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4-08-19 21:06:19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보라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이 말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데, 그건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린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살해된 소녀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이는 걸 용납하는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이 되게 해준다. 그리고 만약 그 말들이 살해된 소녀에게서 나왔다면, 글쎄, 그렇다면 그 말들은 틀림없이 진실일 테니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게 틀림없다. 살해된 유대인이 내려주는 그런 은총과 사면이라는 선물이야말로(정확히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 자리 잡은 선물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안네의 은신처에서, 그가 쓴 글에서, 그가 남긴 '유산'에서 너무도 간절히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죄 없는 죽은 소녀가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었다고 믿는 것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안네가 '내면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 관해 쓴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 문장을 쓰고 3주 뒤, 그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유대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주는 사실이 여기 있다. 그 사람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사실은 안네 프랑크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해 말할 가치가 있다. 그의 일기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집단 학살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것이 그의 일기가 집단 학살에 관해 쓴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런 작품이었다면 그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쓴 글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안네의 일기가 얻은 명성 같은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런 무언가에 가까이 갔던 기록들은 오직 은폐라는 똑같은 규칙,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예의 바른 피해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규칙을 준수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었다.이디시어판은 <나이트>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자들에 대한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 무관심으로(혹은 적극적인 혐오로) 그런 살해를 가능하게 했던 세상 전체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위젤은 후에 프랑스인이자 가톨릭 신자이며 노벨 상 수상자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도움을 받아 '나이트 La Nuit’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프랑스어판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젊은 생존자의 분노를 신학적 고뇌로 전환한 작품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속한 사회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떤 독자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신을 비난하는 것이 낫다. 이런 접근법은 위젤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책이 미국이 베푸는 호의의 전형인 오프라 북클럽 선정작이 되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도 일본의 십 대 소녀들이 안네의 일기를 읽었듯 이 책을 읽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위젠은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은폐해야 했을 것이다.<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주의: 참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현시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기엔 너무 참여-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 것도 같다. 대부분의 글로벌 관객들에겐 영화보다도 먼저 사회적 책무를 인지하고 유의하는 행동주의 예술가의 수상 소감 영상이 전해져왔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오스카에서 유대계 정체성(Jewishness)과 홀로코스트를 또다른 전쟁/학살을 위해 오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 후, 곧장 전세계 시오니스트의 돌을 맞는다. 그 자신 역시 유대계이면서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정면으로 반대한 그가 손을 덜덜 떨며 준비해온 ‘선언’을 수행할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를 느낀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선 곳에 가장 먼저 균열을 내며 우리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 모습. 그렇듯 순교를 불사한 지성인의 결기는 어떤 이에게나 강렬한 전율로 다가오니까.
한편 미디어 아트로서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흥미로운데, 우선 이 영화가 전시하는 풍광은 오프닝부터 경박하리만큼 경쾌하고 그늘 없다. 르누아르의 사랑 넘치는 가족 연작을 떠올리게 할 만큼 밝은 햇볕 속, 떼죽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며 안전한 부귀를 누리는 가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건전한 수용소 미관 조성’을 위해 라일락 관목을 꺾지 말라고 엄숙하게 공지 방송을 하고, 아이들은 곧 도살될 유대인들처럼 아버지 루돌프의 눈을 가리고 그를 정원으로 데려가 깜짝 생일 파티를 선물한다. 어머니 헤트비히가 정성껏 돌보는 아름다운 정원과 윤기 나는 검은 개와 건강한 5남매까지, 완벽한 소품을 둔 듯 잘 가꿔진 이 삶이 평범할수록 도리어 벽 너머의 - 어쩌면 이미 삶이 아닐 - 삶(들)에 대한 암시가 숨을 죄여온다.
헤트비히를 포함한 장병 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머리 하나는 대단한’ 유대계 희생자들을 비웃고, 그들로부터 갈취한 밍크 코트와 보석들을 두르고 힘을 과시하지만 이 과시는 절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다. 다른 부인의 거대한 코트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여제 같다”며 부러워하고 비꼬았던 헤트비히는 강아지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은 문 안에서 제게 떨어진 코트를 몰래 입어보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값비싸고 보드라운 코트는 헤트비히가 평소에 입던 평범한 원피스에 비해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또 헤트비히는 코트 주머니 안에서 나온 립스틱 -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는 살아 있었던 누군가의 소유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소품 -을 발라봤다가 이내 쓱쓱 문질러 지워버린다.
이 은근함, 이 비밀스러움은 회스 부부를 포함한 독일인 전범 가족들이 그 시점 도달한 삶이 절대 처음부터 그들 소유가 아니었단 사실을 제시한다. 그들이 부유했었고 똑똑했던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장모가 과거의 유대인 고용주를 떠올리고 “그 여자도 지금 저기 있으려나?” 상상하며 어딘지 고소해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전에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갖고 있었던 이들에 대한 질시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상위 계층을 ‘몰아냄’으로써 계급 이동에 성공한 하위 계층의 승리감, 도취감 내지는 자족과 뿌듯함이 이들의 얼굴에 부드럽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이는 저보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래요”라며 수줍은 듯 의기양양한 듯 말하는 헤트비히, ‘불합리한’ 전출에 항의하다가 결국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게 삶이란다”라고 애마에게 말하는 루돌프. 우습고 불쾌한 기분이 정점을 찍는 것은 부부가 강가에 서서 발령 소식에 대해 논의하는 씬에서다.
난 죽어도 여기 안 떠나.우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온 삶이잖아.총통도 그렇게 연설하셨잖아.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고.
