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25 16:07:38
위키드 | 뮤지컬보다 더 화려하게, 풍성하게, 날카롭게
<위키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초록색 피부와 마력을 타고난 마녀,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따돌림과 차별 대우를 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시간이 흘러 여동생 '네사로즈'(마리사 보데)가 오즈의 마법 학교인 쉬즈 대학에 입학하고, 다리가 불편한 동생을 돕기 위해 입학식에 동행했던 엘파바는 뜻하지 않게 교장 '마담 모리블'(양자경)의 눈에 띄어 같이 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서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외톨이로 지내던 엘파바. 하지만 그녀는 룸메이트가 된 것을 계기로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우정을 쌓아 나가고, 마담 모리블과의 마법 수업에 열중하며 마력을 갈고닦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엘파바는 어릴 적부터 롤모델이었던 '마법사'(제프 골드블룸)의 초대를 받아 글린다와 함께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고,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두 친구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뮤지컬과 영화 사이의 중용
2012년 겨울에 개봉한 <레미제라블>이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자 유니버설 픽처스는 본격적으로 유명 뮤지컬 영화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높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할리우드에서는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성공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뤄졌으니, 그 반대로 접근하자는 아이디어는 어렵지 않게 떠올랐을 테니까.
다만 유니버설 픽처스의 프로젝트는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레미제라블> 다음 주자들은 영화와 뮤지컬이라는 매체의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줄줄이 혹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 <캣츠>는 뮤지컬 무대를 스크린으로 똑같이 옮기려고 배우에게 CG로 고양이 분장을 덧입혔다가 기괴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몇몇 뮤지컬 넘버를 삭제한 <디어 에반 핸슨>은 원작과 달리 스토리 개연성 문제를 노출하고 말았다.
동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위키드>는 앞선 실패를 확실히 반면교사로 삼은 듯하다. 원작 팬과 영화 관객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곳곳에 드러나기 때문. 뮤지컬 넘버를 줄이지 않는 대신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눴고, 뮤지컬보다는 판타지 장르를 강조하면서 일반 관객에게 어필했다. 이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2부를 기대케 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위키드>는 목적을 충분히 이뤘다.
청각 대신 시각, 뮤지컬 대신 판타지
<위키드>는 뮤지컬의 1막 내용을 다루며, 그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엘파바가 서쪽 마녀로 거듭나는 'Defying Gravity'다. 문제는 이 노래가 1막 끝에 나온다는 것. 그러다 보니 <위키드>는 뮤지컬 영화인데도 노래만으로 영화 관객을 매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 높은 넘버가 부족하기에 'Dream' 같은 노래로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한 <레미제라블>과 같은 방식을 활용할 여지 자체가 없다.
그래서일까? <나우 유 씨 미> 시리즈 및 <스텝 업> 시리즈 연출 및 제작을 맡았던 존 추 감독은 노래보다는 노래를 보여주는 방식에 힘을 줬다. 특히 판타지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존 추는 <인 더 하이츠>와 같은 작품에서 진하고 다양한 색감, 선명한 영상, 리드미컬한 편집과 같은 특징을 선보였다. 이러한 기교는 불가해한 현상을 신비하고 경이롭게 보여줘야 하는 판타지 장르에 최적화되어 있다.
존 추의 기교는 엘파바와 글린다가 에메랄드 시티를 구경하는 'One Short Day' 시퀀스에서 빛을 발한다. 두 주인공의 시점에서 에메랄드 시티의 거리와 전경을 자유롭게 오가며 비현실적인 장면을 더욱 과장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원형으로 움직이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Dancing Through Life'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나유 유 씨 미 2> 속 카드 마술 시퀀스처럼 등장인물과 카메라의 다채로운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1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Defying Gravity' 시퀀스의 연출을 보면 <위키드>가 뮤지컬의 청각적인 즐거움보다는 판타지 영화의 시각적 쾌감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맨 오브 스틸>처럼 상하 움직임과 속도감을 강조한 엘파바의 활공 장면이 오즈의 화려한 산과 숲을 배경으로 펼쳐질 때, 노래와 가사 자체의 감동도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후벼 파는 판타지
이처럼 뮤지컬보다는 판타지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선택은 스토리와 메시지도 더 명확하게 만든다. <위키드>는 사람이 원래부터 악하게 태어나는지, 아니면 자라면서 악하게 되는지에 관한 오래된 논쟁을 다룬다. 이때 판타지라는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덕분에 차별과 분리주의에 대한 <위크드>의 풍자와 비판은 현실의 숨은 체계와 구조를 부드럽게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위키드>에는 크게 두 종류의 차별이 있다. 피부색과 동물 차별이다. 둘은 얼핏 보기에 다른 유형의 차별 같다. 전자는 사람들의 인식에 기반한 반면, 후자는 동물이 교수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등 정책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 실제로 극 중에서도 엘파바가 동물 차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두 종류의 차별은 별개로 자행된다. 그전까지 엘파바는 다르게 생겼을 뿐, 서쪽 마녀처럼 잔악한 인물로까지는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이 엘파바를 마녀로 규정하며 수배를 내리는 장면을 곱씹어 보면 두 차별은 결국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물 차별과 엘파바 수배 모두 마녀 사냥의 일환이기 때문. 특히 중세 유럽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은 진짜 마녀보다는 주류 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 탄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 집단을 악마화하면서 공동체 질서를 강화하고 결집을 도모하는 전략적인 접근인 셈이다.
