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9 08:46:10
충격적인 강렬함으로 광증과 윤리를 잇다
영화 〈레드 룸스〉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재판장. 배심원단과 판사가 차례로 입장한다. 경륜이 있어 보이는 흰머리의 판사는 배심원단에게 분명하게 경고한다. 재판에서 증거로 상영될 영상의 잔혹성이 상당하다는 점을 이미 수차례 강조했지만,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불편한 사람은 말해달라는 당부다. 피고는 슈발리에. 그는 세 명의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장면을 촬영한 스너프 필름을 다크웹에 유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세 명 중 두 명의 소녀가 살해된 영상은 증거로 확보된 상태다. 검사는 영상 속 살인자가 슈발리에라는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변호인은 영상 속 복면을 쓴 남자가 슈발리에라고 확정할 수 없다고 맞선다.
그러나 〈레드 룸스〉는 법정 영화가 아니다. 재판의 개요와 논점을 제시한 카메라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방청석에 앉은 두 여자를 향한다. 켈리앤과 클레망틴이다. 두 사람은 방청석에 앉기 위해 재판 전날 법원 앞에서 잠을 잘 정도로 이 재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동기는 다르다. 클레망틴은 슈발리에가 무죄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이 그를 여론재판하고 있다고 믿는다. ‘무죄’인 그를 사랑하는 듯도 보인다.
한편 켈리앤이 재판에 참석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모델 겸 해커인 그녀는 이미 다크웹을 통해 재판의 증거인 두 편의 스너프 필름을 확보한 상태다. 재판정에서 만난 켈리앤과 클레망틴이 안면을 트고 가까워지는 동안 재판에 참석하는 켈리앤의 동기에 대한 미스터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영화가 켈리앤의 정체에 관한 수수께끼의 무게감을 쌓아 올리는 과정의 긴장감이 대단하다. 특히 켈리앤의 여러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중에서도 정점인 장면, 즉 그녀가 자신을 희생자처럼 꾸미고 슈발리에와 인사를 나누다 제지받고 끌려 나가는 장면의 강렬함이 압권이다. 이 장면이 뿜어내는 미스터리의 힘은 온몸을 찌르는 듯 섬뜩한 사운드트랙과 어우러져 슈발리에와 켈리앤의 정체와 관계에 대한 모든 추론과 해석을 중단시킬 정도로 격렬하다.
관객을 절대적 미스터리의 미로로 몰아넣는 켈리앤의 비밀은 영화가 끝날 때쯤에야 드러난다. 그녀가 지난한 재판을 한 번에 뒤집을 마지막 희생자 살해 영상을 다크웹에서 경매로 구입한 후 이를 익명으로 제보했다는 것이 뉴스 화면을 통해 보도된다. 슈발리에의 얼굴이 논쟁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찍힌 영상이었다. 재판정에서의 기행으로 모델 일자리까지 잃은 그녀가 진범을 밝힌 익명의 영웅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이 ‘반전’처럼 보이는 이유는 영화가 내내 켈리앤을 께름칙한 인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클레망틴의 집착이 왜곡된 애정 때문이었다고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의문이 든다. 켈리앤은 왜 피해자 소녀 분장을 해 유족에게 상처를 주고 재판을 방해했을까? 슈발리에 앞에서 죽은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그에게 반성과 자백을 촉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발리에는 되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켈리앤에게 손을 흔든다. 그가 내내 보였던 무기력하고 따분한 모습과는 정반대다. 그에게는 갱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한편, 켈리앤은 희생자 ‘되기’를 통해 길 잃은 재판에서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잡고자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슈발리에 변호사의 논거는 설득력이 있고, 다크웹은 공고하며, 수사 기관은 켈리앤과 같은 집요함이 없다. 이대로라면 재판은 슈발리에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오롯이 혼자서 이 모든 걸 뒤집어야 하는 켈리앤은 재판정에서의 분장으로 희생자가 ‘되는’ 그녀만의 의식을 치른다. 이제 켈리앤은 이 사건에 분노하는 시민이자 희생자 그 자신이다. 이것으로 슈발리에를 처벌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다짐이 다시 한번 확고해진다.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인 법정 조우 장면에는 이런 의지가 담겼다. 공포에 잠식당하지 않는 분노와 용기의 기괴한 표출 말이다. 이 장면이 관객을 붙잡고 뒤흔든다면, 광증에 가까운 켈리앤의 윤리도 그러할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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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이미 망해버린 세계에서 아이들은 성장할 수 있을까
여름이 지나가면/코리안시네마
시놉시스
