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1 16:24:02
“이미 내 마음속엔 네가 있어” -쁘띠마망
<셀린 시아마 특별전: 쁘띠 마망> 감상문
비밀이 있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
- 넬리
<쁘띠마망>은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시골집으로 내려온 '넬리'와 엄마 '마리옹'의 이야기다.
시골집, 어린시절 엄마의 추억이 깃든 그 곳에서 본인과 같은 나이의 '마리옹'을 만나면서, 단숨에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 넬리는 비밀을 알게 됐다며 말한다.
" 나 비밀이 있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
영화는 넬리가 요양원에서 다른 방의 할머니들과 안녕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방 마다 들어가며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넬리의 할머니가 머물렀던 방에서 짐 정리를 하는 엄마 마리옹을 보며 들어간다.
의도적인지 요양원 방을 정리하는 마리옹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영화제목이 나타난다.
Petite Maman
이 첫 장면과 같이 영화는 내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골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예전 마리옹의 방에서, 거실 쇼파에서, 숲에서의 넬리와 마리옹을 보여주며 이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사랑하는지 그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보여준다.
넬리와 마리옹은 8살의 같은 나이대로, 숲에서 우연히 만나서 동화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마리옹을 만나기 전 넬리의 주변 색감은 늘 푸른톤이었는데, 마리옹을 만나며 주변에 붉은 빛의 색감이 드는 것이 참 좋았다.
마리옹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느낀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마리옹과 함께 많은 놀기도 하지만, 현재 자신들의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꿈,미래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묻지 못했던 질문을 털어놓고 나누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이 인상 깊었는데, 친구 만난 지금도 서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이인 것 같아 보였다.
영화 내내 서로의 이름을 많이 부른다. 여러 세대가 썼던 이름이라, "이미 내 마음속엔 네가 있었어"라는 8살의 마리옹이 넬리에게 한 말처럼, 같은 시간을 공유한 넬리와 마리옹 말고도 같은 이름을 썼던 인물들도 함께 기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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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트 인 파리(Paris Pieds Nus/Lost in Paris/ 2016/ 프랑스, 벨기에)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보이지 않는 손>
캐나다 여성 피오나는 파리에 사는 88세의 이모 마르타로부터 짧은 편지를 한 통 받는다. 양로원에 강제로 수용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것. 어렸을 때에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모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48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 그래도 피오나는 용감하게 파리로 향한다.
어렵게 찾은 이모의 집. 그러나 이모는 집에 없다. 이웃 남자 마르탱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행동이 이상했다고 하여 피오나는 걱정스럽다.
이모가 집에 올 때까지 파리 관광에 나선 피오나. 들뜬 기분에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다 그만 강물에 빠지고 만다. 유람선에 구조되기는 했지만 휴대전화도, 캐나다 국기를 꽂은 배낭도, 여권도, 지갑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앞길이 막막하다. 다시 이모 집을 찾았지만 이모는 감감무소식.
피오나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여권 발급신청을 하고 이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갈 곳이 없는 그녀의 사정이 딱해 영사과 직원은 식사 교환권을 건넨다. 지정 식당으로 간 피오나, 그 식당에서 묘한 분위기의 노숙자 돔을 만난다. 그녀에게 능청맞게 춤을 권하는 돔.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사양했지만 돔의 능숙한 리드에 저도 모르게 춤을 추는 피오나. 그런데 웬일. 둘의 춤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커플의 춤처럼 정말 아름답다. 춤을 추는 두 사람도 서로에게 익숙한 자신들에게 놀란다. 그리고 돔은 피오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물 위로 떠오른 피오나의 배낭을 발견한 것은 바로 돔이었다. 짐을 찾으려는 피오나. 횡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돔.
이튿날 돔은 마음을 고쳐먹고 배낭과 그녀의 소지품을 가지고 캐나다 대사관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피오나를 만난다. 돔에게 화를 내며 배낭을 받아 메고 이모의 이웃들을 만나 행방을 묻는 피오나에게, 이모는 이틀 전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이 바로 오늘이라는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장례식장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 받긴 했지만 피오나는 복잡한 파리의 전철을 탈 자신이 없다. 이때 그녀 주위를 몰래 맴돌던 돔이 나타나 길 안내를 한다.
돔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다가 이모는 마르타인데 고인은 마르트임을 알게 된다. 마르트는 이모처럼 무용수였던 데에다 이모의 이웃에 살았던 터라 사람들이 헷갈렸던 것. 마르타도, 마르타와 마르트 둘 모두의 친구였으며 마르타의 애인이었던 남자 무용수 노르망도 장례식에 나타나지만 피오나와는 길이 엇갈리고 만다.