즉 헤트비히와 루돌프는 “그동안 꿈꿔왔던 삶”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여왔으며 그 삶을 ‘부당하게’ 뺏기지 않기 위해 더한 노력도 불사할 거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노력이란 건 물론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탈취하고 강간하는 일에 일조하거나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의 반복을 직접 설계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돌프의 ‘일’은 사람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정하게 먼 거리에 고정된 다중 시점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그려지고 있는데, 헤트비히가 일궈온 꽃밭과 온실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손만 까딱하면 네 명의 하녀들이 벌벌 떨며 궂은 일을 대신해주고 전시 중에도 케이크와 비싼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벽 뒤에서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든 나머지 가족들이 알게 뭐란 말인가.
“초콜릿 같은 거 있으면 꼭 챙겨줘”라며 남편에게 당부하는 씬을 통해 공범임을 입증한 헤트비히의 몸과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루돌프의 그것에 비해 비인간성의 일상화에 더 깊게 일조한다. 루돌프는 수용소장이고 헤트비히는 그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사람을 죽이고 처리하는 효율적 프로세스를 직접 설계하는 자고 헤트비히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 그럼으로써 당시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일반적인 독일인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돌프가 참석한 나치 장교들의 회의보다도 헤트비히의 신경질적 짜증이 극 전반에 긴장감 도는 중력을 더한다. 그는 결코 상냥하거나 일관된 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 기분이 상하면 “너 하나쯤 재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라며 하녀를 위협하는 여주인이다. 무의식적인 듯해서 더 공포스러운 무시.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고 뒤따르는 책임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쥐어진 타인의 생사여탈권. 성실한 군인이고 좋은 아버지였던 루돌프가 창녀를 사는 위선이나, 헤트비히가 남편보다 집을 선택하는 자기중심성은 그래서 놀랍지도 기이하지도 않다.
상실 없는 상실과 공포 없는 공포, 무게감 없는 무게를 전달하는 작품을 ‘보며’ 관객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는지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 벽 뒤에서 무언가 가동되는 소리. 간헐적인 총소리와 희미한 통곡과 비명 소리. 게르만 아기의 울음과 유대인 아기의 울음은 기묘하게 뒤섞이고 개들은 담장 안팎에서 하울링을 주고받는다. 헤트비히의 어머니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모든 불길한 소리를 못 견뎌 말없이 떠나버릴 정도지만, 내부인들은 백색소음 정도로 치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푹푹 박혀오는 풀꽃의 선명한 빛깔, 새빨갛고 예쁜 수영복과 희디흰 게르만족 피부의 조화, 맑은 강물 앞 단란한 가족이 노니는 풍경이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인가.
눈과 귀의 기이한 간격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며, 눈을 극적으로 속이고, 클로즈업 없는 원경으로 눈이 해석하는 정보값을 어긋나게 하길 의도하던 영화는 돌연 마지막 5분간 오류 없이 명확한 장면을 송출하니, 바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관을 열심히 쓸고 닦는 현대의 풍경이다. 80년의 간극을 뛰어넘게 해줄 통로는 암전 속 빛이 새어 들어오는 좁은 바늘구멍이다. 이는 원시적인 카메라를 즉각 은유한다.
루돌프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돌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찍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블랙박스가 ‘보여준’ 미래를 감지한다. 이 응시는 영적이고 마술적이다. 루돌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루돌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그날 밤 자기 공적을 치하하는 파티에서마저 ‘이 사람들을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전화 너머 헤트비히에게 즐거이 말한다. 즉 그는 ”당신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필사의 합리화로도 보호받지 못할 괴물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구타로 앙갚음당하고 결국 교수형을 당할 자신의 운명을, 악인 하나를 징벌하는 것으론 복구되지 않을 수십만의 생명을, 시원하게 토해내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죄악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짊어진다.
드문 고요 속 루돌프는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아우슈비츠의 집에서 온 방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며 침실로 올라갈 때와 같은 속도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의 우릴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그때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보라'.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보여줍니다.조나단 글레이저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과,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이 아닌 곳에서 담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고 말할 사람들.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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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시리즈 순위
분노의 질주 시리즈 순위
#10 : 외전 홉스 & 쇼 (Fast & Furious Presents: Hobbs & Shaw, 2019)
<데드풀2>의 데이빗 레이치는 드웨인 존슨과 제이슨 스타뎀의 출연작에 대한 메타유머를 활용하고, <007 시리즈>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다. 런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모아로 공간적 배경을 옮겨 다니고, 007의 국제 범죄조직'스펙터'에서 영감을 받은 '에테온'을 등장시킨다. 또 런던 리든홀 활강 장면은 <미션 임파서블>의 부르즈 할리파 장면을 오마주했다.
<홉스 & 쇼>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라기보다는 '버디 액션 코미디'에 가깝다. 또 이야기가 허술한 것은 이해한다 손치더라도 액션조차 히어로영화스럽다. 또 '해티 쇼(바네사 커비)'는 등장할 때마다 빛나지만, 블랙 슈퍼맨 '브릭스턴(이드리스 엘바)'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진다.
#9: 2편 패스트 & 퓨리어스 2 (2 Fast 2 Furious, 2003)
전편의 답습, 마이애미로 이사 간 브라이언은 새로운 파트너 로만 피어스(타이리스 깁슨)와 콤비를 이루지만, 빈 디젤의 공백을 메우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테즈(루다크리스)가 코믹하게 등장한다.
1시간 반 남짓한 2편은 드라마를 듬뿍 덜어낸 대신 존 싱글턴은 '스트리트 레이싱'에만 집중한다. 문제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 속도감은 있지만 우스꽝스럽다. 아무리 저예산 B급 액션 영화라고 해도 동선조차 조잡하다. 이상 2편은 1편과의 연계성도 거의 없고, 엉성한 캐릭터와 부실한 볼거리, 뼈대만 남은 앙상한 스토리라인이 아킬레스건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로만과 테즈 콤비를 득템했다.
