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03-27 23:54:26
더 랍스터 / The Lobster
/ 감상 /
_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근데 과연 이러한 모습이 영화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사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사랑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이미 형성이 되어있다.
예를 들면, 어린 나이의 고등학생-대학생 심지어 중학생들도 "나만 모쏠이야 ㅜㅜ" 라며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의 상황을 불행히 여기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면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 있니?" , "언제 결혼하니?" 아닌가?
이미 우리는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꼬집는 것 같다.
사랑은 주변에서 강요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그리고 그런 강요받은 사랑을 한다고 해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한게 아니다.
억지로 끼워 맞춘 듯이 만난 첫번째 상대와 데이비드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_ 강요받은 사랑은 무조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까?
이건 아닌 것 같다. 영화 후반부 일명 '솔로팸’이 찾아간 커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장이 찾아간 커플의 남자는 자신의 짝을 15점 만점에 14점 만큼 사랑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찾아간 존 커플의 부인은 데이비드의 말을 듣고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삐걱거렸을지 몰라도, 시간이라는 윤활유를 통해 그들의 사랑은 자리를 잡고 부드럽게 굴러갔을 것 이다.
이러한 부분을 현실에 적용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만추'가 아닌 '인만추' 커플 (혹은 선본 사람들) 들이 다 불행할까?
아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강요받은 사랑일지라도 이후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것 같다.
_ 사랑에 있어서 공통분모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공통분모 없이 진정한 사랑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강요 받아 사랑하게 된 커플들이나 데이비드 커플이나 결국 다들 서로의 파트너와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다.
공통된 관심사 혹은 그 이외의 공통된 점은 사랑의 유대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드는
일명 '치트키' 이자 '본드'인 것 같다.
현실에서 생각해봐도 나와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끌리지 않는가.
.
.
이 영화는 이분법적인 시각과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내며,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려주고,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 결말에 대한 나의 해석 /
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이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결말을 해석해 보았다.
일단, 데이비드가 선택한 동물인 랍스터는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생물이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데이비드가 만약 그의 눈을 찌르지 않으면, 랍스터로 변하여 시각능력을 상실하고
그가 만약 눈을 찌르면 시각능력을 상실하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당연히 눈을 찌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게 가장 좋겠지만, 내 생각에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랑한다고 하여도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별개의 일인 것 같다.
앞서 말했던 솔로팸의 리더가 찾아간 커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 커플의 남성은 자신이 자신의 파트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파트너를 위해 희생하기는 커녕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별별 말들을 다 늘여 놓는다.
그렇다, 사랑의 정도와 희생의 강도는 비례하지 않는 것 이다.
또한, 데이비드의 행동을 보았을 때 그는 진실한 사랑을 불신하고 있는 것 같다.
호텔에 참여한 그의 모습은 '사랑'을 찾겠다는 마인드가 아닌 '짝'을 찾겠다는 마인드가 더 커 보였다.
물론, 그가 솔로팸에서 만난 짝에게 한 행동은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들일테지만, 그 행동들을 넘어서 그가 그녀를 자신을 희생할만큼 진실하게 사랑했는지는 의문이다.
단지 랍스터로 변하기 싫은 마음과 혼자 생활하는것이 질리고, 외로워져서 택한
선택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따라서, 나는 결말에서 데이비드가 눈을 찌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버리고 갔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는 않았으나 눈을 찌른 척 하며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어찌되었든
그녀를 사랑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Relative contents
-
-
- 【결말포함】어른은 없다, 주름진 아이만 있을 뿐
#기쿠지로의_여름 #스포일러_없는 #리뷰
최신 일본 영화를 리뷰하고 추천합니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소개합니다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제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작가 슈라 원칙
1.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2.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
3. 수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4.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연락처
adonai0919@gmail.com※ 트위치
https://www.twitch.tv/sura_chtr※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writer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
- 영화 <할로윈 킬즈> 30초 예고편
할로윈 밤의 살아 있는 공포 ‘마이클 마이어스’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받으며 살아온 ‘로리 스트로드’
그녀는 딸 ‘캐런’, 손녀 ‘앨리슨’과 함께 ‘마이클’을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실감하기도 잠시, 그가 지하실을 탈출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이어 ‘마이클’의 살인이 벌어지면서 해든필드 주민들은 또 다시 공포와 혼란에 빠진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로리 스트로드’와 ‘캐런’, ‘앨리슨’은
해든필드 주민들과 그를 사냥하기 위한 추적을 시작하는데…
“악마는 오늘 밤 죽는다!”
-
- 영화 <킹 리차드> 1차 예고편
테니스계의 전설 월드 챔피언 윌리엄스 자매
그들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됐다!
-
-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국내 박스오피스]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가 개봉 첫 주말 44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위, <서울의 봄>은 총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최초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이상 동원, 총 217회 차의 무대인사를 기록하여
기존 영화계의 흥행 기록들을 갈아 치웠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티모시 샬라메 주연 <웡카>가 다시 한 번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전 세계 매출액 4억 6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웡카>는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으나 2주차 주말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에
밀려 한 계단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3주차 주말에 다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되찾고 4주차 주말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제임스 완 감독의 새로운 공포영화 <나이트 스윔>이 2위,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3위에 머물렀지만 글로벌 박스오피스 2억 6천만불을 넘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
-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The Lovers data-on The Bridge)
개봉일 : 1992.04.18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나에게 <퐁네프의 연인들>은 명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왠지 ‘그날의 기분’에 끌리지 않아 밀려버렸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한 개봉작이 아닌 이상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영화를 본 당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단 다가올 상실을 걱정하며 스스로 길거리에 나앉은 미셸과 길거리를 내 집 삼아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가는 노숙자 알렉스. 두 사람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만난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 다리 위.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미셸을 발견한다. 미셸은 알렉스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길거리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멀어버리기 전, 제대로 알렉스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수 중인 불완전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결핍으로 가득 찬 알렉스와 미셸. 두 사람은 가진 게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처지인 두 사람에게 남은 게 있겠는가. 돈도 직업도 지금 당장 만날 인연도 없는 (미셸은 자발적으로 버리고 나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니. 또 다른 노숙자 한스는 알렉스에게 묻는다. “네 주제에 사랑을?”
