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4-12-05 14:45:49
그토록 찾고 헤매던 퍼즐 한 조각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이 글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시사회에 씨네랩크리에이터로서 참석 및 관람 후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원작을 읽고 감상하시면 좀 더 재밌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연말에는 힘이 있다.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어느덧 흘러버린 시간 앞에서 허탈함을 안겨주는 힘. 한 해를, 혹은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힘.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꿇은 무릎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
심장이 뛰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이 손님은 두리번거리다 손아귀를 뻗어 이번엔 빌 펄롱(킬리안 머피)을 잡아당겼다. 하릴없이 공허한 눈으로 굽이굽이 걸어온 열두 장의 달력을 톺아보는 내내. 그의 숨소리는 마치 그를, 그리고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작고 유약했으며, 필사적이었다. 비록 미미할지언정 이렇게 삶의 증거를 뿜어내고 있건만. 그는 어쩐지 자신이 그저 살아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수녀원에서의 그 일 이후 더 강해졌다. 석탄 창고에 물건을 채우는 내내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새겨지고 있는 일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곁눈질조차 눈치가 보이는 것처럼. 그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자신이 숨소리가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은.

새벽이야.
석탄 창고에 갇혀있는 세라의 물음에. 펄롱은 그렇게 대답했다.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아이에게서, 문득 펄롱은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떠나보내던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약했던 자신도 보았다. 소녀를 바라보는 그때만큼은, 펄롱의 시선이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다.
펄롱은 어머니와 어린 자신의 모습을 만나는 동안, 숨죽여 가만히 다가온 윌슨 부인의 기억을 마주했다. 비록 그는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 어떤 비난도 들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말이 윌슨 부인을 비롯한 어머니와 자신에게 눈총이 쏟아지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리라. 그저 그 손가락질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윌슨 부인이.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보호해 준 것임을 펄롱은 세라라는 거울을 본 순간 깨달았다.
세라에게는 펄롱의 등장이 새벽의 신호가 되었으리라.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둡지만. 이제 밝아지는 것 외에는 남지 않은 상태. 감히 희망이라 불러도 될까. 자신의 어둠이 다 물러갈 수 있을지 점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세라가 펄롱을 보며 큰 숨 한 번은 쉬게 할 시간을 벌어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펄롱은. 자기 자신에게 그 순간이 새벽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밤의 시작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목소리 가득 용기를 실어 내뱉었다. 마치 자신에게 다가올 모든 먹구름들도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한 마음으로.
새벽이야.

펄롱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직소 퍼즐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받은 것은 보온 물주머니였다. 왜 그런 것 하나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어린 펄롱은 이해할 수 없어 억울하고 분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이 지친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이 길목에서, 펄롱은 깨달았다. 자신은 인생이라는 퍼즐을 이미 선물로 받았음을. 삶의 그 모든 여정마다 숨어 있는 조각조각들을 자신의 손으로 다 찾아 퍼즐을 채웠음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마지막 조각이 자신의 품 안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새벽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두 사람에게 꽂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겨울 추위만큼이나 날카로웠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이 되어서야 펄롱은 자신이 내쉬는 숨이 자신의 인생과도. 마음의 울림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대로 살아쉬는 순간을 어쩌면 처음으로 맞이했을 펄롱은 그 시선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펄롱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조각으로 인해 퍼즐이 맞춰지고 나면. 다음 퍼즐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또다시 산산조각 난 채 쌓여있는 조각들을 맞추느라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가 되어 또 한 번 연약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제는 내리깔던 턱을 조금은 더 당당하게 치켜들 수 있을 것이며. 그 작은 것들이 모여 결국은 또 지긋지긋한 인생의 퍼즐을 완성할 것임을.
펄롱은 투박하지만 진실된 손을 세라에게 내밀었다. 파들파들 떨던 퍼즐의 손을 잡으며 느낀 온기는. 다시 한번 그의 숨소리가 그의 마음과 동일한 색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토록 황망하게 찾던 것을 손에 쥔 채. 펄롱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처럼. 따스하고. 온화하게.
