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2-10 21:36:45
고요히 내려앉는 한 줌의 선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2024)
고요히 내려앉는 한 줌의 선의
개봉일 : 2024.12.11.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98분
감독 : 팀 밀란츠
출연 : 킬리언 머피, 에밀리 왓슨, 아일린 월시, 미셸 페어리, 클레어 던, 헬렌 비언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겨울은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차가운 계절이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겨울에도 따스함이 있다. 한낮에 머리 위로 내려앉는 햇빛, 빠르게 지는 해를 대신해 집안을 밝히는 전등의 색, 두꺼운 옷의 포근함과 유난히 반가운 누군가의 온기. 이렇게 차가워 보이는 계절에도 작은 따스함이 깃들어 있듯이 어둠만 가득해 보이는 현실에도 잘 찾아보면 작은 희망과 온기가 존재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그 작고 소중한 온기를 조명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작가 클레이 키건의 동명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아일랜드 출신 배우인 킬리언 머피가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원작의 내용을 몰랐을 땐 그가 왜 이 소설을 선택한 걸까? 궁금했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딱, 과연 킬리언 머피 다운 선택이었다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엔 킬리언 머피였기에 가능했고, 완벽히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 석탄 장수 빌 펄롱은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돈 나갈 구석에 대한 고민을 놓을 순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빌은 생각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며 부쩍 추워진 날씨 덕에 석탄 주문이 밀려오고 빌은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석탄을 배달한다. 그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가족과 직원들을 위해 성실하게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주머니에서 짤락거리는 동전을 어린 이웃과 나누는 작은 선행도 잊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은 한 모녀의 심상치 않은 실랑이를 목격한다. 그래도 남의 가정일에 함부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니 그는 우선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순간이 남긴 불편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빌은 석탄가루로 까매진 손을 씻듯이 자신의 마음도 거칠게 벅벅 긁어내보지만 마음 깊이 낀 불편함이 사라지긴커녕 검은 물만 죽죽 흐를 뿐이다.
그렇게 불편함이 덕지덕지 낀 마음을 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빌은 결국 용기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의 선택과 행동은 당장 세상을 바꿀 만큼 거대한 힘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것이 주는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시간적 배경만 크리스마스인 영화가 아닌 크리스마스에 담긴 은총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 있었던 진정한 크리스마스 영화였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그늘
이야기의 소재가 된 막달레나 수용소는 18세기-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은밀하게 운영되었던 여성 수용소다. 사람들은 교정 시설, 여성에게 거처를 제공한다는 겉포장에 속거나 수용소의 실체를 알면서도 쉬쉬했다. 그 때문에 막달레나 수용소는 다른 국가들의 유사 시설들 중 가장 오랜 시간 살았다고 한다. (마지막 수용소는 1996년까지 운영됐다.)
극 중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수녀원(수용소) 이야기를 회피하는 듯한 미운 모습이 나오는데 사실 이게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냥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구나~하고 모르는 척 믿으면 모든 게 평소와 같이 평탄하게 흘러갈 텐데 굳이 그걸 파헤치려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수녀원을 애써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아름답게 바라보려 한다. 그들이 종교를 방패 삼아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지, 그 뒤에 어떤 그늘이 따라붙어있는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실체가 된 의심의 그림자
빌은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자 고용인들을 배려하는 고용주고 굶주린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1985년 아일랜드다. 그 당시 아일랜드는 역대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경제 공황을 겪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빌이 선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혼자가 된 어린 빌을 거두어준 윌슨 부인과 네드의 사랑 덕분이었다. 빌은 두 사람에게 받은 사랑을 그대로 품고 자라 어려운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빌도 처음엔 마을 사람들처럼 수녀원을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유년의 기억과 말간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는 딸들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수녀원에서 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빌은 어린 빌 펄롱과 소녀를 생각하며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빌이 막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수녀원에 갇힌 불행한 소녀’는 대략 옅은 그림자 정도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 그런데 저 건너편 어두운 방안에 있던 그림자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빌 앞으로 튀어나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강까지 데려다주세요. 집으로 데려가 주면 뭐든 할게요.”. 이때 빌은 ‘수녀원에 갇힌 불행한 소녀’가 실존함을 알게 된다.
이때 소녀를 보며 느낀 놀라움과 불편함은 빌의 오래된 기억까지 헤집어 놓고, 그는 또 다른 진실을 보게 된다.