현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애, 즉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나를 가꿀 시간도 모자라서, 나를 건사하기도 벅차서. ‘가진 게 없어 연애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빠르게 포기하는데,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을 한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한다. 내가 상상하던 완전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분명 강렬한 빛깔의 로맨스였다. 퐁네프 다리 위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을, 알렉스의 물음에 미셸이 답을 내리던 그 순간을, 사랑을 잃을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퐁네프의 연인들 시놉시스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내 삶을 선택할 거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알렉스의 삶은 퐁네프 다리 위에 있다. 알렉스가 언제부터 그 다리 위에서 살아온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다듬은지 오랜 기간 지난듯한 몸. 그리고 자연스러운 절도 행위. 알렉스는 퐁네프 다리가 보수작업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다친 발을 이끌고 다시 다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성 미셸. 그녀는 육군 대령의 딸이다. 꽤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왔을 걸로 예상되는 그녀는 그림 작가였지만, 헤어진 연인 줄리앙에게서 받은 상처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떠밀려 길거리를 떠돈다.
미셸은 총과 함께 줄리앙에 대한 미련을 품고 퐁네프 다리에 누워있다. 그녀는 역사에서 우연히 줄리앙의 첼로 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뒤를 뒤쫓는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이 미셸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미셸의 뒤에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남자 알렉스가 있었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총과 함께 미련을 버린다. 7발은 미셸이 7발은 알렉스가.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의 행운을 위해. 알렉스와 미셸은 음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번갈아 총성을 울리며 함께 미련을 지워버린다. 그 날밤, 두 사람은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내일 아침 네가 날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은 세상. 온 도시가 잠든 후에 시작되는 둘만의 시간. 불면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팔. 이런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바람 부는 다리여도 상관없었고, 모래가 가득한 바닥은 포근한 매트리스가 되어 두 사람을 넉넉히 감싼다.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랑을 한다. 마치 갓 세상에 태어난 동물들이 첫 발걸음을 떼는, 본능을 따라가는 그 순간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엇도 알렉스와 미셸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
알렉스는 미셸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간절함은 지하철 역사를 헐떡이며 뛰게 만들었고 끝내 포스터가 들어있는 차와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 한 명을 불태우기에 이르지만, 미셸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이 갖고 있던 라디오는 선이 끊긴 채 방치되었고 알렉스는 미셸 몰래 숨겨뒀던 총으로 왼손 약지를 쏜다. 보통의 연인들은 왼손 약지에 껴둔 반지를 빼며 이별을 실감하는데, 알렉스는 커플링 대신 자신의 손을 쏘며 이별을 맞이한다.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였다면 의미 있는 물건 하나쯤은 남을만한데, 가진 것 없이 이뤄진 둘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방화와 과실치사로 복역하게 되고 2년쯤이 지난 후 미셸은 알렉스를 찾아온다. 시력을 회복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라, 잃었던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미셸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은 순간이 아닌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음을 그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했던 순간이, 모두가 잠든 후에 마음껏 도시를 누리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알렉스와 미셸은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퐁네프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두 사람을 받아준 화물선 위에서 다리 위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두 사람이 만일 다른 시간대에, 퐁네프 다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미셸이 절망감에 휩싸여 퐁네프 다리에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등을 뉠 수 있었던 퐁네프 다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겠지. 퐁네프에서 만난, 퐁네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퐁네프의 연인이 어쩌면 이 두 사람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 예술계 거장 vs 이미지 세탁한 재벌 가문
8★/10★
사진계의 거장과 예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 가문이 맞붙었다. 전자는 낸 골딘이고 후자는 제약회사 퍼듀 파마의 소유주인 새클러 일가다. 시작은 옥시콘틴이었다. 퍼듀 파마는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을 개발한 후 공격적 마케팅에 나섰다. 옥시콘틴의 중독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 약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만 말했다. 나아가 불법과 편법의 경계에서, 종국에는 불법으로 점철된 공격적으로 영업을 이어갔다(이 과정은 넷플릭스 영화 〈페인 허슬러〉 참고). 그 결과는? 수십만 명이 옥시콘틴에 중독됐다. 지금까지 60만 명 이상이 옥시콘틴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낸 골딘 역시 과거 수술 후 옥시콘틴을 처방받았고, 중독되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투쟁을 더욱 확장하기로 결심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두 번째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이 싸움을 담아냈다.
