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2024-10-01 17:05:25
[DMZ Docs] 소리없이 나빌레라
영화 <소리없이 나빌레라> 리뷰
음악의 정의는 무엇일까. 음악은 정상 청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청각장애인 무용수 고아라는청음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직업적인 특성으로 인해, ‘듣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듣고자 노력하는’ 위치에 있다. 고도 난청을 가진 그에게 소리의 울림은 미약하게 다가오고, 음악은 춤을 추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로 여겨질 뿐이다.
고아라 무용수는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창피를 당한 후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던 그는 아기를 재우기 위해, 아기와 함께 놀기 위해,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청력의 범주는 다양하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의 범주는 다양하다. 고아라 무용수는 마이크를 들고, 헤드셋을 낀 채로 그의 청력에 음악처럼 들리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춤을 출 때 발로 바닥을쓰는 소리,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가 마이크를 통해 전하는 모든 일상 속 소리들은 음악적 리듬을 가진다. 관객은 고아라 무용수의 삶을 가차이서 조망하고 긴밀하게 소통하며, 그가 표현하는 몸짓에 따른 음악을 상상하게 된다.
고아라 무용수가 준비한 음악은 기존의 정상성의 틀을 깬다. 리듬감을 가지는 단순한 숨 소리에 맞추어그의 온몸은 유연하게 일렁인다. 인간 본연의 소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호흡의 박자는 그가 선택한 음악이다.
춤을 추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던 음악을 새로이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한 단계 성장한다. 음악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정상 청력이 필요하지 않다. 고아라 무용수는 청각장애라는 정체성을 간직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재해석하고, 주체로서 기능한다.
질서 없는 소리가 나열되며 혼란을 주었던 오프닝 시퀀스와는 대조적인 엔딩에서, 온전한 자신만의 음악을 발견한 그의 몸짓은 보다 찬란히 빛난다. 고아라 무용수가 찾은 음악은 그를 한계짓는 것이 아닌, 그의 존재의 가치를 부각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유랑하듯 흐르는 움직임에 청력의 정도는 중요치 않다. 해당 무용은 그와 관객의 감각을 하나되게 묶는다. 함께하는 감각은 공감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입증한다.
2024.09.27 (금) 20:00 메가박스 킨텍스 7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 : 09월 26일 - 10월 02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크리에이터 기자단 씨네랩 정영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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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2021)
* 이 리뷰는 영화 <크루엘라>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크루엘라 (2021) 정보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 (아이, 토냐 연출)
출연: 엠마 스톤, 엠마 톰슨, 마크 스트롱 등
개봉: 5/26
장르: 범죄, 코미디
러닝타임: 134분
디즈니가 재해석한 빌런, 크루엘라
대중적으로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101마리 달마시안> 시리즈에 나오는 사악한 악녀라고 알려져 있다. '글렌 클로즈'가 '크루엘라'를 연기한 실사화 버전이 1996년에 개봉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2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다시 '크루엘라'라는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준 디즈니의 선택은 살짝 의외였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서사에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디즈니는 이미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애니메이션 속 빌런 '말레피센트' 실사화를 통해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성공적인 재해석을 한 전적이 있어 2021년 버전으로 새롭게 그려질 '크루엘라'의 모습도 기대해볼만 했다. 더군다나 크루엘라를 연기하는 배우가 '엠마 스톤'이라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역할이라 캐스팅만으로도 흥분을 주었다.
도둑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크루엘라
'크루엘라'의 러닝타임은 2시간 14분으로 제법 긴 편인데, 주인공의 서사를 꽤나 장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 반반 머리로 남달리 태어나 사나운 성질과 남다른 재능으로 매사 트러블을 일으켰던 '크루엘라/에스텔라(엠마 스톤)'는 학교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퇴학을 당해 집을 떠나 엄마와 런던으로 향하던 도중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로 엄마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한 순간에 고아가 된다. 엄마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리젠트 공원에 홀로 가게 된 그는 도둑질을 하는 친구 '호레이스(폴 윌터 하우저)'와 '재스퍼(조엘 프라이)'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 절친이 되어 능숙한 강도로 성장한다.
