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8-02 14:45:52
거장들이 평가한 호불호 영화 8선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독님들의 독특한 취향
거장들이 평가한 호불호 영화 모음 !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독님들의 독특한 취향
본인이 만드는 영화와 결이 다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진정한 씨네필이 아닐지
Relative contents
-
- 엘리자베스, 롱 리브 더 퀸!
6★/10★
1952년 여왕의 자리에 올라 2022년 사망까지 70년간 영연방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2세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 번째는 여왕이 영연방의 상징으로서 품위와 위엄을 갖추어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사회의 어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때때로 품위와 위엄이 과해 여왕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으로 왕실을 운영했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각각의 사례에 대한 영화적 레퍼런스를 갖고 있다. 전자는 〈더 퀸〉(2007), 후자는 〈스펜서〉(2022)다. 한편 여왕에 대한 평가는 단지 여왕 개인의 인격에 대한 판단에 그치지 않기도 한다. 민주주의와 입헌 군주제의 병립 가능성(혹은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도 쉽게 연계되는 것이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기간 내내 영연방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의 추모를 받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녀는 분명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퀸 엘리자베스〉는 그런 여왕을 위한 애정 어린 헌사다. 즉위 후부터 재위 말기까지 여왕의 연설과 인터뷰, 일상 등이 기록된 영상을 콜라주해 오랜 세월 사랑받고 존경받은 여왕의 생애와 임기를 톺는다. 중요 변곡점이나 굴곡을 깊이 있게 조명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조감하는 방식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비판 의식보다는 옅은 미소를 곁들인 회고에 가깝다. 영화 말미에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이 야기한 혼란과 위기, 최근에 불거진 해리 왕자의 인종 차별 폭로 등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왕이 이 모든 논란을 잘 갈무리했다는 점을 부각한다. 여왕이 ‘21세기의 군주’라는, 정치적 기반이 쉬이 흔들릴 수 있는 자리에서 놀라운 균형감과 예민한 정치력으로 그 모든 긴장을 조율하고 관리해왔다는 데 더 무게를 둔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인의 여왕이자 영연방의 여왕이었다. 턱시도를 입은 기득권 남성부터 흑인 이민자와 펑크 스타일의 뮤지션까지, 모두의 여왕이기도 했다.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 나라에서, 여왕의 전성기가 지났을 때 태어난 내가 〈퀸 엘리자베스〉와 같은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생경함과 부러움이다. 먼저 생경함은 도대체 군주의 권위가 어떻게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는지에서 나온다. ‘왕’을 전근대적 권력관계의 상징이자 정점이라고 인식하는 곳에서 나고 자랐기에 모두가 자연스레 그 권위를 인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경함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문화, 역사, 제도 등의 차이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정작 중요한 건 부러움이다. 모두가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 혹은 어른이 있다는 데에 대한 부러움 말이다. 민주 공화제 국가에서는 정치 지도자를 투표로 뽑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전 사회적 어른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품위와 도덕의 화신으로 존재하는 군주는 ‘품위 없고 부도덕한’ 존재를 비난하는 근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모두의 상처를 보듬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회적 참사가 나도 여야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날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한국에 엘리자베스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 문제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다. 나이브하고 근거 없는 기대라는 점을 안다. 입헌 군주제가 필요하다는 (한국이 맥락에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끔은 매우 ‘불온한’ 사람까지도 아주 조금이나마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자체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영화를 보면 숱한 위기와 끊이지 않는 비판에도 영국민들의 마음속에 결코 훼손되지 않는 여왕의 위엄과 권위가 분명 존재했다는 감상이 자연히 솟는다. 아마도 입헌 군주제 자체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엘리자베스 2세가 비상한 감각과 타고난 영국적 고귀함으로 쟁취한 결과물일 테다.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The crown is a idea more than a person.” 영화의 정확한 자막은 기억나지 않는데, 직역하자면 왕위라는 관념이 개별 인간보다 더 무겁다는 의미다. 여왕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을 그녀가 느낀 왕관의 무게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그래서인 것 같다.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여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Queen)!’라고 외치는 듯한 〈퀸 엘리자베스〉가 부러웠던 이유 말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자연 앞에서 인간의 태도를 묻는 영화
❣️[Cinelab Curation]❣️
아직 4월임에도 낮 기온이 20도가 훌쩍 넘어가는 요즘,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벌써 걱정입니다…🥲
어제는 지구의 날이었죠.
