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7-09 16:45:24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원래 당연하지 않은 게 세상을 움직이는 법이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My Salinger Year, 2020
드라마 / 12세 이상 관람가 / 101분
감독: 필립 팔라르도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
꿈은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있다. 현실이 꿈보다 매번 먼저 우릴 찾아와 문제지.
슬프지만, 현실은 늘 꿈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다. 그래서 우린 매 순간 현실과 꿈 사이에 표류하면서 안전지대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현실도, 꿈도 모두 포함된 이상적인 공간. 그 공간을 단 한 뼘이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혼을 팔아도 좋을 만큼 꿈은 우리에게 절실하며 애틋하다. 꿈꾸던 시절이 곧 '나'의 찬란한 인생의 한 겹이며, 그 투명하고 얇은 겹이 하나둘 겹쳐지면 앞으로의 나를 예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니까. 현실에서 꿈꾸는 일은 언제나 가치 있다.
조안나의 꿈은 뉴욕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아주 즉흥적으로.
남자 친구에게 버클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일방적인 말에서 왜 활기찬 희망이 느껴지는 걸까. 그렇다, 그녀는 작가란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을 선택했다. 싸구려 아파트에 살면서 카페에서 글 쓰는 유명 작가들의 노선을 경험하기 위해, 진정한 작가는 바로 그런 사소하면서도 운치 있는 환경에서 탄생한다는 학습된 환상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라면 갖고 있는, 특별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조안나에겐 그게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조안나는 작가 지망생이란 신분을 숨긴 채 전통 깊은 작가 에이전시에 취직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마가렛의 첫 번째 업무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샐린저에게 온 편지를 빠짐없이 읽고 정해진 형식에 맞춰 답장하는 일. 첫 만남에 딱 잘라 작가 지망생은 비서로 뽑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마가렛의 말에 조안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마가렛의 비서가 냉정하다 못해 서늘한 직업이라 느껴졌지만, '작가의 세계에 다가간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기에 만족했다. 그러니 편지를 읽고 답장하는 일도 자신의 글쓰기에 분명 좋은 영감을 줄 거라 막연하게 여겼던 그녀였다.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편지를 분쇄기에 넣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무시하고 있다는, 나아가 '작가'로서 독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였기 때문이다. 정해진 양식으로 독자에게 답장하는 일은, 독자가 존재함으로써 살아 숨 쉬는 작가로선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못 할 짓이었다. 그때부터 조안나는 마가렛이 준 임무를 말도 안 되는'허튼소리'라 명명한다.

그러나 조안나는 새내기였다. 꿈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을 것을 과감히 선택했으나 사회생활이라 말하는 사회 구조의 한 일원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의 뚜렷한 기준 갖고 마가렛의 비서로 일하는 건 나쁘지 않은 자세였지만, 그녀는 직원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왜 작가 에이전시에서 독자에게 똑같은 편지 형식을 고수하는지, 왜 소속된 작가의 작품을 '감상'이 아니라 '판매'에 중심을 두는지, 왜 슬러시 파일(개인 출판사가 없이 활동하는 작가들의 원고)을 대부분의 헛소리로 평가하는지... 조안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이고 강압적이며, 열정적인 마음을 식게 하는 부정적 시선만을 눈여겨봤을 뿐이다. 그녀는 작가 에이전시가 지금까지도 그런 메마르고 인정머리 없는 감성을 고수하고 있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직원으로서 말이다.
조안나가 못 박은 허튼소리는 법률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수많은 경험과 데이터가 쌓아 올린 최소한의 울타리이자, 가장 안전한 지침이었다. 답장 하나를 마음껏 할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처지를 '비서일 뿐'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애석하게도 조안나는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비서'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해야 할 일을 잘 해냈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란 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변화시킬 길이 있다면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는 말인데, 다들 알다시피 뭐... 그게 어디 쉽나. 다 실수를 해봐야 아는 거지.

고심하던 조안나는 결국 회사의 타자기를 훔쳐, 허튼소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쓰고 독자에게 정성스럽게 답장한다.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기둥처럼 받쳐주던 관계들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새로 사귄 남자 친구(돈)와의 관계, 냉정한 사장 마가렛과의 관계, 전 남자 친구(칼)와의 관계 마지막으로 내 꿈과 내 현실의 관계까지. 귀중한 관계들이 하나씩 엉키면서,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샐린저의 전화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또 반응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내가 뭘 하려고 했었더라?'
