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1-06 17:34:11
출발선에 선 이들을 위한 영화 8선
행운을 빌어줘요!

여러분은 한 해의 속도를 무엇으로 느끼시나요?
이제는 학교가 어색해져 버린 나이지만, "한 해가 또 지나가는구나"라는 감각만은 여전히 '수능'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시험 일정 역시 다음 주로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수험생을 비롯해 출발선에 선, 혹은 다시 뛰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이들을 위한 영화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이야기인 만큼 졸업 시즌에 맞추어 감상하시는 것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학생이 아니어도 에디터처럼 잠시 추억에 빠져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소개해 드립니다.
그럼, 출발선에 선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 빌어요!
<북스마트>, 올리비아 와일드

줄거리
꿈도, 연애도, 다이어트도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은 스무 살이 가장 기대되는 나이 열아홉! 아이비리그에 합격한 ‘에이미’와 ‘몰리’는 대학과 스펙이 인생의 전부라 믿는 파워 범생이. 춤은 글로, 파티는 책으로 배운 두 사람은 고3의 마지막 졸업 파티에서 잊을 수 없는 레전드 핵인싸가 되기 위해 사상 초유의 일탈을 계획하는데….
<린다 린다 린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줄거리
시바사키 고등학교에선 문화제 준비가 한창이다. 고교생활 마지막을 장식할 문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연습 중이던 밴드는 멤버들의 부상과 탈퇴 등으로 해체의 위기를 맞는다. 남은 멤버만으로 연주할 곡을 찾던 이들은 우연히 전설적 밴드 '블루하트'의 '린다 린다'라는 곡을 듣게 되는데... '바로 이거다!' 다급히 보컬을 찾던 중 마침 이들 앞을 지나가던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 송에게 보컬을 제안한다. 아직 일본어가 미숙한 송은 계속 고개만 끄덕이다가 얼떨결에 밴드 보컬을 떠맡게 된다. 송의 노래실력을 처음 알게 된 밴드 멤버들... 그래도 학창시절 마지막 문화제를 포기할 수 없는 이들, 밴드 연습을 하며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아 나가는데...
<반쪽의 이야기>, 앨리스 우

줄거리
용돈 벌이를 위해 폴의 러브레터 대필을 맡게 된 엘리.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자꾸 만나다 보니 이 친구, 정이 든다. 그런데 그건 둘째 치고, 러브레터 상대에게 자꾸 설레는 걸 어쩐담?
<리바운드>, 장항준

줄거리
농구선수 출신 공익근무요원 ‘양현’은 해체 위기에 놓인 부산중앙고 농구부의 신임 코치로 발탁된다. 하지만 전국대회에서의 첫 경기 상대는 고교농구 최강자 용산고. 팀워크가 무너진 중앙고는 몰수패라는 치욕의 결과를 낳고 학교는 농구부 해체까지 논의하지만, ‘양현’은 MVP까지 올랐던 고교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선수들을 모은다.
주목받던 천재 선수였지만 슬럼프에 빠진 가드 ‘기범’ 부상으로 꿈을 접은 올라운더 스몰 포워드 ‘규혁’ 점프력만 좋은 축구선수 출신의 괴력 센터 ‘순규’ 길거리 농구만 해온 파워 포워드 ‘강호’ 농구 경력 7년 차지만 만년 벤치 식스맨 ‘재윤’ 농구 열정만 만렙인 자칭 마이클 조던 ‘진욱’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최약체 팀이었지만 신임 코치와 6명의 선수가 2012년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써 내려간 8일간의 기적 모두가 불가능이라 말할 때, 우리는 ‘리바운드’라는 또 다른 기회를 잡는다.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 나카가와 슌

줄거리
폐교를 앞둔 고등학교. 마지막 졸업식까지 D-2. 4명의 소녀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 소녀들이 간직한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마음은…? 한 소녀는 멀리 떨어져야 하는 남자친구에게, 한 소녀는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하는 친구에게, 한 소녀는 안식처가 되어준 선생님에게, 한 소녀는 차마 읽을 수 없었던 졸업식 답사를 들려주고 싶은 소년에게.
안녕… 나의 학교, 청춘 그리고 사랑.
<빅토리>, 박범수

줄거리
1999년 세기말 거제, 춤만이 전부였던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는 댄스 연습실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서 전학온 치어리더 '세현'(조아람)을 내세워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든다. 그렇게 9명의 멤버들이 모여 탄생한 '밀레니엄 걸즈’는 ‘치형'(이정하)의 거제상고 축구부를 위한 치어리딩 공연을 시작으로, 응원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게 된다. 그곳이 시장, 병원 그리고 아버지들의 파업 현장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응원하며, 나 자신도 응원받는 모두의 빅토리가 시작된다!