#8 : 3편 도쿄 드리프트 (Fast And The Furious: Tokyo Drift, 2006)
그야말로 프랜차이즈의 정체성인 ‘스트리트 레이싱’에만 올인한 3편이다. 특히 ‘드리프트’의 속도감과 긴박감을 살리기 위해 현역 드라이버 중심으로 구성된 스턴트 스태프들이 온몸을 불사른다. 이쯤 되면 <트리플 X>와 <분노의 질주>를 제작한 닐 오비츠의 성향이 나온다. 플롯, 캐릭터, 드라마, 리듬은 약하지만, 속도감과 볼거리만큼은 끝내준다. 설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설득력을 갖춘 캐릭터가 없다. 이것이 패착이다.
새로 합류한 저스틴 린 감독은 시리즈의 전통인 '길거리 경주'와 '자동차 문화', '범죄' 등 향후 프랜차이즈를 구성할 방향성을 대폭 수정한다. 바로 '다민족 캐스트'를 강조하고, '해외 로케이션'을 적극 반영할 준비를 이미 3편에서 끝마쳤다. 향후 블록버스터로 나아갈 기초공사를 마친 셈이다.
#7 : 8편 더 익스트림 (The Fate Of The Furious, 2017)
프랜차이즈를 책임지는 작가 크리스 모건과 범죄영화에 특화된 F. 게리 그레이는 사망한 폴 워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분노의 질주>만의 포뮬러(공식)을 깨버린다. 리더 돔 토레토(빈 디젤)이 자신의 패밀리를 배신하는 영리한 조치를 취한다. 그 과정에서 한을 살해한 데커드 쇼(제이슨 스테이섬)에게 별다른 속죄 없이 면죄부를 부여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특유의 가족드라마가 깨졌지만, 홉스(드웨인 존슨)와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워커의 부재로 말미암아 실종될 버디 코미디를 되살렸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캐릭터쇼와 볼거리가 다양하고 액션 규모를 키운 반면에 메인 빌런인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5편부터 그 조짐이 보였지만, 액션 스타일이 007시리즈를 자꾸만 연상시킨다. 레티(미셸 로드리게즈 분)가 차량을 비스듬히 기울여 운전하는 장면은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를, 설원의 카 액션은 <007 다이 어나더 데이>를, 최종 병기로 잠수함을 활용한 클라이맥스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007 언리미티드>을 떠올리게 한다.
#6 :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F9: The Fast Saga, 2021)
유니버설은 ‘더 패스트 사가(The Fast Saga)’로 명명된 지난 시리즈를 정리하고 후속작(F10, F11)에 쓰일 복선을 미리 깔아놓는다. 그래서 9편은 드라마 비중이 상당하다. 또, 5편에서 '드웨인 존슨'을, 6편에서 '제이슨 스타뎀' 같은 유명 배우를 추가해서 얻은 효과를 존 시나를 통해 노리고 있다. 그래서 토레토의 가정사부터 3편<도쿄 드리프트>의 등장인물 백스토리까지 캐릭터 개발에 공을 들인다. 동창회처럼 시리즈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결한다.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터무니없는 액션과 캐릭터 쇼로 끊임없이 팬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존 시나를 추가하는 바람에 페이스가 느려졌다. 가족 드라마를 그리기 위해 긴박감과 박진감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 얼개가 탄탄해진 것도 아니다. 이 시리즈는 불가능한 것이 없도록 스스로 세계관을 바꿔왔다. 이제 이 전략이 한계 지점에 다다른 것 같아 불안하다.
#5 : 4편 더 오리지널 (Fast & Furious, 2009)
4편은 사실상 리부트에 가까운 '기능적인 영화'다. 저스틴 린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 모건은 폴 워커와 빈 디젤을 다시 등장시키며 1편을 리뉴얼한다. 초기 영화(1·2·3)의 스트리트 레이싱 드라마와 후기 영화(5·6·7)의 액션 블록버스터 사이 어딘가에 끼어있다. 이런 불균질한 영화의 톤이 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차량 투척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액션이 별 특색이 없다.
1편의 전개와 구도, 캐릭터를 동어반복한지라 작품 자체의 개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특히 레티(미셀 로드니게스)에 대한 부주의한 대접은 <분노의 질주> 특유의 가족 드라마를 방해한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부터 저스틴 린은 캐릭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유일한 장점은 ‘한(성강)’을 도미닉의 친구로 등장시켜 외전에 가깝던 3편을 시리즈의 세계관에 편입시켰다는 정도다.
#4 : 1편 분노의 질주 (The Fast And The Furious, 2001)
이 저예산 범죄영화가 이후에 21세기 초 가장 중요한 영화 프랜차이즈 중 하나가 될 것을 알았을까?1편의 줄거리와 캐릭터, 설정은 <폭풍 속으로 (1991)>을 참조했다.
1편의 진정한 가치는 ‘길거리 레이싱’이라는 프랜차이즈의 정체성을 세운 점이다. 먼 훗날, 탱크와 핵잠수함, 헬기, 우주선, 슈퍼 카들을 고려하면 스케일은 소박하고 싱겁다. 하지만, 속도감 있는 아날로그 액션만큼은 프랜차이즈에서 가장 순수하고, 날 것 그대로의 쾌감이 살아있다.