퍼듀 파마를 만나기 이전부터, 낸 골딘의 삶과 예술은 이미 투쟁이었다. 낸 골딘의 언니는 ‘마음이 병들었다’는 부모의 판단 때문에 정신병원에 머물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언니의 진료 기록에는 그녀가 평범한 정도의 반항심을 가진 청소년이었고, 오히려 부모가 문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죽었고, 골딘은 언니에게서 유쾌한 반항심을 배웠다. 골딘은 집에 있으면 ‘언니처럼’ 될 거란 우려에 부모님 집을 떠나 위탁 가정을 전전했고, 한 히피 학교에서 마침내 구원받았다. 이후 골딘은 게이, 드래그퀸 등의 친구들을 사귀며 퀴어 공동체에서 생활했고 스냅사진으로 친구들이 뿜어내는 삶의 생동감을 포착했다. 섹스보다 사진이 좋았을 정도로, 골딘은 사진에 심취했다. 메리 올리버와 마이클 커닝햄이 각각 《긴 호흡》, 《그들 각자의 낙원》에서 아름다운 산문으로 예찬한 바 있는 ‘게이들의 천국’ 프로빈스 타운의 레즈비언 분리주의자 공동체 일원으로 지내기도 했다. 보수적 가족의 억압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동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사회/문화 공동체로 이끈 셈이다. 이후에는 필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댄서, 성노동자 등으로 일했고 그녀의 사진이 품은 탈규범적 생명력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본 한 큐레이터에 의해 마침내 정식으로 예술계에 발을 디뎠다(골딘은 큐레이터에게 지금껏 작업한 사진을 모은 박스를 옮기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오럴 섹스를 해줬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데뷔 이후에도 녹록지 않았다. 남자친구와의 섹스 장면 등 그녀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기를 포착한 사진은 조롱받았고, 기성 예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투쟁으로서의 삶/예술도 이어졌다. 영화는 골딘이 미국의 에이즈 위기 당시 급진적 에이즈 운동을 벌인 단체 액트업과 함께 작업한 장면을 특히 자세히 비춘다. 정부의 무관심과 방치로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던 에이즈 감염인들과 당사자들이 벌이는 저항 운동은 퀴어 공동체에서 예술을 길어온 골딘이 옥시콘틴 중독자 당사자로서 퍼듀 파마와 싸우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을 터다.
영화는 골딘의 삶/예술 여정과 퍼듀 파마를 상대로 한 현재의 싸움을 번갈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 새클러관에서 골딘과 동료들은 퍼듀 파마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새클러관은 새클러 일가가 엄청난 돈을 예술계에 후원한 대가로 설치된 곳으로, 메트로폴리탄뿐 아니라 구겐하임, 루브르, 대영박물관 서구의 유수한 미술관‧박물관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다. ‘예술에서 후원자의 존재는 필수적인가’라는 물음에는 여러 입장이 있지만, 어쨌든 지금껏 예술에 늘 ‘큰손’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돈이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면, 수많은 사람이 마약성 진통제로 고통받은 결과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자 그대로 죽음을 대가로 한 돈으로 예술을 후원해 사회적 명성을 쌓는 일은 예술-후원의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 사회 정의의 문제다. 낸 골딘은 예술이 가장 더러운 돈을 위장하는 데 쓰이는 일을,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모욕한 제약회사의 전시관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퍼듀 파마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것을, 무엇보다 예술계가 새클러 일가와 그의 영향력을 완전히 퇴출할 것을 요구하며 긴 싸움을 펼쳐나간다.
골딘이 속한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즉각적인 처방약 중독 개입)은 새클러관이 있는 여러 미술관을 두루 순회하며 행위 예술,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마침내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이름을 걷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명한 사진 예술가로서 쌓아온 명성과 추구해온 예술적 가치를 결합한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부분적이다. P.A.I.N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 활동가, 당사자의 싸움으로 퍼듀 파마는 파산했고, 새클러 일가는 60억의 합의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많다. 회사 파산으로 책임을 면피하고, 합의금으로 수천 건의 소송을 취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적인 승리가 감동적인 이유는, 낸 골딘의 싸움이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상적인 답변을 내놓아서다. 예술에는 후원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술은 늘 후원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낸 골딘이 그랬듯 예술과 정치를 도드라지게 결합할 수도 있고,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작품이라도 누군가의 내면과 사회의 심연에 근본적인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종종 예기치 못한 변화의 씨앗이 되거나 그 변화의 징후를 표상한다. 예술의 정치성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예술이 최소한 기업가의 이미지 세탁보다는 더 정치적이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 무심은 너무 쉽고 다정은 너무 어렵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심'을 뜻한다. 애착을 뜻하는 'Attachment'에 부정 접두어 De-가 붙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애착의 반대는 무심이다.
열네 살 때 누군가가 물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아니.
나는 대답했다. 미워하는 거?
아니. 무관심이래.
중학생의 감수성으로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안다.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는 나와 닮아 있다는 것,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 정도.
결핍은 사랑 받기를 원했던 대상에게 사랑 대신 무심, 무관심을 받을 때 생긴다. 누구나, 여러모로, 다양한 종류의 결핍을 가지고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결핍이 애정결핍이 아닐까. 실제로 '나 애정결핍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자.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나. 어린애처럼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자학적이거나, 너무나 거만하거나, 혹은 너무나 세상에 무심하거나. 프로이트식으로 심플하게 리비도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그러기엔 찜찜하고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무심은 사람을 건조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무심, 타인에 대한 무심, 세상에 대한 무심.
인터넷을 보다 보면 '중립기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자동차를 중립기어로 두면 자동차는 기울어진 방향, 즉 비중이 큰 쪽으로 미끄러진다. 중립과 침묵은 힘이 센 쪽을 지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무심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힘 센 쪽이 제멋대로 세상을 굴려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무심한 편'이라는 사람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무심할 수 있겠나. 우리는 쉽게 무심해지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다정함을 잊는다.
애착과 관심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어른들 비슷하게 성장한 청소년기 정도. 다 큰 것 같지만 아기 같고, 아기 같지만 생각보다 성숙한 존재들. 누군가의 인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가 기간제 교사로 만나게 되는 학생들도 그러한 존재들이다. 선생들이 기어이 학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학교의 문제아들. 아무리 앉으라고 해도,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선생의 권위 따위는 이미 저세상 갔다. 대관절 선생의 권위라는 건 무엇일까. 특히나 헨리가 가르치는 문학 수업 따위를 대체 어디다 써먹는다는 건가.
헨리의 반에도 헨리의 가방을 던지고, 위협을 가하려 하며 반항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나 정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 베테랑 기간제 교사 헨리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당신을 조져버리겠다는 학생을 '네 행동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상대한다. 이렇게 대단한 선생이, 한 직장에 안정적으로 다니지 못하는 것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헨리는 배움이 왜 필요한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왜 배워야 할까.