<싱스트리트>, 존 카니

줄거리
‘코너’는 전학을 가게 된 학교에서 모델처럼 멋진 ‘라피나’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라피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덜컥 밴드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한 ‘코너’는 급기야 뮤직비디오 출연까지 제안하고 승낙을 얻는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도 잠시, ‘코너’는 어설픈 멤버들을 모아 ‘싱 스트리트’라는 밴드를 급 결성하고 ‘듀란듀란’, ‘아-하’, ‘더 클래쉬’ 등 집에 있는 음반들을 찾아가며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첫 노래를 시작으로 조금씩 ‘라피나’의 마음을 움직인 ‘코너’는 그녀를 위해 최고의 노래를 만들고 인생 첫 번째 콘서트를 준비하는데…
<월플라워>, 스티븐 크보스키

줄거리
말 못할 트라우마를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찰리’는 고등학교 신입생이 돼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방황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삶을 즐기는 ‘샘’과 ‘패트릭’ 남매를 만나 인생의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멋진 음악과 친구들을 만나며 세상 밖으로 나가는 법을 배워가는 ‘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샘’을 사랑하게 된 그는 이제껏 경험한적 없는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불현듯 나타나 다시 ‘찰리’를 괴롭히는 과거의 상처와 ‘샘’과 ‘패트릭’의 겉잡을 수 없는 방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 사람의 우정을 흔들어 놓기 시작하는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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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 글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감독, 팀 밀란츠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을 전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요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수녀원을 중심으로 한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보호, 참회, 갱생을 빌미로 젊은 여성들을 감금하고 노동착취를 일삼았던 역사(막달레나 세탁소)와 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이미 접한 관객이라면, 첫 장면에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담겼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마을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 고집스럽게 화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정신적 영향력을 관객에게까지 과시하는 수녀원을 과연 누가 못 본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는 어두침침한 마을을, 관객들이 단순히 '풍경'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무실 전화벨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 석탄 배달을 가는 빌처럼 말이다. 그의 트럭을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일상을, 암울한 사회 배경보다 먼저 마음에 담길 원한다. 잔혹한 역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상황보다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더 주요하게 여겨서고, 본래 역사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상관없이 인물로 설명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조금의 덧붙임 없이 충실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이유와도 연결된다. 영화의 주제 의식과 소설의 지향점은 같다. 오직 인물만이 이 비극적 역사를 풀어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오직 빌 펄롱만이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밝힐 수 있다는 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을 통해 쓰인 작품이다. 우린 빌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가 사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가치, 따뜻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빌이 트럭에 석탄을 담는다. 석탄 배달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삶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이다. 새벽에 출근해 석탄을 배달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화장실에서 온몸에 묻은 석탄 가루를 씻어낸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인 귀여운 딸들의 수다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잠에 든다. 자주 잠을 설치지만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석탄을 배달한다. 소소한 만큼 무료하기도 하지만 가족의 평안이란 확실한 대가가 충족되는 하루, 모두에게 이상적인 삶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참이었다. 그가 부모에 의해 수녀원에 강제로 입소하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석탄 창고 안에서 소녀의 울부짖음에도 숨죽였던 그때, 빌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불안이 실은 시한폭탄이었고, 소녀가 수녀원에 갇힌 순간 폭탄 작동 버튼도 함께 눌렸음을 말이다. 사실 빌은 남들처럼 소소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불편했다. 정확히는 모두가 가끔은 불행하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때, 본인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에게 평안의 다른 말은 불안이었고 이는 따뜻함과 혼란함이 공존했던, 그리하여 너무나도 혹독했던 유년기에서부터 축적된 결과였다.
소녀를 처음 본 이후 영화는 석탄 배달 같은 반복적인 장면은 빠르게 넘기고, 빌이 혼자인 순간엔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 어딘가 외롭고 공허해 보이는 그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클로즈업 샷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을 더 집중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대체 어떤 사건이 빌의 내면에 불안을 심었으며, 목에 걸린 음울은 왜 계속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지 궁금하게 한다. 그의 불안을 역추적하는 일에 모든 힘을 소진하는 것인데, 이는 빌이 아내는 물론 동료, 이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빌의 어머니는 갱생의 대상, 미혼모였다. 부잣집 가정부인 그녀 또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꼼짝없이 수녀원에 갇힐 처지였다. 그러나 집주인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빌을 낳고 길렀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부인의 아들이 삼촌으로 곁에 있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들의 보살핌은 계속됐다. 수녀원 창고 안에서 볼록한 배를 감싸고 두려움에 떠는 소녀를 보며, 빌이 어머니를 떠올린 건 당연했다.
빌은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는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계속 과거의 나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걸로도 모자라 현실로 불러와 성인이 된 본인과 마주하게 한다. 소녀는 어머니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윌슨 부인과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빌은 그들의 따뜻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때 부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빌은 없었을 테니까. 더구나 작고 허름해도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은 아내의 말처럼 운이 좋아 얻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윌슨 부인이 어린 빌에게 준 사랑은 많은 돈과 우연이 결합해 발생한 운 좋은 얘깃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이 윌슨 부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웠음을, 어린 빌과 부인의 추억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꺼내 증명한다. 그녀의 사랑은 그를 진정 따뜻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나를 아끼듯 타인을 생각하고, 나를 위로하듯 남을 돌보고, 나를 사랑하듯 그를 돕는 삶. 아내와 다른 이들이 바라는 수녀원의 차가운 입김이 닿지 않는 삶과는 확실히 정반대였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소녀를 돕지 않는 본인을 향한 혐오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사이, 빌은 결국 가장으로 살아온 시간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침묵이 곧 순리임을 돈과 권력으로 강요하는 수녀원장의 입김에 고갤 숙인다. 지금껏 지켜온 모두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단골 가게 사장의 말에도 이를 악물며 참는다. 소녀가 생각나 부끄러움이 밀려오자,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자괴감이 휘몰아치자, 이를 잘라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간다. 