신도시 개발계획이 있는 지방의 한 마을이 있다. 마을로 부랴부랴 이사를 오는 기준의 가족. 동네가 ‘시’로 승격이 되고 난 뒤에는 진학에 유리한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 자격도 없어진다. 새롭게 다닐 학교에서 전학 수속을 밟고 있는 사이, 기준의 새 운동화가 사라진다. 신발 도둑으로 의심을 받는 아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결손가정의 형제들이다. 기준의 가족은 이 형제들이 신발 도둑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고작 신발 정도니까 모른 척 넘어가 준다.(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어린이의 세계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다층적으로 굴곡진 어른의 세계와 닮은 점이 꽤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조수석에 앉은 기준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희망에 부푼 엄마와는 달라 보인다. 서울에 살며, 적당한 재력을 가진 기준의 부모는 기준을 위해 농촌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농어촌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기준이 잔뜩 불만인 이유는 단지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간다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기준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자기 삶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부모 욕망이 투영되는 객체일 뿐이라는 점을 감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촘촘한 기획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포박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는 부모와 기준 모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기준은 전학 첫날부터 브랜드 운동화를 도둑맞는다. 부모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영문, 영준 형제가 범인인 듯 보이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기준에게는 이 사건이 뜻밖의 계기가 된다. 영문은 또래 집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친구들은 그가 분위기를 잡고 한 마디만 하면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금방 움츠러든다. 기준도 영문이 무섭다. 동시에 영문과 가까워지면 금세 그와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겠다고도 느낀다. 기준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영문 형제에게 호의를 베푼다. 부모가 기준에게 ‘더 좋은’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 시골로 이사 왔듯이, 기준 역시 나름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형제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준은 결코 부모가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하고 나름의 삶 기획을 이어간다. 이후는 악화일로다. 물론, 부모의 관점에서 말이다. 기준은 영문 형제와 함께 도둑질, 폭력 사건에 자주 연루되고 그럴수록 무리에서 상승하는 자신의 지위를 은근히 즐긴다. 기준은 늘 영문에게 더 잘 보일 방법을 찾는다.
기준을 ‘나쁘게 물들인’ 영문, 영준 형제에게도 자기 삶 기획이 있다. 이들 역시 부모 없이 근근이 삶을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남에게 위협감을 주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자신의 미래를 모색해왔다. 요컨대 모두는 자기 자신의 상황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좋은’ 미래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획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관철될까?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자의 기획이다. 기준은 결국 그의 비행을 참지 못하는 부모에게 이끌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기준은 끝까지 영문, 영준 형제와 어울리고 싶다. 영문, 영준 형제는 자상한 척 시혜와 동정, 멸시의 시선을 교차로 건네는 기준의 부모님이 밉다.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준의 부모와 달리 자기 삶 기획을 관철할 아무런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반영하듯,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어른과 사회가 없다. 자식에게 계급을 세습하는 일만이 중요한 부모와 형제를 방치하는 학교와 이웃이 있을 뿐이다. 공적 역할을 상실한 사회, 신자유주의적 경쟁관계가 만연한 사회는 모두가 자기 안위만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아이들까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연루되게 했다. 아이들 사이의 폭력과 경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어르고 달래고 뒷받침해줘야 할 어른과 사회가 사라져가는 속도와 비례해 더욱 첨예해진다.
이렇게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쟁 문화는 어린이들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꼼수를 써도 좋은 학교 가서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부모와 친구를 괴롭히더라도 권력감만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기준은 닮은 데가 많다. 영화는 여러 질문을 남긴다. 서울로 돌아간 기준은 부모의 뜻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부모의 계급을 세습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기준이 정말 행복해질까? 영문과 영준은 어떨까? 그들에게 다른 삶 기획이 들어설 기회가 주어질까?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지금 그들이 부득이하게 들어선 ‘비행’의 길에서 오랜 시간 허덕이지 않을까?
