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4-12-10 16:37:40
얼룩이 온기와 구원이 되기까지
팀 밀란츠 감독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야적장에서 하루종일 석탄과 장작을 나르며 일하고 집에 돌아온 빌 펄롱(킬리언 머피)의 손은 까만 얼룩이 져있다. 빌은 모자와 외투를 벗어두고, 현관 바로 앞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손과 얼굴에 묻은 검댕을 꼼꼼히 닦아낸 후에야 아내와 딸들이 있는 거실로 들어간다. 펄롱은 비누와 솔만 들어있는 케이스를 꺼낸 후 세면대에 받아 놓은 물이 까맣게 변하고 자신의 손은 깨끗해질 때까지 비누 거품을 내고 솔로 문지른다. 펄롱이 손을 씻는 과정을 클로즈업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다섯 딸에게 한 점의 더러움도 묻히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는 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좁은 현관 통로는 따뜻하고 깨끗한 거실로 들어가기 전 더러움을 닦아내는 중간 지대의 역할을 한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이어지는 좁은 문은 닫혀 있지 않지만 집의 공간을 분리한다. 영화 속 카메라는 문틀 너머에 펄롱을 위치시키며 일정한 거리감을 조성한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어린 시절, 새벽에 수녀원의 석탄 창고를 들어갔을 때, 수녀원에서 겁먹은 소녀들을 볼 때 문틀 안의 펄롱이 느끼는 감정은 고독함과 고뇌다.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 클레어 키건은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라는 문장으로 펄롱의 고뇌를 표현한다.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감각은 보는 이의 마음을 강력하게 붙잡는다.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이어진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는 조금이라도 타락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을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며 삶의 자유를 빼앗았다. 미혼모, 성매매 여성, 고아,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까지 대상은 불명확하며 넓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환경의 여성들이 가는 감옥이었다. 아일린은 우리의 딸과 그 아이들은 다르다며 차갑게 선을 긋는다. 마을 사람들이 짐짓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수녀원의 영향력이 마을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펄롱의 딸이 다니는 세인트마거릿 학교는 수녀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수녀원은 펄롱의 야적장을 이용하는 주요 고객이고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돈을 주고 있다. 감금된 여성들의 노역으로 쌓아 올려진 풍요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장면이 있는 법이다.
선의는 언제나 옳다고 배워왔지만, 현실에서 선의를 베푸는 것은 복잡한 용기다. 누구나 모른 척 지나칠 수 있는 상황에서 선뜻 손을 내미는 일은 무언가를 무릅쓴 사람의 행동이다. 까맣고 차가운 석탄은 스스로를 태워 밝고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태울 용기와 작은 불씨가 필요하다. 펄롱에게 그 부싯돌 역할이 된 인물은 수녀원에 의해 석탄 창고에 갇힌 어린 소녀 세라다. 어깨에 무거운 석탄을 둘러업고 석탄 창고 안으로 들어간 펄롱은 어둠 속에서 세라를 발견한다. 공교롭게도 미혼모였던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는 출산을 5개월 앞둔 채 수녀원에 의해 석탄창고에 갇혀 추위와 어둠에 떨고 있었다. 기댈 곳 없는 아이를 보호하는 일은 수녀원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가 되고 만다.
펄롱은 자주 어릴 적 기억에 휩싸인다. 주로 창과 거울을 통해 이어지는 플래시백은 펄롱의 과거와 현재를 묶어준다. 아버지가 없었던 어린 자신과 자식을 키우며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얼굴은 과거의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현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괜찮은 걸까?” 펄롱은 아일린에게 묻는다. 아일린은 경제 사정을 묻는 것인지, 부부의 안위를 묻는 질문인지, 자녀들의 미래를 묻는 질문인지 의아해하며 적금을 넣고 있으니 괜찮다고 답한다. 그러나 ‘우리’에는 그보다 더 넓은 의미의 가족, 나아가 공동체 전체의 안위를 포함하고 있다. 펄롱은 어린 세라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본다. 모두가 자신의 딸이자 어머니다.
펄롱은 세라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어린 자신 역시 구원한다. 영화는 원작 소설과 달리 어린 세라의 아이를 엄마와 헤어지게 두지 않는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그랬던 것처럼 세라와 그의 아이를 보호하며 한 가족을 지키게 된다. 펄롱은 세라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좁은 현관 통로에서 간단하게 손을 씻은 펄롱은 아직 얼룩이 가득한 세라의 손을 잡고 거실로 함께 들어간다. 언제나 고독함과 고뇌와 고단함의 프레임이었던 문틀 너머로 희망과 확신을 품고.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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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 70년째 바뀌지 않는 수통 안을 들여다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헌병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이병 '안준호(정해인)'는 선임인 '조석봉(조현철)'의 친절과 병장인 '황장수(신승호)'의 괴롭힘 속에서 군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준호의 관찰력과 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중사 '박범구(김성균)'는 그를 D.P. 팀으로 옮기지만, 준호는 첫 번째 임무에서 선임의 실수로 인해 처참히 실패하고 영창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롭게 부대에 부임한 대위 '임지섭(손석구)'은 준호의 실패가 온전히 그의 책임이 아니라 판단하고, 본래 D.P. 팀이었던 상병 '한호열(구교환)'을 복귀시켜 준호와 같은 팀으로 배치한다. 천방지축이지만 풍부한 경험을 쌓은 호열은 준호에게 필요한 노하우를 알려주고, 그들은 한 팀으로서 탈영병들을 쫓기 시작한다.
