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1-04-11 16:30:01
귀여운 공존과 특별한 평화
<신비한 동물사전> ⭐⭐⭐
최근에 본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와 며칠 전에 본 <대니쉬 걸>의 주연 배우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배우가 등장하는 교집합적인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 이 영화 역시 시리즈로 진행되는 영화이긴 하지만, 시리즈를 몰아서 보진 않은 채 일단 첫 번째 작인 <신비한 동물사전>만 보고 글을 적으려 한다. 나중에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를 비롯하여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도 막을 내릴 때 감상문을 적지 않을까 예상한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비한 동물사전> 네이버 스틸컷
친화력
<신비한 동물사전> 주인공인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는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신비한 동물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어떻게 하면 이들과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호그와트 출신 마법사다. 후플푸프 출신답게 상당히 넓은 관용과 차분함이 있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동물들을 사랑하고 애정을 가졌기에 그가 보여주는 동물 관리법은 굉장하다. 각 동물마다 가진 특징과 행동들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대처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옵스큐러스로 인해 변해버린 크레덴스(에즈라 밀러)를 차분히 설득하는 뉴트의 모습은 그가 가진 이해력과 친화력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
제목 그대로 흥미로운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본 동물은 문카프다. 문카프는 뉴트에 가방에 있던 동물로 보름달을 지켜보다가 제이콥(댄 포글러)이 주는 먹이를 먹으러 쫓아오는 목이 길고 검은 털로 뒤덮여 있으며, 눈이 큰 특징을 지녔다. 문카프가 등장하기 전 겉보기에도 사나워 보이는 천둥새나 거대한 폭탄 뿔을 지닌 에럼펀트라는 동물도 신기하게 봤다. 하지만 문카프는 뉴트의 센스가 돋보이게 해 준 동물이다. 머글 태생인 제이콥에게 눈두나 천둥새 같은 위험한 동물에게 먹이를 주라 하지 않고, 머글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얌전한 문카프에게 먹이를 주라고 한 뉴트의 센스 있는 행동이 돋보여 더 흥미롭게 바라본 동물이기도 했다.
공존과 평화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키워드다. 두 가지 상황으로 공존과 평화가 있는데, 첫 번째는 뉴트의 신비한 동물들과 마법사 사회다. 뉴욕 마법사 사회는 신비한 동물을 금지하는 법이 있을 정도로 동물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는 사회다. 그러나 뉴트는 신비한 동물사전이라는 책을 집필하는 동시에 동물들의 성격과 특성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뉴트는 신비한 동물의 조사와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법사와 머글 세계다. 호그와트 학교가 있는 런던 사회는 머글들이 사는 사회 속에 마법사들이 뉴욕 마법사 사회보다 자연스럽게 살고 있지만, 뉴욕 사회는 아예 지하 세계로 내려와 살고 있다. <신비한 동물사전>에 등장하는 대사로 추측하면 머글들이 마법사들을 공격하여 지하세계로 쫓겨나듯 도망친 상황으로 보인다. 그래서 뉴욕 마법사 사회는 머글 눈에 안 띄는 법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들도 어찌 보면 마법사와 머글들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지닌 공존과 지하세계로 살아가며 머글 사회 눈에 띄지 않으려 하는 특별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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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 재스민> - ‘내가 아닌 타인을 통해 내 세계를 정의했을 때’
블루 재스민 (Blue Jasmine, 2013)
개봉일 : 2013.09.25 (한국 기준)
감독 : 우디 앨런
출연 : 케이트 블란쳇, 알렉 볼드윈, 샐리 호킨스, 바비 카나베일, 피터 사스가드
내가 아닌 타인을 통해 내 세계를 정의했을 때
이름, 꿈, 좋아하는 것, 가치관, 외모, 가족, 타인들과의 관계, 경제적 조건, 직업 등.. 이 모든 조건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나의 세계는 내 스스로 확립해가야 한다. 내가 아닌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타인을 통해 내 세계를 건축하고 그것을 ‘나’라고,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 세계 가운데 있는 타인이 쏙- 빠져나가버린다면? 나에겐 무엇이 남을까.
잘나가는 사업가 남편‘할’을 만나 갖고 있던 이름도 바꾸고 전과 다른 1% 상류층의 삶을 즐기던 재스민은 할의 몰락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비싼 명품과 파티, 여유로운 취미생활을 즐기며 자신을 ‘나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할의 존재가 사라진 후 재스민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꾸던 꿈, 경제적 능력, 남편과 아들, 명품. 모든걸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순식간에 바뀐 삶에 끼어있는 모든 것들이 재스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여동생 진저, 낯설다 못해 수준 떨어져 보이는 진저의 남자들. 재스민은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보다 모든 걸 다 가진 삶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나를 채워가기보단 모든 걸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고 그를 위해 거짓도 불사한다.
재스민은 여전히 재스민이라는 이름을 달고 명품 가방을 들고 명품 재킷을 걸친다. 하지만 그녀가 걸친 명품들은 맑게 빛나지 않는다. 스스로 무너트린 세계에 머문 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은 공허할 뿐이다. 주인공 재스민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이 모든 감정을 설명한다
블루 재스민 시놉시스
NEW YORK 명품을 휘감고 파티를 즐기던 뉴욕 상위 1%의 ‘재스민’! 사업가 ‘할’과의 결혼으로 부와 사랑을 모두 가지게 된 ‘재스민’. 뉴욕 햄튼에 위치한 고급 저택에서 파티를 열고, 맨해튼 5번가에서 명품 쇼핑을 즐기던 상위 1% 그녀의 인생이 산산조각 난다. 바로, ‘할’의 외도를 알게 된 것.
SAN FRANCISCO 모든 것을 잃은 그녀, 화려하지만 우울하다! 결혼생활을 끝내버리고 하루아침에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여동생 ‘진저’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오른다. 명품샵 하나 없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 그녀.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고, ‘진저’와 루저 같아 보이는 그녀의 남자친구 ‘칠리'가 불편하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혼잣말은 늘어만 가고 신경안정제마저 더 이상 듣지 않던 어느 날, 그녀는 근사한 외교관 ‘드와이트’를 만나면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새로 시작해야죠.”
