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6-16 17:10:45
마지막에야 제자리를 찾은 DCEU의 사모곡
<플래시>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스티스 리그 막내로 궂은일을 도맡은 히어로 '플래시/배리 앨런'(에즈라 밀러). 플래시가 아닌 배리로 살아갈 때 그의 삶은 고달프다.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 중인 아버지의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 하지만 배리는 '브루스 웨인/배트맨'(벤 애플랙)의 도움을 받고도 쉽사리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시간 여행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불행한 가족사를 바로잡기 위해 시간을 역행한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멀티버스에 불시착한 배리는 '조드'(마이클 섀넌)의 침공 때문에 위기에 처한 지구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진다. 이에 배리는 멀티버스의 배리, 나이 들고 은퇴한 ‘배트맨’(마이클 키튼), 크립톤에서 온 '슈퍼걸'(사샤 카예)과 팀을 이뤄 시간과 공간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우주를 구하려 한다.
뻔한 재료로 색다른 맛을 내다
또 하나의 멀티버스, 시간여행 영화가 도착했다. 2013년 <맨 오브 스틸>로 시작을 알린 DCEU(DC Extenede Universe, DC 확장 유니버스)의 14번째이자 마지막 영화 <플래시>다. <플래시>는 DCEU를 마무리하고 제임스 건 주도로 리부트된 DCU(DC Universe, DC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중간 다리다.
근래 들어 멀티버스나 시간여행 영화는 슬슬 지겹다. 단순히 작품 수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주제나 교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생일대의 회한이 남는 순간을 되돌려 조금 더 나은 삶을 만들려 한다. 그 과정에서 멀티버스의 '나'를 만나고 깨달음을 얻는다. 후회하고 가슴 아픈 매 순간이 모여 비로소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따라서 과거를 바꾸는 대신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고.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픽사의 <버즈 라이트이어>, 심지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까지. 위의 운명론적인 주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플래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려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플래시>는 익숙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포장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연출은 플래시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수많은 카메오는 DCEU, 더 나아가서 DC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매력을 스크린에 가득 채웠다. 덕분에 러닝타임 144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설령 개봉 전 평가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히어로 영화로서 최고의 재미를 선사한다.
멀티버스로 써 내려간 사모곡
<플래시>는 가족 영화다. 배리의 활약상을 한바탕 보여준 후, 영화는 곧장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조명한다. 배리는 어릴 때 엄마를 잃었다. 아빠가 스파게티에 쓸 토마토 캔을 사러 나간 사이 엄마가 살해당했다. 이후 아빠는 아내를 죽인 혐의로 수감됐고, 배리는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범죄수사 연구소에 취업하기도 했고, 브루스 웨인의 도움을 받아 아빠의 알리바이가 담긴 CCTV 영상도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배리의 시간 여행은 구슬픈 사모곡이다. 엄마를 살려내서 세 가족이 함께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가 마냥 철없는 멀티버스의 배리에게 화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일분일초라는 걸 알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 만난 엄마에게 안아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는 십수 년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특히 상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 가슴 아프다.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살려냈지만, 자기 때문에 엉망이 된 멀티버스를 마주한 배리. 그는 과거의 필연적인 지점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달라진 과거 때문에 스파게티처럼 엉켜버린 멀티버스를 정리할 방법은 없으니까. "모든 문제에 답이 있지는 않다"던 엄마의 말처럼. 그의 사모곡은 엄마가 죽어야만 하는 역설인 셈이다.
에즈라 밀러를 포기 못한 이유
하지만 배리는 이 역설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멀티버스에서 두 인물을 만난 후에야 가슴 아픈 현실을 인정한다. 우선 그는 능력을 얻기 직전인 18살 배리를 만난다. 두 배리는 함께 다니면서 여러 일을 겪는다. 배리는 플래시의 능력을 잃고, 멀티버스의 배리는 플래시로 각성한다. 히어로 경험은 있지만 능력은 없는 플래시와 능력은 있지만 지식은 전무한 플래시는 그렇게 일종의 버디 무비를 찍는다.
그 과정에서 배리는 한층 성숙해진다. 멀티버스 속 배리는 거울과도 같다. 거울 속 '나'는 거울 앞에 서 있는 나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다. 좌우가 바뀌어 있고, 거울 표면에 의해 형태가 왜곡될 수도 있다. 이처럼 거울에 비친 남 같은 내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던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고 달라진 것처럼.
배리도 마찬가지다. 멀티버스에서 지구의 멸망을 지켜본 배리는 과거를 바꾸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깨닫는다. 반면에 멀티버스의 배리는 같은 상황에서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를 고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배리는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미련 때문에 과거를 놓아주지 못한 자기 모습을 반성한다.
에즈라 밀러의 1인 2역 덕분에 배리의 성장기는 더 설득력 있다. 상대적으로 진중한 배리와 마냥 까불거리는 멀티버스의 배리. 정신적 성장을 이룬 플래시와 아직 미숙한 멀티버스의 플래시. 이 차이를 표정과 눈빛으로 완벽하게 표현한다. 후반부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루밍 범죄 혐의를 비롯해 폭행, 협박 등 여러 혐의를 받아 논란이 되었는데도 워너와 DC가 에즈라 밀러를 포기하지 못한 사정이 이해될 정도다.
