 하게 되어 대학 입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는데... 과연 저우 샤오치와 요우 용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둘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학생 때의 첫사랑은 정말 오래 갈 수 있을까?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랑도 깨질 수 있을까?
15년 뒤에 우리 모습은 무엇이 되어있을까?
저우 샤오치와 요우 용치는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꼬치 구이 가게에서 꼬치 구이를 먹으면서 15년 뒤의 우리 모습은 어떨까라고 생각해본다. 저우 샤오치는 수영을 잘했지만 공부는 못했고 싸움만 하던 막무가내 학생이여서 미래가 불투명했고 요우 용치는 공부를 잘했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게 꿈이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허나 요우 용치에게는 어머니와 자신에게 폭력을 쓰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항상 달아나곤 했다. 그렇게 둘에게는 각자의 콤플렉스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만남은 운명이 정해놓은 끈인 것 같다. 이 둘은 학교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대학에서도 만나고 사회에서도 만난다. 마치 천생연분이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오래된 인연도 끝이란 게 존재하나 보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성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첫사랑에서 따뜻했던 연인과의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고 헤어짐에서 함께했던 연인과의 공유했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만남과 헤어짐을 거쳐감으로써 더 큰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게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해 보고 싶다.
첫사랑의 기억은 영원한 듯싶으나 영원하지 않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한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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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더 하이츠> 음악과 춤을 곁들인 라티노의 미나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족들과 이민 온 워싱턴 하이츠에서 잡화점을 하고 있는 ‘우스나비(안소니 라모)’,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는 ‘바네사(멜리사 바레라)’, 엘리트로 온 동네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한 ‘니나(레슬리 그레이스)’. 세 주인공이 각기 자신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하는 사이 워싱턴 하이츠에는 무더운 여름과 함께 우스나비의 가게에서 판매된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이 찾아온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이가 누군지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사이 하이츠 전역에 정전이 찾아오고, 거리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뒤바꿀 이별을 맞이한다.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에게는 일관되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대목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사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주인공들의 시련과 아픔은 해피엔딩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며, 종국에 그들은 원하는 꿈을 성취하고 보상을 받는다. 흥겨운 음악과 춤, 세련된 만듦새는 그 기쁨과 행복을 배가한다. 대신 결말에 이르기 위한 갈등의 해결 과정과 방식은 휴 잭맨 주연의 <위대한 쇼맨>처럼 지나치게 간략하고 도식화되어 얄팍하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이는 달리 말해 뮤지컬 영화가 일부의 변화만으로도 훨씬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데이미안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는 여전히 해피엔딩을 표방하면서도, 플롯을 살짝 비틀어 모든 것이 완벽한 유토피아적 결말의 반대쪽으로 향한다. 실제로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필연적으로 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감을 재즈 피아노의 건반에 담은 결말에는 씁쓸함이 한 스푼 더해져 있다. <스텝 업> 시리즈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존 추 감독이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라틴계 이민자들의 동네, 워싱턴 하이츠에서 3일간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인 더 하이츠>도 마찬가지다.
<인 더 하이츠>는 겉보기와 달리 마냥 희망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다양한 장르의 비트와 선율 위에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열망하는 꿈과 환상보다 현실을 묘사하는 가사가 먼저 얹혀 있다. 우스나비의 잡화점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일면을 포착한 오프닝처럼 영화는 크고 거시적인 사회적 구조와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소소한 삶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그래서 우스나비, 바네사, 니나 등의 중심인물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우스나비는 고향 도미니카 해변에 있는 아버지의 상점을 다시 열겠다는 의지를 현실의 난관과 함께 음악에 담는다. 바네사는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면서도 늘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픈 꿈을 위해 도시로 나가고 싶지만 많은 돈이 필요한 현실을 읊조린다. 니나는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하기 전, 특히 어릴 적 자신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싶은 심정을 노래한다.
