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1-11 15:58:40
11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모두가 기다려왔던 24년 만에 귀환! <글래디에이터 Ⅱ> 개봉

이번 주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돌아옵니다.
우선, 리들리 스콧의 명작 <글래디에이터>가 24년 만에 새로운 속편으로 찾아왔습니다.
<노멀 피플>, <애프터썬>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폴 메스칼이 1편의 주인공이었던 '막시무스'의 아들 '루시우스'를 연기해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는 "결과물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두말할 것 없이 굉장한 경험이었죠. 긴장감을 끝까지 고조시키는 영화예요"라고 말하며 <글래디에이터 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함께 주연을 맡은 페드로 파스칼은 "굉장히 육체적인 트레이닝이었어요. 박살이 났죠. 검술 훈련을 받아본 적 있는데 이런 건 아니었어요"라는 인터뷰로 액션의 강도를 짐작게 했습니다.
또 다른 반가운 얼굴, 배우 박신양이 11년 만에 딸을 잃은 흉부외과의사 '승도' 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돌아왔습니다. 매 작품 놀라운 연기력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그가 처음 출연하는 오컬트 장르에서는 어떤 연기를 펼칠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금마장 남우조연상, 신인감독상, 홍콩금상장영화제 신인감독상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쓴 <연소일기>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던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글래디에이터 Ⅱ
GladiatorⅡ

개요: 액션 | 미국 | 148분
감독: 리들리 스콧
주연: 폴 메스칼, 페드로 파스칼, 덴젤 워싱턴, 코니 닐슨
개봉: 2024.11.13.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줄거리
로마의 영웅이자 최고의 검투사였던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20여 년이 흐른 후. 쌍둥이 황제 ‘게타’와 ‘카라칼라’의 폭압 아래 시민을 위한 자유로운 나라 ‘로마의 꿈’은 잊힌 지 오래다. 한편 ‘아카시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대패한 후 모든 것을 잃고 노예로 전락한 ‘루시우스’는 강한 권력욕을 지닌 ‘마크리누스’의 눈에 띄어 검투사로 발탁된다. 로마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 타고난 투사의 기질로 콜로세움에 입성하게 된 ‘루시우스’는 결투를 거듭하며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알게 되고 마침내 로마의 운명을 건 결전을 준비하게 되는데...! “나는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역사로 기억될 새로운 반란이 시작된다!
사흘
Devils Stay

개요: 공포 | 대한민국 | 95분
감독: 현문섭
주연: 박신양, 이민기, 이레
개봉: 2024.11.14.
배급: ㈜쇼박스

줄거리
흉부외과의사 ‘승도’의 딸 ‘소미’가 구마의식 도중 목숨을 잃고 장례식장에서 ‘승도’는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한편, ‘소미’가 죽기 전 구마의식을 진행했던 신부 ‘해신’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것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는데... 남은 시간은 장례를 치르는 단 3일! 죽은 소녀의 심장에서 깨어나는 그것을 막아야만 한다!
연소일기
Time Still Turns the Pages

개요: 드라마 | 홍콩 | 95분
감독: 탁역겸
주연: 노진업, 황재락, 하백염
개봉: 2024.11.13.
배급: ㈜누리픽쳐스

줄거리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한 고등학교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주인 모를 유서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교감은 이 일을 묻으려고 하고, 정 선생은 우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일기야, 안녕?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어"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어른이 될 거란 믿음으로 써 내려간 열 살 소년의 일기. 정 선생은 일기를 읽으며 묻어뒀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고,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데…
되살아나는 목소리
Voices of the Silenced

개요: 다큐멘터리 | 대한민국, 일본 | 148분
감독: 박수남, 박마의
주연: 박수남, 박마의
개봉: 2024.11.13.
배급: (주)시네마달, 푸른영상

줄거리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 그의 집에 쌓인 작품화되지 못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 기억의 망망대해에서 수집해낸 역사가 강렬하게 들려온다. 잊혀진 피해자들의 표정을 되살려내고 식민과 전쟁으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간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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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상징을 잘 보여주다
대학원 수업에서 분석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처음 볼 때는 주인공들의 감정에 이입하며 너무 불쌍하면서도 대견하고 측은하기도 했는데, 점점 반복해서 볼수록 다양한 상징 요소들이 많이 드러나서 분석하는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시놉시스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당신의 가을을 희망의 빛깔로 물들이는 영화!