플래시와 함께 성장한 DC
배리는 멀티버스에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다. 그는 배리의 아픔을 이해한다. 흡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도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다. 죽은 엄마가 되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범죄자를 때려잡았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엄마를 살려내려는 배리의 용기와 결단력에 감탄하고, 그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배트맨은 배리에게 충고한다. 조드와의 전투 중 부상당해 죽어갈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바꿀 수 없는 사건이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고. 트라우마와 평생 싸웠던 배트맨이기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다. 이처럼 <플래시>는 키튼의 배트맨을 활용해 배리의 성장기를 색다르게 포장하는 데 성공한다.
흥미롭게도 배트맨의 조언은 DCEU, 더 나아가 DC 스스로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DC는 본래 히어로 영화의 명가였다. 1978년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과 1989년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히어로 영화의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다. 물론 그만큼 실패도 많았다. 슈퍼맨과 배트맨 시리즈는 배우 교체와 리부트를 거듭했다. DCEU도 <저스티스 리그>가 실패한 후 표류했다. 결국 반등하지 못하고 10년 만에 문을 닫았다.
<플래시>는 이 모든 성공과 실패, 숱하게 취소된 계획과 기획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수십 년 간 난잡했던 DC의 역사를 화려한 팬서비스로 승화한다. 실제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처럼 취소됐던 시리즈나 흑역사로 기억되던 조지 클루니의 배트맨이 모습을 비춘다. 플래시의 기원을 보여주듯이 DCEU의 첫 작품으로 되돌아가서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이처럼 <플래시>는 DCEU는 물론 DC의 모든 유니버스를 아우르며 DCU의 시작을 준비한다.
훌륭하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플래시>는 개봉 전 평가만큼 압도적인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DC 작품 중에서는 <다크 나이트>에 버금간다거나, 시간 여행이나 멀티버스를 다룬 히어로 영화 중에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만큼 뛰어나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 있다. 성급하게 결말로 나아가는 전개가 발목을 붙잡는다.
일단 배리의 서사에 일관성이 없다. 배리는 다크 플래시를 만났고, 조드 장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위기도 한 번 더 겪었으며, 멀티버스 배트맨의 조언도 들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배리는 어머니를 살리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등 한층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배리의 마지막 모습은 다르다. 그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과거를 다시 한번 건드렸다. 과거는 과거로 둬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했다. 그 결과 또 다른 멀티버스가 생겼고, 배트맨도 바뀌어 버렸다. DCU가 이 결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내적으로만 보면 캐릭터의 서사가 무너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플래시>의 해피 엔딩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새드 엔딩과 대비를 이룬다.
메인 빌런인 다크 플래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다크 플래시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와 플래시의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은 지나치게 간략하다. 다크 플래시는 한순간의 실수로 퇴장한다. 이렇다 할 액션씬이나 설득, 대화 장면도 없다. 굳이 영화 초반부터 복선을 던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정체를 숨기면서 아껴둘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이는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러닝타임이 결코 짧지 않은데도 영화 템포는 점점 빨라진다. 배트맨, 슈퍼걸, 두 플래시로 시점이 나뉘면서 짜임새가 느슨해진다. 멀티버스를 통해 새로운 캐릭터와 예전 캐릭터를 모두 한 데 모으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한 셈이다.
실제로 다른 몇몇 캐릭터도 다크 플래시와 마찬가지로 도구적으로 활용된다. 일례로 조드나 슈퍼걸은 배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기계적인 역할만 수행하고 퇴장한다. 그들은 필연적인 시점이 있으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규칙을 보여주는 각본의 도구로 소모된다.
깔끔한 마무리와 기대되는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시>는 여전히 잘 만든 히어로 영화다. 특히 히어로 영화로서 본분을 다해낸다. 언제나 DCEU의 장점이었던 액션이 어색한 CG도 뚫고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플래시의 속도와 능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엑스맨> 시리즈가 퀵실버를 활용한 듯한 슬로모션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플래시의 빠른 속도를 활용한 액션을 중간에 삽입해 단조롭지 않도록 리듬을 살렸다.
배트맨도 인상적이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활강 장면에서 진가를 보여준다.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육탄전도 늙은 영웅의 복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벤 애플랙의 배트맨도 DCEU에서 처음 등장한 배트포드를 타고 강렬한 추격전을 선보인다. 이에 더해 속도감과 파괴력이 돋보이는 슈퍼걸의 액션도 인상적이다. <맨 오브 스틸> 속 슈퍼맨을 다시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플래시>는 기대 이상의 방식으로 DCEU를 마무리했다. 복잡했던 DC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면서 새로운 미래를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 시리즈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사로잡을 수 있는 볼거리도 아낌없이 펼쳐냈다. 비록 결말은 일말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것> 시리즈를 연출한 안드레스 무시에티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공은 제임스 건에게 넘어갔다. 과연 그가 만들 DCU는 어떨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Acceptable 무난함
시작으로 되돌아가 가슴 벅차게 마무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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