크루엘라는 어려서부터 패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디자인 실력은 도둑질에만 쓰이기 무척 아까웠다. 크루엘라의 재능을 높이 산 친구 재스퍼의 도움으로 리버티 백화점에 취직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청소 및 잡무 뿐이다. 우연히 예술성을 뽐낼 기회를 만든 크루엘라는 런던 최고의 패션 브랜드를 가진 '남작 부인(엠마 톰슨)'에게 디자이너로 발탁되고 본격적인 에술 혼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남작부인의 능숙한 직원이 되어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할 때 즈음,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패션에 대한 광기, 화려한 미장센
'크루엘라'의 빌런으로서의 성향을 패션에 대한 광기로 해석한 시각은 상당히 신선한 접근이다. 충분한 서사가 부여되었기 때문이지 패션에 대한 집착을 통해 악행을 저지르는 크루엘라의 행동들은 왠지 모르게 악해 보이지 않고, 이해가 된다. 과격하고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지만, 명분 있는 그녀의 행동에 우리는 악하다는 비난을 가하기 보다는 공감을 할수밖에 없다. <말레피센트>처럼 실사화를 하면서 빌런이었던 캐릭터를 선역에 가까울 정도로 묘사하지 않고, 캐릭터 본래의 성격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 방식도 맘에 들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크루엘라'의 모습을 다룬 작품인만큼 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의 퀄리티가 매우 높고 남작부인을 도발하는 크루엘라의 파격적이고 아티스틱한 의상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패션에 진심인 영화가 이전에 있었던가. 패션과 광기, 일에 대한 열정과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절제 따위 하지 않고 감각적인 미장센과 함께 극한으로 표출하려 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카메라 무빙 역시 일반적인 기법을 따르지 않고, 현란한 방식들을 사용하며 런웨이를 보는 듯한 기분, 패션쇼를 관람하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사이, 엠마 스톤의 아수라 백작 같은 연기
'엠마 스톤'이 '크루엘라' 역할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원작의 캐릭터만을 생각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견해였고, '에바 그린'과 같은 배우들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엠마 스톤'이 연기한 '크루엘라'는 원작의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인물이고, 그만의 색깔로 악녀로만 여겨졌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극중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두 명의 인격을 연기하는 엠마 스톤의 연기력을 가히 압도적이다. 미세한 표정 연기와 목소리의 떨림, 걸음걸이마저 차이를 두며 인물 스스로가 부여한 2명의 인격체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표현한다. 특히 크루엘라를 연기할 때의 끈적한 악센트와 광기 어린 눈빛, 시선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가히 압도적이다. 자아도취적 인물로 그려진 캐릭터의 막장성은 부자연스러운 과장성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크루엘라의 강렬함 때문에 인물의 본캐인 '에스텔라'의 존재감이 묻히는가? 이 또한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자극적인 크루엘라의 인격 때문에 인간미가 담긴 에스텔라의 성정이 상대적으로 무난해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광기와 분노 이외의 감정을 표출하는 에스텔라의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히 부모의 원수에게 모든 것을 잃은 채 분수 앞에서 눈물과 함께 쏟아내는 독백씬은 연기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꿈에 부푼 붉은 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에서는 '이지 에이'에서의 매력적인 풋풋함이 느껴지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사실에 직면하고 분노하며 빌런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략을 세우는 과정에서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의 똘끼가 비춰진다. 그동안 차근차근 좋은 작품들로 출중한 연기력을 쌓아온 엠마 스톤이었기에 '크루엘라/에스텔라'라는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던 것이다.
엠마 VS 엠마, 불꽃 튀는 연기 혈전
'크루엘라'에는 '엠마 스톤'이 아닌 또 한 명의 엠마, '엠마 톰슨'이 빌런으로 등장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함과 잔혹함을 가졌지만 패션에 대한 욕망만은 누구보다 큰 '남작부인'을 연기하며 크루엘라와 날선 대립각을 세운다. 이 캐릭터는 주인공의 각성을 불러내는 빌런으로서의 역할이 주된 포인트지만, 극 초반까지는 크루엘라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꿈을 실현시켜주는 멘토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화려한 미장센과 서스펜스가 덜한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남작부인'과 '에스텔라'가 형성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관계 또한 상당한 재미를 준다.
크루엘라의 카리스마가 광기와 저돌적인 태도에서 나온다면, 남작부인의 카리스마는 냉혹함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죽음 앞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잔혹성을 지닌 인물을 '엠마 톰슨'이 훌륭하게 연기하며 뒷받침해주었기에 '크루엘라'의 캐릭터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두 캐릭터의 존재감이 워낙 세다 보니 나름 괜찮은 캐릭터임에도 조연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이 함께 나오는 장면들이 가장 재밌고, 투샷이 잡힐 때의 몰입도가 굉장하다.
캐릭터의 완벽함만으로 채우지 못한 빈틈
의상, 연기력, 미장센, 비주얼, 캐릭터까지 모두 완벽하지만 스토리의 정교한 짜임새 면에서는 부족하다. 캐릭터의 서사에 지나칠 정도의 완벽함을 부여하다 보니 범죄를 다루는 장면들의 현실감과 스릴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애초에 '서스펜스'를 보여주기 위한 탄탄한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디즈니 원작의 캐릭터를 재해석하는데만 힘을 쓰다보니 나타나게 된 약점이라고 본다. 동일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허술한 작전을 펼치는데, 경찰은 이들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계속 당하는데도 알아채는 사람은 없다. 비주얼적으로 보여줄 장면들이 많다 보니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게 퍽 느껴진다. 12세 관람가이다보니 인물들의 잔혹성이나 빌런으로서의 악행 역시 수위가 낮고, 잔혹동화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제대로 된 수위로 <조커>이상의 빌런 서사를 꾸렸으면 좋았을 듯 한데, 디즈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던 방안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현란한 삽입곡의 향연도 피로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분명 연출의 긴박감과 스타일리쉬함을 강조하는 효과는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산만하고 정신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캐릭터의 연기는 과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나 연출적인 부분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조금씩 있었다. 물론, 감상을 해칠 정도로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흠이 있기는 하지만 <크루엘라>의 캐릭터 구성은 완벽했고, 배우들의 연기력과 화려한 비주얼, 그리고 감각적인 연출로 디즈니 실사화의 성공작을 새로 쓰게 됐다. 흥행 하게 된다면, 속편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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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 | 처음 보면 오컬트, 끝까지 보면 가족 드라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임 교수직을 노리는 대학교 시간강사 '윤서하'(김현주). 부려먹기만 하고 교수직을 확답하지 않는 담당 교수에게 치이고, 요가 학원 강사인 남편 '재석'(박성훈)의 외도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경찰 전화가 걸려온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의 소유였던 선산이 그녀에게 상속될 예정이라고.
