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2022-03-07 10:04:35
영화 '더 배트맨' 리뷰
돌아온 탐정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된 시리즈 속의 인물들이 다들 그렇지만 특히나 배트맨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은 막중했다. 팬들은 배트맨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 속에 '다크나이트'라는 영화가 있다. 전례 없는 악당의 존재가 만들어낸 드라마는 영화를 걸작의 반열에 올려다 놓기에 충분했다. 배트맨도 제 몫을 다했다. 그가 내린 선택은 영화의 오프닝 장면만큼 강렬한 엔딩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뒤로 배트맨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나 TV 시리즈에서는 크고 작은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훌쩍 나이를 먹어 원숙해지기도 하고, 더 단단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중요한 건 작품마다 배트맨이 어울릴 수 있는 판이 달랐다는 점이다. 고담시를 수호하던 영웅은 어느새 지구를 지켜야 하는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전 세계를 지켜야 하는 영웅의 모습에서 다시금 돌아간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근원적인 정체성인 탐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무대 또한 홈그라운드로 줄어든다. 다시금 기본으로 돌아가면서도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장점들이 빛을 발한다. 어둡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도시의 모습은 이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인물이 가진 강점과 매력에 집중하는 동시에 새로운 빌런으로 판을 뒤흔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신선하게 다가왔던 부분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인물의 설정이다. 브루스 웨인이 부모의 죽음으로 자경단 활동에 나섰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묘사하진 않는다. 그동안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인 토마스 웨인은 의사에 자선가로 인격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처럼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다르다. 그가 과연 도덕적이기만 한 인물이었을까? 이토록 부패한 도시의 재벌이 잘못된 선택을 내린 적이 없었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서 토마스 웨인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버지의 죄'라는 테마를 통해서 극 중에 등장하는 다양한 그룹이 연결된다. 고담이라는 도시의 상황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감각된다. 이는 배트맨에게도 마찬가지다. 복수를 통해 죽은 부모님을 향한 비현실적인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인 리들러의 행동이다. 그는 자신처럼 고아인 배트맨이 본인과 비슷한 동기(복수)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았다는 등 아캄에서 보였던 반응은 전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리들러가 기존 시리즈의 악당과는 다르게 배트맨이라는 인물에 대해 동질감을 느꼈다는 점은 그만큼 배트맨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왔던 일이 본래의 목적의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해온 범죄자가 그를 자신의 팀으로 설득하고 싶어 할 정도로 탈선한 상태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영웅이나 악당의 행동 모두가 굉장히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이 모든 맥락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검은 옷을 뒤집어쓴 자경단원을 대하는 경찰들의 시선 또한 그렇다. 실제로 주변에 있었다면 나라도 저렇게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일상으로 들여올 때 발생하는 이질감을 세심하게 표현한다. 브루스 웨인에게서 풍기는 우울감도 그렇다. 부모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어도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상태의 구분이 명확했다. 여기서는 다르다. 초점이 온전히 배트맨의 활동에만 맞춰져 있다 보니 균형은 깨진 상태이다. 무력한 상태에 놓이고 싶지 않아서 강박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 활동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니 회의감에 빠져있는 입장이다. 이런 감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이 영화 속에서 배트맨은 악전고투한다. 2년 동안 활동을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고 활동에 회의감이 든다. 숱한 경험을 토대로 단련된 초인이 아니고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사건을 막기에도 급급하다. 막연한 믿음으로 자경단 활동을 지속하기에 역부족인 시점이다. 배트맨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점차 변해간다. 그의 변화는 비약하거나 도약하지 않고 아주 작은 호의와 행동으로 드러난다. 겨우 한 걸음 정도의 변화일 뿐이다. 보면 배트맨에게 기대하는 바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맞닿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가 초인 영웅이 아닌 철인 영웅이라 좋았다. 배트맨은 질문과 자기반성, 성찰을 통해 힘을 얻는다. 본인의 삶을 제어하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이 분명하다.
이후에도 시리즈가 나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후속작이 나오면 이번 영화보다는 브루스 웨인의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업가나 재력가로서의 역할을 통해서 배트맨이 할 수 없는 일을 시도할 수 있다. 다수의 시민에게서 희망을 보고 복수에서 발전한 존재가 되려는 고민을 시작했으니 본인의 다른 페르소나 또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패가 될 것 같다. 물론, 고담이라는 환경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보니 어떤 형태로든 더 많은 시련이 있겠지만 해법은 분명 이번 영화와는 달라질 것 같다. 악당들도 기대가 된다. 이번에 나왔던 리들러처럼 다음 적수 또한 무척 난적이 될 테니까.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더 배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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