그의 요지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
역설적으로 영화에는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한 트럭이다.
우선 헨리. 헨리는 어릴 때 엄마가 화장실에서 자살했고,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남겨진 헨리는 외할아버지가 키워주셨는데 그 할아버지도 치매다. 모두 다 잊어도, 딸이 화장실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못한다. 화장실 문을 닫을 때마다 병원이 발칵 뒤집어진다. 학교에서 참을성 있던 헨리도 병원에서 실수로 화장실 문을 닫는 바람에 난리가 나는 것만은 참지 못한다.
그렇게 병원을 뒤집어놓고 엉엉 울며 버스에 탄 헨리의 눈에 몸을 파는 가출 청소년 에리카가 들어온다. 에리카는 말해 뭐하겠는가. 갈 곳도 없고, 몸팔아 번 돈으로 하루하루 그냥 존재할 뿐이다. 삶이라는 것도 없다. 헨리는 갈 곳 없는 에리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에리카는 헨리가 당연히 관계를 요구할 줄 알았지만, 헨리는 에리카를 잘 돌봐준다.
학교 선생들도 다 상처투성이다.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학교를 책임지는 교장은 가뜩이나 학교도 머리가 아픈데 남편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남교사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학교에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대개 반쯤 정신이 나갔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학생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거다. 난 얘 뒤치닥거리 할 시간 없다. 학교에서 애를 잘 돌보면 집에서 신경 쓸 일이 없지 않느냐. 너희가 그러고도 선생이냐.
동네 이사장은 학교가 구려서 동네 땅값이 떨어진다고 한바탕 연설하고, 공개수업일에는 단 한 명의 학부모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메레디스. 학교에서는 레즈비언이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뚱뚱하다고 윽박지르고, 제법 소질을 보이는 사진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한다. 햄버거 하나도 마음껏 먹지 못해 화장실에 숨어서 먹는다. 뭘 먹는 걸 보면 놀릴 테니까. 메레디스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찍는다. 그의 렌즈에는 사람만 있다. 헨리는 메레디스의 외로움을 빠르게 읽고, 에리카에게 한 것처럼 도움의 손을 뻗는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선생으로서 메레디스를 안아주었지만 메레디스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또한 청소년기에 흔히 느끼는 전위일 뿐일 것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와는 다른, 이상적인 아버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얼마나 쉬운가.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이상적인 아버지'를 두고, 그런 남자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며, 이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힘들다.
썸타는 관계였던 동료 교사에게 목격되고, 아동성애자로 몰린 헨리는 종전에 볼 수 없던 분노에 휩싸여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에게 약속된 기간이었던 한 달이 끝나고 마지막 수업날. 그날은 메레디스가 예쁜 컵케익을 잔뜩 구워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흰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들 사이에 검은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이 있다.
헨리가 검은색이 맛있어 보인다고 하자, 메레디스는 그건 자기 거라고 말한다. 컵케익을 손에 들고 있는 학생과 선생님들 사이, 처음으로 메레디스가 사람들 앞에서 컵케익을 입에 문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메레디스. 헨리는 인공호흡까지 하면서 메레디스를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 메레디스는 헨리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헨리는 아동보호소에 보냈던 에리카를 찾아간다. 처음 보호소에 갈 때는 울고불고 난리였던 에리카도 나름 적응해서 잘 살고 있다. 헨리가 찾아오자 에리카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런 애다. 길거리에서 매춘을 하며 살 때의 되바라지고 무례한, 못된 10대가 아니다.
헨리의 행동이 과했는가. 오해를 살 만했는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호의 정도다.
약자 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딱 <디태치먼트> 속 학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주어를 지칭하기 어려우나, '그들'이라 하자. 그들은 한 번도 아이인 적 없던 것처럼 아이들을 혐오하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노인들을 혐오한다. 혐오의 지점을 발견한 자신을 예리하고 냉철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웃자고, 농담이라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궁색한 변명들과 함께.
전세계 IT 강국 코리아에서는 혐오의 언어가 네트워크를 타고 광속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배움' 자체를 조롱하기 시작한 그들은 가르쳐주려는 사람에게 꼰대, 틀딱이라고 부른다. 사흘이 며칠인지 안다는 이유로, 명징과 직조라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는 체 하는 재수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조롱과 혐오의 언어만을 학습하다 보면, 그 언어의 화살이 마침내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헨리는 수업시간에 애드가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의 한 문장을 언급한다.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
어찌 보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배경 학교와 학생들이 꼴통인 지점은 비슷한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는 어른이 존재하고, 어른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관심을 갖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는 '마음의 냉정함'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가.
-
- 인간의 의미에 대해 되묻다
사실 SF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현실성이 없어서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곤 했었다. 미래를 다루고 첨단을 다루고 있는 와중에도 그 본질적인 주제를 찾으면 지극히 현실적이라지만 이상한 기계들이 있는 저 배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서 그간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편견을 깨준 작품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시놉시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리플리컨트: 21세기 초 만들어진 복제인간.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과 사고방식 그리고 신체적 조건을 갖춘, 노동력 제공을 위한 인간의 대체품
# 블레이드 러너: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색출해 ‘제거’하는 임무를 가진 특수경찰
*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항상 겨울이더라
이러한 SF영화의 특징은 미래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전제로한 작품이 많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배경이 또 ‘겨울’이다. 날씨 자체가 비가 많이 내리기도 하고 실내 장면에서는 계절감을 딱히 알기 어려운 복장들을 하고 있어서 도대체 계절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는데 역시나 겨울이었다.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배경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지만 이러한 영화 문법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마찬가지구나 싶었지만 계절감을 알 수 없도록 실내에서의 배역들의 복장이라던지 눈 대신 물을 많이 사용한다던지 어느정도 혼란을 줄 수 있는 장치들을 사용해서 그 반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겨울이라는 배경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 외의 부분은 재밌게 봤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작품을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를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고 관객이 궁금증을 가지게끔 장치들을 배치해서 이 장치가 어떤 의미일가? 관객 나름 생각하게끔 만들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여러 장치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물’이었다. 사방팔방 물이 나온다. 요원 케이가 어딜 이동할 때마다 비가 흩뿌려지고, 리플리컨트들을 제어하는 본부를 감사는 건물 주변에는 댐처럼 물들이 방어하고 있고, 또 리플리컨트를 만들어내는 곳에서는 건물 내부의 조명이라던지 문양들이 꼭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케이가 실비아와 격투를 하는 장면도 바다 속에서 이뤄진다.
