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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명예로운 비밀결사 '하퍼'의 일원이었지만, 하퍼의 맹세를 깬 후 아내를 잃고 딸 '키라'(클로이 콜먼)를 책임져야 할 홀아비가 된 '에드긴'(크리스 파인). 그는 ‘홀가(미셸 로드리게스), ‘사이먼’(저스티스 스미스), ‘포지’(휴 그랜트)와 함께 도적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포지의 친구 ‘소피나’(데이지 헤드)는 에드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부활의 서판’을 훔치자는 것. 아내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뜬 에드긴은 동료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그러나 모험은 실패하고, 그는 홀가와 함께 감옥에 갇힌다. 시간이 흘러 탈옥에 성공한 에드긴과 홀가는 부활의 서판을 되찾기 위한 팀을 다시 꾸린다. 옛 동료인 마법사 사이먼, 변신의 귀재 드루이드 '도릭’(소피아 릴리스), 언제나 진지한 팔라딘 '젠크’(레게 장 페이지)까지. 제각기 아픔을 지닌 이들은 한 팀이 되어 지상과 지하, 삶과 죽음을 넘다 드는 모험에 나선다
<D&D>,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잇다
2000년대 초반 할리우드는 판타지 영화의 세상이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이 쏟아져 나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빛이 비치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 2010년대 이후 히어로 영화에 밀려난 판타지 영화의 기세는 예전 같지 않다. <호빗> 시리즈가 체면치레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후발주자는 좀처럼 기를 피지 못했다.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 역시 해리 포터 팬들에게 실망만 안긴 채 마무리됐다. 그나마 HBO <왕좌의 게임>과 <하우스 오브 드래곤>, 넷플릭스 <위쳐>처럼 드라마 쪽에서 흥행작을 배출하는 중이다.
끊긴 듯 보이는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한 영화가 있다. 바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이하 <D&D>)다. 디오라마 게임판 위에서 장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TRPG, Table-top Role Playing Game)인 '던전 앤 드래곤'을 영상화한 이 작품은 게임 시리즈 속 유명 세계관인 '포가튼 렐름'을 무대로 삼은 판타지 활극이다. 사실 외관만 놓고 보면 <D&D>는 진부하다. 기사와 마법사 등장하고, 드래곤과 괴물들, 난쟁이 등이 판치는 세상은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그러나 <D&D>는 대중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다른 판타지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의 눈길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는 마력을 갖고 있다. 마치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를 보는 듯한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합이 그 정체다.
<D&D>, 중세 판타지 버전 <가오갤>?
<D&D>에는 캐릭터가 많다. 빌런을 제외한 주연 캐릭터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된다. 캐릭터가 많다 보면 영화는 자칫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캐릭터 비중의 균형은 무너지고, 서사는 꼬인다. <D&D>는 다르다. 원작이 롤 플레잉 게임이라는 점을 살려 한 명 한 명에게 명확한 역할과 특성을 맡긴다. 캐릭터가 복잡하지 않으니 영화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원작 게임의 설정에 집착하지 않기에 더 효과적이다. 하퍼를 착한 비밀결사, 레드 위저드를 악의 온상으로 간단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간단히 알려주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또 캐릭터 간의 극명한 차이점은 예상치 못한 유머 포인트다. 그 덕분에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중세 영웅담은 유쾌한 활극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D&D>의 캐릭터는 사실 낯설지 않다. 각 인물의 특성이 <가오갤>의 주인공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이라 할 수 있는 에드긴은 시종일관 류트를 든 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십분 활용해 동료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대목은 음악 빼면 시체인 스타로드, 피터 퀼을 연상시킨다. 홀가는 검, 도끼, 쇠사슬 등 웬만한 무기를 모두 다 다루는 전사다. 시니컬한 성격 덕분에 에드긴과 재밌는 콤비도 이룬다. 가모라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법사 사이먼은 로켓을 닮았다. 스타로드와 투닥거리면서도 필요한 장비를 뚝딱 만들어내는 로켓처럼, 사이먼은 에드긴과 시종일관 갈등을 빚으면서도 마법 아이템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어떤 동물로도 변할 수 있는 드루이드 도릭은 온몸을 변형해 동료들을 지원하는 그루트처럼 활약한다. 마지막으로 매사에 진지해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팔라딘(성기사) 젠크는 힘은 강하지만 사고방식이 독특해 대화가 힘든 드랙스를 재해석한 결과처럼 보인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캐릭터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는 과정도 <가오갤>과 비슷하다. <D&D>는 의지할 가족을 잃은 이들이 모여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본래 질서의 수호자인 비밀결사 하퍼 중 하나였던 에드긴은 하퍼의 맹세를 저버린 결과 아내를 잃고 도적이 된 도망자다. 홀가는 다른 종족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본인 종족에서 쫓겨나고, 결국 남편과 이혼한 외부자다. 사이먼은 최고의 마법사인 '엘민스터'의 후손이지만, 선조의 명성을 조금도 쫓아가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실패자다. 드루이드인 도릭은 오래전 악마의 피가 섞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인간 세계에서 배척된 소수자다. 젠크는 악의 무리인 '레드 위저드'의 사상과 지향을 거부해서 쫓겨난 추방자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애정을 싹 틔우고,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D&D>는 유쾌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은 활극이다. 은은하게 감동적이다. 사이좋게 체포되고 도망 다니던 은하계의 사고뭉치들이 한 팀이자 가족이 된 <가오갤>처럼.