27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는 웹툰 <D.P 개의 날>을 영상화한 작품으로 <뺑반>과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이 연출과 극본을 맡고 원작 작가인 김보통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D.P.>는 공개 직후부터 수많은 현역, 예비역들의 악몽을 유발하는 사실적인 군생활 고증으로 이슈몰이를 하면서 넷플릭스 인기 있는 콘텐츠 top 10에 오를 정도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기의 배경에 단지 리얼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잊고 싶은 그 리얼함마저도 화제가 된 진짜 배경에는 군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메시지와 주제의식, 특히 변하지 않는 군대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하고 있다.
제목인 <D.P.>는 탈영병 추적병을 뜻하는 Deserter Pursuit의 줄임말로, 드라마는 이름대로 탈영병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추적병들의 이야기를 여섯 에피소드로 나누어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레 각 탈영병의 사연을 소개하고 각종 병영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한다. 살인자를 잡기 위한 첫 단계로 살해 동기를 파악하듯, 탈영병들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탈영 동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중 묘사되는 사연들은 구타를 비롯해 코골이가 심하다는 이유로 방독면 씌우고 물 붓기, 하의를 벗긴 후 라이터로 음모 태우기, 자위행위 강제하기, 얼굴에 살충제 뿌리기 등 군대를 경험했다면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사실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외에도 <D.P.>는 폭력과 관계는 없지만 그 못지않게 병적인 여러 모순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군대를 갈 경우 가족을 돌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인원 부족으로 인해 징집률이 약 90%에 이르는 현행 징병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타 부대와 협동하여 탈영병을 잡는 과정에서는 병사와 병사, 병사와 간부 간의 갈등에 가려져 있던 부사관과 간부 간의 대립과 부조리를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육군 주임원사들이 '인격권을 침해당했다"며 육군참모총장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던 사건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박찬주 전 육군 대장 갑질 사건 사건처럼 일부 간부들이 병사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악습 역시 카메라에 포착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들을 갓 입대한 이병 안준호의 시점에서 접하다 보니 더욱 충격적으로 묘사되어 간접 체험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아직 군대와 사회 사이에 서 있는 이병이라는 계급의 특성과 더해져 단지 탈영병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 조직 전반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탈영병을 잡지 못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단지 탈영병이 겪은 폭력뿐만 아니라 탈영병을 잡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문제, 서류와 현실이 따로 놀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면피하려는 군대 특유의 문화를 제대로 꼬집는다. 그래서 사회와 이질적인 시스템 안에서 마치 자신의 얼굴을 피멍이 들 때까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안준호의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며, 가슴 아픈 연출이다.
또한 <D.P.>는 단지 문제를 열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모순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존속되는 근본 원인을 나름대로 고찰해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피해자인 일병 조석봉과 가해자인 병장 황장수가 있다. 평범한 미대생이자 친절한 학원 선생님이고, 후임인 준호에게 "우리는 선임처럼 되지 말자"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선량한 청년이었던 석봉. 그는 거듭되는 황장수의 폭행으로 인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하나의 괴물, 복수귀로 변해간다. 황장수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를 사로잡은 순수한 기쁨과 광기, 그리고 해방감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선후임의 관계를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남겨두지는 않는다. 대신 황장수가 저지른 범죄와는 별개로 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군대라는 조직이 만들어 낸 피해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왜 자신에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고 미안해하지 않느냐는 석봉의 말에 장수는 "그냥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은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수가 처한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치우려는 장수에게 사장은 군필이 일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고 비난한다. 이 비난 밑바탕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본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 한 현행 유지가 주 목적인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가 깔려 있다.
그래서일까? 장수의 대답을 들은 석봉도 비슷한 맥락으로 항변한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만 범죄냐고. 자신을 체포하려 하고 부대로 되돌려 보내려는 너희들도 내가 고통받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고 일갈한다. 이렇게 <D.P.>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었듯이 두 선후임의 입을 빌려 군대라는 조직 안에 들어온 이상 군대니까, 곧 군대가 끝날 거니까, 군대가 끝났으니까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고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꼬집는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에 오히려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진다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감은 마지막 에피소드의 부제가 '방관자들'인 이유이자,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며 성매매 가해자인 청소년들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게 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대목이다.