약간 치매 증세를 보이는 마르타는 경찰이나 응급구조대가 자신을 양로원에 강제로 넣으려 한다고 오해하여 이리저리 피하며 집에 들어가지를 않는다. 경찰은 사실 피오나의 부탁을 받아 이모의 행방을 찾아 나섰던 것.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던 마르타는 돔을 만나 그와 함께 잠시 머물다가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울리는 피오나의 휴대전화를 받게 된다. 피오나가 혹시나 하여 전화를 걸었던 것. 드디어 마르타는 피오나가 파리에 온 것을 알게 되고 피오나는 이모가 지금 '파리의 뉴욕'에 있음을 간신히 알아차린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경찰들을 피해 마르타는 휴대폰을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에펠탑 위로 숨는다.
'파리의 뉴욕'으로 이모를 찾아나선 피오나는 노숙자 텐트에 있는 돔을 만나 이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능력을 지닌 듯한 돔 덕분에 이모가 에펠탑에 있음을 알게 되어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 꼭대기로 오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피오나 역시 돔을 좋아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마침내 마르타, 피오나, 돔은 에펠탑 위에서 만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모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모의 '자연분해 유골함'을 들고 센강 다리 위에서 추모하는 피오나, 돔, 마르탱과 양로원 직원. 1분간의 묵념 후에 유골함을 센강으로 던짐으로써 장례식을 끝낸 일행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딛던 피오나, 발걸음을 돌려 돔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어렸을 적 꿈도 마르타 이모와 마찬가지로 파리에 사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Paris Pieds Nus(파리를 맨발로)이며 주인공이자 감독인 도미니끄 아벨과 피오나 고든은 부부이다. 이들의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동화적이며 대사나 사실적인 연기보다 과장된 동작과 춤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면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춤과 서로 상대를 꿈 속에서 만나는 피오나와 돔의 과장된 동작은 예술이다.
아울러 이들의 영화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로스트 인 파리>는 <피오나>, <돔>, <마르타> 등 세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있고 내러티브보다 각 캐릭터의 개성과 삶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영화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통해 돔과 피오나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마르타의 구조요청은 둘을 이어주기 위한 모티브였던 셈.
피오나는 돔을 만나기 위해 이모로부터 편지를 받고, 파리로 날아가고, 파리에서 두 번이나 강물에 빠지고,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추모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에펠탑 꼭대기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반복되는 고난과 어려움은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 지내다 가족이나 친척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세상을 뜬 이가 마르트인지 마르타인지 주변의 관심을 받지도 못하는, 양로원에 갇혀 답답하게 여생을 살아내야 하는, 한때는 젊고 아름다웠고 기운찼던 노인들의 삶이 가엾거나 쓸쓸하다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상황과 상큼한 색감으로 명랑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인생이 그 주인이며 인간들은 제멋대로 달리는 인생이라는 기차에 타거나 내리거나하는 승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닥 슬플 일도 불행할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피오나와 돔과 마르타를 에펠탑 꼭대기로 모은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생이라는 기차의 기관사는 누구일까(©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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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만화에서 소녀 들어내기
* 영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대와 성장에 관해 다루면서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해진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들을 평생 사랑해 왔다”는 셀린 시아마처럼, 나 역시 나(라는 여자애)는 어떻게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쓰인 영화와 책들에 둘러싸여 자라왔기 때문이다. 냉장고 속 여자들. 똑똑하고 의견이 있으면 ‘발암캐’가 되고, 멍청하면 아이캔디가 되는 여자들. 아무도 이름을 모른 채 퇴장당하는 여자들. 결국 주체적 섹시함에 복무하거나 가정과 모성에 귀속되는 선택을 내리는 바람에 롤모델로 삼을 수 없어진 반쪽짜리 알파 피메일들. 나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줄 알고 경계를 내리고 한껏 몰입한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가 나를 내쳤던 기억들. ‘이 이야기는 너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무심한 축객령에 찬물 맞은 듯 깨어났던 경험이 모여 다른 이야기에도 더 각박하고 의혹 서린 눈길을 보내게 만든 건 내게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면,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은 10대 여성의 존재감을 아예 뺏어버릴 정도로 뻔뻔하거나 무신경하지는 않다. 대신 <태풍클럽>이 채택하는 ‘소년'과 '성장'이란 키워드 속 소녀의 위치는 비난받기 어려운 선에 모호히 또 간신히 걸쳐 있다. 소녀들이 표류하고 타자화되고 젠더 폭력에 노출되되 투명하게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화내고 원망할 줄 알며, 욕망하고 좌절하고 춤도 춘다. 다만 그 소녀들이 발화하는 언어와 몸짓은 지극히 중년 남성의 - 언제나 ‘현대’의 소년소녀들과는 동세대가 될 수 없으며, 자기의 10대는 잊은 지 오래고, 한 번도 여성이어본 적 없는 - 관점에서 상상되고 있다.
