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4-09-29 13:01:16
[DMZ Docs] 소리 없는 아우성
비(非)극장 상영 프로그램 <침묵하는 다리들>(2023

침묵하는 다리들(Muted Bridges)
감독: 얀웨이양 Yan Wai Yin
*
9월 26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개막했다. 다큐멘터리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장이다. 일산 메가박스 킨텍스, 현대백화점 킨텍스점, 롯데시네마 주엽, 일산호수공원 노래하는 분수대,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 경기도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헤이리시네마, 수원시미디어센터, 갤러리그리브스 등지에서 43개국이 참여한 140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2024년 16회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슬로건이 '우정과 연대를 위한 행동'이다.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연대 아닐까 싶다.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2023년부터 비(非)극장 상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올해 주제가 '풍경 landscape'이라고 한다. "생활 세계의 공간들과 거리, 건축, 조경, 자연의 풍경 안에서 오늘날 세계가 처한 위기와 관경, 저항의 운동들을 식별"(공식홈페이지 인용)한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얀웨이양의 '침묵하는 다리들'을 관심 있게 보고 왔다.

일전에도 홍콩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고 온 적이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와 맞물려 아비규환이었던 시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이번 양웨이양의 작품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3분밖에 안 되는 영상이지만, 도시의 풍경, 특히 홍콩의 다리 5개를 비추는 카메라가 함의하는 바가 크다. 감독이 조명한 다리는 홍콩 민주화운동 당시 정치적 슬로건과 항의문, 대자보로 뒤덮였던 장소다.
그 장소가 지금은 너무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거의 표백에 가깝다. 한때 뜨거웠던 시간을 모조리 소거해버린 풍경은 몇 년 전의 풍경보다도 살풍경하다.

3분의 영상 앞에서 잠시 홍콩의 거리 시위 현장을 오버랩해 본다. 뜨거웠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다. 깨끗해진 홍콩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그때의 열기를 잊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 깨끗한 다리에 때가 타고 발자국이 찍히는 동안 홍콩에서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마저도 잊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누가 기억해 주나.
아마 얀웨이양 같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닐까. 그러므로 기록한다.
왕가위가 작품으로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반환 직전의 홍콩 분위기 역시 진작 잊혔을 것이다. 모두가 사랑했던 그 시절 홍콩은 사라지고, 이제 중국화된 홍콩이 남아 있다.
지금 동두천시가 미군 위안부 성병관리소를 철거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반발이 거세다. 기록물을 지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3분의 다큐멘터리 앞에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폭력과 광기의 역사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
2024.09.26.~ 10.02. 레이킨스몰 3층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 : 09월 26일 - 10월 02일
Relative contents
-
- 박해일이 아니었다면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 담당 형사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만나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에 수상함을 느끼고 용의선상에 올린다. 하지만 사건 조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가는데.....
1. 낯선 단어들의 조합
서래는 진술 과정에서 꽤나 문체적인 단어를 쓴다. '마침내 죽을까봐'라던지, '한국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해서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라던지. 대사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하다. 하지만 흔히 쓰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흠칫거리게 하는 그런 소설. 그런 점이 이 영화를 더 신비하고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그런 서래의 모습이 그녀를 용의자로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진술을 연습해온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준은 애써 자신의 의심을 거둔다. 그녀를 의심하기엔 그의 애정이 더 깊었기에 평소였으면 깊게 파고들었을 의심스러운 부분도 밍기적거린다. 그렇게 그는 한 순간의 실수로 '붕괴'됐고, 영화는 붕괴 이후부터가 진짜다.
