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샤2024-10-26 17:47:30
영화 <쑤저우강> 리뷰 -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지독한 사랑 이야기
영화 <쑤저우강> 리뷰
어릴 적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에 발을 담가 본 적이 있다. 사전에 수심이 얕은 곳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탁류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혹시나 물살에 휩쓸려 자빠지면 현세의 흙탕물이 순식간에 황천길로 바뀔 판이니 당연했다. 양발을 하상(河床)에 안정적으로 고정했다는 안도감이 들고 나서야 제멋대로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응시할 수 있었다. 흐르는 시간의 힘을 시각적으로 절감했던 순간이었다. 10대 중반이었지만 모든 것은 변화하고 종내 사라진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꼈을까?
러우예(로예) 감독의 영화 <쑤저우강>은 흙탕물이 흐르는 중국 상하이의 쑤저우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청춘들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과감한 1인칭 시점 숏,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필수적인 주인공의 내레이션 등 내용과 형식 면에서 왕가위(왕자웨이)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영화의 핵심적 이야기 줄기를 바탕으로 영화의 내적 의미만을 고려한다면 <쑤저우강>은 인어공주 동화를 변주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기에는 영화가 관객에게 마련해 준 해석의 공간이 너무 드넓다. 기묘한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레이션만 하고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남자 비디오 촬영기사가 도대체 누구인지, 배우 저우쉰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여자 주인공 메이메이와 무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마다와 무단의 전설적인 사랑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관객은 의심과 혼란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게 된다. 러우예 감독은 <쑤저우강>을 명쾌한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로 만든 것이다.
<쑤저우강>은 '다층적 해석의 거미줄에 걸린 영화'라는 생각을 하며 정성일 평론가가 진행한 라이브러리 톡에 참가했다. 장장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라이브러리 톡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의 내적 구성 요소만으로는 <쑤저우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러우예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현대 중국의 비극적 역사를 <쑤저우강>에 겹쳐 놓고 보아야 흙탕물처럼 속이 보이지 않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영화의 안과 밖을 두루 살펴야 영화의 진짜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에 대한 열정, 고민의 폭과 깊이가 정말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자리를 지킨 관객들에게 따듯한 유대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향했다. (끝)
* 씨네랩의 초청으로 10월 16일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쑤저우강> 상영회와 라이브러리 톡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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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넷플릭스 드라마 'Mr. 플랑크톤'은 세상에 모든 해조와 재미, 어흥들을 위해 이 따스한 메시지를 전하며 포근하게 안아준다. 10부작을 통해 들려주는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청자들은 웃고 울고 힐링을 얻을 것이다.
'Mr. 플랑크톤'은 실수로 잘못 태어난 남자 해조(우도환)의 인생 마지막 여행길에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여자 재미(이유미)가 강제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로드무비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불행'의 길을 걸어온 해조, 유전병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시한폭탄이 심어져있다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자신에게 절망을 안긴 부모의 존재에 줄곧 분노했던 그는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생부(정자 공여자) 찾기에 나선다. 자신 못지않게 불행의 아이콘이자, 조기폐경이라는 충격 진단을 받은 재미와 함께 말이다.
해조의 방식은 다소 과격했다. 재미와 종갓집 장손 어흥(조정세)의 결혼식 당일, 직접 찾아가 재미를 강제 납치해 친부찾기에 올랐다. 이 극단적인 방식이 'Mr. 플랑크톤'을 선택하려는 시청자들에게는 진입장벽이다. 최근 데이트 폭력에 대한 경각심과 엄벌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전 납치, 폭력적인 장면들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
이에 대해 변을 하자면, 먼저 해조-재미는 전 연인 관계이며 헤어지기 전 서로에게 남긴 말에서 출발한다. "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넌 평생 외롭게 살다가 길바닥에서 혼자 죽을 거야" 이 저주 같은 말들이 현실이 되어가자, 다급해진 해조는 외롭게 죽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난감한 상황에 처한 재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한 것.
