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2-02 07:42:26
친밀한 타자, 혈육
영화 〈언니 유정〉
“선생님들은 뭐 하셨어요?” 첫 번째 질문은 적확하다. 대학병원 간호사 유정은 동생 기정이 학내에서 미숙아를 출산한 후 유기했다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방문한다. 유정은 선생님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다. 누군가는 모범생인 기정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데 안타까움을 표하고, 누군가는 그저 걱정만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기정이 형사 처벌을 받으면 퇴학 조치하겠다는 것. 간호사인데도 왜 동생의 임신을 알지 못했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이어진다. 이때다. 한동안 침묵하던 유정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 것은. 유정이 동생의 신체적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 책임이 있다면, 그 책임은 마찬가지로 학생을 돌보는 게 일인 선생님들의 것이기도 하다. 유정의 첫 번째 질문은 본연의 책무를 외면한 채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다. 유정이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죄인이라도 되는 양 굽신거리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 장면이 좋았던 이유다.
“너가 그런 게 맞아?”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틀렸다. 유정 역시 이 사건이 힘들다. 기정은 처벌 위기에도 입을 열지 않고, 부모 없이 동생을 양육한 유정의 속은 타들어간다. 무엇보다 유정은 기정이 ‘이런 일’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여긴다. 자기가 아는 동생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정을 마주한 유정은 질문을 쏟아낸다. 네가 그런 게 맞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왜 그런 일을 겪고도 내게 알리지 않았는지……. 그러나 기정의 답은 간결하다. “언니가 생각이 안 났어.”
혈연은 가족 관계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근거로 간주된다. 하지만 서로를 돌보고 북돋는 가족의 절대적 근거일 순 없다. 가족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 관계 호칭에 걸맞은 육체적‧정신적‧감정적 실천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정이 마주한 과제다. 이제 유정은 동생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전에 알던 기정은 없다. 〈언니 유정〉은 당연하게 주어진 혈연 관계를 넘어 유정이 진정한 의미의 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동생 기정을 알아가는 언니 유정의 여정에는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먼저 유정이 담당한 환자와의 관계다. 임신 중독 증세로 입원 중인 환자와의 관계를 통해 유정은 기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동생인지를 되새긴다. 유정의 엄마는 기정을 낳다가 죽었다. 그래서 유정은 기정을 볼 때마다 동생에게서 엄마를 겹쳐 본다. 동생이 엄마를 앗아갔다는 원망은 아니다. 기정은 유정에게 동생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한, 곱절로 소중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기정의 친구인 희진과의 관계다. 희진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희진의 단편적인 말만으로도 유정은 자신이 기정을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유정은 담당 환자를 통해서는 기정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희진을 통해서는 기정의 현재에 다가간다. 누군가는 영화가 꼭꼭 숨겨둔 기정이 사건의 비밀이 밝혀질 때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지 않는다는 데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마지막쯤에야 드러냄으로써 일정 부분 미스터리 장르의 몰입감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기정과의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유정의 의지와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담당 환자, 희진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한 결과 얻은 통찰로 기정이 사건을 해결하고, 자매간 상호적 관계 실천의 토대를 기어이 마련해내는 유정에게서 가깝고도 먼 혈육과의 관계를 돌아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혈육의 모습과 실재 혈육의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 〈언니 유정〉은 어떤 맥락에서는 그 간극을 마주했을 때 '절망'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 절망이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의 현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혈육은 관계의 출발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조건인 것은 아니다. 혈육은 관계의 의지와 실천으로 공들여 유지해야 할 친밀한 타자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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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엽다! 너무나 반가운 둘리의 극장 귀환
- "5월 24일 개봉 예정인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 언론/배급 시사회 및 기자 간담회에 다녀왔습니다.1996년 개봉했던 작품을 한국영상자료원이 정성 들여 4K로 리마스터링했다고 합니다.덕분에 2D 셀 애니메이션의 색감과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한결 깨끗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구현했습니다.둘리, 또치, 도우너, 희동이, 마이콜, 철수와 영희, 그리고 고길동!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극장의 큰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5월은 '가정의 달'이라 쓰고, '어린이의 달'이라고 읽는다. 매년 5월만큼은 집안과 사회의 대소사가 어린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물론 아이가 없는 집은 평온한 자전을 계속할 것이다). 부모, 조부모, 삼촌, 이모 등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충실한 제사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제물을 바친다. 5월의 극장에서는 어린이 관객을 타깃한 애니메이션이 어깨에 힘을 준다. 어른들에겐 선택권이 없다.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풍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지금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 둘리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5월 24일 개봉한다. 이 작품을 극장에서 만나는 건 필자처럼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때부터 <아기공룡 둘리>를 좋아했던 '둘리 세대(현재 나이 30~40대로 추정)'에겐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알 수 없는 둘리 둘리~"라는 주제가 첫 소절만 들어도 가슴속은 온풍기를 틀어 놓은 듯 금세 따뜻해진다. 귀여운 캐릭터들의 코미디 활극을 지켜보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둘리와 친구들이 절대 기죽지 않고 어른인 고길동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모습은 유쾌, 상쾌, 통쾌해서 없던 변비도 사라지게 할 판이다. 둘리가 엄마와 이별하는 장면에서는 성인이 된 이후 쉴 새 없이 보강공사를 한 덕분에 진도 10의 강진에도 끄떡없을 것만 같았던 눈물샘의 둑이 터진다. 4:3의 화면비, 1990년대 셀 애니메이션의 색감과 감성까지 가세해 초강력 노스탤지어 에너지 장을 완성한다.철수와 영희 남매, 조카인 희동이를 양육 중이었던 고길동은 둘리(공룡), 또치(타조), 도우너(깐따삐야 행성에서 온 외계인)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종족과 행성을 넘어선 우주적 포용력을 보여준다. 고길동은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의 최종 보스 '바요킹'과의 대결에서 완벽한 검술을 뽐내며 '소드마스터(swordmaste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영화가 나오기 한참 전에 서울시 쌍문동에 거주하는 고길동이 '가디언 오브 갤럭시' 타이틀 홀더였던 것이다.30~40대 관객들 중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아이와 함께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을 관람할 것 같다. <아기공룡 둘리> TV 애니메이션을 본 적 없는 어린이들이 1996년에 처음 개봉했던 2D 셀 애니메이션 영화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을 재밌게 볼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은 둘리를 비롯한 등장 캐릭터들을 낯설어할 것이고, 매끈한 3D 애니메이션에 더 익숙하다.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도 약 30년 전의 한국이라서 정서적 괴리감 때문에 몰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깜짝 흥행을 할 것 같기도 하다. 유사 이래 모든 아이들이 사랑하는 공룡 캐릭터 '둘리'가 주인공이고, 다른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깜찍하다. 시간여행만으로도 신나는데 우주와 지구를 오가는 모험이 함께 펼쳐진다. 오프닝 시퀀스의 펭귄들은 보는 즉시 '뽀로로'를 연상시킨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끝)* 5월 8일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 언론/배급시사회 및 기자 간담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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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플러스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 추천
지난 11월 12일, 모두가 기다리던 디즈니 플러스가 국내 상륙을 하였습니다.
