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8-19 10:05:22
8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주말 관객 수 1위 <에이리언: 로물루스>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공개 첫 주말 4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파일럿>은 개봉 3주 차에도 장기 흥행을 보이며 4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고
광복절을 맞이해 개봉했던 <행복의 나라>는 3위, <트위스터스>는 4위 <빅토리>는 6위에 머물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도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4150만 달러를 기록해 1위를 차지했으며 <데드풀과 울버린>이 1조 4564억원을 벌어들이며 역사상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R등급 영화가 됐습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식민지를 떠난 청년들이 버려진 우주 기지 '로물루스'에 도착한 후, 에이리언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며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전작들과 달리 민폐를 부리는 인물이 적다는 점과 적재적소에 삽입되고 오마주 된 에이리언 시리즈의 레퍼런스, 떡밥 회수 등 에이리언 골수 팬들을 충분히 만족시킨다는 평가를 받으며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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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동심이란 이름의 황금 성배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웬디>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우리에게 '소년'이 상징하는 바
미성숙함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유구하다. 소년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싱그러움을 품고 있는 것 같고, '소년 같다'는 말은 '노인 같다'와는 표현과는 다르게 칭찬으로 쓰이곤 한다. 누군가 마음에 소년을 품었다고 하면 그는 시대의 풍파에 때묻지 않고 순수한 사람으로 생각될테지만, 마음에 노인이 있다고 한다면, 글쎄, 어쩐지 꽉 막히고 괄괄한 성미를 가졌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소년'을 동경한다. 그들의 '순수함', '천진함', '때묻지 않음'을 그리워하며 우리 자신이 영원한 '소년'이기를 바라곤 한다.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가능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극 중 웬디 어머니의 말처럼,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막연하면서도 희망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영원히 소년일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우리가 꿈꿔왔던 것처럼 낭만적이고 유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의 매일은 가슴이 벅차오르게 설레고 즐거울까?
영화 <웬디>는 이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2. 나는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영국이 배경이던 원작의 피터팬 이야기와는 달리, 영화 <웬디>는 20세기의 미국 남부를 주 무대로 한다. 어린아이가 드문 어느 시골 마을의 한 식당에서 주인공 웬디는 자라난다.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조촐한 식당은 언제나 노인들로 붐빈다. 그 틈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시선의 중심에 서 있다. 아이들을 향하는 노인들의 시선은 애정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귀애하면서도 저주한다. 너희는 결국 이 시골 바닥에서 네 부모의 일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그것은 그 푸른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미묘한 질투때문일 수도 있고, 세월의 풍파 속에서 겪은 회의적인 경험담인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은 썩 꺼림칙한 예언이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웬디는 다짐한다. 자신은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겠노라고. 기차를 타고 수 많은 집과 건물들을 지나 소녀와 소년의 땅으로 가 모험을 하겠노라고. 한때는 로데오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아이 키우는 것을 꿈이노라 이야기하는 엄마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웬디는, 자신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피터의 기차에 뛰어든다.
3. 동심이라는 이름의 황금 성배
웬디와 제임스, 더글라스는 피터의 기차를 타고 어느 화산 섬으로 향한다. 그곳은 아이들이 영원히 아이들로 있을 수 있는 곳, 네버랜드다. 그곳은 마치 규칙이 없는 천국 같아 보인다. 소란법석을 떨어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엄마의 일을 돕지 않아도 누구 하나 잔소리 하는 이가 없다. 그들은 얼마든지 악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도 규칙은 있다. 어머니를 믿을 것.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 어떤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 것. 이 규칙을 어기는 자는 어른이 되어버리므로, 이러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피터 무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 된다. 그것은 불치의 병과도 같다. 아이들은 늙음을 두려워하며, 늙어버린 동료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늙고 싶지 않으므로 아이들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어머니(어떤 마법적인 힘을 가진 고래 비슷한 생물)'에 대한 아주 원시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거나, 점점 늙어가는 제임스의 손을 주저 없이 자르는 피터의 모습들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상상하는 소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그것은 소설 <파리대왕>의 잔인한 소년 왕, 랄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늙어버린 소년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그 무리로부터 소외받는다. 잊혀지진다. 버조와 제임스(그리고 제임스의 '저주'를 돌리기 위해 그와 함께 간 웬디)가 그랬듯, 그들은 낙원 같은 푸른 숲 너머로 향한다. 그곳에는 많은 것이 모래톱에 뒤덮인 황무지이며, 이미 늙어버린 선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소년 시절의 즐거움이라고는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공허하다. 그들의 할 일이라고는 '어머니'를 사냥하려고 그물을 치는 일 뿐인데, 그것은 '어머니'의 살을 먹음으로써 소년 시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웬디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들은 춤을 출 줄도 모르고, 장난치며 노는 법도 모르고,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저 너무 오래되어서 다 잊어버렸노라고 변명할 뿐이다.