빌의 선택
빌이 머리를 자르지 않은 이유
빌이 아내 아일린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털어놓으며 우리 딸이었다면 어땠을지 물었을 때 아일린은 “우리 딸이 아니잖아.”,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르는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는 차가운 답을 내놓는다. 이때 빌은 “윌슨 부인이 당신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윌슨 부인의 따뜻함을 한 번 더 상기한다.
빌은 소녀를 구해주고 싶다. 윌슨 부인과 네드처럼. 빌은 새벽에 수녀원으로 돌아가 소녀에게 자신의 코트를 입혀주고 함께 수녀원의 문을 두드린다. 빌의 의도를 눈치챈 원장수녀는 안은 따뜻하다며 빌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들인다. 그는 빌을 저지하기 위해 은근한 협박과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빌은 원장수녀가 내민 돈과 카드를 들고 겨우 사무실을 나오면서도 끝까지 소녀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이름을 남긴다.
그런데 이후 빌은 잠시 흔들린다. 너무 갑작스레 새로운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빌이 아내의 지적을 받으면서까지 주머니를 털어 아이들에게 동전을 나눠주고 수녀원과 척을 질 각오를 하면서도 소녀를 구하려고 했던 건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빌은 지금껏 윌슨 부인과 네드가 조건 없이 100% 선의로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가다보니 당시엔 느끼지 못했던 미묘하게 어색한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네드와 닮은 빌의 얼굴, 창 너머로 봤던 어른들의 모습과 자신을 바라보던 네드의 눈빛. 빌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물었던 아버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낸다.
무조건적인 선의라고 믿어왔던 것이 알고 보니 아들이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부정(父情)이었다니. 빌은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함께 소녀를 향한 의지를 잘라내기라도 하려는 듯 미용실에 앉아 검은 미용 가운을 두른다. 한순간 빌의 얼굴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빌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는 결국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미용실을 나와 다시 어머니와 같은 이름의 소녀, 세라에게로 향한다. 네드에게 받은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든 타인의 무조건적인 선의였든 상관없이 어쨌든 그의 사랑이 빌을 키워냈으니 빌 또한 사랑을 나눠주는 어른이 되기로 한 듯 보인다.
빌은 세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손을 세라에게 내민다. 이제 그의 손엔 검은 가루가, 그의 마음엔 불편한 때가 남아있지 않다.
불투명한 유리와 그늘을 향한 빛
빌 펄롱이 보여준 작은 온기와 용기
원래 타인의 불행과 사회의 어둠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빌이 아내를 위해 샀던 네이비 구두, 가방, 크리스마스 케이크같이 행복을 상징하는 것들은 남에게도 잘 보이는 유리 쇼케이스에 진열되는 게 보통이지만 소녀들을 향한 학대와 막달레나 수용소라는 사회의 어둠은 빛이 만든 그늘 어딘가에, 불투명한 유리 뒤(극 중 수녀원 입구의 유리도 불투명하게 표현된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물체를 하나 두고 빛을 한줄기 쏘면 명과 암, 밝은 곳과 그늘진 곳이 생긴다. 이때 시선은 자연히 광원과 빛을 받은 곳을 향하게 된다. 이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 항상 밝은 곳만 주목받고 그늘진 곳은 소외되고, 어둠은 우리 몰래 조용히 그늘진 곳을 노려 내려앉는다 이럴 때 그늘을 바라보고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면 그늘을 없애는 것은 물론 그 안에 숨은 어둠도 찾아낼 수 있다.
빌 펄롱은 사회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다. 빌의 선택이 당장 마을과 사회를 모두 바꿔놓을 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세라의 인생은 변했으니 그만큼의 그늘이 줄어든 것이다. 사회엔 빌 펄롱 같은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 빛을 비추고 작은 온기와 용기를 모아줄 사람.
