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11-13 22:22:58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같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라일리'

라일리는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이다.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인기남인 데다 운동선수로도 각광받고 있는 그의 삶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카웃해가겠다는 학교도 있으니 그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못한 그의 핸드폰 속 세계에는 남자들의 몸자랑으로 가득한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말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없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깊이 탐구할 생각도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서 아드레날린이 가득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연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암이라는 친구와 안면을 트게 되면서 그의 온전했던 삶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1. 잘 짜여진 운동선수의 삶 속 어울리지 않는 그의 정체성
흔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남자의 행동이 다분히 여성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기준보다 여성스럽다고 해서 전부 다 게이도 아니거니와 사회가 규정한 기준에 맞다고 해서 게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라일리는 학교에서도 인기 많은, 소위 주류 문화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남성미가 뿜뿜하는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더 의심하지 못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게이는 여성스러운 남자들의 모습으로 많이 어필되어 왔는데, 그런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겉보기에 그는 착하고 인기많은 이성애자 남자 같아 보였다. 항상 아버지에 의해 운동 위주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 때문에 그는 커가면서 자신의 취향을 잘 알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알아서 잘 연기한 착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적 이득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가족들에게도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이 포지션을 그는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환경의 노예라서, 좋게 말하면 잘 짜여진 생활이고, 나쁘게 말하면 통제적인 환경에서 자신을 향한 기대를 놓아버리기엔 그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똑바로 마주하기엔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두렵게 했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그의 정체성이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져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이 참 보면 볼수롤 안타까웠다.
2. 리암이라는 존재
라일리의 온전한 삶에 돌을 던진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리암으로, 학교에서 게이라는 사실이 꽤나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직시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라일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한다. 라일리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에 자신의 정체성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혼란을 느꼈지만 리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니 긍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제적인 삶을 살던 라일리에게 그의 존재는 꽤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몸은 리암에게 끌리고 있으면서도 이성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라일리의 위선적인 태도는 리암을 질리게 했지만 라일리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는 그에게 한 번 정도는 해야할 일종의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뚫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3. 남의 시선보다는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메시지
이 영화는 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라일리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와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언제나 부모님을 위해서 자신을 숨기고 친구들과의 평가에 신경쓰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홀했던 사람이었다. 보다보니,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LGBTQ영화이지만 '자신을 가장 신경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뭐, LGBTQ라고 하면 대단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성소수자들도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의 주류 문화에 치여 자신을 돌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내 정체성에 대해 깨달았지만 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슬픔을 나같은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만큼은 라일리의 여자친구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소수자들이 라일리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고 있을 것이고, 온전히 나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해주고 싶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귀기울여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이기적이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럴 땐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을 때 추천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가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 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 같고, 그들에게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너무 재수없어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 라일리 같은 친구가 있다면 라일리의 여자친구와 같은 포지션에 있고 싶다. 그렇게 그들의 정체성을 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이번 '서울프라이드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내가 봐왔던 영화들의 범주가 더 넓어진 것 같아 좋았다. 물론 그전에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LGBTQ를 봐오긴 했지만 더 다양한 성수수자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어 내 상식 선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이번 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나같은 이성애자들은 어떤 태도를 정립하는 것이 소수자들에게 존중을 표시하는 길일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너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 같고, 너무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과해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 발치 떨어져서 그들의 삶에 민폐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결론이었다. 적당한 수준의, 선을 넘지 않는 무관심을 표시하는 것, 그것이 곧 답이 아닐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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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평의 여정이 수직적인 세상에 가져올 변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소영(이지은)'은 부산의 한 교회 베이비 박스 앞에 아기 '우성'을 내려놓고 떠난다. 때마침 베이비 박스 당직을 서던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소영이 남긴 쪽지에 아기의 이름이나 연락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아기를 몰래 데려간다. 그러나 다음 날 빚에 시달리며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이 불법 입양 브로커로서 길을 나서려는 찰나에, 예상치 못하게 엄마 소영이 아기를 되찾기 위해 돌아온다. 아기가 사라진 것을 안 소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결국 자신들이 브로커임을 고백한 상현과 동수. 이에 소영은 우성이의 양부모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기로 한다. 한편 이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관찰한 형사 '수진(배두나)'은 후배 ‘이형사(이주영)'와 함께 두 브로커를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베이비 박스는 부모의 사정상 키울 수 없는 아기를 두고 가는 장소로, 한국에서는 2009년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후 현재 3곳의 종교시설에서 운영되고 있다. 사실 베이비 박스는 선한 목적과는 별개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아이를 유기하게 만든다고 말해왔고, 긍정하는 쪽에서는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미혼 부모처럼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현실과 이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의 태도가 중첩된 결과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양측 모두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촬영하고 연출하여 제75회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브로커>가 베이비 박스 앞에서 시작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이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가족이나 소외된 이들의 삶처럼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문제들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 올리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작품은 서늘한 현실감을 유지한 채 해당 문제들을 파고들면서도, 섣불리 비판할 대상을 정하는 대신 그 문제를 겪는 당사자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경우도 많다. <브로커>도 마찬가지다. 영아 납치와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브로커의 여정을 포착한 이 로드무비는 악행과 선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수직적인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순
그 아이러니는 울진의 한 수산물 시장에서 볼 수 있다. 우성이를 사려는 한 부부를 만난 소영, 동수, 상현. 부부는 우성이의 눈매나 눈썹을 살펴보면서 못생겼다며 외모를 품평하고, 친부의 직업이나 과거사를 따진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본래 약속보다 낮은 가격에 할부로 우성이를 구매하겠다는 제안하는 부부. 이에 당황한 상현과 동수는 어떻게든 거래를 이어가기 위해 흥정을 해보지만, 아기를 비하한 부부에게 분노한 소영 덕분에 흥정은 이내 끝이 난다. 이 장면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수산물 시장에서 생선 대신 아기가 거래 대상인 것이나, 아기를 파는 사람이 아기의 가치를 존중해 달라고 구매자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것이나, 브로커에게 더 나은 구매자를 찾아달라는 소영의 모습은 무엇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아기를 팔려고 하는 순간 이미 도덕과 윤리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 한데, 그 안에서 또 도덕을 따지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이처럼 악행을 저지르는데 정작 그 안에서는 선의가 느껴지는 모순은 러닝타임 동안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때 작중 모순은 서로 다른 세상의 논리가 충돌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직적인 세상 안에서 수평적인 관계가 부딪힌 결과다. 우선 <브로커>의 세상은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 계급 우화"인 <기생충>처럼 수직적으로 묘사되며, 영화는 꾸준히 오르고 내린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에 소영은 아기를 버리기 위해 골목길을 올라가고, 수진과 이 형사는 그런 소영을 내려다본다.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친구를 만나 꿈을 이룰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헛헛한 인생 이야기를 한 동수는 보육원으로 향하는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동선과 시점에 더해 인간관계도 수직적이다. 조폭들에게 5,000만 원을 빚진 상현은 일원 중 하나인 태호 앞에서 쩔쩔매고, 후반부에는 그와 담판을 짓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영화의 배경마저도 수직적인데, 부산답게 걸어 올라가기조차 벅찬 계단들이 잊을 법하면 등장한다.