점차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언제부터 제멋대로 선을 넘었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감정이 확 솟잖아요!'라 소리치던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답장이 기계적인 편지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 불이 꺼지기 시작한 관계는 다시 보살피고 필요 없는 관계는 단호히 잘라내면서 마침내 "그들의 편지가 저를 바꿨죠."라고 읊조릴 수 있게 된다. 과거의 나를 책임질 줄 아는 '내일의 조안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만의 속도로, 또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의 매력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자기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즐겁게 춤추고 뛰어다니며, 끝까지 나를 잃지 않는 힘까지 갖게 된 조안나.
이제 그녀는 샐린저의 외투에 몰래 독자들의 편지를 넣어버리는 걸 들켜도 예전처럼 움츠러들지 않게 됐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마가렛에게 진심이 담긴 말을 듣는 사람이 됐다. 그녀는 처음 뉴욕에 눌러앉으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기 싫다 말했었다. 반드시 특별해지고 싶다 했다. 하지만 더는 자신이 평범하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됐으며 이를 불안해하지 않게 됐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한 나를 이끌어낼 방법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든 특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평범하다는 말속에 잠시 나를 위로하고 돌보는 거지.
조안나, 그녀는 분명 달라졌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기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지금도 열심히 꿈꾸고 있는 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조안나를 통해, 꿈을 위해 현실을 이용하는 당차고도 용기 있는 자의 현재와 현실과 꿈의 괴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구현해낼 줄 아는 자의 미래를 모두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긴 여운을 남기는 좋은 응원이 될 것이다.
현실이든 영화든 당연한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당연하지 않은 게 세상을 움직이는 법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처럼, 조안나처럼, 앞으로의 우리처럼, 그리고 오늘의 나처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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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배트맨> 자기 자신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탐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2년간 '알프레드(앤디 서키스)'의 조력을 받고 '제임스 고든 경위(제프리 라이트)'와 협력하며 어둠 속에서 고담시의 범법자들을 응징해 온 '배트맨/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 그는 고담 시장 선거를 앞두고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폴 다노)'가 연쇄 살인을 벌이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다. 리들러가 남긴 단서를 쫓아 '캣우먼(조 크라비츠)', '펭귄(콜린 파렐)', '카마인 팔코네(존 터투로)'를 차례대로 만나며 증거와 정황을 파악하던 배트맨. 그러나 수사를 계속할수록 그는 모든 증거가 자신과 자신의 부모님의 가려진 과거를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가운데, 배트맨은 개인적인 복수와 공적인 정의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팀 버튼의 <배트맨>부터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또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관객들과 함께 한 배트맨. 이처럼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로 통하는 배트맨이지만, 사실 그의 역할은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과는 달랐다. 그간 배트맨 영화는 배트맨/브루스 웨인만큼이나 그의 빌런들에게 적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쏟아 왔다. 실제로 펭귄과 베인, 라스 알 굴 같은 수많은 캐릭터들은 지금도 관객들의 뇌리에 남아 있으며, 특히 그의 숙적인 조커의 경우에는 단독 영화로도 흥행과 비평 양 측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전까지의 배트맨 영화가 하지 않았거나 미처 못했던 일을 대신하는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조커>(2019)의 그림자가 진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다채롭게 장르를 바꾸어가며 영웅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2년 차 배트맨의 내면과 심리를 진득하게 풀어내는 <더 배트맨>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탐정 영화로서 <더 배트맨>
너무나도 익숙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들여다보기 위해 <더 배트맨>이 선택한 방법은 간단하다. 배트맨 고유의 정체성, 곧 탐정이라는 정체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애초에 DC 코믹스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디렉티브(탐정) 코믹스에서 배트맨 탐정으로 처음 등장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원형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는 리들러의 범죄 현장으로부터 경찰들과 과학수사 요원들도 놓치는 여러 단서들을 침착하지만 신속하게 포착하고, 이를 토대로 리들러의 목적을 추리하는 배트맨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동시에 영화는 배트맨의 탐정 활동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가 겪는 부작용과 피해도 공들여 묘사한다. 특히 작중 탐정 배트맨이 프로파일러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탐정 영화로 출발한 <더 배트맨>이 심리 스릴러를 거쳐 종국에는 히어로 영화로서 마무리될 수 있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비 내리는 날씨와 암부가 짙은 배경을 통해 살려낸 누아르적 분위기가 이 영화의 특장점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반부에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거라는 범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바로 그림자라고 독백한다. 그 말대로 배트맨은 고담 시의 다른 경찰들과 달리 범죄자적 사고(thinking like a criminal)에 능하다. 그는 철저히 범죄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이해하고 이용하며, 범죄자들의 특정한 욕구, 경험, 그리고 관념을 쫓을 줄 안다. 이는 돈 미첼 시장의 집을 감시하는 리들러의 시점과 캣우먼을 관찰하는 배트맨의 시점이 연출된 방식이 동일한 이유다. 그래서 고든이 풀지 못하는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오직 배트맨만이 풀고, 그만이 리들러가 숨겨놓은 힌트를 찾아내고 해석할 수 있다.