혼란한 정세 속에서 이런 영화를 만나고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일렁인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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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두려운 감정을 이겨 내게 하는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
푸른 빛의 작업복을 입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공장에서 매트리스를 만들고, 퇴근 후 공장을 나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버건디 코트 깃을 여미며 자전거에 올라, 코 끝이 빨개진 채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로 어디론가 가는 주인공으로 시작되는 영화 <앵그리 애니> 영화 속에서는 오랜 시간을 지나 여러 계절을 지나가는데도, 이상하게 이번 겨울 코 끝이 싸하게 추운 기분이 들때면, 애니가 코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던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춥고, 두려운 감정의 끝에 만나는 따뜻한 누군가의 기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추위를 함께 이겨내는 작은 빛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하면 아이는 셋을 낳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혼 7년차에 첫째를 낳고 4살 터울로 마흔 넘어 둘째를 낳고 나니,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예민함과 넘치는 에너지를 둘 다 소유한 둘째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노산의 엄마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농담 삼아 둘째가 첫째였다면, 나는 둘째를 낳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던 그즈음 생리가 늦어지면 겁이 덜컥 나곤 했다.
‘셋째가 생기면 어쩌지.’
아이를 원해 결혼 후 5년 넘게 애태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달라진 걸까? 그때보다 나는 오히려 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해 더 사랑을 품게 되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구나.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이 함께 찾아왔던 경험이 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임신과 임신 중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순간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애니는 1974년 프랑스 교외의 한 작은 마을, 매트리스 공장에서 일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몸에 밴 익숙한 손으로 바느질을 해 매트리스를 만든다.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어느 밤 자전거를 타고 한 서점을 찾아간다. 서점 한쪽 커튼을 젖히면 작은 공간이 나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사람들의 안내로 모임이 진행된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 중단은 불법이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성들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뜨개질바늘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잘한다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애니가 찾아간 곳은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을 하는 곳으로, 의료진과 함께 안전하게 무료로 임신 중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단체다.
이들은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수술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수술 전 한 번 더 만나 수술 도구를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며 수술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은유나,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영화적인 어떤 환상 같은 것은 없다. 마치 관객들도 알아야 한다는 듯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하나씩 천천히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제 애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함께 알아간다.
설명의 과정만큼이나 수술의 과정 역시 거의 리얼타임에 가깝게 상세히 묘사한다. 수술대 위에 오르는 애니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함께 숨을 고르고 노래를 불러준다. 편안한 선율의 노래를 부르는 눈을 마주치며, 애니는 손을 잡고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지나간다. 애니에겐 출산 경험 보다 더 편안했던 순간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를 함께 키우던 옆집 친구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한 비전문가의 시술 중 사망하게 되면서, 애니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 어쩌면 그 누군가가 애니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게 애니는 따뜻한 커피를 만들고, 두려움으로 찾아온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의 사연은 다양하다. 낳고 싶지만, 남자친구가 안된다고 해서, 25살에 이미 다섯 아이를 낳아서, 이제는 더 이상 낳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17살의 소녀까지. 두려움에 떨거나, 죄책감에 울부짖는 사람들. 임신을 중단하게 된다는 것은 영화 속 많은 여성에게, 두려움과 죄책감과 그리고 때때로 불쾌함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을 준다. 각자의 격동적인 감정을 애니와 활동가들은 가만히 안아준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영화는 이런 사람들에게 임신 중단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구를 비난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눈맞춤과 다정한 말,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옆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져야 하기에’ 다정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손을 잡아주는 애니를 보며, 이러한 연대는 그 어떠한 것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낙태’ 라는 엄청난 경험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마음을 전해 받은 내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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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여운 공존과 특별한 평화
최근에 본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와 며칠 전에 본 <대니쉬 걸>의 주연 배우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배우가 등장하는 교집합적인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 이 영화 역시 시리즈로 진행되는 영화이긴 하지만, 시리즈를 몰아서 보진 않은 채 일단 첫 번째 작인 <신비한 동물사전>만 보고 글을 적으려 한다. 나중에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를 비롯하여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도 막을 내릴 때 감상문을 적지 않을까 예상한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비한 동물사전> 네이버 스틸컷
친화력
<신비한 동물사전> 주인공인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는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신비한 동물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어떻게 하면 이들과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호그와트 출신 마법사다. 후플푸프 출신답게 상당히 넓은 관용과 차분함이 있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동물들을 사랑하고 애정을 가졌기에 그가 보여주는 동물 관리법은 굉장하다. 각 동물마다 가진 특징과 행동들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대처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옵스큐러스로 인해 변해버린 크레덴스(에즈라 밀러)를 차분히 설득하는 뉴트의 모습은 그가 가진 이해력과 친화력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
제목 그대로 흥미로운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본 동물은 문카프다. 문카프는 뉴트에 가방에 있던 동물로 보름달을 지켜보다가 제이콥(댄 포글러)이 주는 먹이를 먹으러 쫓아오는 목이 길고 검은 털로 뒤덮여 있으며, 눈이 큰 특징을 지녔다. 문카프가 등장하기 전 겉보기에도 사나워 보이는 천둥새나 거대한 폭탄 뿔을 지닌 에럼펀트라는 동물도 신기하게 봤다. 하지만 문카프는 뉴트의 센스가 돋보이게 해 준 동물이다. 머글 태생인 제이콥에게 눈두나 천둥새 같은 위험한 동물에게 먹이를 주라 하지 않고, 머글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얌전한 문카프에게 먹이를 주라고 한 뉴트의 센스 있는 행동이 돋보여 더 흥미롭게 바라본 동물이기도 했다.
