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2-09 14:11:18
12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모아나 2>, 개봉 2주 차에도 굳건한 1위!

<모아나 2>가 개봉 2주 차에도 선두를 지키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주 만에 누적 관객 수 220만 명을 돌파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강력한 흥행 파워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2016년 개봉한 1편이 개봉 2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달성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빠른 속도입니다. 다른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보아도 누적 관객 수 724만 명의 <엘리멘탈>보다 8일, 누적 관객 수 557만 명의 <스즈메의 문단속>보다 하루 빠른 속도라고 하는데요.
과연 <모아나 2>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2위는 주연 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 논란으로 인해 개봉일이 미루어지는 곤욕을 치렀던 <소방관>이 차지했습니다.
‘홍제동 방화 사건’을 다룬 <소방관>은 목표 관객 달성 시, 기부 공약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100만 관객 달성 시 약 1억 1,900만 원, 손익분기점인 250만 명 돌파 시 약 3억 원을 국립소방병원에 기부할 계획이며, 목표 초과 시 추가 기부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관객 1명당 티켓 구매액 중 119원을 적립하는 ‘119월 기부 챌린지’를 통해 상영 4일 만에 약 5,950만 원이 모금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뒤이어, 꾸준한 입소문으로 관객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위키드>가 누적 관객 수 149만 명을 돌파하며 3위에 올랐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는 지난주와 동일한 영화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아나 2>와 <위키드>가 나란히 1, 2위를 유지하며 각각 누적 수익 3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모아나 2>는 전 세계 수익 6억 달러를 넘어 곧 1편의 총수익인 6억 4,300만 달러를 추월할 전망입니다.
<위키드>는 최근 미국 영화 비평위원회(NBR)로부터 올해의 영화상, 감독상, NBR 스포트라이트 상을 받으며 앞으로 이어질 시상식 시즌에서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편, 3위를 차지한 <글래디에이터 Ⅱ>는 개봉 3주 차 주말 동안 북미에서 1,240만 달러를 추가로 벌어들여, 현재 북미 누적 수익은 1억 3,27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3억 6,800만 달러를 기록 중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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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일 강의 죽음> 추리의 틀을 쓴 사랑의 비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휴가를 즐기는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 그런 그의 앞에 친구 '부크(톰 베이트먼)'가 나타나고, 포와로는 부크 덕분에 행복한 신혼부부인 '리넷 도일(갤 가돗)'과 '사이먼 도일(아미 해머)' 부부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화려하기 그지없던 피로연은 도일 부부와 치정으로 얽힌 '재클린(엠마 맥키)'의 등장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에 리넷은 하객들을 모두 나일 강의 초호화 여객선인 카르낙 호에 태워 아부심벨 신전으로 여행을 떠나며 재클린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 배 안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위태롭고 불길한 분위기의 선상에서 탐정 포와로가 탑승객들 모두를 범인으로 의심되는 가운데, 연이어 발생한 살인 사건은 냉철한 탐정인 그의 영혼까지 뒤흔든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추리 소설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작가로, 수많은 클리셰를 만들고 보급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탐정이 사건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후에 모든 진상을 설명하는 결말을 처음 활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애거사 크리스티 특유의 클리셰와 스타일은 그녀의 추리 소설이 어떤 쾌감을 의도하는지를 말해준다. 추리소설의 또 다른 대명사인 셜록 홈즈 시리즈가 사건이 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한다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은 왜, 누가 이 사건을 벌였는지를 추적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작중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감정적 반응을 살피며 고조되는 긴장감을 맛본다. 이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 소설 중 동명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자, 2017년에 개봉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속편인 <나일 강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나일 강의 죽음>의 구성과 구조를 보면 이 작품이 원작의 묘미를 충실히 옮기기 위해 노력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게 된 포와로의 사연을 보여준 후, 시선을 돌려 본작의 살인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하나하나 선보인다. 본격적인 사건은 카르낙 호 살인 사건에 결부된 11명에 달하는 용의자들의 관계와 과거를 살핀 후에야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1시간 가량이 지날 때쯤에야 진짜 사건이 벌어지는 영화의 템포는 상당히 느리게 느껴진다. 사건의 결과물을 먼저 제시하고 신속하게 추리 과정으로 넘어가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정반대의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범인을 추적하는 에르큘 포와로의 모습 역시 일반적인 탐정의 이미지보다는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는 배에 승선하고 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겠다는 듯이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수사 내지는 심문 과정 역시 적극적으로 증거물을 추적하거나 찾기보다는 살해된 레닛과의 관계, 주변인과의 관계 및 감정선을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후반부 1시간 역시 앞선 분량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물론 점점 과감해지는 살인범의 존재가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인물의 관계가 명확해지기는 하나, 온도가 천천히 올라도 좀처럼 끓지 않는 물을 지켜보는 듯한 인상은 여전하다. 이는 상업 영화로서는 호불호가 명백히 갈릴 지점이다.
다만 그 덕분에 <나일 강의 죽음>은 케네스 브레너 감독이 의도한 고급스럽고 세련되며 또 클래식한 리메이크의 매력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다. 극의 속도감을 희생함으로써 원작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카르낙 호 승객들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그 결과 고전적 매력과 현대적 감성을 모두 잡는 것이 대표적이다.