'납치'라는 방지턱만 넘어선다면, 해조-재미의 기묘한 동행에 자연스레 빨려들어간다. 조폭에 쫓기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 시그널 등 생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여정을, 유쾌하게 또는 짠하게 단짠단짠 맛을 적절하게 삽입하며 극 전체 분위기를 환기한다. 그러다 세상을 떠다니거나 밀리는 플랑크톤 같은 인물들이 온몸으로 빛을 내며 산소를 만들어내는 플랑크톤처럼 저마다의 인생 가치를 깨닫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시니컬하면서 따뜻함을 간직한 조용 작가의 대사와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풀어내는 홍종찬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래서인지 2004년 방영된 KBS 2TV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순한 맛 혹은 조용 작가의 전작인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밝은 버전처럼 느껴진다.
'Mr. 플랑크톤'에 출연한 배우들의 역량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먼저, 해조 역의 우도환은 10부작 동안 분노, 좌절, 사랑, 애틋함 등 깊은 감정선을 표현하며 극의 중심을 묵직하게 이끌어간다. 해조와 'Mr. 플랑크톤'이 그의 인생캐릭터, 인생작이라고 꼽아도 손색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동안 강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이유미는 조재미를 만나 러블리함과 명랑함을 담당하며 로코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이와 함께 캐릭터의 희로애락을 디테일하게 소화하며 연기력을 입증했다.
어흥 캐릭터로 분한 오정세는 이번 작품에서도 '오정세했다'. 짠하면서 귀엽고, 때로는 엉뚱하다. 그러면서도 오직 재미만 바라보는 순애보 면모를 뽐내며 미친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 외 범호자 역의 김해숙부터 이엘, 김민석, 오대환, 이다희, 이해영, 조한철 그리고 존 나(John Na)를 연기한 알렉스 랜디까지 'Mr. 플랑크톤' 세계관을 확장시키며 유쾌하고 다채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Mr. 플랑크톤'은 '친부찾기'라는 명확한 여행을 로드무비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데, 전북 남원부터 부산, 제주도, 강원도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계절감을 제대로 살린 국내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낸다. 마치 대리 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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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낯선 남미 도시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아르헨티나의 대도시 코르도바를 살아가는 네 사람의 삶을 통해 도시를 형상화시키며 관찰하는 듯한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보여준 영화 〈구름에 대하여〉를 만났다. 세계 각국의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24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 경쟁 부문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 ‘애프터’, ‘가벼운 재앙’, ‘H’, ‘밤의 우회로’, ‘조용한 이주’, ‘사센카’, ‘돌을 찾아서’, ‘부재’와 함께 선정작 10편 중 하나로, 국제 경쟁 작품상을 수상했다. 아르헨티나의 젊은 감독 마리아 아파리시오가 6년 만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 흑백의 1.37 : 1 화면에 담겨 간결한 미장센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감독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네 사람의 미묘한 이야기로 낯선 도시 코르도바를 채워나가며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한다.
“기억보다 더 생생한 것이 없기에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라미로는 술집 요리사다. 에르난은 기술자지만 일이 없다. 노라는 병원 간호사다. 루시아는 서점 직원이다. 구름 낀 하늘 아래 흑백의 도시에서 네 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은 아무도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예고편│Trailer
원제: Sobre las nubes, 영제: About the Clouds
감독: 마리아 아파리시오│각본: 니콜라스 아벨로, 엠마누엘 디아스, 마리아 아파리시오
출연진: 에반 비안코, 말레나 레온, 파블로 리마르시, 후아나 오비에도, 레안드로 가르시아 폰조 외 多
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44분
국가: 아르헨티나│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3.4, IMDB 7.3
수상 내역: 37회 마르델플라타 국제영화제(아르헨티나 장편영화상), 24회 전주국제영화제(국제 경쟁 작품상)
“네 사람을 통해 그려지는 도시의 모습”
감독이 태어나서 자란 도시 코르도바를 살아가는 노라, 루시아, 에르난, 라미로를 인터뷰하는 듯한 장면과 함께 한 의문의 여성 청소부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를 채우는 구성원들로 마치 어두운 밤이 끝나고 활기가 띠기 시작한 그들의 하루를 연상시킨다. 딸 파울리와 단둘이 살아가는 실직 상태의 중년 남성 에르난, 간호사로 딱 맞춰진 삶을 벗어나 연극이라는 새로운 원동력을 얻는 중년 여성 노라, 학위를 준비하며 서점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루시아, 도시에 상경해 주방장으로 일하는 20대 남성 라미로까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했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들의 일상이 잔잔히 흐른다.
