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8-27 15:51:25
토해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하나레이 베이>
눈부시게 슬프고 아름다운 위로와 치유의 과정에서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레이 베이 Hanalei Bay , 2018 제작
일본, 드라마, 97분
감독: 마츠나가 다이시
토해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하나레이 베이>
경찰관이 죽은 타카시의 잘려 나간 오른 다리를 사치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커다란 상어에 다리를 뜯겨 죽었습니다.” 사치는 무표정으로 아들의 유류품을 받고, 유골함을 고르고, 아들이 묵었던 호텔비까지 계산한다. 그리곤 아들을 빼앗은 하나레이 해변을 온몸으로 마주한다. <하나레이 베이>의 포스터를 봤을 때부터 그녀가 절대 쉽게 울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사치는 정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오직 바다만을 바라봤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에 꽂힌, 초점 없는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치의 공허에 상실이 자리한 걸 본 순간, 우린 그녀의 상실을 채운 게 자식을 잃은 슬픔과 그리움 때문만이 아님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사치는, 아들만 떠나보낸 게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엄마로만 살아왔다. 예상했듯, 행복만이 가득한 생활은 아니었다. 마약쟁이 남편의 폭력과 불륜은 사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끝내 망가트렸다. 사치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아(위치)가 한때 꿈꿨던 피아니스트도, 남편에게 맞는 아내도 아닌 타카시의 엄마임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했다. 아들만 있는 엄마의 역할과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도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그녀를 숨 막히게 한 건 증오하는 남편을 닮은 아들을 ‘사랑만’ 하는 일이었다. 사치는 실패했고, 시간이 갈수록 아들과 멀어졌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아들은 사치를 이기적이고 억척스러운 엄마로 여기며 밀어냈고 하와이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싸늘한 주검으로 사치 앞에 나타났다. 아들의 죽음은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흘러가던 모자 관계를 단번에 끝냈고, 진짜 혼자가 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아들을 죽인 하나레이 해변, 아니 아들이 ‘사랑한’ 하나레이 해변뿐이었다.
하나레이 해변, 그곳은 무려 10년 동안 사치의 휴가 장소로 이용됐다. 사치는 일본에서 일상을 보내며 살다, 매년 아들이 죽은 날이 가까워지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하와이로 떠났다. 해변에서 책을 읽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또 바다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가끔 바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정으로 특별한 것 없는 휴가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조리 외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치는 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섬 주민들도 여전히 멀리했다. 타카시는 분노로 휩싸인 전쟁 때문이 아닌 불가항력의 힘으로 인해 자연으로 돌아간 거라며 섬을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은 경찰관과 타카시의 손도장을 건네며 애도의 끝을 강요하는 여자의 마음은 그녀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사치의 시선은 계속 바다를 향했고, 표정 역시 아들의 잘린 다리를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수동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사치를 변화시킨 건, 두 청년이었다. 그들이 사치의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 건, 주민들과 달리 그녀의 비극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서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온 가난한 서퍼들이 타카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빨간 보드를 든 외다리 서퍼를 봤다’라는 말 한마디로 사치 옆에 아들을 존재하게 했다. 사치는 그 외다리 서퍼를 찾기 위해 해변을 헤집기 시작한다. 외다리 서퍼가 타카시라고 굳게 믿으며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치는 외다리 서퍼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다.
"난 아들을 싫어했어요. 그래도 사랑했어요.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이 섬은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요. 그럼 그것도 전 받아들여야 하나요?"