늘 그래왔듯 하루 더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사는 이곳은 누군가를 가여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돕는 게 불가능하고, 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수녀원에 끌려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무관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힘들어할 시간도 없다고 여기는 사는 사람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빌을 무조건 추앙하지도 않는다. 그저 끝까지 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된 침묵만 감도는 이발소 안, 빌은 거울에 비친 어린 자신과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삼촌을 발견하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반복과 집중을 단번에 없애고 이야기 끝자락을 수놓는 빌을 조용히 따라간다. 빌이 외면했던 사람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윌슨 부인, 삼촌이었으며 자기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받은 사랑이 무참히 소멸하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빌에겐 그 희망이 전부였고, 여전히 삶의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의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선택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홀로 된다고 말하는 결연한 용기와는 다르다. 빌은 자기를 버릴 수 없었기에 용기를 냈다. 다만 그의 용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 그가 베풀고자 하는 사랑 안엔 가족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모두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 결과 수녀원 창고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빌의 모습은 알코올 중독자인 친구 아들에게 잔돈을 줬던 그날처럼, 평범한 하루로부터 퇴근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비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울컥하게 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전한다, 삭막한 곳에도 희망은 피어나고, 희망이 핀 곳엔 사실 희망이 이미 뿌리내려져 있었단 사실을.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빌이 소녀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빌이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막달레나 세탁소’는 여전히 수녀원장이 준 크리스마스카드 안에 감춰져 있었겠지. 그의 손에 접착제처럼 붙어있던 석탄 가루가 말끔히 씻겨 사라지는 일도 끝내 없었을 테고, 가족이 있는 시끌벅적한 부엌으로 들어가는 빌과 소녀의 모습 같은, 이처럼 사소한 것도 영영 못 봤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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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끝에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몇 년 전, 친구와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을 했다. 샌프란에서 출발해 LA를 찍고 샌디에이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LA로 올라오는, 나름의 모험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번을 왕복할 정도의 거리를 달리면서 온갖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했고, 미국이란 땅이 낯선 나를 위해 유학 중인 친구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흔한 미국 사람이 홈리스가 되는 시나리오'가 기억에 남는다. 친구에 따르면 미국 서민들의 경우 차를 한번 수리하는 비용과 인건비가 원체 비싸기 때문에 차 유리창이 깨져도 신문지로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도심 외곽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어느 날 차가 완전히 고장 나기라도 하면, 수중에 단돈 몇 천 달러가 없어서 수리비를 변통하지 못한다.(렌트와 보험비를 포함한 기본 생활비가 비싸기 때문에 수중에 현금이 많이 없다고 한다. 저축이란 개념도 약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차를 타고 직장에 가지 못 하여 직장에 잘린다. 직장에서 잘리면 렌트와 보험을 내지 못하고, 그러다 어처구니없게도 홈리스로 전락한다.
샌프란 도심 거리에 보이는 홈리스들은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었는데 실은 파트타임 일을 몇 개씩 뛴다고 한다. 이들은 차가 없기 때문에 다운타운을 떠나지 못하고 슬럼을 형성한다. 미국인에게는 마치 신발과도 같은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일자리의 선택 범위를 확연히 좁히면서, 삶의 방식까지도 제한한다. <노매드랜드>를 보았다면,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과 위와 같은 홈리스들이 질적으로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펀이 자처한 유목민 생활은 도심의 홈리스의 삶보다도 더 척박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의도치 않게 동정 어린 눈길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마주친 옛 학생 앞에서 펀은 자신이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엄연한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선포한다. 홈은 곧 하우스라는 공식에 들어맞지 않을 뿐, 그녀는 홈리스와 다르게 기동력과 안식처를 동시에 쟁취했다고 청중을 설득하고자 한다. 후반부에 카센터에서 구제불능이 된 고물 밴을 집이자 안식처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주장에 진정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펀은 마치 60년대 히피 라이프를 시대착오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 유아적이라는 인상마저 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간의 오해를 뒤로하고 그녀의 여정은 계속된다.
현대인의 끝나지 않는 노동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고들 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에게는 소박하게는 집 한 채 마련, 궁극적으론 경제적 자유가 최종 목표라고도 한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이 촉발한 금융위기부터 지금의 Covid-19까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그 10년 간 경제적으로 낙오한 이탈자들 뿐 아니라 이제 막 노동시장에 진입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이 '소박했던' 바람은 신기루 같은 꿈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떠도는 주체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실제로 실천하고 사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마치 구석기시대로 회귀한 듯한 생활 풍경을 묘사한다. 이들은 수렵과 채집을 하듯 아마존 물류센터, 캠핑장, 고속도로 식당에서 단기 일자리를 구하며 동굴에 몸을 누이듯 밴 안에 몸을 누인다. 특히 영화는 실제 노매드인 린다 메이, 스웽키, 데이브와의 우정을 통해 이들의 다공성(porous)이면서도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노매드 식의 연대에 주목한다. 구석기인들처럼 이들은 서로 평등하고 계급을 의식하지 않으며 식량과 불을 나눈다.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은 서로 교환하거나 나누고, 노동의 품앗이를 한다. 불을 지피는 모습, 공룡, 화석, 먼 별빛 등 태곳적을 상징하는 고고학적인 소재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방법론에 대하여
본 영화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 저, <노매드랜드 : 21세기에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주인공 펀과 데이브를 제외한 일군의 조연 역으로 실제 노매드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어딘가 익숙한 이 작법은 다름 아닌 TV 다큐멘터리의 DNA를 가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법과 닮아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침 최근에 그의 20년간의 영화 자서전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이 감독의 작업 방식과,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국적이고 동양적 가치관을 읽어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서 그는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무관한 정서의 작품을 찍고자 하였으며 마치 재즈에 비유할 수 있는 TV의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비연극적인 작품을 찍고자 한 것이 바로 <원더풀 라이프>이다. 그는 <원더풀 라이프>의 방법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나 픽션이라는 식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하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배우든 일반인이든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허문 장르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직접 연기하는 인물들의 자기표현 욕구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것이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놀라운 화학작용을 발견한다. 이로써 인터뷰는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표현의 생성 과정이 된다.
