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19 23:57:16
기록만이 균열을 낸다
영화 <쑤저우강> 리뷰 + 정성일 평론가 라이브러리톡
DIRECTOR. 러우예
CAST. 저우쉰, 자훙성 외
SYNOPSIS.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쑤저우강. 비디오 촬영기사인 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두 연인 마다와 무단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열렬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연인 메이메이가 있지만 그들과 같은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마다의 사랑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믿었던 메이메이는 마다와 무단의 시체를 보고는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에게 마다와 같은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요구를 무시해 버린다.
POINT.
✔️ 미장센이 아름답고 감성이 세기말이에요. 이거 안 좋아하는 법 아시는 분?
✔️ 사랑은 역시 지난 세기의 사랑이 진짜다... 낭만주의적 장면
✔️ 그리고 거기 남아 있는 깊은 역사적 의미. (정성일 평론가가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천안문 사태를 목도하고 카메라를 쥔 중국 6세대 감독이 무엇을 담았는지 바라보아야 할 영화.
✔️ 1인 2역을 소화하는 저우쉰의 연기 저력

영화 <쑤저우강>은 블랙아웃된 화면에서, 사랑을 시험하는 연인의 질문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이어 강과, 강을 둘러싼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더러 기울어지고 더러 초점이 맞지 않는, 강과 공사 현장과 배... 같은 모습이 점프컷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이내 내레이션을 이끌고 가는 사람은 카메라 촬영 기사로, 앵글이 1인칭 시점으로 움직인다. 카메라 촬영 기사는 동네 술집인 '해피 바' 사장에게 인어 분장을 하고 수조에 들어가 춤을 추는 여성을 촬영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어 역할을 한 메이메이와 사랑에 빠진다.
가까이에서 연인을 보는 카메라는 이런 느낌이구나. 보이는 거라곤 상대 뿐이라, 사랑에 빠진 시선은 타이트해진다. 맹목적으로 상대를 본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꽉 차지 못한다. 메이메이가 연인에게 던진, 사랑을 시험하는 질문 이야기로 한 겹 더 들어간다. 메이메이의 표현에 의하면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쳐갔다는 남자 마다의 이야기로.

촬영 기사는 마다와 그의 연인 무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다소 혼란스러워지는데, 이야기가 피자치즈처럼 하나로 쭈욱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마치 페이스트리처럼 베어 물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황상 마다와 무단의 사랑 이야기는 메이메이가 촬영 기사에게 들려준 것인데, 이야기를 관객에게 서술하는 사람은 촬영 기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궁금했던 건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하는 것이었다. 0에서 100까지의 스펙트럼 전체가 가능성이었다. 마다와 무단이 실존인물일 가능성과 그냥 도시 전설일 가능성. 메이메이가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 메이메이의 이야기에서 촬영기사가 변형시켰을 가능성.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고, 마다와 무단 이야기의 진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펼쳐지는 쑤저우 강의 흐름에 묶어서 나는 막연하게 느꼈다. 강은 아름답기만 한 곳도 아니고,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생명의 젖줄'이기만 한 곳도 아니다. 때로는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사람을 삼키는 강 위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어나고 흘러간다. 영화 초입에 보여주었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강에 계속해서 누덕누덕 기워진다. 역사는, 인간사는 결국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윤슬처럼 무언가 반짝 빛난다. 도저히 인어가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희뿌연 강에서 (애초에 강에 인어란 생물체도 없지만) 사람들은 반짝이는 인어의 환상을, 깨진 사랑의 이야기가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본다. 공장 굴뚝 연기와 짓다 만 공사 현장의 투박한 사이로, 그런 이야기들이 반짝반짝 살아남아 흘러간다.
어디까지가 만든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강을 따라 흐르는, 누덕누덕 내려앉은 이야기 중에는 사랑도 이별도 망설임도 추억도 있다.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도 애틋한 도시 전설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이야기는 어쩐지 허무하게 끝나고, 페이스트리처럼 후두둑 떨어진 이야기 조각들을 보며 나는 슬퍼진다. 강에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후두둑 떨어지고 또 누더기처럼 덧대어지며 흘러가겠지. 어찌 보면 허무하고 암담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계속 붙이는 주체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끌어 가지만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는 촬영 기사 같은 존재를 생각한다. 이야기를 남기고 재구성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도도한 시간의 흐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건 결국, 인간의 기억과 기록 뿐이다.

왕가위 영화가 생각난다는 평이 많았는데, 내겐 그다지 왕가위 생각이 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냥 이 영화 자체로 고유했고, 영화가 주는 에너지가 커서 좀더 곱씹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시작된 라이브러리톡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커서, 일부분만 요약해서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정성일 평론가는 러우예라는 감독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다. 러우예는 학생 시절이었던 1989년 천안문에서 민주화 항쟁과 광장에서의 학살을 목격했다. 그의 첫 영화 <주말정인weekend lovers>는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순회했지만, 정작 중국 당국의 검열로 2년간 영화 촬영을 금지당했다. 그는 다음 영화를 찍기까지 5년 가량을 기다려야 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쑤저우강>이다. 그는 이 영화로 또 다시 1년간 촬영을 금지당한다. 다음 영화 <자호접>은 1931년 반일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하면서 좀 체제 순응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2006년 대놓고 1989년을 배경으로 한 <여름 궁전>을 내놓는다. 정성일 평론가의 표현을 빌자면 러우예의 "폭탄 같은" 영화였다. 결국 그는 또 다시 5년 동안 영화 촬영을 금지당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러한 배경을 상세히 풀어내며, 그렇기에 이 영화를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천안문 이후의 절망과 실패, 좌절 등이 담겨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이었기에 직접적인 알레고리를 사용할 수 없지만, 지극히 간접적인 알레고리를 넣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은 이를 느끼고 촬영을 금지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안문 이후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개방, 정치적으로는 폐쇄를 지향하는 이중의 정책을 펼쳤고, 이 영화는 그 이후 중국 인민들의 정신과 마음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혼탁한 진흙탕 같은 물. 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서사. 마치 유리잔을 깨뜨려 파편을 사방으로 흩듯, 의도적으로 그렇게 찍은 영화라고 했다.
