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7-04 16:37:30
7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라라랜드> 데이미언 셔젤 차기작 '감옥' 배경 영화
<위플래시> <라라랜드> <바빌론>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님의 신작소식!
7월 1주차 씨네뉴스 함께해요!
<탈주> <인사이드 아웃 2> 제치고 1위
이제훈, 구교환 주연의 <탈주>가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습니다.
줄곧 1위를 달려온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을 제치고
개봉 첫날 11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탈주>는 내일을 위한 탈주를 시작한 북한 병사 규남과 오늘을 지키기 위해 규남을 쫓는 보위부 장교 현상의 목숨 건 추격전을 그린 영화입니다.
케이트 블란쳇 X 정호연 <누군가는 알고 있다> 10월 11일 첫 공개
정호연이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애플 TV+ <누군가는 알고 있다>의 공개 일이 정해졌습니다. 작품은 영국 작가 르네 나이트가 2015년 발표한 동명 소설 원작으로 유명 저널리스트가 어느 무명작가로부터 자신의 비밀이 담긴 소설을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심리 스릴러이며, 케이트 블란쳇의 비서 역할을 맡은 정호연은 똑똑하고 활기찬 야망을 가진 여성을 연기한다고 합니다.
<라라랜드> <바빌론> 데이미언 셔젤 차기작 ’감옥’ 배경 영화
‘월드 오브 릴’에 의하면 지난 4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파라마운트와 함께 차기작을 진행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감옥 배경의 액션 요소가 가미된 드라마 장르로 전해지고 있으며 25년에 개봉 목표를 밝혔습니다. 감독은 <위플래시>, <라라랜드>를 평단의 호평과 흥행에 성공했지만 <퍼스트맨>, <바빌론> 흥행에 실패하면서 할리우드에서의 환영이 예전같지 않다는 평입니다.
웨이브, 부천영화제 90개 작품 특별 편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웨이브에서 내일(5일)부터 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오픈합니다.
장편영화는 총 16편, 단편영화는 총 74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람건수 500건 초과 작품은 조기 종영될 수 있습니다. 영화제 현장을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팬들은 물론 평소 접하기 어려운 수준 높은 장르 영화를 원하는 이용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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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스포라들의 뿌리 내리기, <미나리>
※ 이 글은 영화 <미나리>의 내용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1. 국경을 넘어 씨를 뿌리는 자들
디아스포라(diaspora)란 '~넘어', '경유'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전치사 '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spora'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다시 말해, '국경을 넘어 씨를 뿌리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본래 이스라엘 밖을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의 태생지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주민, 난민, 이주노동자, 소수민족 공동체 등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디아스포라들이 만든 작품들을 두고 디아스포라 문학, 디아스포라 영화 등이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아이작 정 리의 영화, <미나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이민 1세대들의 이야기를 그렸으니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 디아스포라'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 <미나리>에서 '한국'과 '한국적인' 것에만 초점을 둔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전하는 많은 메시지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분명히 이 영화는 곳곳에서 한국적인 요소들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적인 공감을,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영화계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독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미나리>가 이토록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감받지 못하는 영화는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나리>는 누구의 공감을 받았을까? 다름 아니라, 또 다른 '디아스포라'들이다.
그렇다. 디아스포라들의 땅인 미국에서, 이 영화가 각광받는 것은 이상할 일이 없다. 시기는 다르지만 그들은 저마다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에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 그 과정은 때론 희망적이고, 때론 처절하다. <미나리>의 가족들의 모습은 재미 동포들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미국 시민적인 모습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2021년.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혹독한 타향살이를 경험했고, <미나리>는 그때의 뼈아픈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보편적이다.
<미나리>가 '제이콥'이 낯선 아칸소에 한국 작물의 '씨를 뿌리는'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 디아스포라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새로운 땅에 뿌리내리기
자, 이제 본격적으로 <미나리>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디아스포라들이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자' 분투하는 이야기이자, 이성과 감성, 현대적 사고와 전통적 사고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화분을 분갈이해 본 적이 있는가? 아주 건강한 식물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옮겨도 식물은 본래 있던 화분에서 뿌리째 뽑혀 낯선 흙에 심기는 것을 버거워한다. 그들의 뿌리는 이질적인 흙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한다. 잔뜩 움츠러든다. 어떨 때는 잎이 죄 시들기도 한다. 새로운 흙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고달프다.
그것은 디아스포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이고, <미나리>의 주인공, 제이콥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바퀴 달린 집이다!"
그들의 바퀴 달린 집은 언제든지 토네이도에 휩쓸려갈지 모른다. 낯선 아칸소 땅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제이콥 가족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제이콥 가족은 이미 미국에 이민 온 지 10년이 지났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제이콥은 그들의 '에덴 정원'을 일구어 성공을 이루어내야 한다. 10년 동안 유능한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으나 뾰족하게 가계를 성장시키지 못한 그에게 농장은 마지막 보루이다. 모니카는 심장이 약한 데이빗이 늘 걱정이다. 아칸소의 병원은 집에서 너무 멀리 있고,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를 아이의 위험에 대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이의 안전과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자 목표다. 앤은 매일 같이 싸우는 부모님과 아픈 남동생을 둔 장녀이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또래보다 먼저 성숙해야 한다는 마음의 굴레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데이빗은 심장에 구멍이 나 있다. 그는 언제나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아이답게 한창 뛰어 놀 나이지만 그러지 못한다.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연약한 아이'라는 말을 멍에처럼 쓰고서.
수평아리는 쓸모가 없어. 그래서 폐기되는 거야.
그러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병아리 감별소에서 제이콥은 데이빗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처지는 병아리 감별소의 병아리들과 다를 것이 없다.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지만, 쓸모가 없으면 '폐기된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절실해진다. 살아남고 싶기 때문이다. 잘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3. 우물 찾기의 여정
"나는 여기에 가든을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은 절실한 만큼 자수성가의 꿈을 키워나간다. 이렇다 할 밑천도 없이 빛으로 시작한 농사일이었지만 그는 이 일에 꽤 자신이 있었다. 해마다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만 3만여 명이라고 하니, 한국 농작물을 파는 일은 썩 전망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멍청한 미국 놈들'이나 '약삭빠르고 제 잇속만 챙기는 도시에 사는 한인들'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없는 들을 일구고 우물을 판다.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한국 사람은 말야,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야.