하늘에 떠 있는 꿈과 환상보다 땅에 붙어 있는 현실에 주목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태도와 정서는 주요 소재 중 하나인 복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분명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복권에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바삐 출근하는 와중에도 복권을 잊지 않고 사가며, 주인공들의 대사에서도 복권은 끊임없이 언급되면서 그 존재가 부각된다. 복권 당첨자가 우스나비 잡화점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수영장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의 희망을 화려하게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복권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을 신나게 보여준 뒤, 정작 복권은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다. 이미 그들은 세 주인공의 노래에서 드러났듯이 그런 꿈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단순히 노래와 춤만으로, 곧 우연한 복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환상 또한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인 더 하이츠>는 주인공들의 공간인 워싱턴 하이츠를 통째로 정전 속에 빠뜨리면서 그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꿈과 노래만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진짜 힘을 선보인다. 그 힘은 존재 자체의 소중함이다. 설령 현실이 너무나 어두울지라도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더 나아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기가 끊겨서 더운 여름날 무기력해진 워싱턴 하이츠의 사람들이 본래 늘 하던 대로 어제와 같이 오늘과 내일도 살아가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이유다. 비록 노래와 춤 그 자체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그 자체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늘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그리던 '피트(노아 카탈라)'로부터 바네사가 옷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 것, 우스나비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이츠에 남는 것, 니나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버티기로 결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특히 워싱턴 하이츠에 사는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들처럼 키워 온 '클라우디아(올가 메레디즈)'의 삶에 집약되어 있다. 모두의 할머니였던 그녀는 정전으로 말미암아 거리가 혼란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워싱턴 하이츠의 사람에게 가슴 아픈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쿠바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온갖 잡일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기어코 지켜낸 그녀의 인생사는 현재의 삶에 지치고 본래의 자리를 이탈해 과거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그 자체로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실제로 주인공들은 일확천금을 노릴 복권이 아닌 클라우디아가 수십 년 간 간직해온 손수건을 보면서 그녀가 그랬듯이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상을 살자고 결심한다.
이 지점에서 <인 더 하이츠>는 마치 라틴계 이민자들을 위한 <미나리>처럼 느껴진다. 이민자들의 소소하고 평범한 삶의 일면을 다루고, 또 할머니가 이민자들의 험난한 적응기를 지탱해주는 힘이자 존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일맥상통한다. 무엇보다도 메시지를 담은 소재가 각각 복권과 미나리로 다를 뿐,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인 이민자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으로 존재함으로써 일구는 변화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 역시 똑같다. 자신의 꿈이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할머니가 심은 미나리를 보면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것을 배운 제이콥처럼, <인 더 하이츠>의 주인공들도 꿈꾸는 일들이 기적처럼 이루어지지만은 않는 평범함의 힘을 마음 깊이 간직한다.
다만 <인 더 하이츠>는 <미나리>만큼의 뭉클함이나 따스함까지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일단 철저히 라틴계 이민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을 들여다보는 작품이기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공감하기 어렵다.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더 나아가 미국의 히스패닉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상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러닝타임 내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고 느껴질 여지도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상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문제들이 하나씩 있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문제를 해결하고 꿈을 이루려고 한다'는 문장 하나로 축약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돌아가면서 털어놓는 여러 고충은 실상 크게 다를 게 없고, 오히려 캐릭터들의 감정선이나 사연을 도중에 뚝뚝 끊을 뿐이기에 영화는 자연히 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현실 안에서 꿈을 꾸며, 실제적인 해결책과 방안을 고민하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이는 존 추 감독의 몫이 적지 않다. 존 추 감독은 <나우 유 씨 미 2> 같은 영화에서 각본의 짜임새와 볼거리 중 후자를 중시한다고 비판받아 왔는데, 이 대목이 역으로 주인공들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장점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들의 눈앞에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바네사가 꿈을 노래할 때 맨해튼의 건물을 형형색색의 천들이 뒤덮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니나와 베니가 건물 벽을 걸어 다니며 춤을 추고, 니나가 자신의 현실을 한탄하며 노래할 때 거리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목격하는 것, 우스나비가 잡화점 한 구석에 마련한 공간이 진짜 해변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전개가 유발하는 지루함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귓가를 스치는 음악과 음악에 스펙터클을 더하는 군무가 그나마 상쇄해준다. 