우리나라처럼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 역시 녹록지 않아 보인다. 10대 딸을 둔 에르난은 엔지니어 경력을 살려 구직을 하고 있지만, 꽤 오랫동안 실직 상태가 이어졌고 콜센터 면접장에서는 자기보다 20살은 어린 청년들과 함께 경쟁해야 한다. 교사가 되고 싶은 루시아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서점에서 일하고, 라미는 마술에 관심이 있는 듯 하나 전혀 다르게 바에서 요리사로 일한다. 그나마 간호사로 일하는 노라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만,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 무료함을 느낀다. 같은 도시를 살아갈 뿐 전혀 연결점이 없고 각자의 삶에서 겪는 서로 다른 고독과 고민을 보여주는 형식이 한편의 수필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제목이 〈구름에 대하여〉였을까?
우울한 일상이 계속되는 그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노라는 연극 워크숍에 푹 빠져 잊어버린 삶의 원동력을 얻고, 루시아는 새로운 사랑이 잠시 찾아오며, 라미 또한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인연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에르난은 여전히 실직 상태이지만 딸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흑백의 장면들은 그들의 그런 심상을 탁월하게 비추고, 개기일식처럼, 변화무쌍한 구름처럼 잠시 짙어진 어둠이 걷히고 찾아올 이들의 희망을 기대하게 한다. GV에서 감독이 아르헨티나와 고향 코르도바에 대한 현실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 시장의 어려움을 거듭 강조했다. 아마도 투잡, 쓰리잡을 하지 않으면 이어 나갈 수 없는 예술과 현실이 공존하는 삶에 대한 자전적 희망을 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줄 평 : 낯선 풍경을 채우는 익숙한 삶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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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걱정이나 해 - 소녀의 성장에 등장하는 소년들에 관하여
니 걱정이나 해
소녀의 성장에 등장하는 소년들에 관하여
청춘들의 성장에는 항상 애처로움이 수반된다. 정서적인 성장에도 세상에는 즐거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신체적인 성장에도 실제로 성장통이라는 고통이 뒤따라온다. 성장통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청소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인간사에 존재하는 희로애락을 깨닫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에도 사용된다. 고통을 수반한 성장을 묘사하는 데 있어 가장 극적인 장치는 소중한 존재의 사망이다. 아예 고아로 성장한 해리 포터가 가장 감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부모님이 모욕당하거나 가족이나 다름없는 위즐리 가문이 공격당하는 순간이다.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가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순간은 아마도 볼드모트와의 대결을 앞두고 스스로 부모님의 기억을 지우는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존재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 프로타고니스트 자신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프로타고니스트의 성별에 따라 성장담이 극명히 갈리는 점은 되짚어볼 문제다. 소녀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대개 소년들이며(죽음을 앞둔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담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다) 소녀들은 죽기 전에 소년들의 앞날을 걱정한다. 가끔은 소리치고 싶을 정도다. 야, 니 걱정이나 해.
죽음을 앞둔 소녀의 이야기라면 바로 몇몇 영화들이 떠오른다. <나우 이즈 굿>, <디어 마이 프렌드>(
한드 아님), <미드나잇 선>(트와일라잇 사가 아님), <안녕, 헤이즐>... 그리고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소년들이 소녀의 성장에 (가끔은 쓸데없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꽤나 모지리다. 최근 개봉한 <베이비티스>는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아 실망했다. 죽음을 앞둔(혹은 앞두지 않아도) 소녀들은 왜 그렇게 소년과 데이트를 하고 싶어하며, 술을 마시고 싶어하고,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걸까. 그리고 소녀들은 왜 동성 친구라곤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가장 큰 문제점은 소녀의 성장을 메인으로 다루는 것처럼 홍보하고서는 기실 소녀의 죽음으로 가장 혜택받거나 성장하는 것은 언제나 소년들이라는 점이다. 밀라(엘리자 스캔런 분)는 우연히 마주친 모지스(Moses, 모세라고 번역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데 발음이 모지스니 뭐.. 어쨌든 토비 월레스 분)에게 반한다. 모지스가 잘생기거나 좀 멀쩡한 소년이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모지스는 본인의 가족에게서도 접근금지 명령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취향의 문제지만 <미드나잇 선> 속 찰리(패트릭 슈왈츠제네거 분)에 비해 모지스는 외모 경쟁력도 떨어지고 <안녕, 헤이즐> 속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분)처럼 밀라에게 헌신적이지도 않으며 <디어 마이 프렌드> 속 캘빈(에이사 버터필드 분)이 스카이(메이지 윌리엄스 분)에게 하듯이 밀라를 따르지도 않는다(캘빈은 최소한 갈곳없는 불량배는 아니었다).