2. 박해일이 없다면
이 영화의 연출과 음악, 배경 모두 박찬욱 감독스럽고 작품성은 평가의 여지가 생각한다. 세계의 영화 전문가들이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인정한 영화이기에 내 평가는 그저 취향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취향은 '기묘하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박해일 배우가 캐스팅되지 않았다면 이 캐릭터가 납득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해준은 냉정하게 말하면 중년의 미남자가 인생이 지루해져 딴 여자에 한눈 판 인물이다. 생각보다 이해받기 쉽지 않은 상황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를 이해하게 된다. 평소의 내가 하던 생각이 아니라서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가진 얼굴과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년의 나이에도 소년의 느낌을 유지하고 매너가 넘치는 캐릭터가 합해지니 불륜하는 캐릭터임에도 여심을 안 흔들 수 있었을까. 아마도 관객들은 '저 남자가 내 남자였으면' 싶었던 게 아닐까. 불륜이어도 저런 '잘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박해일 배우가 가진 소년미가 아니었다면 그 판타지가 구현되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나이에 담백한 소년미를 가진 배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음악과 분위기는 굉장히 고급진 느낌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이 영화는 여자들의 팬픽에서 느낄 법한 판타지를 충족시켰던 게 아니었을까. 팬픽, 웹소설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 스토리가 말도 안되는 건 알지만 원초적으로 충족받고 싶은 이성에 대한 판타지'를 확인시켜 주는 장르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이 영화를 볼 때 서사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런 남자는 세상에 없는 거 알지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여자들의 판타지를 확실하게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서사는 팬픽스러운데 문체적인 대사들로 가득찬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영화라니. 이 모든 조합만으로 이 영화는 한 번쯤은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3. 사랑은 타이밍
해준이 서래에 대한 사랑을 놓았을 때 서래의 사랑은 시작된다. 영화는 해준의 '붕괴' 이후가 진짜인데 그 때 이후로 서래의 집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서래의 사이코스러워 보일 법한 사랑은 해준이 그녀를 버린 후에야 시작되지만 두 사람의 타이밍이 안 맞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의 마지막 선택은 해준에게도 관객에게도 많은 잔상을 남긴다. 남자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겨 절대 잊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는 다분히 병적이지만 결국 이게 이 영화의 미장센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너무 사랑해서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상처를 줘야겠다는 마음이라니. 이 결말이 초반에 팬픽, 웹소설스러운 부분을 단번에 한 편의 소설처럼 느끼지게 만들었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소설 말이다.
4. 총평
박찬욱 감독의 팬분들이야 당연히 이 영화를 보시겠지만 박찬욱 감독 영화에 잘 모르는 분들도 이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다. 그의 영화 치고 꽤나 대중적이고 진입 장벽이 낮다. 입문하기에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
- 그저 그 사이에 끼어 손을 드는 행동이 행동하는 것보다 더 주목받는 순간
‘플란다스의 개’는 동화처럼 따뜻하지도, 감동스럽지도 않은 퍽퍽한 빵같은 영화다. 부끄럽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내면을 감독의 손을 통해 기꺼이 드러내고 불편하지만 직면해야할 문제들을 나열한다. 분명 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개를 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위해 개를 이용하는 사람들만 등장한다. 시간 강사 윤주, 부랑자와 경비원, 현남, 그리고 금방 다시 강아지를 산 집주인들까지.
시간강사 윤주는 시시각각으로 밀리는 상황에 스트레스가 가득한데, 계속 들려오는 개소리에 더욱 화가나 진원지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윤주는 옆집 문 앞의 강아지를 발견하고 납치해서 지하실에 가둬 버렸다. 한편, 아파트 경비실에서 경리일을 하던 현남에게 어떤 꼬마가 다가와 삔돌이를 찾는 전단지를 가져와 도장을 부탁하고 현남은 아파트 내부에 강아지 전단지를 붙인다. 동창회에 참석한 윤주는 1500만원이라는 숫자에 착잡하기만 하다. 잠든 와이프의 배를 보며 술주정을 하던 윤주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소리의 진원지를 드디어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이 없애버린 강아지는 짖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하실로 가서 강아지를 찾아봤지만 사라진 강아지와 무서운 이야기가 그를 밖으로 내쫓는다. 마침내 찾아낸 강아지를 던져버린 윤주는 그 장면을 목격한 현남에게 뒤쫓기고 현남은 그 장면을 목격하여 윤주를 쫓지만 갑자기 열려버린 문에 잡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잔잔하던 영화의 흐름에 갑작스런 추격이 불어닥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소리의 진원지를 제거한 윤주는 와이프 은실이 데려온 푸들, 순자에 더욱 괴롭다. 짙은 연기가 지나가고 행방불명된 순자를 찾기 위해 전단을 붙이는 윤주의 모습과 초반의 현남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산을 장미와 함께 올라가던 현남의 뒷모습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보는 현남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돌아보는 현남이 거울을 꺼내곤 햇빛을 반사해 나의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놓곤 한 곳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든다. 방심하던 순간 드러나는 나의 표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비춰지고 있지만 이 거리에서는 볼 수 없었다.