어쩌면 <레옹> 류의 적극적 성애화나 <싱 스트리트> 류의 과소대표된 마스코트화보다는 좀 나은 대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자 사이의 대찬 어긋남은 여성 관객인 나를 거슬리게 하기 충분하다. 영화 속 주체인 특정 집단을 관객인 우리가 감독보다 잘 알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극중 서사나 연출에서 극도의 작위성과 허구성을 즉각 감지하고 말 때, 어떤 영화는 ‘의도된’ 해학적 연출로서 수용되고 이해받지만 또 다른 영화는 ‘감히?’라는 황당함과 분노를 더 짙게 남기기 때문이다. <태풍클럽>은 슬프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는 평단에서 주로 ‘움직임’과 ‘에너지’라는 (얄밉게도 반박하기 쉽지 않은) 단어에 의존해 뭉툭하게 예찬한 <태풍클럽> 클라이맥스의 나체 파티를 생각해보자. 당최 어떤 10대 여자들이 태풍으로 학교에 고립된 와중 동급생 남학우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일탈을 통해 고통과 자유를 한껏 감각하려 든단 말인가. 이상한 시대의 광기에 걸맞은 기행으로 이해하기엔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소마이 신지 전후의 남성 창작자들이 오염시킨 소녀 이미지, 청춘 이미지들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탓이다.
이 씬에서 여자아이들의 맞춰 입은 듯한 흰 속옷은 기묘한 미인대회를 연상시킨다. Barbee Boys의 暗闇で DANCE가 흘러나오며 수영복 차림으로 춤추던 흥겨운 오프닝이 제공한 생동감과 일말의 기대마저 퇴색한다. 같은 반 남학생 아키라가 물 아래에서 그애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구도가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 무대 위 탈의한 친구들을 지켜보는 미카미의 시선은 카메라의 눈높이와 일직선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미카미의 등에 신중히 초점을 맞추다가 이내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무대 위로 (늘 달려 다니던 여자친구 리에처럼) 달려 나가 친구들의 광기에 합류하는 모습을 담는다. 정확히는 그가 무대로 ‘달려가는’ 움직임을 숏 바깥으로 밀어 잘라내고, 그가 무대 위에 올라 옷을 벗고 동참하는 순간부터를 흐릿하게 원경으로 담아낸다.
이 뻔한 대구란. 이 힘준 하찮음이란. 분명 나도 지나온 시기인데, 속으론 저것보다 더 미쳤으면 미쳤지 절대 더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화면 속 연유도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뇌에 공감하기보단 타성에 확 젖어버리고 만다. ‘50대가 상상한 10대의 청춘’의 대표적 표상 같은 이 씬에서 나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한 타자화를 감지할 뿐이다.
게다가 여자아이들 한 명은 동급생 남학우 켄에 의해 화상을 입었고, 태풍이 오기 직전 학교에 갇혀 도망다니다 옷이 찢기고 만 미츠코다(그리고 미츠코는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이 켄 앞에서 옷을 벗고 켄과 손을 맞잡고 춤추고 있다. 그러니까 이 탈의에서 연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몸짓이 애초에 ’가능한‘ 행위냐는 말이다). 모든 씬이 분절적이고 산만하게 이어붙어진 영화에서 오로지 켄이 미츠코의 옷을 벗기려고 쫓아다니는 시퀀스만이 매우 길고 연속적이고 자세하게 펼쳐진다. 이때 미츠코의 얼굴에 서린 건 오로지 닥쳐올 강간에 대한 공포뿐이다. 그 공포에 즉각 감응할 수 있는 관객으로선 미츠코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생생하다.
한편 오프닝에서 키 작은 남학생 아키라가 밤의 학교에서 수영복 입은 여자애들을 마주쳤다가 물속에서 질식한 사건은 켄-미츠코의 사건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키라는 ‘여자애들이 수영복을 벗기고 레인 로프로 목을 졸랐다’는 경위를 선생님 앞에서 털어놓으며 힘없이 실실 웃는다. 이 진술 자체가 영화에서 유일한 플래시백으로 처리되었기에, 실제로는 그저 관음하다 들킨 게 부끄러워 물속으로 숨었다가 숨이 막혔을지도 모를 아키라의 (깊은 소망이 담긴 듯한) 섹슈얼한 상상처럼 다가온다.
설령 아키라의 말이 진실이었다 해도 아키라의 얼굴에선 (미츠코와 달리) 방금 생사의 고비를 넘긴 아이의 공포나 ‘가해자’ 측인 여학생들을 꺼려하는 반응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선생님 역시 짓궂은 남학생을 혼내듯 장난스레 머리를 때리며 웃는다. 즉 아키라에게 여자애들이 자기 옷을 벗기고 괴롭혔다는 사실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오히려 페티시의 충족, 또래 이성에게서 성적 관심을 받았다는 만족감, 늘 친구 켄과 쿄이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자신이 그럴 만한 존재로 ‘승인’ 받았다는 훈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주변 남자아이들과 선생님 역시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런 미츠코와 아키라 간의 낙차를 영화는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켄이 미치코를 힘으로 제압하는 일련의 숏에 할애된 분량과 연속성 자체가 이 뚝뚝 끊기는 영화 내에서 이질적인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런 간극들에서 소마이 신지라는 남성 연출자의 둔감함 혹은 음험함이 여실히 느껴져 괴로웠다. 남은 평생 그 끔찍한 하루를 잊지 못할 미츠코의 트라우마가 상상되어 참담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다정히 응시하는 건 켄 쪽이다. 미츠코의 옷을 찢어 제가 낸 상처를 기어이 확인하고 순간 숨이 멎어버린 켄은 곧 책상 위로 엎어지고 물건을 죄다 떨어뜨리며 발버둥친다. 지울 수 없는 가해 사실의 무게를 뒤늦게 짐작한 이의 울음과 절망 정도로 자비롭게 이해하면 될까.