밀라는 죽어가지만 온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며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은 밀라의 유치(베이비티스)가 다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밀라는 모지스를 만나고서야 머리칼을 모두 잃어버리며 죽을 결심을 하고서야 유치를 온전히 잃어버린다. 하지만 밀라의 새로운 머리칼과 영구치는 영원히 자라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밀라가 정서적으로 성장하더라도 물리적인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모지스는 애초에 성인이지만 극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정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라는 모지스가 자신 없이도 언젠가는 성장할 것을 믿고 있다. 자신의 혈연에게서도 배척당한 모지스는 믿음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밀라의 가족들로부터도 멸시받지만 이런 모지스를 유일하게 감싸는 건 죽어가는 밀라다. 밀라의 예정된 죽음은 밀라 자신의 성장을 촉발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밀라의 가족에게 동정심을 유발시켜 밀라를 거쳐 모지스의 방패막으로 작용한다. 밀라가 죽을 예정이 아니었다면 밀라의 아빠인 헨리(벤 멘델슨 분)와 엄마인 안나(에시 데이비스 분)는 불량소년인 모지스를 어떻게든 밀라에게서 떼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라가 곧 죽을 것을 알기에 헨리와 안나는 밀라가 좋아하는 모지스를 억지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밀라는 술을 마시고 구토하여 옥상에서 정신을 잃은 자신을 두고 떠난 모지스를 미워하지 못하는데 이는 밀라가 아닌 모지스에게 성장 촉매제로 활용된다. 모지스는 그런 자신조차 용서한 밀라를 통해 타인을 아끼는 마음을 배운다.
<베이비티스>는 밀라의 성장담인가, 모지스의 성장담인가. 밀라의 가족을 통해 벌어지는 일들은 밀라가 아니었다면 모지스는 겪을 수 없었던 일들이다. 밀라가 초대했기에 모지스는 자신의 동생을 겨우 만나볼 수 있었고 밀라의 이웃 토비의 출산 순간을 통해 생명 탄생의 과정을 목도한다. 토비의 출산은 밀라의 예정된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사건인데 하필 밀라의 생일파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미묘하게 탄생과 소멸의 순간을 오가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편적으로 해석해서 밀라의 생일은 밀라가 주인공이어야 함에도 결국 타인의 사건으로 인해 방해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특히나 밀라의 마지막 생일임을 감안할 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밀라가 순식간에 텅 빈 집에 모지스와 함께 놓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밀라는 생일에도 죽음에도 모지스 이외에는 함께할 이가 없는 것이며 이는 밀라의 성장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에 기여할 뿐이다. 밀라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모지스를 돌봐줄 것을 부모에게 강요하듯 약속을 받아내는데 밀라의 유산은 결국 모지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모지스는 밀라의 생일로 인해 자신의 원 가족을 만나볼 수 있었고 밀라의 사망으로 인해서는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밀라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한발 나아간다는 증거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정서적인 성장에 대한 묘사 부족으로 인해 유치 소실이라는 물리적 성장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밀라가 모지스를 이용해 죽으려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이유는 밀라가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지스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밀라는 모지스에게 헤어커트를 부탁하던 영화 초반으로부터 별반 성장한 모습이 없어보인다.
엘리자 스캔런의 이전작 <작은 아씨들> 속 베스와 밀라는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타고나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일견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베스는 놀라울 정도로 이미 성숙한 인물이었다. 베스가 죽고 조(시얼샤 로넌 분)는 "베스는 우리 중 가장 착한 아이였어"라고 회상하며, 베스는 에이미(플로렌스 퓨 분)의 유럽여행을 망칠까봐 에이미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인생 1회차를 이미 초반 20년이 되기도 전에 응축된 형태로 살아낸 베스는 그렇기에 타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죽음으로서 타인의 성장에 자양분이 될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베스의 죽음이 다른 캐릭터의 성장에 이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베스의 죽음에 가장 영향을 받은 이들이 대부분 가족인 여성 캐릭터들인 점이기 때문인데 이들은 이미 베스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베스에게 베풀고자 했던 이들이다. 모지스는 밀라의 삶의 끝자락에 무임승차한 인물이며 밀라에게 베풀기보다는 밀라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만 한 인물이기도 하다. 밀라는 자신이 살지 못할 삶을 모지스를 통해 살고자 했기에 "겁이 없어 보이는" 모지스를 동경하고 사랑했는데 이는 불량배들이나 갈 법한 클럽에 짙은 화장을 하고 들어가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밀라가 모지스와 같은 삶을 동경했던 이유는 본인이 진정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몸이 약한 밀라에게 금지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의 경험이 밀라를 성숙시켜주지는 못한다.