심리 스릴러로서 <더 배트맨>
하지만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라는 <선악의 저편> 속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대로, 프로파일러인 배트맨은 악을 들여다보다 깊은 고통을 겪는다. 범죄자의 입장이 되어서 범죄자의 심리를 통해 사건을 해석할 때 프로파일러의 자아는 방향을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작중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활동에 매진하느라 재벌이자 기업인으로서의 공적인 삶과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개인적 삶의 끈을 놓아버린다. 또 밤이 익숙해진 결과 낮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또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까 봐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과 다른 캐릭터 간의 '관계성'을 마치 거울처럼 활용해 탐정 영화에서 심리 스릴러로 자연스레 장르를 전환시킨다. 특히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프로파일러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범죄자나 피해자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가 브루스 웨인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그가 쫓고 만나고 대화하는 주변인들에게 투영시켜 외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배트맨의 수많은 빌런과 조력자들이 한 영화 속에 빼곡히 등장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부모님의 진실을 사이에 둔 채 변화하는 브루스 웨인과 팔코네의 관계, 또 그와 알프레드의 갈등과 봉합은 액션신 없이도 강렬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배트맨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계기를 보여주는 배트맨과 리들러의 관계다. “나는 복수다”라고 되새기며 범죄자들을 제압하던 초반부의 배트맨. 그런 그 앞에 선 리들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에게 무관심했던 고담시를 향해 마치 '외로운 늑대(lone wolf)'처럼 그저 복수하는 것뿐이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복수심을 범죄자들에게 쏟아내며 해소하던 배트맨은 자신의 모습이 그가 혐오하는 범죄자들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배트맨이 어떤 존재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앞에 선다. 이에 더해 그와 캣우먼과의 로맨스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정의를 동일시하던 배트맨과 달리 그 둘이 완전히 항상 같지는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캣우먼 역시 배트맨으로 하여금 그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영웅 서사로 귀결되는 <더 배트맨>
이처럼 배트맨이 리들러의 수수께끼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의심, 고민, 갈등을 마주한 순간, <더 배트맨>은 장르를 심리 스릴러에서 히어로 영화로 바꾼다. 그 질문과 고뇌에 대한 답, 곧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배트맨을 비추기 위함이다. 배트맨은 리들러와 그의 추종자들을 보면서, 또 캣우먼과 자신의 차이를 자각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리들러의 수수께끼와 캣우먼의 인생사를 통해 자신의 사적 복수와 공적 정의가 같은 의미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배트맨은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와 복수심을 떨쳐내고, 희망의 상징으로 변모하고 또 성장한다.
그래서 홍수가 고담시를 덮치고, 시민들이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배트맨은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스스로를 어둠과 복수에 동일시하며 그림자 속에 머물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림자 밖으로 나와 누구보다도 먼저 시민들을 구하러 나선다. 사람들에게 손을 건네고, 어둠 속에서 조명탄에 불을 붙여 길을 인도하고, 어둠에 갇힌 이들을 환한 빛이 비치는 바깥으로 이끌어 준다. 계속해서 누군가의 발자취만 쫓던 그가 다른 이들을 위해 먼저 발자취를 남겨주며, 공포의 화신이 아닌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배트맨의 영웅 서사는 앞뒤로 신화적 표상이 가득하기에 더욱 풍성하게 느껴진다. 리들러의 살인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함께 들려준다. 이 노래의 가사가 그리스도이자 메시아인 예수의 탄생을 마리아에게 알려주는 내용임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오프닝은 리들러의 악행으로부터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만들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이는 <더 배트맨>의 묵시록적인 결말부와도 직결된다. 요한 묵시록은 일곱 번의 재앙이 일어난 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마침 일곱 대의 차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고담시는 구약 성서의 내용과 노아를 연상케 하는 홍수에 휩싸여 버렸고, 그 순간 배트맨은 사람들을 구하며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영리한 수미상관을 보여주는 <더 배트맨> 속 영웅의 성장은 누아르 장르의 어둡고 진득한 분위기가 더해져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플롯을 빛내는 영리한 연출