오프라인에서는 건물 소등 캠페인을 하고, 온라인에서는 메일 삭제 운동을 하는 등 지구의 날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리고 이번에 내한한 콜드플레이 콘서트에서는 자이로밴드를 회수하고, 페트병에 담긴 물의 반입을 금지하는 등 친환경적인 공연을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이렇듯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을 고민하고, 그 방법을 찾아나가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번 큐레이션을 통해 자연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고민해 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미래를 그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__
_____
-
- 로기완 | 사랑하기에는 둘의 고통이 너무 달랐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옥희'(김성령)의 죽음과 함께 중국에서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탈북자 '로기완'(송중기). 그는 마지막 재산과 희망을 쥐어짜서 벨기에 브뤼셀로 향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하지만 그의 세상은 여전히 혹독하다. 벨기에 정부의 난민 심사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진행되고, 잠잘 곳도 직업도 없는 기완은 브뤼셀의 길거리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어느 날, 기완은 무인 세탁실에서 눈을 붙이던 중 어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한 지갑을 도난당한다. 그는 경찰서에서 범인 '이마리'(최성은)를 만나고, 마리는 황당한 부탁을 한다. 자기가 전과가 있으니 잃어버린 금액을 줄여서 진술해 달라는 것. 기완은 지갑이 있는 곳에 바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그는 미처 예상 못한, 마리와 함께 하는 삶에 첫 발을 내딛는다.
<로기완>에게 건 기대
근래 넷플릭스에서 한국 영화를 보면 실망스러운 작품이 많다. 그러다 보니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작품에 대한 선입견도 생겨난다. 이번에도 기대보다 못할 것이고, 단순한 킬링타임 영화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배우나 제작진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완성도로 인한 나비효과다.
<로기완>은 조심스럽게 다른 기대를 걸어볼 만한 작품이었다. 소재를 다루는 관점이 독특했기 때문. 물론 탈북자들의 어려움 자체는 새롭지 않다. 차인표 주연의 <크로싱>(2008)이 대표적이다. <로기완>은 달랐다. 한국에 입국하려는 탈북자가 아니라 유럽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탈북자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기대는 일부 충족된다. <로기완>은 통상적으로 고려하지 못했거나 조명받지 못한 현실을 드러낸다. 인간답게 살려고 북한을 탈출했지만, 또다시 '거주할 권리'와 '떠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탈북자의 절박함과 억울함을 연기한 송중기의 연기력도 시청자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대신 한계도 명확하다. <로기완>은 한 탈북자의 사연을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하기 위해 장르를 전환한다. 그러나 탈북자의 난민 신청기가 멜로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보여줄 방식을 잘못 선택했다. 그 결과 <로기완>은 시청자를 설득할 힘까지는 보여주지 못했고, 끝내 기대를 저버린다.
생존의 의미를 묻다
<로기완>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생존'이다. 구체적으로는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시작부터 카메라는 로기완의 생존기를 화면에 담는다. 벨기에 정부가 난민 신청을 받아주기 전까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완. 그는 공중화장실을 숙소로 삼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밥을 먹고, 공병을 모아 번 푼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퀀스는 담담하기에 강렬하다. 일련의 사건이 픽션보다 팩트에 가까울 것이기에 울림이 더 크다.
중반부터는 그의 생존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기완. 그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의 아버지 '이윤성'(조한철)은 정반대의 조언을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지금 처지에서 사치가 아니냐고. 일단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기완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난민 심사 과정이나 고기 공장에 불법으로 취업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보여준다. 반면에 쓰레기를 찾아 먹던 기완이 멀끔하게 고기를 구워 먹고, 마리와의 사랑을 싹 틔우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대목은 그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즉, <로기완>은 그가 어떤 생존을 선택하는지를 뒤쫓는 영화인 셈이다.