거듭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선, 시점, 관계는 세 인물이 사회적 시스템에서 가장 아래에 있고, 밀려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상자인 베이비 박스, 네모난 봉고차와 보육원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베이비 박스가 상현, 소영, 동수 개개인의 삶이라면, 자동차는 가족을 상징하며, 보육원은 가족보다 조금 더 큰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육원 밖에는 사회라는 가장 큰 상자가 있다. 이때 가장 큰 상자로부터 작은 상자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어려움은 결국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가게 만든다. 상현은 조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불법 브로커로 활동한다. 보육원을 떠났지만 이렇다 할 희망을 찾지 못한 동수는 상현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밀매한다. 가족을 이룰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소영은 아기를 베이비 박스 앞에 내려놓는다. 이렇게 영화는 수직적인 세계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사연을 베이비 박스 안에 담는다.
수평의 동행이 만든 가족
그러나 <브로커>는 아픈 사연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지상과 지하, 계단 위와 아래 사이에 냄새조차 넘어가서는 안 될 명확한 선이 있었던 <기생충>과는 달리 <브로커>는 비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상승과 하강의 세계가 극한으로 향하기 전에 동행이라는 이름의 수평축을 새로이 끼워넣기 때문이다. 소영이 동수에게 자신이 꾸는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수평적 동행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꿈속에서 비를 맞고 깨끗해지는 꿈을 꾼다는 소영은 그 꿈이 그저 꿈일 뿐이라고 자조한다. 그러자 동수는 두 명이 쓸 수 있을 만큼 큰 우산이 있으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소영이 비를 맞으며 아이를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고물이 되어버린 봉고차 안에서 만난 이들과의 관계가 그 비를 피할 우산이 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봉고차를 세차하던 중 다섯 일행이 비눗물을 뒤집어쓰고, 상현과 소영이 각자 쓰던 가명 대신 본명을 털어놓으며 깨끗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수직적인 세상과 대조되는 수평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수평선이 보이는 동해안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봉고차의 여정과 인천으로 향하는 KTX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동행은 수직적인 세계에서 지친 이들, 특히 가족이 부재한 이들이 봉고차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치유하는 과정이라서 특별하다. 성매매 여성인 소영은 상현과 동수를 만나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소속된 느낌이 무엇인지를 새로이 깨닫는다.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소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지 않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혼 후 딸과 별거 중인 상현은 몰래 보육원을 빠져나와 봉고차에 탄 해진에게서 딸의 모습을 본다. 이는 오르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 찬가로 이어지는 봉고차
이때 영화는 유대감과 치유의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순수함과 도덕성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한다. 사실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예기치 못하게 만났고 또 좋은 일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아기를 유기하는 소영의 행동이나 그 아기를 교회에서 맡아 기르는 대신 팔아버린 상현과 동수의 행위는 누가 뭐라 해도 범죄였다. 그러나 영화는 악행 기저에 깔린 선의들의 만남에 주목한다.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두고 떠났지만 되돌아온 소영의 모성애, 아기를 잘 키워줄 적임자를 찾아주려 했다는 상현의 배려심, 버려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동수의 동병상련은 한 데 모여 치유의 드라마를 써 내려간다. 물론 자신들의 행적을 둘러대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진심인 선의가 만나 새 가족을 만들고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이 감동은 엄마이자 딸로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기로 결심한 소영이 모두에게 전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로 함축되어 있다. 달리 말해 이 대사에는 악행을 저지른 모든 이들의 내면에도 미처 꺼내지 못했을 선함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함 덕분에 모두의 생명이 특별하다는 인간 찬가가 담겨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모두가 최선을 선택하며, 자신들이 마주해야 했던 인생과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책임을 아이 엄마에게 묻는 대신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인간의 선의에 대한 희망은 <브로커>만의 따스함이 감도는 영상 덕분에 더욱 특별하다. 인위적인 설정 대신 햇빛과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있는 그대로 포착해 찍어낸 덕분이다. 상현과 소영의 진심이 튀어나오는 KTX 안에서의 대화 장면이 밝음과 어둠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처럼 수직의 세상에 피어난 선함이라는 주제는 송강호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이 돌아간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소시민적으로 수직적인 세상을 사는 인물이면서도 수평적 여정의 끝에서 인간의 선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인 상현은 영화에 담긴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흔들리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렇다고 해서 <브로커>가 마냥 따뜻하고, 희망적이고, 밝은 태도만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답게 상현, 동수, 소영을 무조건 미화하거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즉 수진의 시점에서 따라가도록 권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수진의 세계를 보여준다. 수진이 소영을 내려다보는 구도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소외된 이들을 보는 시점으로, "버릴 거면 낳지를 말라"는 수진의 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또 아기를 실은 상현의 봉고차를 수진이 조용히 쫓는 장면에서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는 것도 관찰자이기에 관객이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그녀의 관점을 강조해준다.