볼라와 알렉산더 두 남매는 역에 나가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아버지가 오지 않자 아버지가 계시다는 독일에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그러나 무임승차였던 그들은 곧 쫓겨나고 삼촌의 공장으로 간다. 거기서 삼촌과 경찰과의 대화 중 독일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었음을 듣는다. 문득 눈이 온다. 환호하며 나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곧 정물로 변해 버린다. 죽어가는 말이 끌려오고 옆에서는 파티의 손님들이 시끄럽다. 무언가 부조화스럽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사람들은 모두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알렉산더는 울음을 터뜨린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상징과 은유가 매력적이었던 작품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왜 예술 영화라고 평가를 받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잘됐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업 영화는 상징이나 은유에 초점이 맞춰져서 영화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물론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스토리 전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안개 속의 풍경은 중간중간 시퀀스에 방해가 되더라도 상징이 되는 장면을 삽입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했다.
노란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거나 갑자기 사람들이 멈춰서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던지 갑자기 바다 속에서 손모양의 조각상이 떠오른다던지,,, 처음에 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장면이 너무 튀어서 저건 뭘까? 하고 인상이 찌푸려졌었는데 계속에서 보다보니 각 캐릭터의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오히려 튀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처를 잃은 주인공들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은 갑자기 볼라와 알렉산더가 아빠를 찾으러 독일을 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너무나도 많이 길을 잃는다. 볼라는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알렉산더는 경제의 관념이 없는 어린나이에 자본주의를 경험한다. 그리고 사랑을 잃기도 하며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길을 계속해서 잃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한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등장했던 장면이 바로 바다 속에서 손 모양의 조각상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바다 속에 잠겨 있던 조각상이 검지 손가락이 잘린 채 헬리콥터에 의해 운반되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방향을 가리키는 검지 손가락이 없는 조각상이 현재 정처를 잃은 주인공들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했다. 그리고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 압력에 의해 이동되어질 것을 나타내는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본인의 길을 가다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볼라와 알렉산더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독일로 가는 여정 속에서 수많은 고초를 경험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독일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내려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성장을 거쳤다고 판단했다.
혹자는 독일이라고 말하는 공간이 총에 맞아 죽어서 간 공간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총소리는 하나의 위험 장치라고 생각이 든다. 그 총을 피해 결국 볼라와 알렉산더는 어떠한 곳에 내렸고, 영화 초반 오레스테스가 보여준 필름에서 보여준 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향해 달려간다. 오레스테스는 나무를 보며 안개가 걷히면 나무를 볼 수 있다면서 현재의 암울한 상황이 거치면 아름다운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그 나무를 볼라와 알렉산더 앞에 실제로 위치시키면서 그간의 시련을 보상받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은 상징이 무엇일까, 이 은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는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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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져선 안될 원칙!
2018년 공개된 <어느 가족>은 '칸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고, 이내 "아카데미 국제 영화상"에 가장 강력한 후보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쉽게도, 해당 부문의 수상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가져갔다)
이번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의 수상으로 전 국민이 기쁨을 나눴던 것처럼 일본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일본에 그런 가족은 없다!", 노부부의 죽음을 자녀들이 신고하지 않고서 연금을 받아 생활한 뉴스로 제작된 <어느 가족>이 받아든 일본 자국의 반응이다.이번 <브로커>가 건드는 "베이비 박스", '아이를 살리는 상자'로 좋게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1958년을 시작으로 지난 2015년까지 국내에서 국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약 17만명으로 특히, 2020년 "한국"은 "콜롬비아 - 우크라이나"에 이은 3위에 해당된다.
2004년 국회 보건복지위 고경화 의원에 따르면, '국내 입양은 219만 8천원 - 해외 입양은 961만 6천원'으로 입양기관이 입양 희망 부모로부터 요구하는 알선료의 차이는 5배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해외 입양으로 아이를 받는다면, 아이를 낳은 친모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다.1. 선의의 이중성
이야기가 시작되는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의 3자 대면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극 중. 베이비 박스에 들어온 아기 "우성"을 다른 이에게 파려는 "상현"과 "동수"는 자신들을 "사랑의 큐피드"로, 이를 경찰에 신고하는 생모 "소영"은 "브로커"로 바라본다.