웬디의 쌍둥이 오빠 중 하나인 제임스는 한때 더글라스와 더불어 영원한 소년으로 남자고 맹세했다. 그들은 로데오를 포기해야 했던 엄마나, 황무지 너머에서 만난 버조처럼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제임스는 사고로 더글라스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 크나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늙어버리고 만다. 제임스는 그 늙음에 대비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어머니'를 사냥하여 그의 소년 시절을 되찾고자 한다. 소년으로 돌아가겠다는 광기에 휩싸인 그는 늙음을 거부하느라 잘라버린 팔 위로 갈고리 의수를 끼우고, 그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아는 '피터 팬'의 악당, '후크 선장'이 된다. 다 늙은 제임스가 자신의 소년 시절의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줄 알았던 형제와의 재회를 순수하게 기뻐하기는 커녕, '너는 어째서 소년의 모습 그대로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잊은 것이다. 그를 가슴아프게 했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소년 시절'에 대한 집착과 광기로 말미암아.
'어머니'를 숭배하는 소년들과 어머니를 사냥하고자 하는 노인들. 소년들은 '어머니'가 살기를 바라고 노인들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두 집단은 언뜻 보기에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매우 닮아있다. 그들 모두 '소년다움'을 유지하거나 되찾기 위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황금 성배에 목매던 중세의 기사들처럼, 소년답고자 했던 소년들의 갈망이 그들 자신을 망친 셈이다.
4. 우리 안의 소년을 찾아서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영원한 소년이란 정녕 없는가? 우리는 순수의 시절이 그저 떠나가기를 지켜만 봐야하는가? 주인공 '웬디'는 이러한 절망적인 물음에 희망적인 해답을 제안한다.
영원한 소년으로 있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성장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성장 역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변의 많은 세월 역시 그를 비껴나가게 된다. 가족, 친구, 사회는 자라지만, 당신만은 자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피터와 제임스를 비롯한 소년(혹은 소년이었던 노인)들은 그 찬란한 고립을 기꺼이 선택했다. 그러나 웬디는 그러지 않았다. 네버랜드에 다다랐을 때도, 다른 소년들과 뛰놀며 '어머니'의 신비를 만끽할 때도 웬디는 고향에 남아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고 언젠가 그녀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녀는 늙어버린 소년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들이 잊었던 소년 시절의 즐거움을 되살리려고 애쓰는가 하면, 그저 맹목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믿음만을 강요하는 피터에게 '그것은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녀의 특별함은 더글라스의 상실로 인해 늙어버린 제임스와도 대비된다. 제임스와 웬디는 모두 더글라스라는 형제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제임스는 늙었고, 웬디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제임스가 더글라스와 절친한 쌍둥이 형제였으므로 그의 상실감이 더 컸으리라고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좀 다른 각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거 같다. 사람은 그 성장 과정에서 보다 복합적인 감정을 습득하고 받아들여 나감으로써 감정적, 정신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 과정이 주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겉모습만 빠르게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반면 웬디는 세월의 흐름과 늙음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소년의 모습'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소년다움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어른스러워서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천진하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소년들과 다르게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흐르는 세월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로데오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이들을 훌륭하게 기르는 것이 목표라는 어머니에게, 이미 늙어버린 제임스와 다른 소년이었던 노인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자란다는 것의 찬란함 역시 바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결코 우리의 필연적인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녀는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들에게 당신 안에도 여전히 소년이 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웬디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미 늙어버린 제임스는 '후크 선장'이 되어 네버랜드에 남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피터와 제임스는 이제는 어리거나 늙은 소년들의 섬, 네버랜드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살아간다.
웬디는 어른이 되어버렸으므로 소년들의 땅인 네버랜드에는 더는 돌아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찬란한 소년 시절을 추억할 수 있고 그것을 향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다. 그 시절의 그 소년은 아직도 그녀의 안에 남아있거니와, 자라남으로써 그녀가 많은 것들을 보고 누리고 배울 수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무리 감상
이 영화는 산만하고 거칠다. 말 그대로 동화인 원작의 스핀오프라서 그런 것일까? 개연성을 따지고 들면 이애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캐릭터들이 매력적인가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피터는 개구쟁이 폭군이고 제임스는 변절(어른이 되어버리는)한 소년인데, 인물들이 입체적이지 않아서 큰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이 영화를 즐겁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들을 큰 이야기의 한 장치로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영화 자체는 아주 시적이다. 웅장한 자연이 곧잘 연출되며, 그것을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과 물건들(그것도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치면서 낡고 초라해진)과 대비한 것이 절묘하다. 네버랜드의 소년과 노인들, 그리고 웬디의 고향에서의 아이와 어른들의 모습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것도 하나의 관람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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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면 후회 할 영화들로 가득! 넷플릭스 6월 종료작
여러분! 하나씩 공개되는 6월 넷플릭스 영화, 잘 보고 계신가요?