여기서 미성년 켄의 후회를 보며 불편하고 원치 않는 이해와 연민이 피어오르는 것까지가 ‘영화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인 것처럼 이야기하려면, ‘영화가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은/못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온당하다. 그러나 물론 1985년의 ‘고전 명작’을 이 시대에 구태여 다시 불러온 이들과 예찬으로 호응한 이들에게야, 여성 대상의 과잉 폭력 전시쯤이야 ’시대적 한계‘란 말로 적당히 무마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티끌 정도였을 테다. 켄이 미츠코를 좋아한 것처럼 미츠코도 리에와 사귄다고 알려진 미카미를 은밀히 좋아했지만, 켄이 한 것처럼 인기 많은 짝사랑 대상을 ”내 꺼야“라고 선포하거나 그애를 가지기 위해 미카미의 등에 불씨를 넣지는 않았다. 켄이 자길 다정히 맞아주는 가족의 부재에 슬퍼하며 “다녀왔습니다.“와 ”잘 다녀왔니?“를 끝없이 반복한 것처럼 리에 역시 엄마의 상시적 부재에 고독을 느끼지만, 리에는 엄마의 이불에 들어가 자위하듯 꼼지락거리며 기이한 연민을 자아낼지언정 켄처럼 문을 부숴가며 누굴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즉 어떤 집단의 고통은 외부의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방출되며 다른 집단의 고통은 스스로의 더 깊은 곳을 향해 수렴한다. 어떤 ‘이들’이 아닌 어떤 ‘집단’인 이유는 거기 성별에 의한 경향성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얘기하자면 영화가 이 명백한 차이를 본체만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다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중립적 관조의 태도를 자청하는 영화들이 곧잘 그렇듯 사실의 냉소적 재현은 곧 책임감 없는 방조로 이어지고, 감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이 소외되고 오해당하며 잘못 그려진다. 도덕적 판단을 일부러 유보하고 기준점을 흐려보겠다는 일종의 사회 실험을 야심만만하게 시도한 영화들이 늘상 그렇듯 그 기준이 적용되는 세계가 이미 불균형하다는 사실은 무시되고, 동등하지 않은 행위자들의 위치성이 재배열됨으로써 동등하지 않은 행위가 동등한 것처럼 잘못 전달된다. <태풍 클럽>은 이런 전형적인 착시의 수렁에 빠진 예다.
부서진 문과 헐벗은 채 우는 미츠코를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묻는, 미츠코의 “보고도 몰라?“란 말에 재차 ”모른다“고 답하는 멍청한 미카미는 (감독이 어느 정도 의도한 대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소년 장첸과 같은 어둠 속의 민감한 관찰자가 아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유이치나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누구인지 너무나 명백한 폭력을 못 본 체하고 묵인하는 방조자일 뿐이다. 그러니 그애가 성숙을 두려워하며 ‘종을 넘어서는 개체‘가 되고자 할 때, 또래에게 깨달음을 주고 자기 죽음으로 불빛을 밝히려 하는 계몽자의 역할을 ‘감히’ 탐낼 때, 이미 몰입을 방해당한 관객은 같잖은 결기에 조소를 보낼 수밖에.
그러니 간절히 바란다. <태풍클럽>처럼 남성 청소년 호모소셜에서 향유되는 강간문화를 미숙하고 불안한 청춘의 성장과정쯤으로 이해해주는 영화가 불운한 명작으로 재소환되지 않기를. 남성 청소년의 또래 여성에 대한 극도의 폭력과 위악을 엄마 없이 자란 불쌍한 아이의 발악 정도로 정당화해주지 않기를. 또래 남성 앞에서 옷 벗고 춤추고, 자기들끼리 어설프게 입술 부비고, 성인 남자와 원조교제하려 드는 여성 청소년의 자학적 섹슈얼리티를 전시하면서, 시골에 유폐되어 성적으로 억압된 소녀들이 규범을 깨고 일탈로 해소하려 하는 건강한 해방처럼 감히 호도하지 말기를.