얼떨결에 작은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선산 처리를 고민하는 그녀. 그런 그녀 앞에 불길한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이복동생 '김영호'(류경수)가 갑자기 등장하고, 남편이 총에 맞아 사망하며, 그녀의 아파트 현관문이 닭 피로 도배된 것. 사건을 맡은 담당 경찰 '최성준'(박희순)과 '박상민'(박병은)이 확실한 수사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자, 그녀는 직접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베일에 감춰진 진실은 상상도 못 한 채.
일보전진과 일보후퇴
<부산행>, <반도>, <염력>, 그리고 <정이>. 연상호 감독의 장편 영화를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애와 신파의 존재다. <부산행>만 해도 호불호가 나뉘는 수준이었지만, <염력>과 <반도>를 기점으로는 신파가 극의 개연성과 몰입을 저해한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좀비, 히어로, 디스토피아, SF 등 각 장르의 고유한 재미를 방해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반면에 영화가 아닌 작품이면 위의 비판을 피해 가는 경우가 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에서 연상호 감독은 신파에 기대지 않았다. 신의 심판이라는 초자연적 소재를 내세워 인간의 욕망과 종교의 이면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집중하며 호평받았다.
연상호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은 <선산>은 반복되는 비판에서 벗어나려 한다. 가족애와 신파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오컬트라는 새로운 성공 공식을 앞세웠다. 또 장르물에 신파를 더하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 결과 신파에 기반한 가족 드라마에 오컬트와 스릴러적 요소를 곁들여졌다. 그러나 <선산>의 변화는 제자리걸음이다. 이번에도 장르적 쾌감을 살리지 못한 나머지, 일보 전진이 일보 후퇴에 가려지고 말았다.
현대 사회 속 선산과 가족
제목만 봐도 <선산>은 가족 드라마다. 선산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자연히 일련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주인공이 선산을 물려받고, 그에 반발하는 가족과 외부인이 나타나며, 그 사이에서 숨겨진 가족사가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선산 때문에 추진 못하는 부동산 개발 사업이 껴 있으면 금상첨화다.
<선산>도 마찬가지다. 위의 전개가 모두 들어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선산'이라는 어휘의 특성을 살려 약간의 변주를 주는 데 성공했다. 선산은 사실 나날이 낯설어지는 단어다. 가족 형태의 변화 때문이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1인 가족으로 가족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혈연의 중요성은 낮아진다. 그 과정에서 장례 방식도 바뀌고, 선산에 매장할 일이 줄어들면 단어 자체를 입 밖으로 꺼낼 일도 없어진다.
주인공 윤서하는 이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에게 가족은 큰 의미가 없다. 남편 재석은 외도 중이고, 아버지 윤명호는 딸이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작은아버지 윤명길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서하는 작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도 놀라지 않는다. 선산을 상속받는다는 소식을 들어도 선산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누구에게 얼마에 팔아야 할지 궁리할 뿐이다.
진짜 가족을 찾는 여정
<선산>은 윤서하와 180도로 다른 인물을 내세워 선산을 둘러싼 갈등을 부각한다. 그녀의 반대편에는 이복동생 김영호가 위치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졌고, 존재가 지워진 채로 지냈다. 이복 누나가 자기 존재를 전혀 모르고, 경찰조차 그를 선산의 상속자로 고려조차 안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선산에 오히려 더 집착하고, 윤서하를 위협한다. 그에게 선산은 온전한 가족의 일원으로 마침내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선산>은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선산을 두고 벌이는 암투를 담아낸 드라마가 아니다. 그보다는 선산을 지렛대 삼아 가족의 공동체적 의미를 고찰하려는 이야기에 가깝다. 가족을 대하는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인 태도의 충돌을 선산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는 두 이복 남매와는 접점이 없는 최성준의 가족 이야기에 꽤 많은 분량이 부여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일에 치여서 가족에 충실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가 갑작스레 쓰러져서 죽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했고, 비극의 원인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그 결과 아들은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했고, 아버지는 아들과 의절하며 가족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성준은 윤서하 사건을 수사하면서 변한다. 가족 관계에 완전히 무관심한 윤서하, 이복 누나와 선산에게 집착하는 김영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들과의 관계를 되짚는다. 현대적인 태도와 전통적 관점 사이에서 어떻게 가족 관계를 재건할지, 한번 끊어 버렸던 혈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한다. 이는 윤서하가 종국에 김영호와 연락을 안 한다고 해서 관계를 아예 끊은 건 아니라고 말하는 대사와도 상통하는 모습이다.
내용과 장르의 괴리
이렇게만 보면 <선산>은 가족 드라마로서 흥미로운 작품 같다. 확실한 지향점과 메시지를 갖췄으므로. 반면에 장르적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포스터나 예고편을 보고 키운 기대를 드라마가 배신하기 때문. <선산>은 중반부까지 오컬트 분위기를 유지한다. 김영호가 무언가에 빙의된 건지, 아니면 무당에게 조종당하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삼재 부적, 굿하는 스님의 존재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철저히 숨겼던 윤서하와 김영호의 진짜 관계가 비로소 수면 위에 올라오면서 오컬트 분위기가 일시에 가족 드라마, 더 나아가서는 막장 드라마로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암시나 복선도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선산>이 일반적인 스릴러라면 이는 나름 효과적인 반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산>이 애초에 오컬트 작품으로 포지셔닝했기에 이 반전은 악수로 작용한다. 오컬트 요소를 배제하는 순간 평범한 한국 드라마 중 하나일 뿐이니까. 초자연적 존재의 정체를 헷갈리게 하며 마지막까지 서스펜스를 유지한 <곡성>이나 <잠> 등의 작품과 다른 길을 간 대가를 치르고 만다.