어린이,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최근의 영화에서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종종 출구 없는 미로처럼 보이는 경향이 보인다. 그 양상은 갈수록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처음부터 망해 있는 상태다. 기존 질서에 안착한 어른들은 뒤틀린 세계에 무심하고, 탈락한 어른들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늘 외롭다. 사회가 늘 ‘우리의 미래’라며 상찬하는 어린이들은 이런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때문에 ‘어린이가 희망이다’라는 말은 지독한 위선이다. 썩은 토양에 뿌린 씨앗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와 마찬가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3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213)
-5월 5일 21:00 CGV전주고사 4관(457)
-5월 8일 10:30 메가박스전주객사 1관(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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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터본능을 가진 복병의 습격
이 글은 디즈니 플러스 [메스를 든 사냥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btn뉴스
대체 디즈니에 어떤 저주가 내린 것일까.
마블도, 실화 영화도, 게다가 주식도 말아먹더니(우는 거 아님) 이젠 OTT서비스도 그럴 것만 같다.
분명 희망이 보이긴 했다. 정통 추리극을 연상시키는 인상의 예고편을 봤을 때만 해도. 그러나 정주행을 시작하자마자 생각하지도 못했던 복병의 습격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복병은 “복병”이라는 이름부터 글러먹었다고 봐야 한다. 작품 안에 꼭꼭 숨어 있던 것이 아니라 정중앙에서 아주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난감한 복병은 존재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이름이자 존재였던 셈이다. 이 센터 본능을 가진 복병 덕에, 시리즈를 향한 몰입감은 아주 초반부터 박살 나 버린다. 처참하게.
사진 출처:구글
세현은 입체적이다 못해 4D로 표현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의문까지 드는 인물이다. 연쇄살인마의 딸이면서 공범이고, 아동학대를 받은 장본인이자 목격자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애정을 넘어선 집착의 감정을 느끼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존재이자 감시자이기도 했고, 이 모든 살인의 용의자인 동시에 증인이었다.
그러나 박주현 배우는 이 미묘함을 단 하나도 살리지 못했다. 극 중 세현이 느끼는 이 복합적인 감정들을 모조리 일차원적으로 해석해 낸다. 이런 패착을 가능하게(?)한 요소는 다름 아닌 그녀가 연기하는 세현의 모든 것들이다. 쌍꺼풀 수술을 한 것인지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도로 반쯤 감긴 눈. 어떤 감정을 담은 것인지 전혀 느낄 수 없게 하품하는 듯한 발성으로 내뱉는 대사들. 미스터리함이나 의뭉스러움이 아닌 어색함을 뿜어내느라 바쁜 걸음걸이까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연기를 못한다.라는 말 외에는 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세현이 등장하는 순간들이 심각하게 괴롭다.
사진 출처:구글
이런 상황을 더욱 못 참게 만드는 두 배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강훈과 박용우 배우의 활약이다. 이 작품 직전까지 예능에서 더 자주 보는 바람에 그의 연기 자체에 선입견이 있었던 강훈 배우는 우려와는 달리 매우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박용우 배우의 경우는 여기에 끼워 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연쇄 살인마 윤조균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세현과 가장 많이 부딪치는 두 배우가 날고 기어 주는 바람에, 이 대환장의 콜라보는 살다 살다 불쌍해 마지않아야 할 여주인공에 대한 짜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뿐인가. 그녀의 뚝딱거림은 윤조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몸싸움에서 극대화된다. 액션 신(Scene)의 가장 기본이라 해야 할 합이 전혀 맞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기본이고. 그녀가 휘두르는 일격들은 술이 머리끝까지 취한 와중에도 귀소본능을 잊지 않은 취객의 몸짓처럼 허우적거리는 정도로만 보인다. 긴박감은커녕 심각한 분위기조차 조성되지 않는다.