귀족 출신 영국인이 쓴 소설답게 본래 <나일 강의 죽음>은 상류층 인물을 다수 등장시키고, 사교계를 주된 배경으로 삼는 등 영국적이고 귀족적인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계급이 낮은 하녀, 물려받은 작위보다는 스스로 획득한 의사라는 직업을 더 중시하는 귀족 자제, 경제적으로 부유한데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부인과 같은 인물상을 묘사하면서 상류층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그에 따르는 의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이에 더해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 1900년대 초중반을 살아가던 흑인과 유색인종을 향한 선입견과 편견 및 그들이 겪어야 할 아픔과 설움도 등장시킨다. 이는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한 현대적 접근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비극적 사랑이라는 클래식한 테마에 초점을 맞춰서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과 이를 풀어가는 사랑에 아픔이 있는 탐정이라는 교과서적인 구도를 안정적으로 펼쳐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힘이 이룰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명제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대비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에서 묘사된 적 없는 포와로의 사랑 이야기를 선보인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큰 부상을 입는데, 이때 약혼자인 캐서린으로부터 참혹한 상처도 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의 힘은 강하다는 위로를 받는다. 이후 영화는 삼각관계를 비롯해 백인과 흑인 간의, 또 여성 간의 금지된 로맨스를 펼쳐 보인다. 이처럼 다양한 로맨스의 모습은 포와로로 하여금 사건을 해결하는 단초로서 오래전 연인의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 결과 추리 소설을 영상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작품은 마치 멜로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이에 더해 <나일 강의 죽음>은 이집트와 나일 강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를 비틀어 활용하며 비극적 사랑의 안타까움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고, 고전적 매력을 덧입힌다. 그 흔적은 리넷의 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람선 출항 직전의 퍼포먼스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유달리 클레오파트라에 자주 비유하며, 도일 부부는 자신들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빗대어 소개한다. 다만 그들처럼 나일 강 유람을 떠난 커플로는 정작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더 유명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 대목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정식으로 결혼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는 달리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저 연인관계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마치 영화 속 나일 강 유람에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역사는 도일 부부와 재클린, 이 세 인물 가운데 진짜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가 누구인지를 찾을 결정적 힌트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도 영화의 매력과 주제를 강조한다. 마치 이집트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사랑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시각적으로, 또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아부심벨 신전의 존재가 단적인 예시다. 작중 아부심벨 신전은 카르낙 호의 목적지이자 사랑으로 말미암은 비극이 시작되고 결말을 맞이하는 장소다. 흥미로운 것은 아부심벨 신전이 람세스 2세가 첫 번째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세운 신전으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관습을 거스르고 파라오인 자신과 같은 크기로 왕비의 조각을 세운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심혈을 기울인 아부심벨 신전의 생생한 묘사는 사랑의 다양한 단면이라는 영화의 주제와 한 몸이 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나일 강의 낮과 밤, 노을과 동녘을 아름답게 비추는 연출 덕분에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는 것은 결국 배우들이다. 전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페넬로페 크루즈, 조니 뎁, 윌렘 데포,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데이지 리들리와 같은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하면서 흠잡을 데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과 비교해봐도 <나일 강의 죽음>의 캐스팅은 밀리지 않는다. 갤 가돗, 아미 해머, 엠마 맥키, 레티티아 라이트 등 제각기 유명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꿰찼던 배우들이 안정적인 합을 보여준다. 다만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원작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한 결과물에서 들려오는 묘한 불협화음까지 온전히 가리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나일 강의 죽음>은 전작처럼 다시 한번 무난한 타임 킬링 영화이자 착실한 영화적 재현이라는 평가와 지루하고 안이한 리메이크라는 상반된 평가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A(Acceptable, 무난함)
모두를 설득할지언정 매료시키지는 못하는 세련됨과 클래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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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 세대가 공감할 현실적인 스릴러'가 될 뻔했으나
이사 온 지 일주일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수현이다. 현장에 출근하는 수현. 화장실 쪽에 작업이 이상하게 되어있다. 바로 노동자들을 호출하는 수현. 삼촌 뻘의 직원들이지만 수현이에겐 보이는 게 없다. 원래 윗사람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게 없는 건 수현의 직장상사 김 실장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눈빛으로 수현이를 쳐다보는 김 실장. 이런 눈빛이 부담스럽다. 이 눈빛은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할 때 더 부담스러워진다. 호칭이 변한다. ‘자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는 김 실장. 대충 눈치는 준다. 하지만 김 실장의 모습에 물러섬의 기색이란 없다. 애써 던지는 추파를 외면하는 수현. 아무튼 퇴근하면 집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서 발생한 큰 문제는 수현이가 퇴근한 이 집에서 일어난다. 세탁기가 고장 났다. 어디서 중고거래로 세탁기를 구하면 어떻겠냐는 직장동료의 말을 떠올린다. 무릎을 치는 수현. 어플을 켜서 세탁기를 검색한다. 적당한 매물을 찾은 수현. 뒤적뒤적 거려 더 나은 제품이 있을까 찾아본다. 없다. 횡재했다. 이 가격으로 물건을 데려온다는 것이 즐겁다. 며칠 지나 제품이 집에 도착한다. 세탁기를 구동해 보는 수현. 고장 났다. 화가 나는 수현. 판매자의 아이디를 추적해서 댓글에다 ‘이 사람 사기꾼이에요’라고 댓글을 단다. 여기서 수현이 직접 비극을 초래했다. 수현이가 타깃으로 설정됐다.
현실감의 공포
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정서는 ‘공포’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공포가 산재해 있다. 첫째는 중고거래의 공포다. 중고거래를 어플을 통해 하려면 어플이 필요하다. 물건을 어플에 올리고 가격을 제시한 다음 전화번호를 기재한다.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가 유출된다. 중고거래(내지는 인터넷거래)에서 개인정보를 올리는 건 양날의 검이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거래의 신빙성이 달려있다는 점이 구매자에게 중요하다. 반대로 판매자와 구매자들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연락처가 유출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외에, 단지 중고거래 어플사이트만 구경하는 사람에겐 ‘개인정보 노다지’라는 의미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겪을 수 있는 공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나름 꼼꼼하게 살렸다.
다른 공포는 ‘혼자 사는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공포’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데 있어 두려움을 느낄 만한 요소가 영화에서 큰 장치로 두 개가 삽입됐다. 하나는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에 약자의 입장에서 놓이는 경우가 몇 있다. 영화는 이 공포를 앞 문단에서 서술한 것과 병치시키며 중고거래 살인마만큼 무엇이 두려운지를 묘사한다. 또 영화 내적으로 묘사하는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 역시 최근의 대한민국을 연상케 하는 몇 요소가 있다.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현실이 연상되는 다양한 공포를 통해 승부수를 둔다.