2000년 당시의 중국 상황과 끊어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고 하면서도, 정성일 평론가는 우리가 중국 내부인이 아니라는 한계를 명확히 언급했다. 검열을 당하는 국가에서 알레고리는 지극히 간접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외부자의 해석은 언제나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언제든 교정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타는 열정으로 해석에 접근하는 능동적인 마음과,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외부자의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발언이라 인상 깊었다.

"왕가위의 아류"라는 흔한 해석 또한 정성일 평론가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런 해석은 왕가위도 납득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탁류 위를 흘러가는 배 같았던 당대의 중국 상황과, 길 잃은 듯 돌아다니던 <중경삼림> 시기의 홍콩 상황은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했다. 반환 앞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홍콩의 상황보다, 떠돌아다닐 수도 없이 수동적으로 흘러가야만 했던 당시 중국의 절망적 감정을 담은 것이다.
더불어, 왕가위의 점프컷은 세심하게 모두 쪼개어 이어붙인 느낌이지만, 러우예의 점프컷은 노골적인 NG컷까지 포함함으로써 찍은 풋티지를 모두 보여주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차이점도 짚었다. 이는 영화의 서술자가 카메라 촬영 기사임을 생각할 때 더욱 절묘한데, 중국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게 익명의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찍은 것을 모두 보여주는 형태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1인칭 기법을 서방 세계의 미학적 해석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상황에서 관객과 영화를 이어주는 매개로 자리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설명이 마음을 울렸다. 언제든 중단될 수 있을 만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핸드헬드, 서사와 무관한 쇼트까지 포함한 느낌으로 의도된 편집 또한 그 느낌을 뒷받침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설명을 들으며, 아무리 제재와 검열이 아스팔트처럼 뒤덮어와도 예술은 한 평 땅의 흙처럼 숨 쉴 구멍의 역할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일갈한, 최근 한국 독립영화의 '나(자신)만 불쌍'하게 보는 시각 또한 한편으로는 비판받을 지점이라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2024년의 한국 현실과 공명하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사회를 배경으로 피어난다.
영화와 설명까지 모두 끝난 자리, 내겐 동일하게 한 문장이 남는다. 기록만이 균열을 낸다. 사회의 거대한 기조, 도도한 시간의 흐름, 괴로운 현실에...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는다 해도, 기록하는 손의 방향성만큼은 뚜렷하게 남아 균열을 낸다. 지금 우리는 무슨 균열을 낼 수 있는가. 사유하고 반응하고 싶은 마음으로 탁류를 응시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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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결의 사랑에 기대어
SYNOPSIS.
뉴욕 맨해튼에서 홀로 외롭게 살던 ‘도그’는 TV를 보다 홀린 듯 반려 로봇을 주문하고 그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해수욕장에 놀러 간 ‘도그’와 ‘로봇’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려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데··· “기다려, 내가 꼭 다시 데리러 올게!”
POINT.
✔️ 대사 없는 애니메이션인데, 대사 공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촘촘한 연출력!
✔️ 색감도 아름답고 음악도 귀에 딱 붙는 명작
✔️ 도그와 로봇의 관계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몽글몽글... 이건, 사랑입니다
✔️ 스페인 애니 낯설다고? 배경은 뉴욕 맨해튼! 감독 오피셜, 뉴욕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뉴욕 오마주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정서가 펼쳐져요.
✔️ 칸영화제 특별 상영에서 최초 공개되어, 지금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로 노미네이트! 쟁쟁한 기술력의 작품들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작품을 만나 보세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는 순간, 보기도 전에 마음이 퐁당 녹았다. 따뜻한 관계와 갑작스러운 이별... 그 애틋함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까. 뚜껑을 열어 보니, <로봇 드림>은 그런 기대를 기분 좋게 충족시키는 영화인 동시에, 뜻밖의 면면으로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어떤 사랑은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도그를 비롯해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어렵지 않게 도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차갑고 어두운 도시의 밤, 2인용 게임도 혼자 해야 하는 도그는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캐릭터다. 창문으로 보이는 이웃집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부러워 하기도 하고, 레토르트 식품을 혼자 데워 먹기도 하면서, 그는 외로운 생활을 채워 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텔레비전 광고 속에서 보게 된 한 마디. "외로우십니까?" 그리고 마치 홀린 듯이 '반려 로봇'을 주문한다. 그냥 지나치려면 지나칠 수도 있었을 광고를 보게 된 것, 그런 순간도 어쩌면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을까? 답은 광고 이후의 관계에 달렸을 것이다. 두 존재가 특별하게 맞닿는다면, 그 시작점이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겠어.
'친구'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Amigo/Amiga를 연상케 하는 (이탈리아어로 친구가 Amico/Amica이기도 하다) 로봇이 배달되고, 도그는 조립을 시작한다. 마침내 두 존재가 서로 눈을 마주쳤을 때, 둘에게는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어떤 사랑은 그렇게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당연한 것처럼, 더없이 자연스럽게.