즉, <위키드>는 판타지 세상에서 마녀 사냥을 재현하면서 권력의 선택에 따라 누구든 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엘파바는 그저 피부색만 달랐지만, 인간 중심 질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동물보다 더 악한 존재로 공표된다. 이처럼 동물과 엘파바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악인으로 낙인찍고 탄압하는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유대인과 집시를 절멸시키려 한 히틀러를 비롯해 여러 권력자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구조를 넘어서는 개인의 힘
현실의 구조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희망의 끈도 놓치지 않기에 <위키드>가 들려주는 서쪽 마녀 이야기는 더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이 있다. 극 중 글린다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색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소수자를 차별하면서도 그 행동이 차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즉, 그녀는 일반적인 집단, 사회적 다수에 속하는 이들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렇지만 <위키드>는 개인의 양심이 깨어나면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엘파바를 놀리려고 마녀 모자를 선물하면서 파티에 초대한 글린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에워 쌓인 엘파바를 보면서 그녀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며, 엘파바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또 설령 본인은 마법사나 마담 모리블에 못 맞서도, 엘파바에게 망토를 둘러주며 그녀의 비행을 돕는 용기도 보여준다.
마법사의 성에서 추락하던 엘파바가 마침내 날아오르는 순간은 글린다의 응원과 조력 덕분에 단순한 쾌감 이상의 카타르시스로 가득하다. 마치 히틀러와 나치에 대놓고 저항은 못해도 남몰래 유대인을 돕던 사연을 보는 듯하기 때문. 특히 두 여성의 관계가 2부 내용 전개의 핵심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풍성해진 그들의 우정은 <위키드: 파트 2>에 대한 기대를 더욱 돋운다.
여전한 매체의 한계
다만 <위키드>가 뮤지컬과 영화라는 매체의 간극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원작의 구조를 유지하며 판타지 색채를 덧칠한 선택이 영화적 관점에서는 종종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 당장 연결이 어색한 시퀀스가 적지 않다. 2부에서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 사자, 양철인간, 허수아비 등으로 이어지는 중요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맛보기처럼 보여주는 대목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부 전개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장면이지만, 1부의 중심 내용인 엘파바의 성장 서사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세밀한 스토리텔링이 어려운 장르이기에 엘파바와 '닥터 딜라몬드'(피터 딘클리지), 엘파바와 '피예로(조나단 베일리)'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풀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의 서사를 보여주며 복선을 쌓는 과정은 곁가지이자 수박 겉핥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1부와 2부로 나눈 구성의 한계도 숨겨지지 않는다. '기승전결' 중 '승'까지 다루고 있으니 '기'의 단계가 특히 지루해진다. 물론 다양한 시도로 한계를 극복하려고는 한다. 엘파바의 학교 생활, 엘파바와 글린다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묘사할 때는 <해리포터> 같은 마법학교 배경의 판타지처럼 주인공들의 에피소드를 여럿 풀어놓는다. 여기에 노래가 더해지다 보니 마치 <하이스쿨 뮤지컬> 같은 분위기도 조성된다.
하지만 엘파바가 겪을 차별 대우나 사건이 예상 가능한 지라, 원작 넘버를 다 살리려고 분량을 줄이지 않은 선택은 중반까지의 흐름이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레미제라블>이 '아베쎄의 벗들' 분량을 줄였듯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남는 지점이다. 그 결과 16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절대적으로도 길지만, 체감상 더 길게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는 몇몇 기술적 단점이 눈에 띈다. 80년대 분위기가 나는 오프닝 자막은 <위키드>라는 작품의 위상과 규모에 비하면 성의 없어 보일 정도로 당황스럽다. 또 라이선스 공연의 가사를 참조하며 한국어판 가사에 맞추려 한 것은 알겠으나, 'Popular'나 'Unlimited' 같은 단어를 음역한 자막은 영화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듯 느껴진다. '뮤지컬'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라는 관점에서 가사를 번역하면 어땠을까 싶다.