그의 이런 생각은 꽤 그럴싸해 보인다. 이웃의 폴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에 심취해 있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는 무지가 낳은 인종차별 발언을 쉽사리 내뱉는다. 우물을 찾아달라고 사람을 불렀더니 나뭇가지로 물을 찾겠단다. 명석한 제이콥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그러나 삶은 뛰어난 머리 계산만으로 꾸려 나가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뿌리 없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제이콥의 가정에는 혼란과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물고 날아올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다.
4.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순자
어린 데이빗이 보기에 순자는 할머니답지 않은 할머니다. 맛있는 쿠키를 굽기는커녕, 요리는 통 할 줄 모르고,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화투 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남자아이인 자기를 '프리티 보이'라고 하질 않나, 밤새 오줌을 좀 쌌기로서니 고추가 망가졌다고 '딩동 브로큰'이라고 하질 않나. 그녀가 그에게 건네는 것은 달콤한 케이크가 아니라 쓰고 고약하기 짝이 없는 한약이다.
데이빗은 생각한다. 이런 할머니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정도의 차이가 좀 있을 뿐이지, 그 사정은 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자란 두 아이에게 지극히 한국적인 '순자'는 너무나 낯설다. 이 할머니라는 존재는 당최 납득이 안 간다. 그래서 처절하게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가 싫어요!
"아팠을 텐데도 잘 참아냈구나. 스트롱 보이네, 스트롱 보이!"
앤과 데이빗에게 순자는 '틀'을 깨는 사람이다. 미국 할머니라면 하지 않을 법한 일을 스스럼없이 하고, 엄마(모니카)라면 하지 말라고 했을 일을 해도 좋다고 한다. 합리적이지 않다. 전통적이며 감성적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일에 익숙한 그들에게 순자의 모든 행각은 낯설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자에게 물들어 간다.
순자는 '아이들은 원래 아프면서 크는 거'라며 심장이 아픈 데이빗에게 뛰어도 좋다고 말한다. 만약 뛰기 힘들다면 걸어가자고 한다. 다친 아이에게 너는 연약하고 아픈 아이라고 하지 않고, 그 아픔을 이겨냈으니 강한 아이라고 한다. 그녀에게 데이빗은 언제든 죽을지 모르는, '쓸모없는' 아이가 아니라, 더없이 착하고 강한 아이다.
그녀가 보내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는 이성과 합리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데이빗은 그녀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스트롱 보이'이라는 순자의 말은 주술처럼 힘을 입어 데이빗을 강하게 만든다.
제이콥 가족은 순자의 등장을 시작으로 서서히 깨달아 나간다. 현대적인/도시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그들의 견고한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 땅에든 사람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광신도처럼 보이는 폴에게서 숭고한 지지를 얻고, 안 맞는 옷 같던 교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제이콥은 농작물 판매처를 찾았고, 데이빗은 심장 건강이 더 좋아졌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들의 삶은 좋을 것만 같다.
4. 인생은 새옹지마라
운명의 장난일까. 제이콥 가족이 꿈에 그리던 '온전한 자립'에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운명의 주사위는 그들을 두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같다. 그렇게나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은 야속하기만 하다. 데이빗의 몸이 좋아졌는데 순자는 뇌졸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한다. 농작물이 훌륭히 자랐으나 부부간의 감정의 골도 자라났다. 기껏 한국 농작물을 팔 거래처를 찾았는데, 바로 그날, 자식같이 기른 농작물들은 한 번의 화재로 불 타 사라진다.
영화는 단순한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이 있으면 그 너머에는 다시 좋은 일이 있다. 흔히 아메리칸드림하면 떠올리는 성공 신화와는 썩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파도치는 삶의 곡선 속에서 관객들은 제이콥 가족의 삶이 마냥 불행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불행의 순간은 언제나 닥쳐오지만 그 너머에는 다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므로.
뱀이 나온다는 수풀 사이에 발견한 샘에서는 순자가 한국 땅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밭을 이루었다. 제이콥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미나리. 그토록 근사하게 자란 농작물들이 불타 사라진 후 남은 것도 바로 그 미나리였다. 제이콥이 데이빗과 미나리를 캐러 가며 '할머니가 참 좋은 자리를 찾으셨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가 그간 품고 있던 고집을 버리고 그가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한 세계를 수용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 발짝 더 성장할 것임을 알게 해 준다.
5. 시련의 극복을 통한 성장 서사
다시 말하자면 이 한 편의 영화는 지독한 시련을 통해 성장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련은 뼈 아프나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혹은, 성장을 확인하게 한다. 제이콥은 애지중지 기른 작물들이 모두 불타는 그 헛간에서 비로소 모니카를 구한다. 자식 부부의 한 해 수확을 모두 불타게 한 자신을 자책하여 물가로 향하는 순자를 불러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앤과 데이빗이다.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집에 가요.' 심장이 아파 뛰지 못하던 데이빗은 할머니를 향해 달려간다. 손을 내민다. 심장이 아파 뛰지 못한다던 자신에게 할머니 순자가 기꺼이 손을 내밀어줬던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서사들을 통해 '쓸모를 증명하고자' 했던 제이콥 가족은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쓸모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운다.
그들의 뿌리내리기는 여전히 때론 즐겁고, 때론 고달플 것이다. 그러나 예전만큼 처절하거나 고독하지는 않으리라.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그들의 삶 속에는 푸른 미나리가 밭을 이루고 있을 것이므로.
+) 알면 재미있는 기독교적 관람 포인트
1. 제이콥은 히브리어로는 '야곱'이다. 약삭빠른 야곱은 신의 사자와 씨름을 하여 신의 인도와 번영된 삶(땅)을 약속받았다.