디즈니, 픽사, 마블, 스타워즈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까지!
그간 OTT 플랫폼에서 접하지 못하였던 작품들이 잔-뜩 모여있는데요.
디즈니 플러스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 같이 보러 가실까요?
D+ 로키(LOKI)
에피소드 총 6부작
영화 <어벤져스> 에서 수송중인 '로키'가 포털을 열고 사라지고, 이후 로키의 행방에 대해서 다룬 작품으로 평행 우주를 다룬 범죄 스릴러입니다. 마블 페이즈 4 드라마 중 유일하게 시즌 2가 확정된 드라마라고 합니다.
D+ 팔콘과 윈터 솔져
(The Falcon and The Winter Soldier)
에피소드 총 6부작
팔콘과 윈터 솔져는 '타노스'의 핑거 스냅 이후 6개월 뒤의 시간을 다룬 작품으로 은퇴를 선언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받은 샘은 책임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박물관에 방패를 기증하게 되는데, 미국 정부가 마음대로 '존 워커' 에게 방패를 주며 일어나는 스파이 버디 액션 물입니다.
D+ 완다 비전 (Wanda Vision)
에피소드 총 9부작
슈퍼히어로 완다와 비전이 마침내 결혼해 웨스트뷰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만 언제부턴가 현재의 삶이 현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며 생기는 이야기입니다.
D+ 만달로리안(The Mandalorian)
시즌 1,2 총 16부작
스타워즈 실사판 스핀오프 드라마 <만달로리안>은 은하 내전이 끝난 후 제국군이 몰락하고 있는 시점을 배경으로 삼아 현상금 사냥꾼 '딘 자렌'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영화 - 액션,모험,판타지 ㅣ132분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텐 링즈'의 힘으로 수세기 동안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온 '웬우'. 샹치는 아버지 웬우 밑에서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가 남긴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웁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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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당 | 도구로 버려지기 싫었던 야당의 복수극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익숙함 속 틀린 그림 찾기
한국 범죄 영화에는 익숙한 그림이 있다. 검사와 경찰은 항상 싸우기 마련이다. 검사의 일방적인 수사 명령에 끌려다니는 경찰은 한탄을 멈추지 않는다. 과거 시점이라면 검사가 경찰의 횡포에 짜증 내는 정반대 상황도 볼 수 있다. 정치인, 검사, 언론인의 회동도 빠지지 않는 광경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고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위해 끌어주는 이 그림은 <내부자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에 유독 핫한 그림도 있다. 마약이다. 버닝썬 게이트 전후로 한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마약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도 대동소이하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마약 투여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재벌 및 유력 정치인 자제와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마약 수사는 부패 사건 수사로 전환되는 식이다. <베테랑>, <더 킹>, <모범택시> 등 많은 작품이 정형화된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야당>도 익숙한 그림으로 가득하다. 정치인, 검사, 언론, 마약 조직의 연계와 부패, 비리를 고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수사기관 간의 갈등, 연예인 가십 등도 빠지지 않고 활용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야당>은 뭔가 다르다. 익숙한 그림 구석구석에 틀린 그림이 숨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사건이 아닌 인물, 특히 같은 듯 다른 두 '야당'이 대조되는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
야당은 마약사범들 중 경찰이나 검찰 등의 수사 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들을 일컫는 은어다. 수사 기관과 범죄 조직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일종의 이중첩자인 셈이다. 자연히 그들의 성격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에게 그들은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기본적으로는 수사를 위한 도구이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하는 한 그들은 도구로써 기능하지 않으니까.
<야당>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수단과 목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야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수는 경찰에게 마약 조직 정보를 주고, 검거에도 참여한다. 경찰은 강수의 조력을 받아 실적을 올리고, 강수는 체포된 마약 사범의 형량 거래에 참여해 수수료를 받아간다. 둘 모두 서로 이익이 맞으니까 협력하는 경찰과 야당은 꼭 악어와 악어새를 보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악어와 악어새의 우정도 보여준다. 과거 마약 판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강수. 관희는 그에게 자신의 야당이 되라고 제안한다. 마약 조직에 잠입해 정보를 알아내면 감형해 주겠다는 것. 강수의 노력 덕분에 마약 조직을 소탕한 관희는 승진 가도를 달리고, 강수는 출소 후에도 야당 일을 하면서 떼돈을 번다. 그렇게 관희의 수단이었던 강수는 그의 목적이 된다. 커플 시계를 나눠 끼는 의형제로 발전할 정도로.
수단과 목적이 전복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야당>은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다. <야당>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전복하면서 예기치 못한 감정적 동요를 선사한다.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 관희와 강수. 그런데 대통령 후보 아들 '조훈'(류경수)이 파티에서 발견된 순간, 그들의 관계는 급반전된다. 관희는 권력을 위해 강수를 내친다. 관희의 목적이 된 줄 알았던 강수는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해서 중독자가 되고, 다리에도 화상을 입은 채 도구로서 버려진다.
또 다른 야당과의 대조를 이루면서 강수의 비참한 처지는 더 강조된다. 상재는 마약 수사 중 입건된 '엄수진'(채원빈)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마약 공급책, 마약 파티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면 풀어주겠다고. 하지만 거래는 수포로 돌아간다. 상재가 쫓던 용의자를 관희와 강수가 가로챈 것. 결국 수진은 마약 사범이 되고, 상재는 검찰과의 갈등으로 인해 소송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상재와 수진의 관계는 강수와 관희와는 달랐다. 관희에게 복수하려는 강수가 도움을 요청하자 상재와 수진은 복수심 외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협력한다. 상재는 수진과의 약속을 못 지켰다는 자책감에, 수진은 죄책감을 못 떨치는 상재에 대한 연민 때문에. 도구로서 만났지만 진정으로 아껴주는 목적이 되어주는 관계성의 변화는 수진에게 역경이 닥쳐도 상재가 끝까지 관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의외의 특별함
그래서 <야당>은 의외로 감정적이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이의 복수, 서로를 지켜주지 못했던 약자들의 연대에 집중한 덕분이다. 그저 주인공 직업이 검사나 경찰이라서 정치권 및 재계와 엮일 뿐이지,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사람을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한탄이 사회적, 정치적 교훈보다 중요하게 전달될 수 있다.