원작의 힘을 빌려 차별화에 성공하다
<가오갤>의 중세 판타지 버전 같아 보이는 <D&D>. 그러나 <D&D>를 그저 <가오갤>의 아류로 취급할 수는 없다. 원작 게임의 요소들을 적절히 녹여내면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에드긴과 홀가는 새 팀원을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여행하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복잡한 설명 없이도 넓은 세계관의 장소나 역사, 종족들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도릭이 팀에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우드엘프'라는 종족을 소개하고, 그들과 인간의 악연을 설명한다. 또 젠크를 영입하면서 악당인 소피나와 레드 위저드의 과거사 및 목적을 알려주기도 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각종 아이템을 스토리텔링에 결부한 지점도 흥미롭다. 작중 주인공들은 모험 중에 자기 상처를 직시하고,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트라우마를 떨쳐내면서 개인적으로 성숙해지고, 팀으로서도 단단해진다. 이때 영화는 분기점마다 아이템을 하나씩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전개한다.
사이먼이 '분리의 투구'를 사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는 투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고고조 할아버지인 엘민스터의 환상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다. 공간을 초월하는 통로를 뚫어주며 모험 내내 활약하는 '여기저기 스태프'의 등장도 비슷하다. 전 남편을 다시 만난 후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결심한 홀가. 그녀는 과거 전 남편에게 선물했던 지팡이를 다시 챙겨 나온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알고 보니 '여기저기 스태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부활의 서판'도 마찬가지다. 모험이 시작될 때 이 마법 도구는 에드긴이 하퍼로서의 맹세를 깬 업보로 잃은 아내를 되살려 낼 수단이었다. 그러나 모험이 끝날 때, 이 서판은 그의 아내를 살려내지 못한다. 대신 에드긴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다섯 주인공이 하나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제목에 걸맞은 액션과 볼거리도 게임의 매력을 스크린 위로 적절히 불러온다. 주인공들은 '언더 다크'라는 지하 세계에 내려가 던전에 사는 드래곤을 만나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 추격전은 마치 관객이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인 드래곤이 아니라 비만 체형을 자랑하는 드래곤이 등장하다 보니 신선한 재미도 있다. 또 후반부에는 하이썬 경기라는 일종의 미궁 탈출 게임에서 촉수 달린 흑표범 같은 괴물이나, 사람을 녹이는 슬라임 괴물처럼 원작 게임에서 모습을 비춘 바 있는 생명체를 등장시켜 긴장감을 더한다. 각 캐릭터의 능력을 고루 활용한 클라이맥스도 인상적이다. 비록 액션의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한계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빌런의 활용법이 발목을 잡는다. 소피나가 지나치게 일차원적으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피나는 주인공 일행 모두를 패퇴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다. 에드긴을 배신하도록 포지를 부추기고, 포지마저 자기 계획을 위한 꼭두각시로 이용할 정도로 교활한 면모도 있다. 에드긴을 붙잡기 위해 그의 딸로 위장해 덫을 놓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능력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소피나는 영화의 최종 빌런에 걸맞은 위압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레드 위저드의 교주라고 할 수 있는 '스자스 탐'(이언 핸모어)을 소개하고, 악의 근원인 그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려 하는지 알려주는 도구다. 그래서 소피나가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꺾어야만 하는, 또 꺾을 수 있는 전형적인 악역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암시된 까닭이다.
'괜히 휴 그랜트를 캐스팅한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악역, 포지가 있어서 아쉬움은 더 크다. 스테레오 타입인 소피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활의 서판을 얻으려는 모험이 실패로 귀결되자, 포지가 자기를 속인 줄 모르는 에드긴은 그에게 서판과 딸을 부탁한다. 감옥에서 탈옥한 후, 에드긴은 맡겨둔 서판도 되찾고 딸과 재회하기 위해 포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보물도, 딸도 되찾지 못한다. 포지가 키라를 가스라이팅하고, 그녀의 애정을 악용해 부녀의 재회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포지는 옛 동료인 에드긴을 붙잡아 포상금까지 챙기려 한다. 이처럼 포지는 동료애도, 가족애도, 부성애도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 한 가족처럼 끈끈해지는 에드긴 일행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들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셈이다. 이는 별다른 능력을 지니지 못한 사기꾼 포지가 소피나를 제치고 진짜 악역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이유다.
축구에는 육각형 스트라이커라는 표현이 있다. 결정력, 몸싸움, 연계 능력, 스피드, 시야, 패스, 슈팅 등 공격수가 가져야 할 모든 능력치를 고르게 가진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숨겨진 진의가 있다. 육각형이 큰 선수에게는 완벽한 공격수라는 칭찬이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에게는 무색무취하다는 비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등장한 판타지 영화 <D&D>는 다행히도 전자에 가깝다. 익숙하지만 정감 가는 캐릭터의 향연, 원작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액션, 원작을 알면 더 반가울 볼거리, 예상외의 진지함이 묻어져 나오는 스토리까지. 모두가 만족할 둥글둥글한 매력이 넘친다. 루키가 기대 이상의 데뷔전을 치른 이상, 이제 중요한 건 그의 다음 발걸음이다. 과연 육각형을 더 키울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속편을 기다려본다.
A(Acceptable, 무난함)
캐릭터의 합을 내세워 우직하게 나아가는 반가운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