둘은 더없이 행복하다.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는 곧 둘의 주제가가 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도시의 주인공이다. 더이상 도그에게 어둡고 차가운 밤은 없다. "우리가 밤에 춤을 출 때 별들이 어두운 밤을 걷어가던 걸 기억하나요?" 노래 가사처럼 이제 그의 일상은 반짝거리고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리움은 사랑의 그림자
그러나 둘의 관계는 신나게 해변을 찾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이별로 귀결된다. 이후 둘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장면 하나하나가 정서를 어찌나 고스란히 담아내는지, 내가 연애하다가 헤어진 기분이 들 정도로 도그와 로봇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꿈결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어쩌면 꿈처럼 기묘하게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트라우마처럼 남은 꿈에도, 무지개와 꽃으로 아름다운 꿈에도, 서로가 어른거린다. 그리움은 사랑의 해질녘 그림자가 아닐까. 사랑이 긴 만큼 더 길고 검게 늘어져, 둘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돌봄의 방법을 아는 것
로봇과 도그는 서로의 유일무이한 친구로서 우정을 주고 받았을 수도, 아니면 독점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연인 같은 관계였을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거니와, 관계를 무엇이라고 명명하는지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둘이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을 온전히 기쁘게 즐겼고, 헤어지고서는 깊이 그리워했다는 것. 웬만한 로맨스 영화보다 깊게 그 기쁨과 슬픔을 전달한 영화는 이내 결말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관계에서 배운다. 처음 로봇이 도그의 손을 너무 꽉 잡아 아팠지만, 이내 적절한 세기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만남을 통해서도, 만남이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서도, 헤어짐을 통해서도, 헤어짐 이후의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는 배운다. 도그와 로봇이 주고받는 마음과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내 사랑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하나를 슬며시 추가하고 싶어진다. 그건 돌봄이다. 서로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아는 것. 돌봄 없는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성 같다.
2시간 넘는 영화가 남발하는 세상에, 100여분의 산뜻한 러닝타임 안에서 영화는 그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쏟아내고, 별사탕을 가득 받은 사람 같은 기분이 되어 기분좋게 영화관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모두가 별사탕처럼 사랑스러운 것들만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나는 어쩐지 도그와 로봇에게서 자꾸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읽어내게 된다. 동물이 숱하게 유기되고 학대 당하는 사회에 살기 때문이겠지만, 서로를 기억하고 주고받는 감정은 분명 대등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한쪽을 구매하는 형태로 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어쩐지 마음에 자꾸 남는다.
하긴, 반려동물과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사랑 모두를 아우르는 커다란 마음이니, 그렇다고 해도 꼭 이상하지는 않겠다. 내게도 몇 년째 꿈결에 그리워하는 동물 얼굴들이 있으니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들을 생각하면, 로봇과 도그의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헤어지지 말자. 이 위험한 도시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일상의 낭만과 행복을 들이마시자. 우리만의 노래를 틀자. 그리고 혹시 헤어진다면, 꼭 다시 행복해지자.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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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스트 스토리> - '가벼운 영혼의 손으로 쓰다듬는 이별'
고스트 스토리 (A Ghost Story)
개봉일 : 2017.12.28. (한국 기준)
감독 : 데이빗 로워리
출연 : 케이시 애플렉, 루니 마라, 그로버 콜슨, 윌 올드햄
‘가벼운 영혼의 손으로 쓰다듬는 이별’
지독할 만큼 고요하게 변한 집안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추억은 무거운 슬픔과 고통이 되어 남은이를, 다시 돌아온 이를 짓누른다. <고스트 스토리>는 그런 이야기다.
<고스트 스토리>의 포스터만 보면 8월에 잘 어울리는 공포영화일 것 같고, 예고편을 보면 <사랑과 영혼>같은 판타지 로맨스일 것 같다. 만일 포스터와 예고편만 보고 ‘무서울 것 같아서’, ‘로맨스는 싫어서.’ 이 영화를 넘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영화가 주는 무게와 여운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한다.
“사랑하는 이가 내 옆을 떠나면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해 보고, 그런 꿈을 꾸고 눈물 흘렸던 적은 있었지만, 오히려 떠났던 이가 돌아와 나를 기다릴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고스트 스토리>에선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 C와 M이 나온다. 어느 날, C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M은 실의에 빠진다.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 묻은 집안에 홀로 남겨진 M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영혼만 남은 C는 유령이 되어 자신의 기억을 찾아 집으로 돌아온다. M은 떠난 C를 그리워하고, C는 M의 곁으로 돌아와 M의 모습을 지켜본다.
내 눈엔 그녀가 보이지만, 그녀의 눈엔 내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보여서는 안 될 것 같다. 남겨진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무겁고 슬픈 떠난 자의 시선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완벽하게 고요하고 차갑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흐를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담긴 조잘거림이 아닌 적막뿐이라는 사실이 숨 막히게 슬프다.
고스트 스토리 시놉시스
사랑을 잃다
교외의 작고 낡은 집 - 작곡가인 C와 그의 연인 M은 조용하지만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C는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M은 무거운 슬픔에 잠긴다
사랑을 기억하다
창백한 조명의 병원 영안실 -고스트가 되어 깨어난 C는 마치 홀린 듯 M이 기다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무는 그녀와 고스트는 사랑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무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뎌낸다
사랑을 잊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집 -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헤어지며 상실의 시간을 지나온 M은 결국 집을 떠난다. 남겨진 고스트는 영원히 그녀를 기다릴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C와 M은 교외에 위치한 한적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젊은 연인이다. 화려하고 넓은 집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아늑한, 어딘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집이다. 작곡가인 C는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며 연인 M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집이 마음에 든다. 그에 반해 M은 더 깔끔하고, 시내에 가까운 집으로 이사하고 싶어 한다. 다정하게 누워 이사에 대한 기억을 나누던 중, M은 이사를 할 때면 메모를 남겨 떠나는 집에 숨겨놓는다고 말한다.
“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반겨주는 것이 있었으면.”
M은 돌아올 확률이 없단 걸 알지만, 혹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나를 반겨주는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쪽지를 남긴다고 말한다. 큰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더라도, 그냥 이 집에 살면서 좋았던 기억들, 마음에 들었던 것들. 또는 노래 가사나 시 같은 것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시 돌아왔을 때, 이전의 내가, 나의 기억이 반겨준다면 외롭거나 쓸쓸하진 않겠지.