이는 관희와 조훈의 관계와 피해자 세 명이 이루는 대조가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욕으로만 뭉친 관희와 조훈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훈의 마약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지거나 관희가 상재가 강수를 통제하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갈등을 빚기 일쑤다. 이처럼 불협화음이 가득한 관계성 덕분에 배신당하고 버려진 자들의 연대는 더욱 빛날 수 있다.
주인공들의 관계성에 집중한 덕분에 <야당>은 덜 작위적이기도 하다. 정의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형사, 맹목적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검사나 정치인 같은 캐릭터는 없다. 대부분의 인물은 적당히 탐욕스럽고, 정의롭다. 이 양면성 덕분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도 자연스럽다. 관희가 한순간에 강수를 내치는 결단을 내려도, 악연으로 만난 강수와 상재의 관계가 동료로 전환되는 과정도 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실화를 패러디하는 연출도 연장선상에 있어서 자연스럽다. 사회 비판을 위해 실화 사건을 어설프게 풍자하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은 답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전을 주는 장치로써 평연하게 활용한다. 강수는 '우병우 황제 조사 논란'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관희에게 복수한다. 정치 권력과 검찰 권력의 유착 관계를 폭로하는 이 장면은 예측과는 달라서 유효한 반전이고, 그렇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풍자라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관성을 뛰어넘는 재미
다만 <야당>은 한계도 명확하다. 관성적이라는 인상은 떨쳐내지 못했다. 캐릭터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수진은 더 입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다른 범죄 영화에서 단순히 마약 범죄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 연예인 역할 이상의 존재감을 뽐낸다.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려고 직접 움직이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런데 <야당>은 그녀를 다른 캐릭터를 각성시키기 위한 장치로만 소비하고 말았다.
야당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 구조적 측면을 깊이 건드리지 않은 선택 또한 한계로 볼 수 있다. <야당>은 관희와 조훈의 최후만 보여준다. 그들과 결탁한 다른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눈에 보이는 바퀴벌레만 잡을 뿐, 근원적인 문제까지는 굳이 건들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야당>의 사회 비판은 자칫 얄팍한 인상 비평처럼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지만 <야당>은 여전히 거절하기 힘든 영화다. 익숙한 그림을 차별화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는 잘 끓인 김치찌개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기시감이 짙더라도 먹다 보면 의외의 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마약 사건의 자극성이나 사회비판적 메시지에 경도되지 않은 채 소재의 특성에만 집중한 스토리텔링이 되짚을수록 영리하고,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익숙한 프레임에서 틀린 그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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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할 수 있는 기만, 대체할 수 없는 마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넬리는 친구 레네와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그렇게 가고 싶던 고향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고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거쳐야만 했다. 고통으로 점철된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시대의 참혹함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돌아온 고향은 모든 것이 파괴된 모습이었고 고통스러운 사실이 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실에도 유일하게 자신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피투성이였던 넬리는 얼굴 재건을 위해 성형수술을 해야 했고 이전과는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달라진 얼굴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 남편 조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고 ‘피닉스’에서 만난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슬픈 사실에도 쉽게 슬픔을 드러낼 수 없는 넬리에게 조니는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와이프 넬리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고 넬리는 그를 수락한다. 넬리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던 추억은 조니 에게 있어서 바래진 추억일 뿐이었을까. 웃지 못할 연극이 계속되면서 애써 외면해왔던 현재의 모습에 파고들면서 끝을 보이고 있었다.
끝없이 바닥 치는 내면의 마음이 과거의 따뜻한 사랑을 되찾기엔 왜곡된 진실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의술로도 원상태로 돌릴 수 없었던 겉모습과 마음이 남기는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으면서 고통과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그와 함께하면서 시작된 기만을 비롯한 연극이 비극의 끝을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 자리로 자신을 옮겨 온다. 복수보다 무서운 용서가 마지막을 맴돌며 온몸에 전율이 피어오른다. 당연하게 여겨진 것을 잃어가며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당연하게 여겨 어쩌면 외면했던 것들의 다른 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하는 역사의 왜곡은 개인의 왜곡으로 이어져 예견된 비극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습을 감추고, 눈을 감을 텐가.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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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
1.
<인셉션>(2010)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세계 속 시간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도구인 시간을 스크린 위로 불러내서, 영상 언어로서의 시간을 구축한다. 각각의 꿈속에선 단계별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편집 기법을 통해 시각화된다. <미행>(1998), <메멘토>(2000)에서 시작한 ‘플롯 게임’을 지탱하는 내러티브적 시간의 혼재된 배열이 <인셉션>에서는 다른 형태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대놓고 시간 흐름의 상대성을 논하는 <인터스텔라>(2014)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셉션>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이라는 관념을 향한 놀란의 집착이 후속작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2017)의 시간은 <메멘토>와도, <인셉션>과도 다르다. 이 영화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어선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어긋나는 세 시공간대를 과감하게 교차한다. 그간 놀란이 구상해 온 비선형적 플롯 구조 가운데 <덩케르크>만큼이나 비정형적인 사례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한 <메멘토>의 플롯조차도 컬러의 역순행과 흑백의 순행이 섞이는 최소한의 규칙을 전제로 하지만, <덩케르크>는 플롯을 연결하는 관습적인 규칙마저도 최대한 느슨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덩케르크>의 시간은 <인셉션>처럼 시각화된 물리량 변환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정의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물리적 길이가 다른 세 시간대를 교차하는데, 교차된 장면들 총합의 길이가 장편 영화 포맷의 러닝타임에 부합해야 하므로, 잔교의 일주일보다 민간 어선의 하루가, 어선의 하루보다 전투기의 한 시간이 영화상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편집될 수밖에 없다. 즉, 시간대 구간이 짧을수록 각 쇼트마다 더 많은 지속 시간을 할당받는다. 다시 말해 상대적 길이에 따라 재배치된 시간이 필름에 새겨진다. <덩케르크>는 수용자의 관습적인 지각 체계가 작동하기 힘든 영화이다. 관객은 마침내 편집을 통해 재구성한 비선형적 시간 개념을 인식한다. 몽타주로 피어나는 도상적인 운동감과 이미지 간의 리듬을 유도하는 새로운 시간적 개념 또한 동시에 정의된다.