사실 사치는 10년 동안 하나레이 해변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다를 바 없는 아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릴 수 없는 아들을 자각하며 원망했다. 어느 날엔 아들과의 관계를 놓아버렸던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한없이 가여웠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억울해했다. 늘 거친 태풍에 흔들리며 사는 나와 어떤 파도도 유연하게 넘기며 살았을 서퍼(아들)를 같은 선상에 두고 곱씹기도 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딱 잘라 정의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 잃어버린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긴 혼란의 시간 동안, 사치는 빛 한 줌 허용치 않는 어둠과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는 파도 속에서 곡예를 먼저 중단해 버린 자를 끝내 가려내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자신이 진짜 애도 중인 건지 아닌 건지도 판단하지 못했다. 대신 부정과 외면을 택했다. 분노, 슬픔, 고통, 미움, 외로움, 그리움을 매 순간 침묵으로 바꾸고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으며 하나레이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는 척했다. 그렇게 고립을 자처했다. 이미 일어난 비극을 회피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닌, 떠난 아들과 화해는 물론 남겨진 나를 용서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과거에 갇힌 채 말이다. 사치에게 하나레이 해변은 처음부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독하게 가혹한 곳이었고 그녀가 품은 혼돈의 근원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감정을 토해낸 사치는 마침내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손도장을 가슴에 품으며 긴 침묵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타카시가 사랑한 해변에 서서 고백한다, 떠난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기에 가혹하다. <하나레이 베이>는 가혹함을 조금도 덜어내지 않고 ‘가혹’하다고 말하며 사치의 애도를 응원했다. 섬을 거부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고, 비극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걸 멈추길 기다렸다. 말없이 파도만 보는 모습도, 외다리 서퍼를 찾느라 혈안인 모습도, 결국 참았던 울분을 모조리 토해내는 모습도, 전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잔잔한 파도의 형태를 빌려 끝까지 함께 했다. 상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옭아맨 혼란을 마주하는 과정은 곧 치유의 발판이었으니까. 사치가 토해내지 못했던 것들은, 전부 토해내야만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눈과 마음에 가득 들어찬 하나레이 해변이 전하는 깊은 위로가 이제야 한없이 보이듯이.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햇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치와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빨간 보드를 든 타카시. 그런 아들을 보며 미소 짓는 사치까지‥.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신 작품이다. 영상미도 뛰어나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편집이 무엇보다 예술이다. 사치의 고요가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오는 장면 전환은 그녀의 몸의 언어를 만나 완벽한 한 장면, 장면을 만들어 낸다.
<하나레이 베이>는 『상실의 시대』, 『1Q84』를 집필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도쿄기담집」에 실린 단편)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이 주는 감동을 충분히 담아낸 작품이니 꼭 보길 추천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로 출발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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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점이 아니야. 사랑이야.
<노웨어 스페셜>
개봉 2021.12.29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96분
감독 우베르토 파졸리니
출연 제임스 노튼, 다니엘 라몬트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선물하는 법
창문 청소부인 존(제임스 노튼)은 시한부이다. 존은 4살짜리 자기 아들인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이 혼자 남지 않게 가정위탁을 하고자 한다. 시한부 아빠와 홀로 남겨질 아들의 이야기. 줄거리만 보고는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휴지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너네 울어. 울어야 해’ 하지 않았다. 덤덤히 죽음과 남은 빈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 속에서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오열하며 울지 않았고 제발 죽지 말라고 사정하는 장면도 없었다. 영화는 이미 수많은 울분과 체념을 반복했을 존의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고조되는 감정 없이 차분히 흘러간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이별을 준비하는 두 부자의 모습은 몇 번이나 울컥하게 했다.
마이클은 34살 아빠의 생일에 35번째 초를 건넨다. 컵에 주스를 따르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진 아빠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기도 한다. 입양이 뭔지, 죽음이 뭔지 모르지만 어쩌면 마이클은 다 직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내뱉는 짧은 말들이 다 뭉클했다. 특히 입양을 신청한 여자에게 “아줌마는 언제 죽어요?” 묻던 장면이 그랬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남은 빈자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다. 존이 어린 시절,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울었던 때를 고백했다. 그는 그게 자신의 약점이라 말했다. 자신처럼 가정위탁 가정에서 자라게 될 마이클은 죽음이 뭔지 모르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다정한 가정에서 자라길 바란다. 하지만 고백을 들은 동네 할머니는 그건 약점이 아니라 사랑이라 말한다. 엄마를 향한 사랑.
