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2-02 07:42:26
친밀한 타자, 혈육
영화 〈언니 유정〉
“선생님들은 뭐 하셨어요?” 첫 번째 질문은 적확하다. 대학병원 간호사 유정은 동생 기정이 학내에서 미숙아를 출산한 후 유기했다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방문한다. 유정은 선생님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한다. 누군가는 모범생인 기정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데 안타까움을 표하고, 누군가는 그저 걱정만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기정이 형사 처벌을 받으면 퇴학 조치하겠다는 것. 간호사인데도 왜 동생의 임신을 알지 못했느냐는 은근한 책망이 이어진다. 이때다. 한동안 침묵하던 유정이 첫 번째 질문을 던진 것은. 유정이 동생의 신체적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 책임이 있다면, 그 책임은 마찬가지로 학생을 돌보는 게 일인 선생님들의 것이기도 하다. 유정의 첫 번째 질문은 본연의 책무를 외면한 채 책임지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다. 유정이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죄인이라도 되는 양 굽신거리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 장면이 좋았던 이유다.
“너가 그런 게 맞아?”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틀렸다. 유정 역시 이 사건이 힘들다. 기정은 처벌 위기에도 입을 열지 않고, 부모 없이 동생을 양육한 유정의 속은 타들어간다. 무엇보다 유정은 기정이 ‘이런 일’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여긴다. 자기가 아는 동생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정을 마주한 유정은 질문을 쏟아낸다. 네가 그런 게 맞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왜 그런 일을 겪고도 내게 알리지 않았는지……. 그러나 기정의 답은 간결하다. “언니가 생각이 안 났어.”
혈연은 가족 관계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근거로 간주된다. 하지만 서로를 돌보고 북돋는 가족의 절대적 근거일 순 없다. 가족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 관계 호칭에 걸맞은 육체적‧정신적‧감정적 실천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유정이 마주한 과제다. 이제 유정은 동생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전에 알던 기정은 없다. 〈언니 유정〉은 당연하게 주어진 혈연 관계를 넘어 유정이 진정한 의미의 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동생 기정을 알아가는 언니 유정의 여정에는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먼저 유정이 담당한 환자와의 관계다. 임신 중독 증세로 입원 중인 환자와의 관계를 통해 유정은 기정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동생인지를 되새긴다. 유정의 엄마는 기정을 낳다가 죽었다. 그래서 유정은 기정을 볼 때마다 동생에게서 엄마를 겹쳐 본다. 동생이 엄마를 앗아갔다는 원망은 아니다. 기정은 유정에게 동생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한, 곱절로 소중한 사람이다. 두 번째는 기정의 친구인 희진과의 관계다. 희진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시원하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희진의 단편적인 말만으로도 유정은 자신이 기정을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유정은 담당 환자를 통해서는 기정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희진을 통해서는 기정의 현재에 다가간다. 누군가는 영화가 꼭꼭 숨겨둔 기정이 사건의 비밀이 밝혀질 때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지 않는다는 데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마지막쯤에야 드러냄으로써 일정 부분 미스터리 장르의 몰입감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기정과의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유정의 의지와 실천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담당 환자, 희진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한 결과 얻은 통찰로 기정이 사건을 해결하고, 자매간 상호적 관계 실천의 토대를 기어이 마련해내는 유정에게서 가깝고도 먼 혈육과의 관계를 돌아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혈육의 모습과 실재 혈육의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 〈언니 유정〉은 어떤 맥락에서는 그 간극을 마주했을 때 '절망'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 절망이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의 현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혈육은 관계의 출발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조건인 것은 아니다. 혈육은 관계의 의지와 실천으로 공들여 유지해야 할 친밀한 타자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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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팔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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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는 다한증이 있어서 손에 땀을 많이 쥔다. 그래서 수술비를 모으기 위해 자신이 직접 깐 마늘을 사촌 오빠의 식당에 갖다주는 일당으로 3만 원을 받는다. 사실은 춘희는 손과 발을 뻗을 수 없는 다락방에서 자랐다. 고등학생 시절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다한증이 있다고 말하다가 구박을 받는다. 상처받은 어린 춘희에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불에 손을 대서 흉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춘희는 성인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간다. 오랫동안 살아온 이 집에서 얹혀사는 신세라 친척들에게 오랜 구박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는데 주황이라는 말을 더듬는 남자였다. 주황은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춘희와 주황은 연애를 하게 되고 서로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춘희에게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과연 춘희와 주황의 연애는 성공할 수 있을까? 또한 자신의 삶을 앞으로 잘 개척할 수 있게 될까?