그리고 수진의 관점과 태도가 뚜렷하기에 브로커 일행을 쫓는 그녀의 여정에는 더욱 깊은 드라마가 담긴다. 단순한 관찰자였던 그녀가 가족이 되어가는 이들의 동행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이면을 마주하고, 자기 내면에 찾아온 혼란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냉철한 신념과 태도는 "낳고 나서 죽이는 게, 낳기 전에 죽이는 것보다 죄가 더 가볍냐"는 소영의 반박에 꺾인다. 아이를 매매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지만, 그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편견과 제도의 공백이 그녀를 흔든다. 또 멀쩡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만 비로소 우성이가 행복할 거라는 그녀의 고정관념은 "아이를 가장 팔고 싶은 건 나였나 봐"라는 대사를 통해 고발된다.
이렇게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가 필요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람의 선의를 믿으며, 미리 단정 짓지 말자고 설득한다. 정당화될 수는 없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수직과 수평의 충돌 안에 담는다. 사회 제도에 대한 의문과 통념으로 자리 잡은 윤리적 판단에 대한 의심으로 악행과 선의의 딜레마를 장식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진과 동일한 입장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결말을 마주한 순간 긴 여운 속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다만 영화적 뚝심과는 별개로 <브로커>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크다. 다루려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나머지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여정, 곧 소영과 우성이/브로커인 상현과 동수/브로커를 추적하는 수진과 이 형사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사실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를 고려하면 이 많은 캐릭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이는 특히 최후반부에 얽히고설키는 상현, 소영, 동수, 수진의 선택에서 그들의 심경 변화가 한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보육원 시퀀스처럼 대사가 명확히 들리지 않는 기술적인 문제도 감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물론 이러한 단점은 이지은의 연기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과 같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의 사연을 하나로 묶는 접점도 소영이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것도 소영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녀의 퍼포먼스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덕분에 언제나 수심 가득하던 얼굴에 슬며시 웃는 미소를 지나 당찬 의지가 담기고, 진한 스모키 화장이 지워지는 그녀의 변화만 따라가도 <브로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다만 완성도 때문에 영화의 온기와 따스함이 지닌 설득력이 약화되는 게 결국 문제다. 인신매매와 살인처럼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심각성을 지닌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낙관적이고 편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 듯한 경향성이 살짝 엿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상적이고 작위적인 화법 때문에 영화의 결말에 끝내 설득되지 않는다면, <브로커>는 그저 순진하게 풀어낸 인간 찬가로 기억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영화의 메시지와 주제가 갖는 중요성과 가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역량과 명망을 생각하면 이는 퍽 안타까운 결과다.
A(Acceptable, 무난함)
인간의 선함을 믿어보자는, 따뜻함과 나이브함 사이에 있는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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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2011)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이야기 자체의 매력보다도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렬한 영화다. 영화 <블랙스완>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자아의 분열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압도적이다. 믿을 수없는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16mm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디지털화하여 영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상의 노이즈들과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는 웅장한 ‘백조의 호수’, 흑조와 백조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한데 섞인 이 영화는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영상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완전히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강렬한 방식이 눈에 띄는 영화로, ‘완벽’이라는 허상의 것을 좇는 개인의 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앞서가는 것이거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서 완벽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이 영화의 지엽적인 메세지에 불과한 완벽의 추구와 그 허무에 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두를 뜯어 고치지는 않겠지만, 다소간 확장시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보이지 않는 고통들을 드러내는 <블랙스완>.
영화 <블랙스완>이 다루는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은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 시사회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내적 고통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발레 무용수들의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토슈즈를 벗으면 드러나는 성하지 못한 그들의 발과 한번의 무대를 위한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닳고 닳은 깡마른 그들의 몸은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들이다. 한편, 예술가들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쥐어짜내는 고통 역시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니나’를 통해서 두 개의 고통을 포개어 놓는 것으로 그 고통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렇듯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모티브를 받아 구상되었고, 감독의 누이가 발레 무용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발레 무용수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의 상징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연치 않게 두 가지의 상징이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우연이고 필연이고를 떠나서 상징을 중첩시켜 인물의 고통을 강화한 이 영화의 각본은 굉장히 현명했고, 특별하다.
1-2. 분신(Dvoinik)과 분열된 자아.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 Dvoinik>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분신>속 자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의 덧없는 파멸만을 그려내어 탐구가 다소 얕은 반면, 영화 <블랙스완> 속 분열된 자아는 완벽주의에 이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심리적 고통과 함께 파멸과 성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의 역할을 맡은 ‘백조’는 그동안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자아 모두가 니나의 자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발레무용수가 자신이 가진 것 이상(以上)의 연기를 소화해내기 위해 이제껏 가져왔던 자아를 버리고, 백조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아를 꺼내어 자신의 이상(以上)에 이르고자 한다. 물론 그 이상(以上)의 상태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적인 상태는 아니기에, 이 발레 무용수는 완벽한 예술을 위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흑조)과 이전까지 유지해온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백조)은 두 가지의 자아로 나타나며, 두 자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백조’는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다.