“이 집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려.”
C의 사고가 있기 전날 밤, 1층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에서 쿵-소리가 난다. 화가 난 무언가가 힘껏 내리친듯한 소리. C와 M은 급하게 1층으로 내려와 거실을 확인해보지만 그 어떤 것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그날은 C에겐 마지막 날이 되었고, M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날이 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영안실, M은 홀로 서서 C의 시신을 마주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 바라보는 M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M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현실을 외면하듯 C의 얼굴 위에 천을 다시 덮는 것 외에는. M은 크게 울 힘도,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지 않았다.
M이 떠나고, C는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이내 하얀 천이 불쑥 솟아오른다. C는 무거웠던 몸을 내려놓고 영혼만 남아 유령이 된 채 병원 복도를 걷는다. 보이지 않는 C의 존재를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령이 된 C의 앞에 밝은 빛이 넘쳐흐르는 문이 열리지만, C는 그 문을 바라만 볼 뿐이다. 문은 그의 뜻을 알았다는 듯 사라지고 C는 당연하게도 집으로 향한다.
M에 대한 사랑이, 미련이 너무 깊어서. 혼자 남겨진 M이 걱정돼서. 우리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서. C가 집으로 향한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광활한 땅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도착한 C는 문쪽에 서서 M을 지켜본다. 이제 두 사람의 집이 아닌 M만 남겨진 그곳은 지독히 고요하고 적막하며, 시린 공기가 흐르는듯하다. M은 주방에서 말없이 파이를 퍼먹는다. 미련스러운 일이란 걸 M도 알고 있었겠지만, M은 멈추지 않고 파이를 먹는다. 약 5분에 걸쳐 우악스레 파이를 퍼먹던 M은 결국 먹은걸 전부 게워낸다. M은 다시 살기 위해 억지로라도 숨을 쉬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 파이를 토해낸 순간,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C는 그런 M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지만, 영혼만 남은 C의 손은 예전 같은 따스함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C는 어떤 수를 써도 사랑하는 M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슬픔을 누르려는 듯 파이를 욱여넣던 날이 지나고, M은 이불을 정리한다. 그리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외출을 한다.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온다. 유령이 된 C는 같은 자리에서 M을 지켜본다. 남겨진 사람이라 생각했던 M은 조금씩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떠난 사람이라 생각했던 C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우리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그녀가 다른 누군갈 찾아? 날 두고 떠났어”
C를 떠나보낸, 남겨진 사람 M은 자신의 세계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는다. C는 새로운 남자의 옆에 있는 M을 보고 화가 난 듯 책을 떨어트리고 전등을 흔든다. C는 아직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M은 바닥에 누워 예전에 C가 들려줬던 노래를 듣는다. 남자를 남겨두고 떠난 여자와 홀로 남겨진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였다. 노래를 듣던 M의 손이 C가 서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M이 손가락만 살짝 펴도 닿을듯한 거리. 하지만 M은 이내 손을 오므리고 C와의 거리는 다시 멀어진다. 그렇게 M은 C에게서 멀어진다.
M은 함께했던 흔적을 지우고 짐을 싼다. 그리고 언제나 했던 것처럼 집에 쪽지를 숨겨놓는다. C는 홀로 남겨진다. 자신이 들려줬던 그 노랫말처럼. C에게 남은 건 집에 깃든 둘의 추억과 M이 남겨놓은 쪽지뿐이다.
“누굴 기다리고 있어요.”
유령이 된 영혼들은 생전의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을 다시 찾는다. C와 M의 옆집에도 C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유령이 산다. 두 유령은 각자의 창 앞에 서서 인사를 나눈다. 유령들은 추억과 사랑, 미련이라는 창틀에 갇힌 듯 창을 넘어가지 못한 채로 그 앞에 서있을 뿐이다. 누굴 기다리는지도, 무엇이 그리운지도 명확히 모르는 상태로 말이다.
C는 M이 떠난 후에도 집을 떠나지 못한다. 이전부터 집을 떠나고 싶어 했던 M은 집에 홀로 남겨지자 슬픔과 추억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나고, 집을 떠나지 않고 싶어 했던 C는 여전히 이 집에 남아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M이 C에게 이 집이 좋은 이유를 묻는 장면이 있다. C는 “추억이 있잖아.”라고 답한다. C는 추억에 묶여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결국, 무엇을 하든, 팽창하는 우주에서 사라질 것이다.”
집에서 시끌벅적한 파티가 열리던 날.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우주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연설을 하던 예언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무한하게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그것은 의미가 없고,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C의 존재가 그렇다. C는 M의 쪽지를 꺼내기 위해서 사람을 내쫓고, 무게가 사라진 손을 내밀어 문틀을 긁어낸다. 드디어 쪽지를 손에 쥔 순간. 집이 무너져내린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C는 무너진 집 위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C의 노력은 한순간 사라질 아주 작은 것이었고, 집이 허물어지는 순간 C의 미련은 모든 의미를 잃는다.
C의 미련은 C를 다른 시간으로 이끈다. C는 집이 지어지기 전, 첫 정착자 가족의 딸이 쪽지를 적어 바위 밑에 깔아두는 순간을 지켜본다. 그리고 이내 그 가족은 인디언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된다. 아이의 시신이 보이고, 뼈가 보이고, 그 위에 풀이 자라 모든 흔적을 덮어버린다. 아이가 남긴 쪽지도 가족의 시신과 함께 그대로 썩어버렸겠지. 어떤 의미를, 미련을, 추억을 담은 것이든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이든 모든 건 결국 우주에서 사라지게 된다.
“여기 남고 싶어?”
시간은 빠르게 흘러 C와 M이 함께한 순간을 비춘다. 처음 집에 들어서던 날과 C가 이사를 결정했던 날까지. C와 M은 유령이 된 C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셋이 함께 그 집에 추억을 남긴 것이다.