춘희에게 다한증은 극복해야 되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다.
하니엘
춘희는 어린 춘희의 상처에서 벗아났을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춘희는 외숙모처럼 외지인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에 쭉 뻗고 잘 수 없는 단칸방에서 살았는지 삶에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많았다. 이것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소외당하고 항상 혼자였다. 그리고 사촌 오빠도 과거에 명문대생이었지만 데모만 하는 학생이고 염세주의자였다. 자신의 누나도 학교에서 담배 피우다 걸린 신세였고 불량한 학생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춘희가 항상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태어나질 말아야 할 팔자였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춘희의 모습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에서는 단칸방에서 얹혀살던 집 안에서도 가족들이 항상 싸우기만 했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그녀에게 주황이라는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가둬둔 상처들 때문인지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고 다시 혼자가 되는 일을 경험한다. 괴롭던 기억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춘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춘희: 모두 다 네 잘못이 아니야!(어린 춘희에게)
영화에서 본 명대사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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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처럼 천천히 잠식당하는 영화
**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관람한 시사회입니다.
더 웨일
개봉 : 2023.03.01
감독 : 대런 아르노프스키
등장인물 : 브랜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외
평점 : ⭐️⭐️⭐️⭐️
너무 많은 생각들과 느낌들이 스쳐지나간다.
상처를 낸 건 되돌릴 수 없다.
에세이처럼 고치고 고쳐서 완벽하게, 실수가 없게 만들수가 없는 것이다.
딸인 엘리는 아빠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빠를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이기에. 사악하다는 말까지 듣는 엘리이지만 그 안에 채워진 것은 분명히 결핍된 사랑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이는 엘리는 많은 문제가 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보이지만 나는 영화 안에서 엘리가 매우 안쓰럽기도 했다. 8살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큰 상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사랑하는 것은 변함없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관심 없고 아무도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걸 사람들은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가족간의 감정이 골이 깊고, 아직까지 셋의 마음 속을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미 상처받은 마음을 풀 실마리조차도 보이지 않는 상황들 속에서 서로는 흘러간다.
더 웨일은 연극이 원작인 영화이다. 그런만큼 영화의 연출도 어딘가 연극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치 세트장처럼 집 안에서만 진행되는 영화와 카메라 움직임이 원래라면 두 쇼트로 나눌 것 같은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이어서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물들이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리액션 쇼트가 되거나 하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었다.
더 웨일은 기대하고 본 영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좋은 영화였다. 나도 많이 울었기도 하다. 왜 인생연기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처럼 천천히 잠식당하는 영화였다. 나라면 혼자 볼 것 같다. 혹은 친구들과 이 영화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듯 하다. 왜 혼자 볼 것 같다고 생각했냐면 영화는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신경쓰며 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혼자 우직히 앉아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충분히 눈물흘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웨일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인물의 평가가 천차만별일 것 같다. 딸인 엘리부터, 엘리의 엄마, 전도사(인줄 알았던 남자), 피자 배달부, 심지어 온라인 강의를 듣는 친구들까지 모습이 다양하다. 인물을 잘 만든 영화는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더라도 나중에 돌아봤을때 나도 이 인물이었다면 나라도 그랬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라도 그랬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위 말은 영화가 충분히 주인공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포인트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런 면에서는 캐릭터를 외적이든, 내적이든 잘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에 대해 주인공이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하게되는 행동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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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을 두드리는 대사들이 많았던 영화 《작은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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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은아씨들》이 처음 개봉했을 때는 크게 끌리지 않아서 영화관엘 가지 않았는데 넷플릭스에서 뒤늦게 보면서 영화관에 갔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했던 작품 《작은아씨들》. 특히,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원작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작은아씨들》 시놉시스
배우가 되고 싶은 첫째 메그, 작가가 되고 싶은 둘째 조, 음악가가 되고 싶은 셋째 베스, 화가가 되고 싶은 막내 에이미.