40년 전 작품이란 권위에, 덧입혀진 명성에, 화려하고 가식 없는 평단의 홍보 문구에 속아 기대했던 바는 좀 더 거창했다. 에드워드 양의 사려 깊은 관찰력도 <썸머 필름을 타고!>와 같은 편안한 산뜻함도 발견하지 못한 건 괜찮다. 그런 작품이 아님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만과 혼란의 시대에 대한 은근한 향수와 동조를 감지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을 부른다. 그 시절엔 몬트리올이니 동경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 한들, 현대의 관객이 어떤 것을 정전 삼고 어떤 것을 버릴지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않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뇌하는데 얕잡아 보이고 무시되는 10대 시절의 광기와 고독을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나, 이토록 선명한 폭력 앞에서 피식자의 입장에 곧장 이입되어 당황할 때 ‘나도 저랬다’며 열광하는 이들을 보는 건 역시 좀 입맛이 쓴 일이다. 소마이 신지가 관객의 정동을 잘 건드리는 연출자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가 상정한 청소년의 범주에서 어떤 소녀들은 처음부터 빠져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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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하고도 몽환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오다 카오리
다시, 주목할 만한 감독 칼럼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이 없어 언급이 잘 안돼는 감독이나 한국에서 비교적 주목받지 못한 감독을 다시 주목해보자는 취지로 적는 칼럼입니다.
본 칼럼 시리즈를 통해, 다시, 주목할 만한 감독들에 대해 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번 사라 고메즈 감독에 이어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은,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오다 카오리이다.
이번 감독은 현역 감독인데, 한국에서는 제작년에 서울아트시네마 '새로운 바람 - 일본 영화의 현재' 특별전으로 처음 소개되고 '2021 시네바캉스'로 최신작이 한 편 소개되었고 2022년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단편 <가라오케 카페 보사>가 소개된 바 있다.
오다 카오리 감독은 1987년 오사카 출신으로, 간사이 외국어 대학을 졸업 후 미국 홀린스 대학에서 영화학 과정을 졸업했다.
그리고 2011년 자신의 커밍아웃을 밝히는 내용을 담은 자전적 다큐멘터리인 <노이즈가 말하기를>로 단편 대뷔작을 발표한다.
본 영화는 2011년 나라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도쿄 국제 LGBT 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호평 받게된다.
그리고 2013년부터 3년 동안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 거주하며 영화 감독 벨라 타르의 필름 아카데미인 필름팩토리(FILM FACTORY) 과정을 3년 이수한다.
당시에 다른 대학이나 교육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여러 영화적 지식과 경험들을 쌓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었기에, 감독의 이후 작품들에 큰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름팩토리 과정을 이수중이던 2015년 발표한 장편 대뷔작 "광산"은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오래된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찍으며, 어둠속에서의 빛과 인부들의 움직임, 운동을 담아내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다.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며 특별언급이 되었다.
이후 2019년 또 다시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첫 발표한 "세노테"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될 뿐만 아니라 구로사와기요시 감독 등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오시마 나기사상의 제1회 수상자로 뽑히며 더 큰 주목을 받게된다.
세노테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북부에 존재하는 물이 샘솟는 ‘세노테(cenote: 암석 붕괴 등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우물)’라는 공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마야 시대부터 사람들은 세노테와 함께 살며 삶을 영위해 가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노테는 산 사람을 공물로 바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공간으로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았다.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배워 진행한 수중 촬영과 교차해가며, 물과 하늘, 빛과 그림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가며 몽환적인 광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현재로서 가장 최근 장편은 본 작품이기에, 추후 발표하는 작품은 어떨지 기다려지는 부분이다.
오다 카오리 감독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담담하고도 몽환적'이다.
연상되는 감독으로는 라브 디아즈, 왕빙 감독이 떠오르는데 실제로 광산은 오다 카오리 감독이 참고를 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왕빙 감독의 철서구를 봤다고 하고,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거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앞서 말한 이 두 감독 처럼 영화는 감독의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최소한의 설명, 혹은 설명없이 담담하게 대상을 담는 스타일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다.
이러한 담담함은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초현실적인 풍경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최신작인 세노테라고 생각이 드는데, 감독이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촬영한 수중 촬영과 현재 세노테 부근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을 담은 영상, 과거의 기억이 담긴 목소리들, 현재의 목소리들과 같이 대조되는 존재들이 교차되며 보여지는 광경은 정말 독창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예고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한번 예고편만이라도 봐보시고 짧게나마 경험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려본다.
전에 서술한 오시마 나기사 상의 경우에는 오다 카오리 감독이 수상한 2020년 제1회에 이어 2021년에 제2회가 진행되었는데, 2021년에는 적절한 수상자가 없어 수상을 아예 안 했다.
수상자 없음에 대해 심사위원 중 한명인 사카모토 류이치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통해 명성의 상징이 된다면, 그것은 그가 싫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명성에 단순히 편승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를 도발하고 비판하고 초월하는 자만이 이 상을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만나고 싶다." 라고 말했다.
이만큼 심사위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뽑는 상인 만큼 오다 카오리 감독은 일본 감독 중 주목해야할 감독이 맞으며 강력히 지지를 표하고 싶다.