멜로가 등장하는 이유
이에 더해 영화는 기완의 선택에 담긴 의미를 확장하려 한다. 그 일환으로 인간다운 삶을 기완의 마지막 말마따나 "떠날 권리"로 재정의한다. 이는 이중적인 말이다. 일단 물리적인 의미가 있다. 당장 탈북은 그 자체로 '떠날 권리'를 되찾기 위한 사투다. 또 이 싸움은 탈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난민 심사에서 탈락하면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고, 심사가 끝날 때까지는 벨기에를 떠날 수 없으니까.
동시에 심리적인 의미도 엿볼 수 있다. 기완은 어머니가 남긴 지갑과 돈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도난당한 지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벨기에 마피아들에게 대책 없이 달려들 정도다. 그의 몸에 남은 흉터는 그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고통과 죄책감을 항상 상기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떠날 권리"는 마음의 상처를 딛고, 자기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로기완>은 그 연장선상에서 마리를 등장시킨다. 사격 선수였던 마리는 전지훈련을 간 사이에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안락사로 사망하자, 그 책임을 안락사에 동의한 윤성에게 돌리며 그를 비난한다. 가족을 한 순간 잃은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마피아의 도박장에서 이용당한다. 그녀 몸에 있는 문신은 기완의 흉터럼 어머니를 뜻하고, 문신이 있는 한 그녀 역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공통점 덕분에 <로기완>의 장르는 멜로로 바뀔 수 있다. 심리적으로 '떠날 권리'가 없는 남녀. 그 둘은 악연 또는 운명으로 만나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기완에게 마리는 취직하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마리 역시 기완 덕분에 약물을 끊고 마피아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의 사랑을 탈북자, 난민뿐만 아니라 자기 과거를 떠나고 싶은 모든 이들의 발악 혹은 절박함의 표출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공통점을 찾기에는 너무 먼 남녀
그런데 <로기완>의 장르 전환은 매끄럽지 않다. 기완과 마리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 물론 따로 놓고 보면 둘의 이야기는 분명 인상적이다. 탈북자로서 고통받는 기완의 삶도, 마피아에게 협박당하고 마약을 끊지 못하는 마리의 삶도 비참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로기완>은 둘의 아픔이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 기완의 아픔은 직관적이고, 현실적이다. 일단 한국 시청자는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의 고난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또 미처 몰랐던 현실은 그의 난민 신청 심사 과정을 더 험난하게 만든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이 탈북자로 위장해 유럽 국가에서 난민 지위를 얻으려 했던 실제 시도 때문에 벨기에 정부는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서류와 증거를 요구한다.
반면에 마리의 사연은 기완에 비해 추상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마피아와 얽힌 전직 사격 선수라는 설정과 안락사 문제로 아버지와 빚는 갈등. 이 이야기는 피부에 그리 와닿지 않는다. 탈북자가 겪는 고난에 비하면 현실 감각과 무게감이 필연적으로 부족한 이야기이기 때문. 그러다 보니 기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경우, 마리의 이야기는 더욱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완의 사투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는 동안, 그녀의 사연은 짧은 플래시백으로만 암시된다. 복선은 후반부에 가서야 회수되고, 그녀가 마피아와 손잡게 된 전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주인공 중 한쪽이 비중도, 분량도 없으니 <로기완>의 멜로는 전체 분위기에 끝내 녹아들지 못한다.