무의미한 공포
이 영화가 선택한 큰 패착 중 하나는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추격자> 같은 경우는 흑막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방식이 아닌 ‘이 사람의 악행을 막아라’였다. 실제로 <추격자>에서는 빌런이 누구인지 초반부에 다 보여준다. <곡성>은 양자택일을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이란 영화 동시에 이번주에 개봉했던 <한 남자>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가 만들어졌다. 보통 영화를 보고 긴장감을 느끼는 건 관객이 이 ‘과정’에 감정적으로 동참하며 이뤄진다. <곡성>이 기존 호러영화의 클리셰를 뒤집어 신선한 장르 문법을 만들어 낸 것처럼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는 관객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키는데도 실패했지만 기본적으로 인물에 편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악역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 있다. 영화가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이 ‘악역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가’ 혹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이는가’다. 인물이 ‘이 정도로 돌아이니까 무섭지?’라고 질문하는 게 영화가 견지하는 긴장감이다. 이야기에서 분기점 찍기 전까지 명확한 사건전개가 없다. 그냥 범죄자가 수현 캐릭터를 괴롭히고 덜덜 떠는 게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화적인 과장이 캐릭터의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러닝타임 내내 가해지는 폭력이 불쾌하다. 이 설정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토대와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중고거래 판매자/구매자라는 설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 ‘나는 살인자와 중고거래를 했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들어간 것 말고도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 디테일을 살릴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심지어 이 두 설정을 뒤바꾼다고 해도 이야기엔 큰 지장이 없다. 심지어 중고거래라는 세팅을 층간소음으로 바꾼다고 하더라고 이야기의 큰 틀은 유지된다.
조금만 더
영화 전체적으로 뒷심이 부족하다. 우선 사운드의 믹싱 상태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대사가 안 들리는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소리가 먹힌 듯 깔끔하지 않다. 단적으로 영화에서 틈입하는 소리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되어 있다. 이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이야기에서 새는 것들이 몇 보이기 때문에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의 기본 설정 상 전자기기와 인터넷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이 부분을 감독이 잘 이해하고 영화에서 묘사했는지 역시 영화에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캐릭터의 몇 설정에서 차마 빚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 수현은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수현이의 직장 묘사도 마찬가지다. 수현의 동료 두 캐릭터는 영화의 메시지를 조성하기 위해 희생된 감이 있다. 굉장히 과하거나 소극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경찰 조직에 대한 묘사가 후반부에서 매가리가 없다. 초중반부에는 조직에 따라 행동하지만 후반부가 되고 나서는 경찰 구성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빌런 캐릭터도 지나치다. 이 인물이 실질적으로 이런 일들이 가능할지가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용인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빌런 캐릭터의 열연이 오히려 이런 허점을 더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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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한 냄새를 킁킁 맡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화
난 남자치고는 목소리가 높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살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에 부딪히는데, 역시 목소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전화상으로는 여자인 줄 알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게 특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목소리 높아서 살면서 장애가 생길 일이 몇 개나 있겠어? 당연히 없지. 그냥 남들이랑 다르다 뿐이지 그게 사는데 문제가 있고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남들과 다름'에 대해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쓸 말이 많아진다. 그냥 단순히 목소리가 높은 축에 속하지 않아도 타인과 우리를 를 구별하는 사례는 한 200만 개쯤 나올 수 있다. 습득력이 늦거나. 외모가 남들이랑 다르거나. 취향이 좀 다르거나. 이 외에도 살아오면서 각자가 겪는 페널티는 지천에 깔려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살면서 평범한 게 쉬웠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려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한 85%쯤 될 것이라 생각한다. 평범함이라는 단어의 뜻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것 없이 보통이다'라고 한다. 그럼 평범하게 사는게 쉬워야 정상 아닌가? 왜 우리는 이렇게 남들과 달라서 삶이 어려운 걸까? 가끔 보면 답답하다. 남들과 달라 얻는 이점도 있을 텐데. 세상이 이런 우리의 모습을 찾는다면 좋을 것 같은데. 인스타그램을 켜면 남들은 행복하게 사는 모습만 보인다. 그럼 안으로 마음의 뱡항이 꺾인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본 우리에게 우화 같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 덴마크로 날아가 보자.
1.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혐오에 관한 영화라는 점이다. 첫 장면. 주인공 티나는 출입국 사무소에서 일하는, 남들과 심각하게 다른 사람이다. 왜 다르냐고? 딱 처음 보자마자 보이는 특징이 있다. 외모가 솔직히 못생긴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티나에겐 뛰어난 능력이 있다. 그 사람의 냄새만으로도 감정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누군가가 마약을 가지고 이 출입국사무소를 지나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냄새로 쨘 하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 티나다. 이 티나는 동거인과 함께 살고 있다. 직업도 있고 같이 사는 애인 비슷한 것도 있어서 어찌 보면 평범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티나에게 보레라는 남자가 나타나며 완벽히 전복되는 일상을 경험한다. 일상이 전복돼서 얻는 서스펜스가 영화의 전부인 것이 아니다. 영화는 티나가 갖고 있는 비밀을 서서히 공개하며 주인공의 한 개인으로서의 딜레마를 묘사한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묻는다. 이 장면들을 보며 느끼는 생각들, 그거 다 네 입장에서 한 생각은 아닐까? 그게 맞는 걸까? 네 입장에서 한 생각들, 우리가 다 협소한 인간이라 그런 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시각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 영화다.
2.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우리가 배우가 된다고 생각해보자. 나에게 시나리오 한 편이 왔다. 근데 그 내용이 '얼굴이 남들과 심각하게 못생겼으며 냄새로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뭐 업이 연기인 사람이야 '이거야 쉽지' 싶을 수도 있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판타지, 드라마적 내용을 배우들이 큰 거리감 없이 소화해낸다. 또,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단점을 연기로 극복해낸 부분도 있다. 덴마크 언어는 우리와 좀 많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실제로 비행기 타고 덴마크로 가려면 환승이나 장기간 비행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근데 이런저런 페널티가 있어도 몰입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배우들은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3.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나요?
음.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화가 맞다. 근데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불쾌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대사가 많거나 플롯을 꼬아놓은 문제가 아니다. 이게 자세하게 쓰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는 우리 머리 안에 있는 경계선에 대해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무슨 말이냐고?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다. 근데, 우리 상식 밖의 이야기라고 느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하고 보시라는 뜻이다. 혐오스러운 장면은 없다. 우리 생각을 뒤집어놓을 뿐.
4.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지식이 있나요?
