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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4-07-14 19:07:13

변하지 않는 애정의 끈기

영화 <구룡성채: 무법지대> 리뷰

PROGRAM NOTE. 

1980년대 홍콩은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동시에 이로 인해 수많은 화교들이 해외로부터 흘러들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혼돈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홍콩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무법지대가 바로 구룡성채였다. 그 무렵 홍콩으로 흘러들어와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찬 록쿤은 악명 높은 미스터 빅이 이끄는 갱단에게 쫓기게 되고 우연히 구룡성채로 몸을 피한다. 구룡성채를 지배하는 사이클론의 도움으로 구룡성채에서의 삶에 적응하던 찬 록쿤. 그러나 찬 록쿤과 구룡성채를 향한 악당들의 위협은 점점 거세진다.

1993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홍콩의 씬 시티, 구룡성채. 기괴하고 미로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나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포개어지는 공간적 배경과 더불어 인물들의 다양한 사연과 관계를 통해 그 당시 홍콩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9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화려한 액션 역시 놓칠 수 없는 매력 포인트. 제77회 칸 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첫 공개 당시 이미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이정엽 / 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POINT.

✔️ 홍콩 영화를 좋아하세요? 그러면 일단 보세요!

✔️ 고천락, 홍금보, 곽부성, 임현제... 홍콩 영화의 기라성 같은 이름들과 함께 유준겸, 오윤룡, 료자여 등 샛별 같은 이름들이 함께 놓여있습니다. 명배우 파티!

✔️ 하반기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 제목이 '구룡성채'라는 거다. 아무 정보도 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이걸 봐야겠다 생각했다. 구룡성채라니. 홍콩의 씬 시티(sin city)로 불리던 고층 슬럼. 불법 증축으로 거대하게 올라선 굴속 같은 곳. 지금은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 당시에도 위생이나 치안 측면에서 좋은 거주지라 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만, 철거되지 않았어도 들어가볼 수는 없었을 곳. 그럼에도 워낙 독특하여 자꾸 궁금해지는 곳이 아닌가. 다들 좋아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재빨리 매진되어, 취소 표를 겨우 구했다. 그리고 나서야 영화 정보를 확인해 보니... 범죄 스릴러 액션... 홍금보? 아니 왜 나는 구룡성채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일 거라 생각했지? 내 편협한 영화 취향 표에 범죄, 스릴러, 액션은 들어가 있지 않으며 홍금보는...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괜찮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보러 갔다가, 만족해서 나왔다. 하, 이게 바로 홍콩영화의 맛이지!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간단하다. 그리고 익숙하다. 미리 알아둘 것도 없다. 구룡성채를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구나 정도로만 파악해 두면,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 마치 아침 드라마처럼 익숙한 공식이 펼쳐질 것이다. 시작과 동시에 '옛날 옛적에' 느낌으로 구구절절 펼쳐지는 텍스트부터 전개되는 방식까지 어느 하나 어렵게 소화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영화였으면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야! 하고 실망했을 것들도, 홍콩 액션 영화에서 펼쳐지니 익숙한 장르의 문법에 편승해 그냥 즐기게 된다.

 

  자고로 홍콩 영화의 맛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덕진 의리 아닌가.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주인공 무리와, 그 의리를 손쉽게 배반하는 악의 무리 사이의 갈등. 요즘 같은 세상에 우스울 정도로 올바른 주제를 이렇게 고수하는데 어떻게 매력이 없을 수가 있냐고. 게다가 이토록 바른 주제의식을 이렇게 폭력적인 장면에 끼워 넣는 얼얼한 홍콩 스타일. 폭력적이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무협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액션. 아는 맛은 정말 무섭다. 헤어날 수 없게 만든다. 나도 이런데 홍콩 액션 영화를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정통으로 맞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패가 없어도 마작은 계속된다

  사실 나는 홍콩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다. 애초에 홍콩 영화에 익숙한 세대는 아니어서, 뒤늦게 왕가위 영화를 몇 편 보면서 마치 영화사 따라가듯 홍콩 영화도 좀 봐야지 의식적으로 본 정도. 무의식적으로 홍콩 영화를 이미 꿀꺽꿀꺽 받아 마신 나의 앞 세대와는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 또한 내겐 홍금보 쪽보다는 왕가위 영화로 수렴되는 양조위와 장국영의 얼굴 쪽이 가깝다.