<덩케르크>에서 정의된 영화적 시간은 그간 펼쳐왔던 놀란의 시간 게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테넷>(2020)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테넷>의 시간 여행은 다른 영화에서 표현됐던 시간 이동에 관한 무의미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1985) 등이 불연속적 시간 이동을 서사적으로 활용한다면, <테넷>은 시간의 역전이 형상화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에 쓰인 단순한 되감기 기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놀란은 역방향 촬영과 더불어 배우들을 거꾸로 연기하도록 디렉팅했다. <메멘토>에선 되감기 기술을 활용했던 놀란은 이번에는 촬영된 영상을 되감을 뿐 아니라, 피사체(주로 인물)가 직접 거꾸로 행동해서 시간의 역행을 재현하는 장면을 많이 동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재정의된 시간처럼 <테넷>도 관습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시간 순행과 역행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정의하려는 많은 작품이 있지만, 감각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 관계를 시각화하는 <테넷>의 실험만큼이나 생경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놀란 본인이 단편 <두들버그>(1997)에서 각기 다른 시간 선후 관계에 놓인 세 명의 남자(the man)를 동일한 공간에 중첩해서 표현한 점은 <테넷>의 전조로 볼 수 있지만, <테넷>은 분명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양상을 띤다.
'테넷'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2.
문제는 놀란 영화에서 포착되는 시간의 변주나 재정의가 목표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해온 놀란의 세계는 매번 부산스럽게 규모를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세계의 매혹적인 표층을 걷어내면, 근간에서 발견되는 건 지적 유희를 향한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뿐이다. 이토록 편집증적인 면모로 시간 재구성에 관한 영화를 생산하는 연출자가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놀란이 기획한 영화적 시간의 특징적 표지를 읽어내는 순간에 촉발되는 매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영화가 머금은 지적 유희를 탐닉하려는 수용자의 몸부림이야말로 놀란 영화가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가 형식을 통한 영상적 구현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례라면,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몇몇 영화들은 놀란의 다소 피상적인 결과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다. <보이후드>(2014)는 기술 자본을 등에 업고 욕망을 구현하는 놀란의 영화에서 절대 성취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를 12년 동안 연출했다. <보이후드>의 인물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은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삶의 순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실 태생적으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두기도 하고 확장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매체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의 기획은 현실과 영화의 시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재현 수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역시 주연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노화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시간성이 필름에 각인된 사례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적 시간은 곧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작가의 견해처럼 보인다.
영화적 시간을 사유하는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간성을 탐구하고 있다면, 펫졸드의 <트랜짓>(2018)은 과거와 현재를 중첩하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에 구속된 시간 논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펫졸드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역사의 흔적을 응시한다. <트랜짓>은 시공간성의 해체가 현대 사회에 산재한 이슈(난민 문제 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사유하는 작업이다. 펫졸드의 사유는 시간의 재구성을 넘어, 시공간성이 반영된 역사에 관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물론 <덩케르크>의 시간은 전쟁 현장에서 생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관객이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성의 무화를 유도하는 <트랜짓>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테넷>에서의 과시적 유희는 그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인셉션>은 <트랜짓>에 비해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가 매력적으로 구축된 작품이지만, 그 형식적인 틀이 <트랜짓>의 사례처럼 사회 문제나 현실 요소와 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3.
한편 형식적인 관점에서 왕가위의 시간과 놀란의 시간을 비교해보는 시도는 흥미로운 논점을 생산할 수 있다. 왕가위의 영화는 시공간을 필름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왕가위는 <중경상림>(1994), <타락천사>(1995) 등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형식의 층위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왕가위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의 공허함,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는 데에도 탁월한 센스를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주로 어긋나는 관계와 실패하는 사랑의 순간들, 공간을 맴돌거나 홀연히 떠나는 인물들, 기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왕가위가 주로 천착하는 소재들은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왕가위의 영화는 형식을 통해 작가적인 관점을 구현하려는 좋은 사례처럼 보이지만,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왕가위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지만, 놀란은 시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영화들도 유의미한 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는 <1917>(2019)의 의도된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영화적 시간을 현실로 전이시켜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7>의 기술적 성취만으로 서사 화법의 지위를 대체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놀란의 영화가 갖는 한계점과 유사하게, 채택된 기술의 당위성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 되감기의 변주 등을 동원한 <테넷>의 시간 역행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형식적 산물이지만, 그 목적성을 따지기 시작할 때 영화는 급격히 동력을 잃는다. 서사적 측면에서 되감기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한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은 <테넷>이 놓친 요소들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작품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와 다르게 <테넷>에서는 작품 내적 요소 간의 호응보다는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상화한 감독 자신의 가공된 욕망과 자의식만이 느껴진다.
4.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영화적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카메라로 시공간을 담아내는 영화예술의 태생적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분석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놀란의 작품들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구체화된 그의 욕망은 <덩케르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어냈지만, <테넷>에서는 기존의 매력마저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덩케르크>의 비선형적 시간 개념은 형식을 조작해서 관객의 지각 체계에 균열을 가한 뒤, 역사의 흔적과 영화와 현실을 매개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담론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테넷>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전제한 채 다시 한번 조작된 시간을 들이밀지만, 어쩐지 표층에만 머무른 채 심도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진 않는다.
놀란을 향한 상당수의 지적은 생각보다 가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놀란은 현대 영화 산업의 첨단에서 독특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거칠게 말하면 포스트-스필버그처럼 보이는 보기 드문 유형의 창작자이다. 그에겐 16mm 필름 대신 아이맥스 필름이 있고, 열악한 로케이션 현장 대신 특별 제작된 회전 세트나 폭발해도 상관없는 비행기가 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본주의적 연출가 놀란에겐 고삐 풀린 창작욕의 구현과 대중성 기반의 안정적 수익 구조의 창출이 모두 요구된다. 놀란이 영화 산업의 자본 논리에 종속된 이상, 자의식 과잉과 상업성 확보 사이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한다. <덩케르크>는 장르적 서사 코드를 마냥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메멘토> 이후 정체된 듯 보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재입증한 사례였지만, <테넷>의 실험이 만들어낸 산물은 영화사와 감독, 대중과 평단 사이의 다층적인 이해관계에 반영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놀란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간은 과연 <테넷> 이후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가 시간 실험을 지속할지 집착하던 소재에서 손을 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천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리는 일이다.