자넷, 아니 재스민은 잘나가는 사업가 남편 할을 만나 상류층의 삶을 즐긴다. 하지만 할이 전 남편이 되자 재스민은 상류층 부인이 아닌 가진 것 없는 여성이 된다. 그녀는 뉴욕을 떠나 동생 진저의 집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모든 걸 탈탈 털렸다고 말하면서도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일등석에 앉아온 재스민은 옆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지금 이 상황은 별거 아니며 곧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는 식으로 허풍을 늘어놓는다. 영화 내내 재스민은 상류층으로 돌아갈 거라는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한다. 그 꿈이 계속될수록 재스민의 눈은 점점 더 공허해졌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점점 더 애틋함으로 가득 찼다.
재스민의 동생 진저는 재스민과 다른 삶을 살았다. 재스민이 상류층이었다면 진저는 중상류층에도 닿지 못하는 삶을 산다. 진저는 기술자인 전남편 오기와 뉴욕으로 놀러 가 재스민을 만난 날, 재스민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권 당첨금을 전부 날린다. 그 일을 계기로 오기와 이혼까지 했지만 진저는 재스민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 나갈 땐 돌아보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동생을 찾는 못난 언니 재스민은 여전히 진저의 사는 수준과 동거남 칠리, 동료 에디를 평가한다. 두 사람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우선 상류층도 아니고, 교양도 없어 보이는 칠리와 동료. 재스민은 그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다시 일어설 계획을 짠다.
재스민은 원래 인류학자가 되려고 했다. 영화의 초반, 할을 만난 재스민은 “대학을 졸업해서 뭐해요. 인류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라고 말한다. 상류층 남편을 만났으니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더 이상 공부하고 노력하며 꿈을 좇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사실은 재스민이 모든 걸 다 가진 게 아닌, 모든 걸 가진 남자가 재스민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샌프란시스코로 온 재스민은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졸업해서 뭐하냐”고 말했던 대학에 다시 가겠다고, 공부를 해서 인테리어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재스민은 집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쉴 틈 없이 도지는 신경쇠약 증상을 이겨내기 위해 약을 통으로 삼켜내며 노력한다. 처음 해보는 병원 접수일과 컴퓨터 배우기. 이렇게 해서 언제 상류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재스민은 다시 내가 아닌 남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돈이 있어야 사람이 살잖아요.”
파티에서 만난 외교부 소속 상류층 남자 ‘드와이트’. 재스민은 상류층에 속하는 그의 직업을 듣자마자 온갖 거짓말을 술술 뽑아낸다. 전 남편이 외과의사였으며 사고로 사망했다고, 아이는 없고 자신은 인테리어 전문가라고. 재스민은 드와이트와 결혼하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드와이트의 연락이 늦을 때마다 불안감에 떤다. 다시 상류층의 삶으로 데려가 줄 유일한 통로가 끊기는 건 아닐까. 진저는 약을 한 움큼 집어먹는 재스민을 보며 “거짓말을 들킨 거 아니냐”고 가볍게 말을 던지고, 재스민은 진저의 말에 크게 화를 낸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마!”
모든 게 진실은 아니더라도 일부 진실이 섞여있으니 내 말은 거짓이 아니다.라는 게 재스민의 입장이다. 재스민의 세계는 항상 그래왔다. 진정 소유한 건 하나도 없으나 모든 걸 소유한듯한 느낌이 드는 삶. 할이 재스민에게 주던 모든 게 진실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상류층의 일상은 진실이었던 삶. 재스민은 그 거짓 같던 삶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재스민은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과 다르게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한다. 재스민의 아들 대니는 할의 사기 행각이 밝혀지자마자 일찌감치 집을 나간 후 중고 악기점을 차렸고 “과거는 모두 잊겠다”고 말하지만 재스민은 화려했던 과거를 버리지 못한다. 진저는 재스민과 함께 간 파티에서 만난 현실과 동떨어진 로맨틱한 남자 ‘알’에게 끌렸지만 알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현실로 돌아와 다시 칠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재스민은 여전히 누군가가 선물해 줄 상류층의 삶을 기다리며 거짓말을 반복한다.
“난 달리 꿈이 없었어.. 그래도 늘 뭔가 하고 싶었어.”
할을 처음 만나던 날 들었던 노래 ‘블루문’. 재스민은 이제 그 노래의 가사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늘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소유로서의 가치, 경제적인 가치만 따지다 이제 진짜 나를 모르게 된 그녀. 재스민이 걸친 명품 옷은 땀에 절어 볼품 없어지고 재스민은 한껏 흐트러진 모습으로 집을 나선다. 타인의 존재로 완성한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무너뜨린 그녀는 여전히 현실을 되찾지 못하고, 현실과 허상의 공허한 간극 사이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재스민이 활짝 피어날 밤은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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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구분과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에 대한 노래
구분과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에 대한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 섹션 영화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 2021' 리뷰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출연] Ansel Elgort, Rachel Zegler
시놉시스] 1957년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사이드. 산후안 힐 지역의 허물어져 가는 공동주택과 언제 들이칠지 모르는 철거 장비의 위협을 배경으로 두 라이벌 갱단, 터프한 리프의 제트들과 베르나도의 푸에르토리코계 사크들이 우위를 놓고 겨룬다. 승자독식의 패권 다툼을 두고 열린 학교 댄스 행사에서 제트의 싸움꾼 토니와 베르나르도의 여동생 마리아 사이에 로맨스가 싹트자 살벌한 영역 전쟁의 기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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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기다리다며 본 광고에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021’이 등장했다. 사람들의 굉장한 에너지와 힘찬 넘버, 그리고 다양한 색감들을 보면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번에 뮤지컬 영화에서 자신의 끼를 펼쳤구나 하며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나질 않아서 보지 못한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던 영화였다.