풋풋함이 가득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발견한 무기력한 인물들의 웃음을 볼수는 없었지만 얼떨결에 지나가는 일상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저 자신이 주목 받기를 바랐던 현남은 선의를 건넸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다가오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림자 안에서 움직였던 윤주와 경비원은 이득을 얻었다. 분노가 자연스레 자신보다 힘이 약한 이에게 이어지지만 그저 종이 한 장에 건넬 수 있는 돈이 여기에는 없고 저기에는 간다.
-
-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키즈 크리에이티브 2
클린턴은 기숙사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10살인 어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크리켓 골든 트로피를 얻었던 만큼 크리켓을 잘했다. 기숙사에서 키가 큰 아이가 자신을 괴롭히고 비하하는데 클린턴은 자신의 화를 참으며 과거에 트로피를 손에 쥐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클린턴은 기숙사 학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아이이다. 식당에 빌린 돈이 많아 갚지를 못해 밥도 못 먹고 선생님도 클린턴을 소외시키고 만다. 이런 극악의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전학생을 본다. 그 전학생도 말수가 적고 소외당하는 아이지만 클린턴은 그 애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기숙사에서 힘든 시간을 겪은 클린턴에게 기회는 있을까?
제인은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 8살 어린이다. 하지만 그녀를 키우던 엄마가 우울증으로 인해 병원 치료를 받게 되어 할머니 집에 맡겨지게 되자 싫은 감정을 내보인다. 할머니는 그런 제인에게 양파 파이를 만들어주고 레시피도 공개하지만 싫증이 난 제인은 집 뒤뜰에 있는 숲에 가게 되고 길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눈을 뜨자 자신 앞에 보이는 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고 거대한 몸집의 큰 거인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도망치려 하는데... 이 거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아의 소수 민족인 아제리 민족은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성들과 아이들은 글자를 못 읽기에 학교에 가지 못한다. 그러던 중에 파샤의 딸인 귀네쉬는 글자를 읽고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귀네쉬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파샤의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이 미래의 중요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
-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타인의 삶>을 보면서 배우는 정치
<타인의 삶>을 보면서 배우는 정치
- 감시자의 눈으로 본 인간의 본성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국가를 위해 감시하고, 의심하고, 고발한다. 인간의 숨결까지 탐지하려는 국가의 냉혹한 눈, 바로 슈타지의 비밀요원 게어트 비슬러. 그의 존재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듯하지만 정작 인간의 마음은 닫힌 채 살아온 그림자다. 그러나 그가 감시하던 한 예술가 커플의 삶, 그 속의 자유와 사랑은 서서히 그를 흔들게 된다.
이 영화는 감동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역사적 증언이 된다. 배경은 1984년 동베를린. 철의 장막 이편, 동독은 사회주의라는 이념 아래 국가가 개인의 삶을 철저히 지배하던 곳이었다. 슈타지(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국가보안부는 그런 통제의 최전선이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국민을 보호하는 척, 국민을 감시한' 조직이었다. 1950년부터 90년까지 존재한 이 기관은 소련의 KGB를 모델로 창설해 서방 세계의 자유주의를 '적대적 사상'이라 규정하고, 이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시민들의 일상까지 침투했다. 이 조직은 이웃, 연인, 가족의 신뢰까지 파괴해버린다.
이 냉혹한 국가 장치는 바로 냉전의 부산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속에서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됐다. 서독은 마셜플랜과 NATO의 보호 아래 자유주의 진영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동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이자 소비에트 블록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념은 경계를 만들었고, 경계는 인간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어냈다.
영화 <타인의 삶>은 냉전기의 동베를린이라는 단절된 시간 속에서 감시라는 절대적 권력 아래 무너져 가던 인간성을 기적처럼 다시 일으켜 세운 이야기다. 이 영화는 한 비밀경찰의 ‘변화’나 ‘감동적 회개’를 그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감시라는 구조적 억압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포위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인간적 연민의 가능성을 직조해간다.
<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비극은 총성이아닌 침묵 속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독재가 강요한 '침묵의 사회'며 감시가 개인의 내면까지 잠식한 체제의 결과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은 사람을 위해 변한다. 비슬러는 감시를 중단함으로써 처음으로 누군가의 삶에 진심으로 '참여'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가 놓친 인간의 가능성이다.
동독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붕괴의 길을 걷는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숨겨진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결국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이뤄냈다. 이 통일은 국경이 아니라 체제와 기억, 억압과 저항의 통합이기도 했다.