신화에서 황금화살(사랑)과 납화살(거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끊어주는 "큐피드"와 사람들 간의 계약을 정리하는 "브로커"는 뭐가 다를까? - 이처럼 아이들을 파려는 매매범(상현- 동수)과 생모(소영)의 조합은 나를 비롯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나?혈연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가족을 구성했던 감독의 전작 <어느 가족>처럼 영화 <브로커>는 그 궤를 따라간다.
극 중. "소영"이 "우성"을 버려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도 있겠지만, "비"를 시작해 "세차장"까지 "물"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장면들에 비결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내리는 비는 아이를 버리는 엄마의 눈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세차장에서 웃음꽃이 피어나도록 만든다.2. 그 마음, 알겠으나...
이런 이유에는 살인 현장에 있는 와인잔과 창문 바깥에 있는 바다로 판단할 수 있다.
분명히, 끔찍한 현장이지만 각자 담긴 것에 따라 마실 수 있고 볼 수 있듯이 "액체"란 담긴 용기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진다.
이처럼 승합차에서 탄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가족의 모양을 갖춘다면,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이 탄 검은색 승용차는 이들의 어두운 이면(본성)을 말해 불안감을 키운다.영화 <라라랜드>에서 어두운 장면들이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면, 손을 잡고 키스를 하는 등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내 밝아지면, 잡았던 손들은 부끄럽다고 떨어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브로커> 역시, 어두운 화면에서 "우성"에 대한 생각과 "태어나줘서 고맙다"라는 "소영"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브로커>가 실망스러웠다.3. 금기를 깨버린 breaker
상담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것은 절대로 개입해선 안 되는 것이다.
법의 소관에 따라서, 사기죄로 처분을 받을 수도 있기에 환자 본인이 치료 방법을 선택하게 우리는 그 방법을 소개하고 안내해야 한다.
극 중. "소영"이 "엄마 혼자서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라며 "동수"와 갈등을 빚고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내비쳐 관객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며, "동수"의 용서를 받아낸다.
그런 점에서 <브로커>가 관객들에게 말하고 보여주는 "사정"은 위험하다.그렇다면, 이와 비슷하다던 <어느 가족>은 어땠을까?
친모에게 돌아온 "유리"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매달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있어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오빠 "쇼타"를 비롯해 그날 자신을 구해준 이들을 찾으려는 것으로 보였지만, 감독은 이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첫 장면에선 난간에 매달려있지 않았다면, 마지막 장면에선 자신이 나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이다. - 참고로, 상담이 잘될 수 있는 원동력에는 환자 본인이 개선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야만 한다.· tmi. 1 -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에겐 짝수 징크스가 존재한다. (짝수번째 영화는 어김없이 좋다! - 2번째 <원더풀 라이프1999>, 4번째 <아무도 모른다2004>, 6번째 <걸어도 걸어도2008>, 8번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10번째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이 있다)
· tmi. 1.1 -다만, 9번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시작으로 11번째 <태풍이 지나가고2016>, 13번째 <어느 가족2018>으로 이를 해결한 것으로 보였는데... (참고로, 이번 <브로커>는 15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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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영국]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찰리는 시종일관 뜀박질을 멈추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처럼 여유롭게 걷는 것 대신 숨가쁘게 달려나가는 것을 택한다. 아이는 왜 달릴 수 밖에 없었을까. 열다섯 성장기 소년인만큼 운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이사 오기 전, 학교에서 했다던 풋볼 대신 돈이 들지 않는 운동인 달리기를 택한 것일 수도 있다. 두 이유 모두 납득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찰리에게 뜀박질은 무엇보다도 숨을 쉬기 위한 방법처럼 보인다.