'인셉션'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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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 위쇼의 방
-벤 위쇼(Ben Whishaw) 배우론
* 언급하는 작품들의 핵심 전개 포함
* 2022년 5월에 완성한 글입니다.
벤 위쇼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세계’와 화합하지 못했다. <향수>(2006)나 <아임 낫 데어>(2007)의 ‘반사회적 예술가’(오정연, 2008.05.29. [씨네21])에서 시작해, <할로우 크라운>(2012)에선 한 나라의 ‘주인’이 돼서도 예정된 실패를 맞이하고 눈물을 흘렸다. <크리미널 저스티스>(2008)와 <런던 스파이>(2015)에선 ‘로맨스에 휘말려’ 누명을 쓴 청년, <브라이트 스타>(2009)에선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요절한 시인 존 키츠였다. 이는 인물의 소수자성과 연결되기도 했는데-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2008)의 세바스찬은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정체성을 부정 당하다 알코올에 중독됐고,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속 로버트 역시 남성에게 끌린다는 까닭으로 협박 당했으며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노만의 사랑과 존재는 불법이었다.
허면 무대 위 벤 위쇼는 늘상 보편에 속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대상이었는가? 그의 연기를 목격했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테다. 앞서 부러 표면적으로 요약했으나, 그의 주인공들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에 맞서며 중심을 지켜냈다. 몹시도 흔들리며 괴로워하더라도, 여린 눈빛과 신체가 파헤쳐진 밑바닥엔 항상 꺾이지 않는 ‘곤조’가 있었다. 그게 사랑이건 정의건 예술이건, 넘어져도 놓지 않고 ‘세계’에 저항함으로써 주제를 관통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배우가 지은 독특한 감정의 집과 만나 탄생한 캐릭터성이었는데 -벤 위쇼의 인물들에겐 ‘벤 위쇼’가 가득했다.
연기법에 메소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는 지났고, 그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배우들도 있으나, 여전히 메소드는 ‘serious acting’의 가장 추앙받는 방법론이다. 다만 현대에는 오프라인 GV나 인터뷰는 물론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관객이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크린 밖의 배우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미디어는 대중이 배우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을 전제로 ‘그가 자신과 아주 다른 이 인물이 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노력했는가’를 화제로 삼는다. 한편으로는 ‘배우 본인’의 모습만으로 팬덤이 형성되기도 하고, 어떤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공개하고 닮은 역할을 맡음으로써 스크린에 자리 잡았다.
벤 위쇼의 케이스는 조금 특이하다. 스크린 밖의 모습은 공개하기를 꺼리면서 연기에는 그 자신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 개인을 알지 못함에도 관객은 (이상하게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 언급했듯 인물의 특징에 유사성이 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게 다는 아니다. 그는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성, 포지션을 막론하고 스크린 속에서 ‘자신’이 되곤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인물(:타인)이 되고 관객에 닿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기능적 조연일 때조차 어느 정도- 벤 위쇼는 화면에 마련한 제 방에서 주변 인물이나 서사와 소통하며 재빠르게 제자리를 찾았고, 영화/TV시리즈/연극 등 다양한 무대에서 그 범위를 넓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신체보다는 두뇌/‘심장’에 재능이 있는 자가 되었던 벤 위쇼는, 오히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그 예리함을 입는다. 눈을 굴리는 건 남들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내면의 고민이나 불안, 혹은 오감으로 흡수되는 다량의 정보나 빠른 머리 회전 때문이다. 고개나 손목을 꺾는 것은 특정 이미지를 내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감각이 신체에 묻어 절로 그리 된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느끼느라 외부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 모두가 저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임 낫 데어>(2007)
‘세계’와 불화하며 비범하게 존재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비정상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 앞 문장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향수> 속 벤 위쇼의 그루누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행동의 폭력성과는 별개로 스크린 속 그의 몸짓은 오히려 남성/여성을 초월한 기이하고 불온한 선지자의 그것에 가깝다. 단편 <더 뮤즈>(2014), 뮤즈에게 집착하다 결국 익사하는 남자의 변태적 우울에도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은, 그 ‘괴상한 욕망’이 벤 위쇼의 피부에 안착함으로써 ‘어느 정도’ ‘시대와 불화한 비범한 예술’의 정서를 입는 까닭이다.
<아임 낫 데어>,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 ‘시인’.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카메라를 향하는 그의 눈빛도 불온하다. 언뜻 ‘메인 롤’은 케이트 블란쳇의 ‘록스타’나 히스 레저의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의 ‘무법자’ 등 비중과 활동성이 높은 자들의 몫인 듯하지만, 흑백 화면에서 한 공간에 머무르며 말을 이을 뿐인 ‘시인’이야말로 가장 자유롭다. 그의 뾰족한 신체는 플롯들 사이의 중심을 잡고, 대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관통한다. 유사하게,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로버트 프로비셔의 편지는 정교하게 뒤섞이는 서사의 기준을 잡고, 곡은 화면을 아우른다. <브라이트 스타>, 존 키츠의 운명이자 고통인 시 또한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작품 전체에 흐른다.