남편을 떠나보낸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얼마 전에야 남편의 칫솔을 버렸다는 할머니는 '죽었지만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어. 우리 주위에 있어.' 라고 존에게 말해줬다. 할머니의 말에 존은 마이클에게 사랑을 남겨주고 싶어졌다.
존은 나중에 마이클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기억상자'를 만든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다.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네 주변의 공기 속에서, 널 따듯하게 감싸는 햇살 속에서"
"빗물에도?"
"그래, 널 적시는 빗속에도."
이른 아침, 아빠의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앞서 걸어가던 마이클이 멈춘 곳은 입양을 신청한 한 여자의 집이었다. 아이는 떼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이것이 아빠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줄 아는 듯 아이는 아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서 난 <부러움>이라는 글을 적었다. 존의 어린 시절처럼 나 역시 따듯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났다. 나도 이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해줬다. 내가 흘린 눈물은 부러움과 나약함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었던 그때의 가족을 사랑해서였다. 특히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선물하는 법' 은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한 문구라고 생각한다. 끝과 마지막만 떠오르는 시한부 이야기에 시작과 선물이라는 역설은 가슴 아픈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게하고 행복을 떠올리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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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를 따라가면 실체가 있다
로멘스 영화를 추천할 때마다 항상 인지부조화가 걸린다. 머릿속으로는 <해피 투게더>를 외치고 입으로는 <비포 선라이즈>를 외치는 내 모습(물론 <비포 선라이즈> 역시 훌륭한 영화다.). 홍콩영화와 왕가위의 영향력이 개인적으로 상당하고, 그중에서도 <해피 투게더>를 정점이라고 여기는데도 말이다.
어떠한 영향력도, 자격도 없는 주제에 가식적인 의견을 내는 태도는 비단 영화뿐만이 아닐 것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패션, 남들도 좋아하겠지 같은 안일함에 일상을 녹이는 현실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해피 투게더> 속 그토록 좋아하는 양조위와 장국영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은 사랑하기 위해 홍콩에서의 삶을 접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간다. 용기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하고,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불만은 쌓여간다. 함께 가기로 한 이과수 폭포는 점점 램프 속 삽화처럼 철 지난 꿈으로 남고, 오직 집착만이 불쾌하게 피부에 닿다가 이내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하지만 함께하지 못하니 사무치게 그립다. 함께 있으면 미칠 듯이 불안한 걸 알면서도.
결말에서 두 인물의 마지막이 갈린다. 장국영은 끝내 여권을 찾지 못해 아르헨티나에 남으며 원망과 후회가 뒤섞인 눈물을 흘리는 반면, 양조위는 혼자서 나마 이과수 폭포를 보고 아르헨티나를 떠난 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제법 멋들어진 대사로 극을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보면 양조위만 해피엔딩을 맞이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진 않다. 그는 오직 사랑만을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택한 장소를 떠났다. 장국영 역시 오직 과거 만을 소비하며 목적 없는 낯선 땅에 남을 것이다. 어찌 됐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직 함께 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람은 한치 앞의 미래도 모른다. 뜬구름처럼 무수히 스치는 생각들에도 여과가 없는데 미래는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사람은 한없이 유한하며 무능한 존재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해서 우리 삶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결말을 알았으면 그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아르헨티나에 갔을까, 어차피 헤어질 거 집착은 덜 하지 않으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우리는 무수한 삶의 작용점을 지나치면서 불필요함을 느끼기도 한다. 장국영처럼 깊은 후회로 과거만을 소비한 채 한참을 보내기도, 때로는 누구를 원망하기도 하며. 출구는 없을까. 다행히,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이러한 감정조차 오래 허용되지 않는다.우리는 결국 불안한 미래에 다시 기댈 것이다. 양조위의 모습처럼. 어쩌겠는가. 지나온 추억마저 모두 미지에서 발생한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해피투게더> 속 주인공들을 두고 어느 한 쪽을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일부이고, 그것이 어찌 됐건 삶의 다양함을 만들기 때문이지 않나. 그들은 마음껏 기대하고 실망했으며, 헤어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오로지 그들이 사랑했던 과거다. 생소한 나라의 생소한 사랑 이야기에 울림이 있는 이유는 모두 이곳을 지나간다. 그들처럼 용기 있는 자세로 착각 속에 흠뻑 빠지고 싶은 요즘이다.