마치면서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고. 용기는 한 번에 생기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영화에서 이런 사소함이 쌓이는 장면은 펄롱이 손을 씻는 행위로 표현된다.
석탄회사에 종사하기 때문에 더러움을 씻어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사회적인 모습을 벗은 자신의 본모습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기에 펄롱은 그토록 정성 들여 손 씻는 도구들을 관리하고 공들여 손을 씻는 것이겠지.
분명히 영화 뒤편의 모습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다. 또한 펄롱이 세라를 제외한 나머지 소녀들을 (불타는)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펄롱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라의 인생 전체를 바꾸었다. 한 사람의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큰일이 과연 있을까.
[이 글의 TMI]
1. 킬리언 머피의 연기가 너무 섬세해서 좋았음.
2. 내복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춥고. 어쩌란 말이냐. 날씨야.
3. 푸바오 아프지 마.ㅠ
#이처럼사소한것들 #munalogi #영화리뷰 #씨네랩 #시사회 #이처럼사소한것들리뷰 #올겨울가장큰울림 #영화리뷰어 #최신영화 #킬리언머피 #원작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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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애가 가득한 영화 <레슬리에게>
*스포일러 유의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레슬리에게>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영화 <레슬리에게>는 인간 생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롤러코스트의 드라마틱한 움직임처럼 보여준다. 로또 당첨으로 세상을 모두 가진듯한 희열, 알코올 중독으로 파멸을 겪은 아픔과 후회, 버린 어린 아들이 성장하여 엄마를 멀리하는 현실에 대한 고통,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자책.....
돈벼락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레슬리. 지역방송과 인터뷰에서 아들 제임스와 함께 나와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기타도 사주고, 식당도 차리고....”
6년 후,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탕진한 레슬리. 올데 갈 데가 없어 장성한 아들 집을 찾는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을 뿌리칠 수 없어 술을 멀리하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역)는 룸메이트의 돈을 훔쳐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엄마를 멀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영화는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변화하여 일어서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레슬리의 알코올 중독과 함께 모텔의 젊은 주인 로열도 마약중독자이다. 중독은 삶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중독은 또한 의존을 불러온다. 알코올에 중독이 되면 알코올 의존을 벗어나기 힘들고,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에 손을 떼기 어렵다.
의지를 가지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엄청난 고통의 금단현상이 따라온다. 로열이 마약이 생각나면 밤중에 괴성을 지르고 밖으로 뛰어나가 옷을 벗고 춤을 추며 마약에 대한 생각을 돌리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다. 레슬리는 오로지 아들에게 괜찮은 엄마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러운 술의 유혹을 뿌리친다.
나락에 떨어진 인생에도 눈을 들어 보면 분명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의 존재와 호의가 망한 인생에 온기를 돌게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호텔 관리인 스위니(마크 마론역)의 관심과 사랑은 중독된 두 사람을 치유하고 중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가 된다. 잘못된 과거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사는 영혼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상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촬영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촬영감독 라킨 세이플이 맡아 영화를 더욱 빛냈다. 레슬리의 역을 맡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는 빛났다. 영화의 깊이를 더한 그녀의 연기는 아카데미에서도 인정하여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렸다.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인간사의 어두운 내용들이 펼쳐져, 보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2시간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로 느껴졌다. 다행히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옆에 앉은 여성관객도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서인지 참지 못하고 소리 내며 훌쩍이며 엔딩에 감동했다. 2시간 내내 인간사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이 파도치는 보기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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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로드킬 동물에게서 자신을 본 여자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타국의 하늘(Foreign Sky)
US, Japan/2005/72min/금선희 감독 작품
당신이 길거리에서 로드킬 당한 동물을 본다면 어떤 행동을 할까?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릴 수도 있고,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타국의 하늘〉을 연출한 금선희 감독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없이 동물의 사체를 바라봤다. 동물의 사체에게서 자기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금선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3세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그의 증조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먹고 살기가 낫다는 소문을 듣고 192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간도 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의심받아 수없이 살해당했지만, 증조할머니는 다행히 이 비극을 비켜 갔다. 해방 후에는 200만 명의 재일조선인 중 70만 명이 일본에 남았다. 남은 자들은 쓰레기장에서 살며 고철을 모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이 판 고철은 무기가 되어 한국전쟁 중인 남한에 수출되었다 한다.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 동족을 목숨을 겨냥한 지독한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특유의 근면함으로 ‘조선 특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본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재일조선인은 남한과 북한 중에서 국적을 선택하라고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의 국적은 사라진 나라 ‘조선’으로 표기되었다(심지어 일본과 대립했던 북한은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자녀도 ‘외국인’으로 남았다.