이웃집 소년 로리는 네 자매를 우연히 알게되고 각기 다른 개성의 네 자매들과 인연을 쌓아간다. 7년 후, 어른이 된 그들에겐 각기 다른 숙제가 놓이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작은아씨들》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찰떡같이 전환됐던 장면들
집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볼 때는 솔직히 영화관만큼 엄청나게 집중하면서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다. 환경적으로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끊어서 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밝은 곳에서 보다보니 완벽하게 몰입해서 보기는 힘든 편이다.
그런데 영화 《작은아씨들》은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과거로 넘어가고 현재로 돌아오는 장면들이 꽤 많아서 집중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장면전환이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스토리와 대사를 잘 따라가면 왜 과거로 돌아가고 어떻게 현재로 넘어가는지 바로 파악이 돼서 개인적으로 집중도도 올라가고 튀는 화면도 없어서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어린 에이미의 올바른 말
영화 《작은아씨들》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2가지 있다. 모두 에이미가 한 말이다. “왜 꿈을 창피해해야해. 자기 한계를 정하면 안돼.” 언니들이 꿈을 소박하게만 말하려 하자 자신은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다면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에이미가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 해맑게 나는 할.수.있.다.!!! 언니들 왜 이렇게 용기가 없어!! 이러는 장면이지만 그래도 저 말은 옳은 것 같다.
현실에서 내가 그 꿈을 이루기에는 아직 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선뜻 입밖에 내 꿈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나는 이걸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말을 내뱉음으로써 얻는 용기로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조
조는 처음 자신의 원고를 잡지사에 실을 때 익명으로 제출한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용을 잡지사에서 원하는대로 자극적으로 써내려간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조에게 글이 좋지 않다며 객관적으로 평을 내려준다. 항상 자신의 글을 응원해주던 자매들과 어머니 사이에서만의 평가만 받다가 좋은 평가를 해주리라 기대했던 친구에게 비판을 듣자 매정하게 돌아서고 만다.
조는 베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베스가 좋아했던 평범하고도 평범한 일기 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리고 처음으로 잡지사에 원고를 보낼 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낸다. 이 장면에서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직접 쓰는 장면과 겹쳐보였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만의 시각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세가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영화 《작은아씨들》은 잔잔한 울림과 함께 가슴에 톡톡 와닿는 대사들이 많아서 두고두고 볼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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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만의 블루스를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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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우리들의 블루스 (2022)
편성 : tvN, 20부작 완결 │ 장르 : 한국, 드라마
연출 : 김규태, 김양희, 이정묵 │극본 : 노희경
출연 : 이병헌(동석), 이정은(은희), 김우빈(정준), 한지민(영옥), 고두심(춘희), 김혜자(옥동) 외
등급 : 15세 이상세 사람 이상이 추천하면 그건 봐야지
요즘 나는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드라마에 입덕하는 일이 잦다. 그중 하나가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였다. 이정은, 이병헌, 한지민을 비롯해 고두심과 김혜자 선생님까지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드라마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아, 배경이 푸른 섬 제주라는 것도. 내심 속으로는 ‘그 출연진을 가지고 재미없으면 말이 되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 드라마를 본 주변 사람들이 그리도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니 궁금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변에 세 사람 이상이 추천하면 재밌다’는 나의 법칙이 이번에도 통했다. 인물별로 나누어 에피소드를 진행한 점이 특히 독특하고 좋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 대한 리뷰도 인상 깊었던 인물을 추려 인물별로 진행해보려 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한수와 은희 : 다시 잘 살아볼 기회를 주어 고마워
멀대 같이 크고 잘생긴 한수. 서울 사는 한수. 차승원이 연기한 ‘한수’는 제주 사람이 보기엔 그런 존재다. 학창 시절부터 때깔이 달라 결국 서울에 가더니 은행 지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제주로 내려왔다. 평생을 제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 동창들은 그런 한수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걸 모른다. 골프 유학을 떠난 딸을 뒷바라지하느라 한수의 재정상태는 거의 파산 직전이고, 그런 이유로 지쳐있는 아내와도 썩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인다. 그때 눈앞에 ‘은희’가 나타난다. 학생 땐 그저 자신을 좋아하는 귀여운 여학생쯤으로 여겼던 은희는, 현재 자산만 10억을 지닌 알부자다.