수영장에서의 군무 장면은 물이라는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감독의 전작인 <스텝업 3>를 떠올리게 하며, 싱크로나이징을 본 딴 수중 댄스의 등장은 한 발짝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정전된 직후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거리를 가득 매운 채 선보이는 칼군무는 해당 장면이 함축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열정과 흥분을 뿜어내는데, 이 역시 전작인 <스텝업 4>에서 플래시 몹을 활용한 댄스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인 더 하이츠>는 현실을 더해 지나치게 뮤지컬스러운 정서는 덜어내고, 그러면서도 뮤지컬 고유의 스타일을 극대화시킨 결과 더 큰 매력을 뽐내는 영화로 재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미국의 히스패닉과 라티노들의 존재와 이야기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결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설령 무시당하고 보이지 않는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인 더 하이츠> 역시 그 존재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라라랜드>의 형식에 <미나리>의 메시지를 더해 라틴 팝으로 버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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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공간> -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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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공간 (異度空間, Inner Senses)
개봉일 : 2003.06.05 / 재개봉 : 2021.07.21. (한국 기준)
감독 : 나지량
출연 : 장국영, 임가흔, 이자웅, 주가령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2003년 4월 1일, 유명을 달리한 배우 ‘장국영의 유작’ <이도공간>이 19년 만에 롯데시네마를 통해 재개봉했다. 불에 타 유실된 필름을 아주 어렵게 구해 우여곡절 끝에 재개봉에 성공했다는 <이도공간>은 영화의 내용이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장국영의 유작’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짊어진 무게가 무거웠던 작품이다. 2003년 장국영이 삶을 마무리 지었을 때, ‘장국영이 이 작품을 찍고 귀신에 씌여, 우울에 빠져 죽음을 선택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정말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은 이렇게라도 장국영의 죽음을 부정하고,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도공간>은 장국영 필모 중에 유일한 공포영화다. 은근 무서운 장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걱정했는데, 몇 장면의 긴장감만 견디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귀신이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보다 마음 깊이 숨겨뒀던 상처에 대한 두려움에 더 집중한 작품이기에 귀신에 대한 공포감때문에 감상하지 못하고 있다면 잠시 눈 딱 감고! 도전해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공포보다는 슬픈 영화라는 느낌이 더 강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공포감을 견디고 나면 장국영의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눈빛을 마주할 수 있으니.. ‘무섭지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이도공간>은 사람이 아닌 영혼에게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짐과 얀의 이야기다. 얀은 자신이 귀신을 본다고 말하며 매일을 공포에 시달린다. 짐은 귀신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뇌에 저장된 정보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짐과 얀이 마주하게 되는 귀신이란 존재는 ‘귀신’ 그 자체라기보단 오래전에 묻어둔 슬픔과 트라우마, 그리고 외로움의 산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반복된 재혼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홀로 살아온 외로운 얀과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다며 책에만 집중하고 혼자 살아가는 워커 홀릭 짐. 두 사람은 외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다.
누구나 살면서 크게 부끄러웠거나 지독히 슬펐거나 또는 수없이 후회하게 되는 순간을 겪는다. 그런 순간들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사람을 괴롭힌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차라리 잊고 싶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지우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본 적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통은 무작정 지우려 할수록 선연해지기 마련이고 외면하고 묻어두려 할수록 더 무거워진다. 고통에 맞서는 건 분명 아주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가장 큰 슬픔인 이별 또한 마찬가지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래도록 아파하고 무조건 묻어두기보단 그를 받아들이고 아픈 만큼 그리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무지 어려운 일이지만.. 슬픔이 속에서 곪아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기 전에, 무너져내리기 전에 그 순간과 직면해야 한다.
이도공간 시놉시스
부모의 이혼으로 홀로 남겨진 ‘얀’은 오래된 낡은 아파트로 새로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파트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자신 말고 다른 존재들이 집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해 사촌 언니는 정신과 대학교수 ‘짐’을 소개 시켜주고 그녀가 보이는 건 자신의 과거 상처로 인해 비롯된 존재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켜준다. 서서히 이상한 존재에게서 멀어지며 회복되어 가던 그녀는 ‘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는데...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수록 ‘짐’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성적인 정신과 대학교수 ‘짐’은 같은 동료 교수의 소개로 ‘얀’을 만나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녀가 부모의 이혼과 상처로 귀신이란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안심시켜준다. 상담 치료를 한 이후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짐’ 주변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속된 불면증에 시달리던 ‘짐’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제가 본 건 환상이 아니에요.”