영화 <블랙스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자아의 대결을 다루며 이야기의 장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또 한편으로 ‘니나’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적 긴장감을 더하여 ‘시각매체로서’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완벽이라는 이름의 허상
지금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들은 정해진 운명이 없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현존재를 해석하자면, 지금 나의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수히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 중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시간에 얽매어있는 현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가능함이라는 결과 자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지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다른 모든 선택지가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얽매어있는 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을 뜻하는 단어 Perfect {per(모두) + fectio(하다)} 는 시간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들은 도저히 이를수 없는 허상의 단어이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간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을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거짓이자 자기 기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나친 완벽의 추구는 허상의 것을 끊임없이 좇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듯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겪는 고통과 자멸, 그리고 전락을 암시하는 결말은 허상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덧없음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엿볼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일이란 결과적으로 한없이 허무할 뿐인가?
3. 완벽이라는 환상의 추구와 그 당위성없는 행위의 당위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가 짊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해소되지 않을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가 완전해지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것, 그 것이 결과론적으로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수메르의 바빌로니아에서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동시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왕이자 “깊은 곳을 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정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해도, 그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은 허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의 추구. 절대로 구해지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이 일은 어떤 당위성을 얻게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삶의 당위성을 그 목적지에서 찾는 그 전제가 애초에 들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자. 삶의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다. 완벽한 끝. 삶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목적은 그저 ‘완벽한 끝’이므로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삶의 의미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전제를 깔아놓고, 결말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든 행위는 당연 무의미하고, 당위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완벽의 추구 또는 이상의 추구,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이룰수 없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 당위성 없는 행위의 당위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므로, 나는 다만 삶의 의미란 의미를 찾아가는 삶속에 있다고 말할 수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단순히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는 것이다.
4. 추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랙스완>의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깊은 곳”에 닿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니나가 완벽한 흑조가 되어 마주하는 것들은 혼란과 고통, 전락, 그리고 결과에 대한 구체적이지 못한 자기만족―나는 완벽했어, 그 모호한 한마디―에 그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결과적으로 완벽에 집착할 뿐인 광적인 예술가의 군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보자면, 그녀는 흑조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적으로 완벽한 무용수였고, 이미 ‘백조’의 순수함과 순종 결백 등에 집착하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다 큰 그녀가 어머님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순수한 모습들은 그녀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흑조의 날개가 자라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자신의 피부에서 흑조의 깃털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자아와 의지를 억누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이미 백조에 대한 심한 집착과 몰입을 보여준 예술가 니나가 ‘흑조’ 역할을 맡으며 흑조에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에 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니나가 예술가로서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조의 추락과 백조의 죽음을 의미하는 마지막 엔딩씬은 광기어린 무용수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파멸을 야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전까지 니나를 가두었던 백조의 이미지가 죽어버리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니나가 ‘성장’한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이고, 옳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미숙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결핍된 모습들마저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결핍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니나가 백조를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해하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니나 자신을 가두는 백조의 틀을 깨버리는 일인 동시에 니나의 미덕이었던 백조의 모습들마저 버리는 것으로, 흑조로 성장하기보다는 흑조로 ‘변이’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매번 이렇게 변이만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살해하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내야만 할 것이고, 이 편집증적 고통은 성장통의 고통과는 다르다. 그 고통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가 성장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블랙스완>의 니나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광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일 뿐이다. 다만 <블랙스완>이 다루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으니, 이 영화의 이야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완성도는 아주 높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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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나는 외톨이별처럼
아직 내가 서울시민이 아니었던 10년쯤 전,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벌이는 설전을 보았다. 한 후보가 세계 최고의 무엇을 도내에 들이겠다고 했고, 상대 후보는 "왜 최고여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최초, 최고 속도, 이렇게 최(最)가 붙는 것들의 존재가 정말 우리에게 필수조건인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정치인들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법은 아니었다.
그러게, 왜 최고여야 하지? 우리가 왜 꼭 첨단의 첨단을 달려야만 하지? 지켜보던 나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가 도지사 후보로 나갔다는 것조차 가물가물해진 지금도 그 말만큼은 마음 한쪽에 남아있다가 가끔 떠오른다. 아마 지금 내가 서울시민으로, 서울에 살면서 느끼는 것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는데, 내게 서울은 시간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로 보인다. 앉아있으면 온 도시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첨단의 첨단을 달려야만 한다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좇아야 한다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어쩌면 내가 음악이든 영화든 앞에 "인디"가 붙는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서울에서 받는 그 메시지에 대한 저항인지 모른다.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은 자본의 영향력이 적다는 뜻이니 뒤집어 말하면 창작자가 더 극명하게 묻어난다는 소리니까. 창작은 어떻게든 창작하는 이의 시간을 헤집으니까. 혹시 첨단의 첨단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그건 창작의 도구일 뿐 결코 전부가 되지 못한다. 창작자의 시간은 선형으로 흐르지 않아, 현재 아닌 시간의 것들이 어떻게든 묻어나게 돼있다.
도시의 욕망과 나의 욕망 사이에서 제각각의 길을 찾는 것이 창작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영화나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며 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같이 떠오르던, 나는 그런 식으로 글을 써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 그리고 이 영화, <다시 만난 날들>은 어쩐지 그런 상념들을 다시 끌어내 준다.
연주하고 곡도 쓰고, 아직 본인의 앨범을 내지는 못했지만 차곡차곡 음악을 쌓고 있는 주인공 태일(홍이삭)은 동료에게 대형 기획사 대표를 소개받는다. 대표는 "뻔한 사랑 노래" 같은 게 좋다고, 트렌디하고 쉬운 게 좋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면서, 태일의 곡을 들어보자고 한다.