긴장감도 부족하다
멜로 자체도 특색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모의 반대로 난관에 빠지는 전개는 식상하다. 위기를 고조하는 과정은 다소 급작스럽고 작위적이다. 결국 기완과 마리가 사랑을 키우고 재확인하는 순간순간의 긴장감도, 설득력도 약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난민 심사가 진행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마리로 인해 브뤼셀과 베를린 마피아 간의 알력 싸움이 커지고, 그로 인해 마리와 기완은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그런데 마리의 서사가 애초에 빈약하다 보니, 브뤼셀 마피아의 대장인 '씨릴'(와엘 세르숩)의 동기나 목적에 대한 설명 역시 충분치 않다. 그러다 보니 최후반부에는 기완도, 마리도, 씨릴도 무리수를 남발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로기완>은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탈북이라는 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대 이야기를 확장하려는 시도 자체는 남달랐다. 단지 메시지에 힘을 주려는 의도가 과했고, 그 대가로 지향점이 불분명해졌을 따름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을 비교하면 괴리감이 크다.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중간 과정을 납득시키지 못했으니 그 또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만약 로기완의 난민 심사 과정에 온전히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로맨스를 양념으로 활용하고, 마리도 조연 중 하나였다면? 유럽 내에서 살아가는 탈북자 사회, 조선족과의 갈등 관계를 더 부각했더라면? 그러면 소재의 신선함을 온전히 살려낸, 더 특색 있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멀티버스를 상상할 수 있기에 <로기완>의 결과물은 더욱 아쉽다.
Poor 형편없음
시작과 의도는 좋았던 탈북자의 멜로드라마
-
- 향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지구를 구하는 여정으로
@@ 스포가 포함되어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영화에 앞서 줄거리를 소개할게요!
줄거리 : 고등학교 시절 양아치 인싸 친구들 5명이 어른이 되고 오랜만에 모였다. 주최자는 그중 가장 인싸였지만 현재는 가장 백수인 게리 킹. 그들의 목표는 옛 동네로 돌아가 12개의 술집을 해가 뜨기 전 하룻밤에 모두 순례하는 것. 하지만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이 로봇에게 세뇌당해 로봇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그와중 킹은 순례를 멈출 수 없다고 하며, 마지막 술집 '세상의 끝'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술집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로봇들의 왕 네트워크. 하지만 게리 킹과 그의 친구들은 '아무도 안들려~', '우린 멍청할 권리가 있어!'등의 주옥같은 대사들로 네트워크와의 말싸움을 이긴다. 지구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시스템을 파괴한 후 짜진 네트웤. 그렇게 영화의 막이 내린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친구들이 옛 고향의 향수를 맡기 위해 술집 투어를 하는 그런.. 뭐랄까.. 귀여운 독립영화같은 느김을 기대하고 봤는데, 영화가 끝난뒤 떠오르는 말은 예상외로 예상외다...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뒤죽박죽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이야기의 전개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급속도로 바뀌는데에 반해 이야기 자체가 헷갈리지 않고, 난잡하지 않은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여러 인서트를 활용한 연출을 통해 스타일리쉬하며 동시에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감독의 다른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느꼈지만, 연출이 스토리에 개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면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며 즐기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주인공 '게리 킹'을 보여주는 방식.
: 병맛 코미디 영화라는 장르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중요성의 비율은 상당하다. 감독은 주인공을 다른 평범한 친구들과 대비되는 장면들은 보여주며 평범함을 거부하는 그의 병맛력에 매력을 느끼게 하고, 영화의 전개가 되며 친구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주인공의 밸런스를 맞추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복선이 소름끼치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캐릭터를 부각하는 용도로 잘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의 하나 단점을 꼽자면 결론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속편을 기대해달라는 느낌을 주어서 아쉬웠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적응자'가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스토리에서 고등학교 이후로 도태된 부적응자 '게리 킹'은 사회에 적응해 평범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그리우면서도 부러워한다. 그래서 친구들을 데리고 자신의 인생 최대 업적인 술집 투어 챌린지를 돈다. 로봇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 또한 사회에 완전히 순응하고, 이끌려 사며 개성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중 개성있던 술집이 프렌차이즈화 되어 모두 같은 인테리어로 변한 것 등으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등의 장치를 보여주며 고등학교 시절을 마지막으로 적응하지 못하게된 '게리 킹'을 더 가엾게 만든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는 성격인 나로써 영화의 메세지에 공감을 얻었고,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감독의 나머지 2개의 필모그래피도 보고싶어졌다!