멀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었으나 빚만 늘고 있는 한수에게, 생선 대가리를 자르며 많은 것을 일군 은희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직업의 귀천은 무엇이고 잘 산다는 것은 어떤 걸까. 보이기 위한 삶과 진짜로 실속 있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나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조여 오는 궁핍한 상황에 은희에게 돈을 빌리려던 한수는, 은희가 카카오톡 기프티콘 쏘듯 보낸 2억을 결국 다시 돌려보낸다. 은희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도 있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잘’ 살아보려는 의지였을 수도 있다.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정말로 만족스럽고 실속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은희를 보고 배운 덕이다. 한수는 골프 유학을 접고 돌아온 딸과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그때 그 가족은 그제야 처음으로 행복해 보였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인권과 호식 : 절친에서 앙숙으로 그리고 다시 절친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인권과 호식’을 꼽겠다. <범죄도시>에서 감초 같은 연기를 보인 배우 ‘박지환’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응급실 선생님으로 나왔던 배우 ‘최영준’이 각각 인권과 호식을 연기했다. 이들의 사연인 즉, 학창 시절부터 죽고 못 사는 친구지간이었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철천지 원수 같은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 얼굴만 봐도 으르렁대던 그들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복병은 바로 자식들이다. 인권의 아들 ‘현’과 호식의 딸 ‘영주’가 서로 좋아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을 하게 된 것.
아이를 지우고 서울대를 가겠다던 영주는 갈등 끝에 아이를 낳기로 하고, 산모와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현은 학업을 포기하고 중국집 배달부터 귤 따기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순대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키는 맛에 살던 인권의 마음은 무너지고, 마찬가지로 딸을 서울대에 보내 의사를 만들려던 호식도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별 것도 아닌 일을 계기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던 인권과 호식은, 두 아이들을 매개로 하여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원래의 친구 사이로 돌아가는데..., 과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진국이고 눈물 버튼이다. 드문드문 현실적인 나의 뇌는 ‘과연 영주와 현은 아이를 낳아 끝까지 잘 살았을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내 인권과 호식을 보며 안심이 됐다. 엄마의 부재를 메꾸는 아버지의 사랑은 위대했고, 먼지를 털어낸 오래된 우정은 더 위대했으니.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정준과 영옥 : 어설픈 동정이나 위로 말고 정직함으로
한지민과 김우빈이 열연한 ‘정준’과 ‘영옥’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영옥은 육지에서 온 여자다. 서로 모든 걸 터놓고 지내는 제주 사람들과 달리, 좀처럼 자기 얘기를 꺼내지 않고 촐랑거리만 하는 영옥은, 같이 일하는 해녀들에게 눈엣가시다. 하지만 영옥이 그렇게 가벼운 것은 사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이었는데.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장애가 있는 쌍둥이 언니를 부양해야 했던 터라, 살아오면서 사람들로 인해 켜켜이 상처가 쌓여온 것이다. 많은 남자들이 달아났고, 고아나 장애라는 조건에 섣부른 동정이나 무례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말하지 않기와 무겁지 않음을 택했을 뿐이다. 영옥에게 호감을 느껴 다가온 정준 또한 영옥은 그런 이유로 밀어낸다. 어차피 너도 똑같고 날 떠나갈 테니,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자르겠다는 심보.
하지만 연애도 통계학이고 경우의 수다. 열에 아홉이 떠나갔대도 묵직한 놈 한 놈쯤은 나타날 수 있는 법. 영옥에게는 그게 정준이 아니었을까. 가시 돋친 영옥이 “(장애 있는 우리 언니 보고) 많이 놀랐나 봐?”라고 물으면 정준은 “미안해”가 아니라, “나도 장애 있는 사람을 처음 보는 거라 당황할 수 있잖아. 천천히 적응하고 친해질게요”하는 식이다. 선 넘은 동정도, 무례함도 없이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를 이해하려는 정직함 만이 있다. 말없이 생선살을 발라 영옥의 밥 위에 올려주던 정준의 어머니도 그랬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런 거지 싶다. 투박한 날 것이더라도 과장 없이 오로지 이해하려는 그 마음을 ‘정직하게’ 보여줄 때, 사람의 마음은 열리는 게 아닐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제주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바다 같은 마음
왜 배경이 제주여야 했을까 하고 처음에 생각했다. 외계어 같은 사투리도 잘 못 알아듣겠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쉬이 이해하기 힘든 ‘오지랖’ 심한 정서도 너무 강한 탓에, 처음에는 거북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제주여야 했음을 머잖아 깨달았다.