2. 데이빗은 히브리어로 '다윗'이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인과 싸워 이겼고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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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웨일' 리뷰
마케팅은 영화의 성패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명한 감독이 연출했거나 스타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면 마케팅 담당자들의 고민은 꽤 가벼워질 것이다. 영화 <더 웨일>은 독자적인 필모그래피를 구축해 온 세계적 거장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이름 대신 영화의 주연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출연한 영화 <미이라>의 대성공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물간 백인 꽃미남 스타 중 한 명'으로 기억하고 있는 브렌든 프레이저. '그의 연기가 대체 얼마나 놀랍길래 그를 중심으로 영화를 홍보하는 것일까?' 영화 <더 웨일> 개봉 소식과 홍보 포스터를 처음 접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더 웨일>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브렌든 프레이저)’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초고도비만 캐릭터로 분장한 브렌든 프레이저로 가득 찬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고 난 후에 이 영화는 주연의 연기가 실패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연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 '찰리'의 1인극 성격이 강할 것이고, 공간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연극처럼 느껴질 것이고,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나 <맨 프럼 어스(The Man From Earth)> 같은 몇몇 실내극 영화가 보여 주었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라면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한 상태에서 그의 마음을 조심스레 따라갈 수 있어야 영화적 체험을 했다고 느낄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분장에 비해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별로면 어떡하지?'라는 필자의 걱정이 기우로 판명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철까지 활용해 완성한 아주 사실적인 272kg의 거구 분장보다 브렌든 프레이저가 연기한 '찰리'의 커다란 두 눈동자에 바로 빨려 들었기 때문이다. 거구 캐릭터는 현대인의 수많은 정신적 장애 중 하나인 식이 장애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영화의 제목인 '고래(The Whale)'를 주인공의 신체를 통해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실제 몸에 육중한 지방 덩어리들이 붙어 있는 것처럼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도 압도적이지만 적절한 시점에 흔들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눈동자, 섬세한 오디오 감독이 조율한 듯 상황에 맞게 커지고 작아지는 성량 등 브렌든 프레이저는 '찰리'의 몸이 아니라 그의 눈과 표정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좋은 연기를 보여 준다. 덕분에 찰리와 엘리의 부녀 관계, 찰리와 리즈(홍 차우)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물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영화 <더 웨일>은 브렌든 프레이저의 빼어난 연기에 가려져서는 안 될 중요한 질문들을 품고 있다. 성경 구절과 함께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월트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 등 미국 현대문학의 중추적 작품들이 언급되면서 '한 인간 혹은 종교가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과 진실성인가?', '죽음 앞에서 우리가 세상에 남기고 갈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등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관객에게 건넨다.
동명의 연극이 원작인 영화 <더 웨일>은 고전적인 4:3 비율의 화면 속에서 유려한 촬영과 편집, 고래 울음소리 같은 음악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문학이나 연극과 차별화된 영화만의 예술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블랙 스완>의 엔딩 신처럼 눈부신 하얀빛으로 채워진 <더 웨일>의 엔딩 신을 보고 난 뒤 주인공 '찰리'의 마지막 도약이 진짜처럼 느껴진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찰리'라는 고래의 아름다운 마지막 꿈을 진심으로 응원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지난 2월 23일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진행된 <더 웨일>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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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다양한 형태
-헤어질 결심-
"최연소 경감 승진자이지만 불면증을 앓고 있는 경찰. 그의 앞에 나타난 젊은 중국인 과부. 남자는 남편 살인 사건의 피의자 신분인 그녀를 염탐하면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때론 연민을 느끼고, 때론 의심과 불안감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하는 듯 보인다. '사랑하는 듯'.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의 머릿속엔 박찬욱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선홍빛의 태양, 습습한 회색빛의 안개, 순백의 설산들이 가득 찬다. 서사보다 이미지가 더 각인되는 영화다. 그리고 가끔씩 우리 삶엔 불륜이라는 스토리보다 사랑이라는 본능 혹은 본질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해질 때가 있다. 붕괴와 희생의 순간을 배우들의 연기로 원자 단위까지 쪼개버린 듯한 이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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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이 만들어낸 가장 마법적인 공동체의 신화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믈로이)는 어머니(도라 반 더 그로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목소리 큰 남자들이 조용한 여자들을 짓밟는' 한적한 마을은 안토니아를 반기지 않는다. 강인하고 주체적인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스)과 함께 땅을 일구고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안토니아는 너른 품으로 마을의 소외된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안토니아의 긴 식탁은 풍요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안토니아부터 사라까지 4세대에 걸친 모계의 일대기를 그린다. 목가적인 농촌의 풍경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삶은 계절의 변화처럼 순환하며 계속해서 이어진다.
식탁의 공동체
이들의 주요 생계수단은 땅, 즉 농사다. 안토니아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농사일을 함께 하게 된다. 처음에 농사일을 도울 사람은 딸 다니엘뿐이었으나 루니 립이나 디디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시작하며 일손은 점점 늘어났다.
안토니아의 사람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단연 식탁이다. 넓은 마당에 놓인 기다란 식탁은 마음 놓고 먹고 마시며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휴식처이다. 식탁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관계는 혈연관계에서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식구'이다. 식탁 중심의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한다. 이들을 살찌우는 것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아니라 안토니아를 기반으로 다져진 단단한 신뢰다. 누군가 갑작스레 이 식탁의 손님으로 찾아오더라도 문제는 없다. 자리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그만이다.
안토니아는 마치 건국 신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아의 정착기는 황무지를 일구어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안토니아를 주축으로 한 공동체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어떤 여성도 소나 돼지처럼 대우받지 않고, 조금 느리거나 튄다는 이유로 돌을 맞지 않는다. 안정과 풍요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의 바탕에는 안토니아라는 굳건한 땅과 식탁의 공동체가 있다.
경계의 리더십
안토니아는 힘과 폭력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안토니아의 방식은 기존의 남성적 방식과도 다르고 흔히 여성에게 기대하는 '헌신적인 모성'의 성격과도 다르다. 안토니아는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지고 구성원들을 이끌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이들의 의사를 존중한다.
안토니아의 리더십은 경계를 지어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떤 관계에서든 협상의 태도를 보인다. 이를테면 결혼을 청하는 농부 바스가 찾아왔을 때의 대화가 그렇다. 일단 그의 요구를 듣는다. 아내와 엄마를 원하는 바스의 제안을 안토니아는 단호히 거절한다. 남편도, 아들도 필요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다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도와주면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제안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파악한 뒤,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의 것을 제시한다. '너는 여기까지 올 수 있고 나는 여기까지 내줄 수 있다.'는 태도다. 서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다. 힘으로 제압하거나 상대를 깔보지 않으며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세련된 리더십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남성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피트에 맞서는 시퀀스도 안토니아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안토니아는 총을 가지고 가지만 그 용도는 위협에 그친다. 총구는 시종일관 피트를 겨누고 있지만 그에게 발사되지는 않는다. 안토니아는 피트에게 경계를 정해줌으로써 그를 처벌한다. 마을을 떠날 것, 다시는 눈에 띄지 말 것. 다만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자신의 무리에 위해를 가한 자에게 내리는 심판에 협상은 필요 없다. 총구를 단단히 겨눈 팔과 저주를 퍼붓는 단호한 얼굴 뒤로 마을 남자들이 서 있는 장면은 안토니아가 이미 마을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신이다.