선택과 집중의 부재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만듦새에도 군더더기가 있다. 윤서하가 대학교 시간강사로서 난관에 빠지고, 최성준과 박상민의 갈등을 빚는 플롯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서하를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도록 유도하고, 최성준의 가족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초반부에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활용하면 충분할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이 플롯은 중요도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 중후반부에도 거듭 등장하면서 존재감이 커지고, 그 결과 중심 갈등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더해 설명조 대사도 너무 많다. 보여주기만 해도 되는 순간에 굳이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한다. 자연히 흐름은 순간적으로 끊기고, 극은 늘어진다.
그 결과 윤상호 감독의 일보 전진은 제자리걸음으로 귀결된다. 장르물의 본질적인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함정에 <선산>이 또 한 번 빠져 버렸기 때문. 단순한 신파를 깊이 있는 가족 드라마로 풀어내고, 초자연적 소재라는 성공 공식을 버무리는 변화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Poor 형편없음
오컬트향 1% 첨가한 막장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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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필 한 여자를 사랑하다니, 그것도 이토록 격렬하게!
8★/10★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친밀성‧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극적으로 만드는 데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 중 하나다. 상류층 중년 여인의 마음에 불어닥친 고요한 폭풍을 펼쳐내는 〈아이 엠 러브〉(2011),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 사회가 금지하는 사랑을 ‘식인’에 빗댄 충격적이고도 강렬한 러브 스토리 〈본즈 앤 올〉(2022) 등등. 그가 야심 차게 도전한 공포영화 〈서스페리아〉(2019)가 영 호불호가 갈렸다는 점을 복기해보면, 아무래도 감독의 재능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췄을 때 극대화되는 듯하다. 〈챌린저스〉는 이를 또다시 입증한다. 〈챌린저스〉를 본 관객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감독님, 제발 앞으로는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이런 영화만 만들어주세요!”
여기 테니스 선수 아트가 있다. 아트는 ‘위대한 선수’는 아니지만 ‘훌륭한 선수’ 축에는 든다. US 오픈 우승을 노리고 있고, 의류 브랜드에서 테니스복을 협찬받으며, 자동차 광고를 찍을 정도의 선수 말이다. 아트는 US 오픈 도전 직전, 최근 좋지 않은 성적으로 하락한 자존감 회복을 위해 하부 리그에 참석한 상태다. 만약 이 대회에서 우승해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다면 US 오픈 우승이라는 목표에 더한층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데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대회에서 뜻밖의 상대를 만난다. 패트릭이다. 모텔비를 결제할 돈도 없어 폐차 직전의 허름한 차에서 쪽잠 잔 후 대회에 참가한 그는 US 오픈은 고사하고 선수 랭킹도 처참한 별 볼 일 없는 선수다.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반전의 기회도 거의 없다. 그런데 경기가 묘하게 흐른다. 아트는 내내 예민한 채 긴장한 표정인데 되레 패트릭은 여유롭다. 심지어는 아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이 둘에게는 테니스에 한정되지 않는 오랜 인연이 있다. 어쩌면 아련한 우정이고 어쩌면 지독한 악연이다. 둘은 필생의 라이벌이다. 테니스에서도, 사랑에서도.
태초에 타시가 있었다. 유망한 테니스 선수이자 퀸카인 타시는 청소년 시절 같은 대회에 참석한 아트와 패트릭을 단번에 매혹한다. 타시 앞에서 아트와 패트릭은 퀸카와 뭐라도 해보고 싶은 얼빠진 십 대 소년일 뿐이다. 문제는 타시가 폴리아모리가 아니라면, 두 사람 중 한 명은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얼빠진 두 소년과 달리 타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정반대다. 훗날 부상으로 프로 데뷔 직전 선수 생활을 끝내고 코치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전까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실력과 멘탈을 갖춰 아트와 패트릭이 넘보지도 못할 레벨의 테니스 유망주였다. 테니스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타시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들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 묻는 애타는 두 남자에게 답한다. 내일 시합에서 이기는 남자를 고르겠다고. 테니스 랠리가 사랑의 랠리로 확장된다. 스포츠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스포츠가 된다. 절대로 지면 안 되는 게임의 시작이었다.
그 후 10여 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아트는 타시의 남편이자 그녀가 코칭하는 선수가 되었다. 타시는 패트릭에 비해 잠재력과 실력 모두 떨어지던 아트를 ‘훌륭한 선수’로 키워냈다. 10여 년 전의 시합에서 패트릭이 승리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그렇다. 과거의 타시는 연인으로 패트릭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지금 아트가 타시의 남편이고, 그저 ‘구남친’일 뿐인 패트릭이 타시에게 능글맞게 굴며 아트를 조롱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를 직접 봐야만 한다. 구구절절 줄거리 설명으로 10년간 불꽃 튀었던 세 사람의 관계 역동을 요약하기는 불가능할 테니까.
영화는 연애에서의 친밀성과 남성성 문제, 여성의 주체성을 넘나들며 아찔한 랠리를 이어간다. 그것도 격렬한 시합에서 통통 튀며 코트를 오가는 테니스공의 속도로. 현재 펼쳐지는 시합과 십수 년간 세 사람이 겪어온 과거를 교차하며 펼쳐내는 숨 막히는 랠리는 도파민을 폭발시킨다. 테니스, 사랑의 승자가 누구일지를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두 남자는 타시가 벌여놓은 사랑/테니스의 판 안에서 질투심과 열등감을 동력 삼아 움직이지만 종종 판을 뒤집어 게임의 주인이 되고, 한 여자는 능숙하게 두 남자를 주무르며 사랑/테니스에서 목표한 바를 이루지만 예측을 불허하는 욕망의 방향성에 종종 무릎 꿇는다.