다만 탈영병 하나하나의 살아 숨 쉬는 사연이 한국군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깊은 울림을 주는 것과 달리 정작 두 주인공들의 서사에 큰 비중이 주어지지 않은 점은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전개의 중심에 두고, 이 사건들을 등장시키고 소개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들을 쫓는 입장인 준호와 호열을 사용하다 보니 주인공인데도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특히 호열의 경우 재기 발랄한 존재감과는 별개로 그의 서사라고 할 것이 딱히 없다. DP 병에게 필요한 각종 정보와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선임이자 멘토로서 소비될 뿐이다. 그가 과거 한 탈영병에게 칼을 맞은 적이 있고 그 사건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암시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조차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복싱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액션씬에서 활약하는 준호와 달리 액션의 측면에서도 활약상이 많지 않다. 이는 그나마 원작과 달리 이병 신분으로 등장한 준호가 탈영병들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이끌어 내고, 그들과 자신의 군생활을 대비시키면서 처음 느낀 좌절과 자괴감으로부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대비된다.
사실 DP병의 존재가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단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탈영병을 잡아오는 게 임무인 DP병은 군대라는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의 최전선에 위치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조차 탈영병들과 다를 것 없는 부조리에 시달리고 같은 잘못을 범하는 모습은 군대에 끌려와 피해자가 된 이들이 오히려 범죄자로 전락하는 이 딜레마를 집중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었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부제처럼 '군견'이 되어가는 이들의 고뇌를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시즌제를 염두에 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DP병의 비중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된 톤, 문제의식, 명확한 메시지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D.P.>는 박수받을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결말만 보더라도 이 드라마의 우직함이 느껴진다. 일견 <D.P.>의 결말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대대장의 훈시가 끝난 후 다른 병사들의 대열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걷는 준호의 모습은 군대가 변할 수 있으며 자신부터 달라지겠다는 희망과 다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중 시간적 배경인 2014년에 실제로 발생한 임 병장 총기 난사 사건이 모티브가 된 듯한 쿠키 영상을 통해 <D.P.>는 그 희망의 범위를 축소시킨다. 석봉의 말마따나 6.25 전쟁 때 쓰던 수통이 아직도 훈련소와 자대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이 군대에 희망이 꽃필 것이라는 희망이 얼마나 나약한 지, 그 냉혹한 현실을 숨기지 않는다. 7년이 지난 2021년 현재에도 끊이지 않는 군대 내 악습과 구조적 문제를 보면 이렇게 최소한의 희망만을 간직한 채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와 특성을 솔직 담백하게 담아내는 <D.P.>의 선택이 많은 공감을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현실 군대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쓰던 수통도 있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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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살 차이 나는 커플의 사생활을 밝혀나가는 어느 배우의 탈선!
시놉시스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와 결혼해 미국의 신문 1면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런 과거를 알아보려고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가정에 찾아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배우라서 그런지 자신의 영화에 쓰일 자료를 모으려고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레이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자베스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녀의 집착에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엘리자베스 (나탈리 포트만)
엘리자베스는 줄리아드에 나온 배우이며 여러 영화들을 찍었다. 그리고 연출도 하고 있는데 그레이시에 대한 사생활을 그녀의 지인들에게 캐묻기 시작하고 많은 정보들을 알아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레이시의 남편인 조까지도 유혹한다. 조의 직장에 들어가서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친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에는 성관계까지 맺는다.
천식이 있어 호흡기가 있어야 되며 부모가 너는 너무 똑똑한데 왜 배우를 하냐고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또한 자신보다 내면이 여리고 어린 조와 불륜을 시작하면서 곤란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레이시 (줄리안 무어)
그레이시는 자신보다 23살 어린 남자인 조와 결혼했다. 자신은 만난 남자도 별로 없으며 조와는 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집에 오자마자 큰 환영을 하지만 그런 엘리자베스의 집착에 싫증이 나고 자신을 전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레이시가 가족을 꾸리기 전에는 톰이라는 사람과 사귀었는데 톰은 변호사이며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역할만 해오다 그레이시에게 또 다른 남자인 조가 생기자마자 헤어진 것 같다.
조를 사랑하지만 그런 조를 가끔씩 미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총으로 동물 사냥하는 걸 즐기고 가족에게 헌신적이다.