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찰리의 아버지인 레이가 데려온 여자와 아침을 함께 할 때 방문과 벽 사이에 위치한 그는 영락없이 갇힌 모습이다. 델 아저씨와 함께 처음 경주마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 일을 했을 때도 그는 트레일러와 벽 사이에 갇혀 있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찰리를 무언가에 가두는 프레이밍을 유지한다. 그의 숨통이 막히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를 문과 벽(혹은 벽처럼 보이는 무언가) 사이에 위치시켜 가두어버린다. 하지만 달릴 때만큼은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년은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 숨을 내뱉기 위해서 뜀박질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달려야 숨을 쉴 수 있는 찰리가 본디 자유롭게 달려야하는 린온피트에게 온 마음을 내다 준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피트에게 자신을 투영시킨 찰리는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피트와 함께 길 위에 선 찰리는 달리는 대신 피트와 함께 걷는 것을 택한다. 찰리와 피트가 함께 길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주로 아주 먼 익스트림 롱샷으로 비춰진다. 그들을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카메라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찰리와 피트가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찰리는 피트를 위해 그와 함께 달아났다고 생각하지만. 찰리와 함께여도 피트는 전과 같이 목줄에 매여있다. 피트는 정말 숨을 쉴 수 있었을까? 여전히 목줄에 매여 달릴 수 없는 피트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찰리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피트 역시 자유롭기 위해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을 택한다.
피트와 헤어진 후 한동안 뜀박질을 멈추었던 찰리는 마지 고모와 만나자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뜀박질을 다시 시작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딘가에 갇히지 않는다. 찰리가 드디어 마지 고모와 만난 그 날 밤, 찰리는 잠을 이 루지 못하고 그에게 찾아간다. 문을 두드린 아이는 문과 벽에 갇히지 않은 채 아주 손쉽게 방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아이를 문과 벽 사이에 가두어 프레이밍하는 대신 그저 아이가 사라진 방문을 비추는 것을 택한다.
뜀박질을 다시 시작한 아이는 처음으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본다. 그 전까지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 볼 수 없었다. 뒤를 살펴 볼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겪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찰리는 악몽과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 고모의 말처럼 악몽이 전부 사라지진 않겠지만 분명 나아질 것이다. 찰리가 뒤돌아볼 수 있게 된 것 처럼 말이다. 오프닝과 달리, 찰리의 뜀박질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대신 아이의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담는 것을 택한 카메라 역시 그렇게 될 것임을 약속하는 것만 같다.
아이는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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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갖추지 못한 것들
6★/10★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퓨리오사는 핵전쟁이 야기한 문명 붕괴 후 황무지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타델의 임모탄에게서 탈출한다. 임모탄에게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는 것만이 중요한 그의 아내들도 함께한다. 그 과정에서 떠돌이 맥스를 만나 녹색의 어머니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녀 기억 속 녹색의 땅은 사라지고 없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풍요롭던 퓨리오사의 고향은 다른 모든 곳처럼 황폐해졌다. 또 다른 녹색 땅을 찾아 떠나는 퓨리오사와 임모탄의 아내들. 그때 맥스가 말한다. 당신들이 가야 할 곳은 시타델에서 멀리 떨어진 환상 속의 녹색 땅이 아니라 바로 시타델의 심장부라고. 퓨리오사는 운전대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초남성 계급사회 시타델의 수장 임모탄을 죽이고 시타델을 차지한다. 여기까지가 체제 밖의 혁명과 변혁이 아닌, 모순의 핵심으로부터 시작하는 혁명과 변혁의 이야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야기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이야기의 시곗바늘을 되돌린다.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녀가 어쩌다 녹색의 땅에서 납치되어 임모탄 아래서 총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그녀에게 녹색의 땅의 의미는 무엇인지, 왜 그녀의 한쪽 팔은 살‧뼈‧피가 아니라 기계 장치인지, 무엇이 그녀를 혁명과 변혁의 길로 이끌었는지, 왜 혼자 시타델을 탈출하지 않고 임모탄의 아내들과 함께했는지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어린 시절, 황무지의 약탈자 디멘투스 일당에게 납치된 퓨리오사는 자신을 구하러 온 어머니가 녹색의 땅 위치를 추궁당하다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퓨리오사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가 깊게 새겨진다. 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건 생존해 복수하는 일이다. 뜻밖에도 기회는 여성, 노인 등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악랄하게 착취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임모탄에게서 온다. 임모탄의 또 다른 요새 가스타운을 점령한 디멘투스는 임모탄과의 협상장에 퓨리오사를 데리고 가는데, 그녀를 발견한 임모탄이 협상 성사의 대가로 퓨리오사를 자신의 아내로 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퓨리오사는 초남성 계급사회의 동맹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인 재화, 방사능 오염으로 희귀해진 유전적으로 건강한 아이를 낳아줄 가치 있는 상품으로 교환‧증여되며 두 남성의 일시적 동맹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퓨리오사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라는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임모탄의 아내들을 가둬둔 방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머리를 깎고 남성 노동자 행세를 하며 임모탄 수하에서 복수를 위해 자신이 자원화할 수 있는 것들을 빠르게 습득한다.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이 맞물려 차근히 역량을 쌓아나가던 중 현직 총사령관 잭의 눈에 들어 그와 가까워지고, 그의 도움으로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디멘투스에 대한 복수는 헛헛한 공허함만을 준다. 퓨리오사는 자기 마음을 다른 동력으로 채워야 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임모탄의 아내들과 함께 시타델을 탈출한다. 즉 〈퓨리오사〉는 〈매드맥스〉에서 보여준 퓨리오사의 선택과 개성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 운명이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또 하나의 매혹적인 이야기다.