출처 : 나무위키
이 영화는 국가와 체제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서다. 동독이라는 나라는 소련의 영향 아래 세워진 ‘작은 전체주의’였고, 감시는 단지 정치적 기술이 아닌 일상적 감각이자 언어였다. 믿음은 분해되었고, 관계는 해체되었으며, 침묵은 권력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반도를 생각하게 된다. 독일은 수십 년 간 동서독 정상회담과 베를린 협약 등 정치적 협상을 통해 꾸준히 준비해왔고, 주변국 특히 프랑스의 협력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Asia Paradox’의 그림자 아래 있다.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이 깊지만 정치와 안보는 대립의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극복하지 못한 민족주의, 그리고 '존재론적 안보'에 집착하는 주변국들의 태도는 탈냉전의 기회를 아시아에서는 아직 꽃피우지 못하게 한다. 북한의 핵 위협과 중국의 부상, 미중 체제경쟁과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까지 지금의 동아시아는 냉전의 유산 위에 여전히 군림하는 긴장 상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어디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까. 혹은 들여다보는 그 순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일 수 있을까? 우리는 체제의 감시자이면서 동시에 양심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
비즐러는 이 질문에 대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응답한다. 침묵하는 감시자에서 말없이 도운 구원자로의 여정은 곧 인간이 시스템을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변주다.
여전히 감시의 언어가 살아있는 북쪽, 그리고 여전히 분단을 일상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남쪽. 우리는 아직도 역사 속에 머물러 있다. <타인의 삶>이 동독의 폐허 속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양심’의 존재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한반도 분단 현실에서도 중요한 울림을 남긴다. 우리는 언제쯤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 살아낼 수 있을까?
감시의 균열에서 피어난 양심. 그 서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이제 우리의 서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을 우리가 믿는다면 언젠가 이 땅에도 장벽이 무너질 수 있으리라
<영화에서 보는 정치> 교양 수업에서의 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
-
-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
- 겉은 호러지만 안은 따뜻한 겉바속촉형 호러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던 부랑자들을 한두 대 두들겨 팰 수 있을까. 물론 폭력은 나쁘지만 아쉬움이 있다. 왜 날 괴롭히던 애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었나?라는 아쉬움이다. 운동을 열심히 했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성인이 되고 나서 겪었던 몇 흑역사가 여기에서 온 것 같아 또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시간을 돌린다면 내가 내 힘으로 나 자신을 지킬 것이다. 맘에 안 드는 놈에게 찍소리 못하며 당할 바에 운동 열심히 하는 게 나 자신을 지키는 좋은 방법인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년시절은 서로 이어져있다. 당당하지 못하면 맘에 드는 이성에게 말 한마디 걸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 친해지고 싶은 상대와 오히려 안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 쉬웠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결국 나를 만드는 일이란 걸 윗 문단을 쓰며, 또 이 문장을 만들여 다시 한번 느낀다. 극복은 사람 살면서 정말 어려운 난관 중 하나다. 어쩌면 10대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가한 과제를 아직까지도 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솔직히 나한테 까부는 놈 한 방 쳤을 것 같다. 살면서 누구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아직도 난다. 때리지만 않는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때의 객기가 살면서 중요하다는 걸 미리 알았을 텐데 말이다. 이 소년 피니는 글쓴이보다 더 한 두려움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가면 쓴 남자가 관객과 소년을 납치했다. 탈출하는 방법은 이번 주 수요일에 극장에 가는 것이다. <블랙폰>이다.
연쇄 납치범
1978년 미국. 한 범죄자가 덴버라는 마을에 활개 치고 있었다. 죄목은 유아 납치. ‘더 그래버’라는 범죄자는 복면을 쓰고 덴버 마을 곳곳에서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범죄 수법 공통점은 납치된 곳 근처에서 검은 풍선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포에 떠는 마을. 그러나 남매 피니와 그웬에게 더 무서웠던 건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설명이 어려운 한 요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 혼자만 남게 된 후 아이들은 점점 받는 상처가 늘어났다. 걸핏하면 맞는 아이들. 오빠 피니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10대를 보내고 있던 피니. 이런 피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건 급우 로빈과 여동생 그웬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피니. 화장실에서 나쁜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피니에게 폭언을 하고 있었다. 맘에 안 드는 놈 하나 패고 있던 로빈은 화장실로 따라 들어와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나쁜 놈들을 모두 쫓아낸 로빈과 피니. 로빈은 피니에게 “이제 너 스스로가 너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한다. 순수한 근력은 셌지만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몰랐던 피니. 그런데 더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기를 지켜주던 친구 로빈이 납치됐다. 곧이어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 일어났다. 피니마저 그래버에게 납치됐다. 지하에 갇힌 피니. 탈출에 유용할 정보는 독방에 덩그러니 있는 고장 난 검은색 전화기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검은색 전화에서 울리는 의문의 전화벨. 통화 상대는 그래버에게 피살당한 친구들이었다. 피니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은 아이들과의 통화를 시작한다.