M은 유령이 된 C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C에 비해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긴 M은 영화의 초반, “이 집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득 잠에서 깨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말한다. 유령이 된 C는 당연히 자신이 사랑하는 M의 곁을 맴돌았을 테고, C에게 C의 유령은 또 다른 자신이었으니 M만 홀로 유령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다.
M은 꺼림칙한 이 집이 아닌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C를 설득한다. C의 유령은 C와 M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C가 이사를 결정하자 피아노 앞에 털썩 앉으며 쿵 소리를 낸다. C의 유령은 이사를 결정했던 그 밤을 후회했을까?
시간은 다시 흐르고, M은 집을 떠난다. C는 다시 홀로 남겨진다. C는 집이 철거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M의 쪽지를 다시 찾아낸다. 그리고 쪽지를 보자마자 사라진다. 이승에 남아있어야만 했던 미련이 사라진 것이다. 유령들은 미련과 기억을 갖고 그 장소로 돌아온다. 떠나는 게 아닌, 남겨진 사람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문다. 옆집에 있던 유령은 집이 철거되자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거란 걸 깨닫고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난다. C는 M의 쪽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M의 쪽지엔 어떤 내용이 적혀있었을까? 이 집에 있으면서 행복했던 추억? 아니면 C가 들려줬던 노래의 가사 한 구절? 예상컨대, C가 미련을 가질 만큼 큰 의미를 담은 쪽지는 아니었을 것 같다.
떠났을 거라 생각한 사람은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오랜 시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곳을 떠돈다. 남겨진 거라 생각한 사람은 떠난 사람을 뒤로 밀어두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떠난 사람의 시간은 남겨진 사람이 떠난 순간부터 그 자리에 멈춘 채,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남겨지는 날은 생각해 본 적 있어도, 먼저 떠난 내가 미련에 끌려 돌아온다는 건, 그것도 남겨진 사람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는 건 상상해본 적 없다. 미련과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더 이상 흐를 수 없는 떠난 자의 시간이 이토록 무겁고 시릴 줄은 몰랐다. 떠난 사람을 생각하며 왜 먼저 떠난 것인지 원망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도 미련이 남아있다면 그 또한 지겨울 만큼 아파하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결국은 사라질 추억이고 사랑이고 미련이지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 덧없는 감정에 휘둘린 채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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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트 블란쳇의 괴물 같은 지휘에 내내 압도당하다
성공이란 이런 것
성공이란 이런 것이다. 인터뷰 대기 중인 타르.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청중 앞에 섰다. 인터뷰의 취지는 새로운 책을 홍보하는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눈다. 대화가 시작된다. 첫 번째 주제는 성별에 관한 이야기다. 남/녀 지휘자를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에 관한 질문이다. “아니요. 큰 차이점은 없는 것 같아요. 우주 비행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영어 발음을 들려주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설명한다. 다른 소재는 타르의 파트너다. 특별한 성 정체성이 타르의 마에스트로 생활에 지장이 갔냐는 질문이다. 딱히 없다. 다른 주제는 지휘자에 역할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 지휘자들이 인간 메트로놈이 된다는 것에 동의하나’는 질문이다. 다음 주제는 객원 지휘자와 메인 지휘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다. 의견을 설파하는 타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베를린의 마에스트로답게 답변에 머뭇거림이 없다.
누가 봐도 타르는 성공한 인물이다. 물론 클래식계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팬데믹의 영향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업계 최고의 입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타격까지는 오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리디아. 오늘도 여지없이 일을 하고 있다. 리디아의 수행비서로는 프란체스카가 있다. 일정을 공유하는 프란체스카. 그런데 이유가 무엇인지 프란체스카에게 뭔가 이상이 있는 듯하다. 관객들만 아는 찜찜함은 일단 뒤로 무시한다. 대학교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는 리디아. 어떤 남학생이 수업에 들어왔다. 리디아는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 교수로서 존경도 받고. 성공한 마에스트로로서 명예와 권위를 쓸어 담고 있었다. 이제, 그 높은 위치에서 조금씩 비틀대기 시작한다.
곡선으로 휘기
이 <타르>는 불친절한 영화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명확한 서사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보통 a라는 일이 있으면 b가 그 결과로 따라온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영화 문법 중 하나다. 당연하다. 우리가 아는 세상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화법은 그런 쪽이 아니다. 리디아가 처하는 수많은 상황이 있다. 이 갈등의 배경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실제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는가? 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리디아와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선배 마에스트로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연출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할 것 같은 리디아의 마에스트로 활동과도 관련이 있다. 이 장면들이 어떤 식으로 연출됐는가? 는 후반부 리디아가 어떤 인물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신에서도 알 수 있다(물론 이 장면 아니어도 이런 연출은 자주 보인다).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삭제해서 더 거리감이 있는 시각으로 주인공을 바라보게끔 도와준다.
이렇게 전형성을 탈피한 연출 방식은 영화의 가장 처음, 두 번째 시퀀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이거 이런 영화야’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볼 때 극장에 살짝 늦게 들어갔다. 영화관에 들어가니 상영관에 가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이 나왔다. 그리고 직후에 영화 첫 장면이 나왔다. 첫 장면이 뭐였을까? 바로 엔딩 크레디트이다. 엔딩 크레디트는 보통 ‘엔딩’에서 나오니까 이 장면은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모순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프닝을 시작하는 영화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장면이 굉장히 길다는 점, 바로 직후의 인터뷰 신이 사실상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하는 세 가지 소재였다는 점, 극후반부에 대한 묘한 수미상관이 그에 대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순서를 뒤엎고 시작한 셈이다. 또 앞 문단에도 썼던, 리디아와의 인터뷰는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보통 이런 연출 방식을 가졌던 영화는 차고 넘쳤다. 이번 달 개봉작에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리디아의 행보를 전반부에서 어떻게 수거했는지를 생각하고 보니 <타르 TAR>의 성과가 눈에 들어왔다.