운수 없게도 귀신을 보게 됐다는 얀과 귀신은 뇌가 만들어낸 정보의 집합체라는 짐. 얀은 사촌 형부의 소개로 짐을 만나게 된다. 정신과 대학교수인 짐은 불안에 떨고 있는 얀에게 약이 아닌 우유 캔디와 믿음을 담은 수면제를 건넨다. 모두가 얀을 “미쳤다”고만 말 하는데, 짐은 그들과 다르게 조용히 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얀의 일기장과 사진들을 살펴보던 짐은 얀이 귀신을 보는 건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 얀이 마음 깊이 숨겨둔 문제는 어릴 적부터 겪어온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얀의 부모님은 얀이 어릴 때 이혼을 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사랑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애정결핍에서 나온 불안감은 곧 상대를 위한 집착으로 바뀌고 얀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리고 죽은 이의 정보를 받아들여 곧 그것을 귀신으로 만들어낸다.
얀은 짐에게 의지하며 천천히 사랑에 빠진다. ‘귀신이라니, 미친 소리하네’같은 말이 아닌 ‘귀신은 없으니 두려워 말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따뜻한 사람. 그런 짐을 두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짐도 얀을 만나며 호감을 느끼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그는 의사와 환자의 사이엔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얀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둘 순 없다고 말한다. 가볍게 흘러간 ‘의존’이라는 단어는 짐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그의 가장 큰 상처에 대한 힌트였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한참을 고민하던 짐은 상처를 극복한 얀을 보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얀은 짐을 통해 외로움을 채워갔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오래된 상처인 부모님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얀은 자신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했고, 더 이상 귀신을 보지 않게 된다.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의 죽음 이후로 처음 연애를 한다. 첫사랑인 유에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은 짐이 외면하고 묻어뒀던 죄책감과 고통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잊기로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국 찾아버린 1982년, 유에가 자살하던 그날의 기억. 짐은 끝까지 유에의 죽음을 모르는척하고 싶어 했지만, 그가 마음 깊이 묻어뒀던 소년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무의식 상태로 집을 뒤지던 짐은 유에의 흔적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유에의 흔적이 담긴 편지와 그녀의 기사가 담긴 신문.
짐은 가장 순수했던 그 시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소녀가 자신을 탓하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너무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기에 짐은 아예 그 순간과 유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오래도록 묻어뒀던 고통이 현실로 다시 떠오른 순간, 그것은 공포가 되어 짐을 조여온다.
얀과 짐은 서로에게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를 직면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얀은 짐을 통해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 유에를 떠올리고 그녀가 울린 알람에 눈을 떠 유에의 흔적을 마주한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슬픔과 상실을 인정하는 과정은 고통을 귀신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짐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기억에 괴로워하며 유에의 귀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난 지금까지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할 수 있겠어.”
사랑하는 소녀 유에가 나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슬픔과 고통. 짐은 밀려오는 충격에 힘없이 비틀거린다.
부끄럽지만 진심이었던 날들, 찬란한 오후에 함께할 미래를 약속했던 빛나는 순간. “네가 죽으면 함께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웃던 소년소녀. 유에의 죽음으로 사랑과 약속들이 순식간에 깨지고 짐은 결국 모든 걸 잊는다. 그리고 고통과 더불어 유에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도 모두 묻어버린다.