처음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때는 왜 저렇게 축축할까? 찝찝하다.. 이런 느낌이었는데 보다보니 모든 요소에 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이건 어떤 의미일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양수’의 개념이 아닐까 하고 결론을 내렸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양수로부터 외부 충격에 보호를 받듯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리플리컨트들을 물로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닐가 하는 나름의 해석을 해보았다.
그래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때 궁금했던 또 하나는 이 영화에 인간은 나오는가?였다.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존재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들만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에 인간은 있는 것인지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써는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확실히 인간이 아닌 블레이드 러너 케이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의 선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를 그의 딸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기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아무리 기계가 인간보다 신체적으로나 능력적으로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오류인줄 알지만 그것을 행하는 인간을 더욱 선망하는 것인가? 통제된 삶이 아니라 그 통제를 벗어나 오류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리플리컨트들을 인간이 아니면 무엇일까?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주지 않고 관객 스스로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품이었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기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되물은 작품이었다.
-
- 탐 엣 더 팜 / Tom at the Farm
/줄거리 스포주의/
애인 기욤의 부고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톰
참담한 심정으로 기욤의 집에서 장례식때까지 지내기로한다.
톰이 그와 기욤이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욤의 어머니에게 알리려했으나
기욤의 형인 프란시스의 협박에 의해 그의 계획은 무산되고
프란시스는 어머니에게 기욤의 애인이 사라라고 지어낸다.
어머니가 톰에게 사라와 기욤의 사이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톰의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다.
톰에게 계속되는 프란시스의 협박과 폭력.
더이상 못 버티겠어서 장례식이 끝나고 떠나버리는 톰
그러나 가방을 두고온걸 뒤늦게 알아채고 다시 돌아간다.
더 있으라는 프란시스와 어머니의 권유.
그는 이기지 못한채 몇 일 더 머물기로 한다.
머물면서 프란시스와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에게 감정이 생기게 된다.
기욤의 집으로 오게 된 사라.
그녀도 프란시스에게 폭력을 당하고
톰에게 프란시스는 미친것 같으니 같이 떠나자고 말한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편을 들며 남아버리는 톰
그리고 몇일이 지나 프란시스의 소문을 듣게 된 톰
그는 다시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
.
.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닮아 고통스러워도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YELM의 한줄소감
/감상평/
자신이 애인이고 그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얘기하지 못하는 상황을 겪으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 기분을 이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해 준 것 같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느낄 수 있었던 씬은
톰이 기욤에게 쓴 편지를 마치 사라가 전해달라고 한 것처럼
읊조릴 때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슬픔이 서려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감명 깊었던 부분은 위에서 말한 부분 뿐만이 아니었다.
톰이 프란시스를 떠나지 못하고
그의 올가미 속에서 계속 방황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생각해낸 해답은 "기욤을 너무 닮아서." 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낸 것 보다 돌란이 의도했던거겠지만.
기욤을 닮았다는것이 외모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도 나왔지만, 냄새도 닮아있고
그 이외에 프란시스의 행동하나하나 모든 것이 기욤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
프란시스가 톰에게 행하는 폭력들이
톰을 극한의 불안한 상태로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불안한 상태 + 기욤을 닮은 그의 모습
= 그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
그렇기 때문에 그가 프란시스를 변호한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씬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프란시스에게서 벗어난 그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느껴지는
자유.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배경음악
"나는 미국이 질렸어 - 벗어날래 - "
라는 가사들은 USA 옷을 입고있던 프란시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서 떠난다는 돌란의 마지막 인사 같은 느낌이랄까.
.
.
.
/ 마지막 여담 /
역시 돌란의 영화는 배경음악이 신의 한 수 다.
어쩜 그렇게 상황에 딱 맞는 음악을 넣는지 놀라울따름이다.
-
-
- 【결말포함】어른은 없다, 주름진 아이만 있을 뿐
#기쿠지로의_여름 #스포일러_없는 #리뷰
최신 일본 영화를 리뷰하고 추천합니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소개합니다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제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작가 슈라 원칙
1.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2.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
3. 수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4.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연락처
adonai0919@gmail.com※ 트위치
https://www.twitch.tv/sura_chtr※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writer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
- 영화 <할로윈 킬즈> 30초 예고편
할로윈 밤의 살아 있는 공포 ‘마이클 마이어스’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받으며 살아온 ‘로리 스트로드’
그녀는 딸 ‘캐런’, 손녀 ‘앨리슨’과 함께 ‘마이클’을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실감하기도 잠시, 그가 지하실을 탈출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이어 ‘마이클’의 살인이 벌어지면서 해든필드 주민들은 또 다시 공포와 혼란에 빠진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로리 스트로드’와 ‘캐런’, ‘앨리슨’은
해든필드 주민들과 그를 사냥하기 위한 추적을 시작하는데…
“악마는 오늘 밤 죽는다!”
-
- 영화 <킹 리차드> 1차 예고편
테니스계의 전설 월드 챔피언 윌리엄스 자매
그들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됐다!
