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4-11-06 14:44:16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연소일기' 리뷰
한 고등학교 교실 쓰레기통에서 정체 불명의 유서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둔 터라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 정 선생(노진업)은 일단 편지를 쓴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그는 찢긴 편지 속 한 문장을 읽고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오래된 일기장을 떠올린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팠던 과거의 감정을 되새기는 정 선생은 아버지와의 불화,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곱씹는다. 그리고 자기 삶에 치여 외면했던 학생들의 힘든 마음을 헤아려주기 시작한다.
한 소년이 건물 계단을 올라간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지 천장을 바라보며 끝내 옥상에 도착한 그는 뭔가를 다짐하듯 소리치며 난간에 올라간다. 그리고 ‘훅’하고 떨어진다. <연소일기>는 학교 내 유서를 발견한 뒤, 앞서 소개한 그날의 일을 떠올린 한 교사의 이야기다. 과연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기억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라는 카피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걸까?
<연소일기>는 제60회 대만 금마장 시상식, 제42회 홍콩금상장영화제 신인감독상 등 아시아 주요 영화제 8개 부문 수상 및 27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이어가며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국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기도 했다. 특히 플래시백을 통해 정 선생의 숨겨진 과거 이야기가 밝혀지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 자자하다. 이런 영화의 힘이 실화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감독은 학창 시절 가장 친한 친구를 갑자기 떠나보냈고, 이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며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는 유서를 발견한 정 선생을 통해 홍콩 사회에 만연된 학교 폭력 문제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 감독은 경쟁사회에 놓인 학생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아이들은 남보다 더 좋은 점수, 더 나은 능력을 갖춰야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된다는 공포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저마다 말 못 할 아픔이 있음에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는 이들은 우울감에 시달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유서 속 문장은 정 선생이 잊고 지냈던 기억을 되살린다. 알고 보면 그조차도 경쟁사회에 놓였던 이들 중에 하나다. 플래시백을 통해 소환된 10살 아이 요우제(황재락)도 마찬가지.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는 이 소년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공부도 음악도 잘하는 동생 때문에 요우제는 매번 비교당한다.
공부도 못하고 피아노 연주도 못하지만 다른 것에 재능이 있을 텐데,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기보다 자신이 세운 확고한 길을 걸으라고 재촉한다. 조금이라도 이탈하거나 뒤처지면, 무차별 폭력이 행해진다. 그만큼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10살 소년을 옥죈다.
이런 상황에서 요우제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일기다.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자신의 마음을 적은 이 일기에는 소년의 상처가 오롯이 적혀 있다. 텍스트에 담긴 이 아이의 슬픔은 어렸을 때부터 경쟁사회에 놓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후반부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감정의 무게감은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다. 마치 우리도 그 시절을 관통해 살아남은 이들로서의 안도감과 끝내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한데 뭉쳐져 먹먹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요우제와 정 선생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과거의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아 계속 자신을 괴롭힌다는 걸 알 수 있다. 극 중 정 선생이 교단에 선 이유도 과거의 아픔, 트라우마 때문인데, 더 이상 문제를 방관하지 않기 위한 다짐으로 이 길을 선택한 것. 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선생으로서, 남편, 가장으로서 문제가 생긴다. 이를 타파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직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상처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그것에 대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이 과정을 딛고 일어나 한 뼘 성장한 정 선생은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된다. 더불어 감독은 가족, 친구 등 주변에 힘듦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방관보단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다소 교육적인 주제 의식 전달이 간혹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하는 작품의 힘이 이를 상쇄한다. 만약 과거의 상처 때문에 인생의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힘을 내기 바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꼭 기억하면서 말이다.
사진 제공: (주)누리픽처스
평점: 3.0 / 5.0
한줄평: 이 세상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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