저번 콘텐츠에서 소개해드린 <새콤달콤>이 현재 넷플릭스 영화 한 국 순위 TOP10 순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6월 종료작 또한 같이 찾아왔습니다. :(
이번 종료작에는 명작들이 너무 많아 뽑을 수 없어 다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저는 <터미널>,<타이타닉>이 제 최애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가 있다면 관람을, 여러분의 최애 영화가 있다면 n차 관람을 놓치지 마세요!
넷플릭스 6월 종료작, 함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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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종료
▶ 장고 : 분노의 추적자 (2012) - 쿠엔틴 타란티노
6월 30일 종료▶ 포레스트 검프 (1994) - 로버트 저메키스
▶ 투모로우 (2004) - 롤랜드 에머리히
▶ 터미널 (2004) - 스티븐 스필버그
▶ 타이타닉 (1997) - 제임스 카메론
▶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2015) - 매튜 본
▶ 캐치 미 이프 유 캔 (2002) - 스티븐 스필버그
▶ 이지 A (2010) - 윌 글럭
▶ 아메리칸 뷰티 (1999) - 샘 멘데스
▶ 빅 피쉬 (2003) - 팀 버튼
▶ 블랙 스완 (2010) - 대런 아로노프스키
▶ 라이프 오브 파이 (2012) - 이안
▶ 미션 임파서블 : 로그네이션 (2015) - 크리스토퍼 맥쿼리
▶ 인 디 에어 (2009) - 제이슨 라이트먼
▶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2013) - 루이스 리터리어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 웨스 앤더슨
▶ 블레이드 러너 (1982) - 리들리 스콧
▶ 다이 하드 4.0 (2007) - 렌 와이즈먼
▶ 제이슨 본 (2016) - 폴 그린그래스
▶ 루시 (2014) - 뤽 베송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2014) - 제임스 마쉬
▶ 그린 존 (2010) - 폴 그린그래스
▶ 언브로큰 (2014) - 안젤리나 졸리
▶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 샤론 맥과이어
▶ 러블리 본즈 (2009) - 피터 잭슨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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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 하에 박탈당한 모든 것을 위해
어릴 적에 상상해본 적이 있다. 만약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일찍 태어났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운이 좋아봤자 규방 규수. 혹 팔자가 사납다면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결국 그 망상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싱겁게 끝났다. 오랜만에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였다.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2020년 첫 만점을 준 작품으로도 많이 알려졌지만, <씨네21> 평론가 별점 또한 반짝반짝해서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서서 (2월 10일 기준) 13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영화는, 내용만 보면 자못 단순하다. 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라는 귀족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그가 사는 섬으로 향한다. 의뢰를 맡긴 이는 엘로이즈의 어머니로, 딸의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에게 미리 초상화를 보내 두려는 심산이었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목숨을 잃었는데 하녀 소피부터 동생 엘로이즈까지 모두가 내심 자살로 추측한다. 결혼을 피해 수도원에 들어가 있던 엘로이즈는 언니가 남긴 미안하다는 편지를 받고, 원치 않는 결혼으로 떠밀려 나온다. 그런 엘로이즈는 결혼 초상화에 모델로 설 마음이 전혀 없으니, 산책 친구인 척 몰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마리안느에게 붙었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엘로이즈도 그런 마리안느를 마주 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새로운 감정의 기류가 피어난다.
한 사람의 절망
이 영화는 탄탄하다. 뒤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미로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매 장면이 명화 같아서 다음이 궁금할 틈도 없었다. 음악이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종이에 슥슥 그림 그리는 소리, 따닥따닥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소리에 맞춰 나도 같이 숨을 죽인 탓이다. 그러다 한 번씩 그 촘촘한 연결이 의도적으로 삐그덕거리며 튿어질 때, 어린 시절 바이킹 처음 탔을 때처럼 심장이 철렁한다. 모닥불 앞에서 마비된 듯 서로를 바라보다 급작스럽게 움직임이 시작될 때라든가, 마을 여인들이 모여 주문처럼 들리는 노래를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작별 장면에서도.
그중에서도 삐끗하는 정도가 심하다고 느꼈던 건 마리안느가 저택 안에서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하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유령처럼 떠오르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중간중간 본다. 솔직히 말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전설의 고향이야 뭐야..."였다. 나중의 장면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작위적인 장면 아닌가, 싶다가... 어쩌면 엘로이즈가 아니라 엘로이즈의 언니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절벽으로 뛰어내린, 그렇게 결혼이라는 견고한 미래로부터 도망친, 절망했던 한 사람.