#3 : 6편 더 맥시멈 (Fast And Furious 6, 2013)
레티 오티즈(미셸 로드리게스)를 복귀시키기 위해 기억상실증으로 엉성하게 처리한 것처럼 이 영화는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다. 이제 질주는 뒷전이고, 고급차를 마구마구 ‘파괴’하는 분노에 집중한다. 게다가 이번 빌런도 '도플갱어'다. '팀 돔과 팀 오웬의 단체 대결'이 줄거리 전부이고, 슈퍼 카(심지어 탱크, 수송기까지도)들을 즐비하게 등장시키고 그것을 아낌없이 때려 부순다.
지젤(갯 가돗), 엘레나 네베즈(엘사 파타키)이 퇴장하거나 어정쩡해졌지만, 이 재밌는 난장판을 통해 도미닉 일당은 동료애를 넘어서서 '가족애'로 승화되고, 쿠키 영상으로 3편(도쿄 드리프트)와의 연결 고리도 확보한다. 007시리즈를 본받아 프랜차이즈는 '저예산 레이싱 영화'에서 '첩보 블록버스터'로 체급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2 : 7편 더 세븐 (Furious 7, 2015)
7편은 촬영 중 사망한 폴 워커에 대한 진심 어린 송사와 더 많은 캐릭터와 물량의 인해전술로 밀어부친다. 아제르바이잔 오프닝부터 관객의 시선을 뗄 수 없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액션 시퀀스를 쏟아 붓는다. 제이슨 스타뎀, 토니 쟈, 커트 러셀, 론다 라우지 같은 액션배우 올스타를 동원하고, 관객들이 지루할만하면 중력의 법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물량공세가 시청각을 장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질주 7>은 뒷골목 레이싱에서 벗어나 판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슈퍼 카들의 무한질주'라는 초심을 놓지 않는다.
특수한 프로그램 '신의 눈'을 가진 테러리스트 '제케이드(자이먼 혼수)'를 찾기 위해 '데커드 쇼(제이슨 스타뎀)'을 만났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쇼와의 대결로 치닫는다. 7편부터 시리즈의 스토리가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별 장면의 뛰어난 완성도에 비해 전체적인 맥락과 개연성은 희생되었지만, 도미닉 패밀리의 캐릭터 드라마만큼은 확실히 챙겼다는 점에서 제임스 완으로써도 쉽지 않은 임무를 훌륭히 처리했다.
#1 : 5편 언리미티드 (Fast Five, 2011)
5편은 프랜차이즈의 '포뮬라(공식)'을 확립된 작품이다. 첫째, <분노의 질주>는 뒷골목 레이싱에서 벗어나 판을 크게 키운다. 둘째, 홉스(드웨인 존슨)가 합류하면서 도미닉 일당의 윤곽이 확립된다. 셋째, 적과 맞써기 위해 '가족' 같은 일당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질주한다가 줄거리의 전부다.
넷째, 레이스 자체는 볼거리중 하나로 축소되고, 대신에 여타 장르(5편은 하이스트 장르, 6편은 첩보물, 외전은 버디물, 9편은 SF물)를 도입한다. 그밖에 5편의 금고 장면 이후 탱크, 비행기, 드론, 헬기, 잠수함, 우주선을 추가되면서 테스토스테론 연료를 새로이 주입한다. 이로써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현대 액션의 총아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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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블로그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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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리에 박히는 강렬한 영화
지난 5월 12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5월 25일 개봉 예정인 <더 노비스> 초청 시사회에 참석했다.
처음 가보는 광화문 씨네큐브라 굉장히 기대했는데 영화관 시설 자체는 좌석 사이에 거리도 넓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만 영화관 내 취식이 안돼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못 본점은 다소 아쉬웠다..ㅠㅠ
아무래도 관리 인원이 적다보니 극장 내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취지가 아닐까 싶다.
본격적으로 <더 노비스> 관람 후기 및 개인적인 리뷰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스포일러는 최대한 없이 적으려고 하는데, 혹시 영화 정보에 민감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25일 개봉 이후 다시 이 글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다.
? 영화 <The Novice>
1. 강렬한 심리 스릴러물
▶ 영화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주인공의 '1등'을 향한 광기어린 집착에 관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살인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고 사건도 형사도 없지만 <더 노비스>는 스스로의 영혼을 살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심리적 스릴러물이다.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을 좀 먹는 열등감과 오직 1등을 향한 집착으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내내 범죄 수사물보다 더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영화 초반에는 주인공의 심리와 모습으로 하여금 관객에게 '와 정말 힘들겠다.' '엄청 훈련이 힘들겠네' 등의 공감을 사게하는 듯 하지만, 종장에는 관객을 철저한 관찰자로 만든다. 관객은 불안감에 좀먹힌 주인공의 모습을 러닝타임 내내 보면서 처음에는 안쓰럽다가도 종장에는 '저렇게 까지 해야하나?' '끔찍하다'와 같은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주인공이 불안해하는 이유, 광기어린 집착에 대한 타당성 등을 정확하게 부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관객은 그저 1등을 향한 광기어린 집착에 대한 묘한 불쾌감과 그런 모습에 끔찍함을 느끼게 된다. 굉장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매력적인 플롯 구성이다.
▶ 이런 주인공의 집착과 불안감을 잘 연출한 영화를 생각하면 역시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 스완>이 떠오른다. 애시당초 이번 영화 <더 노비스>의 감독 로던 헤더웨이가 이번 작품을 두고 “조정을 소재로 한, <블랙 스완>의 느낌이 드리워진 <위플래쉬>” 라고 말을 했을 만큼 <블랙 스완>의 분위기와 정말 흡사하다. <블랙 스완>역시 발레를 하는 주인공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질투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카메라 무빙과 혼란스러운 컷 전환을 통해 잘 연출한 작품이다.