조 (찰스 멜튼)
조는 내면이 불안하지만 여리고 자신의 아들인 찰리와 딸인 매리를 엄청 챙긴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맞는 찰리와 매리를 무척 아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신보다 23살 연상인 그레이시와 사귀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어른 아이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한국 혼혈이며 집 안에서 나비 애벌레를 키우는데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면 하늘에다 날려보내준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모를 혼란을 겪고 있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해석>
이 영화는 불륜에 대해 다루고 있고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영화에 녹여냈으나 안타깝게도 관객들이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았다. 필자도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23살 차이가 나는 그레이시와 조의 관계에 끼어드는 엘리자베스를 보니 정말 자신의 연기에 이용하기 위해 둘의 관계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캐묻고 그것에 대한 사생활을 이용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레이시와 조는 각자 내면의 상처가 있었고 그 아픔을 안고 사는 듯하다. 미묘한 둘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도덕 기준과 혼란스러운 심리를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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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녀와 야수(1991) VS 미녀와 야수(2017)
정직한 실사화, 그리고 설득력을 주는 세세한 곁가지들
원작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실사화된 영화의 대부분은 원작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부하다는 비평을 피하기 위해, 또는 현시대의 사회 통념에 부합하는 주제를 담기 위함 등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언제나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관객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변질된 이야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과거의 아름다운 동화를 실사화했을 때의 결과물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이때 <미녀와 야수>는 의외로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변형하지 않고, 원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가진 큰 줄기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영화를 더 풍부하게 해 주는 곁가지들을 붙여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초반부에서는 세금을 낭비한다는 추가적인 설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화려한 연회는 요정의 저주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책을 좋아하는 벨이 책을 읽을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세탁기를 발명해 사용하는 실사 영화만의 오리지널을 추가해 그녀의 직업과 성격을 훌륭하게 설명해 줍니다. 다만, 그 추가된 곁가지로 인해 영화의 러닝타임이 다소 증가하여 2시간 10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비해 부족한 건 절대 아닙니다. 실사화를 진행함에 있어 관객들이 시나리오에 어떠한 변경이 가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데에는 그 기본이 되는 스토리에 아쉬운 점은 있을지언정 부족한 부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취적인 마인드를 가진 능동적인 여성의 이야기, 감초와 같은 시종들이 만들어 낸 여러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괴물과 여성의 사랑에 빠진 이야기까지, 많은 이들이 재밌게 감상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영화입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1시간 30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담겨 있어 가볍게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괜히 디즈니 르네상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수없이 거론되는 애니메이션이 아닙니다!
관객들은 훌륭한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실사화한 영화를 원할 뿐, 그리고 <미녀와 야수>는 그 요구를 충족시켰다
당찬 디즈니 프린세스의 시초, 그리고 캐릭터의 재해석은 이렇게 해야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근육질의 남성미 가득한 마초 개스톤은 벨을 제외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작중의 행적을 보면 허세꾼에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데다가 비열하기까지 한,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꼴통마초입니다. 야수의 안티 테제로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야수를 상징하는 캐릭터성은 잘 살렸을지언정 관객들의 호감은 사기 어려운 빌런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벨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항상 구원받아왔던 수동적인 존재에 벗어나 처음으로 상대방을 구원하는 최초의 여성입니다. 거기에 당차기까지 한,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가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변하게 된 시조 격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등장인물입니다. 그리고 야수의 시종들, 르미에•콕스워스•미세스 팟과 같은 등장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과장된 표현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재치 있는 캐릭터성을 부여받았습니다. 거기에 각 캐릭터들이 변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적극 활용한 동작은 애니메이터들의 장인 정신을 느끼게끔 해 줍니다.
실사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여러 등장인물들을 재해석하였습니다. 이때 원작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간 실사 영화의 방향성에 알맞게 재해석된 캐릭터들은 과하게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과장된 표현들은 실사 영화에 알맞도록 적절하게 정적인 표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캐릭터의 성격과,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된 데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데에 시간을 적절히 할애함으로써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해석된 캐릭터들 중에서, 개스톤에 가해진 변화가 가장 인상 깊습니다. 루크 에반스가 연기한 개스톤은 마초적인 인상을 덜어내었고, 현실적인 잔인성을 추가하여 더 입체감 있는 빌런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찌질함과 비호감 덩어리였던 르푸의 상당히 정상적인 인물로의 변화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 않는 새롭고 비중이 크지 않은 캐릭터에 PC를 적용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하여 나쁘지 않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애니메이션만이 표현 가능한 독특한 캐릭터들, 그리고 진정한 빌런으로 재탄생한 실사 영화의 개스톤
볼거리와 들을 거리, CG와 뮤지컬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야수와 벨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씬이 있습니다. 크고 복잡한 샹들리에와 촛불의 빛들, 그리고 바닥에 반사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자연스러운 카메라 워킹까지, CG를 활용해 만들어 낸 명장면입니다. <미녀와 야수>는 CG의 역사에 족적을 남겼을뿐더러 이후 제작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적극적으로 CG를 도입하는 계기가 된 영화입니다. 그리고 뮤지컬 맛집인 디즈니답게,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Belle', 'Gaston'과 같이 주인공들의 성격을 가사와 뮤지컬로 훌륭하게 그려낸 곡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곡인 'Beauty and the Beast'까지 좋은 곡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64회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였으며, 더 나아가 'Beauty and the Beast'로 그 해 주제가상까지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실사 영화도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기술적인 측면에 적지 않은 노력과 힘을 기울였습니다. 벨과 야수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씬은 그동안의 기술 발전을 뽐내는 듯 더욱 화려하게 변경되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구로 변해버린 야수의 시종들은 현실적인 모양새로 변하였으며, 이 때문에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그 현실성을 살리기 위한 섬세한 표현과 연출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 외에 실사 영화의 뮤지컬과 관련하여, 애니메이션의 뮤지컬에서 실사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였습니다. 그 대신 실사가 가진 장점을 살린 대규모 뮤지컬로 변환하는 등 적절한 각색을 통해 익숙한 맛과 새로운 맛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CG를 통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그림과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동시에 수상한 명곡 대잔치, 그 뒤를 잇는 <미녀와 야수>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
<미녀와 야수>는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함에 있어 왕도를 걸어간 느낌입니다. 무리수를 던지지 않는 재해석, 쓸데없는 사족 없이 영화를 풍부하게 해 주는 부가적인 이야기들, 실사화를 통해 관객들이 원하는 시각적•청각적 쾌감의 선사 등등. 완벽한 영화라고는 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쁘지 않은, 아름다운 영화라고 하기에는 손색없습니다. 실사화를 함에 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미녀와 야수>만 따라가더라도 원작의 명성을 깎아먹지는 않을 텐데, 이후의 실사화 영화들의 만듦새를 보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이후에 실사화된 영화들은 제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려 하지 말고, 원작의 이야기에만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포대에 담아야 하는 법, 굳이 낡은 포대에 담으려다가 포대를 찢어먹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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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과 용기 사이,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사소한 것’들
▷한줄소감 : 침묵과 용기 사이,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사소한 것’들
▷영화/책 :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 Claire Keegan, 2023.11월
결정적인 순간에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나의 본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을 용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최근 영화로 개봉된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그 기억들을 소환해내고 있다.