실력이 인정받고 있지만 자기 음악을 하기엔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애매한 상태. 그 불안한 자리에 있던 태일은 문득 바닷가 마을로 향한다. 오래전 친구들과 밴드를 하던 기억이 스틸 사진처럼 남아있는 곳. 여전히 그곳에 살면서 음악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원(장하은)을 만나, 찬찬히 시간을 보낸다. 잘 풀리지 않던 곡의 후반부를 지원과 함께 쓰고, 중학생 밴드 아이들의 노래를 보아주고. 그렇게 마음의 코드까지 하나하나 짚는 모습을 살뜰히 보여준다.
그들이 만나는 곳- 내부는 따뜻한 노란 조명으로, 바깥은 푸른 보랏빛 조명으로 덮인 음악학원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다. 동시에 이제 막 음악에 첫 발을 떼는 중학생 밴드 '더 디스트로이어'가 새싹처럼 자라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필름 사진 속 지금 보면 촌스럽기도 하고 투박하지만 즐거웠던 시절의 그들과, 이제 막 밴드라는 작업의 재미와 신뢰를 알아가는 중학생 손에 들린 필름 카메라. 어쩌면 과거는 미래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다 카포Da Capo,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흘러가는 시간이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어른들의 성장이 나란히 포개지며 영화는 흘러간다.
음악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글을 쓴다고 컴퓨터나 노트 앞에 혼자 앉아있는 것밖에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중간중간 부러운 대목도 있었다. 악기라는 도구가 있다는 것도, 합을 맞추며 함께한다는 것도, 코드를 짚으며 음악을 언어처럼 사용해 소통하는 것도. 그러나 그렇게 탄탄해 보이고 함께 있는 듯 보여도 결국 사람 속은 다 알 수 없는 거여서. 과거의 어느 날 태일은 갑작스럽게 그 시간과 공간을 떠났고, 그래서 그 시간을 그리워하는 한편 그래도 더 크고 '메이저'한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태일과 닮은 듯 보이는 인물이 덕호다. 기태, 배돌, 북순이라는 다소 직관적인 작명으로 표현될 만큼 파트 색깔이 뚜렷한 아이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누나와 자신의 쓸모와 락에 대한 마음 같은 것에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중인 밴드 보컬. 덕호와 친구들을 보면서 태일은 아이들을 격려하고 또 음악을 다듬어준다. 그 '중2병' 감성을 비웃지도 않고, 과장되게 칭찬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창작이란 어떤 걸까. 영화 속 태일은 척추에서 나오듯이, 일기 쓰듯이 그냥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그 안에서 덕호는 성장하고, 태일도 자신을 돌아본다. 무언가 만들어내는 삶을 고민해본 이라면 누구든 그 안에서 쉬어갈 수 있는 쉼표 같은 대사들이 녹아 있다.
태일이 그리는 잔잔한 온기가 영화의 한 축이라면, 반대편에는 지원이 가진 단단함이 있다. 욕망하지 않는 소도시의 작은 음악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설정부터도 그렇지만, 태일에 비해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게 자리를 지켜온 사람의 느낌이 있다. 기죽지 않고 "야" 한 마디만으로 친구를 지켜줄 수 있는 북순도 어떻게 보면 지원과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원 못지않게 북순이 좋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매력은 캐릭터에만 있지 않다. 싱어 송라이터 홍이삭의 노래와 기타, 지원 역을 맡은 기타리스트 장하은의 연주는 물론이고 중학생 아이들의 장면도 매력적이다. 밴드 아이들은 연주 실력이 훌륭하면서도 귀엽고, 각 캐릭터가 파트와 잘 어우러지면서 톡톡 튄다. 특히 지원과 기태의 '배틀' 장면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배틀 못지않게 흥미로운데, 기태 역을 맡은 양태환은 평창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공연했다고 한다. 연기를 해온 사람보다는 음악을 해온 사람 위주의 캐스팅이다. 위험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빛을 발한다.
주연배우인 동시에 음악감독을 맡은 홍이삭이 만든 곡들도 어느 하나 지나치고 싶은 것이 없다. 뮤지컬 <러브 트릴로지> OST로 알고 있던 곡들이 나와 의아했는데, 엔딩 크레디트 보니 심찬양 감독과 홍이삭이 함께했던 뮤지컬 <러브 트릴로지>가 원안이라고 한다. 자이로부터 시작해서 이나우, 박찬영 등 중간중간 <슈퍼밴드>에 홍이삭과 함께 나왔던 반가운 얼굴들도 눈에 띈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김하진, 양지완이라는 이름도 봤는데... 어느 장면인지 놓친 것 같다.)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답게, 영화 구석구석을 좋은 음악으로 빼곡하게 채웠다는 느낌이다. 후반부 각본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아쉬움을 음악이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는데, 계절에 잘 어울리는 뜻밖의 위로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기타를 잡고 밴드를 한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직선적인 열정이 있었던 과거와 유려해졌지만 열정이 사그라든 것만 같은 현재를 톺아보는 사람은 많으니까. 우리의 과거는 미래를 닮아있으니, 나의 오늘을 '메이저'하게 쌓는 것 못지않게 과거와 미래를 일정하게 연결하는 단단한 마음도 중요하다. 그게 뜻밖의 위로가 됐다. 큰 무대에 서지 않아도, 어제와 내일을 잘 이어주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
하필 요즘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나의 20대에 쓸 수 있을 최선을 쓴 것 같은데, 좋은 평도 꽤 받은 것 같은데, 될 듯 말 듯 어떤 선을 못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 이제 더 글을 쓰려면 새로운 무언가를 살아내야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어쩌면 이 영화 속 태일과 비슷한 시기인 것 같다. 그런 때에 훌쩍 떠날 소도시가 있다는 건,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큰 행운인지.