조선에서 왔고, 일본에서 정착했으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재일조선인에게 손을 내민 건 북한 정권이었다. 일본에서 학교 폐쇄 등의 탄압을 겪던 이들은 북한의 도움으로 학교를 건설하고 ‘민족’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김일성이 영원히 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항상 차별만 받다가 10일간의 북한 여행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았다는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은 재일조선인이 기댈 유일한 구석이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북한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일본이 보도하는 악마화된 북한의 모습과 공존할 수 없다. 금선희는 지독한 혼란에 시달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인 학교 규정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그는 이중의 분노를 느꼈다. 첫 번째 분노는 치마저고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일본인을 향하고, 두 번째 분노는 여학생에게만 민족의 옷을 입힌 학교를 향한다. 금선희는 두 번의 분노로 ‘재일조선인’인 동시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고민은 그가 미국 유학을 택한 계기이기도 했다. 요컨대 금선희는 복수의 억압된 정체성에서 오는 지독한 소외를 자기 성장의 자원으로 삼았다.
이제 우리는 왜 금선희가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에서 자기 자신과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동시에 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금선희와 도로 위 동물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길 위에 던져진 연약한 존재다. 가해자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조차 못 한다.
때문에 동물의 사체를 도로 옆 땅에 묻어주는 금선희의 행위는 동물을 애도하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과 재일조선인 모두를 애도하는 일이다. 이제 남은 건 길을 만든 사람, 길 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몫이다. 가해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동안 피해자는 자신의 슬픔을 모두를 위한 윤리로 확장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동물의 사체는 길 위에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겼다. 동물의 사체가 길 위에 남긴 흔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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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총을 든 남자의 비밀
* 이 글은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 )
나쁜 감정엔 바닥이 없다.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두렵고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지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감정을 원하는 대로 해결하기란 몹시 까다롭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나쁜 감정에 휩쓸리는 순간,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비극이 탄생한다.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에도 나쁜 감정에 고통받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고 있는 아내에게 총을 겨눈다. 그에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데이빗(클레인 크레포드)'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을 담았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36회 선댄스 영화제 공식 초정작으로 선정되었다.영화는 앞서 말했듯 '데이빗'이 아내 '니키(세피데 모아피)'에게 총을 겨누며 시작한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세월이 지나 결혼생활의 권태로 인해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결정했다. 별거 중인 어느 날 '데이빗'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벌거벗은 채 자고 있는 아내와 남자 '데릭(크리스 코이)'을 보게 된다. 부부 사이에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약속을 했었지만, 화가 난 '데이빗'은 아내에게 총을 겨눈다.