공존과 평화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키워드다. 두 가지 상황으로 공존과 평화가 있는데, 첫 번째는 뉴트의 신비한 동물들과 마법사 사회다. 뉴욕 마법사 사회는 신비한 동물을 금지하는 법이 있을 정도로 동물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는 사회다. 그러나 뉴트는 신비한 동물사전이라는 책을 집필하는 동시에 동물들의 성격과 특성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뉴트는 신비한 동물의 조사와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법사와 머글 세계다. 호그와트 학교가 있는 런던 사회는 머글들이 사는 사회 속에 마법사들이 뉴욕 마법사 사회보다 자연스럽게 살고 있지만, 뉴욕 사회는 아예 지하 세계로 내려와 살고 있다. <신비한 동물사전>에 등장하는 대사로 추측하면 머글들이 마법사들을 공격하여 지하세계로 쫓겨나듯 도망친 상황으로 보인다. 그래서 뉴욕 마법사 사회는 머글 눈에 안 띄는 법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들도 어찌 보면 마법사와 머글들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지닌 공존과 지하세계로 살아가며 머글 사회 눈에 띄지 않으려 하는 특별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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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둘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충격적인 소재와 독특한 시각으로 연쇄살인 장르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 <레드 룸스>가 10월 9일 개봉합니다.
<레드 룸스>은 다크 웹 속 미지의 공간 ‘레드 룸’에서 3명의 10대 소녀를 살해한 과정을 생중계한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를 추종하는 의문의 여성을 다룹니다.
감독은 “우리 사회의 범죄에 대한 집단적 매혹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일종의 ‘반(反) 연쇄살인범 영화”라고 설명하였는데요. “이 영화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깊이 파고들어 관객들에게 놀라움과 오랜 불편함을 남기길 바란다”며 관객들이 느끼길 원하는 바를 전했습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상영 후 <추락의 해부>, <괴물> 등 쟁쟁한 상영작 사이에서도 관객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레드 룸스>를 전국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레드 룸스
Red Rooms
개요: 스릴러 | 캐나다 | 118분
감독: 파스칼 플랜트
주연: 줄리엣 가리에피, 로리 바빈, 맥스웰 맥케이브 로코스
개봉: 2024.10.09.
배급: 찬란
줄거리
10대 소녀 3명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생중계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슈발리에’ 그리고 슈발리에의 재판을 매회 방청하는 모델 겸 해커 ‘켈리앤’. 심증만 있을 뿐, 물증 없는 재판이 길어지는 가운데 슈발리에를 추종하는 팬들과 희생자 가족이 대립한다. 한편,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던 마지막 희생자 영상이 다크 웹에 등장한다.
너의 색
The Colors Within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01분
감독: 야마다 나오코
주연: 스즈카와 사유, 타카이시 아카리, 키도 타이세이, 아라가키 유이
개봉: 2024.10.12.
배급: CJ CGV
줄거리
음악으로 이어진 세 사람을 비춘 가장 찬란한 청춘의 색! 사람을 색으로 느끼는 엉뚱한 여고생 ‘토츠코’ ‘토츠코’는 어느 날 학교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색을 가진 소녀 ‘키미’를 만난다. 그리고 우연히 작은 책방에서 조우한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 ‘루이’까지 합세하여 오랫동안 꿈꾸던 밴드를 결성하게 되고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는데..! 무지갯빛 청춘을 위한 노래가 시작된다!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When Evil Lurks
개요: 공포 | 아르헨티나, 미국 | 100분
감독: 데미안 루냐
주연: 에지킬 로드리게스, 데미안 살로몬
개봉: 2024.10.09.