1985년 실업과 빈곤으로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뉴로스에서
석탄 배달업으로 아내, 딸 다섯 가족을 이끌고 있는 빌 펄롱(컬리언 머피 역),
무엇보다도 딸들이 각자 자신의 재능을 찾아 성장해 나가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산타클로스에게 보낼 카드를 쓰는 일상이 행복하기만 하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헤쳐 나온 그였기에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기 스스로를 그저 운이 좋을 뿐이라 생각한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p20)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p22)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p24)
그렇다고 하루하루 지치고 힘든 일을 버텨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 일을 하고 저녁 늦게서야 식탁에 앉아 가족을 대하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을 다 잡아준 것은 그 옛날 어머니조차 일찍 돌아가시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되었을 때,
자신을 돌봐 주었던 집 주인 미시스 윌슨 아주머니의 따뜻한 격려 때문이었다.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 다녔다.(p37)
그런 영향인지 빌 펄롱은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다.
사업체 직원들의 일상을 돌본다든지, 동네 사람들 중 어려운 집에 장작을 몰래 가져다 놓는다든지,
지나가다 친구 아들을 보고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푼이라도 꺼내 준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강 건너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창고에 갇혀 있던 어린 소녀 세라를 발견한다.
수녀원장은 친구들끼리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둘러댄다.
오히려 그 사실이 외부에 발설되지 않도록 무언의 압박을 보낸다.
딸들이 다니려고 하는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의 운영자이기도 한 수녀원이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수녀원장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현찰이 든 봉투를 내밀었을 때 그냥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p99)
자괴감에 빠져 있는 그를 바라보는 아내 아일린이나,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던 음식점 주인 미스즈 케호는 그저 모른척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 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p57)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거야.”(p105~106)
그러나, 크리스마스이브날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고, 아내에게 줄 구두를 찾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p113)
결국 그는 다시 수녀원으로 가서 창고에 갇혀 있던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지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수녀원이었기에 자신의 사업체와 가족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이 떠올라 두려웠지만
더 이상 물러서지 말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p119)
빌 펄롱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순간 어려웠던 시절, 집주인 미시즈 윌슨 아주머니와 같은 집 일꾼이었던 네드의 보살핌의 손길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을 이루게 한 것은 그분들의 배려, 친절, 격려들 때문이었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사소한 것(Small Things)들로.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p120)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p120)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121)
지금 주인공 빌 펄롱에게 침묵에 맞설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릴 적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사랑'과 '보살핌'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뿌려진 씨앗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소녀를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그 첫 발걸음은 사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를 나되게한 '사소함'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 무수히 많은 사랑의 손길이 떠오른다.
내가 살아갈 '용기'는 나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불빛이 반짝거리며 떠오르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와 정부 지원하에 1922년부터 1998년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3만 명 이상의 젊은 여성들을 감금, 강제 노역과 착취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곳이다.
2013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진상조사를 마치고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laundries)’ 또는 ‘막달레나 수용소(Magdalene asylums)’는
타락한 여성 교화라는 명분하에 1344년경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아일랜드에서는 1767년부터 10여 개 시설에 약 1만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고, 잉글랜드는 1758년 이후 300개 이상의 세탁소가 운영되었으며,
1800년 미국 필라델피아, 1848년 캐나다 토론토, 1852년 스웨덴, 1890년 호주에서 운영되었다.
노동 착취와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후의 막달레나 세탁소가 1996년에 이르서야 폐쇄되었다.
각 나라의 막달레나 세탁소 / ①아일랜드(1767년), ②잉글랜드(1758년), ③미국(1800년), ④캐나다(1848년), ⑤스웨덴(1852년), ⑥호주(1890년)
20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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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5회 아카데미 후보작 미리보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현지 시각으로 다음 달 3월 12일에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기대가 뜨겁습니다.