“두 사람을 '음'과 '양'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 이 공간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면 제일 먼저 보일 사람이 장국영이에요. 모든 사람이 집중하고, 그렇게 주목을 받아야만 하는 배우가 장국영이죠. 양조위는 이 공간에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눈에 안 띄게 어디론가 숨을 거예요. 하지만 언젠가는 서서히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거예요." -왕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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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과 불행으로 힘겹게 엮는 멜로
불행에 불행이 연이어 엮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절한 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불행 속에서 멜로를 피어나게 만드는 과정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로기완'을 보고도 영 개운치 않은 게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기완(송중기)과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여자 이마리(최성은)가 서로에게 이끌리듯 빠져드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해진 작가의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 등장하는 캐릭터 로기완만 차용해 새로운 내용으로 각색했다.
영화는 초반부에 로기완의 생존기를 구구절절하게 보여준다. 엄마 옥희(김성령)와 함께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떤 사유로 벨기에까지 오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벨기에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그의 삶을 최대한 처절하게 그려낸다. 다소 지리멸렬한 느낌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불행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을 전달하기엔 나쁘진 않았다.
로기완과 이마리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좋지 못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인데 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됐는지 설명이나 서사의 빌드업이 생략됐다. "이끌리듯 빠져들었다"는 표현으로 넘어가기엔 이들의 감정선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차라리 극한의 상황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연대나 응원을 전하는 휴머니즘이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두 캐릭터의 멜로만큼 부족한 게 하나 더 있었으니 마리의 감정선이다. 사격 국가대표 출신인 그가 왜 아버지와 반목하게 됐고,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상처 주려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마리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큰 장벽과도 같았고, 기완과의 멜로 케미도 설익은 느낌이 강했다.
'로기완'을 연출한 김희진 감독의 연출력도 다소 애매했다.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한 점은 분명 이색적으로 느껴지긴 했으나, 과거 8~90년대 작품을 보는 듯한 촌스러움도 같이 묻어난다.
'로기완'의 두 주연배우 송중기와 최성은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성실하게 임하며 연기력을 펼친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높은 완성도는 아니다 보니 '고군분투한다', '노력한다'에 그쳤다는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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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파리' 이후 15년, 그리고 '화란'
7★/10★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한 고등학교의 운동장. 한 학생이 제 손에 주먹만 한 돌을 들고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그러고는 동급생의 머리에 그 돌을 냅다 내리꽂는다. 가격당한 학생은 쓰러진 후 소리를 지르고, 저 멀리서는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온다. 연규의 손에 들려 있던 돌은 운동장의 조그만 물웅덩이에 떨어진다. 돌에는 피가 묻어 있다. 물웅덩이의 흙탕물 사이로 붉은 색 피가 조금씩 퍼져나간다. 영화 〈화란〉의 시작이다.
〈화란〉의 오프닝은 이 영화가 출구 없는 폭력의 연쇄를 다룰 것임을 암시한다. 연규는 가난한 재혼 가정의 고등학생 아이로, 새아빠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 하얀을 괴롭히는 동급생을 응징하기 위해 돌을 손에 들었다. 연규가 하얀을 특별히 아껴서는 아니다. 연규는 엄마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며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인데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작 연규가 ‘같이 사는’ 새아빠에게 수도 없이 구타당한다는 점이다. 새아빠는 발소리, 숨소리만으로 연규를 얼어붙게 만든다.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진 폭력은 그렇게 작동한다.