2. <위플래쉬>가 떠오르는 색다른 음악 연출
▶ 영화 <더 노비스>는 음악적 연출에 있어 상당히 진심이다. 영화 내내 대사 없이 음악과 카메라 연출로 주인공의 긴장감, 불암감을 표현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엄청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조정'이라는 물 위에서 하는 스포츠를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물 위에서의 <위플래쉬>라고 생각이 들만큼 음악과 연출적인 면에서 정말 많은 신경을 썼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 사용이 다소 클리셰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앞서도 설명했 듯이 범인이 나오지도 귀신과 같은 무서운 존재가 나오지도 않는데 오직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데 있어 적절한 음악 사용을 통해 컷을 전환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 반가워요 '이사벨 펄먼' 배우님 !!
▶ 마지막으로 이사벨 펄먼 배우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09년에 개봉한<오펀 : 천사의 비밀>을 제외하고는 배우님이 나오는 다른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오펀 : 천사의 비밀>에서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인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으신 배우이다. 이번 <더 노비스>에서는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당시에는 밖으로 배출하는 광기어린 연기를 보여주셨다면 지금은 자기 자신을 좀먹는 소름끼치는 내적인 연기를 보여주신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더욱 다양한 작품에서 얼굴을 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이번 영화에서 너무나 좋은 연기를 보여주셨다. 사실상 <더 노비스>는 이사벨 펄먼 배우님 1인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 한줄 평
" 뇌리에 강렬하게 박히는 강렬한 스포츠 심리 스릴러물, 그런데 거기에 <위플래쉬>같은 음악적 긴장감을 더한. "
※ 아래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요! 영화 보고 나서, 다시 돌아와서 의견을 적어주세요! ※
? 개인적으로 궁금해요!
▶ 곧 영화를 보시게 된다면 이번 영화를 감상하시고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영화의 결말이 일정 부분 열린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과연 다른 분들은 어떤 결말로 이 영화를 이해하셨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 부, 주인공은 비와 천둥이 치는 악천우 속에서도 홀로 경주를 마치고는, 기록을 적는 게시판에 가서 기록을 적고 기록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지워버린다. 이후 숙소를 나오며 영화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간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의 기록을 관객은 알 수 없다는 점과 주인공이 이름을 지우고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집착을 벗어버렸다기 보다는 결국 1등이 되지 못해 포기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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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rame Stamp
미국 대중 매체 버라이어티는 샤를리즈 테론, 키키 레인이 주연을 맡은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감독의 넷플릭스 액션 영화 <올드 가드>(The Old Guard, 2020)가 남녀 균형 고용을 보여준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선정되었음을 보도했습니다
ⓒ Daum 영화
ReFrame과 IMDB Pro는 오늘 (17일) 2020년에 가장 인기 있었던 각본 영화 100편 중 29편이 남녀 균형 일자리를 보여주는 프로젝트의 징표인 ReFrame Stamp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26편의 영화가 선정되었던 2019년에 비해 12% 상승한 비율입니다.
ReFrame Stamp는 미디어 산업에서 여성 중심 콘텐츠로의 진전을 보여주는 기업과 미디어에 수여되는 상입니다. Stamp 인증은 ReFrame 엠버서더, 프로듀서 및 업계 전문가로부터 정의된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양성평등을 향한 진전을 보여주고 핵심적인 역할에서 여성을 더 많이 고용하는 영화 및 TV 프로그램에 수여됩니다.
올해 수상작으로는 <올드 가드>, <원더우먼 1984>, <프라미싱 영 우먼>, <힐빌리의 노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온 더 락스>,<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뮬란>,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엠마> 등이 있습니다(번역 제목). 또한 수상작 중에는 여성 감독 작품이 17작품(2019년 대비 12편 이상 증가), 유색 여성 감독 작품이 6작품(4편 증가), 유색 여성 각본 작품 4작품(1편 증가), 여성 영화 촬영감독 작품 7작품(2019년 2편 증가)을 차지했습니다.
ReFrame은 수상작 29편 중 샤를리즈 테론과 키키 레인이 주연한 Netflix 액션 영화 <올드 가드>를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꼽았는데요, 감독이자 엠버서더인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는 수상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성공은 여성들이 더 큰 곳에서 활약할 기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아름답고도 강력한 대항 수단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여성들은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빛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Daum 영화
아래는 IMDb Pro의 집계 순으로 정렬된 29편의 수상작들입니다.