-
-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국내 박스오피스]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가 개봉 첫 주말 44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위, <서울의 봄>은 총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최초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이상 동원, 총 217회 차의 무대인사를 기록하여
기존 영화계의 흥행 기록들을 갈아 치웠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티모시 샬라메 주연 <웡카>가 다시 한 번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전 세계 매출액 4억 6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웡카>는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으나 2주차 주말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에
밀려 한 계단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3주차 주말에 다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되찾고 4주차 주말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제임스 완 감독의 새로운 공포영화 <나이트 스윔>이 2위,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3위에 머물렀지만 글로벌 박스오피스 2억 6천만불을 넘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
-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The Lovers data-on The Bridge)
개봉일 : 1992.04.18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나에게 <퐁네프의 연인들>은 명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왠지 ‘그날의 기분’에 끌리지 않아 밀려버렸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한 개봉작이 아닌 이상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영화를 본 당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단 다가올 상실을 걱정하며 스스로 길거리에 나앉은 미셸과 길거리를 내 집 삼아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가는 노숙자 알렉스. 두 사람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만난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 다리 위.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미셸을 발견한다. 미셸은 알렉스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길거리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멀어버리기 전, 제대로 알렉스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수 중인 불완전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결핍으로 가득 찬 알렉스와 미셸. 두 사람은 가진 게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처지인 두 사람에게 남은 게 있겠는가. 돈도 직업도 지금 당장 만날 인연도 없는 (미셸은 자발적으로 버리고 나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니. 또 다른 노숙자 한스는 알렉스에게 묻는다. “네 주제에 사랑을?”
현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애, 즉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나를 가꿀 시간도 모자라서, 나를 건사하기도 벅차서. ‘가진 게 없어 연애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빠르게 포기하는데,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을 한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한다. 내가 상상하던 완전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분명 강렬한 빛깔의 로맨스였다. 퐁네프 다리 위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을, 알렉스의 물음에 미셸이 답을 내리던 그 순간을, 사랑을 잃을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퐁네프의 연인들 시놉시스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내 삶을 선택할 거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알렉스의 삶은 퐁네프 다리 위에 있다. 알렉스가 언제부터 그 다리 위에서 살아온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다듬은지 오랜 기간 지난듯한 몸. 그리고 자연스러운 절도 행위. 알렉스는 퐁네프 다리가 보수작업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다친 발을 이끌고 다시 다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성 미셸. 그녀는 육군 대령의 딸이다. 꽤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왔을 걸로 예상되는 그녀는 그림 작가였지만, 헤어진 연인 줄리앙에게서 받은 상처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떠밀려 길거리를 떠돈다.
미셸은 총과 함께 줄리앙에 대한 미련을 품고 퐁네프 다리에 누워있다. 그녀는 역사에서 우연히 줄리앙의 첼로 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뒤를 뒤쫓는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이 미셸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미셸의 뒤에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남자 알렉스가 있었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총과 함께 미련을 버린다. 7발은 미셸이 7발은 알렉스가.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의 행운을 위해. 알렉스와 미셸은 음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번갈아 총성을 울리며 함께 미련을 지워버린다. 그 날밤, 두 사람은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내일 아침 네가 날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은 세상. 온 도시가 잠든 후에 시작되는 둘만의 시간. 불면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팔. 이런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바람 부는 다리여도 상관없었고, 모래가 가득한 바닥은 포근한 매트리스가 되어 두 사람을 넉넉히 감싼다.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랑을 한다. 마치 갓 세상에 태어난 동물들이 첫 발걸음을 떼는, 본능을 따라가는 그 순간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엇도 알렉스와 미셸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
알렉스는 미셸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간절함은 지하철 역사를 헐떡이며 뛰게 만들었고 끝내 포스터가 들어있는 차와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 한 명을 불태우기에 이르지만, 미셸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이 갖고 있던 라디오는 선이 끊긴 채 방치되었고 알렉스는 미셸 몰래 숨겨뒀던 총으로 왼손 약지를 쏜다. 보통의 연인들은 왼손 약지에 껴둔 반지를 빼며 이별을 실감하는데, 알렉스는 커플링 대신 자신의 손을 쏘며 이별을 맞이한다.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였다면 의미 있는 물건 하나쯤은 남을만한데, 가진 것 없이 이뤄진 둘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방화와 과실치사로 복역하게 되고 2년쯤이 지난 후 미셸은 알렉스를 찾아온다. 시력을 회복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라, 잃었던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미셸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은 순간이 아닌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음을 그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했던 순간이, 모두가 잠든 후에 마음껏 도시를 누리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알렉스와 미셸은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퐁네프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두 사람을 받아준 화물선 위에서 다리 위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두 사람이 만일 다른 시간대에, 퐁네프 다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미셸이 절망감에 휩싸여 퐁네프 다리에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등을 뉠 수 있었던 퐁네프 다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겠지. 퐁네프에서 만난, 퐁네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퐁네프의 연인이 어쩌면 이 두 사람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 예술계 거장 vs 이미지 세탁한 재벌 가문
8★/10★
사진계의 거장과 예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 가문이 맞붙었다. 전자는 낸 골딘이고 후자는 제약회사 퍼듀 파마의 소유주인 새클러 일가다. 시작은 옥시콘틴이었다. 퍼듀 파마는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콘틴을 개발한 후 공격적 마케팅에 나섰다. 옥시콘틴의 중독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 약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만 말했다. 나아가 불법과 편법의 경계에서, 종국에는 불법으로 점철된 공격적으로 영업을 이어갔다(이 과정은 넷플릭스 영화 〈페인 허슬러〉 참고). 그 결과는? 수십만 명이 옥시콘틴에 중독됐다. 지금까지 60만 명 이상이 옥시콘틴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낸 골딘 역시 과거 수술 후 옥시콘틴을 처방받았고, 중독되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투쟁을 더욱 확장하기로 결심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두 번째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이 싸움을 담아냈다.