파노라마_에디터 OREHFILL
-
- 국내 여성 영화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에디터가 차기작 제작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여성 영화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들을 소개합니다!
10대의 성장통을 다룬 <보희와 녹양>, <비밀의 언덕>부터 덕후였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큐멘터리 <성덕>, 모녀 관계를 다룬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딸에 대하여> 등 각기 다른 장르와 소재를 다룬 데뷔 영화들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특히 곧 개봉을 앞둔 <모래바람>은 박재민 감독이 씨름에 빠져 다큐멘터리까지 찍게 되었다는 비하인드가 전해져오는데요.
2009년 최초의 여자 천하장사가 탄생한 이후 5명의 여자 씨름 선수들이 비인기 종목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천하장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은 최초의 여자 씨름 영화!
<모래바람>은 11월 27일 극장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보희와 녹양
A Boy and Sungreen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성덕
Fanatic
비밀의 언덕
The Hill of Secrets
지옥만세
Hail to Hell
딸에 대하여
Concerning My Daughter
모래바람
Sandstorm
-
- <브루탈리스트>, 몇몇 장면들과 질문들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2024, 브래디 코베)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
멀미하며 터널을 빠져나가는
<브루탈리스트>는 취조실에 갇혀 패닉한 조피아의 정면 얼굴로 시작해, 라즐로 토스 회고전에서 자신 있는 연설로 숙부와 숙모의 유산을 기리는 나이든 조피아의 정면 얼굴과 오프닝 오버랩으로 끝난다. 일종의 느슨한 액자로 다가오는 이 구성은 영화를 조피아가 쓴 라즐로의 전기처럼 바라보게도 한다. 조피아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설명하며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라는 문장을 강조한다. 바로 그 ‘과정’, 즉 라즐로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에 배반당하면서도 ‘고작 몇 미터의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서 듣게 되는 대사다. 텍스트만으로는 위험하게 들리는 이 문장 자체가 가치관이라기보단- 가치관이나 태도를 지키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과정’의 서술 방식은 집요하게 상세하되 목적지를 분명히 두고 있어 고통의 전시나 낭만화로 읽힐 위험을 피한다. 고난과 완성된 작품을 잇는 어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는 ‘그러한 맥락으로’에 가깝다.
액자 안의 두 번째 오프닝은 미국에 닿은 라즐로의 모습에 에르제벳의 편지가 보이스오버되는 시퀀스다. 비좁은 공간에서 막 잠에 깨어 부랴부랴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라즐로를 따라가는 롱테이크는 매초가 갑갑하고 초조하다. 편지가 화면을 빠져나가는 와중 라즐로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부드럽게 흐르는 내레이션-편지와 더디게 나아가는 인물, 그 ‘방향’은 서로 어긋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실제로는 아직 닿지 못한 에르제벳의 음성이 라즐로를 이끌며 함께 암흑을 벗어나는 듯한 연출이다. 라즐로는 마침내 야외로 나가 탁하고 환한 공허를 만난다. 무언가를 보고 환호하는 그는 화면 맨 하단에 몰려 있다. 이내 카메라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찍는다. 자유의 여신상, 다만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횡으로 돌아가 있다. 노골적인 만큼 효과적인 은유다.
이어 라즐로가 탄 차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타이틀과 크레딧이 겹치는데, 도로/차를 가로지르는 수평 방향으로 진행된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지럽다. 그 멀미의 감각으로 라즐로의 언어를 감히/조금이나마 알아들어 보기를 제안하는 것일까. 이를 비롯해 영화에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도로를 달리거나 터널을 지나는 숏이 몇 삽입되어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가로막히며 더디게 나아가는’ 감각이 있었다면 이 숏들에는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달리는’ 감각이 있다. 특히 에르제벳과 말다툼하며 어두운 도로를 운전하는 씬은 상징적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며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는 듯도 보였던 부부는 나란히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라즐로는 단 하나 헤로인에는 굴복했으나 자신을 유혹하고 내리누르는 나머지 것들은 거슬렀다. 그가 멀미하고 구역질하며 캄캄한 터널을 견디고 환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도운 것은 그 자신과 에르제벳 외 누구도 아니었다.