운동과 방향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 중 하나는 방향이다. 영화는 많은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에서 타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신이 몇 번 나온다. 그런데 그 와중에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귀찮은 것이 스크린을 타고 관객에게 까지 전달된다. 이 소음 연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흥미롭다. 어쩔 때는 등 뒤 스피커에서 들린다. 또 어떤 때는 오른쪽 뒤에서 들린다. 이 소리의 방향은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운동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 영화는 한 장소에 또각또각 걸어가는 인물들의 동선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리디아 타르라는 인물이 영화에서 어떤 일에 처하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리디아가 이런 일들을 맞이하는 이유, 자아가 약해서는 무조건 아니다. 오히려 리디아는 자기만의 세계와 예술세계를 확실하게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리디아가 여러 일들에 직면하는 이유는 이렇게 뚜렷한 자기 주관 때문인 걸로 묘사된다. 영화가 이 예술세계로 인해 무너지는 내면을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은 영화에서 가장 큰 신선 함이자 강점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강박과 불안이라고 하는 것의 속성을 탐구한 것이다. 글쓴이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잘 생각해 보면, 아예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을 나이가 들수록 못 봤던 것 같다. 다들 마음속에 불안 하나쯤은 품고 산다. 이렇게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은 늘 일상 속에 있다. 그리고 어디서든 갑자기 튀어나온다. 이는 영화에서 제시되는 음악 중 하나인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의 결함을 어디에서 찾는가?라는 영화의 발상이 <4분 33초>의 접근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매번 생각 외의 어떤 것으로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어떤 것은 빼고 줄이면서 지독한 예술과 삶의 불완전성을 그린다. 처음 느꼈다. 없어지게 함으로써 이 모든 인생사의 일들이 자연재해처럼 느껴지게 하는 표현방식도 있다는 것을.
그냥 어려운 영화가 아니야
이렇게 어려운 영화지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연출하지 않았다. 이런 연출 방식과 신선한 인물서사를 그리는 데 있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다. 이번 아카데미 수상이 유력하다고 알고 있다. 이 값을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러닝타임에서 휘몰아치는 광기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잔잔한 것이 있다. 이렇게 모순적인 설정을 보여주기 위해 이 리디아라는 인물은 내면에서 단단한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이 단단한 내면이 점점 약점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인물은 두 개의 큰 에피소드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혹시?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인물의 내면을 그렇게 놀랍지 않다. 이 글을 쓰는 글쓴이나 읽는 여러분도 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이 봐 왔다. 이건 사실 말이 쉽지 실제로 캐릭터를 구현하고 표현하기는 굉장히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입체적인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타르가 담당하는 대사가 굉장히 많다. 우선 타르가 등장하는 인터뷰 신은 긴 롱테이크 몇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말 많은 인터뷰를 롱테이크로 했다? 안 그래도 많아 보일 것 같은 장면을 어떻게 외웠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이 롱테이크의 장면만 덩그러니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리디아가 처한 입장이 영화에서 다양하게 제시됐기 때문에 표현해야 하는 감정의 폭이 넓어야 한다. 분노, 좌절, 우울함, 즐거움, 행복 같은 감정 이면에 돌아버릴 것 같은 인물의 내면을 품고 있어야 한다. 명확한 인과관계가 없이 끌고 가는 영화 서사를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렇게 구구절절 영화의 특성을 썼다. 이 영화에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굉장히 많다.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불규칙적인 사건 제시로, 위치를 뒤엎어 만든 인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직선적으로는 달리지만 좀 특별한 방식으로 서사를 전복하고 있다. 영화는 전형적인 것을 아예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장면에서 집에 쫓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집에 쫓아간다고 하면 보통 누군가가 사는 공간을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뒤집어진다. 이 어떻게? 의 방식이 영화에서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 중 하나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인물을 낙하시켜 떨어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호하게 표현해서 인물에게 더 집중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집중시키거나 그렇지 못하게 영화를 촬영을 설정한 부분도 흥미롭다. 이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비유나 리다아가 안고 있는 묘한 어설픔, 약간의 섹슈얼한 몇 인물들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또 좀 특이한 제목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영화 제목은 좀 이상하다. ‘타르’와 ‘TAR’가 두 번 들어간 것이다. 타르 타르? 뭔가 과거의 영화 제목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TAR가 총 두 번 반복된다. 이 부분은 흥미롭다. 영화 내적으로 리디아가 작곡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예술과 인생의 상관관계를, 또 둘 중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묘사한 인물 설정이 탁월하다고 느껴진다.
이 외에 아쉬웠던 점은 동양인에 대한 묘사다. 뭐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상대적인 걸 보여주고 싶어 이런 연출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핏 보면 이 나라 사는 분들이 살짝 기분 나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또한 영화의 엔딩 역시 이런 맥락에서 좀 ‘아니다’라고 느낄 분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장면을 지켜보는 입장이 어떤 사람들과 오버랩되는지를 생각해 보니 영화의 모호한 부분이 좀 깔끔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호불호가 갈릴 엔딩이라은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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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문명과 야만의 경계
영화 정보
감독: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 (Tatiana MAZÚ GONZÁLEZ)
제작국가: 아르헨티나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90분
장르: Experimental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프론트라인
Korean Premiere
시놉시스
부에노스아이레스시와 교외의 경계에 위치한 교차로. 경찰의 손에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일상의 이미지와 부딪힌다. 그녀의 투쟁과 목소리는 그들이 함께 상상했던 쥘 베른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다.