블룸하우스 발 호러영화?
블룸하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맞다. 호러 영화에서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회사가 제작한 영화는 적은 비용으로도 높은 효율을 뽑는 작품들이 많았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인시디어스>, <겟 아웃>, <해피 데스 데이> , <23 아이덴티티>, <위플래쉬>까지 이 제작사는 감독의 역량이 중요한 호러/스릴러 영화에서 좋은 타율을 선보였다. 그중에서 내 기억 속에 세 번째로 기억에 남았던 게 뭐냐? <살인 소설>이었다(첫 번째는 <위플래쉬> 두 번째는 <겟 아웃>). 스콧 데릭슨이라는 이름이 사실 생소하긴 하다. 나중에 마블에 입덕 하고 나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맡은 감독이었다고 하나 개인적으로는 그 작품마저 그렇게 인상 깊진 않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다시 <살인 소설>로 들어간다. 이 <살인 소설>은 글쓴이 개인적으로 저평가가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 기준으로 호러영화의 대표 격하면 <컨저링>이나 <쏘우>가 나오곤 하는데 이 두 작품보다 <살인 소설>이 밀린다 곤 생각 않는다. <살인 소설>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잘 활용한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기괴한 이미지를 삽입하는데 이 장면이 끌고 가는 공포가 후반부까지 쭉 이어진다. 또 어딘가 익숙하지만 살짝 변용한 톤이 중간중간 기억에 굉장히 강하게 남는다. 또 사운드 연출이 잘돼서 점프 스퀘어가 비교적 덜 식상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이 스콧 데릭센의 장기가 잘 들어가 있다. <살인 소설>을 봤다면 느껴지는 장면 장면들이 곳곳에 보인다. 약간 예전 비디오 돌려보는 듯한 시퀀스가 주요 장면마다 배치가 됐다. 또 사운드 연출이 인상 깊을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은 <블랙폰>이다. 당연히 전화기가 중요한 소재다. 띠리리링 하는 전화 효과음 설정이나 역시 비교적 덜 식상하게 만드는 사운드 연출까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스콧 데릭슨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의 연출 측면에서도 죽은 친구들과 피니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장면마다 죽은 친구들을 묘사하면서 피니에게 어떤 힘을 주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잘 묘사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볼 수 있었던 방법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인물의 시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잘 썼다. 이 턴에 이런 시점을 보여주면 영화가 박진감이 있고. 또 후술 할 에단 호크의 포스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이고. 이런 디테일을 잘 살렸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강점은 감독의 이런 연출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한 틴에이저
아마도 확실하게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지점이다. 이 영화는 중반부에 갑자기 장르를 비튼다. 철저하게 호러 톤을 유지하던 영화는 10대 소년의 내면이 주요 소재가 된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공포는 두 가지다. 학교와 집에서 겪는 공포다. 이 공포는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 공통점이 있다. '대안이 없어도 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피니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도 주인공은 살 만하다. 아버지가 허구한 날 여동생 허리띠 때려도 피니는 외롭지 않다. 누구보다 든든한 여동생이 있으니까. 학교에서 미친놈들이 괴롭혀도 별 일 아니다. 로빈이 구해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피니는 괴롭긴 해도 자기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꿀 필요도 이유도 못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맞닥뜨리는 공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냥 이 상황이 익숙한 것이다.