이 최종 승부에서 아트와 패트릭은 이제 타시와 테니스를 두고 벌이는 싸움의 결판을 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줄곧 타시가 이들 관계를 주도해왔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두 남자는 지금껏 타시의 장기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생애 단 한 번 ‘남자’가 되어 타시에게 스스로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겉보기에는 번드르르하지만 속으로는 늘 타시가 떠날까 전전긍긍하는 아트와 유망주 시절 이후 모든 면에서 실패의 연속인 삶이었지만 성장하지 못한 채 소년 상태에 머무른다는 바로 그 이유로 종종 매력을 뿜어내는 패트릭. 누가 진짜 타시에게 어울리는 남자이고, 코칭받을 만한 테니스 선수인지 이 한 게임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
테니스 게임의 박진감을 돋보이게 하는 독특한 카메라 앵글과 아드레날린 솟구치게 하는 음악, 질척거리는 치정의 감정이 이렇게 다이내믹했던가 탄복하게 만드는 연출이 삼박자를 이루는 이 영화는 두고두고 반복해서 보고 싶을 만큼의 재미와 매력을 갖췄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수작을 볼 때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감정의 역학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에 푹 빠지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챌린저스〉를 계기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재능을 추앙하기로 했다. 그는 이전부터 뛰어난 감독이었지만 보통 자기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주제에 진지하고 느린 속도로 접근했다. 이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가 〈챌린저스〉에서 지금껏 다뤄온 주제를 스포츠 영화의 박진감을 더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데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성공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자기 주제를 눈에 띄는 새로운 스타일로 그려내는 일, 결코 쉽지 않다. 그의 재능을 추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감독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심지어 〈서스페리아〉 같은 ‘외도’도 눈감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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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 가정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정착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서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해외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이민자의 삶을 택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 조금씩 수입이 괜찮은 일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 겨우 자리잡을 수 있을 때 즘에 자신의 모습을 보면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은 이민1세대로 타국에 살아남아 2세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선사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처음 이민을 갔던 부모세대들은 그들 자신을 보살피느라 고향에 남은 가족들을 세심히 살피지는 못한다. 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 하지만 먼 거리와 당장 해결해야 하는 생계문제 때문에 긴 시간 방문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또한 그들의 자녀들을 챙기는 시간까지 더하면 그들이 느끼는 고향의 거리감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이민간 나라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세대 보다는 좀 더 적응이 빠르지만 그들의 삶 내내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 사람의 자녀라면 그는 한국사람 일까, 미국 사람일까. 어쩌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한번즘은 고민하고 있을 질문이다.
미국내 중국계 이민자 빌리 가족의 이야기
영화 <페어웰>은 미국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빌리(아콰피나)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빌리는 아빠(트지마)와 엄마(다이애나 린)과 함께 뉴욕에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직 완전한 독립 생활을 하지 못하는 빌리지만 중국에 있는 할머니(자오 슈젠)와 통화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위로 받으며 기운을 내고 생활해 가던 빌리는 할머니가 폐암으로 몇 개월 내에 돌아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할머니가 금방 돌아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머니 본인에게는 하지 못한다. 할머니 외의 모든 가족들은 죽음의 순간 직전까지 할머니에게 비밀을 말하지 않기로 한다. 영화는 이 상황에서 가족들과 빌리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빌리의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지만 큰 아들은 일본으로, 작은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따로 살고 있다. 자식들을 해외로 보내고 20여년이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는 그는 자신의 형제와 친척들과 교류하고, 또 해외의 손주들에게 전화하면서 그 외로움을 달랜다. 꽤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가 비추는 할머니의 모습은 시종일관 밝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이 그동안의 외로움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가족들이 중국으로 돌아와 모이게 된 공식적인 이유는 큰 아들의 아들 즉, 할머니의 손자가 결혼식을 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할머니가 있는 중국에서 하게 되면서 20여년 동안 한 자리에 모이지 못했던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결혼식은 아주 기쁜 일이지만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의 표정은 아주 어둡다. 할머니에게는 그 결혼식이 정말로 축하하는 집안의 경사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환송회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대조되는 모습 자체가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 만은 않는다. 그 행사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합쳐져 따뜻함과 미소로 돌아온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을 다루지만 시종일관 따뜻함을 유지한다.
이민자 2세 빌리가 겪는 정체성 혼란
빌리는 할머니와 20여년을 떨어져 살았지만 그에게 할머니는 꽤 소중한 존재다. 늘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할머니가 곧 돌아가신다는 말을 들은 빌리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단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빌리의 모습은 그가 중국에 있는 가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빌리는 이민자 2세대로써 미국에서조차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이 중국 사람인지 아니면 미국 사람인지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또한 빌리의 아버지 세대도 이런 혼란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 식구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하고 있는 중간, 누군가 묻는다. "중국 사람이에요? 아니면 미국 사람이에요?". 빌리의 큰 아빠는 자신은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지만, 빌리의 아빠는 자신은 미국 여권을 들고 다니므로 미국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고국에서 오랜 시간 떨어져 살게 된 이민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주변인의 태도도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다. 빌리가 할머니 댁 근처 호텔로 가서 자신의 방으로 갈 때, 짐을 들어주던 직원이 묻는다. "중국이 더 좋아요? 미국이 더 좋아요?". 이 단순한 질문을 빌리는 회피하려 한다. 사실 주변인의 시선에서는 이 질문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빌리에게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빌리는 중국인이기도 하지만, 미국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직원의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과 동일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자들에게는 고국도 소중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인 국가도 소중하다. 어느 것을 선택해 선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는 그런 상황들을 작은 에피소드 형태로 보여주며 그들이 항상 처하게 되는 난처한 위치를 관객에게 전한다.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정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빌리
영화는 이런 이민자들의 혼란스런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분명한 한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가족이다. 빌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지만 그의 할머니에게는 빌리가 미국 여권을 가졌는지 중국 여권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소중한 손녀이고 가족일뿐이다. 할머니는 영화 내내 빌리를 하나의 가족으로 대한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옆에서 다른 식구들의 밥을 챙기고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한다. 가족 간 티격태격 하는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따뜻한 말로 각자를 설득해 나간다. 이것이 영화 <페어웰>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정서다.