사라진 해리슨
오프닝 크레딧처럼, <브루탈리스트>에서는 솟아오르거나 나아가는 라즐로와 그를 방해하는 ‘미국적인 것’이 대립한다. 이미지와 언어/소리가 서로 불일치함으로써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해리슨 밴 뷰런이 라즐로를 연회에 초대해 설득하며 아름다운 일화와 명분을 늘어놓을 때, 화면에는 내기 포커를 치며 값비싼 술을 홀짝이는 파티 참가자-부자-들의 몽타주가 흐른다. 꼭 중세 유럽 귀족들마냥 예술가를 ‘후원’하며 제 소유물로 두려는 듯한 해리슨은 그들 중 하나이면서 홀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위선자, 겸손함과 우아함을 연기하다 실패하는 나르시시스트다. 화를 펄펄 내며 강렬하게 등장한 그의 퇴장은 모호하다. 실질적으로 ‘없다시피 한’ 그 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브루탈리스트>는 관람이 끝나자 마자 페이버릿 씬이 자동으로 생기는 종류의 영화였다. 거기엔 의외로 라즐로가 없었다.(애드리언 브로디가 담배를 무는 모든 씬은 논외로 한다.) 남편의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된 에르제벳은 보조기구를 짚고 천천히 해리슨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간다. 식탁에 둘러앉은 해리슨, 아들 해리, 딸 매기 등등. 에르제벳은 입구에 몰려 우뚝 선 채 해리슨을 폭로한다.(휠체어 이용/걷기를 에이블리즘에 오염된 의도로 구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작가가 상징을 드리우려 했다’기 보다는 ‘에르제벳에게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즐로 역시 엔딩에서는 휠체어에 타 있기도 하고. 영양실조로 하반신이 마비된 적이 있는 에르제벳은 휠체어에 앉아야 이동이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서 걸어 들어가기를 택한 까닭은, ‘내가 불편해지고 심지어는 위험해지더라도 저들을 내려다보거나 적어도 물리적으로 동등한 눈높이에 있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해리슨은 뒤늦게 부인하고 제발 저리듯 라즐로를 해고하겠다고 선언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해리는 과하게 분노하며 에르제벳을 질질 끌고 나가 내동댕이친다. 매기는 해리를 비난하지만, 그의 ‘순수한’(기계적인) 선의는 이 영화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숏은 끊어지지 않고, 카메라는 되돌아가 아버지를 찾는 해리를 따라 긴긴 계단을 오른다.(이 부분에서 조 알윈이 놀라웠다.) 해리는 좀 이상하다. 흥분해 있고, 화나 있고, 방금 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듯도 하고… 헌데 복합적인 격앙에 담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의 일부는 어쩐지 당황해 있고, 무언갈 감추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것도 같다. 그는 해리슨의 혐의가 사실임을 내심 짐작하거나 그 자신이 한 일을 돌이키고 있을 수도 있다.(조 알윈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DAZED]) 여기서 시간/편집 순으로 한참 전의 시퀀스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만취한 해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라즐로를 협박하며 조피아를 언급한다. 얼마 후 호숫가에 있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청한다. 두 사람을 그대로 고립시킨 채 영화는 호숫가의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해리슨, 매기, 에르제벳 등등.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에르제벳은 최선을 다해 웃고 적절히 반응한다. 어느 시점에 배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숲에서 걸어오는 해리와 조피아가 포착되는데, 클로즈업이 아닌 평이한 숏이다. 늘 그렇듯 말없는 조피아와 답지않게 조용한 해리에게서 읽히는 신호는 많지 않다. 해리는 술이 좀 깬 것 같다. 아까는 수영복 차림이던 조피아가 평상복을 입고 있고, 걸어오며 가디건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찰나를 우리는 계단을 오르는 해리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위계는 은근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해리슨은 저택에 없다. 해리와 매기는 사람을 모으고 개를 풀어 주변을 수색한다. 컴컴한 화면에 횃불만이 밝혀진 가운데 개들과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은 어쩐지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곧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에 다다른다. 영화는 빈 건물의 곳곳을 조명한다. 말소리들은 높은 천정과 차가운 벽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카메라는 라즐로가 설계한 ‘빛의 십자가’에 머문다. 그리고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라즐로 토스 회고전을 촬영한다. 밴 뷰런 일가는 재등장하지 않는다. 해리슨은 영화에서 증발했다. 이민자 예술가 라즐로의 경험과 유산, 일관된 태도, 그의 고난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체화한 ‘브루탈리즘’ 건축 예술은 역사에 남았고 기려진다. 그러나 그의 착취자, 미국인 억만장자 해리슨은 악인으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2