한편, 맷 리브스 감독의 유려하면서도 직관적인 연출은 배트맨의 각성과 성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시점이 상당히 중요하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리들러의 시점에서, 배트맨의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다. 이때 배트맨의 시점에 주목해보면, 그의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망원경이나 카메라 등의 도구를 이용해도 배트맨은 초점이 맞지 않거나 흐릿한 시야에 갇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시야는 점점 뚜렷해지면서 넓어지며, 마지막 순간에 그는 가장 높고 탁 트인 공간에서 고담 시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연출 방식이다. 우선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신도 고통에 빠트릴 정도로 범인을 쫓는 일만 집착하던 한 탐정이, 자신의 한계를 깨고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기에 영리하다. 또한 배트맨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해 알 수 없는 과거에 괴로워하던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확실한 과거를 알지 못해도 브루스 웨인이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고 순간 답답하던 시야가 넓게 트이는데, 이정면은 마치 진실을 확신하지 못해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때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또한 긴 러닝타임 때문에 느슨해지려는 찰나마다 등장하는 강렬한 액션신도 인상적이다. 특히 한 템포를 쉬고 본격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예열의 미학이 돋보인다. 관객을 순간적으로 작중 범죄자 혹은 빌런의 입장에 서게 만들면서 배트맨을 마주하는 그 두려움과 공포감을 온몸으로 함께 맛보게 하여 배트맨이 왜 공포의 상징인지를 단숨에 납득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다섯 개의 액션 시퀀스 중에서 전복된 펭귄의 시점에서 배트맨을 보여주는 펭귄과의 추격전이 유독 뇌리에 각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더 배트맨>에 단점이 없지는 않다. 일단 전반적으로 최근 트렌드와는 동 떨어진 스타일의 영화인 점이 호불호를 크게 좌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결정적인 단점이다. 단순히 절대적인 영화의 시간이 길거나 볼거리(액션)나 스토리의 강약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몇몇 캐릭터들의 서사가 과연 적합한지 의문이 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메인 빌런인 리들러의 경우 그의 범행 과정은 상당히 복잡한 데 비해 그의 동기는 상대적으로 평면적이라서 그 괴리감이 적지 않다. 배트맨의 성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인 캣우먼의 활용법 역시 그녀의 존재감과는 별개로 아쉬움이 남는다. 배트맨의 이야기와 별도로 전개되는 개인적인 서사가 다소 과한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리는 <더 배트맨>이 지나칠 수 없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배트맨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이질적이고, 세계관 연계에 집중하는 근래 많은 슈퍼 히어로 영화들과 달리 묵직하고 우직하게 히어로 본연의 의미를 탐구하고 성찰하는 신선함을 선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배트맨>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고 논쟁이 되기에 오히려 특별한, <로건>과 <조커>의 뒤를 잇는 모험적인 히어로 영화의 비장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새로운 배트맨 케이브로의 깊고 어둡고 진득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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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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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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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우성 <보호자> ·이정재 <헌트>, 토론토국제영화제 초청 쾌거
ⓒ 네이버 영화
정우성 배우와 이정재 배우의 감독으로써의 첫 연출작이 토론토국제영화제에 나란히 초청되었다.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정우성 감독의 <보호자>는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었다.
장항준X김은희 <리바운드>, 크랭크업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항준 감독의 신작인 <리바운드>가 7월 13일 크랭크업했다고 지난 29일 제작사에서 밝혔다.
<리바운드>는 해체 위기의 모교 농구부에 부임한 신임 코치와 여섯 명의 선수들이 전국 대회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영화에는 안재홍, 이신영 정진운 배우 등이 출연한다.
한승연, <최악의 이웃과 사랑에 빠지는 방법> 출연
ⓒYG엔터테인먼트
한승연 배우가 영화 <최악의 이웃과 사랑에 빠지는 방법: 언택트 러브> 출연을 확정했다.
영화는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녀가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좌충우돌 로맨틱 코미디이다.
<공조 2>, 9월 개봉 확정
ⓒ CJ ENM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 <공조>의 속편인 <공조2: 인터내셔날>이 9월 개봉을 확정했다.
영화에는 <공조>의 출연진인 현빈, 유해진, 임윤아 배우가 이어서 나오고, 다니엘 헤니와
진선규 배우가 새롭게 등장한다.
<탑건: 매버릭>, 외화 흥행 수익 1위
ⓒ CJ ENM
<탑건: 매버릭>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에서 개봉한 외국 영화 중 최고 흥행 수익 1위를
차지했다. 지난 6월 22일 개봉했지만, 여전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탑건: 매버릭>의 누적 관객 수는 700만을 넘어섰다.
해외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매출 1억 달러 돌파
ⓒ IMDB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글로벌 박스오피스
매출 1억 달러를 돌파했다. A24 제작 영화 중 처음으로 매출 1억 달러를 돌파한 작품이다.