숨이 멎을 듯 멈췄던 시간은 거실에서 떠드는 아이들 목소리에 의해 깨진다. 창문을 통해 집을 빠져나온 남자는 무작정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고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동시에 금속과 살이 부딪히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린다. 듣는 사람마저 불쾌한 감정을 전염시키는 특유의 효과음은 '데이빗'이 나쁜 감정에 사로잡힐 때마다 들린다. 음향을 담당한 '피터 알브레히첸(Peter Albrechtsen)'은 '데이빗'의 삶과 연관된 소리를 찾아내려 노력한 끝에 상영 시간 84분 동안 자동차 문이 84번 열고 닫히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효과음을 만들었다.연출의 특징도 눈 여겨볼만하다.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화면 비율을 4:3 정도로 줄인다. 화면은 크면 클수록 좋고 IMAX가 대세인 요즘 영상과 확연히 다른 선택이다. 좁은 화면은 인적 드문 공터나 도로처럼 영화 속 배경이 주는 여백과 대비되어 훨씬 답답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서 한 장면을 길게 촬영하는 단조로운 구도를 사용했다. 그중 인물의 전신이 보이도록 촬영된 장면이 많은데 관객은 그들의 동선과 대화만 확인할 수 있고 자세한 표정은 알 수 없다. 영화의 감독 '로버트 매코이언(Robert Machoian)'의 인터뷰에 따르면 '카메라에 담긴 특정 인물에게만 집중하기보다 등장인물 누구나 공평한 가치를 지니길 원했다'라고 설명했다. 감독의 의도대로 주인공 '데이빗'을 담는 카메라조차 철저히 방관자에 입장에서 그의 고통을 관찰한다.
Q. 나쁜 감정을 숨기며 지내나요?
'데이빗'은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나쁜 감정을 숨긴다. 그는 '니키'가 다른 남자와 잔 걸 모르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저녁 데이트 코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다정한 아빠 역할을 충실히 해내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거나 신중하게 장난감을 고른다.아무리 덤덤한 얼굴로 괜찮은 척 해도 '데이빗'은 어느 하나 숨길 수 없다. 영화의 배경인 미국 유타주 카노시는 사람이 적은 한적한 동네여서 동네 사람들은 그가 처한 상황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마트에서 아내의 남자 친구를 마주치고 이웃과 안부 인사를 건네며 가출한 딸을 잡는다. 심지어 딸에게 '니키'를 둘러싼 삼각관계를 들키며 딸은 방황하고 부녀 사이는 갈수록 나빠진다.
꾸역꾸역 감추던 감정은 폭력으로 표출된다. 그는 아이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없게 되자 '니키'와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잦아지고 비아냥거리며 거친 말을 내뱉는다. 급기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사람 모양의 샌드백에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하고 총을 쏜다.
글에서 설명한 장면을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 예고편에서 만나보세요▼
그의 분노를 한 꺼풀 벗기면 나쁜 감정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데이빗'은 애쓸수록 망가지는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몰라서 혼란스럽다. 만약 '데릭'으로 인해 아내와의 관계가 끝난다면 가족에게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을 느낀다. 감독은 영화 속 그의 처지를 노숙자에 비유하는데, 별거로 인해 가족과 한 집에서 지낼 수 없으며 아버지 댁에서도 임시로 머무는 손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나마 집이라고 할 만한 장소는 자신의 낡은 트럭뿐이기에 좌절과 외로움을 홀로 견뎌야 한다.
나쁜 감정엔 바닥이 없다. 그러나 시작된 이유는 분명히 있다. 이유를 알아내는 첫 단계로 감정을 숨기는 대신 솔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의 절정은 아내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주저앉아 우는 장면이다. 결국 그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두려움을 인정했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면 '데이빗' 주변에 나쁜 감정의 찌꺼기가 남은 듯 불안감이 감돌지만, 그가 바라던 대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화 속 '데이빗'의 슬픔이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비극이길 바라는 주인공은 없으니까.
영화 리뷰를 꾸준히 쓰고 있지만, 장면마다 숨겨둔 감독의 의도가 이 정도로 궁금한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참고한 감독의 인터뷰와 다른 리뷰는 아래 링크로 남깁니다.
https://www.abc.net.au/news/2021-09-16/the-killing-of-two-lovers-review/100463886
https://www.slashfilm.com/581177/the-killing-of-two-lovers-director-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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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포장지, 그렇지 못한 내용물
4★/10★
각본가의 자질과 연출가의 자질은 얼마나 같고 다를까? 영화 〈살수〉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곽정덕 감독은 〈백두산〉의 각본을 쓰고, 〈끝까지 간다〉를 각색한 인물이다. 이 두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 않더라도, 각각 상업성과 작품성 등의 측면에서 평가받은 지점이 있는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수〉는 조금 이상하다. 〈백두산〉은 상업영화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었고, 〈끝까지 간다〉는 탄탄한 구성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높인 영화였다. 그런데 〈살수〉에는 둘 중 그 무엇도 없다.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션의 헐거움을 메울 탄탄한 스토리를 갖추지도 못했다. 몇몇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지탱할 뿐이다.