화려한 색감 속 가치를 부여하다개인적으로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화려함’ 때문이다. 이러한 화려함을 영화로 그대로 옮겨와 무대의 한계상 보여줄 수 없었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공간을 이동하고 의상들에 변화를 주면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의 색감을 굉장히 다채롭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 다채로움 속에서도 일정한 규칙이 엿보였는데, 기존 맨해튼에서 살던 백인 그룹에서는 무채색과 주로 파란색 계열의 옷을 입는다면, 푸에르토리코계 사람들은 정렬적인 빨간색과 노란색을 위주로 그들을 표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형적인 생김새도 물론 차이가 바로 드러났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색감을 통해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자유로움 속에 내재된 차가움을 표현하는 파란색은 결국 미국이 자유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색 그 자체로 열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빨간색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며 새로운 이 맨해튼에서의 핍박을 이겨내는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주인공 마리아가 토니와 함께 도망치려는 그날 밤 마리아는 파란색 옷을 입고 토니 앞에 등장하는데, 결국 이 미국이라는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외부인이 스스로의 색을 버리고 미국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국의 실정을 넌지시 비춰주고 있었다.
맨해튼에 드리운 구분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자치령이다. 명목상 국가원수는 미국 대통령이지만 직접 뽑은 지사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섬이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곳을 벗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있었고, 맨해튼에 정착하면서 백인과의 갈등이 생긴다. 계속해서 밀려들어 오며 영역을 넓혀나가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을 보면서 점차 밀려나는 백인들은 반감을 품고,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자신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어떻게 해서든 쫓아내려는 백인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한데 어우러지는 공존은 이뤄지지 못하고, 푸에르토리코인은 푸에르토리코인끼리! 라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이 신념 때문에 토니와 마리아는 쉽게 사랑을 할 수 없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제트파와 샤크파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구분을 하고 있을까? 나와 너, 우리와 그들과 같이 끊임없이 우리라는 집단을 만들고 그 속에서 우리와 다른 이들을 좋게는 신기한 눈으로, 나쁘게는 경멸의 눈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결국 우리들 스스로 화를 입히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분노는 분노만 낳을 뿐
자신의 눈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토니를 본 마리아의 내면에는 분노만이 남게 된다. 치노가 쏜 총을 빼앗아들며 치노를 향해서 그리고 제트파와 샤크파를 향해 모두 총을 겨눈다. 결국 서로를 구분하고 영역을 차지하려는 것이 모두에게 화를 입힌 것이다. 결국 피를 보고 나서야 두 갱단은 반성과 화해의 모습을 보인다. 토니를 함께 들고 카페로 옮기면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제트파와 샤크파에 상관없이 말이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속담이 있긴 하지만 과연 이러한 복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끝이 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누군가가 먼저 시작을 한 싸움이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복수를 주고받다 보면 이 악순환 속에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중요해지지 않고, 되갚음만이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분노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풀어내고, 다시금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방지책을 세우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비극적인 결말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제천국제영화제에서의 시작 영화로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021’. 티저 영상으로 접했을 때는 그저 신나는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속에는 구분과 분노에 대한 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구분과 분노로부터 자유로운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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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시간표
2022-08-13 13:00
메가박스 제천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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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부탁해 / 2001
나는 연말이 되면, 자꾸만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한 해의 마무리에는 꼭 당신들의 올해 끝얼굴을 함께 마주봐야 편안해지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가족이 아닌 오랜 친구들에게 무언가 복고하는 감정을 느끼는 걸 보면, 우리가 놓고 온 중요한 것이 자꾸만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그걸 당신들의 얼굴을 통해 알고 싶어하지만, 몇 해를 보고 또 보아도 공허한 마음은 계속 커져간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이 무언지는 아무도 알려 하지도, 알 수도 없다.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인지, 나 혼자 길을 헤매는 건지도 영문 모를 일이다.
왜 난 이제 네 얼굴을 깜박깜박 들여다보면 더 슬퍼지는 걸까? 지금의 나는 몹시 충분한 사람인데도 당신들과 마주하고 나면 반토막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걸까? 즐겁고 공허한 양가적인 마음이 스무살 때부턴 계속 이어져왔다. 더 알고 싶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그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꼭 손을 쥐고만 서 있었던.
“스물셋.. 아니 늦어도 스물 넷에는 꼭 이 영화를 봐야 해. 더 늦으면, 이 영화는 볼 수 없거든. 아무리 봐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걸?”
먼저 이 영화를 본 H언니가 내게 당부하며 말해주었다. 참. 세상에 그런 영화가 어디있어? 라는 생각과 호기심으로 가볍게 보았다. 언니의 말은 정말이었다. 나는 정말로 서른에 이 영화를 보았다면 후회했을거야, 언니. 해주와 지영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안간힘을 썼을거야.
<고양이를 부탁해>. 이 영화는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던 다섯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느덧 졸업을 하고 스물이 되어버린그녀들. 각자의 삶이 지고 있는 각기 다른 무게를 감당해내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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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는 증권사의 계약직 직원이다. 이른 나이에 일찍이 좋은 직장에 취업한 해주는 자신의 직장을 자랑스러워 하며, 더욱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며 열심히 일한다. 상사의 무시, 성희롱 등을 견디면서도
해주는 꿋꿋이 해낸다.
해주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직장, 자신의 외모, 또 자신의 가정사 등. 어른이 된 해주는 더이상 친구들에게 예전만큼의 관심을 쏟지 않는다. 대신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맞춰 열심히 나아가기에 급급하다. 우리의 사회초년생들의모습과 다를 바 없는 해주. 너무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해주의 방식만이 이 사회에선 어린 우리가 살아남는방법일지도 모른다.
해주와 가장 친했던 지영. 지영은 집이 가난하다. 부모는 일찍이 여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여러 종이를 겹쳐 대충지은 듯한 집에서 사는 지영은 직장에서 잘린 후, 매일을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지영에게는 삶이 지옥이다. 자신의 가난이 끔찍히 싫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세상은 자꾸만 그녀를 단념시킨다.