영화는 멀티버스 소재로 세탁소 사장 에블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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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만화에서 소녀 들어내기
* 영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대와 성장에 관해 다루면서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해진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들을 평생 사랑해 왔다”는 셀린 시아마처럼, 나 역시 나(라는 여자애)는 어떻게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쓰인 영화와 책들에 둘러싸여 자라왔기 때문이다. 냉장고 속 여자들. 똑똑하고 의견이 있으면 ‘발암캐’가 되고, 멍청하면 아이캔디가 되는 여자들. 아무도 이름을 모른 채 퇴장당하는 여자들. 결국 주체적 섹시함에 복무하거나 가정과 모성에 귀속되는 선택을 내리는 바람에 롤모델로 삼을 수 없어진 반쪽짜리 알파 피메일들. 나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줄 알고 경계를 내리고 한껏 몰입한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가 나를 내쳤던 기억들. ‘이 이야기는 너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무심한 축객령에 찬물 맞은 듯 깨어났던 경험이 모여 다른 이야기에도 더 각박하고 의혹 서린 눈길을 보내게 만든 건 내게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면,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은 10대 여성의 존재감을 아예 뺏어버릴 정도로 뻔뻔하거나 무신경하지는 않다. 대신 <태풍클럽>이 채택하는 ‘소년'과 '성장'이란 키워드 속 소녀의 위치는 비난받기 어려운 선에 모호히 또 간신히 걸쳐 있다. 소녀들이 표류하고 타자화되고 젠더 폭력에 노출되되 투명하게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화내고 원망할 줄 알며, 욕망하고 좌절하고 춤도 춘다. 다만 그 소녀들이 발화하는 언어와 몸짓은 지극히 중년 남성의 - 언제나 ‘현대’의 소년소녀들과는 동세대가 될 수 없으며, 자기의 10대는 잊은 지 오래고, 한 번도 여성이어본 적 없는 - 관점에서 상상되고 있다.
어쩌면 <레옹> 류의 적극적 성애화나 <싱 스트리트> 류의 과소대표된 마스코트화보다는 좀 나은 대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자 사이의 대찬 어긋남은 여성 관객인 나를 거슬리게 하기 충분하다. 영화 속 주체인 특정 집단을 관객인 우리가 감독보다 잘 알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극중 서사나 연출에서 극도의 작위성과 허구성을 즉각 감지하고 말 때, 어떤 영화는 ‘의도된’ 해학적 연출로서 수용되고 이해받지만 또 다른 영화는 ‘감히?’라는 황당함과 분노를 더 짙게 남기기 때문이다. <태풍클럽>은 슬프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는 평단에서 주로 ‘움직임’과 ‘에너지’라는 (얄밉게도 반박하기 쉽지 않은) 단어에 의존해 뭉툭하게 예찬한 <태풍클럽> 클라이맥스의 나체 파티를 생각해보자. 당최 어떤 10대 여자들이 태풍으로 학교에 고립된 와중 동급생 남학우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일탈을 통해 고통과 자유를 한껏 감각하려 든단 말인가. 이상한 시대의 광기에 걸맞은 기행으로 이해하기엔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소마이 신지 전후의 남성 창작자들이 오염시킨 소녀 이미지, 청춘 이미지들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탓이다.
이 씬에서 여자아이들의 맞춰 입은 듯한 흰 속옷은 기묘한 미인대회를 연상시킨다. Barbee Boys의 暗闇で DANCE가 흘러나오며 수영복 차림으로 춤추던 흥겨운 오프닝이 제공한 생동감과 일말의 기대마저 퇴색한다. 같은 반 남학생 아키라가 물 아래에서 그애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구도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 무대 위 탈의한 친구들을 지켜보는 미카미의 시선은 카메라의 눈높이와 일직선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미카미의 등에 신중히 초점을 맞추다가 이내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무대 위로 (늘 달려 다니던 여자친구 리에처럼) 달려 나가 친구들의 광기에 합류하는 모습을 담는다. 정확히는 그가 무대로 ‘달려가는’ 움직임을 숏 바깥으로 밀어 잘라내고, 그가 무대 위에 올라 옷을 벗고 동참하는 순간부터를 흐릿하게 원경으로 담아낸다.
이 뻔한 대구란. 이 힘준 하찮음이란. 분명 나도 지나온 시기인데, 속으론 저것보다 더 미쳤으면 미쳤지 절대 더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화면 속 연유도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뇌에 공감하기보단 타성에 확 젖어버리고 만다. ‘50대가 상상한 10대의 청춘’의 대표적 표상 같은 이 씬에서 나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타자화를 감지할 뿐이다.