어쩌면 마리안느가 태워버린,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도 엘로이즈의 언니 것이었는지 모른다. 엘로이즈에 비해 다소 현란한 손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엘로이즈의 그림은 몰래 그려야 했으니, 누가 봐도 요구받은 포즈 같은 그런 손 모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유령이든 초상화든 어디까지나 한 관객의 해석이고 추측일 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한 갈래 가능성일 뿐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엘로이즈 언니의 그림자가 계속 기웃거린다고 느낀 이유는 엘로이즈가 결혼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와 아마 같을 것이다. 꼭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정서겠지.
두 사람의 사랑
결혼이 싫어 수도원으로까지 도망쳤음에도 끝내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자 엘로이즈는 더 도망치지 못한다. 초상화 모델이 되길 거절하는 이상의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타난,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면서 엘로이즈의 삶에 사랑이라는 불이 켜진다.
두 사람은 예술가였고, 각자의 미학이 공명하는 사랑을 했다. 마리안느가 꿈을 꾸고, 손을 움직이는 예술가라면 엘로이즈는 생각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꿈꾸게 만드는 예술가랄까. (마음을 확인한 후 마리안느가 "내 꿈을 꿨어?" 물으면 엘로이즈는 "네 생각을 했어." 대답한다.) 처음 완성된 초상화를 볼 때도 두 사람은 화가와 미술 비평가처럼 대화하며 단박에 서로의 말 아래 깔려있는 마음까지 알아차린다.
엘로이즈는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묻는다. 같은 장면에서 서로가 관찰한 서로의 면면을 ("모두 알고 있군요")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면, 화가와 모델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르로 예술을 펼쳐가는 두 사람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 세상엔 그렇지도 않겠지만, 시대극 속에서라면 으레 모델은 화가에 비해 부수적인 인물로 인식된다. 존재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는 그인데도.
게다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우리는 동등한 지위라고, 정확히 같은 지위라고 단호하게 강조한다. 높으신 분이라고 놀리듯 던진 마리안느의 말을 다잡으며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였지만, 어쩐지 뮤즈라는 이름으로 예술가의 자리를 박탈당해온 이들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의 자리에서 내쳐진 이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까미유 끌로델, 그는 예술가로서도 연인으로서도 깎여나간 이름이니까.
이 영화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떠오르게 만들고는 고스란히 감싸 안는다. 목적어 자리에 갇혀 있던 이들을 구해내어 그들이 빼앗긴 주어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뮤즈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박탈당했던 예술가와 연인들의 자리를 오롯이 되찾아 준다.
세 사람의 연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귀족 아가씨는 요리를 하고 하녀는 자수를 놓는데, 화가가 가운데서 술을 똑같이 따라 한 잔씩 나누어준다. 자연스럽게 술을 받아 홀짝이고 각자의 일을 계속하는, 문자 그대로 정확히 같은 지위의 세 사람. 엘로이즈가 수도원 생활을 표현할 때 썼던 "평등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첫 초상화가 신랄한 비판을 받으며 두 예술가에게 버려지고,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말미를 조금 더 주며 자리를 비운 단 며칠. 짧은 시간 세 사람은 친구가 되어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마을 여자들이 모닥불 근처에 모일 때도 함께 가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책을 함께 읽고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하녀 소피가 민간요법에 의지해 낙태를 꾀할 때 같이 바다로 들로 다니며 돕고, 중절 수술을 하러 갈 때에도 동행했다.
그리고 이들의 아름다운 연대는 이내 예술로 승화한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침통한 분위기가 감도는 밤, 엘로이즈는 그 순간을 단박에 예술로 바꾸어 버린다. 요청에 의해, 누군가가 눈대중해볼 대상이 되기 위해 예술의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주체가 되어 순간을 뒤틀고 비집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뒤집어, 가련한 객체였던 에우리디케를 선택의 주체로 만들었듯이 또 그렇게.
세 사람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 여성 화가에게는 주제 하나도 쉬이 내어주지 않던 시대에 게릴라전을 치르듯 그림을 그리던 마리안느에게도, 상대는 자신의 초상화까지 그려가는데 자신은 상대가 사는 도시밖에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억지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 엘로이즈에게도, 원치 않았던 임신을 혼자서 떨치고서는 시든 꽃을 활짝 핀 자수로 담아내는 소피에게도 그 힘은 보인다. 그리고 그 힘은 그들끼리만 보낸 그 며칠 가장 활활 타오른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함께 있는 힘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홀로 있음도 결국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식하며 스스로와 함께 있는 것일 테니. 이 영화에서 그림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던 시간을 되새길 때 그리는 것들이다.