밀라의 삶과 죽음은 결국 밀라의 주변인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이들이 겪는 삶의 변화 혹은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밀라의 주변인이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밀라의 죽음이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헨리와 안나는 위태로운 부부생활을 이어가는데 밀라의 상태는 이들을 잇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이들을 끊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 이들이 밀라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밀라가 모지스와 성관계를 맺었는가다. 밀라가 겪은/겪었어야 할 삶의 단계를 통해 헨리와 안나는 자신들의 삶이 나아간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밀라가 겪지 못한/못할 단계들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밀라의 생일에서 안나가 오랫동안 치지 않던 피아노를 밀라의 부탁으로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밀라의 삶이 안나에게 옮겨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내켜하지 않지만 안나는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는데 이는 밀라의 유언으로 인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안나와 헨리가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게 될 것을 암시한다. 모지스가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신체적으로 성장하고도 그에 맞는 성장 단계를 겪지 못했음을 암시하는데 밀라를 통해 이 단계를 통과할 수 있는 패스권을 얻는다.
함께 언급했던 영화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미드나잇 선> 속 케이티(벨라 손 분)는 햇빛 속으로 한발짝 내딛지만 이것은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며 찰리에게 단순히 슬픈 연애 서사 한 조각을 선사할 뿐이다. <디어 마이 프렌드> 속 스카이로 인해 캘빈은 세상 밖으로 나아간다. <나우 이즈 굿> 속 테사(다코타 패닝 분)는 그나마 아담(제레미 어바인 분)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긴 하지만 굳이 아담이 필요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거스터스의 헌신으로 인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의미있음을 깨닫는 <안녕, 헤이즐> 속 헤이즐(쉐일린 우들리 분)을 제외하면 위 작품들 속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 캐릭터들로 인해 이득을 얻거나 불필요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들을 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케이티는 찰리와 연애하는 대신 대학에 갈 수 있었고 스카이는 캘빈보다는 친구들이나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테사도 마찬가지다. 헤이즐은 소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보다 다른 소설을 읽을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밀라에게 나는 여전히 말해주고 싶다. 야, 니 걱정이나 해.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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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일깨우는 ‘사랑’과 ‘공존’의 가치
▷한줄평 : 다시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소통’, ‘협력’, ‘사랑’, ‘희생’의 보편적 가치를 말하다
▷영화 : 미키 17(Mickey 17), 2025.2월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미키 17>에서 / 티모(스티븐 연), 카이 캇츠(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우리 모두는 ‘익스펜더블’과 같은 존재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도 매번 죽음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생체실험에 자신의 생명을 제공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 직군을 선택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죽음을 피할 방도는 없다. “다시 만나!”라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소각로(사이클러)에 뛰어들면 그만이다. 두려움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다시 프린트하면 되니깐. 이 순간 ‘미키’는 미키1, 미키2… 미키n과 같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달리 벗어날 방법이 없다. 2054년 우주 행성 개발 시대에서조차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하층 노동자는 ‘위험의 외주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미키n이 갖는 존재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지점에 슬픔조차 불필요한 감정이 된다. 죽는 기분이 어떤지 묻는 동료의 질문에 ‘항상 무섭다’라고 말할 것 밖에 없다. 고귀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탄생 일조차 이제는 간단히 버튼 하나로 3D 프린터로 뚝딱 만들어내는 단순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해주는 ‘탄생’과 ‘죽음’의 신비로움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미키는 이런 소모품으로 자신이 소비되고 있음이 후회스럽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미키 17>에서의 새로운 복제인간의 탄생은 우리가 매일같이 잠을 자고 새로운 날을 맞는 것과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미키가 과거의 자기를 폐기하고, 새롭게 탄생한 존재를 현재 살아있는 객체로 구분해 내듯, 우리는 연속된 생을 하루라는 날로 구분하여 매번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낸다. 3월 1일, 2일…n일 처럼 말이다. 시간의 영속적 흐름 속에서 특정 시간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해 강제로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어 쳇바퀴에 올려놓은 꼴이다. 매일매일 지옥과 같은 일상 속에서 자아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을 반복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교차하는 지점에 드는 아쉬움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그래서 미키n이든 제이바다n일이든, 이 세상의 모든 ‘익스펜더블(소모품)’들은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한 일상을 끊임없이 버텨내야만 한다. 그 짧은 간극 사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각 개인들의 몫이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소모품으로 소비되는 미키n의 존재들