조선 최고의 살수 이난은 몸이 망가져 더는 격한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러던 중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초를 찾아 한 마을에 들렀다가, 자그만 주막을 운영하는 모자母子를 만나, 그들을 도우며 잠시 그 집에 머문다. 이 마을은 산적이 기승을 부리고, 고을의 행정 업무를 맡아 산적을 토벌해야 할 이방은 정작 산적과 내통하는 문제가 많은 마을이었다. 어쩌다 이들의 관계에 끼게 된 이난은 산적과 이방의 위협에 맞서 위기를 극복하고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이어간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살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적어도 한 측면에서는 관객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영화다. 화려한 사극 액션, 코믹 요소, 전개의 탄탄함……. 고루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중 하나만 확실히 잘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 같다. 지금처럼 여기저기에 발을 애매하게 걸치다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란 소리다. 이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인 연기로 영화를 끌고 가는 몇몇 배우에게는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포장에 비해 즐길 만한 요소가 너무도 부족한 영화라는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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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닮은 조각을 가진
사별이 기본이요, 못해도 불치병 정도의 장애물 정도는 놓여야 절절한 사랑이라 할 수 있었던 90년대 뮤직비디오로 길러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유교걸에 교회피플로 자라난 내 마음이 사실 극도의 보수를 지향하고 있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쿨한 현대 젊은이들의 '청불' 멜로를 별로 안 좋아한다.쿨하지 못해도 할 수 없다. 몸이 마음보다 개연성을 먼저 가져 버리는, 눈만 마주쳤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사랑이 시작되어 버리는 (때로는 심지어 사랑도 아닌) 전개를 나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멜로란 자고로 감정선이 국밥처럼 절절해야 (그러나 그 표현은 애틋하고 산뜻해야) 하지 않겠냐는 취향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런 영화가 국적이 프랑스라면? 내 마음에 계신지도 몰랐던 흥선 대원군이 부스스 무덤 박차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 원래는 내가 볼 영화가 아니었던 <파리, 13구>를, 보게 만든 한 마디가 있었다.
각본에 셀린 시아마 참여했대.
셀린 시아마가 누구인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감독, 그 후 전작들이 역주행 개봉하고 블루레이 출시까지 금방 될 만큼 국내에서도 사랑받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은 "여성의 시선female gaze"이다.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많음에도, 음험하게 착취하는 시선이 없다. 심지어 육체를 성적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성애 장면을 촬영할 때에도, 성적 대상화만을 위한 대상화는 없다. 셀린 시아마의 이야기는 그 편안한 시선 안에서 겹겹이 풀어진다. 육체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다른 이야기들이 함께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그랬고, 좋은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러니 <파리, 13구>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외로운 현대 청춘들의 청불 멜로지만, 단순한 육체의 부딪힘 그 이상의 파장을 품고 있을 거라고.
<파리, 13구>는 흑백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흑백으로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도시 중 하나일 테지만, 수많은 영화에서 다룬 도시이지만, 여태까지 봐왔던 낭만적인 색감의 파리가 아닌 흑백 속 낯선 대도시가 있다.
창문 속으로 각 집 칸칸이 스쳐 지나간다. 규모 있는 도시라면 어디에나 그렇듯, 창문으로 분절되어 있는 각각의 칸에, 각자의 취향대로 비슷한 듯 다르게 펼쳐져 있는 공간. 제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단절된 사람들. 외로움이 솟아오르기 너무 쉽게 설계된 이 도시에서, 인물들은 스치고 만난다. 미국 그래픽노블 작가의 단편 세 편을 각색했다는 이 영화는, 그 스치고 만나는 사람들 사이 얼마간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에밀리는 콜센터 일에도 크게 흥미가 없고,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시한폭탄 같은 성격도 갖고 있다. 반대로 교사 일을 잠시 멈추고 학위를 따려는 계획을 가진 카미유는 적당하게 여유 있는 사회인의 삶을 표방하고 있다. 두 사람은 금방 불이 붙지만, 이 관계에서 사랑을 원하는 에밀리와, 연애는 하지 않는다며 적당하게 선을 긋는 카미유의 반응이 엇갈린다.