신화와 창조성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단순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의 이야기를 한다고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신화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 신화의 바탕에는 여성들의 고유한 능력인 임신과 출산이 있다. 4대에 걸쳐 펼쳐지는 모계의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여성이 지닌 창조성 덕분이다.
다니엘이 딸 테레스를 가지게 되는 경위를 생각해보자. 다니엘은 아이를 원했지만, 남편과 결혼은 원치 않았다. 다니엘과 안토니아는 아이를 얻기로 한다. 여기서 남자의 역할은 한 번의 성관계를 함께 하는 것이 전부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필요도 없고, 남자 역시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딸 테레스는 다니엘의 딸이 분명하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고 산뜻하게 그려진다. 감독은 중요하지 않은 아버지의 역할보다 생동감 넘치는 여성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들의 창조력은 비단 임신과 출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은 그림으로, 테레스는 음악과 수학으로, 사라는 글로써 창조력을 뿜어낸다. 이들의 삶에는 폭발적인 창조력이 꿈틀거리고 있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안토니아의 죽음이 '끝'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이야기는 자손들에 의해 불멸할 것이다. 안토니아 개인은 그저 필멸의 생을 지닌 인간이지만, 그가 창조한 자손과 질서와 공동체가 이어져 불멸할 것이다. 필멸하되 불멸하는 인간의 기나긴 흐름이 담겨있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신화적인 면은 이 불멸성에서 드러난다.
환상의 이미지
작품 속에서 다니엘과 사라는 종종 환상의 이미지를 마주한다. 안토니아의 어머니 일레곤다의 장례식에서 다니엘은 관에서 일어나 흥겹게 노래 부르는 할머니의 환상을 본다. 예수 조각은 고개를 움직이고 천사 동상은 날개로 신부를 내리친다. 라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 다니엘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다니엘은 이미 절대자의 허락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고 유쾌하다. 그렇기에 교회의 세속적인 신부가 아무리 다니엘과 안토니아를 힐난해도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다. 다니엘은 종교와 신화의 위에서 자유롭다.
다니엘이 미술적인 환상을 본다면 사라의 환상은 조금 다르다. 안토니아의 증손녀인 사라가 가족의 구심점인 식탁을 보며 죽은 이들의 환상을 보는 신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일레곤다, 크룩 핑거, 미친 마돈나와 신부, 레타, 디디의 남자 형제들, 루니 립은 사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식탁 옆에서는 젊은 모습의 안토니아와 바스가 춤을 춘다. 감독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켜보는 사라의 시선을 따라 하이앵글의 풀숏으로 이 장면을 담아낸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이 꿈같은 장면은 안토니아의 가족을 거쳐간 죽은 이들을 다시 식탁으로 소환한다. 실제로 사라가 그들을 아는지 상관없다. 안토니아의 삶의 궤적은 사라에게도 각인되어 이어진다. 마당에서 펼쳐진 환상적 이미지는 안토니아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작품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내레이터이기도 한 사라가 모든 것을 지켜보며 훗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내리라는 것을 안다. 안토니아의 마지막 아침에서 시작해 주마등 같은 그의 젊은 날들은 사라를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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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어느새 71세가 된 조반니 “난니” 모레티 감독의 최신작 <찬란한 내일로>는 그의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고려하면 일견 수수해보인다. 난니 모레티는 본명과 직업이 같은 주인공을 직접 연기하며, 나이든 감독이 평생 잘 굴려왔다고 믿은 영화와 가족 양측에서 내쳐지고 비로소 얻은 깨달음과 후회를 코믹하게 펼쳐둔다.
<아들의 방>과 <악어> 시절부터 모레티와 오랫동안 합을 맞춘 마르게리타 부이, 실비오 올랜도 등 반가운 배우들이 극중 조반니의 오래된 동료나 부인으로 분하더니, 크레딧 롤을 대신하는 듯한 마지막 행진 장면에서는 아예 지금껏 협업한 배우들을 카메오로 불러내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알바 로르바케르(일층 이층 삼층), 자스민 트린카(아들의 방), 다리오 칸타렐리(미사는 끝났다/아들의 방/악어/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등), 줄리아 라짜리니(나의 어머니), 안나 보나이토(악어)와 리나 사스트리(에체 봄보)까지. 송경원 평론가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대행진‘이다.
거장이 된 창작자가 자기 ‘사단’을 불러다놓고 (그동안 지겹도록 말해진) ‘영화 만드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우회적으로 논하는 자전적 작품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거장들은 자꾸만 일생의 마지막 정리를 하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그런 영화들은 종종 긴 세월의 노고를 함께 해준 ‘이너 서클’에 대한 우애나 자기 자신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애틋한 치하를 필연적으로 담지하고 있어 관객인 내게 애수와 함께 아주 미약한 피로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반드시 사변적이라거나 습작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확률상’ 그런 루프에 빠지기 쉬운 것도 사실인데, 노장의 자전적 필모그래피란 그런 습작성을 가릴 만큼의 노련함까지 갖추고 있어 소위 ‘흐름’을 타지 못하면 영화 내내 홀로 축제에 합류하지 못한 찝찝한 기분으로 뒤에 남겨지기 일쑤였다. 서사성의 결여, 자기애적 회고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만듦새를 돌아볼 새가 없어지고 그 무엇보다도 ‘감독의 리듬과 나의 리듬이 잘 맞는가’가 가장 중요해지고 마는 아쉬움. 굳이 꼽자면 내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나 빅토르 에리셰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그런 작품이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적인 영화, 우회하지도 않고 그 어떤 서사적 덧붙임도 없이 본연의 ‘일 이야기‘로 직행하는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는 왜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만점짜리 영화로 마음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왜 이 화려하고 친밀한 출연진과 훌륭한 이탈리안 코미디로서의 연출과 노련한 ‘리듬감’을 보고도 이 영화가 편안하고 충만한, ‘자신과 너무 먼 나를 받아들이는’ 영화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영화적 야심의 충족 대신 환대와 허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장들(보다도 그들의 맹목적 추종자들)이 숱하게 저지르는 실수와 달리 난니 모레티는 ‘영화를 마음대로 해석해주는’ 관객에 대한 불만을 전연 느끼지 않고 오히려 모두의 즐거움을 보장하는 따스한 경청의 태도를 취한다. 영화도 그렇거니와 영화 바깥의 태도 역시 그러하다. 한국 관객들과의 씨네토크에서 그는 특정 장면의 ‘의도’가 헤집어질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연출했다고 말하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을 때 “영화는 크로스워드 퍼즐이 아니기 때문에 정답은 없고, 여러분도 몇 년 후 다시 보면 감상이 또 달라질 것”이라며 웃는다. 영화 속 조반니가 그의 영화를 맡게 된 낯선 한국 제작자들의 “사랑과 정치, 예술과 공산주의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해석에 그저 “네, 맞아요”라고 수긍한 것처럼 그는 타인의 의견에 (그것이 폭력과 비윤리를 미화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열려있(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저 먼 한국에서 와서 소주로 건배를 권하는 제작자를 생경하게 생각지 않은 조반니처럼 ‘나를 따돌리지 않는’ 영화다.