게다가 여자아이들 한 명은 동급생 남학우 켄에 의해 화상을 입었고, 태풍이 오기 직전 학교에 갇혀 도망다니다 옷이 찢기고 만 미츠코다(그리고 미츠코는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이 켄 앞에서 옷을 벗고 켄과 손을 맞잡고 춤추고 있다. 그러니까 이 탈의에서 연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몸짓이 애초에 ’가능한‘ 행위냐는 말이다). 모든 씬이 분절적이고 산만하게 이어붙어진 영화에서 오로지 켄이 미츠코의 옷을 벗기려고 쫓아다니는 시퀀스만이 매우 길고 연속적이고 자세하게 펼쳐진다. 이때 미츠코의 얼굴에 서린 건 오로지 닥쳐올 강간에 대한 공포뿐이다. 그 공포에 즉각 감응할 수 있는 관객으로선 미츠코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생생하다.
한편 오프닝에서 키 작은 남학생 아키라가 밤의 학교에서 수영복 입은 여자애들을 마주쳤다가 물속에서 질식한 사건은 켄-미츠코의 사건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키라는 ‘여자애들이 수영복을 벗기고 레인 로프로 목을 졸랐다’는 경위를 선생님 앞에서 털어놓으며 힘없이 실실 웃는다. 이 진술 자체가 영화에서 유일한 플래시백으로 처리되었기에, 실제로는 그저 관음하다 들킨 게 부끄러워 물속으로 숨었다가 숨이 막혔을지도 모를 아키라의 (깊은 소망이 담긴 듯한) 섹슈얼한 상상처럼 다가온다.
설령 아키라의 말이 진실이었다 해도 아키라의 얼굴에선 (미츠코와 달리) 방금 생사의 고비를 넘긴 아이의 공포나 ‘가해자’ 측인 여학생들을 꺼려하는 반응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선생님 역시 짓궂은 남학생을 혼내듯 장난스레 머리를 때리며 웃는다. 즉 아키라에게 여자애들이 자기 옷을 벗기고 괴롭혔다는 사실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오히려 페티시의 충족, 또래 이성에게서 성적 관심을 받았다는 만족감, 늘 친구 켄과 쿄이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자신이 그럴 만한 존재로 ‘승인’ 받았다는 훈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주변 남자아이들과 선생님 역시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런 미츠코와 아키라 간의 낙차를 영화는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켄이 미치코를 힘으로 제압하는 일련의 숏에 할애된 분량과 연속성 자체가 이 뚝뚝 끊기는 영화 내에서 이질적인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런 간극들에서 소마이 신지라는 남성 연출자의 둔감함 혹은 음험함이 여실히 느껴져 괴로웠다. 남은 평생 그 끔찍한 하루를 잊지 못할 미츠코의 트라우마가 상상되어 참담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다정히 응시하는 건 켄 쪽이다. 미츠코의 옷을 찢어 제가 낸 상처를 기어이 확인하고 순간 숨이 멎어버린 켄은 곧 책상 위로 엎어지고 물건을 죄다 떨어뜨리며 발버둥친다. 지울 수 없는 가해 사실의 무게를 뒤늦게 짐작한 이의 울음과 절망 정도로 자비롭게 이해하면 될까.
여기서 미성년 켄의 후회를 보며 불편하고 원치 않는 이해와 연민이 피어오르는 것까지가 ‘영화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인 것처럼 이야기하려면, ‘영화가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은/못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온당하다. 그러나 물론 1985년의 ‘고전 명작’을 이 시대에 구태여 다시 불러온 이들과 예찬으로 호응한 이들에게야, 여성 대상의 과잉 폭력 전시쯤이야 ’시대적 한계‘란 말로 적당히 무마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티끌 정도였을 테다. 켄이 미츠코를 좋아한 것처럼 미츠코도 리에와 사귄다고 알려진 미카미를 은밀히 좋아했지만, 켄이 한 것처럼 인기 많은 짝사랑 대상을 ”내 꺼야“라고 선포하거나 그애를 가지기 위해 미카미의 등에 불씨를 넣지는 않았다. 켄이 자길 다정히 맞아주는 가족의 부재에 슬퍼하며 “다녀왔습니다.“와 ”잘 다녀왔니?“를 끝없이 반복한 것처럼 리에 역시 엄마의 상시적 부재에 고독을 느끼지만, 리에는 엄마의 이불에 들어가 자위하듯 꼼지락거리며 기이한 연민을 자아낼지언정 켄처럼 문을 부숴가며 누굴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즉 어떤 집단의 고통은 외부의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방출되며 다른 집단의 고통은 스스로의 더 깊은 곳을 향해 수렴한다. 어떤 ‘이들’이 아닌 어떤 ‘집단’인 이유는 거기 성별에 의한 경향성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얘기하자면 영화가 이 명백한 차이를 본체만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다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중립적 관조의 태도를 자청하는 영화들이 곧잘 그렇듯 사실의 냉소적 재현은 곧 책임감 없는 방조로 이어지고, 감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이 소외되고 오해당하며 잘못 그려진다. 도덕적 판단을 일부러 유보하고 기준점을 흐려보겠다는 일종의 사회 실험을 야심만만하게 시도한 영화들이 늘상 그렇듯 그 기준이 적용되는 세계가 이미 불균형하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동등하지 않은 행위자들의 위치성이 재배열됨으로써 동등하지 않은 행위가 동등한 것처럼 잘못 전달된다. <태풍 클럽>은 이런 전형적인 착시의 수렁에 빠진 예다.
