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06 17:05:04
제82회 골든글러브 영화 부문 수상 결과
<에밀리아 페레즈> 4관왕 달성!

제82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 영화 부문 수상 결과를 사진으로 확인해 보세요!
이번 시상식에서 각각 3관왕, 4관왕을 차지한 <브루탈리스트>와 <에밀리아 페레즈>는 오는 2월에 국내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과연 곧 이어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어떤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누리게 될까요?
*image: Variety, imdb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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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학대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여러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집에서 가족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들은 그 학대의 흔적을 지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그래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흔적을 꼭꼭 숨기려 해도 조금씩은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사소한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 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 학대의 모습들을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심한 관심은 학대를 막거나 멈출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세심히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건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많은 복지단체, 복지사, 경찰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의 관심으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런 이들은 일반인에 비해 학대받는 아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학대를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집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경우, 아이의 부모에게서 아이를 완전히 떨어뜨려 놓기는 힘들다. 제도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막으려 하지만 그 힘이 닿지 않을 때도 많다. 얼마 전에 있었던 창녕 아동학대 사건이나, 인천 의붓아들 학대 사망사건 등 최근까지도 이런 학대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복지 제도권 안에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멈춰지지는 않았다. 그런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 내 학대를 다루는 영화 <고백>
영화 <고백>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에 대한 영화다.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신입 경찰 지원(하윤경)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불안하게 앉아있는 오순(박하선)을 발견한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지원은 뛰어가다 속도를 멈추고 오순의 옆에 앉게 되어 대화를 나눈다. 그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진다. 영화는 우순과 지원의 불안하고 찜찜한 얼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가정 학대를 받고 있는 보라(감소현)를 등장시켜 그 주변에서 어떤 반응과 일들이 있는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뉴스에서는 누군가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납치범은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국민 일인당 천 원씩 1억 모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같은 날 시작된 주인공들의 만남과 납치범의 인질극은 영화 중간중간 묘하게 겹치며 긴장을 만든다.
영화 속 오순은 사회복지사다. 여느 사회복지사가 그렇듯 어려운 일을 돕는데 특히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와 그의 동료 미연(서영화)이 학대받는 아이를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연이 차분하게 제도 안에서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는 인물이라면,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는 합리적으로 차분히 아이를 돕는 미연에게 동감하게 되지만, 실제로 학대를 받고 맞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면 관객은 점점 오순의 행동에 동감하게 된다. 미연의 도움은 제도권 안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벌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원인을 차단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아이 학대 신고로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보더라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은 앞선 도움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학대받는 아이 보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직접 보라 아빠와 각을 세우기도 하고, 소리치고, 몸싸움도 벌인다. 그렇게 영화는 보라가 아빠에게 학대당하는 모습과 그것이 아이의 일상생활을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를 오순의 눈과 귀를 통해 보여준다. 집에서 보라는 늘 겁에 질려있고,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자신이 선생님의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느낄 때 다른 친구에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많은 학대 아동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학교 생활을 이어나가겠지만, 그것은 의외의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선생님의 말처럼 그런 아이의 모습은 섬뜩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그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회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 세심한 관심
영화 속에 신입 경찰 지원은 주변을 아주 세심히 관찰하는 인물이다. 가정 폭력을 받는 여자를 도우려 한다거나 그런 폭력적인 낌새를 눈치채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 역시 경찰이라는 사회제도적 울타리에서 행동한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경찰에 대한 교육을 할 때 그는 경찰은 주변을 잘 관찰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처럼 경찰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이상한 것이 있는지를 발견해 내야 한다. 보통 가정 폭력 피해자들은 보복 때문에 그것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워한다. 영화는 지원의 그런 세심한 관찰을 보여주며 실제로 가까운 사람의 폭력을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도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보라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주는 오순을 만나며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라는 오순과 보낸 짧은 시간을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미소 짓는 순간은 영화의 분위기도 밝게 만든다. 그동안 공포에 질려 보낸 집,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학교에서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거나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아빠에게 별 이유 없이 맞고 잘못했다고 우는 모습은 계속 지켜보기 괴롭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도 아빠라는 이유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멍이나 여러 가지 학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빠가 때렸는지 증명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경찰의 이야기는 과연 지금의 제도가 가정 학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에 또 다른 이야기로 등장하는 유괴사건은 그 실체를 명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누가 그 모금을 위한 편지를 보냈는지 왜 모금 계좌를 복지재단으로 했는지 등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납치 사건과 오순, 보라 그리고 지원이라는 세 인물에게 벌어지는 일을 대비시킴으로써 가정 폭력의 가해자와 납치범 각각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교하면서 관객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주인공 오순역을 맡은 박하선 배우는 가정 학대를 한 부모에게는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으로, 다른 한 편으로 피해 아동에게는 차분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오순을 잘 표현해낸다. 그 자신도 학대를 받았던 오순이 아직도 그냥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오열하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원 역을 맡은 하윤경 배우도 따뜻한 시선의 좋은 연기로 영화의 사실감을 더한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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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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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편’이 부재하는 전쟁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Civil War)>(2024, 알렉스 갈란드)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증오의 단면
작품은 이 가상의 전쟁을 설명하지 않는다. 내전의 원인, 각 편이 주장하는 이념이나 명분은 알 수 없다. 서부군의 중심 세력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화자인 기자들의 대화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자로서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대신 수도를 성역처럼 봉쇄하기를 택하고, 역시 미국 국민일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선전을 지속한다. 기자들이 그를 비판하는 것은 그 때문이지, 서부군을 응원해서가 아니다. 궁금해진다, 서부군은 어떤 이들이며 어째서 분리 정부를 내세웠는가, 아무 군대에도 속하지 않는 미국인들은 어디를 지지하는가,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인가 공화당 출신인가?) 그러나 작품은 알려주지 않는다.