존 키츠는 화면에 잡히지 않은 채 타인의 언어를 통해 등장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집구석에 박혀 있는’, ‘요새 슬픈 생각을 많이 하는’ 따위의 말이 불러일으킨 예상을 깨며- 세상 맑은 얼굴로 평가를 백지화했다. ‘날 똑바로 보라’고 요구하듯 첫인상을 남겼다. 병이 목숨을 앗아가기 전 이미 연인과 작별의 밤을 보내며 차분히 죽음을 예견했다. 어느 정도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기더라도 사랑과 예술에 대한 확신만은 뚜렷한 채였다. 로버트 역시 스스로 마지막을 만든다. 유서 격의 편지와 함께 등장하기에 관객은 자연히 그가 삶을 ‘포기’하게 된 과정을 궁금해하게 되는데, 이 자살은 사실 ‘포기하지 않음’에 가깝다. 세상이 정한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기에 무시당하고 협박당하지만, 제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 죽어가는 영혼을 곡에 담는 모습에는 절망이나 파멸의 정서가 없다. 초월적 아름다움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자, 자신을 짓누르는 세계에 순응하느니 존엄하게 사라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가 편지에 적은 대로. (“진실된 자살은 세심한 준비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야.”, “더 나은 세상이 있다고 믿어, 먼저 가 있을게.”)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세바스찬은 가난한 예술가가 아닌 귀족가 도련님이었으나, 세상에 ‘fit in’ 되지 못했다. ‘남색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관람되며’ 처음 등장하는데, 그 역시 편견에 빼앗긴 첫인상을 제 언어로 재정립한다. 꽃다발과 편지, 이어 테디 베어와 행복에 대한 의심으로. 가족과 자신을 단호하게 분리하며 이방인을 자처하는 세바스찬의- 텅 빈 저택을 휘감는 위화감은, 미묘하게 구르는 벤 위쇼의 눈동자로 완성된다. 미래의 불행을 확신하고 ‘죄인’이 되어 슬픈 얼굴로 기도하면서도 절대 존재를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Just to fit in.그냥 너한테 맞추려고.”이라던 찰스에게, 그는 “Well, than don’t!그럼 하지 마!”이라고 말했다. 저들의 ‘선의’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망가지고 고립되기를 택했다. 사과하는 찰스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그는 작별의 순간 “Not a word.한 마디도 하지 마.”라고 선을 긋던 존 키츠와 겹친다. 타인의 죄책감이 되거나 ‘구원’되기를 거부하며, 연약하나 평온한 모습으로 원하는 순간 이별(퇴장)을 선언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침착하게 각도를 맞춰 입에 총구의 자리를 만드는 벤 위쇼의 동작은 분명한 정서를 섬세하게 전달했다. 시대의 룰에 억압당한 그의 인물들은 -병으로 인한 죽음이든, 권총 자살이든, 이민이든- 결국 제 식대로 ‘세계’와 헤어지기를 택하며 고유의 언어로 존재를 정의했다. 이 남다른 자들이 거의 거리감 없이 관객에게 닿았던 것은, ‘두꺼운 피부나 굳건한 심지로 대수롭지 않게 억압을 받아치거나 무시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숨길 요령 없이 최전선에 던져져 끊임없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존재를 지켜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캐릭터 묘사의 일등공신은 절대 벤 위쇼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평범하고 무해한 마스크 속 내면의 힘
단편 <러브 헤이트>(2008) 속 ‘착하지만 수완 없는’ -증오조차 ‘제 hate에게 휘둘려’ 어설프게 표출하며, 욕이 가득한 메일을 쓰며 울먹이거나, 사람을 ‘죽이려’ 나서서도 주먹 한 방에 자빠지고 마는- 톰처럼, 벤 위쇼의 어떤 주인공들은 가장 평범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대개 사람이나 상황에 ‘말려’ 곤경에 처하고 위험에 노출되었는데- 그 ‘순수’는 대다수의 사람이 지닌 것은 아니어서, 관객은 이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고’ ‘구해지기를’ 바라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받는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끝내 스스로를 구한다.
<크리미널 저스티스>, 벤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평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말한다, “Be yourself, Ben.네 모습 그대로 있으면 돼, 벤.” 벤 위쇼의 얼굴은, 작품이 ‘크리미널 저스티스’의 모순과 부정의를 강조하는 제1의 방법이다. 메시지를 분명히 하려면 주인공의 캐릭터성에 물음표가 생겨선 안 되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 속 카세 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그의 ‘무해한’ 인상은 의심의 여지를 효과적으로 지웠다. (‘매력적인 보호자’와 로맨틱한 긴장감을 유지하다 ‘구원’되는 연약한 주인공의 남성형인 듯 하다 그것을 ‘배반’하기도 하는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제스처였음을 전하는 것도 벤 위쇼다.) 후반부 결코 전처럼 해맑지 못한 눈빛은 시스템에 의해 개인의 마음이 조각난 모양을 빚어낸다. 최종적 설득력은 대사나 행동 자체보단, 섬세하고 개인적인, ‘두려움을 내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기에 있었다. 특수한 상황임에도 인물과 같은 것을 겪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몸도 마음도 최대한으로 여린 듯 보이나 숨겨진 내면의 힘으로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들. 연인의 죽음 이후 누명을 쓰고 괴로움과 혼란에 휩싸이지만 진실을 알아내려 애쓰는 <런던 스파이>의 대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노만 스콧 또한 그 맥을 잇는다. 벤과 노만 모두에겐 법정에 서는 장면이 있는데, 강압적인 시선 한가운데 자리한 무방비한(무방비하나 무력하지는 않다.) 이미지가 이미 ‘결백’을 주장한다. 벤 위쇼는 ‘연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모든 자극을 견뎌내며, ‘울음을 계속 참고 있는, 그러다 참지 못하기도 하는’ 모양을 유지한다. 그 터질 듯한 상태 그대로 결국 말들을 당당하게 뱉어내는 모습은, 고통스럽고 벅찰 수밖에.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경우 노만 스콧의 특수한 서사, 복합적인 내면과 매력을 드러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데, 벤 위쇼는 조심스러우나 방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를 수행한다. 노만은 제레미 소프의 서술을 통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 포지션에서 시작하지만, 짐작은 곧 깨진다. 감정과 ‘약점’을 다 드러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 속수무책의 순수. 모델로서 포즈를 취할 때도 어느 정도 수줍고, 협박을 해도 어설프다. 내내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즐겁고 당당하게 세상에 외칠 때, 엉엉 울고 나서도 활짝 웃을 때, 관객은 이것이 ‘노만 스콧의 이야기’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2018)
비범하나 보편적인, 평범하여 특별한.
‘천재’라는 수식에 기자는 어울리는 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 아워>(2011-2012) 프레디의 재능은 절대로 비범하다. 그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없지만, ‘안 예쁜 태도’에 대해서도 모두 입을 모은다. 열변을 토할 때 그의 표정은 ‘관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굳어진다. 프레젠테이션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제 평판보다 진실이 중요해서다. 모두 어느 정도 연기하며 사는 세계에서, 홀로 연기할 생각을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기꺼이 골칫거리가 되는 자. 프레디가 맘에 없는 말을 하는 대상은 벨 하나다. 감정을 덮으려 부러 장난을 걸거나 상대를 깎아내리지만, 아련한 눈빛이 진심을 다 드러낸다-기보단 숨기지 못한다. 외부 압박에 타협하지 않는, 남달리 똑똑하고 위트있는, 그러나 로맨스엔 젬병인- 주인공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프레디 라이언은 유일하고 그 까닭은 벤 위쇼라는 이름으로 설명된다. “He sees extraordinary in ordinary.그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봐요.”(벨 롤리) 프레디가 그렇듯 벤 위쇼도 그렇다.
