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미국 외, 판타지 외, 130분
감독: 데이빗 로워리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우린 가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두 물음 사이에서 방황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다니는 친구이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목적을 잃고 떠도는 방랑자였으면 하니까.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어둠을 뚫고 나오면, 두 물음표가 사실은 하나의 느낌표였음을 깨닫는다. 이내 스스로 다시 묻게 된다. "난 이 세상을 살다 갈 나만의 주체적인 방식과 길을 갖고 있는가!" <그린 나이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을 위해 탄생한, 매력적인 동시에 무서운 걸작이다.
주인공 가웨인은 뭐 하나 자의로 결정한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서왕의 조카로서, 왕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있는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와 무용담도 없다. 그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제집 드나들듯 했던 기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어린애'다. 그렇다고 가웨인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가? 아니다. 현재로서 그에겐 애인 에셀의 따뜻한 품과 술만 있으면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잘 알고 있는 눈치 빠른 자다. 하여 최대한 모른 척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말 그대로 '어떠한 준비도 하고 싶지 않은' 어린 가웨인으로 살고자 한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묻는 아서왕에게 말씀드릴 이야기가 없다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가웨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도 없는 왕의 핏줄, 아니 한 인간. 그건 곧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화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무용담이 없는 왕의 핏줄'이란 결핍을 덥석 받아들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을 놓고,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길 끈질기게 기다린 결과다.
가웨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그 검에 참수당한 그린 나이트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1년이다."란 말을 남긴 후 유유히 떠난다. 어린 가웨인은 다들 가진 전설적인 무용담을 얻기 위해 그린 나이트의 게임 조건을 승낙했었다. 그러나 게임의 승자가 됐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보내는 박수와 함성을 들으며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단 직감만 가질 뿐이다. 어떻게 살 거란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뤄왔던 그는, 단 한 번의 감정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년 동안 가웨인의 일격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더는 어린애로 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가웨인은 자신의 즉흥적이고 가벼웠던 행동이 불러올 비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웨인의 다리를 움켜쥔 덫은,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뒤흔드는 초자연적인 힘과 같다.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길인 걸 알면서도, 때론 신의 횡포라 믿고 싶게 만드는 '운명'이다. 죽음이란, 이미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의 가웨인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녹색 기사, 일명 '그린 나이트'와의 독대 말곤 없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1년은 짧았지만 빛을 집어삼키며 어둠을 낳는 이끼가 가여운 가웨인의 마음을 잠식하기엔 충분했다.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왕은 그에게 그린 나이트를 찾아갈 것을 권한다. 그는 가웨인이 위업을 달성할 것을 원했고, 그 목표를 위해선 반드시 목숨을 건 모험이 전제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웨인은 1년이란 시간 동안 내면 깊숙이 깔린 이끼가 뿜어내는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이겨내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초조하기만 한, 여전히 자기 삶에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어머니가 주술을 걸어 만든 녹색 허리띠와 연인 에셀이 준 사랑의 증표(방울), 그린 나이트가 남긴 도끼를 갖고 긴 여정에 오른 가웨인. 크리스마스 날에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이 1년 전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 것처럼 똑같이 목을 내어주면 되는 게임. 단순한 게임일 뿐이지만, 그의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다. 가웨인은 다섯 가지의 시련(기사의 덕목)을 맞닥뜨린다. 잘 와닿지 않는다면 왕, 기사, 왕위, 명예 등 영화가 제시한 (인간의 가치를 명예로 내세운)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자. 가웨인이 겪는 고통이 우리가 매일 밤잠을 설친 이유와 같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은 고난과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과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린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 말은 인간답게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이를 깊이 깨우치길 바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사기꾼 소년에게 베푼 작은 친절을, 배신으로 돌려받은 가웨인은 처음으로 극한의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온몸이 묶인 그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자 해골로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가웨인이 등장한다. 이후 카메라는 다시 반대로 회전해 사력을 다해 떨어진 칼로 기어가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생을 향한 포기와 집착. 이 상반된 두 장면은 교차로 인해 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힘겹게 죽음의 끝에서 벗어난 그를 보며, 우린 언제든 내 삶을 끝낼 수 있는 건 '내 인생의 주인인 나, 자신'밖에 없음을 다시금 유념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웨인은 마침내 가장 나약한 상태로 고난의 길을 걷는다. 성 위니프레드의 시험을 통과해 도끼를 되찾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우와 동행한다. 미지의 존재(거인)와의 만남에선 여우의 도움으로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쉼터를 제공해 자신의 발을 묶은 버틸락성 성주에겐 잡혔던 여우를 돌려받고, 성주의 아내에겐 어머니의 허리띠를 받는다. 얼핏 보면, 그가 다섯 가지의 관문을 잘 통과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그는 다섯 관문을 통과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중심이 흔들렸으며, 원초적인 본능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아서왕의 기사가 되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성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찾아준 건, 이후 똑같은 신세가 될 자기를 향한 연민과 동정의 읍소였다. 성주와 한 '획득물 교환 게임'에선 호의를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에셀의 얼굴을 한, 성주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 결전의 날 아침엔 그녀에게서 녹색 허리띠에 걸린 마법(허리띠를 하고 있으면 어떠한 외상도 입지 않는) 얘기를 듣고, 유일하게 꿋꿋이 지켜왔던 사랑의 지조마저 굽혔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에 잘릴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성주 아내의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든 가웨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여우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녹색 예배당에 들어선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서왕 앞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무릎을 꿇고, 이끼로 더럽혀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말하는 여우는 신의 뜻이 아니라 가웨인이 은연중에 남겨둔 그의 여지, 도망갈 구멍이었다.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을 1년 동안 기다린 그린 나이트를 보며 가웨인은 비로소 삶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운명의 시간, 그린 나이트는 무릎을 꿇은 가웨인에게 말한다. "자네가 했던 것처럼 한 번 내리치지."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란 공포에 휩싸인 가웨인은 정말 이게 끝이냐고 절규하며 되묻지만, "그럼 뭐가 또 있나?"란 차갑고 날 선 대답만 듣는다. 그래, 죽으면 끝이다. 무엇이 더 생의 공간에 남아있을까, 역사? 명예? 솔직해지자, 그런 건 모두 남은 자, 산 자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노래이며 그들의 몫이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안돼, 죄송합니다!!"