부서진 문과 헐벗은 채 우는 미츠코를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묻는, 미츠코의 “보고도 몰라?“란 말에 재차 ”모른다“고 답하는 멍청한 미카미는 (감독이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소년 장첸과 같은 어둠 속의 민감한 관찰자가 아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유이치나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명백한 폭력을 못 본 체하고 묵인하는 방조자일 뿐이다. 그러니 그애가 성숙을 두려워하며 ‘종을 넘어서는 개체‘가 되고자 할 때, 또래에게 깨달음을 주고 자기 죽음으로 불빛을 밝히려 하는 계몽자의 역할을 ‘감히’ 탐낼 때, 이미 몰입을 방해당한 관객은 같잖은 결기에 조소를 보낼 수밖에.
그러니 간절히 바란다. <태풍클럽>처럼 남성 청소년 호모소셜에서 향유되는 강간문화를 미숙하고 불안한 청춘의 성장과정쯤으로 이해해주는 영화가 불운한 명작으로 재소환되지 않기를. 남성 청소년의 또래 여성에 대한 극도의 폭력과 위악을 엄마 없이 자란 불쌍한 아이의 발악 정도로 정당화해주지 않기를. 또래 남성 앞에서 옷 벗고 춤추고, 자기들끼리 어설프게 입술 부비고, 성인 남자와 원조교제하려 드는 여성 청소년의 자학적 섹슈얼리티를 전시하면서, 시골에 유폐되어 성적으로 억압된 소녀들이 규범을 깨고 일탈로 해소하려 하는 건강한 해방처럼 감히 호도하지 말기를.
40년 전 작품이란 권위에, 덧입혀진 명성에, 화려하고 가식 없는 평단의 홍보 문구에 속아 기대했던 바는 좀 더 거창했다. 에드워드 양의 사려 깊은 관찰력도 <썸머 필름을 타고!>와 같은 편안한 산뜻함도 발견하지 못한 건 괜찮다. 그런 작품이 아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만과 혼란의 시대에 대한 은근한 향수와 동조를 감지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을 부른다. 그 시절엔 몬트리올이니 동경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 한들, 현대의 관객이 어떤 것을 정전 삼고 어떤 것을 버릴지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않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뇌하는데 얕잡아 보이고 무시되는 10대 시절의 광기와 고독을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이토록 선명한 폭력 앞에서 피식자의 입장에 곧장 이입되어 당황할 때 ‘나도 저랬다’며 열광하는 이들을 보는 건 역시 좀 입맛이 쓴 일이다. 소마이 신지가 관객의 정동을 잘 건드리는 연출자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가 상정한 청소년의 범주에서 어떤 소녀들은 처음부터 빠져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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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e Battle After Another(2025) 예고편 공개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a.k.a PTA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베니치오 델 토로, 숀 펜 등
개봉일: 2025년 9월 26일 (북미 예정)
드.디.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예고편이 공개되었습니다. 짧은 영상 클립 공개 일주일 만인 3월 28일, 워너 브라더스가 SNS를 통해 공식 예고편을 발표했는데요.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직접 유튜브 계정을 개설하고 첫 게시물로 예고편을 올리며 기대감을 고조시켰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프렌치 75라는 혁명 단체 소속이었던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곤경에 처한 딸을 구하기 위해 전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암호를 잊어버리며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1990년 발표된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Vineland)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앤더슨 감독은 이전에도 핀천의 작품을 다룬 바 있습니다. 2014년 개봉작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바로 핀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핀천의 소설은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특성 때문에 영화화가 드물었는데, 앤더슨 감독이 이번에 또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네요.