배급:(주)팝엔터테인먼트
줄거리
외딴 마을, 잔혹한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쫓던 형제는 마을 속에 숨어 지내는 한 가족이 관련된 것을 알게 된다. 악령이 깃들어 온몸이 부패해 죽어가는 아들 ‘우리엘’을 숨겨왔던 것. 두 형제는 ‘우리엘’을 마을 밖으로 유기하려 하지만 이미 악령의 봉인이 풀리고 마을을 잠식하는데...
싱글 에이트
Single 8
개요: 드라마 | 일본 | 112분
감독: 코나카 카즈야
주연: 후쿠자와 노조미, 우에무라 유, 쿠와야마 류타, 타카이시 아카리
개봉: 2024.10.09.
배급: 오드 AUD
줄거리
"찍는다 레디, 액션, 컷!" 우리들의 시간 역행 SF 영화 만들기 1978년 스타워즈를 보고 흥분한 고등학생 히로시와 그의 절친 요시오, 사사키는 8mm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카메라 가게 직원의 제안으로 ‘시간 역행’을 주제로 한 SF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오랜 짝사랑인 나츠미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우려는 히로시의 열의와 함께, 학교 축제에서 상영을 목표로 이들의 청춘 가득한 영화 만들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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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들이 평가한 호불호 영화 8선
거장들이 평가한 호불호 영화 모음 !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독님들의 독특한 취향
본인이 만드는 영화와 결이 다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진정한 씨네필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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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파더 앤 솔저|Father and Solider
마티유 바드피에|Mathieu VADEPIED
France, Senegal|2022|101 min|DCP|Color|Fiction|12|Asian Premiere
시놉시스
1917년, 바카리 디알로는 강제 징집된 17세 아들 티에르노의 곁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두 사람은 함께 전선에 투입되고, 전쟁에 직면한다. 티에르노가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바카리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프로그램 노트
1차 대전 당시 프랑스령 세네갈. 프랑스인들은 세네갈인들을 징집하여 유럽의 끔찍한 전쟁터로 보낸다. 척박한 땅에서 아들 티에르노와 가축을 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바카리는 프랑스 군인이 나타난다는 소문만 들리면 징집 대상인 아들을 은신처로 보내 숨어 있도록 하지만 아들은 결국 세네갈에 있는 신병교육대로 끌려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자원입대를 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부자는 유럽 전선으로 끌려간다. 한 전투에서 10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곳, 같은 아프리카인들끼리도 서로를 속이고, 강도 행각을 벌이는 전선에서 어떻게든 아들을 찾아 탈출하려는 아버지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휘관의 눈에 들어 영웅이 되려는 아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겪게 된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이었던 이 작품은 아버지의 애틋한 정과 덧없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다. (전진수)
평범한 부자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서나 익숙하게 쓰이지만 의외로 오래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 민족이다. 민족은 'Nation'을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언어나 문화, 국기나 국가(國歌) 같은 상징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민족 개념이 퍼졌다. 한 민족이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졌다. 실제로 새롭게 생겨난 나라도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즉, 민족은 혈통과 관련된 말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존재한 개념도 아니다. 근대 국가가 만들어질 때 생성된 새로운 관념이다.
그런데 민족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 월드컵 성적이 좋지 않거나 대표팀에 내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부가 청문회를 연다. 축구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많은 축구 대표팀은 그 자체로 프랑스의 통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드피에 감독의 <파더 앤 솔저>는 특별하다. <파더 앤 솔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땅에 뿌려진 피와 땀의 의미도 들려준다.
눈물겨운 부성애
얼핏 보면 <파더 앤 솔저>는 평범하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부성애 이야기는 익숙하다. 물론 그만큼 호소력이 짙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세네갈 땅에 사는 부족민을 강제로 징집한다. 티에르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카리는 아들을 빼돌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자원입대한다. 아들을 보호하고,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 방법도 여러 가지다. 티에르노를 후방에 남기기 위해 취사병 보직으로 보내려 로비하고, 은신처를 찾거나 탈영 계획을 짜기도 한다.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자 자기 한 몸을 희생한다. 전투 중 독일군 포로가 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독일군 진지에 침투한다. 아들을 구출해서 프랑스군 참호로 돌려보내는데도 성공한다. 비록 자기는 총 맞아 쓰러지지만.
이처럼 <파더 앤 솔저>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묵직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니 설사 흔한 스토리라 해도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다.