<노매드랜드> 역시 픽션과 다큐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픽션에 다큐멘터리식 터치가 들어갔다'거나, '페이크 다큐'라고 단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그의 영화에 다큐식 터치가 가미되었다는 평가에 억울하다고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들을 다큐식 촬영을 단순 차용하여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은 자오의 섬세한 연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카메라는 광활한 대자연과 그 안에서 늙고 풍화되어 가는 인물들을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극적이거나 작위적인 연출을 지양하는 대신, 대상이 스스로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애정과 시간을 들여 지켜보고자 한다. 특히 현실 고발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여 한 생태계를 파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감독은 노매드의 삶에 미묘하고도 아주 깊숙이 그러나 그들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침투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카메라의 존재와 배우의 존재는, 노매드들이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태도에도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노매드인 출연진들도 이제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자기 삶에 대한 표현 욕구를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이들만이 가진 긍지, 강인함, 존재론적 고독을 발견한다.
펀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또한 본인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 스스로가 배우라는 사실조차 잊고 5개월의 긴 여정 동안 순전히 펀이라는 인물로 살아간다. 맥도먼드는 실제로 아마존에 이력서를 내고 취업도 하고, 밥 웰스가 설립한 RTR(Rubber Tramp Rendezvous)에 머무는 노매드들과 교류를 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동안 누구도 그녀를 유명 여배우라고 의심해본 적 없을 만큼, 맥도먼드는 생활 연기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한 캐릭터를 체화할 수 있었다. 이 성실하기 그지없는 배우는 나중에 펀이라는 인물의 핵심 코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터뷰한다(링크). RTR에 처음 입성했을 때 펀은 처음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그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조용히 듣는 역할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밥 웰스와 일대일로 대면할 때 자신의 이야기(실은 픽션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두 사람의 독대 장면은 후반부에 한번 더 반복되는데, 맥도먼드 배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순수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밥 웰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 장면이 끝나고 배우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타인의 삶을 대하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는 완전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감독이나 제작자의 생각을 투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감독은 배우 양쪽에게 정보의 불균형을 주고 돌발적인 지시를 내린다든가 하는 '조작'과 테크닉을 통해 즉흥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밥 웰스가 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상실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은, 펀이라는 같은 처지의 청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토로이자 고백이었다. 이 장면은 밥 웰스를 외부인으로서 관찰하면서 얻어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였고 그녀의 남편도 멀쩡히 살아있다 한들, 그가 드러낸 진실된 감정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영화은 이런 진귀한 장면을 포착, 발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맥도먼드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해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 순간 아주 밀도 있게 형성된 특별한 관계는 다음 국면을 맞이한다. 이 영화는 배우와 카메라를 통해 실존하는 인물들의 삶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다가가려고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를 취한다.
애도를 마치고 나면
이제 비로소 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2008년 경기침체로 미국 엠파이어의 석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마을은 폐허가 되고 만다. 사랑하는 남편 '보'마저 병으로 떠나보내자, 펀은 집을 청산하고 밴 한대를 몰고서 노매드의 생활을 시작한다(영어로는 hit the road라고 표현하는데 모든걸 박차고 길 위로 떠나는 이미지가 상기된다). 이 유랑길은 1) 생존을 위한, 2) 도피를 위한, 그리고 3) 애도를 위한 유랑이다. 먼저 1) 생존이란, 삶의 터전을 잃은 이가 때때로 자신에게 떨어지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수렵/채집하는 과정이다. 초반에 비치는 아마존 물류 시스템의 부감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저 18세기의 낭만적인 방랑객이 아니라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방을 떠날 수 없는 취약계층 노동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2) 도피는, 상실로부터의 도피이다. 펀은 늘 새로운 시도나 친구들의 초대를 거절하는 습성이 있다. 펀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모든 옛 기억들을 자신의 밴에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다닌다. 그리고 데이브가 이를 훼손했을 때 노여워하고 심지어 다시 접착제로 붙이기도 한다.
이런 회피형 인물이, 의도치 않게 다른 노매드들과 스치고 대자연의 존재를 마주하며 하나둘씩 상처를 씻어내려가게 된다. 그녀는 한시적인 일을 하면서 유독 오물을 치우거나 얼룩을 닦는 일을 많이 한다. 샤워를 하는 뒷모습에서 검은 물이 씻겨내리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즉, 펀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고 정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업을 완수해가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를 노년의 성장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사는,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떠났다가 깨닫고 돌아오는 서사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떠남을 위한 떠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첫번째에는 도망치고 잊기 위해, 두번째에는 기억하고 되찾기 위한 떠남이다. 예컨대 펀에게는 몇번 정착할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주변에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망이 있다. 데이브와 언니 부부의 존재가 그러한데, 이들은 펀이 도피와 애도의 순례를 끝마쳤을 때 노매드의 삶을 버리고 정착하게 될 것인지를 다시한번 자문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로드무비의 여정이 반지처럼 한 번의 원을 그렸을 때, 그녀를 추동하는 힘은 생존을 위한 갈구도, 과거로부터의 도피도, 상실한 자의 애도도 아닌 태생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심, 강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며, 망자의 시선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스웽키가 마침내 알래스카에 도착하여 보내온 영상에서 제비들은 알을 깨고 나온 껍질을 물가에 떨구고 어디론가 한없이 떠돈다. 겉으로 보기에 목적이 없는 어지러운 비행일 지라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이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비상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처럼 스스로의 방랑에서 각자 그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 노매드들이 거쳐야 할 통과 의례이자 숙명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자연의 풍광과 목격한 자의 내면의 풍경을 2.39:1의 웅장한 시네마스코프 안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과연 테렌스 멀릭 스쿨이라고 자처할만하였다. 또 한편으로 감독은 노매드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균형을 잡기 위하여, 평범한 가정의 일상 안에서도 생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려 한다. 펀이 데이브의 집에 초대받아서 데이브 손자를 어색하게 안고 있다가 잠든 아기의 손을 쥐어보는 장면은, 거대한 나무와 자라나는 여린 잎을 보듯이 자연을 바라볼 때와 같은 순일한 감정을 자아낸다.