하얀을 위하는 연규의 마음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것과 현실의 합의금은 별개의 문제다. 연규는 당장 300만 원을 마련해야만 한다. 엄마는 돈이 없다. 새아빠에게 말했다가는 또다시 죽을 듯 맞을 것이 뻔하다. 300만 원은 아르바이트 비용을 가불해 지급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큰 금액이다. 궁지에 몰린 연규에게 구원자가 나타난다. 연규의 사정을 알게 된 동네 조직 폭력배 중간 보스인 치건이 부하를 시켜 돈을 전달한 것이다. 연규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치건은 연규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그래서 연규를 도왔다. 그러나 치건의 호의가 마냥 선의의 발현인 것만은 아니다. 치건이 연규에게 건넨 ‘구원’은 그의 세계에 들어오라는 암묵적 초대이기도 하다. 합의금을 손쉽게 마련한 것으로 끝낼지, 아니면 치건의 초대에 응할지는 연규의 몫이다.
짐작 가능하듯, 연규는 치건의 길을 따른다. 치건은 연규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연규가 결코 갖지 못할 힘과 돈을 가졌다. 연규는 빠르게 치건의 조직에 적응하고, 그들과 ‘같이 살며’ 가족이 된다. 처음부터 글러먹은 도시, 탈출할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자란 치건과 연규는 빠르게 유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연규는 하얀을 지켜주고자 한 선한 마음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는다. 조직의 냉혹한 문법과 기존 마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연규는 기지와 수완을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연규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한 그 무엇이 그가 영화의 마지막에 하얀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도시 밖으로 나가는 밑절미가 되어준다.
치건을 연기한 송중기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화란〉 시나리오를 보고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떠올랐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이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엉켜 영속되는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질식되어가는 사람들. 그 적나라한 폭력의 현시에서 우리는 눈을 질끔 감고 고개를 돌리고만 싶다. 그러나 연규를 연기한 홍사빈 배우의 얼굴이 우리의 고개를 다시 스크린으로 돌린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비천한 희망을 담아내는 그의 연기가 주는 흡인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괴로울지라도 영화(그리고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를 응시하도록 붙잡아둔다. 나아가 그가 겪어내는 폭력의 파편을 관객의 몸과 마음에도 새겨 넣는다. 송중기 역시 기존 출연작이 잘 떠오르지 않는 묵직한 연기로 연규가 마주한 구원과 고난의 엄숙함을 증폭시킨다.
〈화란〉은 영화 말미에 아주 자그마한 숨구멍을 뚫어 놓는다. 희망이라고 말하기에는 터무니없고, 연규와 하얀이 그럴싸한 미래를 마주할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든 둘은 폐쇄적 폭력의 연쇄의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결말은 연규의 ‘선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연규가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직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치건과 오해가 생겨 갈등이 극에 달한 장면에서, 두려움에 질린 연규는 하얀을 담보로 치건과 협상을 벌인다. 즉, 연규는 ‘같이 사는 사람’인 하얀을 하나의 화폐로써 치건에게 지급한다. 연규가 적당한 선함을 가진 건 맞지만, 그가 절대적 선함의 담지자는 아니란 소리다. 사람을 화폐로 제시하는 연규의 이 비겁함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를 재현할 때 종종 발생하는 ‘약자는 완벽히 선해야 한다’는 요구를 비틀며 그의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똥파리〉 이후 15년, 〈화란〉은 사회와 폭력에 대한 영화적 재현은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를 질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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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혁의 '절찬 상영중' - 아이리시맨
[김태혁의 ‘절찬 상영중’ – 아이리시맨]
평등한 덧없음에 대하여
-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간다
총(銃)은 칼보다 평등하다. 칼을 무기로 잘 사용하려면 완력이 좋아야 하지만, 총은 방아쇠를 당길 정도의 힘만 있다면 누구나 격발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를 총으로 제압할 수 있다. 총이 개입하는 순간 육체적 우위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순식간에 기화(氣化)된다. 총싸움에서는 근육의 무게보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배짱의 무게가 중요하다. 누구나 총을 쏘려면 쏠 수 있겠지만, 무심하게 총을 갈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과 실행 사이에는 총신(銃身)의 수억 배에 달하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다. 갱스터 무비의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발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책감과 양심에 발포한다. 