또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단 세 장면뿐인데,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들려주는 장면, (개인적으로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처음 입 맞추고 싶었던 순간이 이때일 거라고 믿고 있다. 같이 본 친구는 다른 장면을 꼽았지만.) 물리적으로 옆에 서서 눈을 마주치면서 음을 쌓아가는 여자들의 노래는 물론이고, 몸으로는 떨어져 있는 마지막 장면조차 엘로이즈의 시선 끝에는 누가 봐도 확실히 마리안느가 아른거리고 있다.
예술이란 단어는 너무 크고 깊어, 나로서는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예술이란 사랑하는 눈에서 시작될 때 그 본질의 의미를 갖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또 역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유미주의자들에게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아름답지 못하게 담는 것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고, 폭력의 양상을 보이는 순간 예술은 이미 본질을 상실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과 사랑은 어쩐지 닮아있어, 이 영화의 두 예술가 사이에서 부드럽게 얽히고 파도처럼 고동친다. 시선 속에서, 대화 속에서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던 그것에, 두 예술가가 캔버스 앞에 마주하는 순간부터 불이 붙는다.
이 영화는 당대 여성의 지위를 고민하는 여성의 메시지를 배제하고 볼 수 없고, 아주 대놓고 두 여성의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고, 그들이 펼치는 예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셋은 마치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 같아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생존의 결을 같이 한다고 느낀다. 주인공들끼리 보낸 5일이 아름다웠던 건, 그 셋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랑은, 여성은 이런 존재라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나는 예술도 여성성도 사랑도 모두 무언가를 강인하게 감싸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어그러진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한 사람의 절망, 두 사람의 사랑, 세 사람의 연대 안에서. 그렇게 이 영화는 보여준 이들과 보여주지 않은 이들까지 감싸 안으며 우아하게 타오른다. 한 번 붙은 불은 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슈베르트의 <여름>처럼 강렬한 사랑의 기억 하나가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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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녀의 잉태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이유!
수녀가 임신했다. 과연 이 일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판단은 누가 주체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신부와 수녀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축복하고, 임신을 맞닥뜨린 수녀는 저주처럼 느낄 것이다. 신이 내린 운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종교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한다면 오해 마시라. <이매큘레이트>의 내용이다. 티 하나 없이 깔끔한 의미를 지닌 제목과 달리, 극 후반부는 피로 범벅된 주인공 수녀의 모습을 마주하며 그녀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수녀의 수난사인 동시에 한 여성의 수난사를 보여준다.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온 미국 소녀 세실리아(시드니 스위니)는 테데스키 신부(알바로 모르테) 소개로 어느 수녀원에 도착한다. 언어의 장벽은 물론, 악몽에 시달리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조금씩 타지에서의 적응을 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영문 모를 구토를 한 세실리아는 추기경과 신부에게 수녀가 되기 전 성관계 유무를 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불쾌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 신에게 선택받은 자로서 성당 모든이에게 축복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점점 이곳의 이상한 점을 알게 되고, 아무도 모르게 탈출을 감행한다.
<이매큘레이트>는 수녀의 임신이라는 소재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올해 상반기 개봉한 <오멘: 저주의 시작>이 떠오른다. 미국인 수녀가 홀로 이탈리아의 한 수녀원으로 온 후, 영문 모를 임신을 하는 설정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하지만 두 영화는 약속이나 한 듯 후반부에서 서로 각자의 길을 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화자가 수녀이지만, 결국 시리즈의 악마 데미안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반대로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임신을 한 수녀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심리적 여정을 주의 깊게 아니, 끈질기게 따라간다.
보통의 수녀에서 성녀가 된 그녀의 삶은 한순간에 뒤바뀌는데,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초반 로우 앵글로 신을 비춘 것과 동일하게 성녀가 된 세실리아를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신격화가 된 세실리아를 우러러보는 수녀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안개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은 수녀원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녀는 신이 아닌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이 누군가에게 바치는 재물처럼 여겨진다.