사진출처:스포츠 한국
분명 얼마 전 디즈니에서 제공하는 작품들이 애매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작품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디즈니에 재앙이 내리지 않고서야, 이런 애매함 총량의 법칙이 적용될 리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센터본능을 가진 복병 덕에. 이 작품은 초반부터 모든 동력을 상실해 버린다. 분명 아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이 글의 TMI]
1. 무표정으로 시리즈를 다 본건 또 오랜만임.
2. 주말에 갈비탕 먹을 거임 와하하하하
#메스를든사냥꾼 #감독 #배우 #배우2 #배우3 #영화국적영화 #영화장르 #영화추천 #OTT #디즈니플러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CGV #롯데시네마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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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이라는 주체를 다시금 확인하다 _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내 생애 첫 영화관에서 보는 다큐멘터리였던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다큐멘터리는 항상 집이나 학교에서 봐왔었는데 영화관에서 집중하며 보는 것은 처음이라 기대가 되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깔깔깔 재밌게 보고나왔던 작품이었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시놉시스
“일도 사랑도 다 가지고 싶어!” 의욕 충만 아름
“아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사랑 하나만 믿고 떠난 로맨티스트 성만
오직 의욕과 사랑만 가지고 프랑스로 떠난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학업, 생활비, 육아, 가사 노동이다.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결혼했을까? 결혼, 도대체 뭘까? 에펠탑 아래에서 시작된 아름과 성만의 좌충우돌 결혼살이를 들여다본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일러스트를 잘 활용하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부분은 일러스트의 활용이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대부분의 장면을 일상생활에 찍은 자신과 남편,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면적인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출산의 생생한 장면 등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장면들을 하얀 도화지에 검정색 색연필로 그 감정과 상황을 추상적이지만 단적으로 표현해 나레이션과 함께 배치했다.
오히려 사실적인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렇게 나레이션과 추상화된 감정과 상황을 보는 것이 더 강한 임팩트로 다가왔다.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만 가는 자신의 정신상태와 젖을 물리는 고통들을 오히려 더 시각적으로 직관적이게 표현을 해서 머리 속에 잘 각인될 수 있었다.
결혼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다
만약 박강아름이 한국에 살았다면 이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한치에 망설임 없이 NO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굉장히 정형화 되어 있고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남녀가 만나 혼인신고를 하고 집안끼리 연결되는 것. 이 외의 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를 유학을 떠난 박강아름이 마주한 결혼은 꽤나 다양하다. 팍스(PACS)라는 제도를 통해 대안결혼 제도를 살펴볼 수 있었고, 동성들의 만남에 대해서도 편견없이 담아내고 있었으며 우리와 같은 정형화된 결혼과 혹은 국제결혼까지 다양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어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렇게도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기적인 것일까?
이기적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일까?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결혼하다는 팍팍한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굉장히 유머러스한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박강아름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약간의 불편함을 지속적으로 느꼈다.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간 박강아름과 그녀를 위해 혈혈단신 타지로 함께 넘어온 성만. 성만은 외조를 하기 위해 집안일을 혼자서 다하고 독박육아, 독박살림을 하게 된다. 이러한 '독박'이라는 단어를 영화 속에서 계속 사용하면서 아름이 도와주긴 하지만 전적으로 집안일은 남편 성만의 몫인 것처럼 표현이 되는 모습에 언뜻언뜻 박강아름이라는 여성이 이기적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성만이 일을 하고 아름이 집안에서 독박육아, 독박살림을 했더라면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변한게 없구나! 하는 가부장적인 회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그 삶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의 모습과 역전과 아름과 성만의 관계를 보면서 아름을 향해 이기적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아름이 이기적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개인이 느끼는 불편함에서 비롯된 판단인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굉장히 웃음기가 넘치면서도 사회 속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잘 녹여낸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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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데미에 올라갔어야만 했다
봄에 피어나는 벚꽃만큼이나 극장을 자주 드나드는 관객들에게 이 시기는 대작들이 개봉하는 여름 극장가 부럽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아카데미"에 이름이 올라간 영화들 때문입니다.