딱히 없다. 위에서 적었듯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 키 포인트가 될 것 같다.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사실 영화를 가볍게 보는 분들에게 엄청 과하게 추천해주고 싶지는 않다. 3, 4번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우리의 머리 안에 박혀있는 편견에 정면승부를 거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원래 영화가 이런 것도 말하나?'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잔인하거나 야하거나 이런 높은 수위를 많이 접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불쾌한 골짜기에 면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이트 팬들이 본다면 2시간을 땅바닥에 버린다!라는 뜻은 아니다. 이들에게도 좋은. 근데 화들짝 놀라는 정도가 더 정도가 클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사실 우리 모두다. 왜냐면, 우리 이 세상에 하나도 안 힘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각자도 각자 나름대로의 고달픔을 살고 있겠지. 나는 이 스트레스가 세상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온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만 해도 난 사회성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아서 혼자가 됐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왠지 어떤 프로그램에 나온 무슨 참가자가 어디 나사 빠진 행동을 하면 '이거 나인가' 싶어 찔리는 게 나인걸. 반면교사 삼아 성장한다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내가 싫을 때가 많다. 이런 내가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눈호강을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위로가 있었다. 난 확실히 이 영화를 보고 불쾌했다. 그래서, 불쾌한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냈기 때문에 감독이 따뜻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에게 불편함을 유발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때? 어느 곳에선가 우리는 공감을 통해 각자로 서 있을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손을 내미는 게 감독의 화법인데. 무작정 다 잘될 거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채로 여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더 강하게 서있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그 현실적인 해결책이 이 작품일지도 모르고. 다만 중요한 건 혐오가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겠지?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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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데미언 셔젤, 2014)에 관한 길고 장황한 글.
<위플래쉬> (데미언 셔젤, 2014)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
<위플래쉬>는 2014년에 개봉한 데미언 셔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고, 단연 빛나는 두 배우 J.K. 시몬스와 마일스 텔러의 연기력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데미언 셔젤의 장기인 영화의 리듬에 재즈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에 있어서, 그리고 음악을 중심으로 인물의 성장과 그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를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게 담았다는 점에서 필자도 현재까지 나온 데미언 셔젤의 최고작이자 한 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화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필자는 이 작품의 스릴러적인 요소가 이 작품을 ‘아주 재밌는 영화’로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영화가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가 파멸로 향해 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하고 싶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위플래쉬>의 메인 서사를 따라가되, 마지막 장면을 포함해 짚고 넘어가 볼만한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볼 것이다. <위플래쉬>는 관객에게 크게 어렵게 다가오는 영화도 아니기에 구태여 주요 장면들에 달아보는 해설같다는 느낌이 들어 재미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영화를 ‘파멸로 향해 가는’이라고 한만큼 엔딩 이후의 ‘앤드류’도 한번 해볼 생각이다. 다만 그 뒷얘기는 꽤나 삐딱한 이야기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속 재즈 음악이나 무대 공연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하면서 작성했으나, 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계신 분들의 수정과 첨언을 부탁드린다.
오프닝 장면부터 짚어봐야겠다. <위플래쉬>의 첫 번째 쇼트는 연습하는 앤드류를 복도에서 열려있는 연습실을 향해 롱 쇼트로 바라보다가 달리 인으로 점차 가까이 가서 컷으로 플레처 교수(J.K. 시몬스 분)가 등장할 때까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보다 더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암전된 상태에서 점차 템포를 올려가는 드럼 소리를-그리고 엔딩에서 다시 듣게 될- 들려주며 제목 ‘위플래쉬’가 나오는 게 첫 번째 쇼트다. 이 오프닝이 사실상 영화 <위플래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주는데, 템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드럼 소리는 앤드류가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과정,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리듬과 일치한다. 이를 인지하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자.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 앞에서 연주를 보여준 뒤 무시당하고,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앤드류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것을 아마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를 처음 만났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들어봤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선망을 품고 있다.
이후 단체로 연습이 진행 중이던 강의실에 플레처 교수가 난입한다. 플레처 교수는 두 번째 등장에서 그의 카리스마와 동시에 얼마나 청각이 예민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이때 앤드류는 본인이 연주를 잘했는지, 못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뜬금없이 플레처에게 교내 최고인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듣는다. 앤드류는 아무튼 ‘그에게 간택을 받았다’라는 자신감으로 평소 마음에 두던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앤드류의 파멸은 이제부터 진짜로 시작된다.
앤드류는 잘못 알려준 시간 때문에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뒤 9시 약 5분 전에 단체로 몰려오는 밴드 팀원들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초짜인 앤드류의 시선에서 이들은 교내 최고의 밴드의 일원인 만큼 제각각은 분주하지만 꽤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이를 빠르고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보여주면서, 9시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계의 쇼트는 이 분주한 와중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9시가 된 순간 플레처 교수는 이 장면의 리듬을 완전히 박살 내면서 등장하여, 모든 것은 플레처 교수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군생활 중 생활관에 등장한 대대장을 방불케 하는 이 장면은, 뒷 이야기를 위해 한 번 이렇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자신이 위치한 공간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춘다. 오로지 그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이 밴드는 플레처의 등장 이후 분주함은 사라지고 조화를 이룬다.
플레처가 밴드를 장악하는 방식, 사람을 다루는 방식,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자극하는 방식은 대체로 정서적 학대다. 필자는 이 글의 부제를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이라고 했다. 여기서 외력이란 플레처 교수의 자극이고 내력은 앤드류의 욕망과 감정이다. 플레처 교수는 사람을 자극하는 면에서, 사람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다루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까지 불사하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가야 할 대사는 “찰리 파커가 위대한 뮤지션이 된 건, 조 존스가 그의 머리에 심벌즈를 던졌기 때문이야”라는 대사다. 그리고 꼭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 앤드류의 머리를 향해 의자를-심벌즈와 꼭 닮은- 집어던진다. 앤드류는 이 자극에 엉망으로 무너졌다가, 그의 템포에 맞추기 위해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앤드류의 감정이라는 내력이 끌려 나오기 시작하는데, 피를 흘리면서 연습하는 장면의 무시무시함은 거의 호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앤드류는 태너의 악보를 잃어버리는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밴드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꿰차게 된다(이 대목은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미스테리로, 영화가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앤드류가 악보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미래가 기대되는 와중에, 영화 초반에 암시되었던 새로운 외력이 등장한다. 앤드류의 가족 중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없고, 신입생치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앤드류의 행보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앤드류의 친아버지조차도. 이 무렵부터 자기 증명을 향한 앤드류의 내력은 점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지게 되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즐겁다기보단 어딘가 살짝 나사가 빠진 듯한 눈으로 연주하는 앤드류를 담은 로우 앵글, 그리고 코넬리가 자기 자리를 뺏었다는 생각에 보이는 격렬한 감정적 반응, 여자친구와의 결별 선언이다. 이쯤부터 앤드류는 자기 증명 말고는 그 어떤 가치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드럼을 부수고 욕설을 내뱉으며 연주를 해나가는데, 이때 주의 깊게 봐야 할 반복되는 쇼트가 있다. 처음으로 피 흘리며 연습하는 장면에서 외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심벌즈에 밀려있던 앤드류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나와 있다. 지금의 앤드류를 움직이는 동력은 분노라는 내력이다.