극중 조반니가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충돌에 관대한 인물이었냐 하면 물론 아니다. 난니는 페르소나인 조반니를 상당히 짜증스럽고 고압적이기도 한 연출자로 그려내는데, 편집증에 가까운 그의 강박은 애꿎은 젊은 스탭들을 괴롭게 하고 ’우리(부부) 얘기만 빼고 다‘ 하는 그의 일방적 수다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부인 파올라가 이혼을 결심케 만든다. 조반니는 혼자만의 의식에 집착하고 “단어 하나만 달라져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영화라면서 제작진과 배우들을 몰아세운다. “20테이크 정도만 더 찍자”는 조반니의 예사로운 말에 스탭들이 몰래 한숨을 쉬고, 스포트라이트나 즉흥 연기를 바라는 배우들은 “그 친구 클로즈업 안 해요”라든가 “카사베츠는 카사베츠고 이건 내 영화”라는 조반니의 단언에 허물어진다.
이런 조반니가 5년만에 찍고 있는 영화의 정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배경으로,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따른 이탈리아의 평범한 공산주의자들의 혼란을 담은 작품이다. 마을에 방문한 헝가리 서커스 단원들과의 심정적 연대, 정치적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처한 지부 사람들은 고뇌하며 갈등한다. 조반니와 함께 전동 킥보드를 타던 프랑스 제작자 피에르는 고전적인 영화를 두고 이렇게 상찬한다:
서커스는 현대 영화의 은유잖아요. 줄 하나에 매달릴 뿐 앞일을 전혀 모르니까요.
감독님 영화는 체제 전복적이에요.
조반니는 손사래 치면서도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짓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집 나간 부인의 행방을 찾다 외동딸에게 동음이의의 잔인한 선고를 듣기도 한다:
아빠랑 있으면 늘 외줄 타는 기분이긴 해요.
40년간 13편의 영화를 공동 제작한 동업자이자 부인 파올라가 새 영화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유망한 신진 감독 주세페를 밤새도록 가르치는 조반니를 보고 있노라면 이 ’외줄 타는 기분‘을 곧장 추체험할 수 있다. 스콜세지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 영화의 폭력성이 왜 정당하지 않은지 연출적으로 어떻게 부족한지를 설파하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완고한 침입자.
자기 영화 현장에서도 조반니는 마찬가지로 자기 ’원칙‘에 따라 소품, 의상, 촬영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들을 차례로 당황시킨다. 1950년대 물 상표부터 낡은 옷깃 표현까지 하나하나 간섭하는 그의 원칙이란 ’실제가 어떠했는지‘에 사활을 거는 척하면서도 결국 실제가 아닌 자신만의 고집에 복무하기에 허구적이다. “스탈린 포스터를 실제로 걸었더라도 내 영화에선 아냐”라든가, ”당시 실제 기사예요“라는 미술감독의 항변에 ”그건 상관없어요“라며 기사 캡션을 줄여 (자기 마음에 들게) 다시 제작해오라는 지시에서 이 원칙의 자의성과 이중성이 낱낱이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는 미학도 있지만 윤리도 중요”하다는 조반니-난니 모레티의 철학은, 넷플릭스-액션-(자칭)네오리얼리즘으로 요약되는 차세대 감독 주세페와 충돌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명료해진다. 키에슬로프스키를 거론하며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폭력 외의 다른 묘사는 전부 폭력에 대한 미화고 옹호라는 조반니의 지론은 넷플릭스식 액션에 익숙해지고 폭력에 매료된 현대 사회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물론 젊은 영화 연출가는 ‘최면에 걸렸다 깨어나서 우는 날’이 올 거라는 경고를 거부하고, 밤새워 강의하며 제작진 수십 명을 대기시킨 조반니는 파올라에 의해 현장에서 쫓겨난다.
“사악함밖에 없는 영화잖아. 당신까지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러더니 변했다”는 말로 파올라의 분노를 산 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노감독의 뒤로 그 매혹적인 폭력의 묘사가 배우들에 의해 간단히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조반니는 그를 무시하고 흘러가는 - 점점 더 빠르게,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 세상의 속도로부터 완전히 유리되고 있다.
몇십 년간의 영화/결혼 생활 동안 상대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완고함은 주변에 생채기를 내어왔다. “새 영화를 들어가서 상담을 줄일” 정도의 책임감으로 임하고 있고, “촬영장을 못 떠나겠어요”라며 기실 조반니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까지 자신도 모르게 설명한 파올라의 영화에 대한 (조반니 못지않은) 열정을 조반니만 우습게 알고 있다. 제작자 피에르가 사기 혐의로 붙잡혀 가면서 투자받기 어려워졌고, 못내 경멸하던 넷플릭스 투자를 꿈꿔봤지만 ‘왓더퍽’하는 모먼트가 없단 이유로 수정 요청을 받으면서 촬영은 점점 더 난항이 되어간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데려온 코끼리들은 싸움이 나고, 스페인 곰은 탈주해 숲으로 숨어들어가는 난장판이 프로덕션을 어지럽힌다. 오래 협업한 주연 배우 엔니오가 우물쭈물 의견을 밝히지 못하는 사이, 또다른 주연 배우 베라는 조반니가 싫어하는 뮬을 신고 “제게 연기란 재즈처럼 배우가 대본을 변주하는 일”이라거나 “누가 요즘 정치물 봐요? 이건 사랑 얘기예요. 모르시겠지만 그래요”라고 주장하며 대들지만 조반니에겐 그를 다른 ‘고분고분한’ 배우로 교체할 권위도 잃었고 사실 명분도 없다.