리뷰
다큐멘터리 <모든 문명의 기록>은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시작으로 국가가 가행한 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시적인 상상과 강렬한 사실로 엮어낸다. 감독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는 실종된 10대 소년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한 국가가 어떻게 자국민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사건은 비극적이고 충격적이다. 아들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고 실종된다. 그러나 국가와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들의 폭력을 ‘민주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국가가 빈민층에 대해 저지르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 주목해야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보호자가 아닌 억압자, 심지어 가해자 역할을 한다. 아들을 잃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을 찾아가거나, 기다리거나, 울부짖는것 밖에 할 수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이는 국가 폭력의 비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더구나, 경찰이 저지른 범죄는 고작 10년형이라는 형량으로 끝난다. 이는 국가의 폭력과 그에 대한 처벌의 불균형, 정의의 결여를 극명히 보여준다. 아들은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데, 가해자는 10년 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국가 권력의 야만성과 불공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 감독은 이러한 비극을 기록하면서도 그녀는 쥘 베른의 상상 세계를 차용한다. 관객에게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보여준다. 쥘 베른의 작품은 종종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탐험과 호기심을 상징한다. 이는 현실의 억압과 비극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반영한다. 쥘 베른의 세계는 현실에서 빼앗긴 아들과의 연결을 상상 속에서 회복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상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며 관객에게 더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발터 벤야민이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라고 말했듯이, 영화는 국가 폭력이라는 야만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정당화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문명은 이러한 폭력을 기록하며, 잊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포함한다. 이 기록은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경고로 작용한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국가 폭력과 개인의 상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은 불꽃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아무리 억압적이고 부당한 현실이라 해도, 기억하고 기록하며 저항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영 일정
2025년 5월 1일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2025년 5월 5일 17: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2025년 5월 9일 14:30
CGV 전주고사 5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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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을 대하는 자본의 위선
이민자의 삶은 언제나 고통의 연속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들이 모인 동네라도 자기 신념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인간은 간사한 존재라서 차라리 무관심하면 나은데, 나와 생각이 다를 때 끊임없이 찍어누르며 자신이 정답이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여기 한창 전쟁 중이었던 유럽에서 막 망명한 건축가 라즐로도 이런 편견을 견뎌내었다. 그의 인생이었던 건축이 미국 상류층 사회에 미친 영향과 반대로 상류층이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을 관객으로서 바라보며 몰입하게 된다. 이 영화는 자유를 외치는 예술 조차 돈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라즐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1. 예술가와 자본가의 논리의 차이
라즐로는 전쟁이 망친 건축계의 천재였다. 하지만 천재도 세상의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파시스트가 판치는 세상에선 능력보다는 인종, 피만으로 사람이 평가받던 시기였기에 라즐로는 그저 하등한 출신의 예술가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온 미국에서도 그는 그저 이민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적 능력은 한 부자의 책장을 리모델링해주면서 분출된다. 그렇게 해리슨과 라즐로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들의 인연은 파탄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해리슨은 자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바꾸었다는 이유로 라즐로를 욕보여 놓고 세상의 주목을 받으니 그제서야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라즐로의 능력을 첫 눈에 알아본 사람이 아니고, 세상이 알아주니 그제서야 그를 치켜올렸다. 고로 해리슨은 대단한 예술적 취향이 있는 인물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한 사람임이 처음부터 드러난다. 하지만 지출은 줄여가며 명성은 유지하고 싶어하는 자본가적 속성은 라즐로의 예술성은 돈 먹는 하마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라즐로의 예술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이 그의 예술성에 가려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돈으로 괴롭혔던 것 같다. 돈은 없지만 어디서든지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한 편으로는 기쁘다가도 그의 재능이 자신을 하찮게 만든다고 생각이 들 땐, 유일하게 가진 그의 재능인 돈으로 그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리라.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렇게 세상의 수많은 부자들이 천재들을 후원하는데, 그 후원은 순수할 수가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보여준다. 예술은 예술가들의 미학인 것 같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자본가들의 미학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돈많은 예술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돈이 없어 자신의 재능을 미끼삼아 후원해줄 자본가를 찾아온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도 메디치 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라즐로의 예술도 결국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라즐로 또한 자신의 재능에 취해, 해리슨을 친구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라즐로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리라. 해리슨은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일 뿐 친구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다. 그런 라즐로의 세상 물정 모르는 모습은 그의 예술가적 순수함으로 발현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예술성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그의 건축은 남의 돈에서 비롯되어 결국 자본가의 논리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2. 세상은 가끔 천재를 동경하다가도 질투한다.
역시 신은 모든 것을 주시진 않는 것 같다. 라즐로가 세상 이치에 밝았다면 자신의 돈으로 자신만의 건축을 하는 예술가로 살 수 있었겠지만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자본가의 논리에 휘둘렸던 역사를 보고 있자면, 신은 생각보다 공평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 있는 자에게 실리적 관점을 주지 않고, 실리만 있는 사람에겐 예술적인 안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를 끊임없이 부러워하게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신은 어쩌면 장난이 과하신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해리슨의 예술에 대한 동경, 라즐로에 대한 질투는 미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로 남았지만 후대의 평가는 확실히 갈리는 듯하다. 깊은 내면의 애로사항을 알 리 없는 후손들은 그의 작품을 수용소를 형상화했다고도 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쩌고 하기도 한다. 과거의 예술작품을 후대가 해석할 때 어쩔수 없이 주관이 개입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내가 해석을 해본다면 그는 그저 모더니즘의 경도되었던 예술가였고 모더니즘의 본질이 군더더기없는 표현을 통해 정확한 메시지의 전달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저 예배당으로서의 기능,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족시켰던 것이 아닐까. 특히 건축물을 해석할 때 건축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투영되는 것에 대해서는 제 3자가 가치판단을 할 순 없는 것 같아서 더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기능에 대한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다.