첫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두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영화 중반부까지를 외력과 내력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는 자극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외력을 가하며, 자극받은 앤드류는 그 템포에 맞출 수 있도록 내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템포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면서 자극의 강도 또한 강해지고-플레처 외의 요인과 함께- 앤드류의 내력은 성취욕이라기보단 분노에 훨씬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하면서 더 강력해진다. 그러니까 <위플래쉬>는 오프닝에서 점점 빨라졌던 템포처럼, 앤드류의 외력과 내력이 엔딩을 향해 달리는 지옥의 밸런스 게임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플레처와 앤드류(외 2명)의 광기 어린 연습 장면은 이 지옥의 밸런스 게임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분에 330 더블 타임 스윙’ 템포의 기준을 제시한 뒤, 내력과 외력의 밸런스가 맞을 때까지 플레처는 계속 외력을 가한다. “빠르게! 더 빠르게! 멈추지 마!”
플레처의 템포에 맞춘 앤드류에게 벌어진 아주 뜻밖의 사건. 영화 <위플래쉬>의 전체의 리듬은 이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변주된다. 첫 번째는 물론 악보를 잃어버리는 사건이었고, 이 사건은 앤드류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되었다. 두 번째 사건, 타이어 펑크로 경연에 늦는 불상사는 첫 번째처럼 플레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건으로 본인이 간신히 얻은 기회에서 추락하는 계기가 된다. 간신히 내력을 끌어올려 맞춘 ‘더블 타임 스윙’을 보일 기회가 사라지려 하자, 앤드류는 피투성이로 무대에 오르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이 대목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며, “넌 끝이다”고 선언하는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분노를 표출한다. 왜? 한계치까지 오른 앤드류의 내력, 분노가 마땅히 분출되어야 할 지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적당한 앤드류가 마주한 뜻밖의 진실(사건이 아니다). 플레처 교수가 눈물까지 보이며 들려줬던 음악의 주인공 ‘션 케이시’는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한 것이고 그 원인은 플레처 교수의 지도를 받던 시절부터 나타난 불안과 강박 증세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정되는 사실은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만 이런 외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심벌즈나 의자를 던졌다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이전의 앤드류’가 있었으며, 그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앤드류의 반응이 묘하다. 앤드류는 자신이 당한 가혹 행위에 관해 ‘그는 잘못이 없다’며 그를 감싼다. 왜? 그를 폭행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해 제적을 당했으면서?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외력으로 다가왔으나, 앤드류가 음대에 입학하면서 필요로 한 것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정신적 지지였다. 그러나 앤드류의 친아버지는 앤드류의 진로를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탐탁지 않아 했고, 아들이 다른 사촌들처럼 예술 외의 진로를-그가 진정 ‘재능’으로 생각하는- 택하길 바랐다. 앤드류는 친척뿐 아니라 자기 직계가족인 아버지로부터 그의 행보에 대한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지옥 같은 자극을 줄지언정 그의 재능을 발굴하고 ‘Whiplash’, 채찍질해주는, 가끔은 격려를 통해 따뜻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플레처 교수를 자신의 아버지로 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그를 감싸주는 행위를 하지만 자신을 아끼는 친아버지를 보고 끝내 앤드류는 그를 고발하는 데 동참한다. 여기서 이 장면을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어린 시절 영상을 보는 앤드류, 개인 연습실을 정리하는 앤드류로 교차편집했다. 나눠서 보여줘도 이상한 것이 없는 이 장면을 교차편집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일까?
영화 <위플래쉬>, 그리고 앤드류를 중심으로 한 내력과 외력의 주도권 경쟁엔 ‘부자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교차편집 장면을 부자 관계를 통한 설명으로 바꿔보자. 끝없이 채찍질 받으며 자신도 성장했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친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앤드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배신하고 원래의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앤드류. 한 장면에서 현재, 과거, 미래의 부자 관계를 충돌시키면서 앤드류가 느끼는 공허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음악을 관둔 앤드류가 위치한 환경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고 화려했던 학교와 무대와 다르게 조용하고 공허하다. 공간과 청각 감각의 대비. 목표나 자기 증명을 향해 자신을 자극하던 외력도 없고 자신을 이끌었던 내력도 사라진 상태의 앤드류. 사실상 앤드류는 자신의 성취를 향한 갈망을 거세당한다. 물론 이쯤에서 영화가 끝날 리가 없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들은 스크린에 팝콘 통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뜻밖의 사건. 세 번째 사건이 다시 이 영화의 리듬을 바꾼다.
앤드류는 길을 걷다가 아주 우연히 작은 재즈 바의 공연에서 플레처 교수를 다시 만난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플레처가 직접 보여주는 연주. 강압적인 선생이-혹은 아버지가- 아닌 재즈를 사랑하는 뮤지션의 면모. 앤드류는 자신이 배신한 과거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플레처는 바를 나서려는 앤드류를 붙잡고 자리를 마련한다.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자신이 강단에서 물러났음을 말하며 자신이 학교에서 했던 역할은 학생들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사가 퍽 인상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 정도면 잘했어’(Good Job.)야.” “제2의 찰리 파커라면 좌절하지 않지.” 플레처는 재즈가 죽어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쉬운 것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고, ‘버드’ 찰리 파커와 같은 스타 탄생엔 조 존스의 심벌즈처럼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마음이 매우 복잡해지는 앤드류에게 재즈 페스티벌의 공연 자리를 제안하며, 코넬리는 앤드류를 자극하려고 데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네가 제2의 찰리 파커이길 기대하고 있다’와 같은 발언. 플레처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다.