오프닝, 카메라는 연설을 연습하며 단어를 반복해 뱉는 대통령을 클로즈업한다. 자신만만한 연설문은 언어일 따름이다. 너무 가까이 맺힌 상은 오히려 흐리고 거의 비현실적이다. 그 사이에는 사실적인 전쟁의 이미지가 있다. 거리를 두어야 보이는 것들과 다가가 거기 머물러야 보이는 것들- 영화는 기자들에게 밀착해서, 때로는 그들의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담아낸다. 모든 폭발과 총질이 극적으로 시원하거나 짜릿하지 않고 끔찍하게만 다가오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기자들의 시선을 따르는 촬영과 연출 때문이다. 더불어, 이들도 관객도 어쩌면 그들 자신도, 군인들의 편과 정체를 구별해 낼 수 없어서 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이 제 목소리라고 믿는 무언가를 삭제하고, 사실상 그들의 목소리가 된 총성과 폭발음, 비명과 신음을 조명한다.
이 전쟁의 한 실마리는 “트와일라잇 존” 근처 유원지에 있다. 리 일행은 한 군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조심스럽게 통과하려는 찰나 총알이 날아든다. 건물 근처로 숨자, 잠복해 있는 두 군인이 보인다. 조엘은 되풀이해 묻는다, 당신들은 어느 편이며 저 건물에는 누가 있는가. 그들의 답도 되풀이된다, ‘저쪽이 쏘므로 이쪽도 쏠 뿐이며’, ‘저 건물엔 총 쏘는 인간이 있다’. 물론 전쟁의 ‘양 쪽’을 거울의 양면처럼 다뤄선 안 되는 경우가 많다.(안타깝게도 우리는 현재진행형의 예시인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학살을 떠올리게 된다.) 분노도 다 같지 않다. 현재 미국의 법과 사회를 장악해가고 있는 조직화된 혐오(한국은 어떤가)에서 비롯된 분노와, 그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에 종종 실리는 분노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가 가상의 ‘내전’을 통해 들여다보려는 바는 아마도, 그 억압과 피억압의 권력관계를 따져 보는 행위가 무의미해진 전쟁이 끊임없이 생산하는 분노인 듯하다. 특히 반정부군이 최첨단 장비와 조직화된 군대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미국이라는 국가 내의, 총기(효율적인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도구)를 쥔 증오 말이다.