〈퓨리오사〉가 웬만한 범작은 너끈히 뛰어넘는 수작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굳이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쉬이 즐길 수 있고, 이번에도 노장이자 거장인 조지 밀러의 펄펄 끓는 열정과 그가 선사하는 영화적 황홀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절대적 기준은 〈매드맥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기준을 놓고 본다면, 〈퓨리오사〉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먼저 서사다. 전작의 핵심은 변혁과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우정‧사랑‧연대였다. 한편 이번 영화의 핵심은 성장이다. 퓨리오사가 개인적 복수심을 넘어 더 큰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런데 퓨리오사가 육체적‧정신적으로 강해지는 과정의 연결고리가 그리 튼튼하지가 않다. 단계적으로 차근히 진행된다기보다는 점프하듯 보여준다는 느낌이랄까? 퓨리오사가 강해지는 과정을 체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라는 의문이 솟는 장면이 반복된다.
‘미투 운동(혁명)과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로의 집단적 정체화(성장)’라는 사회 조류가 각각의 흐름을 대변하는 두 영화의 개봉 시기와 기묘하게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이번 영화에 전작처럼 피를 끓게 만드는 요소가 부재한 이유다. 혁명 서사는 현실에 불만인 사람 모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성장 서사는 특정 인물(혹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에 제한된 소구력을 갖는다. 이야기의 전제와 완성도 두 측면 모두에서 〈퓨리오사〉는 전작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전작보다 현저히 적다는 점도 아쉽다.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을 디멘투스는 절대 빌런 임모탄을 마주한 순간 포스를 잃고 한없이 가벼워진다. 전작에서 극의 핵심 동력이었던 임모탄의 아내들과 그녀 중 한 명을 사랑하는 워보이, 주름진 여전사 같은 눈길을 끄는 캐릭터도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퓨리오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베푸는 임모탄의 총사령관 잭의 역할이다. 도대체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퓨리오사를 도울까? 단지 퓨리오사의 전투 능력이 출중해서? 혹은 (달랑 대사 한 줄로 전달되듯) 그의 부모님이 혼란한 세상에서도 정의를 추구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영화는 전작에서 맥스가 담당한 여성 혁명의 남성 조력자 역할을 잭에게 부여하려 하지만 잭 캐릭터의 입체성과 주변 인물과의 관계성 모두에서 이 시도는 실패한다(이는 뒷모습으로만 짧게 등장하는 맥스로 추정되는 남자의 존재감이 커다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만의 압도적인 사막 드라이빙 액션신도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명장면은 영화의 다론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에만 가능하다.
이쯤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절대적 근거가 전작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전작의 아우라와 감동을 기대한다면 어쩌면 실망은 ‘당연한’ 일이다. 〈퓨리오사〉가 웬만한 영화보다는 훨씬 재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 작품을 고대할 정도로 말이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조지 밀러가 시타델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세 번째 영화로 건강히 돌아오길 염원한다.
*조지 밀러 감독은 페미니스트 철학자에게 영화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자문을 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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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미국/200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멜 깁슨이 배우라기보다 감독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극장개봉 전에 이미 유명해진 영화다. 반유대주의 영화라고 하여, 헐리웃을 점령한 유대인들로부터 미국의 엘리트 계층, 자본가 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은근한 혹은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그 유명세는 더 한층 상승되었다. gory 하다, 따라서 horror 장르로 분류해야 한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수위가 높은 잔인한 고문장면 때문에 약한 심장을 가졌던 관객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제 멜 깁슨은 유대인들의 왕국인 헐리웃의 영화에 캐스팅되기는 글렀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아마 그 예측은 옳을 것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동고동락했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당시 유대 종교 엘리트 계층인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후 예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기까지, 즉 구약의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다룬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기독교 구약과 신약성경의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할 수가 없다. 그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죄지은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외아들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 인간들이 당해야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도록 '상관'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가 당할 모든 저주를 혼자 감당한 뒤 인간으로 죽었다. 그리고 역시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의 사역을 완전히 성취했다.