다시금 가슴이 불타오르는 듯한 앤드류.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 그날처럼 니콜에게 전화를 건다. 카메라는 방문 프레임 안에 앤드류를 두고 바라보다가 니콜이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계속 앤드류를 바라보고 있는 롱테이크. 관객들은 앤드류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앤드류는 한 번 선택한 일은 되돌릴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꿈을 선택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버리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과 꿈을 두고 양자택일하는 주제는 데미언 셔젤의 이후 영화들에서 계속 반복된다)
JVC 무대는 누군가의 커리어 혹은 인생을 아주 긍정적으로나 아주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큰 무대다. <위플래쉬>에서 첫 번째 사건은 기회였고, 두 번째 사건은 몰락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사건은? 세 번째 사건은 둘 다다. 앤드류에겐 기회지만 플레처에겐 앤드류의 몰락이다.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앤드류인 것을 눈치챈 플레처는 이 업계에서 앤드류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부른 것이다. 플레처가 이제 바라는 것은 앤드류의 성장이 아니라 파멸이다. 이 동기라기보다 악의에 가까운 행동은, 앤드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고 가장 강력한 외력이 될 것이다. 물론 앤드류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Upswingin’’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연주를 망친다. 그리고 플레처의 한 마디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아니야.” 플레처가 기다리던 제2의 찰리 파커가 아니라는 말이자, 너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배신에 가까운 아버지의 선언. 앤드류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이 있을까? 공포에 가까운 관객의 시선을 뒤로한 채 앤드류는 무대를 나서고 친아버지는 앤드류를 안아주며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바뀌어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지나치게 자기 계발 격언으로 사용되곤 하는 니체의 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플레처의 악의 가득한 외력은 앤드류를 끝장내지 못한 것일까? 혹시 앤드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 소리도 화려함도 없는 공허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플레처가 가하는 그 가혹한 외력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앤드류는 자신을 배신한 애증의 아버지에게 플레처에게 복수해야 한다. 앤드류의 내력은 이제 분노라기보단 집념에 가까워 보인다. 앤드류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복수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명은 플레처의 인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이자 마지막 장면의 진행은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따라가야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지휘 사인 없이 혼자서 연주를 시작하고 옆에 있는 콘트라베이스부터 자신의 신호에 따르게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플레처의 템포, 플레처의 자장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강의실이라면 뭐라도 던졌겠지만, 공식적인 무대이므로 플레처는 이미 시작된 연주에 따르면서 ‘팔이나 휘두르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자가 된다. 우리는 앤드류가 그리도 지독하게 연습한 더블 타임 스윙, Caravan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과연 프로 밴드답게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연주가 만족스러운 플레처는 이 무대에 합세하기로 한다. 이때 앤드류와 플레처, 다른 말로 앤드류의 내력과 외력이 얼마나 조화로운지는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시그니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화면이 주고받는 패닝 쇼트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레처 둘 다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플레처는 연주를 마친다는 사인을 보내는데 앤드류는 멈추지 않고 독주를 이어 나간다. 왜? 앤드류에게 아직 할 일이 더 있는 것일까?
앤드류는 이 밴드의 주도권을 플레처로부터 빼앗아 오긴 했지만, 아직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증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어지는 앤드류의 드럼 솔로 독주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일갈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앤드류의 행동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것인지 뜯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앤드류의 독주는 플레처, 밴드 단원들, 공연 스태프들, 모두를 당황시킨다. 첫 번째로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개인 지도를 한 적도 없으며, 독주 버전의 ‘Caravan’을 지도한 적 역시 없다. 앤드류는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버디 리치가 실제로 드럼 솔로가 부각되게 편곡한 버전처럼 독주를 시작한다. 두 번째, 플레처는 곡 소개를 하면서 ‘Upswingin’’이 ‘익숙한 명곡이 아닌 새로운 레퍼토리’라고 하였다. 앤드류가 자신의 주도로 Caravan을 시작하는데, 앤드류와 달리 ‘프로’인 연주자들은 악보 없이도 최상의 연주를 들려준다. 다들 손에 익을 정도로 연습이 된 곡이라는 소리이자 뒤집어 말하면 누구나 아는 명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곡 뒤에 누구와의 합의도 없이 '독주'를 시작한다. 세 번째로 무대의 조명은 플레처의 지휘 사인과 함께 꺼졌다가 앤드류의 독주 시작과 함께 다시 켜진다. 지금은 페스티벌의 오프닝이고 그들은 한 팀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밴드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밴드지, 앤드류의 밴드가 아니다. 앤드류는 이 밴드의 메인은커녕, 마지막에 들어온 일원일 뿐이다. 지금 앤드류가 하는 행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행동이다. 앤드류는 무대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무대 자체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무대로, 모든 템포를 자신에게 맞추도록 바꾼다. 이것이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내가 제2의 찰리 파커가 맞다’고 복수하는 방법이자 증명하는 방법이다.
피를 봐야만 가능한 수준의 연주, 앤드류는 정말 광인처럼 드럼을 두들긴다. 여기서 앤드류의 친아버지의 시점 쇼트와 클로즈업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 복잡하다. 필자는 이 클로즈업이 ‘아들을 지지해주지 못한 죄책감’이라기보단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표정 같다. 끝내 앤드류를 집에 데려오지 못한, 플레처라는 악마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만 아버지의 괴로움. 앤드류와 친아버지는 그 시점 쇼트의 거리감만큼이나 멀어진 것 같다. 시점 쇼트 직전에 잠시 사운드가 사라지고 프레임 속에 앤드류의 상체만 잡았다가 다시 사운드를 키우는 장면은 충분히 과잉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필자는 이 부분이 자신을 욕망을 거세하려 하는 애증의 아버지와 친아버지 둘 앞에서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장면같다고 느낀다. 아까 2번째 사건에서 앤드류의 내력이 ‘분출’할 곳을 잃었다고 했듯이, 지금 이 장면은 앤드류 내력의 거대한 분출 장면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오프닝에서 끝까지 듣지 못했던 부분은 이 하이라이트에서 마저 듣게 된다.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속주 다음, 이 격렬한 영화의 마지막 분출 이후 프레임이 입까지 잡고 있지 않기에 정확하지 않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뭔가를 말한다. 이 영화의 맥락상 그 발언은 높은 확률로 "Good job"이다-“네가 제2의 찰리 파커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맥락상 Good job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앤드류는 이 처절한 자기 증명에 성공한 듯하다. 영화 <위플래쉬>는 딱 이 부분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런 영화라면 영화가 끝난 다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위플래쉬>를 파멸로 향해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생각한다고 했다. 앤드류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를 논하는 것은 개인적 가치관의 문제다. 그런 얘기는 영화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앤드류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보다는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앤드류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영화는 이미 끝났고 카메라로 찍히진 않았으니 사실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필자가 작성한 속편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하겠다.