1. 올드 가드 / Old Guard / 미국 / 감독 : Gina Prince-Bythewood
2. 원더우먼 1984 / Wonder Woman 1984 / 미국 / 감독 : Patty Jenkins
3.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 / Birds of Prey: And the Fantabulous Emancipation of One Harley Quinn / USA /감독 : Cathy Yan,
4. 뮬란 / Mulan / USA / 감독 : Niki Caro
5. 홀리 데이트 / Holidate / USA / 감독 : John Whitesell
6. 레베카 / Rebecca / USA / 감독 : Ben Wheatley
7. 크리스마스에는 행복이 / Happiest Season / USA / 감독 : Clea DuVall
8.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 USA / 감독 : Emerald Fennell
9. 트롤: 월드 투어/ Trolls World Tour / USA / 감독 : Michael Fimognari
10. 애프터: 그 후/ After We Collided / USA / 감독 : Roger Kumble
11. 엠마 / Emma / UK / 감독 : Autumn de Wilde
12.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 / USA / 감독 : Ron Howard
13. 큐티스 / Mignonnes (Cuties) / France / 감독 : Maïmouna Doucouré
14. 앤터벨룸/ Antebellum / USA / 감독 : Gerard Bush, Christopher Renz
15.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 Ma Rainey’s Black Bottom / USA / 감독 : George C. Wolfe
16. 갓마더드 / Godmothered / 감독 : Sharon Maguire
17. 마지막 게임 / The Last Thing He Wanted / 감독 : Dee Rees
18. 유물의 저주 / Relic / 감독 : Natalie Erika James
19. 오버 더 문 / Over The Moon / 감독 : Glen Keane
20. 그 남자의 집 / His House / 감독 : Remi Weekes
21. 데스페라도스 / Desperados / 감독 : LP
22. 사라진 소녀들 / Lost Girls / 감독 : Liz Garbus
23. 비트를 느껴봐 / Feel The Beat / 감독 : Elissa Down
24. 크리스마스에 날아갑니다 / Operation Christmas Drop / 감독 : Martin Wood
25. 호스 걸 / Horse Girl / 감독 : Jeff Baena
26. 온 더 락 / On the Rocks / 감독 : Sofia Coppola
27. 위험한 거짓말들 / Dangerous Lies / 감독 : Michael M. Scott
28. 반쪽의 이야기 / The Half of It / 감독 : Alice Wu
29.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 All the Bright Places / 감독 : Brett Ha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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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 리뷰
다비드 뤔 감독의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는 할리우드에서 그려내는 신세대 뱀파이어 -인간 흡혈을 거부하거나, 인간 사회를 동경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와 달리 고딕풍 유럽 전설의 냄새를 잊지 않은 작품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라는 별칭까지 활용하며 지극히 전통적인지라 현대에 이르러선 오히려 잊히고 만 뱀파이어의 전승을 구현한다. 마늘을 기피하거나,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고 관 속에서 잠들며, 햇볕을 피해야 한다던가, 누군가의 장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은 뱀파이어에게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떠도는 자'의 운명을 삭제하고 범접 불가능한 초월자의 모습 대신 병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무게를 반감시켰다. 이에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가벼운 코미디로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작품처럼 인간 존재/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 위에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폰 쾨즈뇜 백작(토비아스 모레티)은 자신의 부인인 엘사(자넷 하인)와의 삶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다. 백작부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끊임없이 쾨즈뇜 백작에게 자신의 외모를 묘사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한 두 마디조차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햇볕에 스스로를 내맡겨 자살하지 않은 까닭은 그저 오래전 환생을 약속한 연인 나딜라 때문인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는 프로이트 교수(칼 피셔)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교수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여럿이지만, 그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화가 빅토르(도미닉 올라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환자의 꿈을 들으며 화폭에 옮긴다. 그런데 늑대인간과 관계를 맺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물의 모델은 동일한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 루시(코넬리아 이반칸). 빅토르는 눈을 감고도 루시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지만, 정작 루시는 빅토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못마땅해한다. 빅토르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즐겨 입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구불거리는 금발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문학은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성립한다.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이 그 간결한 예시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상정하며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없는 극단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는 죽은 자의 귀환을 이끌며 혼란을 발생시키는 두려운 자로 인간과 대비되었고,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원작은 앤 라이스의 소설이지만, 이 글에선 영화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에서 뱀파이어 루이와 레스타는 뱀파이어로의 삶을 선택하였음에도 끝없는 허무와 혼란에 방황하고, 클라우디아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착화된 시간 속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이렇듯 뱀파이어 세계와 인간 세계의 뚜렷한 대비는 독자/시청자인 우리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그 궤가 다소 다르다.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레이어는 분명히 겹쳐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이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은 뱀파이어/인간 세계의 대비가 아니라,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이란 사회를 꾸리는 종족이라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무엇이지 않던가.
이러한 전략을 위해 뱀파이어는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설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 광신도에게 사망했다는 연인 나딜라의 이야기나 성에 사는 귀족으로 이미지화된 쾨즈뇜 백작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며, 한 마리의 야생늑대처럼 빠르고 강하며 흡혈을 망설이지 않는 백작부인의 모습은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능력은 위계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물리법칙을 어기는 종족임에도 백작은 심리적으로 지쳐 상담을 필요로 하거나, 과거에 잃은 사랑을 기다렸으며, 백작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 인간 화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뱀파이어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뱀파이어의 흡혈 장면에서 선악을 논하지 않고, 범법을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뱀파이어의 고뇌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에 '뱀파이어'가 삽입되어 있고, 사건의 시작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폰 쾨즈뇜 백작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대상화된 타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주목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루시-혹은 루시의 욕망-다.
위에서 말했듯 루시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 긍정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은연중에 변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이중적 행태에 분노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와 폰 쾨즈뇜 백작이 만난다. 프로이트 교수의 집에 놓은 루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작은 그가 자신의 옛사랑 나딜라와 놀라우리만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빅토르가 캔버스 위에 상상 속 루시를 구현했다면, 폰 쾨즈뇜 백작은 기억 속 나딜라를 루시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모두 루시 앞에서 사랑을 논하지만, 루시라는 인물이 지닌 본연의 욕망(존재하는 그대로 사랑받고자 하는 소망)은 거듭 소외된다.
백작부인의 욕망 역시 영화 내에서 소외당하는 듯 보이나, 이는 백작부인 개인으로서의 소외라기보단 뱀파이어 종족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 보아야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백작부인은 '여성 뱀파이어'로서 영화 내에서 전통적인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폰 쾨즈뇜 백작보다 더 야성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을 전복하는, 완전한 괴물로서 기능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백작에게 요구하고, 루시와는 달리 치장에 매달림으로써 언뜻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존재로 나타난다. 즉 백작부인은 한 명의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문화 속 '여성 뱀파이어' 그 자체의 현현이기에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종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욕구(박일아)'를 끊임없이 소망한다. 백작부인은 그러하므로, 최은주(2010)의 표현과 같이 "결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개인이었고, 욕망을 이뤄내지 못한 육체는 끝내 소멸한다.