이전에 세노테를 본 이후로 필자는 아직까지도 오다 카오리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으며, 분명 그 신작은 필자의 기대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인들의 기대도 충족시킬만한 영화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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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진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Summary
고립된 종교 공동체 마을에서 사는 여성들은 마을 남성들이 저질러온 연쇄 성범죄의 끔찍한 실상을 알게 된다. 용서를 강요하는 마을 장로들이 도시로 떠난 동안, 여성들은 공동체의 대책을 논의하러 헛간에 모인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Cast
감독: 세라 폴리
출연: 루니 마라, 제시 버클리, 클레어 포이, 벤 위쇼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렵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렇다"라고 답하면서도 괜히 주변 눈치를 보았던 저를 기억합니다. 혹시나 직장에서 그런 질문을 받거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야 '페미'로 낙인찍히지 않는다는 진지한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단어를 오염시키고 오용하는 사람들은 과연 페미니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더 잘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진정한 반페미니스트라면, 되려 페미니즘의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바로 그런 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 ⊙ ⊙
<위민 토킹>은 고립된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성폭행 악습을 알게 된 여성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2009년 볼리비아의 한 폐쇄적 기독교 마을에서 100명이 넘는 여성들을 소 마취제로 기절시키고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소설 원작 영화인데요. 이 작품은 이야기의 배경을 캐나다로 옮겼을 뿐, 실제 배경과 거의 유사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여성 캐릭터는 모두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로 등장합니다. '오나'는 강간범의 아이를 임신 중이고, '샬롬'은 강간 피해를 당한 네 살배기 딸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메알'은 강간당한 후유증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고, '그레타'는 누군가의 폭력으로 인해 치아가 다 부러진 상태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자는 사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이뤄졌습니다. 마을 여성들은 악마의 짓, 사탄의 행태, 터무니없는 상상력으로 치부된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왔죠.
그러던 중 강간을 시도하려던 가해자가 처음으로 목격되면서 공동체의 남성들이 가해자의 보석금을 내주기 위해 마을을 비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사이, 여성들은 처음으로 토론이라는 것을 하게 되죠. '남성들을 용서하고 천국에 가는 것과 용서하지 않고 지옥에 가는 것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떠나야 하는가?', '떠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인가?', '억지로 하는 용서도 용서인가?' 한 번도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지만 그들은 민주적으로 투표하고, 한 번도 마음껏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들은 열성적으로 토론합니다.
성폭행 가해자를 위해 보석금을 내주러 간 몽매한 남성들 덕분에 무지를 강요받아 온 여성들은 처음으로 생각할 권리를 되찾습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마을의 여성들은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헛간에 모여 고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들 주위에는 주체성의 아우라가 기쁘게 뿜어져 나옵니다. <위민 토킹>은 주체적으로 대화하는 여성들의 대사와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발언하는 인물들을 바스트 샷으로 촬영하고 흑백에 가까울 만큼 화면의 색채를 제거했죠.
⊙ ⊙ ⊙마을의 여성들은 모든 남성들을 버리고 공동체를 떠나기로 합니다. 이는 가해를 저지르지 않은 마을의 남성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저 남성일 뿐인데, 가해자와 같은 취급을 받고 버려지는 거니까요. 극중에도 비슷한 의문을 갖는 여성이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가해자가 아닌데, 우리는 왜 모든 남자들을 떠나야 하는가?" 이에 대해 '오나'는 이렇게 답합니다.
Perhaps not men, but a way of seeing the world, and us women.
남성들은 문제가 없을지도 몰라. 문제는 세상과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점이지.
그렇다면 마을의 여성들을 지지하고자 하는 남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을 여성들의 헛간 토론장에는 '아우구스트'라는 남성 한 명이 있습니다. 오래전, 마을의 실체를 깨달은 부모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가 '오나'를 향한 연심으로 마을에 돌아온 인물이죠. 그는 가해자 석방을 위해 보석금을 내러 가는 대신, 글을 쓸 줄 모르는 여성들을 위해 회의록을 써줍니다. '아우구스트'는 그저 묵묵히 여성들의 토론 내용을 정리할 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성인 자신은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죠.
마을의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우구스트'처럼 가만히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하듯이, 남자아이들만큼은 달라질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겠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어린이들에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안전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배우고, 나아갈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이런 것조차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성들이 마을을 떠나게 두는 것,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지가 되니까요.
⊙ ⊙ ⊙더럽혀진 '페미' 논쟁 속에 숨은 진짜 페미니즘이 궁금하신가요? 그럼 페미니즘을 향한 날 선 감각들은 잠시 접어두고, <위민 토킹>으로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해 보세요. 마을 여성들의 토론장에는 페미니즘의 본질과 스펙트럼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 영역에서 성별에 관계없는 평등을 꿈꿉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은 넓은 범위로 존재합니다. '오나'가 용서와 복수 대신 남성들을 떠나자고 말하는 한편, '마르케'는 마을을 떠나는 것마저 망설이는 것처럼요. 페미니즘은 절대 한 가지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극 중에서 '오나'는 뭘 무너뜨릴지가 아니라 뭘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페미니즘도 이와 같습니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을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화 감상 후, 엔딩 크레딧 끝자락에 들려오는 잔잔한 자연의 백색 소음과 새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자잘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평화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안전하고 동등한 공동체, 여성들이 꿈꾸는 것은 단지 그뿐입니다.