짐은 유에처럼 옥상의 끝에 서서 유에의 귀신을 바라보며 유에와 함께했던 시간을 천천히 떠올린다. 끝은 고통이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기억. 그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진 아름다움’으로 흔적 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제부턴 아무것도 잊지 않을게”라고 다짐한다. 그날 밤, 짐은 괴롭다는 이유로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그리움과 사랑으로 물든 인생의 한순간을 되찾는다. 유에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엔 얀이 서있고, 짐이 유에에게 선물했던 새가 묻힌 무덤가엔 새 두 마리가 앉아있다. 짐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슬픔의 색이 옅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그 기억과 흔적 위에 얹어진다. 오랜 외로움이 버티고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생겼음에도 아직 환한 웃음을 되찾지 못한, 조금은 퍼석한 표정의 짐을 보며 여전히 위태롭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그의 옆엔 얀이 있으니까.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별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충격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짐처럼 사랑했던 이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겪었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나도 짐과 비슷한 일을 겪으며 “차라리 그를 모른 채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모든 흔적을 외면하려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외면한다고 해서 고통이나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이제는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밟으며 건강하게 그리워하고 있지만, 슬픔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슬픔에 젖어 아팠던 날들을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결국은 웃으며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오늘이 왔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 당장은 무섭겠지만 그렇게 마주한다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더 나아가 웃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 대사를 몇 번 곱씹다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배우 장국영. 그와의 이별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슬픔이 됐겠지. 하지만 그때의 상처를 극복하고 오늘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참 놀랍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사히 슬픔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용감하고 강한 그대들이 참 멋지다고, 그 마음 오래도록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오래오래 함께 그리워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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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그해 여름, 남매 성장기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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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윤단비 감독 작품, 2019년, 104분, 한국.)
〈남매의 여름밤〉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유년의 기억 한 페이지를 소재 삼아 아이의 성장기를 담아낸 영화다.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때로 격정을 느끼고, 아파하며, 성장한다. 여름과 성장의 질감이 짙게 묻어나는 이 영화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철거를 앞둔 재개발 골목에 흰 다마스 한 대가 서 있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옥주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동주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의 집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나무로 된 짙은 갈색의 실내 장식에서 나는 냄새가 화면 바깥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어느새 아늑해지는 그런 냄새. 옥주와 동주는 아주 느린 속도로 말하고 걷는 할아버지와 그의 흔적이 담긴 집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내 적응하고는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빠르게 흘러가는 아이들의 시간은 꽤나 잘 어울려서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굉장히 섬세하고 구체적인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어떻게 상상하고 연출했을까 싶은 장면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남매의 기분 좋은 여름날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시간은 마냥 행복하게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들은 성장한다. 첫 번째는 어른이라는 문제다. 옥주와 동주는 어려운 형편에도 남매를 잘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남편과의 문제로 언젠가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사는 고모를 잘 따른다. 자신들을 아껴주는 어른들의 마음이 진짜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에 지친 어른, 현실에 지치다보니 현실과 닮아버린 어른이기도 하다. 두 어른은 거동이 힘들고 용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을 팔고자 한다. 이것만으로 아빠와 고모를 욕할 순 없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른이 엄청난 품이 드는 돌봄노동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매우 힘들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꼭 그 집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도 맞다.
그러나 여기에는 빠진 게 있다. 옥주는 요양원과 집 문제를 두고 아빠에게 묻는다.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요양원),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했어?”(집). 옥주는 두 어른보다 현실과 윤리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다. 설령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더라도, 집을 판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결정의 주체 혹은 의논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두 어른은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다. 다소 화가 난 듯이 보이는 옥주의 감정은 정당하다. 어른이 부재한 곳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두 번째는 엄마 문제다. 옥주는 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동주를 자존심도 없냐며 다그친다. 아마도 엄마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동주에게 엄마를 만나러 가면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그런데 동주가 몰래 나가 혼자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 온다. 옥주는 화가 나서 이를 뺏으려 하고, 동주는 엄마의 선물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두 남매는 소리 지르며 몸싸움까지 한다.* 그러나 옥주가 이렇게 화가 났던 건 사실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 문제에 의연한 척했던 건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긍정하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 그 역시 동주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와 청년의 경계에서 홀로 의연히 버텨내고자 하는 옥주의 의지가 대견하면서도 쓸쓸하다. 그해 여름 한 소녀의 지극히 사적인 성장통이 보편적 호소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덧. 이 영화를 배리어프리 영화(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제작된 영화)로 봤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한국어 영화를 자막(일반 자막이 아닌 배경음악 등에 대한 정보까지 포함한 상세한 자막), 내레이션(박정민 배우가 재능 기부한 것으로 화면 움직임에 대한 해설 등으로 구성)과 함께 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의 문장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문학적인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화면 대신 내레이션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이 그려냈을 남매의 여름밤도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싸우는 두 남매를 중재하며 달래주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남매를 다독인다는 것은 아빠와 고모의 판단이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우리 시대의 어른됨이 정상성(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육체적, 정신적 기준)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현실’이 인간을 찌들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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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if)으로 써 내려간 매력적인 문항들
2016년 5월 9일. 전역을 16일 정도 앞둔 시점에 진지 공사를 하다가 간부님에게 "전문하사"를 제안받았다.