Acceptable 무난함
판타지로써 뮤지컬 영화의 장단점을 기묘하게 상쇄시키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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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단을 지연하여 도달하는 곳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는 서사를 부분적으로 감추거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서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인물에게 실어나르는 감정에 주목한다. 일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청년이 소년에게 숨겨져 있던 성 정체성을 끌어올리는 동안, 소년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은커녕 그들의 사이를 관조하거나 응원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청년에게 시선을 할애하지 않아, 관객에게 성 정체성에 의해 고민하고 지연되는 갈등보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이는 궤도를 동행하게 만든다. 성 정체성을 다루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에 더 깊게 몰두하는 것을 두고,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롬니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빛나고 완벽해서, 이건 인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장영엽, 「씨네21」 2018-03-21 재인용)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런 비판에도 구아다니노는 자신의 영화적 관심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왓챠를 통해 독점 공개된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2020)에서는 한술 더 떠 ‘다름’을 평범하게 제시하며 ‘구분’ 자체를 흐리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소년 프레이져(잭 딜런 그레이저)가 군인인 두 엄마를 따라 이탈리아에 있는 미군 주둔지로 오면서 시작한다. 프레이져는 손톱에 색을 칠하고, 미성년자임에도 맥주를 손에 쥐고, 지휘관의 아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주둔지를 활보한다. 그런데 두 엄마는 프레이저의 기행을 오히려 비범하다고 여기고, 특히 친모인 사라(클로에 세비니)는 미육군 대령이자 부대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아들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프레이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성장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 듯 보이는데, 일례로 생리를 시작한 다른 주인공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시먼)이 탐폰의 사용법을 몰라 혼자 애를 먹는 반면에, 프레이져는 엄마 매기(앨리스 브라가)를 통해 면도하는 법을 배운다. 케이틀린과 그의 가정도 평범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인 아빠, 나이지리아인 엄마, 친부가 따로 있는 이복오빠와 함께 사는 케이틀린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이다. 그는 아빠 포이트리스(스콧 메스쿠디)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서운해하고, ‘하퍼’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주둔지 밖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가 ‘원래 다들 이렇지 않아?’라고 시치미를 떼듯 어딘가 어색한 인물들을 대수롭지 않게 담아낸다는 것이다. 구아다니노는 전작들에서 그랬듯, <위 아 후 위 아>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두 가정의 사연을 서사의 진행에 필요한 부분만 꺼내 보여준다. 레즈비언인 매기와 사라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 프레이져의 친부에 대한 정보, 그가 왜 임신한 사라와 헤어졌는지도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케이틀린의 오빠인 대니(스펜스 무어)의 친부 또한 드라마 내부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남편과 이별한 후에 제니(페이스 알라비)가 어떻게 미군 포이트리스의 만나게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서사 바깥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극 안으로 가져오지 않아, 인물들의 특별한 사연이 극적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드라마가 ‘다름’과 ‘구분’에 관해 말을 아끼는 동안,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도 두 아이가 서로를 지탱하며 큰 문제 없이 유려하게 흐른다. 그러다 6화에서 포이트리스가 두 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직접 학교 앞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인서트씬이 막간처럼 틈입한다.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심지어 두 아이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유쾌한 운동감이 있지만 서사와는 큰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이 씬은 레오 까락스의 영화 <홀리모터스>(2012)에서 드니 라방이 성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과 닮아있다. 영화비평가 허문영은 <홀리모터스>의 이 장면을 두고 “이 장면에 넋을 잃게 되는 이유는 연주와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위치에 있다. 비루하고 잔혹하며 고단한 가면 놀이의 틈에서 우리를 향해 이처럼 벼락같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음악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허문영, 「진실은 막간에 있다」)라고 평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이 가진 장력은 배치에 있다는 것이다. <위 아 후 위 아>의 유사한 장면도 구분이 개입하는 순간을 정확히 짚어내어 위치한다. 이 장면은 프레이져 때문에 케이틀린이 어긋나고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포이트리스가 물리적으로 두 아이를 가로막는 순간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다름과 올바름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인물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는 작위적인 장면의 의도적 배치를 통해 다름에 관한 판단을 영리한 방법으로 지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드라마 중간중간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트럼프와 관계있어 보인다. 드라마는 트럼프의 당선 소식(6화 결말)을 기점으로 앞선 회차들을 전복시키며 지연했던 판단을 하나둘 건져낸다. 크레이그(코리 나이트)의 죽음 이후 학생들은 토론을 벌이며 상대의 의견을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프레이져의 솔직함은 눈치 없음으로 바뀐다. 또한, 흠모하던 조나단(톰 메르시에)의 집을 방문한 프레이져는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조나단의 여자친구와 조나단 사이에 서게 되는데, 갑자기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두 엄마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와 조화 확인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들과는 다른 성적 지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 프레이져는 집으로 돌아가 두 엄마에게 이제껏 찾은 적 없던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4화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아무런 제약이 없던 러시아인의 저택에도 일탈이 주는 해방감과 역동성이 거둬진다. 술과 마약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대니와 아이들은 물건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일탈이 비행으로 바뀌면서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어른인 매기와 사라가 찾아오게 된다.