퍼듀 파마를 만나기 이전부터, 낸 골딘의 삶과 예술은 이미 투쟁이었다. 낸 골딘의 언니는 ‘마음이 병들었다’는 부모의 판단 때문에 정신병원에 머물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언니의 진료 기록에는 그녀가 평범한 정도의 반항심을 가진 청소년이었고, 오히려 부모가 문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죽었고, 골딘은 언니에게서 유쾌한 반항심을 배웠다. 골딘은 집에 있으면 ‘언니처럼’ 될 거란 우려에 부모님 집을 떠나 위탁 가정을 전전했고, 한 히피 학교에서 마침내 구원받았다. 이후 골딘은 게이, 드래그퀸 등의 친구들을 사귀며 퀴어 공동체에서 생활했고 스냅사진으로 친구들이 뿜어내는 삶의 생동감을 포착했다. 섹스보다 사진이 좋았을 정도로, 골딘은 사진에 심취했다. 메리 올리버와 마이클 커닝햄이 각각 《긴 호흡》, 《그들 각자의 낙원》에서 아름다운 산문으로 예찬한 바 있는 ‘게이들의 천국’ 프로빈스 타운의 레즈비언 분리주의자 공동체 일원으로 지내기도 했다. 보수적 가족의 억압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동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사회/문화 공동체로 이끈 셈이다. 이후에는 필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댄서, 성노동자 등으로 일했고 그녀의 사진이 품은 탈규범적 생명력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본 한 큐레이터에 의해 마침내 정식으로 예술계에 발을 디뎠다(골딘은 큐레이터에게 지금껏 작업한 사진을 모은 박스를 옮기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오럴 섹스를 해줬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을 이어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데뷔 이후에도 녹록지 않았다. 남자친구와의 섹스 장면 등 그녀가 살아가는 일상의 생기를 포착한 사진은 조롱받았고, 기성 예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투쟁으로서의 삶/예술도 이어졌다. 영화는 골딘이 미국의 에이즈 위기 당시 급진적 에이즈 운동을 벌인 단체 액트업과 함께 작업한 장면을 특히 자세히 비춘다. 정부의 무관심과 방치로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던 에이즈 감염인들과 당사자들이 벌이는 저항 운동은 퀴어 공동체에서 예술을 길어온 골딘이 옥시콘틴 중독자 당사자로서 퍼듀 파마와 싸우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을 터다.
영화는 골딘의 삶/예술 여정과 퍼듀 파마를 상대로 한 현재의 싸움을 번갈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 새클러관에서 골딘과 동료들은 퍼듀 파마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새클러관은 새클러 일가가 엄청난 돈을 예술계에 후원한 대가로 설치된 곳으로, 메트로폴리탄뿐 아니라 구겐하임, 루브르, 대영박물관 서구의 유수한 미술관‧박물관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다. ‘예술에서 후원자의 존재는 필수적인가’라는 물음에는 여러 입장이 있지만, 어쨌든 지금껏 예술에 늘 ‘큰손’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돈이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면, 수많은 사람이 마약성 진통제로 고통받은 결과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자 그대로 죽음을 대가로 한 돈으로 예술을 후원해 사회적 명성을 쌓는 일은 예술-후원의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 사회 정의의 문제다. 낸 골딘은 예술이 가장 더러운 돈을 위장하는 데 쓰이는 일을,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모욕한 제약회사의 전시관에 자기 작품이 전시되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퍼듀 파마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것을, 무엇보다 예술계가 새클러 일가와 그의 영향력을 완전히 퇴출할 것을 요구하며 긴 싸움을 펼쳐나간다.
골딘이 속한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즉각적인 처방약 중독 개입)은 새클러관이 있는 여러 미술관을 두루 순회하며 행위 예술,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마침내 예술계에서 새클러 일가의 이름을 걷어내는 데 성공한다. 저명한 사진 예술가로서 쌓아온 명성과 추구해온 예술적 가치를 결합한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부분적이다. P.A.I.N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 활동가, 당사자의 싸움으로 퍼듀 파마는 파산했고, 새클러 일가는 60억의 합의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많다. 회사 파산으로 책임을 면피하고, 합의금으로 수천 건의 소송을 취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적인 승리가 감동적인 이유는, 낸 골딘의 싸움이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상적인 답변을 내놓아서다. 예술에는 후원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술은 늘 후원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낸 골딘이 그랬듯 예술과 정치를 도드라지게 결합할 수도 있고,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작품이라도 누군가의 내면과 사회의 심연에 근본적인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종종 예기치 못한 변화의 씨앗이 되거나 그 변화의 징후를 표상한다. 예술의 정치성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예술이 최소한 기업가의 이미지 세탁보다는 더 정치적이라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 무심은 너무 쉽고 다정은 너무 어렵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심'을 뜻한다. 애착을 뜻하는 'Attachment'에 부정 접두어 De-가 붙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애착의 반대는 무심이다.
열네 살 때 누군가가 물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아니.
나는 대답했다. 미워하는 거?
아니. 무관심이래.
중학생의 감수성으로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안다.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는 나와 닮아 있다는 것,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 정도.
결핍은 사랑 받기를 원했던 대상에게 사랑 대신 무심, 무관심을 받을 때 생긴다. 누구나, 여러모로, 다양한 종류의 결핍을 가지고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결핍이 애정결핍이 아닐까. 실제로 '나 애정결핍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자.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나. 어린애처럼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자학적이거나, 너무나 거만하거나, 혹은 너무나 세상에 무심하거나. 프로이트식으로 심플하게 리비도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그러기엔 찜찜하고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무심은 사람을 건조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무심, 타인에 대한 무심, 세상에 대한 무심.