왕의 후계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맥 빠지는 말 한마디만 녹색 예배당에 남긴 채 가웨인은 도망친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이의 보살핌을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왕에게 기사 칭호를 받고, 죽은 왕을 대신해 새로운 왕위에 오른다. 사랑했던 연인 에셀에겐 돈 몇 푼으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들을 빼앗고 그녈 버린다.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그는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 왕비를 얻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택한다. 수없이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는다. 마지막 왕국마저 적에게 함락되고, 그는 홀로 남아 그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그린 나이트에게 도망친 이후로 일어난 비극은 전부 선택의 결과이자 책임이란 걸 가웨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주인 잃은 괴물의 폭주로 망가졌고,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어른 가웨인'의 이야기는 실패했다. 쿵! 마침내 가웨인의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간결해 슬픔과 연민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대신 초점을 잃은 그의 동공이 읊조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시 녹색 예배당.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 앞에서 눈을 번쩍 뜬다. 도망친 자의 말로를 보고 온 그는, 망설임 없이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달라진 그의 얼굴. 가웨인은 당당히 그린 나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이제 준비됐다!" <그린 나이트>의 첫 장면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스스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가웨인이 변화한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짓는다. 잘했다 격려까지 한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손에 여전히 들린 도끼. "이제 네 머릴 가르마." 가웨인은 자신의 결함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어리석었던 그가 선택한 결과가 남아있었다. 그린 나이트와의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다. 게임을 끝낼 방법은 성공 아닌 실패, 단 두 가지 옵션뿐이다. 정도란 없는, 상승과 하강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을 책임지는 희극과 비극처럼.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그린 나이트>는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을 찾는 데 성공한 가웨인의 목에 다시금 도끼를 들이밀며 막을 내린다. 가웨인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뗐으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그의 두려움인 그린 나이트에게서 발휘됐다. 녹색 기사는 가웨인이 스스로 극한의 공포심에 휩싸인 채 만들어낸 존재였다. 지금까지 가웨인은 내면의 자아와 싸운 셈이다. 이후로도 그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기에 또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린 나이트 역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기 주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직하게 기다리겠지. 그게 제대로 사는 방식이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은 그의 머리를 불태우며 강력하게 말했다. "이 영화는 왕의 이야기도, 왕을 노래한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그렇다, <그린 나이트>는 왕이 아닌 죽음 앞에 놓인 인간, '가웨인'의 여정을 지켜본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계획되지 않은 일과 새로운 일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지, 선택의 순간마다 그린 나이트를 만났는지, 이후 어떻게 죽음의 선로에서 빠져나와 다시 살아남고 있는지.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자신만의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얼마든지 잔인한 게임을 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나의 진정한 삶이 되고, 나의 유일한 죽음을 안내할 표지판이 된다. <그린 나이트>는 이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한 장면까지 모든 힘을 짜내 완성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혹여라도 철학적이고 난해한 이야기에 파묻힐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이야기를 쏙 빼놓고 봐도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포인트를 무수히 갖고 있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영상미와 장엄한 기운을 내뿜는 음악에만 집중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웨인의 여정에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그의 무용담 곳곳에 뿌려놓은 <그린 나이트>만의 향기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일부로 지나치기도 어려울 거다.)
가웨인의 새로운 선택을 앞둔 채 극장에서 돌아선 순간, 섬뜩함에 사로잡히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자기 내면의 감시자, 그린 나이트와의 만남이 번뜩! 떠오른 것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