다른 한 축에는 노라와 앰버 스위트가 있다. 인터넷에서 1:1 영상통화로 성인방송을 하는 앰버 스위트는 금발 단발 가발을 쓰고 방송을 진행한다. 법대생 노라는 학교를 한동안 쉬고 고향에서 부동산 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복학했다. 미묘한 배척의 정서를 느끼지만 그래도 학교를 열심히 다녀보려고 애쓴다. 그 일환으로 파티에 간 날, 평소와 달라 보이려고 뒤집어쓴 금발 가발 때문에 앰버 스위트로 오해를 받게 되면서 학교 생활이 어그러진다.
그떄부터 날아드는 수군거림, 각종 성희롱 메시지에 고통받던 노라는 어느 날 앰버 스위트의 방송에 접속해 묻는다. 금발 단발 가발을 쓴 자신이 정말 앰버 스위트와 닮아 보이는지. 거기서부터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둘과 둘의 이야기로 뚜렷하게 막을 가른 옴니버스라기보다, 그냥 도시를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답게 은근하게 얽혀 있다. 각자의 사정을 안고 스치고, 만나고, 헤어지고, 탐하고, 밀어내고, 눈빛을 주고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에밀리와 카미유의 이야기가 좀더 전통적인 멜로 드라마의 스토리라인에 가깝지만, 개인적으로는 노라와 앰버 스위트의 이야기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운명적 사랑의 발견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절된 공간으로 가득한 도시는 사랑마저 부유하는 외로운 공간이다. 거기서 운명적 사랑을 찾아 마무리된다는 결말은, 적어도 이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에서 알콩달콩 혹은 티격태격 이어진 시간 끝에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상정하는 결말로 끝나는 사랑은, 대도시에서는 이미 판타지 장르로 편입되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유행하고 있는 현대 서울처럼.
<파리, 13구>는 현재의 사건과 대화를 통해 인물들을 밝은 미래로 보내는 게 아니라, 현재 인물을 둘러싼 배경을 통해 과거를 대충 예단하게 한다. 대만계인 에밀리의 가족을 통해, 카미유의 가족을 통해, 그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 그 안에서 이들이 사랑에 보이는 태도를 개략적으로 이해시킨다.
사랑을 원했던 에밀리, 사랑을 몰랐던 카미유, 사랑이 두려운 노라, 사랑이 값비싼 앰버 스위트. 인물들의 상황과 태도는 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가벼워 보이는 안에도 절실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우리 다 그렇듯이.
정답 같은 관계가 있을까? 거의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요?' 같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답이 다를 수밖에 없고 정답은 없을 질문.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믿지 않는 (그래서 한 번의 눈맞춤으로 개연성을 해결하는 멜로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이 질문에도 아마 없지 않을까 대답한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랑이 모든 공허를 메우는 인생의 치트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본원적인 고독과 각자 져야 하는 1인분의 짐이 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의 <향연>을 믿지 않는다. <헤드윅>을 재미있게 보았지만, 오래 전 형벌을 받아 갈라져 나온, 한때 하나였던 둘이 다시 만나는 과정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오히려 같은 조각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에 가깝다. 인간 본원적인 고독과 각자 져야 하는 1인분의 짐 앞에서, 서로를 다독일 수 있는 옆사람의 존재.