앤드류는 JVC에서 무지막지한 연주를 보여줬고, 그는 친아버지가 조롱하던 링컨 센터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가 앤드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더 이상 앤드류에게 외력이 없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이제 늘 자기 자신과 사투해야만 한다.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인정받았으니 앞으로도 관계가 지속되지 않을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플레처는 공교롭게도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을 해버렸다. 그는 이제 긍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에게, 제2의 찰리 파커에게 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플레처는 앤드류가 선택한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제2의 찰리 파커를 위해 자극시키는 법만 아는 인간이다. 플레처는 아버지나 선생의 위치에서 자식이나 제자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아주 부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는 아버지로부터 곧바로 독립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과연 ‘스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있다. 플레처는 바에서 만난 앤드류를 다시 자극시키면서 퍽 인상적인 대사를 몇 마디 내뱉는다. ‘요즘 세상은 뭐든 쉬운 걸 원해. 그러니 재즈가 죽어가지. (…) 그런 제자를 키워보려고 누구보다 노력했어. 그래서 내 노력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어.’ 플레처는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노력을 계속해나간다면 언젠가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아마 현실 또한 마찬가지로- 재즈는 죽어간다. 그러니까 재즈라는 장르가 아예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재즈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필자의 생각엔 재즈의 시대를 풍미할 스타는 그때 이미 탄생했고 지금은 탄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 수도 없다. 그런데 플레처는 이 불가능한 일을 한계 이상의 외력을 통해, 정서적 학대를 통해 해내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인간이 있을까? 영화의 내용이 꼭 도덕이나 윤리에 부합할 필요는 없고, 가치판단에 그다지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확실하게 끔찍한 이야기다. 필자는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만, 개봉 당시에 <위플래쉬>를 보고 자극받았다는 몇몇 네티즌들의 평가에는 다소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앤드류의 내력이 점점 더 높아져 가면서 소위 말하는 ‘인간미’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므로 앤드류는 성공 가도를 걷든, 걷지 못하든 그는 스스로 파멸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앤드류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긴 했지만, 과연 플레처를 만나기 전에도 ‘이름만 남길 수 있다면 약물중독으로 단명하는 삶’을 바라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플레처를 만나기 전의 앤드류는 성공했을지 못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위플래쉬>는 앤드류가 플레처를 만나면서 시작하고, (아마도) 함께하는 마지막 무대에서 끝난다.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는 확실히 파멸할 것으로 보인다. Whiplash… 채찍질이란 뜻의 영어단어다. 플레처는 채찍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암전이 끝난 이후 앤드류가 연습을 시작하자 천천히 달리 인으로 앤드류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앤드류가 누군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자 플레처 교수로 컷이 되지만, 앤드류로 향해 가는 카메라는 플레처의 시점 쇼트가 아니다. 명백하게 앤드류가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일치하지도 않고 플레처의 눈높이와 카메라의 아이 레벨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 이동은 뭘까? 내 생각엔 앤드류에게 ‘플레처라는 채찍’으로 ‘불행’이 서서히 다가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앤드류와 플레처의 더블 타임 스윙 연습 부분에서 주목해 볼만한 것은, 플레처가 외력을 가하는 대상이 앤드류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태너와 코넬리, 그 외의 밴드의 구성원들 또한 플레처의 자장 안에 있는 동안은 이 외력의 객체가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위플래쉬> 속 세상에서 꽤 시간이 지난 다음, 플레처 교수는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아마도 제3의 찰리 파커를 위해, 아니 어쩌면 너무 빨리 떠난 제2의 파커를 다시 찾기 위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고 있을 것이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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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가 최악인가, 사람이 최악인가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 글 분량을 채울 수가 없겠더군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제목에서 최악이 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언뜻 들어서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과연 그럴까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영화 안에서 두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최악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율리에와 사랑에 빠진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 분)과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롬 분)는 각자의 매력을 지닌 이들이긴 하지만 완벽한 연애 상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도 연애할 수 있을 것 같은 율리에는 왜 악셀과 에이빈드를 만나 자기 자신에게 못할 짓을 하게 되는가. 악셀과 에이빈드를 만나며 활기차 보이는 율리에지만 정작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이다. <라우더 댄 밤즈>를 통해 한 가족을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 파헤치고, <델마>에서는 사랑에 빠진 초능력자 레즈비언 여성의 성장기를 보여준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두 이야기를 합친 것 같은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기 전 이미 악셀과 연인 사이였고,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되는 오랜 커플의 전형처럼 보인다.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는 오랜 커플이 그렇듯 권태기가 찾아오고, 서로에 대한 의리가 있어 대놓고 바람을 피우지는 못한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에이빈드는 악셀보다도 잘 통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옷이 쌓인 침대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급기야 서로 화장실에서 배설하는 모습까지 공유하지만 선을 넘는 신체 접촉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이 헤어질 무렵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바람은 아니라고 도장찍듯 대화를 나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율리에는 에이빈드의 이름을 묻지 않고 헤어지지만 역시나 많은 영화에서처럼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율리에는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만큼 악셀에게 더 이상 설렘을 느끼지 못하면서 왜 헤어지지는 못하는 것일까. 이 장면은 율리에가 악셀에게 최악의 연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악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기 자신에게 못할 짓을 하는 율리에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나기 전 악셀의 가족을 만났을 때 악셀과 나누는 대화는 도통 두 사람이 연인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대화를 나누는 주제마다 부딪히고, 특히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는 율리에와 악셀은 가족을 이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율리에가 철저하게 약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자고 싶지 않다며 떼를 쓰는 아이를 혼내고 보채는 건 결국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이기에 율리에에게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세세한 과정에서 실익을 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악셀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율리에의 입장에 공감해주지 못한다. 심지어 임신과 출산의 주체가 여성인 율리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할 때 율리에는 악셀과의 관계에서는 가족을 이룬다는 전제 하에 선택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치만을 점유한다. 영화 중반부 만화 작가로 일하는 악셀이 과거에 그렸던 여성 비하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면 악셀이 율리에(를 포함한 여성)에게 최악의 사랑이 될 것을 관객은 짐작하게 된다.