이후 세실리아가 겪는 고난의 과정이 그려지는데, 그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하다. 감독은 고난의 과정을 견고한 서사 흐름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영상으로 오롯이 옮긴다. 마치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처럼 고통스런운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사가 아닌 심리의 방점을 둔 이야기 흐름 때문에 기본적인 정보 전달이 미흡하고, 각 인물의 행동 근거가 약하다. 특히 비밀을 감춘 채 그녀에게 접근하는 신부와 수녀들의 180도 다른 모습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넌스플로테이션(수녀들의 삶을 다룬 장르)을 차용해 장르적 재미를 살리려고 했지만, 점프 스케어와 피칠갑 장면에만 의존해 호러 장르의 재미를 십분 살리지는 못하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공포가 남다른 건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두려움을 잘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는 공포 영화는 시대의 가장 어둡고 두려운 부분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해왔던 게 사실. 그런 점에서 <이매큘레이트>는 현대 여성들이 가진 임신과 출산 자체의 공포,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결혼 후 당연히 임신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주장에 따른 현대 여성들의 잠재적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극 중 세실리아 임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의 재림인데, 이는 예로부터 전해진 종교의 원칙, 가족 윤리 등 굳어진 여성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압박은 극 중 세실리아의 마음에 불안과 고통을 심고, 임신의 궁극적 목적이 밝혀진 이후 억압된 감정이 싹을 틔우면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주를 일으킨다. 그녀의 피칠갑은 이유가 있다.
더불어 영화는 지금도 미국에서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는 낙태 금지법에 대한 은유적 항의의 뉘앙스를 풍긴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마지막 세실리아의 마지막 절규와 행동만 보더라도 이를 잘 나타낸다.
뭐니 뭐니해도 <이매큘레이트>의 가장 큰 매력은 핏빛 열연을 펼친 시드니 스위니다. 그녀는 불안, 당혹, 슬픔, 분노 등 세실리아의 다층적 감정선을 큰 눈망울과 세밀한 표정 연기, 그리고 떠나가라 지리는 목청으로 표현한다. 드라마 <유포리아>를 통해 눈도장을 찍은 후, 다수의 작품을 거쳐오면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시드니 스위니에게 이 영화는 완성도를 떠나 그녀의 연기 인생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무조건 후반부 시드니 고라니, 아니 시드니 스위니의 절규와 외침, 그리고 마지막 결단을 주목하길 바란다.
P/S: 참고로 시드니 스위니는 연기는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다. 몇 년 전 오디션을 위해 읽은 스크립트가 준 강렬한 섬뜩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그는 미공개로 남은 그 작품을 자신이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유포리아> 시즌 2 이후, 이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을 재게, 마이클 모한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제작의 시작을 알렸다. 이 작품에 담긴 그녀의 애정을 알았다는 듯 <이매큘레이트>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대비 4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드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사진제공: ㈜엔케이컨텐츠
평점: 3.0 / 5.0
한줄평: 시드니 스위니가 열고 닫는 여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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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소수자 신체성에 토대한 유쾌한 반격
호랑이 소녀(Tiger Stripes)
‘부천 초이스: 장편’ 섹션
아만다 넬 유 감독
Malaysia/2022/95min
장난기 많은 12살 소녀 자판. 때로는 유쾌한 성격 탓에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혼나기도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판의 생리가 시작된다. 동급생 친구 중 처음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반전된다. 늘 자판과 함께 지내던 친구들은 생리혈 냄새에 대한 비난과 그 냄새를 따라다니는 귀신 이야기를 수군대며 자판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남들보다 2차 성징이 빠르게 시작된 자판에 대한 또래의 질시와 생리를 ‘불결한 일’로 대해온 오랜 문화가 섞인 결과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리에 이어 알 수 없는 신체의 변화가 생겨 자판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간다.
영화는 왜 자판이 괴상한 신체적 변화를 겪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생리 이후 그 변화가 조금씩 진행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이 모호성은 전략적이다. 자판이 겪는 신체 변화의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녀의 경험이 사회가 낙인찍은 여러 소수자의 신체성을 포괄할 가능성을 연다. 손가락질 받는 모든 소수자의 신체적 특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자판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실은 이 변화가 더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는 점은 소수자 신체가 품은 힘과 가능성을 고민케 하기도 한다.
장애인의 몸, 퀴어의 몸 등 사회에서 주변화된 몸은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져 차별과 낙인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의 생리에까지 부정적 편견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우리가 소수자의 신체적 특징을 악마화하여 ‘정상 신체’의 내용과 범주를 확정해왔음을 보여준다. ‘정상’이 먼저 있어서 ‘비정상’이 규정된 것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몸을 통해서만 ‘정상’ 신체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 소녀〉는 소수자 신체성이 숨겨야만 하는 것일 때는 괴로움을 유발하지만, 이를 마음껏 펼쳐낼 환경이 있다면 기존 위계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소녀의 성장기와 버무려 선보인다. 자판의 유쾌하고 당찬 여정은 신체의 문제로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는 모두에게 즐거운 위안으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6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됩니다. 오프라인 상영 시간표와 온라인 상영작 리스트는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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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 / ร่างทรง,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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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은 코미디'라는 말은 <곡성>을 연출한 "나홍진"감독 본인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이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영화 <랑종>은 <블랙 위도우>를 개봉일부터 누르며, 현재 관객수 253,396명(07.15 기준)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나홍진"감독이 본인의 영화를 어떻게 소개해왔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장편 데뷔작 <추격자>를 "밸런타인데이에 맞는 데이트 무비"라고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황해>는 "크리스마스"였으니, "코미디 영화"로 소개한 <곡성>의 소개말은 양반으로 보일 겁니다.그렇다면, "나홍진"감독은 왜, <곡성>을 콕 집어냈을까요?