사실 누군가 죽을 병에 걸리면 당사자에게 말하지 않는 행위는 전형적인 동양 정서다. 그것도 아주 구세대의 정서라고 볼 수 도 있다. 물론 지역이나 가족의 특성에 따라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곳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페어웰> 안에서는 이것은 꽤 중요한 정서로 인식된다. 그래서 빌리의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차마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냈던 빌리는 그나마 가족 중 미국적인 정서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계속 할머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부모님과 다른 가족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해나간다. 하지만 가족 그리고 할머니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 역시 가족의 전통대로 할머니에게 말하지 않는 결정을 한다. 그렇게 빌리도 그 가족의 일원으로 같은 결정을 내린다.
영화 <페어웰>은 감독인 룰루 왕의 개인적 가족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감독 자신이 중국계 미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왔고, 중국에도 친척들이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영화적 감성을 넣어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완성하였다. 또한 주인공 빌리 역을 맡은 배우 아콰피나는 과거에는 웃기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해 왔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절제되고 슬픔을 억누르는 감성적인 연기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영화는 무엇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 가정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나라에서만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민자 가정의 모습이 어떤지 알고 싶은 관객들이나, 또 가족 내 이민자가 있는 관객이라면 공감하며 볼 수 있는 따뜻한 영화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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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웰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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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로맨스 없이도 로맨틱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배유람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2023년 개봉작 중 입소문으로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역시나 <킬링 로맨스> 아닐까. “재미있겠네. 다음에 봐야지…” 정도로 가볍게 바라보고 있던 이 영화는 극단의 호불호 후기와, 해탈한 듯한 배우들의 인터뷰, 무대 인사 후기까지 죄다 재미있었다. 이제 영화만 재미있으면 되는데. 나는 <킬링 로맨스>를 보기 전에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부터 보았다. 이십대 초반 아직 풋풋하던 내가 극장에서 보기엔 너무… 포스터가 이상해 보였던 작품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고 생각보다 웃겼으며 생각보다 뇌리에 남았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무반주 음악에 흠… 하핫… 핫초ㅑ… 하며 뻘쭘한 춤을 추던 배우 오정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버렸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웃기겠군! 좋겠군! 기대하며 <킬링 로맨스>를 보았다. 재미있었고 웃겼고 좋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영화의 어느 한 구석이 나의 오타쿠 감성을 자극하고 말았으니… 나는 감동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팬과 스타, 로맨스 없이 로맨틱한 그 관계에 대하여.
#1. 브리트니 스피어스 <Lucky>
태초에 “She was everywhere”였던 누군가가 있었다.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 그를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고 그만큼 오해와 편견에 빛을 잃기도 쉬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노래 가사처럼, 그토록 사랑을 받는 스타는 밤에 혼자 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센세이션이 저물고, 세상은 “사랑”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여래(이하늬 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브리트니의 노래 가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수한 말, 쏟아지던 조롱과 비슷한.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HOT의 <행복> 말이다.
기묘한 마이페이스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기세에 눌리기 쉽다. 마치 괴한을 쫓던 그의 “powerful punch”처럼. 그러나 비대한 자의식에 자리를 내어주느라 상대의 자아에는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의 언어와 행복의 노래를 가장한다 해도. 이미 세간은 이 가장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담아낸 지 오래다.
#2. HOT의 <행복>과 레드벨벳의 <행복>
조나단의 입버릇은 ‘완성’이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프레임 속 여래의 미소는 랄라텐 광고 속의 미소 반만큼도 살아있지 않다. 옆집 사수생 범우에게 받아 든 랄라텐을 예의 실력으로 순식간에 마셔버린 다음 미소를 짓는 여래는, 랄라텐 마시는 속도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연예인인데 말이다. 그는 조나단의, 조나단을 위한, 조나단에 의한 조나단 월드에 갇혀 있다.
조나단이 귤을 쥐는 순간, 이 영화에 귤이 처음 등장한 순간, 아직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소름이 돋았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폭력의 수단이 무엇이든 폭력은 폭력이다. 뭐든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 폭력성이다. 새콤달콤한 귤에 죄가 없다고 귤을 이용한 폭력이 죄 아닐 리 없을 것이다.
수단에 감정 이입하는 건 모두 틀렸다. 폭력의 수단뿐 아니라 행복의 수단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노래는 새로 부르면 된다. 레드벨벳의 <행복>을 불러도 되는 거고, HOT 노래를 NCT가 리메이크할 수도 있는 거고요. (참고로 그 곡은 행복이 아니라 <캔디>이며, 공명의 동생 도영은 거기 없었지만… 이선균 씨 참고 바랍니다.) 게다가 잘 들어 보면 여래의 필모그래피에는 이미 <행복>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다. 수단은 바꿔치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칸트처럼 말해 보자.