해소되었거나 되지 않은 질문들
- 관람 전 질문: AI 사용이 필요했는가? 연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 두 배우의 헝가리어는 훌륭했으나, 워낙 어려운 언어라 세밀한 리얼리티를 위해 녹음된 대사를 다듬는 데에 사용했다고 하던데… 두 인물이 ‘헝가리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하는 비헝가리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했다면 ‘양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헝가리어는 주로 편지 내레이팅에서 쓰였고, (내 생각이지만)헝가리인을 포함한 관객들이 그 완벽함에 감명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허나 워낙 민감한 이슈고… 이렇게 바운더리가 모호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수정’하기 시작하다 점점 배우 각자의 고유성을 침범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하며 판단을 유보중이다. 다만 제작진의 AI 사용 결정 ‘탓에’ 오스카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간다면 애드리언 브로디는 속이 좀 쓰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는 이미 연기상을 여럿 수상했고 BAFTA 수상 소감에선 사려깊게도 동료 후보들을 모두 호명했다.)
- 관람 후 질문: 영화는 은근히 시오니즘을 지향하고 있는가?
: 조피아는 ‘예루살렘 행’이 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듣고 “그럼 우린 유대인이 아닌 거니?”라고 혼란을 표했던 에르제벳은 후에 ‘여기선 살 수 없다’며 이스라엘로 가자고 말한다. 아마 브래디 코베도 영화에 대한 반응에 ‘시오니즘’이라는 화두가 등장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 같다. 그가 NYFCC 작품상을 수상하며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점령을 다룬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No Other Land>를 서포트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을 간접적 근거로 들 수도 있으나, 당연히 이야기 내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할 테다. 조피아의 단정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할까? <브루탈리스트> 주인공들이 (아마도 1950년대에) 이스라엘 행을 결정하는 바탕에는 막연한 희망과 동경보단 구체적인 좌절이 있다. ‘그나마 가능한 살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감독은 “캐릭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주위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DAZED])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각각 인정받는 프로 건축가/교수와 저명한 기자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서로 이별했다. 아메리카에서 라즐로의 드리밍은 지속적으로 제지당한다. 역시 고초를 겪은 조피아는 두 사람의 관찰자이기도 했다. 헝가리와 미국에서 그들은 ‘살 수가 없’다. 물론 그 ‘살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을 침범한다. 허나 적어도 이들 가족의 경우는 이미 ‘건국’된 이스라엘로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그래서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는 트루먼의 ‘이스라엘 국가 선포’ 연설이 보이스오버 되는 씬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거꾸로 자유의 여신상’으로 은유하며 허상과 위선 덩어리로 바라보는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대통령의 ‘승인’ 또한 무책임한 제스처이며 허상이라고 암시하는 것일까? 과해석일 수도 있다. (미국은 하얗고 가자지구‘도’ 미국의 것이며 ‘신이 주신 두 개의 성별’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백악관에 들어앉은 지금, <브루탈리스트>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묻는가?)