결국, "NO(아니요)"라는 대답으로 없던 일이 되었지만 고민을 안한 건 아니다.
첫 번째, 복학까지 9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두 번째, 다가올 실사격 훈련에 "HE(고폭탄)"아니라 "RAP(로켓추진 고폭탄)"을 쏜다고 하니 혹하더라 - 근데, 유격은 싫다.
만약에 그때 "군인"을 했었다면, 지금의 블로거 "파천황" 혹은 "간호사(예비)"는 없지 않았을까?<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 이후 "MCU"의 테마는 "멀티버스"인데, 공교롭게도 "루소 형제"가 나간 시기와 맞물린다.
"마블"의 최전성기를 이끈 이들이기에 엉망진창인 "멀티버스"에 늘 마음이 걸렸다.
제작에 참여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으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블린"이 혼란에 빠진 멀티버스를 구해야 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첫 극장 수입 1억 달러를 안겨주었다. - 최근 <그레이 맨, 2022>을 포함해 "스트리밍"이 많았다.1. 왜, 안 보세요들?
현재(10.14 기준)까지 국내 누적 관객 수 19,211명을 기록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익숙한 작품은 아니다.
"멀티버스"와 "루소 형제", 그리고 "양자경"까지 이름을 올렸지만 "루소 형제"가 직접 감독한 작품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양자경"이라는 배우는 알긴 할까?
"마블"때문이라도 "멀티버스"의 개념이 익숙할지 몰라도, 어느 관객들이 '139분이나 되는 영화를 선택할까?'싶다.
그렇기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작품이다.결국, 해당 작품에서 관객들의 흥미를 좌우할 부분은 '멀티버스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확장되면 될수록 재밌는 이야기의 강점을 살펴보자!
극 중. "에블린"과 남편 "웨이먼드"는 아버지와 딸 "조이"까지 겉으로 보기엔 화목한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국 국세청의 압류에 처했고 딸 "조이"는 성적 취향을 포함해 모든 것이 불만이고 아버지는 혼자선 아무런 일도 못하는 "설상가상" 시퀀스를 보여준다.2. 극장에서 상영하는 가장 재밌는 영화!
그래서, 이후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만약(if)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미련 가득한 말인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물론, 결과가 정해진 전체 하에 진행되는 가정 하에 진행되나 이만해도 "이블린"을 비롯해 악당의 동기를 설명해 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야기만 들어도 이의가 없지만, 영화는 이 과정에서 8-90년대 홍콩 영화들이 보여주었을법한 액션들로 설득한다. - 실제로, "양자경"은 <예스 마담 시리즈, 1985-87>로 그 시기에 활약한 배우이다.결과만 본다면, "성룡"의 영화들에서 볼법한 사물 액션들로 최근 이들이 선보였던<그레이 맨, 2022>보다 더 박진감이 느꼈을 정도로 훌륭하다.
어찌 보면, "독립 및 예술 영화"로 분류되긴 하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그 어떤 작품들보다 더 오락 영화를 표방한다.
물론, '15세 관람가'치고는 성인 용품들을 비롯해 잔인함(종이의 면으로 손가락을 베려 한다. 으으...)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렇게 재밌는 영화가 또 있을까?3.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라는걸,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어떤 선택으로 인해 포기된 기회들 가운데 가장 큰 가치를 갖는 기회 자체 또는 그러한 기회가 갖는 가치를 "기회비용"이라 한다.