#3. 에픽하이 <fan> 대신 자우림의 <fan>
가스라이팅 앞에 기꺼이 “bad girl”이 되겠다 일갈하고, <제발>을 부르며 일어선 여래의 분연한 얼굴은 분명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그 덕분에 방범등은 꺼지는 순간 축포가 되고, 바로 그 순간 달은 가득 차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계속 주목하게 된 건 여래와 범우 사이의 마음이었다. 7년째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로 자기 삶을 응원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가. 비록 범우는 여래의 소원을 척척 이루어 주지도, 여래와 같은 마음으로 손발을 척척 맞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래가 돌아갈 과거가 다시 여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런 범우가 영화 속에서 불가능을 넘어 소통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라는 점 또한 괜스레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런 목소리라면 닿을 것이다. 여래에게 닿았듯이. 진심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했으나 끝내 대중과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어떤 이들에게도.
세상에는 범우의 다락방 같은 방이 얼마나 많을까. 부디 거기서 울려 퍼지는 팬의 노래가 에픽하이의 곡보다는 자우림의 곡에 더 가까웠으면 한다. 가질 수가 없는 미친 사랑을 괴로워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더 행복하니까.
#4. 그리고 어느 팬에게 남은 말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오래오래, 시간을 따라 함께 기쁘게 뛰어보자고. 땀 나고 타조 깃털 휘날리는 길이더라도, 같이 뛰어가고 싶다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노래를 부르고(“누나 왜 노래를…”), 거기서 함께 힘을 얻으면서 가보자고. 무지하게 겁나도 끝까지. 그렇게.
나는 당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세월 따라 더해지는 표정, 그런 것들을 오래 보고 싶다고. 그런 모습이 좋다고. 그냥 이 작업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즐거운 것이었으면 한다고.
로맨스가 아니어도 충분히 로맨틱한, 어떤 행복이라고.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7 한국만화박물관 (상영코드 337)
7월 5일 19:30-21:17 CGV소풍 4관 (상영코드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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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 감독의 새로운 시도, 관객에겐 이질적인 시도
다시 또 혼자
뚜벅뚜벅 걷는 길. 수혁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정확히 딱 10년 만에 나왔다. 만기출소일. 누군가가 두부를 들고 교도소 입구 기다렸으면 했지만 수혁에게 혼자는 익숙하다. 가족? 딱히 없다. 조직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건 쓸쓸한 수혁 그 자체였다. 혼자 차를 탄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질렸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가는 수혁.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수혁에게 민서는 냉담하다.
민서의 냉담한 반응은 당연하다. 갑자기 민서의 곁을 떠났던 수혁.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수혁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수혁을 어떤 사람에게 데려가는 민서. 민서와 수혁에겐 딸이 있었다. 발레를 배우고 있는 인비. 수혁에게 많은 것이 떠나갔지만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인비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됐다 싶으면 돌아와” 지금 당장 수혁이가 딸 인비에게 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조금씩 시작하면 되겠지. 평범한 삶을 다시 꿈꾸는 수혁.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전에 일했던 조직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과연 수혁은 응국과 성준을 피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난 응원했어
지금의 충무로를 생각할 때 ‘정우성’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 과소평가 된 감이 있다. <비트>라는 영화로 일약 청춘스타로 등극한 정우성. 지난 몇 년 동안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해사하게 빛나던 청춘이었다. 정우성이 갖고 있는 청춘스타로서의 카리스마는 많은 작품에서 시너지를 냈다. 이 청춘스타로서의 이미지가 데뷔 이후부터 꾸준했던 탓에 이 배우를 두고 연기력 논란이 일부 있었다. 실제로 정우성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쉬웠던 작품이 몇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수 감독의 <무사> 같은 영화를 보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톤이 변화가 없다. 캐릭터의 입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아쉬운 퍼포먼스였다. 비교적 최신작인 <아수라>에서는 욕하는 대사가 많았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 배우가 나쁘지 않은 감정연기를 보여주는 것과는 별개로 욕설 대사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후에 <증인>이나 <헌트>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긴 했다. 그동안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액션 연기만 뛰어나지 예술가로서, 연기자로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 많았다. 일례로 <증인>에서의 변호사 연기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으로 수상한 바가 있다. <아수라>에서도 이야기의 템포를 황정민, 곽도원 두 배우가 끌고 간다. 광기 어린 에너지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아수라>. 두 베테랑에 밀리지 않게 한도경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욕설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오히려 그 영화의 톤 앤 매너에 어울렸다. ‘강철비’ 시리즈에서의 연기는 두 캐릭터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어디에 방점을 둬야 할지를 분명히 조준한 퍼포먼스였다. 정우성 배우는 최민식, 송강호 배우처럼 화려하게 테크니컬 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객관적인 능력치가 있어서 그걸 매 작품마다 일정치만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정우성 배우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가장 뛰어난 액션연기로, 또 마스크로 소화한다. 이런 점에서 정우성 배우는 좋은 배우다. 최근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헌트>에서 연기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이 정우성 배우가 이번 작에서는 연출을 맡았다. 정우성 배우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분이 오래전부터 연출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감독 정우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정재’의 <헌트>다. 이정재 감독이 처음 메가폰을 잡아 칸에 초청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도 (글쓴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말고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뚜껑을 열어본 <헌트>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르적으로 피 말리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헌트>가 손익분기를 넘김에 따라 다음 해에 <보호자>가 개봉한다는 사실에 시선이 집중됐다. 