반면 루시는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굳이 '기나긴 여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루시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고달팠기 때문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물린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이트 교수의 침대에 놓인다. 그곳에서 흡혈 충동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는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자기 존재에 대해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다. 낯섦에 방황하지 않고 루시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긍정한다.
루시가 느낀, 기존의 정체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루이가 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루이가 허무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성 선택을 하였다면, 루시는 뱀파이어로서 더욱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뱀파이어 되기'와 '뱀파이어로 살기'를 선택한 셈이므로. 특히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피를 수혈하면 돌이킬 수 있다는 옵션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루시의 '뱀파이어 되기'는 일종의 선택지에 불과할 뿐 운명론적 관점에서 벌어지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시가 뱀파이어로 변했던 첫 번째 순간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순간, 루시는 쾨즈뇜 백작에게 선언한다. 뱀파이어로 살고 싶으며, 나딜라도 루실라도 아닌 루시로 살 것이라고.
이미지 출처: IMDb
많은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를 손쉽게 저버리고, 욕망을 발현하곤 한다. 그런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사회의 거부, 개인의 불순응, 종족의 본능 등의 사유로 '떠도는 존재'라기보다는 일부분 '정착이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루시의 욕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강정구, 김종회 (2011)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현실에 부재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창작물을 자아내는 일은 곧 "타자를 경유하여 인간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전달하고 싶었던 인간/인간사회의 단면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시가 힘을 얻었을 때, 공포로 가득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는 너(이혜정, 2020.)"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
참고문헌
강정구, 김종회 (2011). 뱀파이어라는 타자에 대한 상상. 비평문학(40), 7-30
박일아. (2013)."내면화를 통해 장르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뱀파이어 영화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9.1 pp.32-56
윤은애 (2010). 라캉(Jacques Lacan)과 여성의 히스테리적 글쓰기. 우리문학연구, 29, 327-363.
이혜정 (2020). 내러티브 윤리학과 여성주의 주체 – 내러티브 윤리학은 여성주의 주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 철학연구, 127-148.
최은주 (2010). 「성별화된 몸, 그 의미와 잉여의 두께-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영미문화 제10권 3호 한국영미문화학회 27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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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는 눈, 믿음에는 믿음
한 마디로 역겹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역겨움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오해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내의 장면이 구역질 난다던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역겨웠다. 이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것이,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런 감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영화는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다. 어떤 믿음을 강요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다고. 그런 사람에겐 믿고 있는 세상이 전부일 것이라고. 그래서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몸매에 대한 강박 때문에 거식증을 앓는 엄마를 따라 어려서부터 음식에 거부감을 느꼈던 엘사, 학부모회의 수장인 부모님의 간섭에 지친 라그나, 이혼하고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를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벤, 모든 가족이 해외에 나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프레드까지. 대체로 가족과 얽혀있는 상처들은 어린 나이에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스 노백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다. 불안정한 심리를 파고들어 아이들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이다. 의지할 곳 없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믿음직한 어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포착한 후, 섬세하고 치밀하게 상처를 헤집는다. 그렇게 아이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고, 차차 정신을 지배해나간다. 바로 이 모든 과정이 날 역겹게 만들었다.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은 하지만 저항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일명 '반골 기질'이라 불리듯, 모든 강요받는 것들에 대해 극렬한 거부를 하긴 하지만, 이것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스템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 자신만의 태도로 행동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 아이 곁에 모든 걸 포용해 주는 어른은 거의 없다.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거나, 부드러운 말투를 쓰지만 결국 자신의 말만 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때론 아이에게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있지만, 너무 일찍 철든 아이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 시점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대한 관심과 들어주는 태도이다. 무언가를 말하고 조언하려는 것은 어른의 방식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앞에서는 그저 들어주는 것만이 전부이다. 그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니까.
노백 선생 같은 자에게는 청중으로부터 고립된 아이들이야말로 딱 좋은 먹잇감이다. 먼저 이야기를 들으며 약점을 찾아내면 소극적이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신념인 식사법을 권유한다. 가장 먼저 그 식사법으로 효과를 본 프레드를 바탕으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설파한다. 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행동이 좌우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헬렌'은 그저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룹에 끼고 싶어서 수업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식사법을 공유하는 그룹에 속해 있으면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친구'라는 존재가 우선되는 것이 아닌, '식사법'이라는 요법이 우선되는 것이다. 그것이 노백 선생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말라간다.
왜 하필 식이요법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엘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지식으로 치환한다면 정신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세상에 놓여져 있는 지식을 거부한다. 이것을 삼키면 그들에게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인 어른에게. 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던 노백은 그것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반해 영화에서는 어른이 식사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학교 교장인 도싯은 노백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고 과자를 먹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게다가 학부모들은 식사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심지어는 학부모 회의를 할 때마저도 무언가를 먹고 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생각을 쳐낼 힘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습득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릴 의지가 있다. 그게 과하면 치우친 어른이 되지만, 어쨌거나 그런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주어진다.
지식이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깊은 단어다. 사람에게는 지식이 있어야 그것을 응용할 지혜가 생기고, 그런 지혜가 모여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근간이 되는 지식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노백의 방식은 아이들이 다른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존하도록 하는 세뇌에 가깝다. 쉬운 예시를 들어볼까? 당장 보이스피싱만 해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타인이 수상한 낌새를 채면 안 되니까.