특히 크레이그의 죽음에 대한 사라의 태도가 눈에 띈다. 사라는 모니터에 비친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여기 군인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며 나체를 드러내고, 추모식에선 ‘평화를 위한 대가’라며 그들의 죽음을 군인으로서 숭고한 희생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미국을 위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며, 드라마 내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던 포이트리스가 미군들이 이탈리아 피자 가게 파손시킨 사건을 “미국을 모욕했겠죠”라며 미국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이 장면에서도 트럼프 관련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즉 7화에선 이전 회차까지 선명한 구분이 없던 성 역할, 어른/아이, 군인/민간인, 미국/타국이 하나로 모이거나 둘로 나뉘며 그 경계가 선명해지는데, 이 갈등 양상은 트럼프 시대가 가져온 분리 정책과 미국 사회의 분열과 겹쳐진다. 드라마가 6회까지 미뤄뒀던 갈등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 7화에 일순 화면 위로 길어 올린다고 본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한 목적은 트럼프 시대의 사회 분열을 겨냥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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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를 가족으로 꾸릴 때, 그런 나도 결국 누군가의 가족이었음을.
지나고 보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말. 너무도 많이 들어본 거 같아 좀처럼 듣기도 싫고, 잔소리로만 느껴지던 그 말들이 어쩌면 그 횟수만큼 중요했기에 반복되었음을 왜 난 미처 알지 못했을까. 결국 닥쳐야만 깨닫는 못난 자신이 밉고 싫어진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집 가(家)자에 족 족(族)자로 이루어진 말로, 한 집에 모여 사는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의 집에서 무리를 이루며 짓는 사람들. 세상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되어주려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소홀해지고 무뚝뚝해지는게 가족이라는 사실을 스크린 속 비춰지는 허상의 가족을 보며 깨닫는다. 결국 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그리고 나에게 말 한 마디라도 더 걸고 싶었으나 차마 당신도 받아본 적이 없어 결국 손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누구나 경험했을 평범한 가족의 독특하지 않은 순간을 비범하게 다루어낸 걸작이다. 나약하고도 위태로워보이는 가족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고, 겉으로는 연약해보이기만 한 영화의 모든 씬들이 결국 스크린 속에서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나를 발견한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로케이션 헌팅에 '집' 만큼이나 고심을 기울인 곳은 계단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시작되고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토시코'와 첫째 딸 '지나미'를 뒤로한 채 산책을 떠난 할아버지 '쿄헤이'는 계단의 아래로 향해갔다. 계단 그리고 육교의 밑으로만 내려가던 그는 저멀리 바다를 보게 되고 금세 자리를 뜨고야 만다.
영화는 아래로만 향하는 쿄헤이를 촬영하는 데에 있어 익스트림 롱쇼트로 담았는데, 그 결과 쿄헤이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연약함을 눈치챌 수 있게 한다. 더군다나 그가 일본의 한 시골 동네 의료원을 운영하다 이제는 그만둔 전직 의사라는 점은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인상깊은 점은 본 장면과 닮아있는 나머지 씬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계단을 둘째 아들인 '료타'와 손자인 '아츠시'와 내려가던 장면 속 느릿하게 걷던 지난 씬들과는 달리 가족의 보폭에 맞추려 힘겹게 디디는 노인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난 후라면 그것이 그만의 사랑법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영화의 종반부, 1박2일 동안 함께했던 료타 내외를 바래다주고, 쓸쓸히 집으로 항하던 쿄헤이와 할머니 '토시코'의 뒷모습에서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 축 쳐진 어깨와 등을 볼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들던 찰나, 뒤따라 나오는 료타의 보이스 오버는 그렇게 두 노인이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화면은 잠시 어두워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카메라 각도는 교과서대로 각 인물들을 객관적이고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그 효과는 책 속 이야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게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괴물> 등의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의 선조격인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그의 이러한 다큐멘터리적이면서 실험적인 카메라 앵글의 첫단추였을지 모른다.