Schedule in SIWFF2023.08.26(토)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19:302023.08.28(월)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16:00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 08월 24일 -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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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전생'에서 깨진 인연을 지금 다시 붙이고 싶다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감독 : 셀린 송
출연진 : 그레타 리, 유태오, 존 마가로
울보 나영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나영이다. 외로운 삶. 어린 나영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영에게 기댈 수 있는 그늘이 있다. 같은 학교 친구 해성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항상 해성과 함께했다. 사실 왜 둘이 집을 같이 갈까 3자가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쉽다. 다만 서로가 각자의 마음을 알기엔 너무 어릴 뿐이다.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나영 가족. 이미 나영의 부모는 나영에게 ‘노라’라는 영어 이름을 붙여줬다. 이별이 다가오는 둘. 나영은 해성에게 ‘나 이민 가. 한국에선 노벨상 못 받으니까’라고 전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해성이다. 1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했다. 분명히 노라는 날 좋아했었다는 미련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떠나기 며칠 전에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페이스북으로 사람을 찾는다. 이름은 문나영.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사실만 알았지 이름이 ‘노라’가 됐다는 건 아예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 연락이 오겠지? 기다리고 있는 해성. 그날은 해성의 친구가 연인과 헤어진 날이었다. 펑펑 우는 친구 옆에서 해성은 어쩔 줄 모르고 있다. DM 알림이 온다. “안녕. 나 나영이야.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나영이, 아니 노라에게 연락이 왔다. 미국과 한국, 뉴욕과 서울이라는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된다.
넘버 3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셀린 송이다. 영화가 흥미로웠던 점은 이야기 곳곳에 이 셀린 송이라는 인물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셀린 송의 부친은 송능한 감독이다. 송능한 감독은 연출로 데뷔하기 이전에 임권택의 <태백산백>을 비롯한 몇 작품의 각본가로 활약했다. 충무로에서 나름의 명성을 쌓은 송능한 감독. <넘버 3>를 발표하며 금세 한국영화의 기대주로 올라선다(최근의 한국영화를 바탕으로 하면 아마 엄태화 감독쯤 됐을 것이다). 차기작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기말>을 발표하는 송능한 감독. 하지만 영화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며 흥행에 실패한다. 이민을 결심한 송능한 감독. 미국으로 떠난다.
영화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극 중에서 나영의 아버지 직업이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왜 아버지가 이민을 결심했는가’에 대해선 ‘설명하기 복잡하다’로 끝난다. 부친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가 어느 정도는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영화가 주인공 나영이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직업을 ‘시나리오 작가’라고 설정했다. 실제로 셀린 송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극작가(Playwriter)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작중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에게 여동생이 있다. 실제 셀린 송 감독에게도 여동생이 있다. 감독의 남편 역시 실제 배우의 외모와 닮았다. 작중에서 노라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실제 셀린 송 감독의 남편 사진을 찾아보면 이와 유사하다.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있어 많은 부분을 어디에서 착안했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백을 비추는 카메라
이 영화의 강점은 감정전달에 있어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앞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자기가 잘 아는 것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덕에 장면마다 정보를 더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이 안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노라와 해성이 성인이 되고 나서 대면하는 신이 그 예다. 두 사람은 거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걸 온갖 대사로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딱 한 문장으로 끝내되 대신 다른 장면에서 인물들과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표적으로 나영이가 울보라는 설정이 그렇다. 나영이는 잘 울었다. 하지만 봐줄 사람이 없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감정을 표현해도 울보라는 것을 알아봐 줄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울 일도 줄어들었다.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노라의 성격이 변한 것이다. 반대로 해성이의 경우는 인물의 성격이 10대/20대 큰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까지 본다면 20대의 해성과 어린 시절의 해성이 둘 다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중간에 군 생활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의 시간이 12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체감하기 어렵다. 특히 가족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그런데, 둘을 비추는 방식은 별 차이가 없다. 시각적으로 이들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연출해 실질적으로 변한 건 드물다는 것을 암시하는 연출이다.