이번 작품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커리어 최대 규모가 될 전망입니다. 제작비가 무려 1억 4천만 달러(한화 약 2,061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앤더슨 감독은 평단의 호평에 비해 흥행 성적은 다소 부진했습니다. 독특한 소재 때문에 진입장벽이 있는 탓이겠지요. 그렇지만 'PTA교'라고 불릴 만큼 매니아층이 두터운 감독이라는 점, 디카프리오의 티켓 파워가 강력하다는 점을 고려해 제작사가 넉넉한 지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디카프리오의 출연과 관련된 흥미로운 비화도 있습니다. 그는 과거 GQ 인터뷰에서 1997년 앤더슨 감독의 <부기나이트> 각본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촬영 일정과 겹쳐 출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타이타닉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거절하기는 어려웠겠죠. 타이타닉 이후 28년 만에 고대하던 앤더슨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네요.
음악은 이번에도 조니 그린우드가 맡았습니다. 전설적인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인 그는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앤더슨 감독과 스코어 작업을 함께해왔고, 이번이 여섯 번째 협업입니다. 늘 새로운 디카프리오의 미친 연기, 앤더슨 감독의 놀라운 독창성, 그린우드의 찰떡 스코어 그리고 워너 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이 어우러진 만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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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설계해서 대참사가 났네
'설계자'에서 빛나는 건 강동원의 '비주얼'이다. 이 말은 즉슨, 영화의 매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설계부터 잘못해서 결국 대참사가 난 꼴이다.
'설계자'는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설계자 영일(강동원)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요즘 개봉한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99분)인데 배우 라인업은 꽤나 화려하다. 강동원을 비롯해 이미숙, 이무생, 이현욱, 김신록, 탕준상, 이동휘 등 연기로는 날고 긴다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탄탄한 배우진이지만, 이 영화의 서사와 소재가 문제다. 팀플레이를 예상하긴 했지만, '선수 입장' 급의 구성으로 '영화 제작 시 하지 말아야 할 요소'를 저지르고 말았다. 소재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공직자, 영혼을 판 기자, 비자금 논란 등 다른 작품에서 숱하게 다뤘던 소재이기에 기시감이 강하다. 그래도 살인 청부업자로 등장하는 강동원은 그나마 신선하긴 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스릴러 장르의 생명인 긴장감이 점점 느슨해지고 지루함이 짙어진다. 의뢰받은 건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데다,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값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 그래서인지 대사도 투머치하고, 어느 시점부턴 극 중 유튜버들이 전기수처럼 전달한다. 심지어 이들은 비중 있는 것처럼 등장했지만, 막상 기능적 역할에 불과했다.
고증(?) 면에서도 허점이 많다. 초반에 제법 그럴싸하게 설계했던 살인과 달리 뒤에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이 일어나야만 성립되는 허술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반전을 주어도 크게 터지지 못하고, 결말 또한 허망하다. 이걸 보려고 99분이라는 시간을 할애했나 싶을 정도로 현타를 느낀다.
서사가 부실하니 캐릭터들도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쏟아지는 정보값에 비해 인물 간 관계성 또한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는 속 빈 '깡통' 케미를 그릴뿐이다. 여러 질문과 의문점을 남기려 애쓰지만, 관객들에게 크게 와닿진 못한다.
'설계자'를 이끌어 갈 주연 배우 강동원의 장악력 또한 아쉽다. 영화 장르나 설정상 주인공에게 몰입해 그가 보고 믿는 것들을 따라가게 만들어야 했으나, 영화 속 영일의 생각과 반응을 따라가기엔 쉽지 않다. 맞지 않은 옷을 입어서인지 좀처럼 몰입할 수 없다. 그나마 이무생, 김신록만 눈에 띄었을 뿐, 다른 배우들도 존재감을 피력하진 못했다.
결국 '설계자'는 설계를 잘못한 바람에 부실한 공사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게다가 음모론만 잔뜩 늘어놓고는 극을 마무리해 갑론을박만 일으켰다. 여기서 '갑론을박'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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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에스파 로 알아보는 '거울' 의 의미ㅣ매트릭스4 리뷰ㅣ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ㅣAespa Dreams come true | 윈터 | 카리나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 아이돌 에스파 블랙맘바, 넥스트레벨, 세비지, 드림즈컴트루
+ Aespa Black Mamba Next Level, Savage, Dreams come true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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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앰뷸런스> 파이널 예고편
두 형제의 위험한 질주와 폭발하는 리얼 액션! #앰뷸런스 보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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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로큰> 메인 예고편
소설에 예고된 동생의 죽음 과연 그 날 밤의 진실은? 하정우 X 김남길의 소름 MAX 진실 배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