대개, 시상식에 이름이 올라간 이유에는 그만한 기준에 충족했기에 올라간 것이라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올라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극장으로 가 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진부한 패턴이 영화 <모리타니안>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년이라면,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는커녕 결과까지 나왔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로 모든 일정들이 연기되며 이제서야 "골든글로브"가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미나리>의 작품상 후보 지명 불발이 가장 큰 논란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나리>의 "윤여정"분의 후보 지명 불발도 화제였습니다. 다른 시상식에서는 다 휩쓰는데,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관객들에게는 자연스레 "윤여정"분이 빠진 "여우조연상"을 받을지에 관심이 쏠렸고 이는 오늘 소개할 <모리타니안>의 "조디 포스터"분이 수상했습니다. 이에 일부 팬들은 "호랑이가 없는 곳에 늑대가 왕이다"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1989>과 <양들의 침묵1992>로 여우주연상만 2번 받은 분이라 늑대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특히, 이를 30대 이전에 다 받으신 거라...)
이외에도 여기에 출연하는 "타히르 라힘"은 "남우주연상"에 이름을 올려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연기 보는 맛은 쏠쏠하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모리타니안>은 어떤 영화이었는지?' -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9·11테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집안에 경찰이 오자 "슬라히"는 어머니에게 '잠깐만 다녀오겠다'라는 말로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인권 변호사 "낸시"는 지난 3년간 재판도 없이 "콴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슬라히"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아무리 중한 범죄라고 해도 재판 없이 감옥에 수감된 것에 궁금한 "낸시"는 그의 변호를 맡게 되고, 숨겨져 있던 사실에 충격을 받는데...
낯선 영화에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 이유는?
1. 클리셰를 깨버리는 이 과감함, 뭐지?
영화 <모리타니안>은 제목만 봐서는 어떤 영화인지 좀체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디 포스터", "쉐일린 우들리", 그리고 <샤잠!>의 "제커리 레비"를 보아도 역시, 감이 안 잡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포스터에도 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낯선 영화에게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히는데요. 근데, 영화 <모리타니안>에게 법정에서 주고받는 증언에 증언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법정"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해도 되나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힌 <모리타니안>의 초반 전개는 이와 비슷하게 흘러나갑니다. 마치 변호하는 "낸시"는 선역,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는 "스투"는 악역으로 보이는 <모리타니안>의 시작은 뻔하게 흘러갑니다. 근데, 영화는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을 제시하는데 그게 "플래시백"입니다. 대개, "플래시백"은 직접 짜 맞추는 것과 다르게 해당 캐릭터의 시점에서 흘러가 설명보다는 감정을 먼저 제시합니다. 특히, "법정극"이라는 장르가 논리와 논리의 상충이 주되기에 이런 방법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데요. 근데, 영화는 "클리셰"와 같은 규칙을 깸으로 오히려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2. 이러니까,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라가겠지.
앞서 말했듯이 영화 <모리타니안>은 이야기의 중간마다 "플래시백"을 삽입함으로 해당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해 이야기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외에도 부족한 설명을 채워주는 역할도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죠. 근데, 영화는 굳이 이런 몰입을 깨버립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물아일체"의 상태를 깨기까지 한 영화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에 치우치면 본질이 흐려지는 것도 있지만, 두 번째 <모리타니안>이 법정극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야심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영화는 '반전'이라는 카드로 위장하여 보여주기도 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플래시백"을 경계한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슬라히"는 속내를 모르는 대상이 아닌 그저, 불쌍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텍스트로 적혀진 보고서에는 이런 설명들을 부정하니 관객들에게 인지부조화가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진짜 틀린가?'라는 마음으로 1차적인 반전을 일으켰다면, 영화는 곧장 2차적인 반전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잠시, 영화를 떠나 글을 쓰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객관적인 자료로 주관적인 감정으로 끝을 짓는 것입니다. 근데, 순서를 바꿔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요.
비슷한 재료인데도 순서가 틀리면, 완전히 달라지는 영화 <모리타니안>은 1차 반전으로 '전자', 2차 반전은 '후자'로 보여주여 더 깊게 빠지게 만듭니다.
3. 방법은 틀린 것이 없다. 쓰는 이에 달라질 뿐.