세네갈 부족민, 프랑스 군인이 되다
반면에 아들의 시점에서 보면 <파더 앤 솔저>는 전혀 다른 영화다. 원치 않게 프랑스군에 입대한 티에르노. 그도 처음에는 집을 그리워한다. 전선에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자기도 죽을 위기를 여럿 넘기면서 귀향을 꿈꾸는 마음은 더 커진다.
그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달라진다. 프랑스군과 독일군 참호 사이에 방치된 친구 시신을 수습해 오는 등 무공을 보여준 결과 상병으로 진급한다. 다른 병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프랑스 지휘관들과 교류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보호 때문인 걸 알면서도 아버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기를 증명하려는 만용을 부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사춘기 아들의 반항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요소가 끼어든다. 바로 프랑스다. 이등병 티에르노가 상병을 거쳐 하사까지 진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공 외의 무기가 있었다. 의사소통 능력이다. 티에르노는 아버지와 달리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안다. 그는 프랑스군 장교와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 간의 가교였다. 그 결과 티에르노의 변화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깃든다. 그는 단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반항하는 게 아니다. 그는 프랑스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두고도 아버지와 아들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카리는 부족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독일과의 전쟁도 무의미한 살육일 뿐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탈영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티에르노는 다르다. 그에게 이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탈영은 하나의 공동체인 프랑스를 배신하는 선택이다. 그가 아버지와 달리 전선으로 복귀하고 프랑스를 위해 싸운 이유다.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아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바카리의 부성애도 달리 보인다. 그의 죽음은 이제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마냥 가슴 아픈 감동도 아니다. 질문이다. 한 민족이라는 자각도 없이 참호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족을 잃고, 가족이 찢어진 채로 그들이 지켜낸 국가와 민족은 또 무슨 의미인지. 식민지에서 끌려와 파리 개선문 밑에 묻힌 이름 모를 군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다른 부자 관계도 바카리가 던지는 질문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에는 프랑스군 장성 아버지와 중위 아들이 등장한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푸념한다. 실제로 아버지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아들 부대를 방문했을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 작전 중 전사하니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인정한다. 성대한 장례식을 열고 아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가족 대신 민족과 국가를 선택했다고 칭찬한다. 과연 이 아들은 아버지의 칭찬에 기뻐할까?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파더 앤 솔저>는 얕은 영화일 뻔했다.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흐른다. 내용을 예상할 수 있는 제목도 한몫한다. 하지만 우려는 기우였다. 결말의 맥락은 복잡하다. 그만큼 여운은 길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답다. 익숙함을 뒤집어 고뇌의 시간을 선사한 바드피에 감독의 재능도 빛난다.
영화 <파더 앤 솔저>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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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을 찾아서(2007)> 리뷰
얼마 전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행복을 찾아서(2007)>를 감상했다. 현재는 사업가이자 연설가로 부유한 삶을 누리는 크리스 가드너의 삶의 한 부분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일까. <행복을 찾아서>는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주인공의 고달픈 시절에 집중한 후,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간신히 행복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이렇듯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놓친 적 없는 이의 이야기는 욥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인류에게 오래되고 익숙한 플롯이다. 필립 모슬리의 삶을 기반으로 삼았다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나 존 카니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기본 뼈대였다는 <싱 스트리트(2016)> 등을 비롯한 영상 매체와 다양한 문학은 물론, 신문 기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전형적이라 해도 뻔하진 않고, 감동과 교훈을 한 번에 선물하는 소위 ‘안전한’ 서사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행복을 찾아서>를 가족과 함께 봐도 좋은 영화로 추천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굳이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한 개인을 영광스럽게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할지라도, 이따금, 어떤 예술이 세상의 허점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아서>를 보는 동안엔 여러 책이 머리를 스쳤다. 예컨대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 스테퍼니 랜드의 『조용한 희망』, 조문영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장밋빛 아메리칸드림 홍보영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간단히 <행복을 찾아서>의 시놉시스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구식 스캐너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당장 매일의 생계가 걱정되는 상황이지만 불안이라는 파도를 가족과 함께 견뎌왔다. 그런데 세금, 집세, 어린 아들 크리스토퍼 가드너(제이든 스미스)의 어린이집 비용을 부담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순간 아내 린다(탠디 뉴튼)는 떠나겠다고 한다.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자신했던 크리스의 말이 오래도록 실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그의 얼굴은 참담하리만큼 무표정하다. 이렇게 아내와 헤어진 크리스 가드너는 딘 위터 레이놀즈의 주식 중개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택한다. 우연히 추천받은 이 프로그램은 6개월 동안 지속되지만, 합격률은 단 5%에 불과하고, 심지어 그 동안 봉급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린다는 그에게 묻는다. 그건 후퇴 아니야?