이에 이어, 또 하나의 실마리는 서부군 주둔지 근처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조우에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의 연속으로 영리하게 관객의 불안과 안도를 유도하던 영화는, 관찰자 입장에 있던 기자들이 자신을 정확히 겨냥하는 총구를 맞닥뜨리도록 한다. 거기 조건적 혐오에 기반한 무조건적 폭력의 예시,라고 할만한 무언가가 있다. 제시와 보하이가 시체를 매장하고 있는 군인의 포로가 된 상황, 리와 조엘은 둘 중 조엘이 말문을 열기로 합의한다. ‘남자 대 남자’ 토킹을 시도하자는 일종의 위기 대처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초적인 군인의 눈엔 더 ‘중요’한 것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핏빛 색안경을 낀 금발의 백인 군인은 공격적으로 기자들의 출신지를 물으며 누가 “진짜 미국인”인가를 가려내려 한다. 착취자가 ‘발견’한 땅에 건국된 이민자들의 나라에서 그가 말하는 “진짜 미국인”이란, 착취자와 가장 닮아 있거나 닮고자 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정답이 없어야 할 질문에 정답이 생겼다. 그 정답은 답의 내용이 아닌 답을 강요당하는 자들의 생김새와 말투에 있다. 질문자가 보고 있는 것은 세 명의 기자가 아니다. ‘라틴계 남자’, ‘금발의 백인 여자’, ‘유달리 두려워하는 아시아인 남자’다. 토니가 거짓말은커녕 입도 제대로 떼지 못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었던 건, 홍콩 출신이어서 라기보단 아시안의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다. 그는 방금 보하이가 악센트가 두드러지는 영어를 구사하는 아시안이‘라서’ 살해당했음을 알고 있다. 그건 ‘피부에’ 곧바로 침투하는 공포이리라 감히 짐작한다. 조엘이 특히 패닉했던 것, 상황이 지나가고 만난 동료 기자들이 ‘새미와 다른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자 조엘이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다’고 반응했던 것도, 그 색안경 너머 시선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의 카메라와 거리
‘유원지의 저격수’ 시퀀스로 돌아가 본다. 리는 총알을 피해 몸을 낮추고 차 사이에 숨었다. 주위가 흐려지고, 꽃밭이 보인다. 그때 리의 긴장이 풀리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어쩌면 그는 ‘트와일라잇 존’의 주민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옥상 위의 저격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며 잔디밭에 물을 주고, 멋진 옷을 사고, 깨끗한 동네를 산책한다. 제시가 건넨 원피스처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상. 리에겐 그런 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제시의 가족, 리의 가족, 옷가게의 점원처럼- ‘내 코앞으로 시야를 좁히고 그 바깥을 외면하는 삶’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다. 허나 참혹한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건 때로 특권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그런 날을 보낼 수는 있어도, 리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자주 카메라를 주변의 위험을 파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그의 시야는 현장에서도 일관되게 넓다. 전쟁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그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전쟁의 장면들을 곱씹으며 괴로워하고 스스로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는 리는, 자신이 몸담은 장면도 멀리서 관찰할 수 있는 자로 보인다.
서부군이 백악관을 폭격하는 아수라장에서, 자주 패닉해 울던 제시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쉼 없이 사진을 찍는다. 반면 리는 패닉한다. 조엘과 제시가 세 기자의 죽음을 “프로세싱”하는 동안 리는 카시트에 범벅이 된 피를 닦아내기만 했는데, 뒤늦은 프로세싱이 시작된 것일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수없이 겪었을 폭발과 총성도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 것 같았다. 승리를 앞두고 긴박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서부군의 효율적인 움직임, 군복을 입은 동료 방송 기자들의 기묘한 미소,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제시의 번득이는 눈동자… 따위 모두가 리를 몰아가는 듯 보였다. 리는 그 순간, 그 장면에 ‘포함’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을까.
이내 평정을 되찾은 리를 선두로, 기자들은 리무진을 공격하는 서부군을 등지고 백악관으로 향한다. 이제까지의 취재가 주로 기자들이 군인들의 뒤를 따르는 식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반대로, 군인들이 기자들의 뒤를 밟는다. 그러나 백악관 내부로 들어가자 다시 위치가 뒤바뀐다. 한 군인은 기자들에게 ‘우리 진로를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협박한다. 냉정한 명령이 아닌 흥분에 사로잡혀 토해낸 고함으로 들린다.
리가 사진을 찍다 얻어맞은 제시를 돕기 위해 카메라를 내리고 다가가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이별 또한 리가 제시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총을 맞으며 이루어진다. “내가 죽는 장면도 찍을 건가요?”라는 물음에 리는 “어떨 거 같아?”라고 되물었다. 그 복선은 제시가 리의 죽음을 촬영함으로써 비틀려 완성된다. 영화는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멈추지 못하는 제시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 무엇을 위해 찍는가,를 묻게 한다. 폭력의 잔상들을 집착적으로 좇는 몰입한 표정이, 달리는 차의 창문을 넘어가며 신나 활짝 웃던 얼굴과 닮아 보였다면 착각일까, 그가 군인들의 흥분을 공유하고 있는 듯 보였다면. 전쟁을 담다가 그 일부가 돼 버렸다면, 포착한 이미지로 무엇을 전할 것인가는 이제 상관이 없고, 그 이미지들 자체가 목적이 돼 버렸다면, 그래도 괜찮은가. 리가 고민하던 바도 이와 닿아 있는 것일까. 영화는 전쟁을 바라보는 매체로 기자의 카메라를 활용하면서도, 그 형태와 거리의 윤리 역시 탐구하려는 듯했다.