마치며
이 글의 서두는 홈리스가 되는 취약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길 위를 달리고 대자연의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시선은 점차 미국 사회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 대자연 그 자체, 자연 앞의 나의 미약한 존재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갔다. (<노매드랜드>도 이러한 순차를 따르고 있다) 우리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때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위험해보이는 절벽임에도 어떠한 보호막도 쳐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내 간판에는 <접근하지 마시오, 바다사자 어미가 갓 낳은 새끼들을 떠날 수 있음>이라고 적혀있었다. 인간에게 추락할 수 있다, 위험하다고 경고하기는 커녕, 너의 위험은 내 알 바 아니고 생태 환경을 위해 접근하지 말라는 말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라고 생각되었다. 노매드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이를 닮아있다. 야생에 맨몸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앞으로 닥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할지를 스스로 가늠하고 판단하면서 더듬거리며 길을 나아간다. 스페어타이어도 없이 서부를 횡단하는 펀에게 선배 스웽키가 조언해주듯이, 이들은 사회적 보호막에 의지하는 대신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외침과 손길을 의지한다.
우리의 자동차 여행은 사실 험난했다. 하루 50불짜리 에어비앤비 숙소는 형편없었고 위험한 다운타운 동네의 안 좋은 집을 예약하여 숙소를 옮긴 적도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자동차로 미 서부를 횡단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절대 못하겠단 생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늘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그만큼 정주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제대로 잘 정착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기도 했던 것 같다. 영화 전반부에 노매드들이 무모하고 고집스럽단 인상마저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 판단을 진정으로 거둘 수 있었다. 제비들이 알을 깨고 날아다니는 데에는 어떤 말과 해석도 필요 없듯이,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풍화하는 삶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그동안 나름 여러 대륙의 대자연들을 찾아다니면서 눈물이 흐를 만큼 위엄있는 그 풍경들이 여행자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강하게 뇌리에 박혀 때때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 내 삶에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노매드랜드>도 그런 영화가 될 것만 같다.
2018년 겨울, 몬테레이 베이의 석양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pp. 32-45
이미지 출처
https://www.vogue.com/article/oscar-predictions-2021https://tonebenderspodcast.com/159-nomadland-with-sergio-diaz-and-zach-seivers/
https://edition.cnn.com/style/article/nomadland-film-making-of-spc-intl/index.html
https://i.pinimg.com/originals/1c/77/90/1c779035984fbca2c3080c4e93fb8490.jpg
https://www.imdb.com/title/tt9770150/mediaindex/?ref_=tt_mv_sm2021년 4월 26일 감상 / 2021년 4월 2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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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으로 가득한 비현실적인 세상
-비전문가의 개인적인 감상 및 해석
-영화 <무드 인디고> 스포일러 포함 / 기억에 의지해 쓰느라 실제 영화와 다른 부분이 존재할 가능성 있음.치즈 (CHEEZE) - 무드 인디고 (Mood Indigo)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인만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무드 인디고는 색감과 독특한 연출로 감정을 전달한다.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색감으로 가득하던 나날이 흑백으로 변해버린다거나. 뭐 그런. 내 기준에서 이 영화의 연출은 상당히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무드 인디고의 세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존재한다. 스케이트를 타다 간단한 이벤트에서 우승하기 위해 몸이 풍선인형처럼 길어져도, 말하는 새가 이벤트를 담당해도, 음악을 틀어놓으니 방이 둥글게 변해도, 어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다리가 고무마냥 길어져 마음대로 움직여도, 다리 달린 자명종이 사방을 기어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비현실이 곧 그들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우리의 자명종이 움직이지 않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팔과 다리가 마구잡이로 길어지지 않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서다.
무드 인디고는 낭만을 이야기한다. 인연의 시작과 슬픈 끝까지 그토록 낭만적이고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오히려 끝맛이 씁쓸하다.
폐에 핀 수련. 수련을 죽이기 위해 필요한 꽃들. 몸에 대고 있는 것만으로 시들어버리는. 수련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 콜랭이 불량품을 만들어낸 일자리까지. 영화의 후반부에는 온갖 비현실적인 것들이 가득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나는 콜랭의 옆에 서 있었다. 어떤 영화는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보는 이를 내쫓는다. 개인적으로 무드 인디고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스스로 콜랭의 곁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영화였다. 콜랭과 클로에, 시크 그리고 나. 나는 인물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나의 내면을 살펴본다. 어떤 영화는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클로에와의 첫만남에서 콜랭은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공감성 수치를 느끼다 못해 영화를 중간중간 멈추면서 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 이끌렸고, 다음날 데이트를 했다.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낭만적인 데이트를. 공사 현장에서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둘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현실과 가장 동떨어져있으면서 인물들의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들이 구름 모양의 무언가를 탄다는 걸 알았기에,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가장 먼저 반가웠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두 번째.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일까 고민하는 게 마지막. 나는 영화의 끝까지 무드 인디고의 독특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상미에 시선이 빼앗겨 홀린 것처럼 영화를 보다가도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도 많다.
실제로 초중반부는 꽤 지루하다. 영화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면서 봤고, 또 이야기가 이렇게 됐는데 이 정도가 남았다고? 라는 생각도 종종 했다. 그러나 색을 잃은 후반부는 나름 몰입하면서 봤다. 내가 콜랭이 된 것처럼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생각을 않더라.
시크와 알리즈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얹자면 보는 내내 시크는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우상을 좇느라 현실을 뒤로 하고, 그 현실에 속한 알리즈는 상처 받고. 그럼에도 둘은 사랑을 했다. 시크의 우선순위가 우상이었을 뿐. 알리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뭔지 돈이 생기면 있는 족족 그 우상한테 부어버리는데 어떻게 계속 만났지?