보다가 문득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서는 <아가씨>도 청불이 아니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하고 오래 전에 주워들은 얘기를 떠올릴 만큼, 성애 장면의 수위가 높다. 그러나 음험한 착취의 시선은 없으며, 몸의 대화 못지 않게 말로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일까 어떤 면에서는 작고 섬세한 버드키스를 닮았다. 이렇게 보면 나의 멜로영화 취향에서 그렇게 많이 벗어나는 영화도 아닌 것 같다. 가장 절절한 마음을 산뜻하고 애틋하게 표현하는 멜로영화 못지 않게, 이 영화도 여린 마음 깊은 데 있는 속살을 연민이나 유난 없이 산뜻하게 드러낸 영화였다.
이런 섬세함은 플롯 외의 면에서도 빛난다. 주요 인물들의 다양한 인종 또한 구색 맞추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고, 나이나 성별을 이유로 불필요한 위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작은 데서도 미묘하게 편안하다. 예를 들어 카미유가 여동생에게 타박 주는 말을 던졌을 때, 아빠가 나서서 열여섯살 동생에게 필요한 건 응원이라며 "네 의견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말한 순간. 짧은 장면이었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장남이고 오빠고 없이 그 의견 자체에 대한 평가만을 하는 순간 미묘한 편안함이 있다.
내가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 아마 더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와 닮은 조각을 가진 사람들이 느꼈을 편안함. 한국에서 보편적인 정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흘려보내기엔 아쉽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운명적 이야기에 감응이 없어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고, 보편적인 정서에서 소외감을 느꼈지만 소외되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분명 버드키스를 건네줄 영화라 믿는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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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들의 우정 이야기 영화 '클로즈' 언론배급시사회 후기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클로즈
(2023.05.03 개봉)
감독: 루카스 돈트
출연: 에덴 담브린, 구스타브 드 와엘
안녕하세요! 씨네랩 크리에이터 에깸입니다 ♥
소년들의 풋풋한 우정을 그려 더욱 관심 받고 있는 영화
'클로즈'의 언론배급시사회에 다녀왔어요
영화관 내 오열하신 분도 계셨구 ㅠㅠ
감정선을 정말 톡톡 잘 건드리는 영화였던 거 같은데요
어땠는지 평을 한번 남겨 볼게용
클로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레오와 레미는
친구들에게 관계를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후 낯선 시선이 두려워진 레오는 거리를 두고,
홀로 남겨진 레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점차 균열이 깊어져 가던 어느 날,
레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클로즈>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후기 글이니까 엔딩 말씀드리자면
레미가 괴한에게 습격당해 죽습니다
그제야 레오는 레미와 거리를 두던 자신을 반성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나는데요
뜬금포 괴한 습격이... 사실 좀 당황스러웠어요
사실 괴한인지 뭔지 정확히 나오진 않지만 집 문이 박살나 있고 레미가 죽었다고 말하거든요
차라리 저는 레미가 자살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레미의 자살로 인해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 왕따를 견디지 못한 아이
두 개의 교훈적 엔딩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 아이들의 대사 중에 '호모', '생리하냐', 등 편견 섞인 대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엔딩이 더 맞았다고 보고요
레오를 원탑 주인공(감정선)으로 두려다가 오히려 분위기가 축축 쳐지기만 하고
레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벅차단 느낌까지 들더라고요...
레미의 엄마를 또 다른 주연으로 둔 건 좋았어요
레오-레미-레미엄마 세 캐릭터의 구도로 가니까 레미가 죽고 나서도 이어갈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다만, 레미 엄마의 태도가 급변하는 게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달까요
아들이 죽기 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 달라고 하지만
말하지 않는 레오도 다정하게 대해 주거든요
우물쭈물하다 말하니까 바로 차에서 내리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오케이죠 당연한 감정이에요
근데 5초도 안 돼서 찾으러 가요
이 부분이 약간... 정신사나웠던 듯해요
레오의 감정선을 토대로 영화가 흘러가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돌보지 못한 느낌?
그래도 끝내 레오가 오열하던 병원 씬에서는 많은 분들이 따라 울더라고요
예술 영화로선 정말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공부하는 제가 보기에 딱이었달까요?
인물의 감정선을 어떻게 꾸려가면 좋을지 굉장히 공부가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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