조반니는 자신만의 룰로 세상을 주물러왔지만 더이상 세상은 그의 틀에 만만히 잡혀줄 정도로 ‘고분고분하지 않다’.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폴란드 대사 예르치와 사랑에 빠진 딸처럼, 영화 속 의도되지 않았던 로맨스 서사를 쟁취하더니 현실에서도 결국 커플이 된 배우 베라와 엔니오처럼, 조반니와 같이 과거에 매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생히 역동하고 반응하며 조반니는 외로이 그 생기를 억누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타협하든가 잊혀지든가 둘 중 하나뿐이다.
만일 조반니가 묵묵함이라고 일컬어지던 불통, 장인정신이라고 오해되던 고집을 계속 발휘한다면 그의 영화도 삶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엔니오와 조반니의 다이얼로그가 암시하듯이.
“(주인공의 자살이) 영웅적이지 않나요?”
“과한 면이 없지 않죠. … 사실 영화 마지막 장면부터 떠올라서 나머지 대본을 썼어요.”
“언젠가는 하실 줄 알았어요. 주인공의 자살로 끝나는 작품을요. 감독님다워요.”
‘감독님답다’는 말에 멍해진 조반니는 “당신이 묻어있는 인물이 자살하는 결말인게 왠지 불길해”라던 파올라의 염려가 어떤 예지였는지 갑자기 깨닫는다. 혼자 사는 삶은 삶이라 부를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도 그를 찾아든다. 그래서 그는 세트장을 횡단이동해 옆방으로 건너가 (즉 그가 ‘원칙’에 충실하느라 앞만 보고 달렸을 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옆’으로 나아간다) 침묵 속에 잠긴다.
결국 한국 제작자들까지 모두 모인 폴란드 대사관의 다국적 식탁에서 “결말을 완전히 바꿔야겠어요”라고 조반니가 운을 떼는 순간 모두의 대사들이 생생히 터져나온다. 연출적 감동을 자아내는 이 극적인 소란 속 조반니는 독백한다. “삶에는 ‘만약에’가 없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만약에’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가 바란 ‘만약에’란 소련의 압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헝가리와 연대하며 폭력에 순응하는 대신 용기 내어 윤리를 선택한 1956년의 이탈리아이며(‘이탈리아 공산당은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결별하고 맑스, 엥겔스의 정신을 독자적으로 실현했다.’), 타인의 영향력이 자신을 침범하도록 놔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다(‘우리는 지금도 행복하다’).
찬란한 내일로 난니 모레티 감독 GV
with 씨네큐브 X 에무시네마 (에무필름) X 송경원 평론가
Q.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작년 칸에 둘 있었다. 감독님의 <찬란한 내일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Fallen Leaves. 56년 헝가리 혁명이 배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A. 두 가지 이유인데 첫째로는 근현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가 갖던 의미를 다루고 싶었다. 또 그때 이탈리아인들이 소련의 영향에서 해방될 기회를 놓친 때이기 때문이다.
Q. 중간부터 극 중 극과 별개로 젊은 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싸움이나 대사들은 마치 단막극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연출한 이유는?
A. 원래 겹겹의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다.
Q. 최근의 이탈리아 영화 제작 환경은 어떤 편인가? 극중 촬영과 실제 촬영 현장은 얼마나 다른가?
A. 다른 감독의 촬영을 멈추는 취미는 없고(ㅎㅎ) 춤도 안 춘다ㅎㅎㅎㅎ 예전의 나는 실제로 즉흥 연기를 반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조반니의 나머지 면과 나는 상당히 비슷하다.
Q. 감독님이 제일 애정하는 씬은 무엇인지? (송평은 이탈리아에 공산당이 있었냐고 배우가 맹하게 묻는 대본 리딩 장면부터 ‘아 내가 좋아할 영화다, 너무 재미있는 코미디겠구나’ 하고 확 끌렸다고)
A. 글쎄… 영화는 크로스워드 퍼즐이 아니기 때문에 정답이나 해답이 없다. 여러분들도 2년 후 다시 보면 또 감상이 다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탈리아 노래가 나오는 모든 씬, 그리고 그 젊은 커플이 나오는 장면을 좋아한다. 예전부터 50년간 함께 하는 커플을 (다큐멘터리처럼) 50년간 찍는 작업으로서 다루려고 시도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 숙원을 풀게 되었다. 또 커플 중 여자 쪽의 대사는 나의 개인적인 노트에서 가져와서 대본에 없는 대사다. 내 일기, 노트의 글들을 대사로 넣기 위해 연출한 것이기도 하다. 즉흥적인 결정이기도 했기 때문에 여배우는 당연히 대사를 다 외우지 못했고, 내가 카메라 옆에서 직접 말해준 장면도 있다.
Q. 극중 조반니의 촬영 현장을 구하는 한국인 제작자들이 나온다. 통역 격인 유선희 배우를 작년 칸에서 운좋게 만나뵀는데, 감독님에 대해 “20번 넘는 테이크를 찍는 완벽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수십 번 리허설한 대사를 현장에서 바꾸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A. 감독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기, 음악, 변칙 등 상세한 요소들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71세가 된 대감독인 저라도 (현장에 따라 즉흥성을 발휘하는) 이 정도의 반항심은 있어야 한다는 거다. 동시에 그런 (일관된) 연출을 위해, 배우들이 좀 지름길로 가고 싶어할 때가 있으면 내가 단호하게 멈추기도 했다.
Q. 아까 언급한 주세페의 영화에 끼어들던 장면. 거기서 “영화의 윤리”라는 게 언급되는데, 오늘날의 영화의 윤리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A. 반복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오늘날의 영화 제작진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폭력을 우대하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Q. 이 영화가 그런 현상에 대한 해독제라든가 반작용이 될 것을 의도했는지?
A. 그런 것을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관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 충실했기 때문에 나 역시 만족스럽다.
Q. 프랑스와 한국 제작자, 폴란드 대사 등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유는?
A. 먼저 프랑스 출신의 제작자들과는 친분이 두텁다. 내게 프랑스는 거의 제2의 고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폴란드 대사 예르치는 오로지 그 배우를 위한 역으로 만들어넣었다(배우분 본명도 예르치). 오래된 친구이자 동료였고, 그를 위한 역할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제작자들에 대해서라면, 이탈리아 사람이 재깍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에서 온 사람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살리고 영화를 마음대로/좋게 상상하고 해석해주는 부분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화 산업이 얼마나 활발하고 독특한지는 잘 알고 있어 원래도 관심이 컸다.