조바심과 불안해하는 마음은 버리기로 했다. 중학생 덕호가 습관처럼 외치는 빌보드가 아니어도, 뮤직비디오 찍고 앨범 내는 가수가 아니어도, 이들에게는 함께 부른 노래가 있었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쓰고 싶은 것들을 소중하게 써내려가기로 했다.
* * *
천만 관객 동원하는 상업영화부터 아직 개봉하지 못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까지, 빌보드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부터 이제 막 첫 녹음을 한 누군가의 작은 공연까지. 각자의 취향과 자본의 영향력으로 그린 사분면 어딘가에, 지금도 다양한 음악과 영화가 별처럼 흩뿌려지고 있다.
존 버거의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우주의 별 절반 이상이 성운에 속하지 않은 외톨이별이라 한다. 가장 많은 빛은 그들에게서 나오는 거라고. 더 다양하고 그래서 더 풍성한, 독립영화와 인디음악의 힘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나직하지만 힘 있게 빛나는 외톨이별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도 한 외톨이별로서 빛나고 있을 거라 다정하게 도닥여주는 빛. 따뜻한 마음으로 이 영화 음악을 들으며 나의 별을 밝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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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는 그냥 툭 튀어나온 작품이 아니다.
‘REMEMBER YOU ARE ONE’
소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한 대스타였던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50살이 된 날 더 이상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며 에어로빅 TV 쇼에서마저 해고당한다. 차 사고로 실려간 병원, 수상하지만 매력적인 남성 간호사로부터 권유받은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주입하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 수(마가렛 퀄리)의 몸이 탄생한다. 규칙은 단 하나, 7일 주기의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
주제와 장르
‘서브스턴스’ 포스터 속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척추를 타고 찢어진 등판에 대충 어떤 영화인지 감을 잡은 것 같겠지만,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서브스턴스’는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비판과 인간의 본질이라는 강력한 주제 의식과 더불어 강력한 컬트와 바디 호러의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위 장르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도전해 봐야 하는 영화이다.
연예계와 한물 간 스타라는 설정으로 외모지상주의에 지배된 세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 ‘사랑과 영혼’의 대스타였던 데미 무어가 세월이 흘러 60세의 나이로 주연을 맡은 것도 영화에 몰입도를 더한다. 방송국 사장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새우를 게걸스럽게 뜯어 먹으며 싱그러운 여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이 듦을 인정하지 않는 타인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후, ‘서브스턴스’ 약물로 수(마가렛 퀄리)가 태어난다. 'PUMP IT UP'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 탄탄하고 아름다운 몸을 노골적인 앵글로 담아 보여준다. 이걸 본 모두는 수(마가렛 퀄리)에게 매혹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조차도 말이다. 7일간 늙고 섹시하지 못한 자신을 자학하며 피폐해져가는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그리고 7일 뒤 등장하는 어리고 섹시한 수(마가렛 퀄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관객 역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아름다운 외모를 추구하는 타인을 비판하다가도 스스로 늙은 몸을 배척하고 젊고 아름다운 몸을 탐하는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아이러니하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관객을 극단의 극단으로 몰고 간다.
<리얼리티+>, (2015, 코랄리 파르자)
단편 영화에서부터 감독의 강력한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주인공 남자(빈센트 콜롬보)는 일 12시간만 활성화되는 프로그램 ‘리얼리티’를 몸에 심는다. 목덜미에 프로그램을 이식한 사람들끼리는 ‘리얼리티+’가 활성화되는 동안 자신이 설정한 매력적인 외형으로 보인다. 같은 칩을 심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꿈꿔온 완벽한 외모로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자는 ‘리얼리티+’를 활성화 중인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바네사 헤슬러)와 눈이 맞아 연애를 시작한다.
‘일주일이라는 완벽한 밸런스’
아름다워지기 위한 규칙은 이때부터 시작이다. 하루 12시간만 활성화되어 프로그램이 꺼지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감을 잃고 인파로부터 도망친다. 매력적인 외형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비활성화가 되는 순간, 서로에게서 도망치는 두 남녀. 데이트에 차질이 생기고, 집에서 자괴감에 빠져가던 남자는 테라스에서 옆집에 사는 여자(아우렐리아 포이리어)에게 매력을 느낀다. 주인공은 본래의 모습으로 옆집 여자와 즐거운 데이트를 시작한다.
영화의 결말, 남자가 여자(바네사 헤슬러)에게 전화를 걸자 옆집 여자(아우렐리아 포이리어)의 핸드폰이 울리고, 서로임을 알게 된다. 끌림에 외모는 중요치 않다는 것, 하지만 모두가 미를 추종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리벤지> (2017, 코랄리 파르자)
이 영화에서부터 감독의 매운맛이 점점 드러난다. 바비인형의 외모를 가진 제니퍼(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는 애인의 사냥 행사에 동행하다 아름다운 제니퍼에게 눈독을 들인 애인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사실을 알게 된 애인은 합의를 종용하다가 결국 친구들의 편에 서고 제니퍼를 죽인다. 독을 통해 부활하게 된 제니퍼는 복수를 시작한다.
관음, 방관하기만 하던 남자는 두 눈을 찔려 죽고,
욕구를 못 이기고 성폭행을 한 남자는 정확히 머리에 총을 맞아 죽고,
아름다운 제니퍼의 몸만을 탐하던 애인은 나체로 복부에 총에 맞아 죽는다.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코랄리 파르자 감독에겐 자비가 없다.
오마주
컬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장면들이 다수 존재한다. 컬트 대가들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로 스타일리스트 연출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와 수(마가렛 퀄리)가 세트장을 향하여 가는 붉고 긴 복도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을 연상시킨다.