봉준호 감독은 이 지점에 미키17이 자신을 복제한 미키18을 마주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17번째 미키가 크레바스에서 죽었다고 착각한 이들이 18번째 미키를 리프린트하게 된 것이다. 이 세계에선 동일한 익스펜더블이 공존하는 '멀티플'은 불법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상황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존속이 행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해야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은 계속 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달라.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거잖아.’ 영화 <미키 17>에서 / 미키 17(로버트 패틴슨)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결과물은 사뭇 다르다. 기억의 저장과 재생 과정에서 성품까지도 동일하게 반복 재생시키지는 못했다. 마치 기억의 저장소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내 나의 온전한 기억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미키18는 다혈질의 성향을, 미키17은 온유한 성품을 가졌다. 어쩌면 순간마다 달라지는 우리들의 내적 자아의 분열과 같다.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
미키의 이러한 다른 성품은 둘 중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둘은 처음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격하게 부정한다. 서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소통’이 만들어낸 대결과 파멸의 극복
기록된 역사는 정복자의 관점을 투영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말 그대로 우연한 ‘발견’일뿐이지, 그 대륙에도 사람들이 이미 번성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사용한 ‘발견’이라는 말 대신에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지금도 정복자의 시선이 담긴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당시에도 문명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잉카, 마야, 아즈텍은 대표적인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다. ‘니플헤임’ 식민 우주 행성 개척은 생육과 번성을 꾀해왔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외계인인데 왜 쟤네더러 외계인이래?" 영화 <미키 17>에서 / 나샤(나오미 애키)
이 프로젝트의 총사령관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과 일파 마샬(토니 콜렛) 부부는 이런 정복자 DNA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행성에 이미 살고 있었던 외계 생명체, 크리퍼 (Creeper)를 ‘추악한 외계인’이라 부른다. 그 옛날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리퍼들이야말로 이곳 니플헤임의 원주민이며 외계인은 오히려 지구에서 찾아온 우리 인간들이다. 크리퍼에게는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체계가 있었으며, 그 수많은 개체들마다 각자의 이름(루코, 조코, 등)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종족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케네스 일당은 여전히 그들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마샬은 벌레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며 식민지 개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크리퍼를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미키 17>에서는 이 지점에서 외계인을 포함한 타인을 대하는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아둔하고 차별적이며 폭력적인 케네스 마샬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옆에서 이를 부추기며 소스(Sauce)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등 사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아내 일파 마샬과 조력자들의 존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들은 철저히 계급을 나누고 명령과 복종을 강요한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대화와 타협, 소통은 늘 뒷전이다.
이젠 미키17과 미키18에게는 극복해야 할 공공의 적이 생겼다. 어떤 식으로든 케네스 일당으로부터 크리퍼의 파멸을 막아보겠다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외계인과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다.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 인류와 외계 인간의 공존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소통’과 ‘협력’은 파멸을 이겨내는 과정이 되었고, 종국에는 ‘희생’을 통해 희망이라는 미래를 만들어 내었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외계 생명체를 만나러 가는 미키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사랑’과 ‘희생’의 가치
이러한 분열된 자아와 같은 또 다른 미키의 등장으로 인한 혼란, 생사의 키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의 압박, 처음 마주한 외계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미키17과 미키 18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케네스 마샬은 미키가 그동안 느껴왔던 ‘두려움’조차 이용하려 든다.
"너도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너도 인간이잖아, 중요한 존재지."