그 이유에는 이번 <랑종>은 당초 <곡성>의 "일광(황정민 분)"의 프리퀄로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무산되자 <셔터>의 '반종 피산다나쿤'이 해당 각본을 각색하고, 직접 감독하여 만든게 이번 <랑종>이 되었는데요.
결과물이 당초 기획과 다르게 되었지만, 결국 영화 <랑종>은 <곡성>과의 유사성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어떤 영화이었는지?' - <랑종>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영화는 태국의 "이산"지역으로 "랑종", 즉 "무당"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제작진들의 자막으로 시작합니다.
이곳에 있는 무당 "님"을 만나 촬영을 하던 중, 언니 "노이"의 남편 부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것도 잠시, 조카 "밍"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님"은 "밍"의 방에서 수상쩍은 것을 발견하는데...진짜로 무서울까?
1. 우리의 이야기
영화 <랑종>의 관람을 시작하기 전부터 영화가 말하는 "애니미즘 - 토테미즘 - 샤머니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절과 같은 종교들도 있지만 토속 신앙까지 합쳐본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이집트의 경우. 고양이나 쇠똥구리의 형상을 지닌 신도 존재하니 마치, 국내 포털에서 '무엇으로 만든 김치'처럼 얼마나 있을지는 자국민들도 모를 겁니다.
그만큼 익숙할 수가 없는 소재를 그것도 낯선 국가를 배경으로 관객들을 이해하게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 <랑종>은 그렇게 어려운 영화는 아닙니다.무엇을 해야만 하는 거죠?
앞서 말했듯이 자국민들에게도 어려운 소재를 타국을 배경 삼아 만든다는 건 배로 어려운 일이지만, 유사한 부분도 존재합니다.
'환웅 설화'를 예시로 든다면, 환웅이 하늘에서 같이 내려온 3명의 신하 '풍백 - 운사 - 우사'는 "자연"을 뜻하는 "애니미즘"을, '단군왕검'이 태어난 과정에서의 '곰 - 호랑이'와 같은 '동물'은 "토테미즘"으로 의미합니다.
여기에 "환웅"은 자연스럽게 "무당"을 뜻하는 "샤머니즘"으로 볼 수 있으니 나라는 달라도 전달되는 의미는 똑같아 어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꼭 <곡성>과의 유사성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죠.2. 트렌드 호러담(談)
그렇다면, 영화 <랑종>의 공포는 어땠을까요?
보통 공포 영화에서의 러닝 타임은 "점프 스케어"로 일컫는 깜짝 놀래는 방법과 찝찝함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구분됩니다.
그런 점에서 131분의 <랑종>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운 영화로 '어떤 공포를 선호하는가?'에 따라서 관객들이 느끼는 만족도 역시, 크게 다를 겁니다.
무엇보다 영화 <랑종>은 동양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보여주는 장르는 최근 국내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오컬트"와 일맥상통하게 느껴집니다.동양에서 서양을 느끼다?
굳이, <곡성>을 언급하지 않아도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제8일의 밤>만을 보더라도 국내에서 '오컬트'는 더 이상 낯선 장르는 아닙니다.
이로 인해, 국내 관객들에게 공포 영화에서의 귀신은 더 이상 "한(恨)"을 품어 해소시켜야 하는 딱한 존재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랑종>에서 보여주는 귀신은 성불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아닌 퇴치를 해야 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이런 익숙함 때문에 <랑종>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굳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꺼내든 "파운드 푸티지"는 이를 납득하게 만듭니다.3. 어떻게 쓰느냐에 다르게 느껴진다.
1999년에 나온 <블레어 윗치>를 시작으로 2009년 <파라노말 액티비티>로 유명한 "파운드 푸티지"는 "진짜인가?"를 의심케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핸드헬드"라는 촬영 방법은 일부러 화면을 흔들어 비전문인이 촬영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 현실성을 부여하는데요.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방법인데, 이런 우려와 다르게 <랑종>은 이를 살벌하게 보여줍니다.
극 중 "CCTV"로 "밍"이 무엇을 하는지?를 지켜본다든지, 적외선 시점으로 보는 장면은 공포 게임 <아웃 라스트>가 연상되는 등 앞에서 쓰지 않았던 "점프 스케어"를 폭발시켜 관객들의 어깨들을 들썩거리게 만듭니다.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에는...