‘선아(신민아)’는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떠난 차가운 남편이 아닌, 만물상 하는 촌스런 제주 남자 ‘동석(이병헌)’의 오지랖에 치유를 하게 됐고, 남이 흉이라도 볼까 가면을 쓰고 다니던 영옥도 제주 남자인 정준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웠다. 언제든 두 팔 벌려 안아줄 것 같은 제주 할망 ‘옥동(김혜자)’과 ‘춘희(고두심)’는 모든 이들의 엄마였다. 경쟁이나 물질만능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그곳 제주에는, 촌스럽지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할 줄 아는 선한 마음들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화해하며 끝나는 다소 진부한 결말이었음에도 이 이야기가 와닿는 건, 까끌해진 마음을 보듬는 따스한 인류애 때문일테다. 제주에서, 오지랖을 당하고 싶어진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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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부터 이어진 스파이더맨 사가에 대한 헌사
샘스파, 어스파, 톰스파 모두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기발한 장치, 멀티버스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21년까지 이어진 스파이더맨 실사화 영화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리즈입니다. 하지만 이 오랜 기간 동안 시리즈에 변화가 없지는 않았으며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이자 속칭 샘스파, 마크 웹 감독의 어스파, 존 왓츠 감독의 톰스파까지 총 2번에 걸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각 시리즈마다 본연의 특색을 가지고 있도록 하여, 스파이더맨이란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있을 뿐 등장하는 스파이더맨의 성격이 천지차이일뿐더러 등장하는 빌런들도 전혀 겹치지 않는 등 별개의 시리즈로 보아도 무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별로 어떤 시리즈를 특히 더 좋아하는지와 같이 선호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 스파이더맨 시리즈 모두를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 시리즈의 스파이더맨과 수많은 빌런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면 너무 좋겠다'와 같은 팬들의 염원은 무시 못 할 정도로 거대해졌습니다.
하지만 배경도, 주인공도, 빌런도 모두 다른 세 시리즈를 한곳으로 모이게 하기 위한 합리적이면서도 마땅한 장치가 그동안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 팬들을 위한다는 명분만으로 세 작품을 모으기에는 아무리 히어로 무비라고 할지라도 "왜 세 명의 스파이더맨과 빌런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었는가?"란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납득이 가능한 해답, 다시 말해 서사의 핍진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은 MCU의 히어로 중에서 치트키 수준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등장시킴으로써, 더 자세히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을 통해 평행우주의 개념인 멀티버스를 사용함으로써 핍진성도 가지면서 세 작품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훌륭한 명분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무리 최근에 MCU의 멀티버스로 무리한 세계관 확장 시도와 그에 따라 생긴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이는 차치하고, <노 웨이 홈>만으로 한정 짓는다면 멀티버스를 적절하고 완벽하게 활용했습니다.
스파이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팬들을 위한 시작점,
멀티버스로 핍진성과 흥미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오랜 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들만 모아놓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최악일 수도
감상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영화이지만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물론 영화 전부가 또렷하게 기억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감상 도중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씬들을 중심으로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노 웨이 홈>은 앞선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인상 깊은 씬들을 차용하여 그대로 사용하거나, 혹은 적절하게 변형하여 오마주 형식으로 영화에 등장시킵니다. 가령 <스파이더맨 2>에서 오토 옥타비우스와 피터 파커가 "잘 지내니?"와 "노력하고 있죠"란 대사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 <노 웨이 홈>에서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대사로 안부를 묻는 장면으로 다시 등장함으로써 <스파이더맨 2>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관객에게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외에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에서의 피터 파커가 그웬 스테이시를 철탑에서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를 <노 웨이 홈>에서 추락하는 MJ를 구출하는 적절한 변형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씬을 통해 톰스파뿐만 아니라 다른 스파이더맨들 또한 들러리 역할에 그치지 않고 성장의 주체로서 표현한 점을 호평하고 싶습니다.