시크가 죽는 장면... 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돌려봤다. 총을 맞은 시크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꽃과 비슷한 무언가가 되는 연출이 좋았다. 알리즈는 자신을 위해 파르트르를 죽이고, 시크는 파르트르에 의해 죽는다. 딱 봤을 때는 죽은 줄 알았던 파르트르가 튀어나와 의문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자아의 실존성'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알리즈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시크의 죽음 이후 알리즈는 어떻게 살았을까. 감옥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시크의 뒤를 따라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알리즈는 무엇을 하고 살까.
영화를 다 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문득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으로 책에 밑줄을 그은 문장이었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문장. 무드 인디고와 결이 비슷한, 사랑에 대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정의. 솔직히 이 책과 맞지 않아 읽다 관뒀는데, 다시금 문장을 곱씹으니 책을 끝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나면 처음부터 도전해봐야겠다.
생각이 나는 대로 막 쓰다보니 가독성도 떨어지고 내용도 별로인 리뷰가 되어버렸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리뷰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다음에 볼 영화를 찾아야겠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싶은데 보다가 울 거 같아서 고민 중.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베크만 中-
에디터 : 고삼_한국코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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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꼭 사랑하겠어'라는 집착이 꾼 악몽
우리는 신혼부부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 수진과 현수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 연애 초반의 풋풋함을 유지하고 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두 사람. 현수는 배우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현수를 위해 수진은 임산부의 몸을 이끌고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못내 미안한 현수. 하지만 이런 미안함도 신혼부부라면 함께 이겨낼 수 있다. 사실 현수와 수진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 바로 두 사람 사이의 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만 할 것 같은 두 사람.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일상이 만족스럽다.
어느 날. 현수가 자다 일어나서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나서 뭐라 중얼거리는 현수. “누군가 들어왔어”란 말을 한다. 난데없는 잠꼬대에 아내인 수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문 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밖으로 나가보는 수진. 침실 근처에 있는 드릴을 무기 삼아 누가 있는지 물어본다. 사실 별거 없었다. 다시 잠에 드는 수진. 수진과 현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이 이야기를 나눈다. 글쎄. 어제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별 일 아니네. 수진이 퇴근하고 난 다음 이뤄졌던 대화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시 잘 준비를 앞두고 있다. 갑자기 얼굴을 벅벅 긁는 현수. 현수나 수진이나 여기까지는 별 일 아닌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현수의 얼굴에 피가 흥건한 채로 큰 상처가 생긴다. 경악하는 수진. 두 사람의 잠에 끔찍한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묘한 기시감
영화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향수가 있다. 첫 번째는 구로사와 기요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기요시는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던 예술가다. 일본 영화 역사상 가장 큰 발자국을 찍은 <큐어>, 2006년에 발표한 <절규>가 대표작이다. <잠>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은 갈래가 나뉘는데, 이는 기요시의 필모그래피와 유사하다. 구체적으로 비슷한 영화는 <큐어>다. 두 영화(<큐어>, <잠>)의 주인공 서사는 공통점이 있다. 내적으로 미쳐가는 인물을 각기 설득력 있게 표현한 것이다. 또 기요시는 시각적으로도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괴함을 묘사했다. <큐어>의 엔딩신이 나 <회로>에서 웅덩이와 관련한 장면들이 그렇다. 이는 <잠>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영화에서 카메라가 침대 밑을 비추는 신이 있다. 이 장면은 <큐어>에서 주인공이 아내를 살해하고 난 다음을 연상케 한다.
다음은 두 오컬트 영화 <유전>과 <곡성>이다. <유전>을 단지 가족영화로만 정의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가족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는 요소가 영화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잠> 역시 가족이기 때문에 알거나 알지 못했던 것들이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또 <곡성> 같은 경우는 극 중 서스펜스를 만드는 것을 어느 정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돼서 이 부분을 깊게 풀어쓸 수는 없지만 <곡성>을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공통점을 쉽게 찾으실 것이다. 이렇게 병치시킨 이야기 때문에 단점도 느껴진다. <유전>과 <잠>의 캐릭터가 조금 비슷한데, 정유미, 이선균 두 배우의 호연으로 끝까지 몰입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 세 영화들이 생각난다고 해서 <잠>이 남 따라 하기만 한 영화는 아니다. <잠>은 기존 호러영화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유재선 감독의 영상언어로 깔끔하게 재구성한 영화다. <큐어> <유전> <곡성>과 분명한 차이점이 되는 지점이 있다. 주인공 수진과 관련된 부분, 현수의 직업, 딜레마를 왜 다뤘는가에 대한 부분 등 기존의 영화들과 구분되려고 했던 수가 돋보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구분되는 차이점은 영화가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 장면들은 공간이 열리면 열리는 대로 닫히면 닫히는 대로 그 특이점을 보여준다. 수진의 동선과 관련된 부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벌이는 행동이라 관객으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것들은 <유전>, <곡성>, <큐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출 방식이었다.
이건 몰랐지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예상을 벗어난다는 점이다. 정유미 배우가 맡은 수진 캐릭터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영화를 이끈다. 여주인공이 플롯의 핵심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하지만 수진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이에 대한 근거를 쌓는 과정은 영화가 다른 호러/미스터리물에 비해 가지는 분명한 차이점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수진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관객들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끔 사건을 배치한다. 예를 들어 수진의 어머니 캐릭터, 중반부에 등장하는 핵심 조연 둘, 현수의 리액션이 그렇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진의 내면묘사다. 100분 언저리의 짧은 러닝타임에 굵직한 사건이 많아 지나치기 쉬우나 초반부 이 인물이 갖고 있는 설정은 사실상 이야기의 모든 지점을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이 사소한 요소들을 후반부에 방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정유미 배우의 호연이 돋보인다.