이렇게 만든 영화 <랑종>의 이야기는 역시, <곡성>과 유사함이 지적되나 면밀히 살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두 영화, 운명을 받아들어야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내용으로 <곡성>의 경우. '왜 하필이면 자네 딸이냐고? 그 어린 것이 뭔 죄가 있다고~?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뭐가 걸릴 건지 알고 미끼를 던지는가? 그놈은 미끼를 던진 것이여,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본 것이고.'으로 무작위적인 선택을 신의 운명으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랑종>은 받아들여야 하는 신의 운명에 있어 이들이 저지른 죄악들에 그 원인이 있음을 말합니다.4. 돌림판과는 다른 족쇄들
영화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님"은 신내림을 거부한 언니 "노이"를 대신해 무당을 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노이"가 신내림을 거부해 신의 분노를 샀다는 점도 있지만, 극 중 "개고기"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개는 인간으로의 환생 직전의 마지막 단계로 보아 이를 먹지 않는데, "노이"를 이를 판매하고 있으니 신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죄를 저질렀으니 갚아야지!
여기에 그의 오빠 "마닛"은 가정이 있음에도 외도를 즐기고, 죽은 "밍"의 오빠 "맥"은 "천주교"에서 가장 큰 죄악 "자살"을 저질렀고 동생 "밍"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시사했으며 "밍"은 이모 "님"을 비롯한 "무당"을 조롱하는 등 저지른 죄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중에는 "밍"의 아버지 "아싼티야"의 조상이 예전에 공장에 불을 저질렀던 과거까지 피해 갈 수 없음을 예고합니다.
이런 점에서 "님"은 이 중에서 가장 무결한 인물입니다.
결국, 무당의 운명을 받아들었고, 결혼과 자식을 두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도운 인물이니 이 캐릭터의 존재는 앞선 캐릭터들에게는 유일한 가능성으로도 해석됩니다.5. 마동석씨, 여기 좀 와봐유!
이렇게 본다면, 영화 <랑종>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영화이겠지만 중간마다 아쉬운 구석들이 많습니다.
공포 영화에서는 "왜 그렇게 하는 거야?"로 관객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이를 흔히, "발암"으로 총칭해서 말하는데 극 중 "신내림을 못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일을 크게 만드는 등 가슴이 답답한 전개들이 많은데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력의 배치에 형평성을 의심케하는 전개에도 답답함을 느끼니 아쉬운 개연성을 보여줍니다.깨물지 말고 말을 해!
이런 이야기의 아쉬움이 영화 내내 있었음에도 초반에는 언급되지 않는 이유에는 분위기와 사운드로 찝찝함으로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거든요.
하지만 후반부에 이런 문제가 드러나는 이유에는 <곡성>에서도 나온 "좀비(?)"의 등장입니다.
극 중 혼을 언급하는데, 동물들도 있어 그런 모습들에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이를 1인칭으로 보여주는 모습의 연출이 <랑종>의 폼을 급격하게 떨어트립니다.
특히, 카메라를 땅바닥에 내려두고 피만 보여주거나 소리만 나오는 "파운드 푸티지"의 클리셰가 유치하게 보이는데요.
분명히, 나쁘게 본 영화는 아니지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해서 그렇지 못한 마무리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처음에 언급 드린 '곡성은 코미디'에는 아무래도, 영화가 보여주는 수위로 보입니다. 세상에 <곡성>이 '15세 이용가'인걸 5년 만에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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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리뷰」실제 역사와의 차이점 22가지 | 킹메이커 영화리뷰(*스포일러) | 킹메이커 역사
? "킹메이커(2022)" 영화와 실제 역사 비교영상 (*스포일러)
어디까지 실화이고 어디까지 픽션인가??
- 킹메이커 영화정보
장르: 드라마
감독: 변성현
각본: 변성현, 김민수
제작: 이진희
촬영: 조형래
조명: 이길규
미술: 한아름
음악: 김홍집, 이진희
편집: 김상범
출연: 설경구, 이선균 외
제작사: 씨앗필름
배급사: 대한민국 국기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촬영 기간: 2019년 3월 25일 ~ 2019년 7월 30일
개봉일: 대한민국 2022년 1월 26일
상영타입: 2D : 디지털
화면비: 1.85:1
상영 시간: 1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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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플> 메인 예고편
당신을 사로잡을 가장 특별한 여운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 유행병에 걸린 ‘알리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이름도 집 주소도 아닌 한 입 베어 문 사과의 맛. 며칠이 지나도 그를 찾아오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무연고 환자로 분류된 ‘알리스’에게 병원에서는 새로운 경험들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리스’는 자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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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대가 조국> 티저 예고편
사냥이 시작됐다!
언젠가는 '내'가 될 수 있는 갈등과 저항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