그들의 사격은 늘 두 번씩 이루어진다. 그 태연한 반복 동작을 보며 관객은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느끼게 된다.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을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갱스터 무비의 대가다. <아이리시맨>은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1973)> 등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름을 영화사에 아로새겼던 그의 대표적 갱스터 무비들과 같은 듯 다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전 그의 페르소나였던 로버트 드니로(프랭크 시런 역)가 조 페시(러셀 버팔리노 역)와 함께 예전처럼 극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여기에 <대부> 시리즈와 <스카페이스(Scarface, 1983)> 등 여러 갱스터 무비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연기로 관객들을 겁박했던 알 파치노(지미 호파 역)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힘을 합쳐 범죄, 우정, 배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사실은 일견 <아이리시맨>이 갱스터 무비의 성공 방정식을 재현(再現)하는 영화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리시맨>은 이러한 단편적인 해석을 배반하는 영화다. 1942년생, 한국 나이 79세로 소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니로(1943년 생), 알 파치노(1940년 생), 조 페시(1943년 생)는 동년배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풍화작용은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의 지류를 형성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금언(金言)을 비웃으면서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밤의 세계에서 군림했던 갱스터도, 늙는다. 사실은 법이 아니라 '시간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처럼 늙은 갱스터를 위한 밤거리는 없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에 저항해 보려는 걸까. <아이리시맨>은 최첨단 영화 기술 중 하나인 'de-aging'을 활용해 세 주연 배우의 얼굴 주름을 펴서, 마치 초혼(招魂)하듯, 그들의 더 젊었던 시절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그렇게 과거의 영광을 복기해 본들 밤거리를 휘젓던 갱스터의 두 다리는 속절없이 좌표를 휠체어로 옮길 수밖에 없다.
(CG로 도배된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비판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de-aging' 활용했다는 것은 영화가 당대 최첨단 기술과 친구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아이리시맨>은 갱스터에게도 봄날은 가기 마련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인생의 황혼을 지나 밤을 향해 걷고 있는 갱스터 무비의 전설들이, 밤의 고요 속에서, 누구나 '평등한 덧없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나직하게 읊조린다. 총성으로 밤의 고요를 깨는 장면들로 점철되기 일쑤인 갱스터 무비가 오히려 밤의 고요를 느끼게 해 준다는 아이러니야말로 <아이리시맨>의 핵심이 아닐까. <아이리시맨>의 엔딩 크레디트를 채우는 'The Five Satins'의 'In the Still of the Night(밤의 고요 속에서)'를 들으며 나는 침묵한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태혁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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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리틀 포레스트>
-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제작 : 한국, 드라마 │ 감독 : 임순례
출연 : 김태리(혜원), 류준열(재하), 진기주(은숙), 문소리(혜원母) 외
등급 : 전체관람가 │ 러닝타임 : 103분만인의 힐링 영화가 될 줄 알았지
리틀 포레스트.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힐링 영화로 자리 잡게 되리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소하고 슴슴한 맛의 이 영화를, 그래서 나도 무려 다섯 번이나 보았다. 언제 어느 부분에서 틀어도, 또는 배경으로 쭉 틀어놓아도, 모든 장면이 위안이 되는 그런 흔치 않은 영화이기에.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다섯 번이나 본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결코 달콤한 영화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도 어여쁜 시골의 사계절과 요리 장면, 세 청춘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관계 등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청춘들이 결코 시골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지내고 있는 것만은 아님을 느껴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두고 ‘귀농에 대해 미화하는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 말은 오히려 이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보았음에도 영화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에.