인터넷을 보다 보면 '중립기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자동차를 중립기어로 두면 자동차는 기울어진 방향, 즉 비중이 큰 쪽으로 미끄러진다. 중립과 침묵은 힘이 센 쪽을 지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무심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힘 센 쪽이 제멋대로 세상을 굴려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무심한 편'이라는 사람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무심할 수 있겠나. 우리는 쉽게 무심해지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다정함을 잊는다.
애착과 관심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어른들 비슷하게 성장한 청소년기 정도. 다 큰 것 같지만 아기 같고, 아기 같지만 생각보다 성숙한 존재들. 누군가의 인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가 기간제 교사로 만나게 되는 학생들도 그러한 존재들이다. 선생들이 기어이 학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학교의 문제아들. 아무리 앉으라고 해도,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선생의 권위 따위는 이미 저세상 갔다. 대관절 선생의 권위라는 건 무엇일까. 특히나 헨리가 가르치는 문학 수업 따위를 대체 어디다 써먹는다는 건가.
헨리의 반에도 헨리의 가방을 던지고, 위협을 가하려 하며 반항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나 정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 베테랑 기간제 교사 헨리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당신을 조져버리겠다는 학생을 '네 행동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상대한다. 이렇게 대단한 선생이, 한 직장에 안정적으로 다니지 못하는 것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헨리는 배움이 왜 필요한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왜 배워야 할까.
그의 요지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
역설적으로 영화에는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한 트럭이다.
우선 헨리. 헨리는 어릴 때 엄마가 화장실에서 자살했고,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남겨진 헨리는 외할아버지가 키워주셨는데 그 할아버지도 치매다. 모두 다 잊어도, 딸이 화장실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못한다. 화장실 문을 닫을 때마다 병원이 발칵 뒤집어진다. 학교에서 참을성 있던 헨리도 병원에서 실수로 화장실 문을 닫는 바람에 난리가 나는 것만은 참지 못한다.
그렇게 병원을 뒤집어놓고 엉엉 울며 버스에 탄 헨리의 눈에 몸을 파는 가출 청소년 에리카가 들어온다. 에리카는 말해 뭐하겠는가. 갈 곳도 없고, 몸팔아 번 돈으로 하루하루 그냥 존재할 뿐이다. 삶이라는 것도 없다. 헨리는 갈 곳 없는 에리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에리카는 헨리가 당연히 관계를 요구할 줄 알았지만, 헨리는 에리카를 잘 돌봐준다.
학교 선생들도 다 상처투성이다.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학교를 책임지는 교장은 가뜩이나 학교도 머리가 아픈데 남편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남교사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학교에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대개 반쯤 정신이 나갔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학생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거다. 난 얘 뒤치닥거리 할 시간 없다. 학교에서 애를 잘 돌보면 집에서 신경 쓸 일이 없지 않느냐. 너희가 그러고도 선생이냐.
동네 이사장은 학교가 구려서 동네 땅값이 떨어진다고 한바탕 연설하고, 공개수업일에는 단 한 명의 학부모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메레디스. 학교에서는 레즈비언이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뚱뚱하다고 윽박지르고, 제법 소질을 보이는 사진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한다. 햄버거 하나도 마음껏 먹지 못해 화장실에 숨어서 먹는다. 뭘 먹는 걸 보면 놀릴 테니까. 메레디스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찍는다. 그의 렌즈에는 사람만 있다. 헨리는 메레디스의 외로움을 빠르게 읽고, 에리카에게 한 것처럼 도움의 손을 뻗는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선생으로서 메레디스를 안아주었지만 메레디스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또한 청소년기에 흔히 느끼는 전위일 뿐일 것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와는 다른, 이상적인 아버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얼마나 쉬운가.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이상적인 아버지'를 두고, 그런 남자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며, 이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힘들다.
썸타는 관계였던 동료 교사에게 목격되고, 아동성애자로 몰린 헨리는 종전에 볼 수 없던 분노에 휩싸여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에게 약속된 기간이었던 한 달이 끝나고 마지막 수업날. 그날은 메레디스가 예쁜 컵케익을 잔뜩 구워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흰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들 사이에 검은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이 있다.
헨리가 검은색이 맛있어 보인다고 하자, 메레디스는 그건 자기 거라고 말한다. 컵케익을 손에 들고 있는 학생과 선생님들 사이, 처음으로 메레디스가 사람들 앞에서 컵케익을 입에 문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메레디스. 헨리는 인공호흡까지 하면서 메레디스를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 메레디스는 헨리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헨리는 아동보호소에 보냈던 에리카를 찾아간다. 처음 보호소에 갈 때는 울고불고 난리였던 에리카도 나름 적응해서 잘 살고 있다. 헨리가 찾아오자 에리카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런 애다. 길거리에서 매춘을 하며 살 때의 되바라지고 무례한, 못된 10대가 아니다.
헨리의 행동이 과했는가. 오해를 살 만했는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호의 정도다.
약자 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딱 <디태치먼트> 속 학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주어를 지칭하기 어려우나, '그들'이라 하자. 그들은 한 번도 아이인 적 없던 것처럼 아이들을 혐오하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노인들을 혐오한다. 혐오의 지점을 발견한 자신을 예리하고 냉철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웃자고, 농담이라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궁색한 변명들과 함께.
전세계 IT 강국 코리아에서는 혐오의 언어가 네트워크를 타고 광속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배움' 자체를 조롱하기 시작한 그들은 가르쳐주려는 사람에게 꼰대, 틀딱이라고 부른다. 사흘이 며칠인지 안다는 이유로, 명징과 직조라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는 체 하는 재수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조롱과 혐오의 언어만을 학습하다 보면, 그 언어의 화살이 마침내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헨리는 수업시간에 애드가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의 한 문장을 언급한다.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
어찌 보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배경 학교와 학생들이 꼴통인 지점은 비슷한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는 어른이 존재하고, 어른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관심을 갖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는 '마음의 냉정함'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