그럼에도 꿈을 갖고 있는 그녀. 지영은 텍스타일 아트에 관심이 많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꿈을 놓지 않는 지영. 매일 같이한 칸씩 색을 칠해나간다.
또 다른 친구인 태희. 태희의 집은 큰 찜질방을 운영한다. 부유한 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태희는 자신보다 못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매일 같이 장애인 봉사활동을 나가고, 그 봉사활동에서 만난 지체장애인의 시를 대신 써주며 사랑하기도 한다. 지나치는 작은 것에도 동정을 갖는 태희. 그런 그녀는 자신에게 올곧은 길만 요구하는 집안이 힘들다. 자꾸만 멀리 떠나고 싶어하는 태희.
그런 태희는 다섯 친구의 관계가 소중하다. 고등학생 때 친구였던 이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유일하게 노력하는 인물이다. 자신만 이 관계에 항상 노력하고, 마음을 쏟는 게 서운하지만 결국 또 모든 걸 도맡아하고 있는 그녀. 그녀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슬퍼진다.
해주: 미안하다. 이거 오늘까지 꼭 해야한다는데. 낸들 어쩌냐? 야. 내 생일이라서 안된다고 그럴 순 없잖아.
태희: 왜 맨날 내가 전해야 하는건데? 일일히 연락해서 약속 잡는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알아? 결국 나만 연락하잖아 매일.
해주의 생일로 오랜만에 모이게 된 다섯 친구들. 하나씩 해주에게 선물을 건넨다. 비류,온조는 뽕브라를. 태희는 립스틱. 세 친구들은 스무살에 걸맞는 선물을 준다. 지영은 길에서 주운 고양이를 해주에게 준다. 자신이 열심히 손수 그린 텍스타일 포장지로감싼 상자에 담아.
선물이야. 이름은 티티야. 예쁘게 키워.
이 장면이 결국 친구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장면이란 생각이 든다. 해주는 지영의 선물을 받고는 당장 포장지를 찢어버린다. 지영의 정성과 꿈이 담긴 텍스타일 그림은 해주에겐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짓. 돈도 안 되는 쓸모 없는 낙서에 불과하다. 그 찢어진 그림을 들어 지영에게 말을 거는 태희.
태희: 이거 네가 그린 그림 맞지? 야. 멋있는데? 근데 이거 하나하나 다 그리려면 조금 지루하겠다.
태희는 항상 버려지고 찢긴 것을 주워 다시 봐준다. 정확히는 봐주려고 노력하지만, 하지만 그 공감은 전적으로 상대를 위로해주지 못한다. 그저 씁쓸히 웃어보이는 지영. 친구들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다섯 중에서도 해주와 지영은 더욱 친했다. 같은 무리에서도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 듯, 두 사람은 그런 특별한 사이였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너무도 달라져버린 둘. 지영은 고등학생 때와 다를 것 없이 해주에게 진심이지만, 해주는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벌써 어른이 된걸까. 자꾸만 지영의 마음에 흠집을 내는 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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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야 서지영. 진짜 놀랬다? 난 네가 나한테 고양이 선물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지영: 예쁘게 키워.
해주: 근데 너 요새 뭐해?
지영: 뭐 좀 생각하느라고. 그냥 있어.
해주: 생각? 무슨 생각?
지영: 유학 가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요즘 텍스타일 공부하는 사람들 외국으로 다들 나가잖아.
해주: 유학은 뭐 아무나 가니? 돈이 있어야 가지. 그러지말고, 이 언니가 알바 자리 소개해줄테니까 용돈이나 벌어서 학원이나다녀보던지 해. 어때?
(지영은 밖으로 나가버린다.)
해주: 야. 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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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의 회사에 찾아온 지영. 자신이 준 고양이를 버려버린 해주이지만, 마지막으로 그녀를 믿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흘리듯 한말을 기억할리 없는 해주. 지영은 몇시간을 지하철 역에 앉아 기다린다. 너무도 달라진 둘의 관계.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이 똑같은 경험을 하며 같이 울고 웃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이제는 서로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도 잘 모르게 된 둘. 각자가 처한 환경은 이제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멀어져버리는 옛 친구들. 서로를 향한 마음의 크기는 다르고, 서운함은 쌓여만 가고 편한 존재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주게 된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았던 우리가, 사회의 발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쉽게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슬프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그녀들의 등 뒤로 보이는 “좋은 여행, 영원한 추억”이라는 문구가 자꾸만 눈에 띄었다. 우리에게 영화가 하는 말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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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래된 집이 가라앉기 시작한 지영. 지영이 처한 현실처럼 그녀를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점점 좁아지고 설 곳이 없어지는 지영. 여기저기 일을 구해보다 태희에게 결국 돈을 빌리게 된다.
그런 지영의 부탁에 자신의 전단지 알바를 반 나눠주곤
돈까지 빌려주는 태희.
태희: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아 맞다. 까먹기 전에. 여기 돈.
지영: 고마워. 언제까지 주면 돼?
태희: 그냥. 돈 생기면 갚아.
근데 어디에 쓰려 그래?
지영: 그냥 좀 필요해서.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좀 마.
태희: 네가 전화해서.. 의외였다?
지영: 그래? 내가 그렇게 전화를 안했나?
태희: 우리 모일 때는 맨날 내가 먼저 연락하지. 네가 먼저 연락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졸업하니까 애들이랑 멀어지는거. 그게 젤로 섭섭하다?
학교 다닐때가 정말 좋았었는데. 매일 만나다가 떨어져 지내니까 이젠 만나도 별로 할 얘기도 없고.
개인적으로 태희의 이 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매일 보던 사이가, 단지 물리적으로 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우리들은 이렇게 변해버리는 건가? 라는 서운함을 스무살 때 너무 큰 혼란으로 겪었다. 서로를 낱낱이 알던 때와는 달리, 몇 달만에 만나 간간히 그동안의 일상을 전하는 것은 꽤 우리의 졸업이란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반갑고 자꾸만 텅 비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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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길에서 노숙자를 만난 지영과 태희.