극에서 제시되는 납치라는 설정은 이 익숙함을 광폭하게 비틀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이 두 공포가 병렬적으로 제시되며 피니를 괴롭힌다. 일단 여동생과 로빈이 없는 환경은 첫 번째 공통점을 가진다. 또 그래버가 피해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영화의 어떤 장면과 오버랩되는 것은 절대 그냥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피니가 겪고 있는 공포를 좀 더 색다르게 표현했다. 그래야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 닿아있다. 또 이렇게 설정을 의도적으로 대치시켜야 인물이 두 공포 중 하나만 극복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엔딩에 인물들이 고르는 선택지에 탄력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이 후반부의 장르 변화가 아쉽다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호러 분위기를 에단 호크의 카리스마와 점프 스퀘어가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이게 뭐가 공포영화나?'라고 생각할 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새는데 엔딩은 거의 기름을 붓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호러 장르이기 이전에 피니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 주신다면 감상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니가 정말 겪어야 했던 공포는 자기 내면에 있다. 이렇게 찍어 누르는 세상 속에서 바꿀 생각을 않는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이 영화에 작동하는 굉장히 큰 공포일 지도 모른다. 이 공포야말로 소년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극복해야 했던 처음 관문이다.
앉아있기만 해도 무서워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에단 호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저씨 연기 잘하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래버에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그래버가 납치 수법을 관객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신이 있다. 이때 뭔가 엉거주춤하는 자세와 낮게 깐 목소리톤으로 관객들을 장악한다. 이 연기에는 살짝 페널티가 있다. 바로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빛과 표정연기로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시작한다. 가면을 잘 고른 감독의 공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에단 호크의 개인기가 빛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시퀀스는 그래버가 피니를 납치한 후가 중심이 된다. 이 그래버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극에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래버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피니에게, 또 관객에게 공포감을 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납치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바로 먹는 문제가 걸릴 것이다. 이 음식 주는 장면도 에단 호크는 두렵게 소화한다. 굉장히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살짝만 비틀어서 호러 분위기를 조성했던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 영화를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익숙한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이 잘 느껴진다. 바로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다. 카메라 워킹부터 목소리 톤까지 살짝살짝 바꿔가며 극을 이끄는 카리스마가 압도적이다. 이 영화가 10대 소년의 극복기를 다룬 것만큼이나 '호러 무드'를 품고 있는 이유는 이 배우의 충격적인 연기가 뒷받침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인물의 연기를 구경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한 재미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더 배트맨>의 리들러가, 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의 그린 고블린이 연상이 되는 엄청난 연기였다. 앉아있고. 서있고. 뭘 들고 있고. 내려놓고 있고. 뛰고. 몸싸움을 하고 단어 한 글자만 나열해도 장르가 되는 퍼포먼스 하나 만으로도 비싼 티켓값의 2/3은 구성한다고 보는 쪽이다.
굳이 옛날이야기를
영화를 보고 나서 느껴지는 뜨거운 무언가는 좋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1970년대 이야기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밀폐된 공간 탈출하 기다. 바로 호러영화의 근본으로 이어진다. 호러영화의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빌의 저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피비 랜 나는 복수극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귀신 씐 집이라는 소재 <엑소시스트>까지 미국 호러영화의 전성기는 197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쭉 이어졌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가 생각나는 빌런이나 특정 장르에 무언가 쓰였다는 점까지 아마 감독이 당시 호러영화에 대한 리스펙트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점도 있어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점도 있다. 바로 여동생 캐릭터다. 여동생 캐릭터에 어떤 코드로 읽힐 수 있는 몇 가지 설정이 있다. 이 코드가 무엇인지 쓰면 스포일러가 된다. 그런데 극을 보고 나서 딱 알 수 있는 건 이 설정은 사실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곁다리로 스윽 지나가는 느낌이다. 뭐 검은색-흰색의 색채 대비나 그래버가 쓴 가면이 영화의 특정 코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굳이 여동생 서사에 그런 소재들을 넣어 집중을 깰 필요가 있었는가? 는 의문점이 든다.
또 피니의 설정이다. 피니 이야기 물론 좋았다. 관객들도 뿌듯할만한 충분한 이야기 구성이었다. 그런데 이 피니와 블랙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살짝 인과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극에서 중요한 것이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헐겁다면 충분히 헐겁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여동생에게 부여한 설정 하나가 피니에게도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설명을 좀 더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
-
-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런칭 예고편
#전지적독자시점 런칭 예고편 공개💥 "이거, 그 소설 시작이랑 똑같잖아" 소설 속 세계가 현실이 되는 시간 2025년 7월 COMING SOON✨
-
- 영화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 두번째 30초 예고편
베놈’과 완벽한 파트너가 된 ‘에디 브록’(톰 하디) 앞에 ‘클리터스 캐서디’(우디 해럴슨)가 ‘카니지’로 등장,
앞으로 닥칠 대혼돈의 세상을 예고한다.
대혼돈의 시대가 시작되고,
악을 악으로 처단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