시상식을 기다리는 국내 영화팬들을 위해 CGV, 롯데시네마,씨네큐브등에서 후보작들을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하는데요, 상영 일정을 먼저 알려드릴게요 :-)
<CGV 2023 아카데미 기획전> : 2월 11일(일) ~ 3월 21일(화)
<씨네큐브 2023 아카데미 화제작 열전> : 2월 15일(수) ~ 3월 28일(화)
<롯데시네마 2023 아카데미 기획전> : 2월 22일(수) ~ 3월 12일(일)
그럼 이제 어떤 작품들이 상영될 예정인지 함께 알아볼까요?
더 웨일
The Whale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미국 | 117분
감독: 대런 아로노포스키
출연: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등
배급: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개봉: 2023년 3월 1일
시놉시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CINE PICK!
A24가 제작 및 배급까지 맡은 <더 웨일>은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가 9년 만에 만난 10대 딸과 쓰는 마지막 에세이를 담은 작품으로, <블랙 스완>, <마더!> 등으로 유명한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입니다. <미이라>의 전설적 스타 브렌든 프레이저가 272kg 대학 강사 ‘찰리’ 역을 맡고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의 '세이디 싱크'와 아시안계 배우 '홍 차우' 등이 가세하며 더욱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로 떠올랐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3개 부문(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분장상) 후보에 오른 <더 웨일>은 남우주연상과 분장상 부문 수상이 유력한 것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
ⓒ 네이버 영화개요: 미스터리, 서스펜스, 스릴러, 코미디 | 영국, 미국 | 109분
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콜린 패럴, 브렌던 글리슨 등
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개봉: 2023년 상반기
시놉시스
파드레익은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누나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가 교류하는 사람은 오랜 절친 콤과 마을 유일한 경찰의 아들 도미닉뿐이다. 어느 날, 콤이 파드레익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일방적인 절교를 받아들일 수 없던 파드레익은 계속해서 그의 주변을 맴돌고, 이에 콤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면서 둘의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CINE PICK!
골든 글로브 시상식,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아카데미 시상식 등을 휩쓸었던 <쓰리 빌보드>의 마틴 맥도나 감독이 연출을 맡고, <더 배트맨>, <신비한 동물 사전>부터 <킬링 디어>, <더 랍스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연기 내공을 가진 콜린 파렐이 주연을 맡은 '이니셰린의 밴시'는 평생 친구였던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그들의 우정을 끝내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감독 본인이 과거에 집필했던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공개 이후 엄청난 호평이 쏟아졌고 국내 관객들에게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상반기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올해 아카데미에서는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브렌단 글리슨, 배리 케오간), 여우조연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음악상 등 총 9개 후보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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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영화개요: 드라마 |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 104분
감독: 루카스 돈트
출연: 에덴 담브라인, 구스타브 드 왤레 등
배급: 찬란
개봉: 2023년 예정
시놉시스
온 가족이 함께 사는 목가적인 시골의 한 마을. 13세 소년 레오와 래미는 무엇으로도 깰 수 없어 보이는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지낸다. 하지만 학교의 또래 아이들이 던지는 냉담한 시선과 조롱은 그들 사이를 점점 갈라놓고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CINE PICK!
영화 <클로즈>는 2022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 2023 골든글로브시상식 ‘외국어영화상’에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화제작입니다. 셀린 시아마, 배리 젠킨스, 션 베이커 감독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이 시대의 스토리텔러 루카스 돈트 감독 작품으로, 루카스 돈트 감독은 첫 장편 <걸>로 2018 칸영화제 4관왕을 비롯해 전 세계 영화제 32관왕, 40회 노미네이션으로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어린 소년들이 마주해야 했던 변화의 계절을 시리도록 아름답게 표현한 이 작품은 “<400번의 구타>, <보이후드>가 자리한 영화의 신전에 이 아름다운 영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Time Out), “부정할 수 없이 뛰어난 루카스 돈트 감독의 탁월한 작품”(BBC.com), “모든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 울림”(IndieWire) 등의 극찬과 함께 현재까지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92%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TAR 타르
Tar
ⓒ 네이버 영화개요: 드라마 | 미국 | 158분
감독: 토드 필드
출연: 케이트 블란쳇, 노에미 메를랑 등
배급: UPI 코리아
개봉: 2023년 2월 22일
시놉시스
무대를 장악하는 마에스트로, 욕망을 불태우는 괴물,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 이 이야기는 그녀의 정점에서 시작된다.
CINE PICK!
<TAR 타르>는 베를린 유력 교향악단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수석 지휘자로 선출된 저명한 지휘자이자 작곡자인 리디아 타르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클래식 업계와 더불어 혼란스러운 사생활과 창작의 고통 등 타르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북미에서 개봉한 'TAR 타르'는 IMDB 7.1, 로튼토마토 신선도 90%, 메타크리틱 91점이라는 호평을 얻었으며, 독일어 말하기와 피아노 연주, 지휘 기술을 완벽히 소화해 극찬을 받았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밖에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촬영은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했던 플로리안 호프마이스터가 맡았으며, 편집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를 작업했던 모니카 윌이 함께했습니다. 특히 <조커>에 이어 의 음악을 맡은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어 더욱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
ⓒ 네이버 영화개요: 가족 | 아일랜드 | 95분
감독: 콤 바이레아드
출연: 캐서린 클린치, 캐리 크로울리 등
시놉시스
1981년,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녀 카이트는 가난으로 당장 그녀를 돌볼 수 없게 된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당분간 거의 남이라고 할 수 있는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지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생전 처음 본 부부와 함께 살게 된 카이트는 새로운 환경이 낯설기만 하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아내 에이블린과는 그런대로 잘 지내지만, 무뚝뚝한 남편 션은 이 모든 게 못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션도 카이트의 순수함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고, 어느새 이들 사이엔 떼어놓기 힘든 특별한 우정이 싹튼다.