영화는 어린 소년을 구하려다 결국 자신이 바다에 빠져 익사하게 된 장남의 기일에 맞춰 모두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가족의 모습이 비단 명절 겸 오랜만에 모인 여느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료타의 가정은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린 '유시코'와 료타 그리고 아들 아츠시로 이루어졌지만 영화는 본 요소를 영화의 반전이나 플롯의 핵심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가족의 특이사항 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특별하고 혹은 특별하게 연출해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 방법이 있는 반면, 너무도 평범히지만 그 속에서의 변주와 공감을 통해 관객을 이끄는 방법이 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후자의 속하며, 그 변주는 배우의 열연과 이를 지탱해주는 각본에 있다.
영화의 모든 순간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비범했지만 특히 뜨개질을 하던 토시코와 료타가 나눈 장면 속 토시코의 연기는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장남인 '준페이'는 물 속에 빠진 어린 '유시오'를 구하려다 그만 소년을 살리고 자신이 사망케 된다. 사고 이후 매년 준페이의 기일이 되면 토시코는 유시오를 불렀고, 그런 유시오가 고통스러워 보였던 료타는 그만 부르자고 말한다. 하지만 토시코는 유시오가 고통스럽길 원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라 웃으며 대답하고 다시 정색하며 숨을 한번 삼킨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떠나보낸 아들에 대해 차마 원망할 없어 그 대신 살아남은 이에게 고통을 함께 느껴보라며 부르던 그녀의 표정 속에서 안타깝게도 통쾌함을 찾을 수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 분명 잘못되었음을 알면서 차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터져나오는 양심의 숨을 토시코는 힘겹게 삼켜낸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고함도, 괴성도 없이 고통스러움과 애절함, 비통함을 표현해낸 이 장면은 경이롭다.
토시코의 연기만큼이나 할아버지인 쿄헤이의 연기 또한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있고, 그런 가족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으나 해본 적이 없어 방에 혼자 있던 쿄헤이는 딸이 오는 듯하자 급하게 두리번댔다. 이제 남은 아들이라고는 하나 뿐인 료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싶으나 결국 그에게 가장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고른 쿄헤이에게서 가부장적이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사랑하는 법을 몰라 그저 서툴렀던 우리의 아버지들을 보는 듯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었던 장남을 잃은 바다를 가지 못해 지켜만 보다 돌아선 것은 아버지의 슬픔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손자가 바다로 가자고 하자 아들과 함께 바다를 보러갔던 것 또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후 료타 내외가 떠나자 다음 명절에나 볼 수 있겠지 하며 아들 부담스러우니 다음부터 손을 잡지 말라는 둥 핀잔을 주던 말은 아버지의 그리움이었다. 쿄헤이는 말수가 적은 인물로 작중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쿄헤이의 연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빛, 한 번의 행동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추측하건대 영화관 속 작품을 관람하던 모든 관객들은아마도 료타의 모습을 보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저러면 안 되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되돌아보며 부끄러움 내지는 반성을 느꼈을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향해 집을 나갔지만 결국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게 되고 차마 그런 모습을 부모 앞에 보일 수 없어 거짓말하던 료타의 모습 속 우리가 보인다. 인상적에이게도 료타는 그토록 싫어하고 어렵던 부모의 모습, 특히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별 말 않다 터뜨려버린 고함과 손짓의 모습은 당신의 모습이요, 공유하는 추억이 많지 않아 운동 이야기만 줄곧 늘어놓는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불어 호랑나비를 보며 아츠시에게 호랑나비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는 료타의 모습은 이전 장면 속 어머니와의 대화 장면을 오버랩된다.
작품 속 료타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있다. 죽음으로 인해 가족이 모인 자리에 죽음으로 인해 결성된 가정이 찾아온다. 역설적이다. 친아들이 아닌 아들에게는 쩔쩔매며 이름조차 '료짱'이라 불리는 것을 넘기지만 친아버지에게는 한 없이 방어적이다. 역설적이다. 의사가 되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결국 미술을 하겠다며 집을 나간 료타는 미술품을 복원하는 나름의 '의사'가 되어있다. 역설적이다. 영화는 쿄헤이와 토시코의 모습에서 부모의 감정, 가족으로서의 연민을 느끼게 한다면 료타를 통해서 가족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풀어내는 듯하다.