이런 악셀에게 지쳐갈 때 만난 이가 아이 생각이 없다는 에이빈드였다. 임신 출산의 주체로서 여성을 인정하고 선택권을 온전히 넘겨주는 정도는 못 되지만 최소한 에이빈드와는 가족을 이루는 문제에 있어 다툴 필요가 없다. 악셀과 함께 사는 집에서 일어나 부엌 불을 켠 순간 세상이 멈추고 에이빈드를 찾아 밝은 표정으로 거리를 달려나가는 율리에의 모습은 악셀과의 세상은 더 이상 역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모두가 멈춘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있는 에이빈드는 멈춘 세상에서 유일하게 매력적인 남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에이빈드와 키스 후 돌아와 부엌 불을 껐을 때 비로소 악셀은 움직인다. 부엌불은 악셀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메타포로서 작용하는데, 밝은 빛 아래에서 결점까지 보이는 악셀을 더 이상 율리에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런 악셀과 살기 위해서는 불을 끄고 어느 정도 흐린 시선으로 악셀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에이빈드라는 선택지가 생긴 율리에는 어둠 속에서 악셀과의 세상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서 악셀과 이별을 통보하는 율리에는 다른 사람이 생겼느냐는 악셀의 질문에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리에가 악셀에게 최악의 인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에이빈드를 만나 안정된 것처럼 율리에는 보이지만 파티에서 마약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에이빈드가 율리에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님에도 에이빈드의 전 여자친구인 수니바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며 자신과 비교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이빈드와의 관계가 안정되어 갈 때쯤 율리에는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맞닥뜨린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 그리고 악셀이 암으로 죽어간다는 것. 아이 생각이 없던 여성이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취하는 행동은 자신에게 최악인가, 연인에게 최악인가? 임신 자체가 모체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때 어떤 선택을 하든 율리에는 자신에게 최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 생각이 없었음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을 두고 출산을 고민하는 동시에 악셀을 찾아간 율리에는 에이빈드가 아닌 악셀에게 먼저 임신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리에가 에이빈드에게 최악의 연인인가? 임신한 여성의 선택의 결과는 본인이 오롯이 그 책임을 감당할 뿐 주변인의 그 누구도 당사자만큼의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
모호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율리에의 선택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연애하는 내내 자신에게 최악의 선택만을 하던 율리에는 커리어를 이어가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율리에를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공개적으로 비하하던 악셀은 아마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에이빈드는 율리에를 떠나 새로운 인연을 맞이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에이빈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율리에는 사랑을 떠나고서야 자기 자신에게 최악인 사람으로부터 벗어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자신에게 최악일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을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을 영화는 밝은 톤으로 보여준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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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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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우성 <보호자> ·이정재 <헌트>, 토론토국제영화제 초청 쾌거
ⓒ 네이버 영화
정우성 배우와 이정재 배우의 감독으로써의 첫 연출작이 토론토국제영화제에 나란히 초청되었다.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정우성 감독의 <보호자>는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었다.
장항준X김은희 <리바운드>, 크랭크업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항준 감독의 신작인 <리바운드>가 7월 13일 크랭크업했다고 지난 29일 제작사에서 밝혔다.
<리바운드>는 해체 위기의 모교 농구부에 부임한 신임 코치와 여섯 명의 선수들이 전국 대회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영화에는 안재홍, 이신영 정진운 배우 등이 출연한다.
한승연, <최악의 이웃과 사랑에 빠지는 방법> 출연
ⓒYG엔터테인먼트
한승연 배우가 영화 <최악의 이웃과 사랑에 빠지는 방법: 언택트 러브> 출연을 확정했다.
영화는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녀가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좌충우돌 로맨틱 코미디이다.
<공조 2>, 9월 개봉 확정
ⓒ CJ ENM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 <공조>의 속편인 <공조2: 인터내셔날>이 9월 개봉을 확정했다.
영화에는 <공조>의 출연진인 현빈, 유해진, 임윤아 배우가 이어서 나오고, 다니엘 헤니와
진선규 배우가 새롭게 등장한다.
<탑건: 매버릭>, 외화 흥행 수익 1위
ⓒ CJ ENM
<탑건: 매버릭>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에서 개봉한 외국 영화 중 최고 흥행 수익 1위를
차지했다. 지난 6월 22일 개봉했지만, 여전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탑건: 매버릭>의 누적 관객 수는 700만을 넘어섰다.
해외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매출 1억 달러 돌파
ⓒ IMDB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글로벌 박스오피스
매출 1억 달러를 돌파했다. A24 제작 영화 중 처음으로 매출 1억 달러를 돌파한 작품이다.
영화는 멀티버스 소재로 세탁소 사장 에블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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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ㄷㄷㄷ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찍을수 밖에 없는 이유.보시면 압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크리미널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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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리뷰]부모라면 꼭 봐야할 영화, 어른들의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리뷰입니다.
예고편을 다량 사용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수익창출을 포기하겠습니다. 영상만 내리지 말아주세요!사용 예고편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x2TGD...
https://www.youtube.com/watch?v=A__FO...
https://www.youtube.com/watch?v=HyS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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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시스턴트> 리뷰 예고편
꿈에 그리던 영화사에서 보조 직원으로 일하게 된 '제인'
어떤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소한 사무실 정리부터 상사의 개인적인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 종일 몰아치는 잡다한 업무에 지쳐간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한 여성이 찾아오면서 회사 내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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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쿠폰의 여왕> 메인 예고편
명품백, 슈퍼카, 최신 무기까지 쿠폰으로 찢었다! [#쿠폰의여왕]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