1화 첫 장면은 대뜸 클로즈업된 벤 위쇼의 얼굴, 거울을 보고 연설문을 읊는 모습이다. 따라서 관객이 보고 있는 상은 프레디 본인의 눈에 비친 것과 동일하다. 이처럼 작품은 자주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 뛰어난 감각이 인식하는 바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 벤 위쇼가 샅샅이 드러내는 보편적인 감정의 떨림 덕이다. 그러고 보면 프레디는 여성을 ‘구하는’ 강하고 멋진 남성이기보단, 루스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늘지거나 잔뜩 얻어맞고 벨에게 발견되는 자다. 인간적인 ‘보통’의 정서를 지님에도 물러서지 않기에 더 ‘보통이 아닌’- 이 위대한 기자의 여정을 그저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이입해 가슴을 졸이며 응원할 수밖에. 비범하면서도 보편적인, 평범하기에 특별한. ‘세계와 불화하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힘을 벤 위쇼는 오롯이 소화해 전했다. 그 컴플렉스complex함을 절대 단순화하는 법 없이.
어떤 인물들: ‘유해한 세계’에 벤 위쇼가 편입되는 법
아르튀르 랭보, 존 키츠, 노만 스콧, 리처드 2세와 최근의 아담 케이까지. ‘실존 인물’에 그를 캐스팅하며 외모의 유사성은 애초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을 테고, 기대한 바도 완벽한 ‘재현’과는 멀었을 것이다. 그가 ‘벤 위쇼 아닌 자’이려면, 애니메이션 곰이 되거나, 판타지적 디스토피아의 무감정이라도 입어야만 했을테니. 그러나 <패딩턴>(2015), 마음껏 정신없이 명랑했다가도 풀이 죽어 무방비하게 처량해지는 벤 위쇼의 정교한 미성이 사고뭉치 패딩턴을 ‘지구상 가장 순수한 생명체’로 만드는데 필수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듯- ‘기능적 조연’들 역시 벤 위쇼를 통함으로 인해 달라진다.
<007> 시리즈나 <제로법칙의 비밀>(2013) 속 ‘박사들’ 외에 그가 맡은 일부 조연들은 어쩐지 의외다. 빈민가 소년, 시인, 기자, 귀족 자제, 심지어는 왕의 모습으로-세계의 법칙이/을 거부하는 자였던 벤 위쇼는, 몇 년 후 여성 주연 작품들에서 ‘유해한 규범을 기꺼이 따르고 재생산하는 남자들’이 되었다.(‘절름발이 남자’는 규칙을 어기지만, 세계에 편입되기 위함이었다.) 맡는 역할의 범위를 넓히며 늘 ‘특정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캐스팅으로 ‘효과’를 본 것은 사실 배우보다는 작품이다. ‘규범’이 현실적인 경우 개인이 아닌 불평등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면, ‘영화적일’ 때는 화면에 미묘한 불쾌감을 부여한다.
<서프러제트>(2015) 속 남성의 유형은 다양하다. 습관적으로 폭력을 즐기는 자, 권력을 쥐고 놓지 않는 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법을 집행하는’ 자, 아내를 지지하는 자- 그들 모두가 ‘악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며, ‘대표적’ 가부장의 마스크를 벤 위쇼가 가져가며 이는 최대한으로 어필된다.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는 ‘착실한 남자’로 등장한 소니는, 모드가 여성 참정권 집회에 나가도 먼발치에서 예민하게 주시하거나 부드러운 말투로 걱정을 내비치는 정도였다. 그 ‘배려’의 정체는 인물의 불안과 함께 밝혀지고, 카메라는 그가 ‘자상한 남편’, 이어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을 노린다. 악의 없이 울먹이며 흔들리는 낯을 잠시 클로즈업함으로써, 이 남자가 그저 평범하고 유약하며 특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가부장임을, 그 무책임한 몰인지가 그의 잘못이며 폭력과 차별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더 랍스터>(2015)는 남다른 이입이 특기인 벤 위쇼에게 언뜻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연기 스타일이 일정함에도, 이곳의 배우들은 의외로 ‘텅 비지’ 않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연출을 거듭할수록 더) 배우의 개성을 지우기보다 ‘세계’의 룰에 맞게 돋보이도록 조율하며, 행동과 정서가 뻔하게 이어지지 않도록 활용해 장면을 ‘흥미롭게’ 만든다. ‘비정한 여자’가 안젤리키 파풀리아의 얼굴을 통해 기본적 우울을 입듯,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절름발이 남자’의 바탕에 있는 불안은 벤 위쇼의-기계적인 톤을 적절히 입고도 예민하게 구르는 눈동자를 통해 드러난다. <리틀 조>(2019), 크리스의 변화를 미묘하고 ‘극적’으로 드러내기에도 그는 가장 적합한 배우였다. 주인공 여성을 사로잡는 매력적 남성의 전형이 아닌, 잔뜩 긴장해 머뭇머뭇 데이트를 신청하는 소심한 연구원. 그 조심스러움, 어색함과 함께 무해함이 사라지고 결국 무감정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크리스가 지닐 기이함을 예시카 하우스너는 벤 위쇼의 실루엣에서 찾았다. ‘변화’ 이후의 폭력성 역시 계산된 각도로 침착하게 주먹을 뻗는 종류의 것으로, 색다른 공포와 불쾌감을 야기한다. 엄격한 디스토피아에 편입되는 남성들, 그 유해함마저 벤 위쇼만의 것이었다. 특정한 ‘악인’이 되려 애쓰지 않고 ‘세계’를 거역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위치를 찾는다.
<리틀 조>(2019)
예민함이라는 재능: 타인의 얼굴로 가장 솔직한 자신이 되다.
단순히 마른 것이 아닌 ‘가녀린’ 실루엣, 쉽게 긴장해버리는 근육. 같은 작품에 출연했던 동세대 잉글랜드 배우들: 톰 히들스턴(<할로우 크라운>)이나 짐 스터지스(<클라우드 아틀라스>), 매튜 구드(<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와 같은 ‘남성 리드’가 되기 어려운 이미지고, 에디 레드메인(<대니쉬 걸>)의 ‘무던함’도 없다. 유사하게 ‘세상과 불화하는 천재’ 타이틀을 유독 많이 달았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뭐든 가능한’ 마스크도 아니어서, 드물게 이성애 로맨스 서사의 주인공이 될 때도 제 1화자나 ‘관계의 리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많은 동료 배우와 평론가, 관객들로부터 ‘동세대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의 핵심은 이 ‘예민함’에 있다. “주변 사람들보다 피부를 한 겹 덜 가지고 있는 것 같은”(트레버 넌),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을 전제하는 천재성,은 ‘축복’이라고 하기엔 망설여짐에도- 그의 예민함은(‘예리함’으로 바꿔 적어서도 안 된다) 절대로 ‘결점’이 아니다.