보통 "피해"를 입은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가장 기피해야 하는 것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 자체만으로도 "고문 포르노"와 별반, 다르지가 않거든요. 그렇기에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는 이를 재현하기보다는 연설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낙서와 같은 문신으로 이를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모리타니안>은 세련된 방법은 아닌데도 이에 대한 충격을 받은 이유에는 이를 쌓아올린 누적된 설명들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구식과 클래식이 나눠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낸시"는 선역, "스투"는 악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낸시"가 "테리"에게 "슬라히"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듯이 "스투"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영화는 "낸시"에게 "슬라히"의 편지를 읽음으로 그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면, "스투"는 관객들에게 그가 어떤 곳에 있었는지를 직접 가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낸시"가 주관적인 감정이라면, "스투"는 객관적인 관찰인데,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나 영화는 이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데요. 그리고 극과 극에 서있던 "낸시"와 "스투"가 "슬라히"가 보여주는 재연으로 합쳐지니 "고문 포르노"였던 방법은 "현실 고발"이라는 있어 보이는 방법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4. 옳고 그름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메시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 <모리타니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예상했던 "법정극"으로 생각하기에는 대상자의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전개는 장르를 제외하더라도 그리 좋지만은 않고요.
그럼에도 <모리타니안>은 앞서 말한 "아카데미 영화"를 보는 삼단 논법의 마지막 단계,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는 결과에는 문제없이 도출되는 영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말하려는 '법은 상황에 맞게 짜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어야만 한다'라는 메시지는 극히, 이성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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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슬픔도, 분노도 가늠할 수 없는 방향 잃은 칼날.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전, 란>은 10월 1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였고, 김상만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진선규, 장성일을 비롯한 배우들이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례적인 OTT 영화 개막작 선정과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이 작품이 논란을 잠재우고 이 영화가 과연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종려는 양반가 외아들이고, 천영은 종려의 몸종이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함께 했던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동무이기도 하다. 천영은 노비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종려 또한 그를 돕는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데다가 일이 얽혀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기게 된다. 그로 인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게 되는데, 이들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조선 시대는 신분제가 엄격히 구분되었고, 그 체제가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정여립은 '천하는 모두의 것', '임금과 노비가 대등하다',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을 주장하다 처형당했고,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만큼 조선의 신분제도는 누구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천영도 그러했다. 부모가 양민이었지만 어머니 빚으로 인해 노비가 되었고 노비종모법에 따라 노비가 됐다. 그 일로 인해 억울했던 천영은 늘 마음속으로 자유를 품고 있지만 쉽게 쟁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소중했던 자유를 향한 열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영화는 천영의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천영과 종려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둘 사이의 오해가 생기고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게 되는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들은 주종 관계를 넘어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었으나 사회적 제약과 개인적 갈등이 얽혀 그들 사이의 신뢰가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과연 이들의 갈등이 무사히 회복될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왕은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 그것을 지켜본 백성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왜군을 맞이해야 했고, 전란 속에서 버림받은 백성들은 경복궁을 모조리 불태우고, 폭정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반기를 들며 주인의 집을 불태웠다. 이는 자유를 향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일어나지 않았을 '난'이 조선을 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황폐화된 조선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들이 생겨났으나 왕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큰 기여를 한 이들을 의심하고, 왕은 경복궁 재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 담긴 듯하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오해를 통해 그들이 처한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드러내며,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각 인물은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함께 전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혁명의 길로 인도하지는 않지만 중요시해야 할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바라본 조선의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은 무언가를 바라보게 된다.
영화를 보자마자 이 작품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OTT 공개 예정작이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유가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했어도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러 찾아왔을 것이다. 압도적인 전개, 큰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웅장함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우선, 화려한 액션과 직관적인 전개, 입체적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영화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중심이지만 외부와 내부, 5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여러 등장인물의 서사가 뜬금없이 튀어나오지 않고 자연스레 연결되며 몰입감을 더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오해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이 묵직하게 다가오며, 영화의 전개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영화는 그 지점에 명확히 점을 찍어 저마다의 입장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풀어나가는 과정이 시원하고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의식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인상 깊다. 다만, 영화의 주요 소재인 계급과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두 주인공의 서사보다 비중이 적어 아쉬움이 남는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올해의 개막작은 김상만 감독님의 <전, 란>으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 및 각본에 참여를 했고, 김상만 감독님을 비롯하여 출중한 실력의 한국 영화인들이 힘을 모아 완성해 낸 사극 대작이라고 소개했다. 박도신 대행 김상만 감독, 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성규, 장성일 배우가 참석했다.