지영: 아까 그 거지 말이야. 난 솔직히 그렇게 될까봐 좀 무섭다?
태희: 글쎄, 난 무섭단 생각은 안 해봤고. 가끔 그런 사람들 보면 궁금해서 따라가보고 싶기는 하다? 매일 뭐하면서 지내는지. 아무런 미련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지낼 수 있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지영: 그걸 자유라 그러니?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태희는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이는 선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입장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다. 그건그녀가 그런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란 태희는 거지, 외국인 노동자들, 고기잡이 배를 보며 “자유”를 떠올린다. 하지만 지영은 가난을 안다. 그것이 자유가 아닌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는 현실의 쓴 맛을 직접 겪어본 인물이다. 지영에게 그것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 그 자체이기에, 자꾸만 지영은 걱정한다. 당장 집이 가라앉으면 어떡하지? 저러다무슨 일을 당하면 어떡하지? 하고서 말이다.
결국 마음뿐인 연민을 가진 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다 가지고 남은 여유로 남들을 돌보는이들과, 진심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아는 이의 차이가 무언지 생각해보게 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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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나고, 또 다시 만나기로 한 친구들. 이번에도 역시 태희의 제안으로 약속은 진행된다. 지영은 해주와의 저번 일로 아직마음이 상해 더이상 해주를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건 상관 없이, 그저 지기와 가까운 곳에서 효율적으로 만나고 싶어하는해주. 각 인물들의 성격이 다 드러난다.
지영: 꼭 그래야해?
태희: 한 달에 한번씩은 꼭 만나줘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 우정에 금이 안가지.
해주: 우정? 참.
비류, 온조: 아. 그럼 말이 또 달라지지.
해주: 근데 언제 인천까지 가니. 니네가 서울로 오면 안돼?
비류, 온조: 하여튼 얘는 꼭 지 생각만 한다니까.
지영: 난 해주한테 가는 거면 안 가.
태희: 우리 넷이 서울을 가는게 낫니. 너 하나가 인천을 오는 게 낫니?
해주: 너희 넷이 서울로 오는거 !
결국 인천에서 만난 다섯 친구들. 시작부터 지영은 해주와 말도 섞지 않으며 둘의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태희: 야. 너 지영이한테 왜 그래 자꾸. 학교 다닐 땐 너네 둘이 제일 친한 사이였잖아.
해주: 예전에 친한 사이였다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니? 현재가 중요하지.
태희: 현재? 그래서, 현재 너한테 중요한 게 뭐야?
해주: 옷이다. 왜!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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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로가 소중하지만, 서로가 가장 중요하진 않게 되어버린 우리들. 이건 결국 나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스물을 겪은 청춘들이 알게 된 씁쓸함일 것이다. 다섯 친구들이 인천에서 쇼핑을 하며 각자 둘러보는 장면은 결국 아무리 친구여도, 자신의 인생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 뜻인 것처럼 느껴져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해주와 지영이, 태희처럼 미래에 대한 고민과 꿈으로 가득차 멀리 떠나버리기도, 현실에 안주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동안에 종종 만나 서로를 바라봐주는 따듯함은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지금의 내 나이는 어쩌면 가장 혼란스럽고, 바쁘며 치열한 나이인지도 모른다. 졸업의 끝과, 새로운 시작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그 속에 걸쳐있는 우리들. 앞으로도 우리가 더 멀어진다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겠지만, 문득 생각나면 서슴없이 연락하고 언제나열여덟처럼 깔깔대며 철없는 소리만 하는 우리이길 바란다. 다들 나와의 여행을 영원한 추억처럼 계속한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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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가 지영에게 한 말이 자꾸만 남는다.
태희: 지영아. 나는 니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 그래도 니편이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거라고 생각해. 나 너 믿어.
가끔은 해주였고, 또 가끔은 지영이었으며 종종 태희였던 모든 방황하는 스물에게 보내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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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위도우> - '히어로, 딸, 언니, 친구였던 나타샤의 삶'
블랙 위도우 (Black Widow)
개봉일 : 2021.07.07 (한국 기준)
감독 : 케이트 쇼트랜드
출연 : 스칼렛 요한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와이즈, 데이빗 하버, 레이 윈스턴, 윌리엄 허트
‘히어로, 딸, 언니, 친구였던 나타샤의 삶’
어벤져스가 처음 개봉한지 근 10년.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로 긴 시간을 함께하고 엔드 게임을 마지막으로 어벤져스를 떠나는 블랙 위도우, 나타샤를 위한 마지막 배웅 같은 영화 <블랙 위도우>가 드디어 개봉했다. 개봉한지 근 3주가 지나가고 있는.. 아주 늦은 시점이지만 나타샤를 보내는 마음으로 늦은 글을 써본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1년 넘게 늦춰지는 바람에 그동안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무사히 <블랙 위도우>가 개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큰 감동이었다.
<블랙 위도우>는 시빌 워와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어벤져스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고 로저스(캡틴 아메리카)가 잠적한 후, 남겨진 나타샤의 이야기다. 그동안에 깊이 언급되지 않았던 나타샤의 어린 시절과 ‘레드룸’에 대한 비밀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데, 지나치게 어둡거나 무겁게 다뤄지진 않는다.
이전 영화들에서는 나타샤가 레드룸에서의 기억과 그 안에서 잃어버린 것(어린 시절이나 가족, 여성으로서의 삶 등..)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어벤져스라는 새로운 동료이자 가족들을 만나며 그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난 가족이 없다.’고 말하던 그녀가 어벤져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갑자기 일어난 어벤져스의 내부 분열은 나타샤를 다시 한번 고민에 빠트린다.