우리는 크리스 가드너가 결국 모든 기회를 쟁취하고 백만장자가 되었음을 알기에 린다를 향해 조금만 더 남편을 믿어주었으면 좋았으리라 말하기 쉽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당신이 린다의 상황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장 생존의 위협이 다가왔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개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는 꿈을 추구하는 대신, 매일의 삶을 연장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린다가 아들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뉴욕으로 떠나 가족의 식당 일을 도우려 했듯.
그러나 크리스는 이 미치도록 적은 확률의 ‘가능성’을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타인과 다르게 만든 지점이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개인을 저토록 궁지에 내모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하고 몰인정한가?
“결과적으로” 크리스 가드너는 노력 끝에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지만, 만일 그가 인턴직 기회를 몰랐더라면? 도둑맞은 스캐너를 찾지 못했거나, 교통사고를 더욱 크게 당했더라면 어땠을까? 대런 맥가비는 자신의 책 『가난 사파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실수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영화 곳곳에서 증명된다. 크리스 가드너는 끊임없이, 쉼 없이 달려야 한다. 페인트칠하다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고 달려가 면접을 보는 그의 모습, 부유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서러운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장면, 당장 모텔을 전전할 돈조차 부족해 아들의 손을 잡고 교회의 자선사업에 의지하고 발을 구르거나 전철역의 화장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삶의 편린은 너무도 절박하다. 일련의 상황과 조건이 크리스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을 수 있겠지만, 이렇듯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희박하기 짝이 없는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보편적 대중에게 설파하는 건 지나치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사회는 단순히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희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더욱 많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의 유래가 되었고, 크리스가 언급했던 문장조차 그다지 찬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토머스 재퍼슨이 미국의 헌법에 명시했다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구절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혁명론』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재퍼슨이 뜻한 바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의 행복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공적 행복이었다고. 실제로 재퍼슨이 어떤 생각을 하며 해당 문구를 헌법에 넣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간단히 미국이 영국 왕정의 핍박을 피해 온 이들이 세운 국가였다는 점,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최초로 제도화한 근대적 국가인지라 많은 용어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리라는 점만이라도 고려한다면 아렌트의 주장은 퍽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진실로 재퍼슨이 헌법에 급작스레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행복의 추구’를 포함한 이유가 개인의 사적 행복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삶의 설움을 떨치기 위해 개인적으로 발버둥 친 크리스의 노력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허해지기까지 한다.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한 편으로는 그저 약간의 행운이 부족해 제2, 제3의 크리스 가드너가 되지 못했을 이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일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의 신념처럼,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산 사람을 해치지 않을 방어 체제는 언제고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인간의 기본 권리와 개인의 삶이 소외되지 않기를 고민했던 헤겔의 법철학을 가져와도 좋겠다. 현대에 오며 낡아버린 철학일지라도 그가 했던 고민의 뿌리는 작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살얼음판인 이에게 “행복은 환경을 비롯한 외부적 요소와 무관하며, 개인의 힘만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공허하다 못해 잔인한데다가,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가.
잠시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의 내용을 인용해본다.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더니,
한 친구가 이런 내용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선생님 이야기처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꿔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꼭 높은 사람이 되어야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두 명의 예외적인 성취를 칭송하고 지금의 시스템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일인분의 행복을 위해선 당신과 세상이 필요하므로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자 당신을 위한 일이며 사회를 향한 발돋움이다.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는 세상, 개인의 능력에 맞는 사다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점차 세계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요즈음이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민사회에 대해 낙관을 가져본다.
* 참고 문헌
조문영.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김누리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대런 맥가비. (김영선 옮김) 『가난 사파리』
소병일.(2018).헤겔의 행복한 인간.철학사상,(68),129-153.
이재정. (2015). 행복의 공공성: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철학연구, 133, 263-282
정원규. (2020). 아렌트 공적 행복 개념의 발전적 재구성을 위한 보충적 논제들. 사회와 철학, 40, 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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