<전, 란>은 임진왜란이라는 시대 배경과 창조된 인물을 통해 구성된 영화이며, 왕조 실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만큼 여러 나라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넷플릭스 영화뿐만 아니라 극장의 걸리는 영화들도 더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좋은 평과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 어떤 사회의 계급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 인물들 즉, 대표되는 인물들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전했다.
상영일정
10/02 18:00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10/03 16:30 영화의전당 중극장
10/04 12:30 CGV센텀시티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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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고 변화하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가 먼 것은 평소에 의식하기 어렵다. 당장 오늘 먹고 입고 일하고 잠드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그러한 일상 속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단 걸 의식하긴 어렵다. 무디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며 살아간다면, 불안과 동요로 마음이 날뛸 테다. 일상에 치여 산다고들 표현하는데 되려 그 덕에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는 두 갈래의 경계를 오간다. 동시 번역 일을 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여기에 죽음과 맞닿은 존재를 돌보는 일도 포함된다. ‘벤슨 증후군’. 명칭마저 생소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신경 이상으로 시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감각을 서서히 잃어간다. 열쇠구멍을 찾아 한참 헤맬 정도로.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한 아버지는 시각과 기억을 잃어가는 변화에 적응 중이다. 사실 발병은 5년 전이라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거 같지만,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과 시력은 언제고 익숙함과 거리가 멀다.
산드라가 사별한 남편도 얼추 비슷한 햇수인데, 그는 어떨까.
홀로 여덟 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도 충분히 바쁜 하루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찾아뵈며 도움을 건네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제게 걸려오는 전화를 애써 무시한다. 마치 일터에서 퇴근한 사람처럼. 하지만 으레 엄마 역할이 그러하듯 끝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와중에 아버지가 더는 요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하자, 비용과 시설이 적절한 요양원 찾는 일도 생겼다. 할 일 투성이인 산드라에게 다른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친구 클레망이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클레망. 그런 클레망과 산드라는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어느새 입을 맞닿을 정도에 다다른다. 한 번은 손쉽게 두 번, 세 번, 새로운 일상이 된다. 딸은 기묘한 변화를 금세 눈치채고 이러한 변화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는다. 놀러 올 때마다 자신과 다정히 놀아주는 존재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드라는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으려 클레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설레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 이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클레망이 현재 가정을 정리한 후 자신에게로 완전히 정착할 것이라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클레망은 단언한다. 다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그 말을 믿으며 기다리던 산드라. 기다리는 와중에 아버지의 집안에 가득한 책 일부를 제자들에게 보내고, 원하는 요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매번 아버지는 머무르는 거처가 바뀐다. 여전히 클레망은 소식이 없다. 서서히 직감한다. 아, 그가 날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기억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그러다 산드라도 잊어간다. 이혼한 전처를 잊어버렸듯.
숱한 이동과 변화의 반복. 영화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잔잔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음향이나 이미지도 없다. 그저 붉고 푸른색을 선연히 드러내고, 클로즈업으로 세밀한 표정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서술 없이 내레이션이나 오가는 짤막한 대화에 맥락을 넣는다.
그래서였다. 산드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죽음도, 기억도, 변화도, 새로움도, 기대감과 눈물도,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살다 보면 별난 이벤트도 생긴다. 다 끝난 것 같던 관계, 그러니까 클레망이 정말로 산드라에게 돌아와 머무는 것처럼. 이 새로운 가족이 얼마나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할지 가늠할 순 없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익숙한 모습을 띤 채로 조금씩 계속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영화의 ost가 말한다. 포옹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어 완성하는 것처럼.
모든 망각과 변화와 새로움 앞에서도,
Love wil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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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은사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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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4 필의 동성애
09:31 피터의 아버지 살해
12:19 별점 및 한 줄 평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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