영화 <미키 17>에서 / 케네스 마샬 (마크 러팔로)
그러나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영원한 사라져야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다를 것이다. 이 ‘두려움’을 ‘희생’으로 치환 시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과 ‘공존’에 대한 염원이다. 사랑이야말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가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멀리서 보이는 사랑하는 나샤(나오미 애키)와 미키 17을 바라보면서 ‘희생’을 선택한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나샤
봉준호 감독은 참으로 일관된 스토리텔러이다.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설국열차>의 멈추지 않는 기차와 <기생충>의 어두침침한 지하실에서 <미키 17>의 미래와 우주로 옮겨 놓았을 뿐,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보편적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설득해 내려고 한다. 그동안 인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등장해 왔던 독재자, 아메리카 신대륙을 정복하러 나섰던 콜럼버스와 같은 야욕가, 인간의 생명의 존엄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정치가 등 부와 권력의 위계질서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모색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다. 영화 <미키 17>은 ‘사랑’, ‘협력’, ‘소통’, ‘희생’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바로 우리, 여기,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영화 <미키 17> 포스터
20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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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겁했기에 지킬 수 있던 이름들
<페르시아어 수업>은 한 사람이 살기 위해 순간적으로 내뱉은 거짓말로 인한 후폭풍을 겪어내는 이야기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똑같이 벌어졌을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배경으로써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풀지 않을 거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질'은 유대인이지만 나치군에 끌려가는 과정에서 물물교환으로 우연히 얻게 된 페르시아 책을 증거로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 주장하며 목숨을 구한다. 한 장교가 페르시아어를 알려줄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목숨을 건사하게 된 질이 자신이 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장교도, 그를 데려온 군인들도 그가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군인들은 사례품을 받기 위해 그를 데려오긴 했지만 유대인의 외모를 가진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장교는 그에게 매일 페르시아어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가 가짜인지 확인하기 위한 덫을 파둔다. 질은 장교의 앞에서 '레자'라는 이름의 완벽한 페르시아인이 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어라고는 책을 받을 때 들은 '아빠'라는 단어 정도만 알기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낸다. 가까스로 전혀 다른 체계의 단어 조합을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할 때, 인간이라면 당연히 한계를 체감하게 되기 마련이다. 기록을 남길 수 없는 환경에서 질이 써오던 입으로 외우고 머리로 기억하는 방법은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
이때 질의 눈앞에 펼쳐지는 묘수는 질에게 주어지던 우연 혹은 행운의 연속으로 보이면서, 영화의 마지막을 생각한다면 필연처럼도 느껴진다. 어느 군인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해 못마땅해하던 코흐가 질에게 맡기는 '수감자 명단 작성' 업무를 질이 보란 듯이 해내는 것은 질이 유대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다. 군인들은 장교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그가 못마땅해 함정을 파고 그가 거기에 빠지길 여러 차례 기다리지만, 질은 그들이 만든 난관들을 위태롭고도 무사히 통과하며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그곳, 수용소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에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을 거쳐가는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고, 수용소는 그런 그들이 거쳐가는 경유지 중 일부다. 질은 이들과 같은 처지에 처해 있지만 가짜 페르시아어 수업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자신을 점점 부끄럽게 생각한다. 핍박의 체제를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런 체제가 유지되는 현실을 한탄할 여유는 수용소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죽음을 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질이 가지는 감정은 반복되는 분노와 허탈감이다.