전작들과의 연계성에 기반한 측면에서 호평하고 싶고 리뷰에 다루고 싶은 부분들이 차고 넘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MCU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톰스파는 피터 파커란 일반인으로서, 혹은 스파이더맨이란 히어로로서 전혀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점이 스파이더맨의 아이덴티티 부재와 더불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곤 했습니다. 하지만 <노 웨이 홈>에서 MCU 스파이더맨이 극중 사건들로 발생한 상실이란 아픔을 겪고, 이를 통해 비로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스파이더맨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여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나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팬들을 위한 헌사가 가득 담겨 있을지언정 어디까지나 <노 웨이 홈>의 주인공은 톰스파입니다. 영화의 모든 서사가 톰스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수많은 과거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위상에 가려지지 않도록 적절하고 영리하게 그들을 배치했습니다. 이처럼 관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줌과 동시에 톰스파의 부족한 면들을 채우면서 마무리 지었단 점에서 <노 웨이 홈>은 톰스파 트릴로지를 넘어 2002년에서 시작된 스파이더맨 실사영화 시리즈의 피날레를 훌륭하게 장식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이어진 호평들은 어디까지나 샘스파, 어스파를 모두 감상한 관객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불어 앞선 시리즈들을 단순 감상한 것에 그치지 않고, 각 영화들이 극장에 개봉했을 적에 극장에서 감상했던 경험이 있는, 다시 말해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관객들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평가입니다. <노 웨이 홈>은 성장을 주된 테마로 하고 있는 만큼 그들과 함께 성장한 관객들에게는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성장했거나 노쇠한 배우들을 주축으로 다시 보였을 때 감회가 남다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앞선 시리즈들을 한 번에 몰아서 감상한,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함께 성장해 오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이 장면을 여기서 다시 사용했구나'라고만 생각할 뿐, 이와 같은 오마주에 대해 큰 감흥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즉 <노 웨이 홈>은 오랜 스파이더맨 실사영화 팬들에게 바치는, 그들만을 위한 영화일 뿐 일반 관객층들을 위한 영화는 아닙니다. 어찌 보면 MCU의 진입 장벽을 무지막지하게 높여버리는 데 일조한 작품 중에 하나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어쭙잖은 팬들은 나가떨어지도록 하고, 진성 팬들만을 데리고 가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상 깊은 장면들을 활용한 오마주로 관객들을 사로잡으면서, 톰스파의 성장 서사를 훌륭하게 담아낸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피날레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스파이더맨 팬들만의 잔치일 뿐, 새로운 입문자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만점을 줄 수 없도록 만드는 최악의 오점, CG
이 영화는 서사와 관련된 오마주 외에도 액션에 관련해서도 종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이 가지고 있는 액션에 대한 오마주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홀로 웹슈터를 사용하지 않고 몸에서 거미줄이 나가는 샘스파에 대해 펼쳐지는 어스파와 톰스파의 질문 공세, 또는 샘스파가 그린 고블린을 내려다보는 자세는 <스파이더맨 1>의 유사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 스파이더맨 별로 웹 스윙 이후 착지하는 자세를 각 시리즈별 시그니처 자세로 그대로 표현하는 등 이전 영화들의 크고 작은 액션들을 오마주 하여 이 영화의 액션들로 편성하였습니다. 물론 <노 웨이 홈>이 오마주한 액션들로만 이뤄져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수많은 빌런들이 본인만의 특색을 뽐내면서 등장한 후 벌이는 전투씬들을 비롯해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하여 스파이더맨들이 협공하여 빌런들을 하나씩 격퇴해 나가는 이 영화만의 익숙함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액션들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액션이 매끄럽기 위해서는 액션을 뒷받침하는 CG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섬세하거나 정교하지 않은 CG 작업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위화감은 절대 무시하지 못하며, 이는 곧이어 보여지는 액션의 몰입에 적지 않은 방해 요소가 됩니다. 이때 <노 웨이 홈>은 단순히 어색한 정도를 넘어 정말 실망스러운 엉망진창인 수준의 CG가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서사, 핍진성, 오마주 등의 구성이 좋을지라도 이 영화의 근본은 액션에 있습니다. 그 근본을 제대로 신경 쓰지는 못할망정 저품질 수준의 끔찍한 결과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선 좋은 평가를 다 깎아먹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20년을 아우르는 모든 스파이더맨 실사영화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인데도 작품의 퀄리티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부분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킬 지경입니다. 한 가지 단적인 예를 들자면 위 단락에서 언급했던, 이 영화의 피날레격 액션인 자유의 여신상 액션 시퀀스의 배경은 어두컴컴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빌런 일렉트로의 특징상 어두운 배경이 필요함을 감안하더라도 어색하고 성의 없는 CG를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한 얄팍한 처세 목적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액션도 오마주 하면 뭐 하나, 그 액션의 품질이 저품질인 것을