아츠시는 영화의 초반부 죽은 토끼를 보며 토끼를 쓰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웃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사망한 이에게 편지를 써봤자 어차피 모를 것이라며 대답한다. 그런 아츠시가 시골 생활을 마치며 자기는 생부의 직업이었던 피아노 조율사가 될 것이며, 만약 안 된다면 할아버지의 직업이자 새 아버지의 어린 시절 꿈인 의사가 되겠다고 밖에 나가 누군가에게 전하듯 말한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생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결국 아츠시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 즉 영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남은 이들의 가슴 속으로 삶의 흔적이 이전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이 생겨나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장손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가족이 때되면 모일 수 있었으며,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새로운 가정이 생겨날 수 있었다.
영화는 이처럼 가족의 의미, 부모와 자식 간의 미묘한 감정과 틈 그리고 삶과 즉음에 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대단히 유기적으로 담아내 관객을 설득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요란스럽다기 보다 조용하기에 설득하지 않고, 관객을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전혀 저항조차 못한 채 영화의 감동과 여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필자에게 누군가가 전한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필자에게는 아직도 큰 충격이다. 영화는 관점의 예술이기에, 아무리 진실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다루어도 주관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역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배운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는 훌륭한 교본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의 그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나의 경험이란 관점의 결과인데 그렇다면 과연 경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역사를 진실로서 다루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과연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실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각 속 자신의 관점을 찾는 과정이 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영화를 통해 인생과 가족을 배운다. 누군가는 영화로 인생과 가족을 배우는 건 새삼 어리석은 짓이라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라면, 그 중에서 특히 <걸어도 걸어도>라면 그건 어리석은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한 방법일 것이라 확신한다. 인생과 가족에 대해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갈고 닦은 감독의 마스터피스를 관람한다. 그의 작품 속 세상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가족의 연대와 '가족이니까' 넘어가고 무심해지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이에 대한 교본이다.
작품은 죽음을 다루면서 신기하게 단 한번도 눈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의 눈물은 무더운 날씨 묘비에 뿌려지는 물로 대체되었을지 모른다. 영화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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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의미에 대해 되묻다
사실 SF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현실성이 없어서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곤 했었다. 미래를 다루고 첨단을 다루고 있는 와중에도 그 본질적인 주제를 찾으면 지극히 현실적이라지만 이상한 기계들이 있는 저 배경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서 그간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편견을 깨준 작품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시놉시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리플리컨트: 21세기 초 만들어진 복제인간. 인간과 같은 지적 능력과 사고방식 그리고 신체적 조건을 갖춘, 노동력 제공을 위한 인간의 대체품
# 블레이드 러너: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색출해 ‘제거’하는 임무를 가진 특수경찰
*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항상 겨울이더라
이러한 SF영화의 특징은 미래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전제로한 작품이 많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배경이 또 ‘겨울’이다. 날씨 자체가 비가 많이 내리기도 하고 실내 장면에서는 계절감을 딱히 알기 어려운 복장들을 하고 있어서 도대체 계절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는데 역시나 겨울이었다.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배경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지만 이러한 영화 문법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인지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마찬가지구나 싶었지만 계절감을 알 수 없도록 실내에서의 배역들의 복장이라던지 눈 대신 물을 많이 사용한다던지 어느정도 혼란을 줄 수 있는 장치들을 사용해서 그 반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겨울이라는 배경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 외의 부분은 재밌게 봤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작품을 재밌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를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고 관객이 궁금증을 가지게끔 장치들을 배치해서 이 장치가 어떤 의미일가? 관객 나름 생각하게끔 만들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여러 장치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물’이었다. 사방팔방 물이 나온다. 요원 케이가 어딜 이동할 때마다 비가 흩뿌려지고, 리플리컨트들을 제어하는 본부를 감사는 건물 주변에는 댐처럼 물들이 방어하고 있고, 또 리플리컨트를 만들어내는 곳에서는 건물 내부의 조명이라던지 문양들이 꼭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케이가 실비아와 격투를 하는 장면도 바다 속에서 이뤄진다.
처음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때는 왜 저렇게 축축할까? 찝찝하다.. 이런 느낌이었는데 보다보니 모든 요소에 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이건 어떤 의미일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양수’의 개념이 아닐까 하고 결론을 내렸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양수로부터 외부 충격에 보호를 받듯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리플리컨트들을 물로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닐가 하는 나름의 해석을 해보았다.