<블랙 위도우>는 레드룸에 얽힌 음모와 그것을 전부 깨부수기 위한 여정이자 나타샤가 완벽하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죄책감을 덜어내는 과정, 지금껏 아팠던 만큼의 성장을 한 번에 이뤄내는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잠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나타샤는 아이언맨처럼 강철 슈트를 입은 것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실험을 받은 것도, 토르처럼 신도 아니다. <블랙 위도우>는 인간의 몸으로 몇 가지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도 전혀 ‘나약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던 그녀가 숨기고 있던 상처와 감정들을 밖으로 내놓으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슈퍼 히어로 블랙 위도우이기 전에 인간 나타샤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쩌면 나타샤가 어벤져스 내에서 신체적으론 가장 약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과 정신은 다른 히어로들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타임라인 이후에 인피니티 워, 엔드 게임에서 보여준 결단력과 용기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더 그런 확신이 든다.)
나타샤가 인피니티 워에서 짧은 금발머리를 하고 다시 등장했을 때, “그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었구나” 하고 짐작하긴 했으나, 그때는 그저 그녀의 외적 변신에 더욱 크게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항상 아프고 씁쓸해 보였던 그녀가 새로운 머리, 새로운 옷을 입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갈라섰던 동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킬러로서 살아온 세월을 속죄하며 세상을 위해 싸우던 그녀가 더욱 강한 사명감을 갖게 된 이유가 이 영화 <블랙 위도우>에 담겨있다. 모든 게 가짜라고 생각했던 나타샤의 삶에 ‘진짜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녀가 마지막으로 몸을 내던져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이제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블랙 위도우 시놉시스
어벤져스의 히어로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 (스칼렛 요한슨)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레드룸의 거대한 음모와 실체를 깨닫게 된다.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의 위협에 맞서 목숨을 건 반격을 시작하는 ‘나타샤’는 스파이로 활약했던 자신의 과거 뿐 아니라, 어벤져스가 되기 전 함께했던 동료들을 마주해야만 하는데… 폭발하는 리얼 액션 카타르시스! MCU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할 첫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끽하라!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나타샤는 오하이오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확히는 3년간 러시아 스파이인 가짜 엄마 아빠와 피를 나누지 않은 동생 엘레나와 함께 ‘위장 가족’으로 살았다. 나타샤는 자신에게 진짜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가 아닌 ‘킬러’라는 물건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 레드룸에서의 어린 날들과, 킬러가 되어 살아온 시간들을 지나, 모든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어벤져스가 되어 세상을 위해 싸우던 나타샤는 ‘이제 진짜 가족이 생겼나’싶었지만 어벤져스가 와해되고 다시 혼자가 된다.
“이제 떠날 거예요.”라고 말하며 수트를 놓고 추적을 피해 달아난 나타샤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아픈 어린 시절의 흔적을 마주한다. 그건 바로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는 ‘레드룸’과 여전히 소녀들을 세뇌시켜 위도우로 키우고 있는 드레이코프. 끝났을 거라 생각했던 드레이코프의 악행은 계속되고 있었고 지켜주는 어른이 없었던 소녀들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을 해방시켜줘.”
나타샤가 레드룸을 벗어난 후 남겨졌던 동생 엘레나는 다른 위도우의 도움으로 해독제를 맞고 탈출에 성공해 나타샤에게로 향한다. 나타샤는 레드룸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음을 알고 엘레나와 함께 해독제를 들고 가짜 엄마 아빠였던 멜리나와 알렉세이를 찾아간다.
“내게도 진짜 가족이었어.”
나타샤, 엘레나, 멜리나와 알렉세이가 한 식탁에 모이고, 그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칭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3년의 시간 동안 쌓아왔던 습관과 작은 추억들을 나눈다. 레드룸의 계획으로 이뤄진 ‘위장 가족’이었다는 비밀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에 ‘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정과 사랑은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타샤는 멜리나가 건넨 “절대 너 자신을 잃지마.” 라는 한마디로 자신을 붙잡고 살아왔고, 멜리나는 나타샤, 엘레나와 함께 찍은 사진첩을 간직하고 있었고, 알렉세이는 엘레나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타샤에 등에 들어있던 멍과 이들의 행동을 보며 슈트를 입은 히어로나 킬러, 대단한 작전을 행한 스파이이기 이전에 이들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널 두고 갈 순 없었어.”
“그 안에 너 있는 거 알아. 널 두곤 안 갈게.”
나타샤는 다시 한번 드레이코프와 레드룸에 맞서며 지금껏 자신을 심하게도 아프게 했던 시절들을 털어낸다. 그리고 그만큼 강해진다.
힘없는 여자아이들을 세뇌시키며 차고 넘치는 자원이자 재활용품이라고 칭하는 드레이코프. 그의 앞에 선 나타샤는 스스로 자신의 후각 신경을 손상시키며 드레이코프가 남겨둔 마지막 세뇌의 흔적을 제거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을 끊으면 드레이코프를 공격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기다려 그의 계획을 캐내는데 성공한다. 나타샤는 먼저 레드룸을 탈출하며 구하지 못했던 위도우들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탈출하기 위해 무너지는 레드룸에서 늦게까지 머물며 해독제와 정보를 챙긴다. 이번엔 ‘구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레드룸이 내려앉을 때, 대부분의 위도우들은 해독제를 맞고 탈출에 성공한다. 위도우 네트워크 정보를 들고 탈출하던 나타샤는 감옥에 갇혀있던 안토니오를 꺼내고 지상에서 다시 한번 격돌한다. 안토니오는 드레이코프의 딸이자 그가 세뇌를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1급 무기’다. 안토니오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어 마치 거울과 싸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적이자 나타샤의 오랜 죄책감의 중심이다. 나타샤는 자신의 거울처럼 움직이는 안토니오에게 해독제를 투여하는데 성공하고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나타샤의 진심 어린 사과는 자신이 탈출한 후에도 갇혀있었던 여러 위도우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전 세계에 퍼져있는 세뇌당한 위도우들, 그리고 괴로웠다며 무조건 부정하려 했던 위도우 시절의 나, 자신의 과오에 희생된 이들에게 건네는 말일 것이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겪고 있는, 거울 속 나와 같은 소녀들, 그리고 과오를 저지르던 그때의 나. 나타샤는 안토니오의 해독을 마지막으로 오래 묵은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젠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
“절대 너 자신을 잃지 마.”
