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미국 영화계는 왜 '미나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까. '미나리'는 이미 수십 개의 영화상을 받았고,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미나리 현상'은 미국 영화계는 물론, 한국에서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드러낸다. 말하자면, 낯익은 서사를 신선한 영화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는 영화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젊은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을 갖고 미국으로 이민 온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가족은 중남부에 있는 아칸소주로 이주한다. 남편 제이콥이 이끈 땅은 비옥하고, 땅값이 싼 곳이어서 넓은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아내 모니카는 이주가 달갑지 않지만, 아들 데이빗의 건강을 위해 동의한다.
캘리포니아의 대도시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던 두 사람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제이콥이 농장을 일굴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하는데, 가까운 마을을 가려해도 자동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외진 곳이다. 아칸소주는 중남부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바로 옆에 오클라호마주가 있다. 신기하게도, 아칸소주가 있는 경계로 남북으로 길게 왼쪽은 사막지역이고, 오른쪽은 비옥한 땅이 있는 지역이다.
부부에게는 딸 앤(지영)이 있고, 아들 데이빗이 있다. 두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엄마, 아빠와 대화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고, 한국말을 비교적 잘 알아듣는다. 남매끼리 대화할 때는 주로 영어로 대화한다. 이민 2세는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데, 그 첫 번째 현상이 언어의 사용이다.
부부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아이를 보살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자, 부부는 한국에 계신 모니카의 어머니를 초청한다. 한국에서 할머니가 도착하고,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짐에는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 재료들이 바리바리 들어 있다. 고향을 떠난 것은 젊은 부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이 시기 한국 상황은 전두환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독재국가였고, 민주화 투쟁의 불길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부부의 이민이 이런 한국 정치상황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개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의 보편적 속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의 숨막히는 독재 상황이 이들의 이민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네 식구의 가정에 할머니 - 한국 할머니 - 의 등장은 잔잔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데이빗은 외할머니를 낯설어 하고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냄새는 '한국' 냄새이며, 미국에서 태어난 데이빗은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조국'인 '한국'의 낯선 냄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녀와 손자에게 스스럼 없는 '한국 할머니'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영어로 말하고, 할머니의 말은 알아 듣지만 한국어로 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할머니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데이빗과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다 작은 개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그 개울 옆에 뿌린다. 할머니는 미나리가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말한다.
제이콥이 아칸소주로 이사한 것은 농장을 꾸리기 위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한국에서도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가 농사 짓는 모습을 보며 자랐던 것이 부부의 대화에서 아주 잠깐 드러난다. 반면 모니카는 서울 또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미국에 이민와서도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것을 좋아했고, 아칸소의 시골로 이주한 것이 달갑지 않은 상태였다. 모니카가 아칸소로 이주한 것에 동의한 이유는 데이빗이 갖고 있는 선천성 심장병에 자연 환경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제이콥은 낯선 곳에서 농사를 지으려 준비하면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미국인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그 선입견은 이방인이 갖는 공통의 심리이기도 하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선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태도는 자기와 가족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이며, 생존을 위한 기본 심리이기도 하다.
제이콥은 농사를 짓기 위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200달러를 달라는 업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우물을 판다. 중고 농기계를 구입하는 것도 마을 주민에게 싼 값으로 사는데, 그렇게 우연히 폴을 만난다. 폴은 백인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백인은 아니다. 그 역시 시골 촌놈이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인물이고, 아마도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며, 이상한 주문과 주술을 하는, 조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폴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폴 역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제이콥을 돕는다. 폴은 일요일이면 십자가를 메고 도로를 걷는 고행을 하는데, 폴의 인생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쩌면 폴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PTSD로 고통받는 사람인지 모른다. 폴이 제이콥에게 친절한 것도 우연이지만 제이콥이 한국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폴은 외로운 사람이고, 누구든 가까이 지낼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농사를 짓던 제이콥은 판매를 할 만큼의 농산물을 수확하고, 판로를 개척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갑자기 할머니가 뇌졸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모니카는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농장, 어머니의 발병으로 인한 간병과 경제적 문제, 아들 데이빗의 심장병 등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힘겨워한다.
모니카는 이웃에 사는 폴을 초대해 식사하면서 뇌졸증으로 쓰러진 어머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 의식을 치른다. 한국식으로 보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인데, 모니카 역시 이런 상황이 좋은 건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한 자기 위로라고 본다. 제이콥은 모니카가 주도하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할머니는 딸과 사위, 손자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데이빗을 데리고 도시의 병원으로 간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았고, 숨차게 뛰는 것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시골로 이주한 뒤에도 데이빗이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었다. 데이빗을 진단한 의사는 심장이 많이 좋아졌다고,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한다.
시내 나온 김에 제이콥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에 들러 자기가 재배한 채소를 납품할 수 있는지 상담하고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제이콥은 아칸소 뿐 아니라 가까운 오클라호마에도 채소를 납품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가족이 모두 외출한 사이, 할머니는 혼자 쓰레기를 태운다. 몸이 자유롭지 않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다 쓰레기에서 떨어진 불이 농작물 보관 창고에 옮겨 붙으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쯤 창고는 불길에 휩싸이고, 모두들 망연자실한다.
할머니는 자기의 잘못으로 제이콥의 농사를 망쳐서 절망하고 집을 떠난다. 이때 데이빗이 달려가 할머니를 가로 막고, 가족은 다시 트레일러로 돌아와 쓰러져 잠에 든다. 할머니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사실 채소 저장소는 다시 지으면 되고, 채소는 계속 자라는 것이니 그것이 죽을 만큼 큰 절망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다행인 것은 데이빗의 심장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좋아졌다는 것이고, 제이콥이 시내의 마트와 납품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민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한국 채소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이다.
채소 저장고의 화재는 제이콥 가족에게 한순간 절망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제이콥과 모니카가 화해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제이콥은 데이빗과 함께 할머니가 심어 놓은 미나리밭을 찾아간다. 싱싱한 미나리를 뜯으며,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낯설고 물선 미국에서 힘겹지만 조금씩 뿌리 내리는 한국인 이민자의 삶이 희망적이라는 메시지를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간과 정서는 1980년대를 나타낸다. 우리는 2020년에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한국의 1970년대를 떠올리는 기시감을 갖는다. 따뜻하고 살가운 할머니의 모습과 무한한 애정, 고생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리고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가난했던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이며,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미국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며, 이민자들이 갖는 보편적 감성을 영화가 매우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날 때의 낯설고 두려운 심정, 낯선 땅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던 자신들의 과거가 이 영화에 과정 없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과장하지 않고,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담한 영화 언어로 이민자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자연이 드러내는 풍경, 바람소리, 물소리, 빗소리, 풀잎이 스치는 소리, 여기에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음악까지, 영화는 미국의 농촌 풍경을 낯설지 않게 보여준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 초보 이민자가 만나는 이웃들 역시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대부분의 사람은 친절하고, 다정하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이웃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건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영화에 필요 이상의 감정을 넣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과의 갈등으로 촉발하는 시선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약간의 희망을 보이면서 끝난다. 하지만 할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제이콥이 하는 농사는 항상 수익이 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아칸소만 해도 한여름의 태풍이 엄청나서 태풍 피해를 입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결말을 말하지 않는다. 이 가족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만 확실하다. 사람은 힘들게든, 고통스럽게든 그렇게 한발 한발 땅을 디디며 살아갈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