(송평: 그 ‘마음대로 해석해준다’는 부분과 관련해서, 이 영화가 그런 접근을 너그러이 허용해주는 영화라고 느껴져서 아주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런 지점이 가장 좋았다)
Q. 마지막 장면의 행진이랄까 축제 같은 장면에서 처음에는 작게 사람들을 잡다가 점점 행렬 규모가 커지고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던 배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바 로르와케르 등 감독님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이었는데, 이런 연출의 이유는 무엇인지.
A. 주조연 배우들과 1회차 촬영을 했는데, 갑자기 공산당 리더로 엔딩에 잠깐 나온 엑스트라 배우라든가, 작가들, 조감독들, 그리고 한국 제작진들까지 이 영화와 연관된 모든 인물들이 포함되면 좋을 것 같아서 2회차 촬영을 했다. 그런데 편집을 끝낼 때쯤 10~30년 전의 내 영화에 등장한 배우들까지도 다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해서 다시 3회차 촬영으로 마무리했다.
(송평: 정말 대단원의 대행진이라 할 만하다…)
Q. (플로어 질문) 차 속에서 노래를 틀고, 다같이 따라 부르는 씬이나, 조반니가 혼자 축구공을 위로 뻥뻥 차올리는 씬 등 전 영화들의 오마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의도된 것인지?
A. 사실 그런 장면들은 하나도 의도되지 않았다. 45년 간의 커리어를 이어오다 보니 우연히 겹쳤을 것이다ㅎㅎ 촬영 들어가기 전 다같이 노래하는 장면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무 뜻도 없다.
Q. (플로어 질문)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나, <롤라>, <라 돌체 비타> 등등… 서커스라는 모티브도 그렇고 이탈리아 영화들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난니 모레티 감독에게 페데리코 펠리니란?
A. 씨네마 그 자체. 덧붙여 한 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내 초기작에서 언급된 영화들은 사실 비판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인용한 영화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언급한 영화들을 비판받을 수 있는 자리에 놨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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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을 둘러싼 궁중암투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정립된 캐릭터와 세계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고뇌를 담아내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만큼이나 불친절하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설계한 작가주의적 세계를 선호한다면 여지없이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임은 명확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합병 이후 대영제국의 첫 번째 군주가 된 앤 여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영국사 측면에서도 혼동의 시기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승기를 잡은 영국은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자국의 입지를 더욱 공고화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한다. 하지만 ‘공짜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영국은 전쟁을 지속시키는 대가로 막대한 전쟁 자금을 내놓아야 했다. 이에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한 양 당(휘그당과 토리당)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감독은 당대 영국의 정치사적 배경을 발판삼아 앤여왕과 사라 그리고 애비게일의 관계성을 주요 플롯으로 재구성한다.
작가주의 영화는 사회적 모순이나 정치적 이슈에 대한 공동체 문제의식보다는 감독 개인의 철학적 고뇌를 담아낸다.
"장르영화" 중에서 배상준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장대한 역사 사건 중심의 전개보다 개인과 개인 간의 구도와 사건, 인물들의 심리에 치중한 작가주의 성향이 짙은 영화이다.여왕의 강력한 조력자 ‘사라’와 사촌 ‘애비게일’의 대립
영국이 막대한 전쟁 자금을 쏟아부으면서도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집권당이던 ‘휘그당’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라 역시 전장에서 거듭 승리를 이끌며 전쟁 영웅이 된 남편 ‘존 처칠’과 자신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해 휘그당과 뜻을 같이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와 다름 없는 군주의 옆자리를 꿰찼으니 ‘여왕의 여자’가 된 사라가 두려운 게 무어 있었을까. 휘그당은 물론이고, 야당인 토리당까지 그녀의 눈치를 살폈으니 사라는 실질적 일인자와 다름없었다. 적어도 사촌 동생 애비게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문의 번영과 안녕을 누려온 사촌 언니 사라와 달리 애비게일은 자신이 딛고 있던 기반이 무너져버린 경험을 일찍이 하게 된다. 귀족 가문 출신의 고결한 아가씨가 하녀라는 계급으로 곤두박질 치면서 맛봐야 했을 좌절, 치욕,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그녀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집안 내력인지 둘의 성미는 상이하면서도 비슷한데, '여왕의 여자' 자리를 두고 경쟁할 만큼 영리하나 대범한 타입의 캐릭터다. 다만 사라가 저돌적이고 직관적인 타입의 ‘여장부(女丈夫)’라면, 애비게일은 전략적이며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가진 ‘괴짜’에 가깝다. 특히나 이러 괴짜스러운 모습은 애비게일을 담아내는 촬영 방식에도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장면이 ‘어안 렌즈’로 애비게일을 촬영한 장면이다. 상황 자체를 심각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희극적인 톤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자신의 처소에 무작정 쳐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나를 겁탈할건가요?”하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애비게일을 보라. 그녀의 상대는 단순히 하녀를 요깃거리 삼으려는 인물이 아니라, 왕의 강력한 조력자 사라이다.
애비게일은 강력한 입지에 오른 사라의 대척점에 서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토리당과 정치적 결탁을 맺는다. 즉 정치적 결탁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자와 찬탈하려는 자의 파워게임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앤여왕은 두 사람의 대립을 가히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일찍이 남편과 아이들을 여읜 앤은 무엇보다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여왕이 아닌 인간 ‘앤'으로서 정서적 결핍을 채우고자 사라를 곁에 뒀으나 국정을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라와 그녀 사이에는 균열이 생긴다. 결국 이 균열을 비집고 파워게임을 승기를 잡은 건 에비게일이다.
“우린 게임의 목적이 전혀 달랐어"
사라와 앤여왕은 군신 관계이었으나 연인 관계를 바탕으로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갈등을 겪는다. 사라는 자신이 대체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바탕에는 여왕이 아닌 '앤'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반면, 애비게일은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여왕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지, 정서적 결핍을 채우는 인간 '앤'의 여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앤여왕은 사라가 다른이로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차를 타고 왕실을 떠나는 사라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패자는 게임의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장막이 나눠진 세계, 여왕 ‘앤’과 인간 ‘앤’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4장 A Minor Hitch
앤여왕과 애비게일은 우연히 정원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단원들을 마주친다. 연주를 듣고 있던 앤은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라고 소리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창문 밖 빛만을 의지하며 위태롭게 걸어가는 앤의 모습을 통해, 안과 밖의 명암을 대비시켜 불안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가장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표정으로 복도에서 우연히 하녀의 아기를 마주친 여왕은 아기를 강탈하는 것처럼 안아든다. 이는 그녀의 자식에 대한 결핍과 강한 집착, 충동적인 성향을 단번에 드러내는 가장 직관적인 방식이다.그녀의 내면은 이미 공허와 상실감 그 사이에서 점차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17명의 자식을 잃은 앤여왕의 상실감은 실상 그 누구도 채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왕은 그 결핍을 사람이 아닌 ‘토끼’로 채우고자 했다. 상실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더라도 공허함을 채울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극 초반 애비게일이 앤여왕과 가까워지고자 던졌던 화두도 여왕이 기르던 토끼였다. 여왕의 침실에 토끼들을 풀어놓고 애비게일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인간 ‘앤’이 가장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오만을 거듭하던 애비게일은 결국 여왕의 분노를 산다.