정우성 감독이 그 나름대로 만들 액션스타로서의 장르물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유수의 국제문화제에 초청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정우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캐릭터들의 퍼포먼스도 훌륭했다. 그에 상응하는 단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이 영화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다. 일반적으로 빌런 vs 주인공의 대결구도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한 명의 주인공이 나머지 악당 무리를 상대한다. 이 대결구도는 지난 5월에 개봉했던 <범죄도시 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마석도와 주성철, 리키가 각자 대립하며 극에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도 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만 다른 빌런들도 그에 상응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린 고블린’이 영화의 메인 빌런이면서 ‘닥터 옥토퍼스’가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극의 이야기를 이끄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범죄도시 3>이 취했던 연출 방식과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주인공 수혁과 대립하는 빌런은 네 명이다. 우진/응국/진아/성준이다. 이 네 명의 캐릭터들은 영화에서 나름의 입체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치고받고 갈등도 일으키며 이야기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이 빌런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켜 캐릭터에 개성이 분명하다는 점은 영화의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어디서 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단점처럼 느껴진다. 캐릭터를 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응국은 ‘끝판왕’, 성준은 자격지심, 진아는 외유내강, 우진은 광기다. 각자 다 다른 톤으로 연기한다. 이 각기 다른 개성들은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봤던 것들이다. 응국과 성준은 <아수라>에서, 진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감시자들>에서, 우진은 <태양은 없다>에서다. 이 위에 나왔던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내면 묘사가 본작에 이어진다. <헌트>가 견지한 처절함이 이야기의 개성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기원과 결말이 어디에 향할지 예상이 된다는 점은 신선하지 않은 영화 대사들 덕에 더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 것 같아’라고 예상하게 되는데, 타율이 낮지 않다. 이렇게 인물이 핵심이 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이야기를 이끌어야 할 캐릭터들이 식상해진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누수가 생기는 이유가 된다.
액션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로서 장르에 충실한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이자 누아르영화다. 후자 ‘누아르영화’적인 측면은 박성웅 배우가 제 몫을 해 장르 구색을 맞춘다. 누아르영화 특유의 끈적하지만 처절한 분위기가 작품 내면에 잘 깔려있다. 더 큰 문제는 무려 정우성이라는 액션스타가 주인공이자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장르적인 쾌감이 덜하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 자체의 액션 시퀀스들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장면 자체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다. 하지만 이 장소의 특성과 이 도구를 활용했다는 점이나 이후 인물 대 인물의 액션신은 충분히 영화 내적으로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이 액션이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에서 이 액션 신들을 장르로서 보여줘야 하니까, 숙제로 풀어야 하니까 넣었다. 똑같이 정우성 배우가 출연한 <헌트>에서 5 공화국 시절 자유에 대한 갈망을 처절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박력이 극의 서스펜스가 된다는 점이 대비되니 더 단점으로 느껴진다. 액션은 좋다. 그런데 ‘액션 만’ 좋다. 이 예술은 서사라는 영화라는 종합예술이다.
또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신을 보면 이 작품의 기획의도가 궁금해진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기대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쓴다면 후반부 전개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시퀀스들의 구성이 영화 전체적인 흐름과 어긋난다. 영화 전체적으로 누아르, 액션물이라고 초반부부터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적어도 그대로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전개 흐름이 이 그대로라면 이 영화가 굳이 주인공이 수혁일 이유가 없다. 반대로 우진-진아 커플이 광기에 찬 인물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응국 캐릭터는 영화에서 이렇다 할 위기를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구멍을 각본 스스로가 이미 만들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단순히 몇 이미지만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액션물로 기획됐다면 감독님의 판단 착오라고 보인다. 진부한 이야기가 후반부액션에 힘이 들어가면 분명히 영화가 가진 장점이 됐을 것이다. 영화의 기획력에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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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 이 영상을 보셔야 예고편 이해가 100% 됩니다ㅣEBSㅣDUNEㅣ티모시 샬라메ㅣ듄 예고편ㅣ워너브라더스ㅣ드니 빌뇌브
? '듄(DUNE)' 영화 예고편 분석 및 원작소설 / 스토리 요약정리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듄 #듄영화예고편 #듄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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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하인드 더 트리> 메인 예고편
절대로 뒤돌아 보지 말것!
커플인 에이미와 제이는 북인도로 함께 여행을 떠나 즐거운 휴가를 보낸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제이는 아름다운 숲속 깊은 곳에서 에이미에게 프러포즈를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후 리조트로 돌아가던 두 사람은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가 현지 주민들이 아이를 상대로 구마 의식을 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두 사람은 좁은 곳에 갇혀 있는 아이를 꺼내 몰래 리조트로 데려오지만 아이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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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문자> 예고편
27살의 일리야 고류노프는 감옥에 수감된 동안 줄곧 자신을 수감시킨 러시아 연방 마약통제반의 젊은 장교 표트르 하진과 대면하길 꿈꿔왔다.
일리야는 어머니, 여자친구, 그리고 절친한 친구가 그를 집에서 맞이하기를 기대했지만,
그가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가 원하던 삶은 파괴되었고 일상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표트르와의 만남에서 일리야는 성급한 행동을 취하고,
그의 스마트폰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표트르의 사진과 동영상, 부모님과 여자친구 니나와의 문자, 위협과 암시로 가득찬 동료들과의 이상한 문자가 가득하다.
잠시 동안 모든 사람들은 핸드폰 문자를 통해 일리야가 표트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