수상한 젊은 남성 간호사가 건넨 ‘It’s changed my life.’ 명함 속 번호로 은밀하게 전화를 거는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하관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지난 17일 부고 소식이 들려온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연상시킨다.
포스터에서 가장 궁금증을 유발하던 척추를 타고 갈라진 엘리자베스의 피부,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하자 척추 사이로 수(마가렛 퀄리)가 출산된다. 이는 세대를 풍미한 ‘에일리언’을 떠올린다. 감독의 전작 <리얼리티+>에서도 등장하는 이미지이다.
온 극장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메리칸 뉴웨이브를 위시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를 연상시킨다. 이 장면을 위해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몇 톤의 붉은색 액체를 준비했다고 한다. 컬트와 호러 영화에 대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존경과 찬사를 듬뿍 느낄 수 있다.
마무리
자기혐오로 똘똘 뭉쳐져 어긋나는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를 보며 우리는 극도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하비(데니스 퀘이드) 사장 같은 속세적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편견과 불안함, 더 나은 나를 원하는 자기혐오적 사고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어리고 섹시한 여성을 노골적으로 원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와 수(마가렛 퀄리)의 충돌을 고어라는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여성 개인의 내면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본다. 편견에 가득 찬 세상을 비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편견에 집착하는 개인을 비판하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3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영화
엘리자베스, 수, 그리고 무엇일지 궁금하다면
141분이라는 러닝타임의 고어를 견딜 수 있다면 당장 체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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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 the Fourth Be With You!
디즈니는 5월 제4회 ‘May the Fourth Be With You’(<스타워즈>의 명대사 중 하나인 ‘may the force be with you’와 발음이 비슷해서 만들어진 5월 4일 스타워즈의 날)를 앞두고 있다.
5월 4일에는, 5월 매주 금요일에 개봉하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스타워즈: 배드 배치(Star Wars: Bad Batch)>의 방송이 시작된다. 이 시리즈는 <스타워즈: 클론 전쟁>의 스핀 오프 작품으로서, 클론전쟁 시즌 7에서 등장했던 클론 포스 99을 주연으로 하며, 오더 66, 클론전쟁 종전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빅 샷> 그리고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의 새로운 에피소드가 5월 14일부터 개봉할 예정이며, <마이티 덕>의 후속 시리즈는 5월 28일에 시즌 마지막을 장식할 예정이다.
또한 이번 달에는 디즈니의 차기 블록버스터인 <크루엘라>를 볼 수 있을 예정이다. <크루엘라>는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악당인 크루엘라에 관한 이야기이며, 크루엘라 역을 맡은 엠마 스톤과 함께 5월 28일 개봉할 예정이다. 이 디즈니 실사 영화는 재능은 있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던 ‘에스텔라’가 남작 부인을 만나 충격적 사건을 겪게 되면서 런던 패션계를 발칵 뒤집을 파격 아이콘 ‘크루엘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트리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디즈니+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디즈니+의 한국 상륙 날짜는 2021년으로 영화 <블랙 위도우>와 함께 출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단은 디즈니+에서 5월에 상영될 작품이다.
5월 4일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1)
5월 7일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7)
<빅 샷> (에피소드 104)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2)
<완다가 간다> (시즌 1, 2)
<리틀 야구왕 앤디(Everyone’s Hero)>
<플리카 2(Flicka 2)>
<와일드 하츠 캔 비 브로큰(Wild Hearts Can’t Be Broken)>
<판타스틱 4 – 실버 서퍼의 위협>
5월 14일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1)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3)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8)
<빅 샷> (에피소드 105)
<특수 요원 오소> (시즌 1, 2)
<특수 요원 오소: Three Healthy Steps> (시즌 1)
<엑스맨 – 최후의 전쟁>
<Life Below Zero> (시즌 15)
<Race to the Center of the Earth>
5월 21일
<Inside Pixar: Unpacked><Unpacked: About Time>
<Unpacked: Everybody Loves a Villain>
<Unpacked: The Squint Test>
<Unpacked: Inner Drive>
<Unpacked: No Small Roles>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9)
<빅 샷> (에피소드 106)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2)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4)
<빅 시티 그린즈> (시즌 2)
<Mickey Mouse Mixed-Up Adventures> (시즌 1)
<Fury Files>
<Ice Road Rescue> (시즌 5)
<러닝 와일드 위드 베어 그릴스(Running Wild with Bear Grylls)> (시즌 6)
<팅커벨(Tinker Bell and the Legend of the NeverBeast)>
<Akashinga: The Brave Ones>
5월 28일
<크루엘라> 프리미어 엑세스
<런치 패드>
<마이티 덕: 게임 체인저스> (에피소드 10)
<하이 스쿨 뮤지컬: 더 뮤지컬- 더 시리즈> (에피소드 203)
<스타워즈: 배드 배치> (에피소드 5)
<빅 샷> (에피소드 107)
<Bluey Shorts> (시즌 2)
<데칼코마니, 아빠와 나(Sydney to the Max)>, (시즌 3, 에피소드 1-8)
<Kingdom of the Polar Bears>
<위키드 튜나(Wicked Tuna)> (시즌 10, 에피소드 1-7)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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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단인가? 어떤 걸 믿겠는가!