마지막에 다다른 악당은 "에블린"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말로 회유하려 들지만, 끝내 실패만을 고집하는 현재를 선택한다. - 배우와 요리사, 사랑까지 어떤 것이든 지금보다 나을 텐데 왜 그럴까?
앞서 언급한 "기회비용"의 주체는 가장 큰 가치를 선택하고, 나머지들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속한다. - 재밌는 건, 다른 차원에서는 딸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독신을 선언했던 어머니만 하더라도,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나와 동생을 낳았다.
그리고, 자식의 입장에서 기억하기에도 정말 고생도 많이 하셨음에도 "만약"과 "후회"란 단어는 입 밖에 내놓질 않는다.
물론, 누가 보기에 따라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결정된다.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에서 말이다!· tmi. 1 - 당초 예정된 주인공은 "성룡"이었지만, 불발되며 그의 아내로 캐스팅된 "양자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보다 풍성해져서 만족스러웠다는 후문이...
· tmi. 2 - 극 중. "이블린"의 아내로 등장하는 "웨이몬드"역의 "키 호이 콴"은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 "존스 박사"의 조수 "쇼티"를 맡았던 그 배우가 맞다!
· tmi. 2. 1 - 이후 <구니스>까지 출연했으나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가 출연하는 데에 힘듦을 느껴 은퇴하고, 스턴트 감독으로 활동했으나 "양자경" 배우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관람하면서, 배우 복귀를 선언했다! (3번 봤는데, 3번 다 울었다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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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한 아이들
여기 한 한부모 가정이 있다. 엄마는 아들이 느낄지 모르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나가고자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아들은 점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점점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터널에서 발견이 되질 않나, 학교에서 선생님과 나눴던 이해 못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조합해 보니 아들이 담임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학교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학교의 대응은 무성의하기 그지없다. 사과는 하는데, 눈에 영혼들이 없다. 절차 상 필요한 행동만 하고 사건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과정에서 담임에게서 아들이 왕따를 주동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전하는데........ 이 일의 진위는 무엇인 걸까? 내 아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엄마는 혼란을 감출 수 없다.
1. 3가지 시점이 존재하는 영화
영화는 주인공이 두 명이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두 명의 시점에서만 진행되진 않는다. 미나토의 엄마, 미나토의 담임 두 사람의 시점도 함께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시점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본 것만 믿으면서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소문을 창조해내는 한없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1-1. 아이들의 시점
한 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미나토와 요리, 두 친구는 멀리서 보면 그리 친해 보이진 않는다. 표면적인 교실의 풍경 속에서 요리는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미나토는 그 왕따를 관망하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이 둘이 정말 영혼의 단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른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거라고 몰아갈 수는 없다. 어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아이들이 굉장히 잘 숨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들이 잘 못 생각하는 지점 중에 하나가 초등학생들의 심리 정도는 어른들이 가뿐히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틀렸다. 아이들도 집단으로 뭉치게 되면 그 어린 영혼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존재하게 되고, 집단 논리라는 것이 생긴다. 요기는 그 집단의 논리에 적응을 못해 남자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였고, 미나토는 집단의 논리에는 순응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반감이 있었던 아이였던 것이다. 이 두 지점이 통했던 아이들은 수업 시간이 끝나면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가 힐링의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별해야 할 시점이 오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그저 우정이 아니라 그 너머의 있는 감정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감정은 어린 초등학생이 느끼기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1-2 담임
담임은 표면적인 잘못은 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 사이에 어떤 논리가 형성되어 있는지부터 학생들의 개개인적인 특성을 잘 알지 못했다. 표면적인 평화를 지키는 데에 급급했을 뿐이다. 그는 학교폭력을 저지르거나 세상의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아이들이 숨긴 메세지가 불러온 나비효과에 직격탄을 맞은 것 뿐이다. 요리와 미나토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이들이었지만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표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혼란한 감정들을 말이다. 조금만 관심있게 지켜봤었다면 이 아이들이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 않아도 아주 깊은 공감대가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성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성애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범주이기에 설마 이 어린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 지점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3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
사오리는 아들의 상처를 보고 폭력을 당했다고 1차원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곧장 학교를 달려가 항의를 하는데, 점점 미나토가 이상한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라는 둥, "아빠는 다시 태어났을까" 등등 엄마로서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말들을 한다. 정상적인 엄마라면 사오리의 행동이 정당했겠지만 미나토가 엄마에게조차 자신의 동성애 기질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사오리는 과연 자신의 아들을 잘 알고 있었던 걸까 의심하게 된다. 모든 엄마들은 자식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친근함을 느끼는 존재에게마저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철저히 숨긴다. 나는 내 아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며, 그 오만으로 사오리는 자신의 아들이 명백히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갖혀 한 교사를 폭력 교사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돌아왔다.