기념비적 연기들
아직도 <피아니스트>만이 자주 화자되나, 애드리언 브로디는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다만 때로 ‘도저히 모를’ 작품과 캐릭터를 택했기에 고유의 분위기와 퍼포먼스가 제대로 빛나지 못했을 뿐이다.(가끔은 그가 웨스 앤더슨 픽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대 배경과 캐릭터 설정에서 어쩔 수 없이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되었으나, <브루탈리스트> 작품 자체 만큼이나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라즐로는 큰소리를 낼 때 가장 취약해 보이고 가만히 미소 지을 때 가장 단단해 보인다. 압도하고 누르기보단 거센 바람에 바스러지며 꼿꼿이 상처받는 자. 연약하며 우아하고 엉망인 채로 고고한 존재감이라고 할까… 모조리 사랑하기는 힘든 인물이었으나 라즐로 토스는 <디태치먼트>의 헨리와 나란히, 내 ‘애드리언 브로디 최애 퍼포먼스’ 목록에 올랐다. 멋진 서재 리모델링을 보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드미트리마냥 열을 펄펄 내는 해리슨 앞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빼무는 라즐로-보십시오 이것이 애드리언 브로디 입니다. 그래, 늘 당신이 배우로서 좀 더 주목 받았으면 했었다.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굉장했다. 앉아있건 서있건 누워있건 화면 어디에 있건 중심이 되었다. 에르제벳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라즐로를 위한’ 역할로 남아 아쉽기는 했으나, 그는 이끌리기보다는 이끄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아닌 이해를 선행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였다. 남편이 빠르게 미는 휠체어나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에르제벳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지하고 질문하고 따지고 주장했다. 폐쇄적인 구석이 있는 라즐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성공했으며, 이내 남편의 대변자 자리에 위치했다. 헤로인을 맞고 사랑을 나누며 라즐로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되는 에르제벳은, 마치 남편의 내면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토스 부부의 베드신들은 기묘하고 불편하고 애처로우며 아름다운데, 육체의 하나됨을 넘어선 생각과 정서의 하나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편집도 편집이었고, 펠리시티 존스의 액션을 애드리언 브로디의 리액션이 받쳐주며 마디마디 환상적으로 맞물리는 연기 합이 대단했다.
+ 가이 피어스도 물론 훌륭했고, 라피 캐시디는 관심 배우 목록에 올렸고, 스테이시 마틴은 ‘아무것도 안 하는’ 역할을 맡았고, 기대했던 이삭 드 번콜은 애드리언 브로디와 공사장 컨셉 화보를 찍은 후 퇴장했고, 조 알윈은 내내 효과적으로 신경을 거스르다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에서 ‘뭔갈’ 해냈다.
* 참고 인터뷰
DAZED | Joe Alwyn and Brady Corbet on The Brutalist: ‘It’s very, very radical’
-
-
-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을 전문(어)가를 모시고 리뷰 해봤습니다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나의 문어 선생님을 K-문어 선생님과 리뷰 했습니다!
씨네마사지
? 황보랑 영화 보고 싶은 사람 모여라~?? ♀
거리두기 해제 기념 씨네마사지에서 첫 번째 이벤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
다가오는 5월 18일에 개봉하는 범죄도시2를 황보와 함께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신청해주세요 ↓↓
https://forms.gle/sAATgsdoStRCPH7v8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
-
- 영화 <미션 임파서블: 루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의 ‘올랭피아’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연이어 폴 고갱의 ‘과일을 든 여인’, 반 고흐의 ‘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
피카소의 ‘책을 든 여인’,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까지…
세계 곳곳에서 유명 명화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범인은 바로 심리치료사 루벤과 그의 환자 미미, 페르난도, 조, 브루노!
루벤이 명화 속 주인공들에게 공격당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자
다 함께 문제의 예술작품 13점을 훔치기 시작한 것!
하지만 마지막 작전을 앞두고 사립탐정 코왈스키에게 덜미가 잡히고
현상금을 노리는 킬러들에게 쫓기기 시작하며 예기치 못한 위험에 빠지는데…
남은 명화는 단 하나!
마지막 한탕을 위한 팀 루벤의 미션 임파서블이 시작된다!
-
- 영화 <씽2게더> 파이널 예고편
꿈꿔왔던 드림 스테이지! 씽 크루들은 빛나게 해낼 수 있을지 1월 5일 극장에서 확인해보자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