CINE PICK!
<말없는 소녀>는 베를린영화제를 필두로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올해 최고의 아일랜드 영화’라는 찬사를 받은 영화입니다.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 가슴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로 온 가족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EO
EO
ⓒ 다음 영화개요: 드라마 | 폴란드, 이탈리아 | 86분
감독: 토드 필드
출연: 사만다 드지말스카, 이자벨 위페르 등
수입: 찬란
개봉: 2023년 예정
시놉시스
동물의 눈으로 본 세상은 신비로운 곳이다. 우울한 눈빛의 회색 당나귀 ‘EO’는 삶의 여정에서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들을 만나고,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며, 행운을 재앙으로, 또 절망을 예상치 못한 행복으로 바꾸는 전화위복의 굴레를 겪는다. 하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
CINE PICK!
영화 <EO>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 및 각본의 2022년작 폴란드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제75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이며, 로베르 브레송의 1966년작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영화로 한 폴란드 서커스단에서 태어난 당나귀의 일생을 따라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80대의 노장 감독이 선보이는 자연 다큐 스타일과 아방가르드풍 실험 영화와 VR 체험을 능숙하게 오가는 완숙한 솜씨와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연출은 EO가 갈망하는 해방을 고스란히 옮겨놓아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애프터썬>,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 등 총 11개 부문 후보에 올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분장상/시각효과상/음향상 후보에 오른 <더 배트맨>, 의상상/미술상/음악상 후보에 오른 <바빌론> 등의 기개봉작도 함께 상영한다고 하니 아쉽게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도 이번 기회에 함께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
<애프터썬> 스틸컷, ⓒ 네이버 영화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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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한스의 선택
<거대한 자유(Grosse Freiheit)>(2021, 세바스티안 마이저)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969년 서독, 몇 번째인지 모를 옥살이를 하던 한스 호프만은 ‘175조’ 폐지 목소리를 담은 기사를 보게 된다. 출소한 후 어느 바 앞에 다다르고, 두 남자가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며 그곳을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간판에 적힌 이름은 ‘거대한 자유’. 들어가 홀로 있던 한스는 낯선 남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미로같은 공간, 남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지만 집중조명하지는 않는다. 꿈꾸는 듯한 시선과 리듬으로 한스를 따라간다. 이내 미로를 빠져나온 그는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고, 밤거리로 나와 상점 쇼윈도를 깨 물건을 대강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여유롭게 서성이다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번의 카메라는 길 건너편에 고정된 채 먼발치에서 원테이크로 그를 담는다. 화면은 어둡고,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바 시퀀스에서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은 멎은 채다. 단조로운 경보음이 귀를 파고든다. 엔딩크레딧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고요만이 남는다.
침묵 속에서 관객은 생각에 빠진다, 한스는 왜 교도소로 돌아가기로 했을까. 그에 대한 두 갈래의 해석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포스터 아트 또한 다른 정서로 읽히게 될 것 같다.
먼저, 13년 동안 여러 번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더 나은 삶을 바라기를 포기하게 됐고, 머릿속 감옥에 갇혀버렸다고 보는 방향이 있다. 앞서 한스는 레오를 교도소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의 거짓 진술을 인정했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 레오에게 ‘너와 달리 나는 이미 희망이 없다’며 자조했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대사는 오스카와의 미래를 꿈꾸던 십 년 전과 대조된다. 연인을 향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눈은 이제 생기를 잃고 일시적인 위안을 찾는다. ‘거대한 자유’에서 마음껏 서로를 탐하는 남자들을 지나며 제가 속할 곳이 아니라고 느꼈고, 자유를 반납한 후 ‘안락’하고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은 것은 영혼이 억압에 중독되었음을 상징한다. 마침내 ‘거대한 자유’가 ‘(부분적으로)허용’됐을 때, 한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채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힘을 싣고 싶은 것은 두 번째 해석이다. (배우의 얼굴에 담긴 것이 이에 가깝다고 느꼈다.) 한스는 변한 적이 없다, 늘 사랑의 자유를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모든 자유를 포기할 준비가 돼 있는 이였다. 십 년 전 오스카에게 동독으로 넘어가자고 말했던 그는, 이제 빅토르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은 익숙한 억압으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빅토르와 같은 중독자의 패턴을 보인 것도, 체념하거나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한스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대한 자유’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자들을 지나치며 그가 느낀 것은 몸의 자유, 그리고 ‘너’의 부재. 그래서 쇼윈도에 돌을 던졌다. ‘너’와의 추억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이곤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나올 수 없다면 내가 들어갈게.’, 그에게 자유는, 머무는 장소에 있지 않았다. 사랑에 있었고, 상대방에 있었다.