멜 깁슨이 가톨릭(구교) 신자여서 그랬겠지만 영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경외심이 배어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를 초월한 복음의 정수를 전달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는 고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그 언어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종파로 나뉘기 전,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섞이기 전의 예수 수난사건과 그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멜 깁슨은 영화를 전 세계에 배급하면서 더빙이 가능한 원고가 아닌 자막용 원고만을 만들었다. 영화를 더빙하지 못하도록 M/E (Music and Effect) 트랙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이쯤되면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정관사 the와 함께 대문자로 시작하는 Passion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뜻함을 알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신(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그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함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들과 교통하며 신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아름다운 국가를 세워 그 주변의 이방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모두 그 아름다운 국가를 따라 살기를, 즉 모든 인류가 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의 계획안에서,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약속을 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내리라. 그가 너희들을 구원하리라... 그리고 내 뜻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태어난 성육신(인간의 몸으로 온 신)이다. 예수는 구약성경 곳곳에 예언으로 주어진 말씀대로 메시아로서 감당해야할 모든 것을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성취한다. 그는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했다. 예언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은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순종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사야서 53장 5절)는 메시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가 인류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영화에 그려진 인간들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잘 아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고통으로 지켜본다. 그 곁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을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늘 함께 있다. 그들은 아무 힘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지켜보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며 전도하였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물질이 탐이나 돈에 스승을 판다. 반역자다. 그리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흥분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는 비겁했다.
당시 구약을 믿고 암송하며 가르쳤던 유대교 종교 엘리트이며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그의 기적의 능력을 질투했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예수를 두려워했다. 아니, 예수 때문에 그들의 인기와 권위가 실추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거짓증거를 날조하여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였다. 야비한 살인자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의 군인 빌라도.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나면 로마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말 것을 두려워한 비겁한 출세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무력함, 비겁함, 야비함, 두려움 등의 어두움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에게서 늘 찾아지는 것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지 않는 한.
인간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 즉 세상을 사랑하고, 속이는 자 사탄은 세상의 재미로 인간을 미혹하며 죄를 짓게 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나 신은 위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나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인간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리고 온갖 사탄의 책략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죽음, 즉 사탄을 이김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이며 예수의 보혈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죄의 종, 즉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이 영화의 요지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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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 2021
미국, 그리스, 드라마, 122분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러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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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5주 최신 개봉영화(007 노 타임 투 다이, 수색자, 스쿨 아웃 포에버, 서유기: 재세요왕, 용과 주근깨 공주)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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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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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주 최신 개봉영화(듄, 라스트 듀얼, 동백, 휴가, 한창나이 선녀님)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3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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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크맨> 메인 예고편
그가 가진 것은 트럭 한 대와 총 한 자루!
한 소년을 지키기 위한 목숨 건 추격전이 시작된다!최고의 사격수였다가 은퇴한 군인 ‘짐’(리암 니슨)은
애리조나 국경 지역을 지키며 조용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쫓기는 모자를 구해주지만
무자비한 놈들의 공격에 소년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다.
소년을 시카고에 있는 친척에게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짐’은 길을 나서고
마약 카르텔의 표적이 되어 숨막히는 추격전을 벌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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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피릿> 메인 예고편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코라’ 고모와 할아버지 손에 자란 호기심 많은 소녀 ‘럭키’는
방학동안 ‘코라’ 고모와 함께 아빠가 홀로 살고 있는 미라데로에 머물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의 서먹한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던 ‘럭키’는
우연히 에너지 넘치는 야생마 ‘스피릿’을 만나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되고,
새로 사귄 친구 ‘아비게일’, ‘프루’와 함께하며 두근거림과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어느 날, ‘스피릿’과 그의 야생마 가족이 악당들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고
‘럭키’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두려움을 무릅쓴 모험에 나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