레드룸의 파괴와 나타샤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가족들과의 만남은 나타샤가 자신도 행복한 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준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타샤를 지배했던 세뇌의 흔적들은 사라졌고,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던 위도우들도 해독제를 통해 자유를 되찾았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가족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엘레나는 여전히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동생이었다.
“난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이나 있더라고.”
모든 게 가짜고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음을 조금 더 뻗어보니 그들의 손이 있었고, 손을 내밀자 그들은 나타샤의 손을 잡아줬다. 위도우들도 알렉세이도. 그리고 어벤져스도.
“난 선물상자가 빈 통인걸 알면서도 다 열어보고 싶었어.
그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
가짜인 걸 알면서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아이’의 기분을 궁금해하며 빈 상자를 열었던 어린아이는 무사히 자신을 잃지 않고 어른이 되어 세상과 다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킨다. <인피니티 워>에서 만난 나타샤가 입고 있던 엘레나의 조끼와 어린 그녀의 모습과 같은 짧은 금발머리는 그녀가 가장 큰 결핍이라 느꼈던 어린 시절과 가족을 새롭게 정의했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엔드게임>에서 나타샤가 내렸던 결정은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 그에 대한 사죄와 사명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 지켜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나를 위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된 나타샤가 내린 가장 큰 결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슬픔과 함께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나타샤는 해독제를 맞은 위도우들에게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항상 자신이 행한 과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레드룸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나타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는걸, 그녀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빼앗긴 한 명의 위도우였다는 걸, 그녀의 희생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나타샤가 멜리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라고 위로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아쉬운 만큼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된 느낌이다. 그렇기에 그 뜻을 이해하며 이제 나타샤를 보내주고 새로운 세대를, 엘레나의 등장을 반겨줄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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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이 있다면 지르자, 다만 현실은 잊지 말고
1957년 런던, 전쟁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살고 있는 ‘해리스’는 청소부로 일하던 가정집 부인의 값비싼 디올 드레스를 발견하고 아름다움에 빠진다. 이후 오랜 시간 기다려온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 ‘해리스’는 이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벌어온 돈을 모아 막연히 꿈만 꾸었던 디올 드레스를 사기 위해 파리 여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도 잠시, 파리의 디올 매장에서 무시를 당하는 등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게 되는데…
1. 흔한 듯 흔하지 않은 판타지
처음엔 이 영화가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뭐가 다른 걸까 생각했었다.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상징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흔하디흔한 영화구나 라고 생각했다. 뭐, 이를테면 미드나잇 인 파리 같은 영화였달까.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이가 들대로 든 중년과 노년 그 어딘가에 있는 여성이라는 점이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여성이 젊은시절 누리지 못한 외적 허영을 충족하는 과정을 응원하게 될 뿐더러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연륜의 짬바가 참 따뜻하다고 느껴진다. 역시 인간은 해보고 싶은 걸 해보고 살아야 이후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해리스 부인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은 어른의 말씀 중 좋은 말이 "젊었을 때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는 게 늦바람 불어 주변인에게 민폐끼치는 것보단 낫다."였는데 해리스 부인을 보면서 남편이 죽고 나서야 자아를 찾아나선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에 무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그 모습이 별거아닌 거 같아도 멋있어 보였다.
2. 겉모습과 속사정은 누구나 다르다
다분히 영화적 설정으로 배치된 러브라인이 보이지만 그 러브라인을 이어주기 위한 미시즈 해리스의 오지랖도 적당히 따뜻해서 좋았다. 패션계에 종사하는 두 남녀는 누구보다 철학을 사랑하는 반전이 눈길을 끈다. 그들은 허영과 사치의 상징과도 같은 패션계에 종사하면서도 직업과 당신의 삶을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함으로써 인생의 동력을 잃지 않는 점이 그들의 멋있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설정이 참 새로웠던 것이, 겉모습이란 참 얄팍한 것이라서 해리스 부인같은 청소부도 디올 드레스를 살 수 있다는 생각들을 못하고, 모델이 철학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들을 잘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외모로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당신의 얄팍함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다양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는 달리 파리에 대한 판타지 충족만 하지 않는 나름 알맹이가 있는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3. 판타지를 쫓되, 현실도 잊지 말 것
세상엔 당신이 현실은 무시한 채 갖지 못한 것에만 몰두하며 남에 대한 부러움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리스 부인도 당신이 누리지 못한 화려함을 쫓아 파리에 오지만 곧 이 세계에서 당신은 청소부라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깨닫고 잠시 낙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갖지 못한 화려함의 환상에 젖어 허우적대지만은 않고 다시 노동자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어른으로서 파업을 주도하는(약간은 오지랖이지만) 모습은 그녀가 환상에 젖어 당신의 위치를 버리는 무모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루려는 행위는 고귀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지르는 행위는 무모하고 이기적일 수 있다. 특히 결혼한 사람이라면 더하다. 현실의 상황을 유념하고 지를 것. 내 현실을 잊지 않은 상태에서 약간의 무모함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성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꿈을 이룬다는 명분 하에 현실을 때려치우면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리스 부인도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청소부로 돌아오지만 그녀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있다. 부당함에 조금 더 소리칠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자신감을 찾았기 때문인데, 이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판타지에 젖어 현실을 대단히 뒤바꾸지 않아도 내가 조금만 바뀌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내가 판타지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판타지를 이룰 기회는 금방 사그라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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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기록과 해석의 순간
OVERVIEW
2018년 브라질, 우연히 손에 넣은 16mm 필름에 담겨 있던 낯익게 느껴지지만 먼 곳에서 온, 그리고 오래 전에 촬영된 기이한 이미지들에 충격을 받아 이 영상의 기원을 조사하기로 한다.