결국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노백 선생과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방에 걸어두었던 액자 속 풍경에 들어간 미스 노백과 아이들. 명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은 걸로 보아선, 그들에게 있어 유토피아와 걸맞은 장소일 듯하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생할 수 있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닐까. 노백 선생의 이름은 'no back'이란 발음과 똑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함께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 장면에서 묘하게 노백의 모습 역시 아이들과 같다고 느꼈다. 마땅히 기댈 변변찮은 어른이 없어, 고통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노백은 그들을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겠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미스 노백이 설파하고자 했던 신념도, 그것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진보적이고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정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결과다. 미스 노백의 신념에 의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는지, 치우친 교육이 남긴 흔적은 무엇인지.
아이를 잃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모인다. 스키장에 가느라 노백을 만나지 못했던 헬렌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학생이다. 헬렌에게 노백을 따른 이유를 묻지만, 이미 세뇌된 헬렌 역시 노백의 말을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이다. 유일하게 어른들 중에서 식사를 거부했던 엘사의 엄마는 '우리도 먹지 않으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헬렌은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면 위험할 때도 있다. 지식의 섭취는 오로지 지식에 의거했을 경우에만 유용하다. 빈 속에는 식이섬유와 채소부터 먹고 단백질, 탄수화물 순서로 먹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이다. 합리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거부할 때는 그에 반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거부해야만 마땅한 이유 말이다. 현대 사회에는 아직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는 아이들을 꼬드겨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 자들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다.
아이를 믿고, 그 아이의 마음과 생각에 관심을 갖고, 귀를 열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믿음만이,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믿음으로부터 구할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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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미국/200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멜 깁슨이 배우라기보다 감독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극장개봉 전에 이미 유명해진 영화다. 반유대주의 영화라고 하여, 헐리웃을 점령한 유대인들로부터 미국의 엘리트 계층, 자본가 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은근한 혹은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그 유명세는 더 한층 상승되었다. gory 하다, 따라서 horror 장르로 분류해야 한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수위가 높은 잔인한 고문장면 때문에 약한 심장을 가졌던 관객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제 멜 깁슨은 유대인들의 왕국인 헐리웃의 영화에 캐스팅되기는 글렀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아마 그 예측은 옳을 것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동고동락했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당시 유대 종교 엘리트 계층인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후 예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기까지, 즉 구약의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다룬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기독교 구약과 신약성경의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할 수가 없다. 그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죄지은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외아들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 인간들이 당해야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도록 '상관'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가 당할 모든 저주를 혼자 감당한 뒤 인간으로 죽었다. 그리고 역시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의 사역을 완전히 성취했다.
멜 깁슨이 가톨릭(구교) 신자여서 그랬겠지만 영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경외심이 배어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를 초월한 복음의 정수를 전달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는 고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그 언어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종파로 나뉘기 전,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섞이기 전의 예수 수난사건과 그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멜 깁슨은 영화를 전 세계에 배급하면서 더빙이 가능한 원고가 아닌 자막용 원고만을 만들었다. 영화를 더빙하지 못하도록 M/E (Music and Effect) 트랙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이쯤되면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정관사 the와 함께 대문자로 시작하는 Passion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뜻함을 알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신(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그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함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들과 교통하며 신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아름다운 국가를 세워 그 주변의 이방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모두 그 아름다운 국가를 따라 살기를, 즉 모든 인류가 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의 계획안에서,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약속을 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내리라. 그가 너희들을 구원하리라... 그리고 내 뜻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태어난 성육신(인간의 몸으로 온 신)이다. 예수는 구약성경 곳곳에 예언으로 주어진 말씀대로 메시아로서 감당해야할 모든 것을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성취한다. 그는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했다. 예언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은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순종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사야서 53장 5절)는 메시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가 인류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영화에 그려진 인간들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잘 아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고통으로 지켜본다. 그 곁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을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늘 함께 있다. 그들은 아무 힘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지켜보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며 전도하였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물질이 탐이나 돈에 스승을 판다. 반역자다. 그리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흥분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는 비겁했다.
당시 구약을 믿고 암송하며 가르쳤던 유대교 종교 엘리트이며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그의 기적의 능력을 질투했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예수를 두려워했다. 아니, 예수 때문에 그들의 인기와 권위가 실추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거짓증거를 날조하여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였다. 야비한 살인자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의 군인 빌라도.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나면 로마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말 것을 두려워한 비겁한 출세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무력함, 비겁함, 야비함, 두려움 등의 어두움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에게서 늘 찾아지는 것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지 않는 한.
인간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 즉 세상을 사랑하고, 속이는 자 사탄은 세상의 재미로 인간을 미혹하며 죄를 짓게 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나 신은 위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나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인간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리고 온갖 사탄의 책략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죽음, 즉 사탄을 이김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이며 예수의 보혈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죄의 종, 즉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이 영화의 요지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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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퍼피 구조대 더 무비> 메인 예고편
퍼피 히어로가 세상을 구한다!
시민들을 속여 어드벤처 시티의 시장이 된 날씨 악당 ‘험딩어’는
취임식 당일, 구름을 조종해 천둥번개를 만드는 등 시민들을 위협하며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가운데, 용감한 시민 퍼피 ‘리버티’로부터 어드벤처 시티가 위험에 빠진 소식을 들은
퍼피 구조대는 신속하게 시티로 출동하는데…!
위기에 빠진 어드벤처 시티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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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30초 예고편
하루 동안 정기적인 보고를 하지 않으면 터지게 되는
폭탄을 가슴속에 지닌 채 기밀 정보를 알아내는 AN통신.
요원 ‘타카노(후지와라 타츠야)’와 ‘타오카(타케우치 료마)’는
대기업 CNOX와 태양광 에너지가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여기에 정체불명의 여인 ‘아야코(한효주)’와
일급 스파이인 ‘데이비드 킴(변요한)’까지 관련 정보를 노리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차세대 에너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