그보단 청춘의 성장통을 그리는 이야기
주인공 ‘혜원’만 보더라도 그렇다. 임용고시에 실패 후 고향인 시골마을로 내려온 혜원은 도시를 떠나왔다고 해서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간은 정말 순수한 힐링과 도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곧 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재하의 말대로 ‘그런다고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혜원은 시골에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러 내려온 셈이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재하’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상사의 폭언을 견디지 못했던 재하도 도피하듯 시골로 내려왔지만, 그렇다고 시골에 와서 마냥 이것저것 뚝딱 농사를 성공했던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는 태풍으로 사과농사를 망치는 것이 얼마나 익숙한지 아주 덤덤하게 낙과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도 시골로 오면서 이별해야 했다.
시골에만 붙박이처럼 있었던 은숙의 삶도 만만치 않다.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는 은행에서 그녀는 여름이면 공짜로 믹스커피를 타다 바쳐야 하고, 아무리 작은 단위의 은행이라도 회식자리에서 부장을 위해 맘에도 없는 탬버린을 쳐야하는 비애는 똑같다.
과연 이들의 어떤 지점이, 귀농을 미화한다는 걸까. 이 영화는 시골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보여줌과 동시에 세 청춘의 쓰라린 성장통도 훌륭히 보여주고 있는 것을. 단지, 군데군데 자연이 내뿜는 푸르르고 여유로운 장면들이 배치되어 있어 그들의 성장통이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 방식을 띈 작품들은 많다. 이를테면 <라라랜드>. <라라랜드>는 유쾌 발랄한 뮤지컬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서로의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연인을 노래하는, 그러니까 사실은 ‘슬픈’ 영화가 아니었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막상 읽어보면 “청춘은 원래 아픈 거니까 쭉 아파라”라고 말하는 책이 아닌데도, 어쩐지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리틀 포레스트>도 그런 외형을 띈 영화가 아닌가 싶다. 혜원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자연의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시골의 풍부한 사계절을 뛰어난 영상미로 담아냈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시골생활을 가볍게 그리는 영화는 아닌데...., 들여다보면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 즉 청춘남녀들이 자신만의 작은 숲을 일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프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외피만 놓고 오해하는 경우가 생겼던 게 아닐까.
작은 숲을 가꾸기 위하여
물론 나는 이 영화를 오해하는 많은 이들처럼, 혜원이 요리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얇은 튀김옷을 입힌 아카시아 꽃과, 무지개색으로 쪄낸 시루떡, 보기만 해도 달큼해지는 밤 조림, 꼬들꼬들 말라가는 주홍색 곶감을 보면서 정말 많이도 시각적 힐링을 했더랬다. 그렇지만 그런 요리를 하는 혜원에게 아픔이 있음 또한, 영화를 볼 때마다 여지없이 느낀다. 그러면서 나는 늘 혜원의 행복을, 그리고 혜원에 투영된 나의 행복을 빌었다.
영화는 혜원과 재하, 은숙 세 사람이 그래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 혜원이 ‘자신의 작은 숲’을 찾았음을 암시하는 미소로 관객들을 안심시키며 끝이 난다. 영화가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던 것조차도, 어쩌면 혜원이 찾은 숲이 ‘시골로의 정착’이냐 ‘도시로의 회귀’냐 하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님을 시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그 시시한 결말과, 처음부터 끝까지 소소하고 슴슴한 맛의 이 영화가 참 좋았더랬다.
청춘과 인생은 자연의 섭리를 많이 닮아있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리틀 포레스트에는 ‘인생’에 대입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좋은 대사들도 많다. 긴 요리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 혜원에게 혜원의 엄마가 하는 말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라던지, 재하의 “겨울에 심은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라는 말이라던지. 기다림과 긴 긴 겨울에 대해서 자연은 늘 그렇게 단단한 통찰을 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귀농을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지만, 때때로 내 숲을 가꾸는 일이 힘들게 느껴질 때 다시금 이 영화를 찾는다. 혜원이 힘들 때 고향을 찾아가 위로받았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글쓰는우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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