그래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때 궁금했던 또 하나는 이 영화에 인간은 나오는가?였다.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존재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들만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에 인간은 있는 것인지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써는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확실히 인간이 아닌 블레이드 러너 케이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의 선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를 그의 딸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기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아무리 기계가 인간보다 신체적으로나 능력적으로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오류인줄 알지만 그것을 행하는 인간을 더욱 선망하는 것인가? 통제된 삶이 아니라 그 통제를 벗어나 오류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리플리컨트들을 인간이 아니면 무엇일까?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주지 않고 관객 스스로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품이었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기계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되물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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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때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은 남자의 일대기
7★/10★
영화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자. 헤더 로즈의 인상적인 소설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명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에서 감독에게 제목을 즉흥적 투표로 정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를 포함한 몇몇 사람이 제목을 적어 내고, 그중 투표로 뽑힌 걸 이 영화의 제목으로 하자는 것이다.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죽기 전에 해볼 장난이 몇 개 더 있어요”라고 말한 백남준의 일대기와 예술관에 부합하는 제목 정하기 방식이다. 그러나 백남준의 ‘장난’이 그러했듯, 이 제목은 그저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제목에는 영화가 재현하는 백남준 예술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기도 하다.
1932년에 태어난 백남준은 당시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에서 자라며 예술적 지향의 기틀을 다졌다. 그 퍽퍽했던 시절에 아놀드 쇤베르크의 전위적 음악을 들으며 감명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백남준의 예술은 그가 평생 미워하고 거부했으나 영원히 단절할 수는 없었던, 예술을 하찮게 여긴 아버지의 영향하에서 그 싹을 틔웠다. 한국 전쟁 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58년, 존 케이지의 공연을 보고는 “새로 태어났다”. 음악에 동양적‧우연적 요소를 적극 들여와 클래식 전통을 파괴해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존 케이지의 음악은, 아시아인 예술가를 상상하지 못했던 당시 유럽 예술계를 마주한 백남준에게 어떻게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막힌 응답이 되어주었을 터이다.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객석에 앉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바이올린에 줄을 단 채 반려견인 양 끌고 다니는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서 “자유로워질 용기와 파괴할 용기”를 얻었다.
이후 모든 예술적 권위에 반대하는 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에 참여한 백남준은 TV가 도래할 시대의 핵심 매체가 될 것을 예감했다. 훗날 그를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로 만들어줄 절묘한 통찰이었다. 그에게 TV는 독재적 매체였다. 사람들은 TV에서 송출되는 화면에 수동적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물론 문화연구에 따르면 시청자는 TV의 수동적 대상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TV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달과 같다. 즉,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이에 백남준은 TV를 헤집고 기괴하게 비트는 등 TV의 일방향적 매체성을 뒤집을 예술적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고안했다. TV 방송의 중심지였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리고 비디오가 나왔다. 비디오는 TV와 다르다. 수많은 사회 운동가가 TV 방송에서 다루지 않는 현실을 비디오로 촬영해 알릴 수 있었던 것은 비디오가 TV보다 민주적인 매체였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송국을 소유해 주류가 하지 않는 걸 해야 한다는 백남준의 예술관은 비디오 시대, 나아가 지금의 1인 방송 시대를 한참을 앞서 선취했다.
백남준의 예술은 소재와 방법론 등에서 기존 위계의 맨 밑바닥에 있었다. 당시는 회화, 조각에 밀려 사진조차 예술로 대접받지 못하던 때였기에, TV와 비디오를 예술로 들여온 백남준의 시도는 파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단의 냉대도 자주 받았다. 그의 ‘재능 없음’에 대한 몇몇 평론가의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백남준은 시대를 선취한 모든 예술가의 숙명과도 같은 냉대, 경멸, 저평가를 이겨내고 마침내 점차 널리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력과 예술적 영향력의 극치는 뉴욕과 파리 등에서 다원 생중계된 이른바 ‘인공위성 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영감을 받은 이 방송은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이 시청했고, 한국에서는 새벽에 방영되었음에도 수백만 명이 봤다고 한다. 쇤베르크에서 시작해, 존 케이지를 경유하고, 끝내 그의 시대를 지배한 매체에 대한 통찰로 나아간 백남준은 언제나 예술적 전위, 즉 아방가르드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시대를 겨냥한 그토록 적확한 장난을 평생 멈추지 않은 백남준이 그의 ‘조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한국을 떠난 그가 국제적 명성에 힘입어 다시 고국을 방문한 1984년은 군부 독재의 통치기였다. 백남준이 예술에서 민주주의를 주창했을 뿐 아니라 특권층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었음을 고려했을 때, 그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 동료들에게 얼마간 연락이 없으면 조치를 취해달라 부탁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를 성대히 환영해 ‘국격 상승’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의 작품을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갖는 국가가 나서서 칭송하는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현상이다. 자기 예술에 담긴 반권위주의적, 민주적 요구를 국가가 그저 근사한 트로피로 포장해 전시했을 때 백남준(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환대받는다는 느낌이 평생 고약한 장난에 몰두한 백남준의 예술가 정체성을 완전히 잠식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더불어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던 백남준의 아내 구로다 시게코와의 관계 측면에서, 그의 예술가적 남성성이 어떤 토대에 발 디디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괴짜’, ‘천재’, ‘선구자’들은 거의 언제나 남성의 얼굴을 한다. 같은 재능과 예술 행보를 보인 여성 예술가가 종종 ‘미친년’ 소리 듣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백남준의 혜안과 탁월함에 감탄하면서도, 평생 아이 같은 해맑음으로 그저 예술가일 수 있었던 그의 예술적 토대와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예술계의 젠더 배치가 내내 궁금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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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리지널 <콜> 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으로 혜성처럼 등장하며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전종서 배우.