총평
예술은 자본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에 자본가의 입맛에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자본가가 예술가를 질투까지 해버리면 그 관계는 파탄이다. 영화는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의 파탄을 보여주니 후대가 보는 라즐로의 작품은 어디까지가 그의 의도인지를 알 수가 없다, 중간에 자본가 집단이 어떻게 장난질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 세기의 천재들이 남긴 작품들의 이면들을 대부분 알 수 없기 때문에 후대는 일부만 알고 떠드는 것일수도 있겠다. 우리가 뭘 안다고 떠들 수 있을까.
과연 해리슨은 어디로 숨었을까. 엘리자벳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리슨에게 죽음이란 사회에서의 망신살을 당하는 것이라는 걸,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보단 사회에서의 매장이 그에게 곧 죽음이라는 것을. 라즐로의 예술성을 부러워하다 못해 탐한 것이 온 세상에 알려졌기에 그는 더 이상 미국 필라델피아에 공식적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살아있대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 것이다.
덧붙여 현대 건축에 대한 헌사를 아낌없이 표현하는 작품이다. 긴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 장면 그림이 아주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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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평생 살면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완전히 똑같은 취향을 만나기는 힘들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은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의 전제는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취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비슷한 취향과 습성을 가진 사람과 빨리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취향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건 당연한 것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만나려 노력한다. 가지고 있는 취향이 보편적이지 않고 특별한 경우라면 더욱 그런 사람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끔찍한 습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인물, 메런의 이야기
영화 <본즈 앤 올>은 기본적으로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 인간이 가진 취향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포함되어 있다. 주인공 메런(테일러 러셀)은 아빠와 살고 있지만 특이한 습성이 있다. 그는 종종 사람을 먹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실제로 아기 때는 베이비 시터를 물어뜯은 적이 있고, 청소년기에도 친구의 손가락을 깨물어 먹은 적이 있다. 영화에 메런만 등장할 때는 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가진 습성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메건은 그 습성 때문에 시종일관 혼란스럽고 괴로움을 느낀다. 메건이 완전히 혼자가 된 이후, 영화는 일명 ‘이터’라고 불리는 메런과 비슷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메런이 처음 만나는 설리(마크 라이런스)는 메런이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이터다. 자신과 똑같이 종종 사람을 먹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실제로 인육을 먹는다. 그리고 설리의 초대를 받은 메런은 본능에 이끌려 같이 인육을 먹게 된다. 그 첫 경험은 메런에게 자신과 같은 취향과 습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일이고 자신에게만 있는 욕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사실 화면에 등장하는 설리는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가진 인물이다. 메런이 차량으로 이동할 때부터 한참을 멀리서 그를 쳐다보고 미행하면서 일부러 접근했다. 그가 쓰는 말투와 행동은 정신이상자나 스토커 같이 보이기도 한다.
설리라는 인물 때문에 메런은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것에 대해 공포심을 느낀다. 그 공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메런 자신도 그런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라는 의심은 그를 더욱 심리적인 절벽으로 떨어뜨린다. 그때 만나는 것이 바로 리(티모시 샬라메)다. 리는 메런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고 메런이 마트에서 이상한 사람에게 공격받을 상황이 되자 그 상황을 모면하게 도와준다. 그리오 무엇보다 메런과 똑같이 인육을 먹어야 하는 습성이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같이 인육을 나눠먹는다.
인육 먹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의 로드무비
영화 <본즈 앤 올>은 전반적으로는 메런이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메런은 자신과 똑같은 취향을 가진 리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은 의지할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 중 리는 자신이 왜 인육을 먹는 존재가 되었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반면 메건은 엄마를 찾아가서 자신이 이터가 된 이유에 대해 답을 얻으려고 한다. 갓난아기 시절에 그를 버리고 간 엄마의 존재가 자신이 왜 그런 취향을 가졌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면 될지를 알려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그 메건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이터라는 존재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메건과 리도 그들의 여정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엄마라는 존재를 만나지만 그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답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이다. 같은 취향과 습성을 가졌고 비슷한 나이 또래인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다.
이 영화의 설정은 이상하고 끔찍해 보인다. 인육을 먹는다는 설정이 자칫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리기 쉽다. 하지만 인육이라는 설정을 떼어놓고 본다면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이고, 자신과 같은 취향이나 습성을 가진 존재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설레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 속 메건과 리는 온전히 자신의 습성을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에게 첫사랑과 같은 관계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습성 때문에 어린 시절 겪었던 불편함과 슬픔, 당황스러움 그리고 공포를 같이 내뱉으며 공유한다. 그들이 가는 여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터로서의 자신들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안착하게 된 건, 사랑과 좀 더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영화 인물들의 궁극적인 목적
조금은 끔찍한 습성이나 취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도 다양한 이터가 등장하듯,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조금씩 이해의 범위는 다르다. 삶은 나라는 존재가 왜 생겨났고,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결국 누군가 나를 이해하고 아끼는 사람을 만나면서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만끽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영화 속 메건과 리는 자신들의 취향과 습성을 가진 상대를 만났고 적당히 그것을 조정하며 자신들만의 삶을 이루어냈다. 이 영화의 설정이 끔찍할지언정, 이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관계와 삶의 모습은 아름답다.
영화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과거에 <버거 스플래쉬>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리고 <서스페리아>를 연출한 감독이다. 훌륭한 미장센과 설정으로 자신만의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 전달했던 그는 이번 <본즈 앤 올>에서도 독특한 설정 속의 인물들의 내면을 아름답게 전달한다.
메건 역을 맡은 배우 테일러 러셀은 <이스케이프 룸>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다. 이터라는 독특한 습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배우인 티모시 샬라메는 이 영화에서도 이터로서의 고통을 공감하고 결국 사랑에 빠지는 리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인육을 먹는다는 설정은 꽤 큰 걸림돌이다. 영화가 인육을 먹는 장면을 공포영화처럼 끔찍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관객들에게는 그 장벽을 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인육을 먹는다는 설정을 떼어놓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무척 아름답고 슬프다. 평생 자신의 취향과 습성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그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이 영화에 숨어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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