MCU의 고질적인 CG 문제가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물
마지막으로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언급하고 싶었던 내용들에 대해 짧게 짚고 이번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윌렘 대포의 그린 고블린은 19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얼굴이 가면에 가려져 있던 <스파이더맨 1>과 달리 <노 웨이 홈>에서 맨얼굴에 담겨 있는 광기를 직접 직면하니 더 공포스러웠고 강렬했습니다. 두 번째로, 샘스파와 어스파의 테마들을 적절하게 편곡함으로써 그 당시의 영화에 담겨있던 분위기를 훌륭하게 가져온 마이클 지아키노의 노고가 정말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세세한 설정 오류와 함께 빌런들의 비중 분배가 아쉬웠습니다. 물론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다는 측면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활약하는 부분을 보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장장 20년에 걸친 스파이더맨 사가의 마무리 격인 작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완벽한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근본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조그마한 핸드폰 화면에서도 이렇게 심하게 체감되었는데 IMAX와 같은 대형 스크린에서는 얼마나 더 눈에 띄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이 정말 좋았기에 스파이더맨 사가의 마지막 작품을 IMAX로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여러분들은 <노 웨이 홈>이 어떠셨나요? :)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
-
- 후회뿐인 삶,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고래 한 마리
1
불청객
어딘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을 지나가고 있는 선교사 토마스. 어느 외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뭐지? 집에 들어가 보니 어떤 남자가 낑낑대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어딘가 좀 특별하다. 엄청난 거구의 남자.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남자의 노트북에선 야한 동영상이 나오고 있다. 황급히 닫는 거구의 남자. 거동이 힘들어 보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황급히 묻는 토마스. 엄청난 몸무게에 앞가림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토마스에게 별 말 하지 않는다. “거기 종이에 써져 있는 몇 문장 보이죠? 그걸 읽어줘요!” 911이 아닌 부탁,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읽는다.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세이 같은 글. “이게 뭐죠?”묻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다”란 답만 할 뿐이다. 읽어준다. 금세 침착해진 거구의 남자. 하지만 토마스가 그곳에 간 이유는 분명하다. 선교사 일을 하는 토마스.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어림없다. 곧이어 남자의 간호사가 왔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이름은 리즈. 어렵지 않게 거구의 남자 이름이 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0kg도 넘어가는 체중.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찰리는 버티고 있다. 리즈의 입에서 병원 타령을 반복하기엔 이제 그녀도 지쳤다. 마지막 경고를 전하는 리즈. 이렇게 돼지 취급받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계속하다간 주말 즈음에 고혈압으로 마지막 날을 맞이할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와 버렸나. 끝이 두려운 찰리.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을 앞둔 오늘, 이제 마지막 끝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딸 엘리와의 마지막을 앞둔 채로.
연극 무대같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주인공 찰리가 272kg의 거구이기 때문에 이 특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생긴 이야기의 배경은 찰리와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특성이 된다. 우선 첫 번째. 영화의 핵심인 구원이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움직이는 행동은 결국 어떤 것과 은유된다. 이는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이 연출 요소 활용한 것이다. 또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도 경제적이다. 방구석이 더럽다. 이런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을 그렇게 설정한 느낌이 좀 있다.
인물들의 리액션에 집중한 영화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집의 공간적인 특성이 인물과의 대화에 특화된 곳으로 묘사되는 것 같이 보인다. 문이 많은 방문, 부엌과 거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 거실과 집 입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장면 연출에 있어 특이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전체적으로 묘하게 연극 같은 느낌이 있다. 이는 인물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리감과 관련이 있는데, 후반부 폭발하는 에너지를 어느 정도는 제어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 원작인 것을 영화화시킨 결과가 돋보인다.