REVIEW
이 영화의 감독 자나이나 나가타는 오래된 16mm 영사기 점검을 위해 릴을 하나 구입했는데, 선물로 작은 필름 롤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 롤에는 19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 가족이 휴가를 보내는 19분 분량의 홈무비가 담겨 있었다. 감독은 이 발견의 순간부터 컴퓨터를 떠나지 않고 인터넷과 모든 도구를 동원해 이 휴양지 이미지의 실제 배경을 알아내는 조사에 착수한다. 무해한 필름 롤과 아마추어 이미지가 주는 정보로 단순한 인터넷 검색에서 끝날 줄 알았던 이 특별한 수사 스릴러 형식의 영화는 결국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기 일어난 인종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드러낸다. (문성경)
"사적인 영화"는 감독이 영사기 점검용으로 "릴+사적인 영화"라는 제품을 온라인 구매하면서 시작된다. 릴과 함께 들어있던 19분 가량의 영상은 누가 봐도 가제 그 이상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제목의, 출처 불명의 무성 필름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미 편집한 영상이었다. 즉 어떤 의도가 이미 반영된 기록물이었다.
검은 화면에서 타이핑되는 글씨로 시작한다. 타각타각 소리와 함께 화면에 타이핑되는 속도대로, 관객은 감독이 겪은 정보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이 영화는 19분의 풋티지 영상, 그리고 영상 속 정보의 조각을 찾아 따라간 감독의 여정을 관객이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영화 <서치>에서 딸을 찾는 아빠의 탐색전을 흥미진진하게 본 사람이라면, 다음 장면을 궁금해 하며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단순하게 크루거 국립공원이다. 얼핏 사파리에 가서 재미있었던 시간을 담은 기록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감독이 설치한 음악이 고조되면서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든다. 끼긱끼긱 퉁겨지다 득득 긁히며 끊어질 듯 말 듯한 현, 퉁퉁 불규칙적으로 쏟아지는 타음이 불안을 고조시킨다. 기린이 걸어가거나 원숭이가 움직이고 가젤이 뛰고 물 안의 하마들이 지나가는 그 자연스러운 장면들조차 불안해 보인다. 그러면 궁금해진다. 누가 어떤 의도로 이 영상을 편집했을까? 코끼리의 걸음이 왜 반복되고 있을까? 앉아 있는 사자를 왜 재차 비출까? 사파리인데 조금도 경쾌하지 않다.
불안 안에서 궁금해하고 있노라면 전통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춤이 나온다. 사파리에도 있던 백인 아이가 춤을 지켜보며 슬며시 화면을 지나간다. 불안한 예감은 어두운 냄새를 맡는다. 도시의 길거리와, 현란한 복장의 인력거꾼과, 놀이기구가 있는 해안 도로와, 푸르게 어두운 아쿠아리움, 잔디밭, 사람들, 부유한 옷차림의 백인들과, 들판의 오두막들... 영상이 나아갈수록 어둡고 불편한 감각이 느껴진다.
감독은 꼼꼼하고 성실하게, 차곡차곡 파고든다. 영리한 구성을 따라가다 보몀 어느새 불안은 경악이 된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과 이름들을 마주하게 된다. 평화로운 여행의 기록일까 싶었던, 아니 실제로 상당 부분 그랬을 이 영상에는 착취의 역사가 배어 있다. 타인의 피를 팔아 제 배를 불린 사람들의 기억이 스며 있다. “사적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사적이지 않은, 역사 교과서에 길이 실릴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보다 보면 궁금해진다. 사적인 기록은 정말 사적인가? 기록은 언제까지 "사적"일 수 있는가? <안네의 일기>가 그랬듯, 기록은 서랍 안에 있을 때만 사적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가끔은 작가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의미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안네가 일기를 쓸 때 안네가 차마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처럼, 19분의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한 이가 이 영화를 상상했을 리 없다. 그냥 값비싼 취미였는지도 모른다. 코끼리가 걷는 장면이 반복되는 게 단순히 재미있어서 별 생각 없이 했는지 모른다. 아이의 미소를 사랑해서 계속 담다 보니 모인 영상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의도였든, 영상엔 단순히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것만 담기지 않았다. 길 가다 불려와 쭈뼛거리며 카메라 앞에 선 여자의 얼굴에 어린 경계와 불안, 그 자리를 피해보려고 얼굴을 가리는 사람, 환하게 웃는 백인 아이 옆에서 현란한 옷을 입고 등짝보다도 커다란 모자를 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인력거를 끌어야 하는 사람.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분리되어야 한다고 허울 좋은 단어를 끄집어내면서도 착취의 순간에는 옆에 있는 걸 불편해 하지 않았던 누군가들의 얼굴. 영국 여왕처럼 차려입은 여자들과 말쑥한 정장을 한 남자들의 만찬, 연설.
마치 그 대조를 의도한 작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19분의 영상 바깥에서도 동일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감독은 영상이 촬영된 시점에서 서서히 현재까지 이야기를 끌어온다. 역사가 이 영상이 찍히던 시절의 남아공을 지독한 인종차별의 시절로 기록함에도, 어떤 이들은 해안도로와 수영장과 원색의 옷자락과 환한 미소에서 풍기는 부유한 기운을 잃어버린 천국으로 기억했다. 없던 추억까지 제조해 버리는 힘이 있는 밴 모리슨의 음악을 배경 삼아, "비티지"하고 "레트로"한 색감 속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러나 모두에게 추억의 풍경일까? 다른 누군가에게도 천국이었을까? 영화는 희생을 담아내지 않고도 희생의 얼굴을 비춘다. 그렇게 누군가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사적인 기록은 공적인 역사의 순간으로 읽힌다.
다큐멘터리가 역사적 순간을 말할 때, 한 축이 기록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해석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해석을 통해 기록과 해석의 존재 의의를 동시에 비춘다. 기록을 읽어내는 과정에 관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동참시키고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고 묻는다. 1960년대의 일에서 지금 여기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지. 여전히 허울 좋은 말에 가려진 차별과 격리로 누군가를 투명하게 만드는 시도들은 없는지. 그 현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눈은 어디에 있는지. 영리한 영화는 이렇게 존재 의의를 스스로 증명한다.
2023. 04. 28 19:3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172)
2023. 04. 30 14:0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338)
2023. 05. 05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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