그 배우는 차기작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콜>에서
박신혜 배우와 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가야하는 책임감 또한 맡게 됐다.
물론 세 번째 작품으로 할리우드 진출작인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으나,
국내 11월 24일 개봉 예정인 <연애 빠진 로맨스>(감독 정가영)가 전종서 배우를 세 번째로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공식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다시 <콜>을 다시 보게됐고, 그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게 됐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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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 서연(박신혜)은 병실에 계신 엄마(김성령)와의 짧은 면회(아버지는 20년전에 돌아가시고, 엄마와의 관계를 좋지 않음이 짐작된다)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 안에서 우연히 낡은 무선전화기를 발견하고,
정체 모를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발신인인 영숙(전종서)은 서연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곤 하는데 ,
결국은 과거의 20년전에 살고 있는 영숙과 20년후 현재의 서연이 같은 집에 살고있음을 깨닫게된다.
처음은 여느 젊은 또래마냥 소소하게 얘기를 나누고, 일상을 보내며 우정을 쌓아가는 듯하다가.
서연의 아버지(박호산)이 20년전에 화재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영숙이 자신이 과거를 바꿈으로써 아버지를 살릴 수 있지 않겠냐며 제안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연은 다시 화목한 일상을 찾는 듯하나 되려 서연의 화목함은
서연과 영숙의 유대감을 깨뜨린 듯 하다.
(서연과 영숙은 그들의 불안이나 불행이 둘 사이를 결속해주는 유대감인듯 하다)
영숙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서연에게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위험한 요청을 하게되고,
급기야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콜>의 Point.
1. 단편(몸값)에서 영화적 인정을 받은 신예감독(이충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
2. 두 여성인 배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스릴러.
(많은 스릴러 영화들은 흔히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으로 설정하지만)/
<콜>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자배우들조차 모두 죽는다
3. 영화적 설정이나 장치의 최소화
4. 서연과 영숙의 캐릭터. 특히 이제껏 국내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숙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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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의 오류가 몇몇 보이는 영화이지만, 스릴러 장르의 세대변화 같은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젊어진 것 같다)
또한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세련되고 스타일리쉬한 한 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느껴진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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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공포증을 증발시킨 곧 역주행을 불러올 실화 영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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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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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웅 주연 필사의 추격 / 코믹 액션 / 범죄 수사극 / 아쉬움이 남는 후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필사의 추격"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엔드크레딧 나오면서 나옵니다. 가장 마지막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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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샌드맨> 공식 예고편
위험한 꿈을 꾸어라. 《샌드맨》의 세계로 들어오라.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곳은 바로 '꿈결', 꿈의 지배자 샌드맨(톰 스터리지)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두려움과 판타지에 숨결을 불어 넣는 곳. 하지만 예기치 않게 붙잡힌 '꿈'이 한 세기 동안 갇혀 지내게 되자, 여러 사건이 잇달아 벌어져 꿈결과 깨어있는 세계 모두가 영원히 바뀌어 버린다.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여러 세계와 시간대를 여행하는 꿈. 그 여정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고, 오랜 친구 및 적과 재회하고, 새로운 우주적 존재와 인간도 만난다. 수많은 팬들의 사랑 속에 유수의 상을 수상한 닐 게이먼의 DC 코믹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샌드맨》. 10개의 장에 걸쳐 꿈의 장대한 모험이 펼쳐지는 가운데, 신화와 어두운 판타지가 여러 캐릭터를 중심으로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스토리를 개발한 원작자 게이먼과 쇼러너 앨런 하인버그,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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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나더 레코드> 티저 예고편
정겨운 서촌 거리를 거닐다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시간 속에서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까지 나누는 진짜 ‘신세경’의 모습을
독보적인 감성의 김종관 감독이 담아내다!
모두가 아는 신세경의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