구원에 관한
영화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단어는 '구원'이다. 영화는 여러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 영화를 보다 보면 러닝타임 내내 드는 생각이 있다. '아니 왜 병원을 안 가지? / 왜 음식을 안 끊지?'라는 생각이다. 이 찰리가 지은 원죄는 굉장히 원초적이다. 그냥 폭식을 끊거나 병원에 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우리 입장에서나 쉬운 말이다. 영화 중 어떤 인물의 입에서 찰리의 위기를 반박하는 것도 그 일부인데, 이를 반영하듯 인물의 욕망이 굉장히 복잡하게 연출된 것이 극에서 하고자 했던 말과 관련이 있다. 사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인물의 단면마저도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찰리/리즈/엘리/토마스의 속사정이 후반까지 쭉 나온다. 이 중 대표적으로 찰리의 문제는 영화 모든 내용을 관통하며 이어져 있다(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 찰리가 왜 혼자가 되었는가? 와 찰리가 왜 음식을 끊지 못하는가? 는 큰 관련이 있는 셈이다. 이는 곧 영화 후반부에서 전반부의 떡밥을 수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행동의 원인과 이유는 간단해서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당연하다.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이 '너무 멀리 왔다'의 딜레마는 우리 삶 속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 하는 생각들, 지금 당장 내일 일어나서 안 할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점점 줄어들 순 있어도 완벽하게 싹 낫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찰리와 같이 어떤 것에 후회하는 일도 지금 당장 내일 없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 깊은 골을 영화는 죽음이라는 소재로 풀어가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영화에서 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 리즈가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을 보면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스탠스는 결국 어떤 공통점을 도출한다. 바로 자기 파괴적이라는 속성이다. 자기 파괴적인 태도로 변한 것에 '어?'로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영화의 강점이 된다.
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어떻게 인물마다 표현하는지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네 인물이 갖고 있는 모티브는 '그럴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라는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를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내리는 해결책이 절대 모든 것의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영화 최후반부 하이라이트 신 연출이나 전반부 주인공이 늘 갖고 사는 에세이, 토마스라는 인물이 내포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가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부분 연출이 어떤 분들에게 좀 무책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야기의 끝마무리가 모호한 점은 아쉽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의 양태는 관객에게 하여금 감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서려있는 연기
1999년이었다. 한 남자가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건장한 피지컬에 섹시한 이목구비가 매력이었다. 출연 영화는 <미이라> 시리즈. 그전부터 쌓아 올린 인기가 폭발한 것이다. 연기력. 외모. 스타성 모두 다 인정받은 프레이저. 그에게 위기가 들이닥친다. 누군가의 성희롱과 이혼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미이라> 시리즈에서 일하다 생긴 신체적인 문제다. 무릎 연골을 죄다 수술해야 했던 프레이저. 악재는 한꺼번에 겹쳤다. 사람이 미웠다. 오랫동안 암흑기가 있었다. 2014년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니셰린의 밴시> 콜린 파렐, <앨비스>의 오스틴 버틀러와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유력하다. 현재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레이저. BAFTA에서 상을 받은 오스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연기가 아카데미를 위시한 여러 시상식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확신한다. 영화에서 봤던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단순히 특수효과를 끼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가 품고 있는 딜레마인 자기 파괴라는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잘 알고 보여주는 연기였다. 가령 리즈에게 음식을 달라는 신이 있다. 이 목소리 톤과 시놉시스에 나왔던 "내가 인생에서 잘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단 것을 알아야겠어!"신의 말투는 정말 강약조절에 있어 능수능란한 배우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당연히 이 <더 웨일>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사람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디 싱크나 홍 차우의 퍼포먼스도 좋았지만 이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두드러졌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다. 심지어 폭식 연기도 잘한다. 감독 의도를 잘 살리면서 먹는다.
뭐 이런 연기를 하는 데 있어 자기의 삶이 투영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무의식 중에 이 찰리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자기와 닮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브랜든 프레이저. 이 물아일체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도 저렇게 이해 안 되고, 깊은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래'라는 키워드에 감정이입하게 도와준다. 영화는 살짝 무책임하기도 하다. 또한 영화의 몇몇 설정은 감독의 전작에서 갖고 온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전하는 카타르시스는 아는 맛임에도 폭발적이다. 이제는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더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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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틀 조> 메인 예고편
꽃이 피고 사람들이 이상해졌다
싱글맘이자 새로운 식물품종을 만들어내는 연구원 앨리스. 아들을 돌보며 꽃박람회 출품을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던 그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식물을 배양해내는 데 성공하고, 아들의 이름을 따라 '리틀 조'라고 이름 붙인다.
자신의 연구가 성공했다고 믿는 앨리스는 아직 승인도 나지 않은 식물 리틀 조를 아들 조에게 선물한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던 조는 화분에 말도 걸고 물도 주며 리틀 조를 극진히 돌본다. 그러나 마침내, 리틀 조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조는 전과 다른 말과 행동을 보이며 점점 낯선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하는데…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