페르시아어 수업과 함께 질과 코흐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질은 더 허망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에는 둘 사이의 미묘한 유대가 우정과도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영화는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음을 질의 울분에 찬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자신도 떳떳하지 못하고, 코흐는 더 비겁한 사람이라는 그의 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고백이면서, 코흐가 애써 보지 않던 현실을 보게 만들며 그를 찔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비겁했던 사람과 그보다 더 비겁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살지 못한 자들의 눈에는 변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건들을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겪어냈고, 다른 이유는 그 시작에 있지 않았다. 외웠던 수많은 단어들도,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순간의 거짓말도,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행동들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때, 아마도 당신은 2,840이라는 숫자가 주는 충격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끄럽고 비겁했던 자가 자신을 위해 행했던 일이 모두를 위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목도하면서.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있기에' 증명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더해져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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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감독] 테드 브라운
출연] 구스타보 두다멜
시놉시스]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는 테드 브라운이 시기적절하게 내놓은 희망적인 다큐멘터리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손바닥을 새기고, 수백명의 어린이에게 사인 요청을 받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그는 베네수엘라의 유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계적 성공을 거둔 지휘자다. LA 필하모닉,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그는 클래식 스타의 영향력을 건설적으로 발휘할 방법을 늘 고민한다. 여전히 불안정한 고국에서 그는 음악으로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스포일러 주의#
음악이 주는 치유의 메시지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베네수엘라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음악을 가르쳐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과연 음악 하나로 인성적 사회적 교육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에게는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이 가장 큰 도움이 될텐데 아무리 무상이라지만 문화적 교육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제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옳았다. 또래 아이들과 악기를 통해 합주를 하면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과의 협동심을 기를 수 있었고, 한 단체에 소속되어 동료로서, 그리고 선후배로서 악기를 서로 가르쳐주면서 사회성 역시 발달되었다. 또한, 불우한 자신의 가정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의 강점과 장점을 찾으며 자신의 환경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클래식을 연주하면서 그 음악 자체로도 심적 안정감과 힐링을 받으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교육 시스템이 어디있을까. 한 조사에 따르면 어두운 골목길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강도, 살인과 같은 중범죄부터 소매치기와 같은 경범죄까지 그 비율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마 엘 시스테마를 처음으로 만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음악이 가지는 힘이 지금 당장의 경제적 뒷받침을 되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치 체계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엘 시스테마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을 교육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과연 늦었는가
구스타보 두다멜은 지휘자로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다. 17살의 나이에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데뷔를 하고, 2004년 독일의 밤베르크 교향악단 주최로 열리는 지휘자 경연대회인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서 지휘자로서 성공가도를 쭉쭉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중견 지휘자들 빰치는 분주한 활동을 계속하면서 지휘자의 커리어를 알차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고향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와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그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고뇌하고, 더불어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불안정한 베네수엘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차베스 정권 당시에는 친정권적인 태도를 보이고, 마두로 정권에 들어오면서 부터 현 정권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에 대해 너무 뒤늦게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아닌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이 부분도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에서 꼬집는다. 하지만 과연 구스타보 두다멜의 입장에서 차베스 정권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하다.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엘 시스테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지원 중단을 검토했으나 빈곤 퇴치와 범죄 예방 그리고 사회 부흥 및 국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고 판단해 지원을 지속하며 해외 공연을 늘리면서 엘 시스테마를 해외에 알리는데 집중했다.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서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사회적 교육의 일환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왔던 두다멜에게는 엘 시스테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밝혀버리면 한 집단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마두로의 집권 이후 유혈사태와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유혈사태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입장이 뒤늦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정치성으로 이용되길 원치 않았던 그에 있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성명 발표로 인해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하나둘 다른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나라로의 이민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점차 단원들의 빈자리를 보여주면서 왜 그가 정치적 입장을 이제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무게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이 지휘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을 넘어서 단원들의 생계 역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동안의 비판에서도 침묵을 지켰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엘 시스테마부터 구스타보 두다멜의 이야기까지 베네수엘라의 현재 상황과 그의 행보에 대해서 다룬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찬란해보였던 행보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에도 엄청난 무게감이 있음을 잘 보여준, 그리고 미래의 그의 행보 역시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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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2021) 영화 예고편 분석
- 원작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 소개
- 중국 배우 납치 사건 소개- 영화정보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 각본: 필감성
제작: 강혜정
출연: 황정민
제작사: 외유내강
배급사: 대한민국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촬영기간: 2019년 5월 15일 ~ 2019년 8월 13일
개봉일: 대한민국 2021년 8월
제작비: 8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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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2010)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성장 영화
Chapter 2 예언자
00:00 자크 오디아르
01:49 성장영화
03:28 아버지 죽이기
05:38 예언자
08:02 레예브와 리아드
09:21 별점 및 한 줄 평
09:39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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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수리남> 티저 예고편
"누가 진짜인가" 여기, 믿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목숨을 건 생사의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곳. 《수리남》 9월 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공작》 《범죄와의 전쟁》 윤종빈 감독 하정우X황정민X박해수X조우진X유연석X특별출연 장첸 그리고 당신이 믿지 못할 '실제로 있었던 거짓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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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신> 티저 예고편
귀신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강원도 폐교회!
초자연 미스터리 현상을 취재하는 방송국 제작진과 귀신을 쫓는 무당, 그리고 미스터리 체험단이 귀신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찾는다. 그날 밤, 역시나 범상치 않은 기운에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음날 낮, 기겁한 이들 앞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밤보다 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나오라는 귀신은 안 나와도,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건들이 득실대는 현실 공포를 경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