색다른 공포다. 종교를 소재로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만나는 건 흔하지 않다. 우리가 믿는 종교란 무엇인지 밑바닥까지 파묘하고, 마주한 진실에도 기존 믿음을 견고히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선택이 이어진다. 여기에 과연 모르몬교를 믿는 두 자매가 이단인지, 그들에게 종교의 실체를 까발리는 리드가 이단인지 관객에게 되묻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강도는 세지고, 하염없이 깊어진다. 어떤 걸 믿어야 할까? 종교가 없다고 해도 이 물음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모르몬교의 신실한 신도인 두 자매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은 오늘도 전도하러 다닌다. 어떻게든 신도를 모으기 위해 애쓰는 이들은 외딴 집주인 리드(휴 그랜트)의 집에 도착한다. 자신들을 이단으로 보는 사람들과 다르게 따뜻함으로 반겨주는 리드의 안내로 집 안에 들어가는 자매들. 곧이어 믿음과 종교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은 이 질의응답은 점차 반스와 팩스턴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반스는 리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긴 걸 확인하고서는 자신들이 이 집에 갇힌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리드는 친절함을 유지하면서 들어오는 문으로 나갈 수 없다며, 다른 두 문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 문에 ‘믿음’, ‘불신’이라 적는다.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은 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한다.
<헤레틱>은 작정한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종교에 대해 묻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고, 그에 따른 답을 듣는다. 신앙을 전하기 위해 온 자매들은 오히려 리드에게 그들의 신념이 어디까지인지 시험대에 오른다. 마치 간증을 하는 자리인 것처럼, 리드는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 교리를 시작으로 물꼬를 트고, 자매를 압박한다. 주객이 전도된 자리에서 이들은 쉴 새 없는 질문을 받고 답하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이 믿음을 유지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리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신 보드게임의 대명사 ‘모노폴리’, 라디오헤드의 ‘Creep’과 관련된 표절 시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며, 종교와의 유관성을 주장한다.
안전한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장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자매들은 이 집에 갇힌 상태다. 밀실 안에서 첨예한 종교적 논의는 점점 리드에게 무게가 실리고, 자매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위험한 상황에 몰린다. 그리고 리드는 계속해서 이성적인 접근법으로 두 자매에게 종교에 숨겨진 정체를 소개한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여기서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이제 누가 이단처럼 보이냐고. 신기하게도 두 자매가 이단인데, 리드가 더 이단처럼 느껴진다. 자신만의 논리로 이 자매들에게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 자체가 무논리 궤변이다. 자신의 깨우침이 곧 진리라 생각하는 이 잘못된 신념은 자매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공포의 요소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리드의 행동이 그동안 종교가 믿음이란 단어로 세상의 약자들에게 뻗친 가혹한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말이 곧 진리요 법이라 말하는 종교인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라야 하는 형국에 놓인 사람들. 극 중 생존의 기로에 선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이다. 약한 자를 구원하는 게 아닌 오히려 이들을 구워삶아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종교의 어두운 민낯은 안경을 쓰고 중저음 목소리를 내뱉으며 인텔리전트한 모습 뒤 보이는 리드의 실제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종교의 민낯은 영화 첫 장면 큰 바위산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콘돔 이야기를 하는 자매들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경험해 보지도 않았지만, 콘돔 회사의 마케팅 문구나, 이를 사용해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이 제품을 믿는 자매들의 모습이 비친다. 영화는 마치 종교도 콘돔 회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로 시작해 젠더 이슈까지 건드는 <헤레틱>의 야심은 스릴러 장르의 재미로 이어진다. 추리 요소를 가미한 작품 특성상 영화는 끝까지 봐야 리드의 속내를 알 수 있는데, 이는 생존의 기로에 선 두 여성의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더한다. 특히 집 안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이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이 부분에서 <아가씨> <그것> 등 폐쇄적 공간 안에서 확실한 밀도감을 부여해왔던 정정훈 촬영감독의 장기가 잘 발휘된다. 대신 슬래셔, 고어 장르의 호러 영화는 아니다 보니 시각적인 공포는 덜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를 상쇄하듯 배우들의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휴 그랜트의 악역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인텔리전트한 외모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했다가 광기 어린 신념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면서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게 상당한 몰입감을 준다. 이렇게 좋은 목소리가 오히려 소녀들을 압박하니 그 자체로 낯설고 묘하면서 강압적이다. 극 중 휴 그랜트의 이중성은 안경 착용으로 빚어지는데, 언제 안경을 쓰고 벗는지 유심히 보기 바란다.
여기에 소피 대처와 클로이 이스트의 연기도 발군이다. 서로 다른 성격과 믿음의 결이 다른 이들은 각자 처한 위기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휴 그랜트와의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극을 이끈다. 특히 최근 개봉한 <컴패니언>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소피 대처의 연기는 왜 그녀가 차세대 호러퀸인지 알 수 있게 한다. 큰 눈망울을 통해 비치는 두려움과 불안, 그럼에도 강단있는 행동 등 좀 더 진취적인 호러퀸 캐릭터로서 그 맛을 살린다.
결말에 이르러서 영화는 과연 우리가 믿는 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또 한 번 안긴다. 감독은 이 악몽 같은 이야기 속 다양한 일들이 과연 실제 존재했는지, 누군가의 상상 속 이야기인지 혼돈에 빠뜨린다. 극 중 팩스턴은 자신이 죽으면 나비가 되어 사랑하는 이들의 손 끝에 앉겠다고 말하는데,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뜻하는 이 말을 끝까지 유념하며 보면 이 작품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 스튜디오 오르카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평점: 3.5 /5.0
한줄평: 믿음과 불신 속 세상을 사는 이들을 향한 날선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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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라이 대 싸이코 / 변요한 신혜선 / 그녀가 죽었다 / 스토킹 범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그녀가 죽었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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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미친 청춘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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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큘라 2021> 예고편
세실리아와 마르틴 모자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발생 사흘째, 그녀는 혼자 아들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실마리조차 없다. 그러던 중 최근 3일간 발생한 의문의 살인 사건들에 자신 그리고 미지의 존재가 연관된 것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살육의 주범을 찾던 그녀 앞에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태초의 악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