현수 캐릭터 역시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현수의 직업은 배우지만 담당 배우 이선균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큰 역할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무명 배우라는 직업적 특성은 영화의 배경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이 설정이 영화에서 다른 두 가지의 핵심 소재를 은유하는 것으로 영화가 묘사하고 있으면서 영화가 다루고 있는 딜레마를 표현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인물의 설정을 인간의 도리와 부부가 지켜야 할 선으로 표현한 점은 영화가 갖고 있는 창의성이다.
두 가지의 갈림길
영화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 관객들끼리 다양한 해석을 토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류 여론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 예상할 수는 있지만 반대측면에서 이야기를 바라봐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두 설정 각자가 갖고 있는 디테일이 살아있어 n회차를 해도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두 딜레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다 함께’라는 부분이다. 수진과 현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묘사도 둘의 연대를 두고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전개하는지에서 온다. 가족이 다 함께 모이거나/해체되어 있는 것이 영화의 갈등구조인데 이 부분을 염두하고 본다면 이 영화가 어떤 부분을 염두하고 짠 이야기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맑은 눈
이 영화에서 이선균, 정유미 두 배우는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다. 정유미 배우의 수진 캐릭터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원동력이다. 헤어스타일에 따른 각기 다른 감정변화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 역 이병헌 배우가 생각나는 퍼포먼스였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3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글쓴이도 3부를 보면서(물론 1,2부도 정유미 배우의 연기가 감탄스럽다) 이 배우가 이런 연기도 잘할 것 같았어 감탄했다. 글쓴이 같은 사람들은 아마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나 <우리 선희> <다른 나라에서> 같은 작품으로 기억하지 드라마에서의 활약상은 잘 모른다.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다른 얼굴이 흥미롭다. 이병헌 배우와 함께 온갖 '~주연상'의 유력 후보다. 파트너인 이선균 배우는 내내 깔아주는 듯한 퍼포먼스를 하다가 강력한 임팩트 한 방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이 가진 위압감과 장면 연출은 박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꼽자면
영화의 단점을 굳이 뽑자면 ‘이야기를 다 보고 나서’로 함축할 수 있다. 강한 템포로 뛰어다니는 영화이기 때문에 몇 장면은 생략한 것 같다. 수진의 감정선이 더 들어가면 영화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수의 내적 갈등이 좀 더 들어갔다면 엔딩 해석이 더 폭넓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보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의 딜레마만을 다루기 위해 캐릭터가 약간 희생된 것이다. 하지만 관람에 큰 영향을 주는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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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육십에 성폭행을 당하면 벌어지는 일, 영화 <갈매기>
갈매기 (Gull, 2020)
제작 : 한국, 드라마 │ 감독 : 김미조
출연 : 정애화(오복), 장유(남편), 고서희(큰딸), 김가빈(막내딸)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75분"아 이 언니가 나이 먹고 왜 이래?"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건 뭘까. 딸 셋을 낳고 시장 좌판에서 몇십 년을 억척스럽게 일해온 ‘오복’은 이른바 나이 먹은 여성이다. 그녀는 배운 건 없지마는 생선을 팔아 딸내미들을 모두 대학공부까지 시켰다는 긍지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오복의 또 다른 이름은 평범한 어머니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32년간 궂은일 마다 않고 살아온 울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딸의 혼사를 앞둔 어느 날, 오복은 시장 사람들과 술을 기울이다 수모를 당했다. 밤이었고, 술에 취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 뒤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오복은 육십이 넘어 그런 일을 당한 것에 무어라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한다. 그저 ‘사과를 받아야 할 일’쯤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억울함보다, 딸의 혼사에 방해가 될까, 남편에게 괜한 신경 거리가 될까, 시장 사람들한테 수치가 될까를 먼저 고민한다. 오복은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으며 가족들 몰래 산부인과를 찾고, 가족들 몰래 피 묻은 이불을 빨고, 범인의 영업장에 가서 수족관을 깨버리는 것 정도로 이 일을 덮으려 생각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큰 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그래 놓고도 괜한 말을 했다며 곧바로 후회하면서도, 큰딸이 경찰에 신고할 것을 제안하자 오복은 처음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고는 신고일뿐. 목격자도 증인도 없는 외로운 상황 속에서 오복은 자신이 성폭행당했음을 증명할 방도가 없다.
우리 엄마 세대의 여성에게도 미투는 유효한가 ?