사라의 자리를 차지한 애비게일은 귀족의 명예를 되찾고 왕실의 무법자가 된다. 애초 권력을 쥔 자가 품어야 할 잭임이나 겸손은 없었다. 그저 왕의 권한을 쥐고 흔든다는 오만한 착각을 할 뿐이다. 허나, 이러한 태도는 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여왕은 크게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결국 여왕의 화를 불러 일으킨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바로 애비게일이 토끼를 학대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였다. 작고 여린 토끼의 몸을 구둣발로 짓밟는 행위.
그 순간 애비게일이 취한 오만은 단순히 외면할 수준이 아닌, 여왕의 인내를 넘어선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왕의 분노는 철저히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응징하는 기폭제가 된다.
여왕은 애비게일에게 하녀 시절처럼 무릎을 꿇고 자신의 다리를 문지르라고 명령한다. 여왕의 표정은 애비게일을 향한 분노로 일그러지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강한 괘씸함을 드러낸다. 마치 '네가 내 토끼들을 괴롭히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야'라는 섬뜩한 경고와도 같다. 감독은 관객에게 다시 한 번 이 세계의 권력의 구조를 각인시키려는 듯, 카메라 앵글과 편집 기법을 활용해 극적인 구도를 더한다. 크로스 디졸브 기법은 '애비게일 - 토끼 - 앤' 사이의 얽히고설킨 짓밟고 짓밟히는 관계성을 부각시키고,익스트림 로우 앵글은 앤 여왕에게 위압감과 권력을 부여하는 도구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촬영과 편집 그리고 음울한 음악의 조화가 더해져, 엔딩을 위한 완벽한 삼박자를 이룬다.
‘앤’은 장막이 나누어진 세계에서 때로는 절대적인 여왕처럼 때로는 나약한 인간처럼 묘사되었다.
인간의 다면성을 상업 필름에서 온전히 담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영화는 각 장막을 통해 주제를 환기시키며, 그 순간마다 앤의 특정한 기질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영리한 방식을 취했다. 작가주의적 구성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독특한 ‘영상 필체’가 만나 세밀하고도 깊이 있는 세계를 구축해 낸 것이다.
작가주의 세계를 돋보이게 만드는 밀도있는 연기
영화의 주축 배우인 올리비아 콜맨, 엠마 스톤, 레이첼 바이스의 열연은 감독만의 독특한 세계 안으로 관객들을 단숨에 몰입시킨다. 특히나 올리비아 콜맨은 신체적 심리적 붕괴를 겪고 100kg의 거구가 된 ‘앤’여왕으로 열연하기 위해 15kg 증량했다고 한다. 외형적 동화뿐 아니라 다리를 절거나, 인물이 겪는 내면적 혼란, 쇠약 해져가는 얼굴을 표현할 때 올리비아 콜맨의 진가가 드러난다. 실제로 앤 여왕은 사라가 추방된 후 3년 만에 작고했으며, 사후에는 뇌졸중이 그 원인으로 꼽혔다. 영화 후반부, '애비게일'과 '앤'이 침실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앤의 얼굴은 구안와사가 온 것 처럼 불편해 보이는데, 이는 뇌졸중의 대표적인 예고 증상으로 여겨진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올리비아 콜맨의 노련한 연기력 덕분에 관객은 끝까지 몰입감을 가져갈 수 있었고 결국 이듬해 오스카, 골든 글로브, 아카데미, 베니스 시상식을 휩쓸며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큰 결실을 맺는다.
흥미로운 점은, 앤 여왕을 연기하며 극찬받았던 올리비아 콜맨이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 시즌 3, 4에서 다시 한 번 여왕을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단단하고 침착하며 인내심 깊은 인물로, 성향적인 면에서 앤 여왕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다. 베테랑 배우인 올리비아 콜맨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싶다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더 크라운>을 모두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작가주의적 성향에 따른 호불호와 고증적 한계
감독부터 배우까지 모든 합이 조화로운 작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실제로 앤여왕이 불안정한 정서와 히스테릭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는 하나, 토리당과 휘그당 사이에서 정치적 협상을 잘 이끌어간 성군으로서의 면모도 있었다. 양 당의 갈등을 해소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신중함과 중립적 태도를 일관했다는 역사 기록들이 그녀의 노력을 뒷받침한다. 영화에서도 자신의 오랜 조력자였던 사라를 내쫓고 의회에서 군주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시퀀스를 할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극은 언제나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한다. 어떤 부분을 각색하고 다듬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포커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적 군주인 ‘앤’을 기대하고 보면, 영화 속 앤 여왕은 다소 납작하게 묘사된 캐릭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 플롯이 "위태롭고 나약한 군주를 놓고 펼쳐지는 두 여성의 강력한 파워게임"인 만큼, 앤 여왕은 절대적 왕정의 자리에 있음에도 끊임없이 인간적인 측면이 타자화되는 캐릭터로 설계되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세계 안에서 세 인물 간의 관계성을 잘 구축하기 위해 캐릭터의 각색은 필연이었던 셈이다.
작가주의 영화는 그 특성상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점에서 도전적인 성격을 지닌다. 대중성은 일반적으로 이상적이고 명확한 엔딩, 기승전결 구조, 그리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선호하는 반면, 작가주의 영화는 전형적인 장르적 구도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메타포를 사용해 관객의 해석을 요구한다. 이러한 특성은 대중에게 높은 장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상업적 성공을 담보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작업을 완수한 감독이 바로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예술성과 상업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그의 작품은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는 필자는 앞으로 더욱 거장이 되어 갈 감독의 행보에 뜨거운 지지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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