  그럼에도 고천락, 임현제, 곽부성 같은 배우들은 어쩜 그렇게 멋있는지. 자신들이 수호하는 의리와 인정을 품은 채 우아하게 나이 든 '형님'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 아래 각자 있는 대로 멋을 부리고 의리를 받드는 다음 세대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세대를 이어가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결연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세대 교체란 건 일면 서글프기도 하다. 당장 구룡성채는 몇 년 후 철거될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형님' 세대는 마치 구룡성채처럼 과거 영광의 기록이 되어 떠나갈 것이다. 홍콩 영화가 아시아 일대를 씹어 먹던 시절은 끝난 것 같다는 말조차 무색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패가 하나 없어도 마작은 계속된다. 몸의 일부를 다치고 잃어도 싸움은 계속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어떤 선언처럼 느껴지는 이 마음. 그 올곧음조차 촌스럽게 치부되는 시대에, 여전히 홍콩 영화를, 홍콩 액션 영화를 고수하는 건 정말 뜨끈뜨끈한 마음이다. 홍콩의 여름 습도만큼이나 끈적끈적하게 마음에 눌어 붙는다.

 

 

애정이 묻어날 때 가장 강하다

 구룡성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었던 내가 꽤나 만족했을 만큼, 이 영화는 사진으로 보던 구룡성채의 면면을 성실하게 재현했다. 빛도 들지 않는 굴속같은 건물 안쪽에서 구멍가게를 내고, 잡은 돼지를 염장하고, 만두를 빚고, 생선을 토막 내고... 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공동 수도 앞에 줄은 길고 물은 모자라며 전깃줄은 언제 화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구룡성채의 외양만 구현하고 싶었던 것 같지 않다. 외양을 성실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구룡성채 거주민 사이의 인정까지 그려낸다. 마약과 매음과 폭력 조직 등 각종 범죄만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존재했던 삶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도 담아내고자 한 마음이 느껴진다.

 

 홍콩 영화는 늘 홍콩을 정말 사랑한다. 반환이 결정되고 실제 반환이 이루어지면서 홍콩이 겪은 혼란의 상처는 홍콩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았지만, 깊고 눅진한 애정으로 승화되었다. 홍콩 영화마다 혼란과 방황 사이로 그 애정이 깊이 느껴진다.

 

 이 영화 또한 홍콩에, 홍콩 사람들에, 홍콩 영화에, 홍콩 액션 영화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난 누군가 이토록 깊은 애정을 품은 시선을 보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이 애정에 거스르는 방법 같은 건 도무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단점이 없지는 않다. (없을 리가...) 영화의 액션은 중간에 좀 과해지면서 무협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아무리 홍콩 맛이라지만 어디까지 가나... 하는 생각이 분명히 든다. 그리고 옛날옛적 액션 영화 답게, 필요 이상으로 남성 중심적이어서 여성과 아동 캐릭터는 소모적으로 표현되는 면이 있다. 구룡성채에서 가장 다부진 눈빛을 하고 있는 (터치드 보컬 윤민 닮았다) 만두집 여성의 경우에도 더 좋은 서사를 부여해줄 수 있었을 것 같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아쉬운 구석이다.

 

 그렇지만 홍콩 영화는, 홍콩 영화를 둘러싼 애정은 지금도 변치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함을 빛내는 좋은 작품이었다. 개봉 후 아빠 보여줘야지 싶은 작품도 참 오랜만이다. 깊은 애정을 받은 것들은 시간이 가도 은은히 빛난다. 부디 그 빛을 더 갈고 닦으며 시대에 발맞추어 더 오래오래 빛나 주기를.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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