“세 시간 만에 모든 인생사를 겪고 자살을 결심하는 젊은이”(벤 위쇼, 2004.04.29. [인터뷰: AP Archive]), 비니에 후드티 차림으로 약병과 주머니칼을 꺼내며, ‘사느냐 죽느냐’를 논하-기보다 온몸으로 겪-는 트레버 넌의 ‘뉴 햄릿’은, 벤 위쇼의 운명과도 같았다. 아니, 이 역할의 운명이 그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이 주연 데뷔 퍼포먼스로 그는 수없이 공연되고 인용됐던 대사가, 관념에서 떠도는 대신 관객의 가슴에 내려앉게 하고 말았다. <할로우 크라운>, 리처드 2세의 슬픔이 밴 엷은 미소에는 귀족과 군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분투했던 열 살의 어린 왕마저 비친다. 그는 짓무른 눈가에 자기파괴적 저항과 조롱의 뉘앙스를 드리우고 스스로 ‘폐위’ 씬을 써내려가며 ‘텅 빈 왕관’의 의미를 들이밀었다.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외치며 안경을 든 손을 섬세하게 놀리던 브루투스가 그랬듯, ‘폭정’으로 수식되기도 하는 리처드 2세의 말년 역시, 벤 위쇼와 만나 풍부하고 ‘현대적’이기까지 한 정서를 입었다. 현대의 일반인과는 한참 먼 이 셰익스피어의 남자들이 벤 위쇼와 만나면, 어찌하여 ‘인간’으로 다가와 버리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던 그는, ‘모순적’이게도 스크린을 통해 가장 적나라한 자신이 된다. ‘연기하지 않는’ 이들을 연기하는 벤 위쇼는 그들인 동시에 ‘벤 위쇼’이며, 보고 있는 관객 하나하나다. 그가 불어넣는 개인적 에너지는 작품 전체로 확장되어 관객을 인물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평범과 비범, 특수와 보편을 가리지 않는다. 중세 왕의 대사조차 개인적 감성을 완벽히 드리워 읊어버리고, ‘특별할 것 없는’ 청년일 때도 남달리 고통 받는다. 어떤 전형성조차 저다운 방식으로 수행한다. 배우로서 ‘이점’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특징을- 벤 위쇼는 애써 지우고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타인/인물이 자신의 피부에 착륙하여land on one’s skin 파고들도록 허락한다.
배우가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하면, ‘OOO게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따라붙고, ‘아니라는 부정’이나 커밍아웃에 대한 기대(유명인의 커밍아웃은 퀴어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이고 인식을 향상시킬 가능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여기서 ‘기대’는 그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한 종류의 것이 아닌 단순 가십을 위한 ‘기대’를 일컫는다.)가 뒤따른다. 벤 위쇼 역시 그에 시달렸고 아웃팅outing으로 성 지향성이 대중에 알려졌으나, 이후로도 소수자적 정체성을 ‘공개’하거나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벤 위쇼, 2016.04.03. [인터뷰: The Guardian]) 이미지가 굳어지기를 걱정해 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의’ 배역을 맡지도, 반대로 전략적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대중에 ‘어필’하지도 않았다. “배우들은 어떤 것이든 구현하거나 표현할 수 있고, 그 자신이 무엇인가,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벤 위쇼, 2019 골든 글로브 백스테이지 인터뷰)고 벤 위쇼는 말했다. 그의 인물 중엔 게이도 바이도 스트레이트도 있으며, 이는 표현의 깊이나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스로 ‘양쪽 모두의 에너지에 매료된다’(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고 말하기도 했듯,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전형을 답습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깨트린’다기보다는- 다만 가장 정직한 인간이 된다. 카메라 앞에서 기꺼이 무방비해지는 그 솔직함과 용기 역시 재능이다. <리틀 조>의 서사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가장 ‘리틀 조 행복 바이러스’에 덜 감염된 사람 중 하나일 테다.
아르만도 이안누치식 찰스 디킨스 각색에서 ‘밉상 빌런’ 유리아 힙의 옷을 입기도 했던 그는, <파고>(시즌4, 2020)에서는 총을 겨누고 협박하다가도 “내겐 아내가 있어요.”, “난 아내가 없는데 내가 죽으면 개밥은 누가 줘요.” 따위의 말에 눈가를 떨고 마는 ‘정이 가는 범죄자’ 라비 밀리건의 복잡한 캐릭터성을 한 톤 낮춘 목소리에 드리웠다. 프로듀싱을 겸한 <디스 이즈 고잉 투 허트>(2022)에서는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unlikable’’(벤 위쇼, 2022.01.29. [인터뷰: The Guardian]) 프로타고니스트 아담 케이가 되어 바쁘고 예민하게 이 병실 저 병실을 오가거나 우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벤 위쇼는 여전히 범위를 제 식대로 넓히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연예술계에 혈연이 없음에도 젊은 나이에 무대 정가운데에 올랐던 그의 연기에는 초반부터, ‘타고난 천재성’ 따위 문구 없이는 수식하기 힘든 완전함과 특별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흔치 않은 재능’이란 흔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것 역시 안 될 말이다. 그가 지나온 예술의 여정엔 소수적 정체성을 지닌 내성적 남성으로서의 경험과 고민의 과정, 그것을 드러낼 용기와 감수성, 인물을 존중하는 섬세한 접근법, 어느 하나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배우로서의 프라이드와 철학이 녹아 있다.
연기는, 벤 위쇼가 타인을 자신의 공간에 초대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화면 밖의 그를 궁금해할 필요나 권리는 없다. 그는 어느 정도, 데뷔 초부터 그 선언을 마쳤다. 연기예술가 벤 위쇼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의 예술을, 픽션의 옷을 입은 채 내보이는 자신을 들여다보면 된다. “Give him a mask, and he’ll tell you the truth.가면을 씌워 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거야.” (1998, <벨벳 골드마인>, 오스카 와일드 재인용)
* 주 참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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