60대 여성이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세상에 털어놓는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비교적 괜찮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내 동의 없이 이루어진 부적절한 스킨십을 언제든 ‘추행’으로 고발할 수 있는, 내가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한다면 나 같은 여성들의 지지가 언제든 뒷받침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났음에 때때로 감사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건 2021년을 살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의 엄마들은? 육십이 넘어 일찍이 폐경을 한 우리 엄마들 세대의 여성들에게도 과연 그럴까? 영화 속 오복을 보니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한 번도 엄마 나이대 여성의 성폭행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엄마는 내게 조심하라고 하는 사람이었지, 당신이 조심해야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언제나 거대하고 굳건해서 엄마가 누군가의 성범죄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배제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들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오복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에게 상처가 될까 봐, 나이 먹고 부끄럽게 왜 이러냐고 할까 봐, 그렇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숨겨온 엄마들이 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성범죄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젊은 여성에게는 물론, 생식기능이 전혀 없는 소아부터 노년의 여성에게까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전방위적 범죄다. 문제는 우리 사회 성범죄 의식의 범주가 ‘젊은 여성’에 포커싱 되어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은 언제든 ‘미투’로 지지받고 상대를 수장시켜버릴 수 있는 반면, 나이 든 여성들은 왜 이런 사실을 함구하는 데에 익숙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 엄마도 언제든 당할 수 있는 일
“우리말로 한강에 배 한번 지나갔다고 생각해” 라던 오복의 시장 동료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남의 눈치만 보다가 나는 언제 챙기냐”던 오복의 말도 그래서 서러웠다. 바야흐로 힘 있고 당당한 여성들이 세상을 이끄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상이 우리 밀레니얼 세대 여성의 전유물만은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소리 내면 안된다던 시대적 굴레에 갇혀, 또 엄마와 아내라는 프레임에 갇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중년 이상의 여성들에게도 용기와 힘이 전해져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 바람과는 달리, 오복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결국 증명해낼 수 없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보리색 모닝을 끌고 엄마의 억울함을 벗기려고 곁에 머문 건 오복의 두 딸들이었다. 이 영화는 여성을 위한, 그 속에서도 우리 엄마 세대 여성의 용기에 대한 헌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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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파된 가부장 신권정치
9★/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167분의 상영 시간 동안 내내 긴장감으로 들끓는 이 놀랍도록 강렬한 영화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가부장 신권정치를 내파한다. 테헤란 거리에서는 시위가 한창이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체포되었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공식 사인은 ‘뇌졸중’.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한 가족이 있다. 수사 판사로 승진한 아버지 이만은 법원에서 총기를 지급받는다. 시위자를 처벌하는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에게 공격받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의 아내 나즈미는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다. 나즈미는 남편의 승진으로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다르다. 나즈미는 시위 소식을 TV 뉴스로 접하며 혀를 차지만, 두 딸은 SNS에서 검열되지 않은 시위 현장을 접하고는 분노한다. 이 ‘평범한’ 가족은 가부장 신권정치의 관계성을 대변한다. 이만은 체제의 권력자를, 나즈미는 보수적 신민을,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아직 힘이 약하지만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시민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가족이 나라와 체제의 은유이기에, 히잡 시위는 국가의 위기인 동시에 가정의 위기다. 부모와 두 딸이 갈등하던 와중 레즈반의 친구가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진압하던 경찰이 발사한 산탄총에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나즈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레즈반 친구의 소식을 남편 몰래 알아보려 하지만 무산되고, 결국 레즈반이 아버지에게 직접 친구의 행방을 묻는 지경에 이른다. 이만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레즈반이 항의한다. “그럼 누가 아는데?” 통치자의 무능과 무책임, 폭력성에 대한 피통치자의 불만과 저항 의식이 점차 고조된다.
그러나 ‘모른다’는 이만의 말은 진실이다. 그 역시 시위를 빠르게 진압하고 주동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공포 정치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만은 그에게 주어진 일, 즉 시위대에게 속전속결로 사형을 판결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해고될 것이다. 처음에는 도덕적 가책을 느꼈지만 이젠 그럴 새도 없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이만은 점차 불안에 휩싸인다.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 돼.” 이만은 권위와 힘을 가졌지만 가부장 신권정치 체제의 부속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 국민 앞에서 이를 인정할 수도 없다. 그는 늘 ‘신성한 권위’를 수호하는 ‘근엄한’ 인물이어야만 한다. ‘법’으로 ‘죄인’을 단죄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에게 호신용으로 지급된 총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한편으로 총은 반항자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이만에게 쥐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총은 체제가 모든 시민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가부장 신권정치의 편집증적 불안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이 불복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만이 총이 없어진 걸 확인하고 크게 당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을 분실하면 징역형을 받는 건 표면적인 이유다. 총을 잃어버린 이만은 누군가를 단죄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고, 들켜서는 안 되는 불안을 들켜버린 것이다.
총을 가져간 건 가족 중 하나다. 이만은 총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가져갔다는 사람이 없다. 이만의 불안과 의심은 점차 커져만 간다. 결국 이만의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불안에 휩싸인 그는 가족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대피한다. 이만은 시골집에서 무너진 권위와 가족애를 회복하고 싶다. 그러나 두 딸은 이만에게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이만은 아내와 딸을 감금하고 총의 소재를 밝힐 때까지 풀어주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만/국가의 ‘보수적 신민’이었던 나즈미가 돌아서는 건 이때다. 그녀는 지금껏 주로 이만의 편에서 두 딸을 엄하게 훈육, 훈계하는 데 집중했지만, 두 딸이 극한으로 몰리자 마침내 비난의 화살을 남편/국가에게 돌린다. 이제 두 딸과 이만은 모두 더 물러설 곳이 없다.
이 모든 일에 막내딸 사나가 있다는 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이란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정치적 혼란에 놓인 한국의 관객에게도 시의성을 획득한다. 사나는 대체로 언니의 편에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항했지만 언니보다는 소심했다. 어른들은 사나를 애 취급했다. 자기 친구가 다친 레즈반에 비해 사나의 감정이 덜 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나는 가장 긴박한 순간에 가장 큰 용기를 낸다. 아버지가 수사 판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편집증에 빠져 불안에 떠는 사람이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환기해 ‘회복’되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아닌 이만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나아가 대담한 용기로 아버지가 감금한 어머니와 언니를 빼내 도피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족이 도달한 어느 빈집 터. 미로를 닮은 이곳에서 네 가족은 추격전을 벌이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족들을 좇던 이만은 끝내 추락하여 흙에 파묻힌다. 가장 어린 여성의 기지와 용기가 아버지를, 가부장 신권정치를 땅에 묻어버린다. 이란에서도, 한국에서도 변화의 최전선에는 ‘어린’ 여성이 있다. 202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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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미드나잇 아시아: 먹다 춤추다 꿈꾸다> 공식 예고편
밤이 되면 아시아의 도시들은 낮고 ㅏ다른 재미를 드러낸다. 음식과 술, 음악,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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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 : 끝내주는 모험> 파이널 예고편
끝내주게 웅장하고 귀여워진 소원성취 액션 블록버스터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파이널 예고편 대!공!개! 이봐, 집사들! 장화신은 고양이와 함께 할 준비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