일본이 사회적 이슈들을 소재로 삼아 영화화 해왔던 감독인 만큼 이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도 이지메라는 일본 사회의 왕따를 앞세워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진짜 키워드는 동성애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느끼는 동성애, 그리고 그 혼란한 감정을 숨기는 과정에 있어서 어린 아이들의 서툰 모습들이 어른들의 삶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이야기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잔잔한 파도처럼 시작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다. 잔잔한 과격함이 있다라고나 할까. 분명히 자극적인 내용이기는 한데, 모든 인간군상에 대한 이해를 하게 만든다. 그게 고레에다 감독의 장점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분명 선악이 명확하지 않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만든다. 이건 범죄자를 미화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저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 그런거지 하면서 씁쓸한 인정을 하게 만든달까.
3. 괴물이라는 제목
영화는 요리보다는 미나토의 관점이 주된 영화적 시점인데, 요리 캐릭터도 흥미로운 것이 미나토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는데, 요리는 마치 이전부터 자신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온다. 아들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리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괴물 취급을 하고, 그렇게 괴물 취급을 당하면서도 요리는 특유의 해맑음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리의 그런 해맑음이 어린 아이가 경험하기엔 너무 가혹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느끼게 한다.
그래서 괴물이라는 영화 제목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보니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깨닫는 분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사회에 안정적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외계인 같기도, 때로는 괴물 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미나토도 언젠가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자신의 엄마 앞에서 자신의 아빠처럼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세상에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은 괴물이거나 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돼지의 뇌니 뭐니 하는 대사가 나오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 그저 안쓰러울 수 밖에 없었다.
4. 결말에 대한 의문
영화는 과연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빗속에서 실종된 아이들을 담임과 사오리가 찾아냈다는 장면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상에서 두 아이들은 비가 그친 뒤의 들판을 해맑게 뛰어나간다. 이것은 아이들이 나온 곳이 진짜 세상인 건지, 그들의 죽음 이후의 세상인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태가 어떤 것이든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안식을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에 미나토가 교장 선생과 부는 불협화음 색소폰이 그 증거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면 그저 힘껏 색소폰을 불어보라는 교장의 말에 희미하게 웃는 미나토의 밝은 웃음을 믿어보고 싶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돌파구를 찾은 거라고.
아, 그리고 담임이 궁지에 몰려 난간에 서있을 때 그 불협화음 색소폰이 울려퍼지는데, 보면서도 이 기괴한 음악은 뭘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미나토의 일종의 절규였음을 알게 되자,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의 모호하지만 처절한 외침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곱씹을수록 슬프면서도 선생님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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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과 함께 추락하는 영화, 문폴
재난 영화 전문 감독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신작 문폴이 공개되었습니다.
이번엔 달이 추락해 지구와 충돌하게 되는 재난을 담고 있죠.
재난 전문 감독의 영화답게 달이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다양한 재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많은 재난 장면들이 이미 과거에 본 적이 있죠?
그래서 기시감이 많이 들고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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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피 아워> 메인 예고편
30대 후반에 접어든 네 명의 친구 아키라, 사쿠라코, 준, 후미.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준은 이혼 소송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서 이들은 "진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을 솔직히 들여다보며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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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2차 예고편
관능적으로 녹여낸 신분 초월 로맨스! 2022년, 웰메이드 파격 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