또 영화에서 흥미롭게 리듬을 변주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시차다. 두 사람의 시차는 영화에서 첫 대면신에만 설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시차가 영화에서 내포하는 바는 의사소통의 균열이다. 이 균열이 일어나는 장면이 인물들의 관계마다 다 묘사되어 있다. 아마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술집의 장면은 주인공 해성-노라 / 노라의 남편으로 대화 구조가 짜여있다. 둘/하나로 나뉘는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노라의 남편은 한국어를 못한다. 그래서 둘은 내면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언어로 시차를 둔 것이다. 이 시차는 두 주인공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12개월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번 끊는다. 여기에서 해성과 노라가 연애를 시작한다. 해성이는 사랑을 끝내는데 반면 노라는 남편을 만나는 장면도 두 사람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 신에서는 노라가 직접('네가 원하는 나영이는 이제 없어')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해성이가 원하는 현재와 노라가 이해하는 과거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해성이는 노라가 나영이의 모습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기 바라기 때문에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영화는 시차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드러내고 있고, 이를 두 인물이 가진 고유의 리듬을 비틀면서 전개한다
뜨겁게 뜨겁게 안녕
이 영화를 만든 셀린 송 감독은 이 영화를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글쓴이에게 있어 ‘새롭게 시작한다’라는 의미는 시차와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시차를 두는 일과 유사하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한다. 쉽게 털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래 가슴에 품는 이도 있다. 이 후회는 과거의 내가 보지 못했던 걸 현재의 자신이 알고 있다는, 일종에 시차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영화는 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내가 알지 못했던 걸 지금 고치기 위해 노라에게 간 해성. 하지만 과거의 내가 알든 현재의 내가 알든 그건 노라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해성이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이 과정을 깨닫는 해성의 내적 성장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또 사실상 노라의 현재를 상징하는 남편 캐릭터를 진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당신에게 현재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한다. ‘전생’에 있었던 그 모든 사건보다 현생의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유태오 배우는 열연을 펼친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의 중심 부분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회전목마 신에서는 이 인물이 그동안 품어왔던 그리움을 표정으로 보여준다. 네가 그리워라고 주절주절 떠드는 것 없이, 단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응축한다. 아마 유태오 배우가 이 감정에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유태오 배우가 참석했다. 유태오 배우는 “이 시나리오를 받고 울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술집에서 대화하는 신이다. 여기서 해성을 보면 영어에 서투른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영어를 못해서 대충 눈치로 넘기는 장면을 보면 '정말 영어 못하나 보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인 유태오 배우는 영국과 미국에서 연기를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기로 이 부분을 돌파한 셈인데, 유태오 배우가 연기에 얼마나 이 장면을 잘 이해하고 있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에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10월 9일 오후 12시 30분에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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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 The Pianaist
/ 감상 /
_ 사실 저번에 본 피아니스트보다 이 피아니스트를 더 보고 싶어했었는데...
전쟁의 참상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인 것 같다.
내가 여태 본 전쟁영화는 대부분 군인들의 전쟁터에서의 삶을 보여준다거나,
수용소에서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이 영화는 실제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갔던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성을 극대화 시키고 보는이로 하여금 공감을 잘 이끌어 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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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슈필만의 인생의 버팀목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낙담하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질때면 피아노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더이상 가라앉지 못하게 지탱해준다.
그리고, 그의 목숨을 실제로 살려주었다.
후반부에서 독일장교를 만났을 때, 만약 슈필만의 직업이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떘을까?
과연 슈필만을 살려주었을까 싶다.
피아노의 선율에 녹아들어간 슈필만의 감정이 장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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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씬은 앞에서 말한 슈필만이 장교앞에서 연주했을때이다.
슈필만이 그렇게 치고 싶어했던 피아노..
그는 이게 자신의 마지막 연주라 생각하고 모든 감정을 담아 연주하였던 것 같다.
그 장면을 보고 전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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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젠펠트가 결국 슈필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된다.
난 호젠펠트의 마지막에 대하여 그리 안타깝지 않다.
그가 아무리 슈필만을 도와주었어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집단의 우두머리 급이었으니
그거대로 대가를 치르는게 맞다고 본다.
그를 인정하는건 그 이후에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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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연기에 박수를..
난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그 특유의 우울하고 슬픈 연기가 너무 좋다.
아련하고 우울한 연기 원탑 에이드리언 브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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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요즘 시대의 자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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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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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본> 예고편
한물간 여배우 리나 오닐은 곧 개봉할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의 영화에서 배역을 따내 재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16년 전 출산 도중 사망한 딸을 향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연기에 집중하지 못한다.
한편, 사산되었다가 전기충격으로 되살아난 소녀가 한 영안실 직원에게 납치된다.
감금된 채 성장한 소녀는 16살 생일에 탈출해 친엄마를 찾아 나선다.
소녀는 친엄마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하여 방해되는 사람들을 하나둘 처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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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작은 방안의 소녀> 메인 예고편
친구의 괴롭힘에 못견딘 희주는 자퇴하고 집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다. 그리고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만난 동하를 통해 자신감을 얻는 방법을 배운다. 동하는 펜둘럼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최면을 스스로 걸기를 알려준다. 그리고 채팅으로 만난 자신과 같은 히키코모리들을 격려한다. 1년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던 희주는 점점 자신감을 얻으면서 드디어 방을 탈출한다. 그리고 희주모와 화해도 하며 사회로 나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때 1년전 희주를 괴롭혔던 해영은 그녀의 집주소를 찾아내서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괴롭힘이 시작된다. 희주는 사회에 복귀하려고 하지만 해영이라는 장애물을 만난다. 결국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은 희주는 동하에게 배운 펜둘럼을 통한 최면을 해영에게 이용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해영을 스스로 자살하도록 최면을 걸고 자신은 사회에 온전하게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