너무 낭만화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라 해도- 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내려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늘 확실하지만은 않은 말과 행동, 몸짓과 표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뒤따르는 감상은 달라질 테다. 내가 한스 호프만의 눈빛에서 읽은 바는 위 두 문단 중 후자에 가까웠고, 그를 바탕으로 아래 문장들을 적었다.
1945년, 한스 호프만은 수용소에서 교도소로 ‘옮겨진’다. 파시즘 체제가 내린 형을 2차대전 후에 ‘이어’ 살게 된 것이다. 독일 제국 때 확립되고 나치가 강화한 ‘형법 175조’를 서독이 그대로 따르기로 해서다. 영화가 이 이상한 시대와 국가와 법을 고발하는 방법은, 한스라는 인물로 중심을 잡는 것, 그의 눈에 세계를 담고 세계가 그를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허구적 ‘위인’의 (자서전보다는)전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계의 상대방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 역시 그를 관찰하고, 시선으로 그에 대해 말한다. 1968년, 재판을 받고, 옷을 벗고, 신체 부위를 내보이는- 그의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건 익숙함 때문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종종 자조와 체념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한스의 태도는 늘 당당하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도 지금도 ‘늘 방법을 찾아낸다’. 한스 호프만은 그 한결같음으로 주변의 폭력성과 비정상성을 선명히 드러내는, 드물게 빛나는 사람이다. (해선 안 될 것은 한스를 밀어낸 오스카나 거짓 진술을 한 레오를 섣불리 평가하는 행위. 레오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스 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저화질 필름에 담긴 비디오였다. 장소는 공중화장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곳에서 성행위를 하는 남자들을 촬영한다. 서독 경찰이 숨겨놓은 카메라에 찍힌 영상으로, 재판장에서 공개되어 한스가 ‘175조’를 어겼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쓰인다. 그러나 영화는 먼저 관객에게 그 자체만을 보여주길 택했다. 촬영된 까닭과 재생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본다면, 영상에 담긴 것은 그저 (불법이 아니어야 할 일이 불법인 세상에서) 순수한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일 따름이다. 오스카와의 추억 역시 유사한 비율과 톤의 프레임에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교도소 문에 달린 반입구가 있다, 빅토르가 한스에게 불을 붙여주던. 독방에서 한스가 피운 성냥의 불빛이 꺼지며 1945년으로 연결되는 연출은-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의 옥살이를 하며 그가 찾은 자유가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듯하다.
작품이 1945년이나 1969년이 아닌 1968년을 오프닝에 배치한 까닭은, 또다른 시작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된 인연과, 새로운 사랑의 상대방으로서 재회한 해. 오스카의 죽음을 알고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빅토르가 십 년 후 마약중독으로 괴로워할 때, 한스는 그 포옹을 돌려준다. 당신의 괴로움을 다 내 피부에 새기겠다고, 내가 붙잡을 테니 당신은 놓아도 괜찮다고 선언하듯 촘촘하고 단단한 그 포옹들. 작품은 빅토르와 한스의 관계를 ‘편견을 넘어선 우정’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히 로맨스에 다다르도록 했다. 거기엔 빅토르가 처음부터 틀렸다는 암시가 있다. 어쩌면 먼저 상대를 좋아하기 시작한 쪽이었던 그는, 그 마음을 알아채고 꺼내어 준 한스의 사랑에 구원받았다. 구원은 (차별적 억압의 근거로 이용되곤 했던) 십자가와 성경에 있지 않았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남자와 데이트하는, 성경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러브레터를 쓰는, 그것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우는 한스의- 조그마한 신성모독, 위대한 사랑에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가끔 <거대한 자유>의 포스터를 들여다봤다. 누군가의 머리에 나 있는 문, 그 프레임 안엔 아마도 그 자신일 남자가 갇혀 담배를 물고 있다. 밖에서 불을 붙이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어쩌면 그역시 자신의 손일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짐작하기도 했다. 영화를 관람하며 손의 주인이 빅토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기억의 방으로 들어온 순간, ‘손은 그 자신의 것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957년, 컴컴한 독방에서 한스는 오스카와의 추억을 재생했다. 성냥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13년 동안 교도소와 독방을 들락거린 그를 살아남게, 아니 살게 한 것은 그 성냥불이었다. 찰나를 태우고 사그라들지만 기억 속에서 반복해 빛을 내는 그것은, 특정한 대상인 빅토르보다는 모든 사랑과 상대방들을 상징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한스는 사랑의 감정과 기억에서 얻은 연료로 삶의 불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둠 속 잠깐의 빛에 홀려 중독된 것이라 해도, 그 길에 사랑이 있다면- 나는 한스의 마지막 선택을 감히 안타까워하고 싶지는 않다.
<거대한 자유>는 실재했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고발, 빅토르와 한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스 호프만과 그가 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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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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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 이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나 자신까지 모든 것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