백악관을 나갈 용기도 없어 가장 안쪽의 방에 숨어 있다 경호실장을 내보내 투항 협상을 하려던 대통령, ‘적’의 죽음들을 축하하는 그를 클로즈업하며 시작되었던 영화는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조엘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냐고 묻고, 대통령은 “살려주세요, 저들에게 날 살려달라고 말해요.”라고 애원한다. 제시는 그가 총알에 살해당하는 모습을 찍는다. ‘우리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군인들이 시체 곁에서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스틸컷- 이 가상의 르포, 위험한 로드무비, 폭력적인 ‘성장’ 영화는, 고요하고 섬뜩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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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이 예정된 두 모성의 사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이 태어나기 172년 전, 칠왕국의 왕 '비세리스 타르가르옌(패디 콘시딘)'은 아들이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왕비 '아엠마 아린(시안 브루크)'는 출산 중에 사망하고, 갓 태어난 아들도 곧이어 세상을 뜬다. 이에 비세리스는 야망 가득한 다혈질 동생 '다에몬(맷 스미스)'의 반발을 무시한 채 유일한 딸 '라에니라(에마 다시)'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가문의 비밀인 '약속된 왕자'에 관한 '얼음과 불의 노래'를 들려준다. 몇 년 뒤, 비세리스는 라에니라의 소꿉친구이자 절친이었던 '알리센트 하이타워(올리비아 쿡)'와 재혼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왕의 장남 '아에곤 2세(톰 글린-카니)'가 태어난다. 이에 칠왕국은 왕의 공인을 받은 후계자이자 장녀인 라에니라를 지지하는 '흑색파'와 왕의 적자이자 장남인 아에곤 2세를 지지하는 '녹색파'로 분열된다. 이렇게 왕국과 대륙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쟁 '용들의 춤'이 발발한다.
HBO 오리지널 드라마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성황리에 첫 시즌을 마쳤다. 8월 21일에 공개된 첫 화는 당일 북미 시청률만 천만 명에 육박했고, 마지막 회는 9천만 명이 시청했다. 전작인 <왕좌의 게임>의 각 시즌 피날레 시청률을 압도하는 엄청난 흥행이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실망을 안긴 <왕좌의 게임> 때문에 기대감이 낮았기에 더욱 놀라운 결과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판타지 드라마 <반지의 제왕: 힘이 반지>를 압도한 건 덤이다. 그 원동력은 흥미롭게도 꽤나 고전적이다. 예정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두 주인공의 비극, 특히 두 여성의 운명적인 비극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왕과 왕자가 아닌 공주와 왕비의 이야기, <하우스 오브 드래곤>
<하우스 오브 드래곤>에는 <왕좌의 게임> 못지않게 수많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인공 감으로 손색없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주인공을 꼽으라면 당연히 라에니라 타르가르옌과 알리센트 하이타워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세계의 질서와 관습에 도전하는 여성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파멸하는 여성의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왕좌의 게임> 버전 <선덕여왕>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라에니라와 알리센트는 주위에 가득한 수많은 남성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적인 리더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의 리더십은 그 남자들이 칠왕국을 분열과 붕괴로 이끌 획책을 꾸미고 있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우선 라에니라의 옆에는 다에몬이 있다. 선왕인 비세리스 1세의 동생이고, 라에니라의 숙부이자 남편인 다에몬 타르가르옌은 용의 불같은 성질로 악명이 높다. 형의 서거 직후 공인된 후계자인 라에니라의 왕위를 녹색파가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즉각적인 선전포고와 수도를 향한 포위 공격을 주장한다.
한편 알리센트의 옆에는 아버지이자 왕의 수관인 '오토 하이타워(리스 이판)'가 있다. 그는 왕비인 알리센트 몰래 그녀의 장남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아에곤을 왕위에 올릴 공작을 꾸민다. 또 후계 구도에 필연적인 위협이 될 라에니라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여성의 리더십을 부각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 여성은 각자의 진영에서 가장 이성적인 리더로서 상황을 통제한다.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정세를 읽고, 마지막까지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라에니라는 왕이 후계자에게만 직접 알려주는 왕가의 비밀을 무기 삼아 다에몬의 폭주를 제지한다. 왕의 동생이자 후계자의 부군인 다에몬은 라에니라 못지않게 철왕좌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라에니라는 다가올 겨울과 약속된 왕자에 대한 '얼음과 불의 노래'의 존재를 다에몬이 모른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주도권을 빼앗아 온다. 아무리 혈연적으로 왕좌에 가깝다 하더라도, 왕의 자격이 그에게 없음을 일깨운다.
항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던 알리센트도 녹색파와 흑색파의 전면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행방이 묘연했던 아에곤을 오토보다 먼저 찾아내 그의 음모를 좌절시킨다. 타르가르옌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알레니스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타협안을 제시한다. 라에니라가 목숨을 건 정적이 되어 버린 순간에도 어릴 적 둘도 없는 친구였던 추억을 상기시키며 마지막까지 전쟁을 피해보려고 애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 권력 투쟁일 수 있었던 두 절친의 대립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여성 리더십이 실패한 이유, 모성애
아이러니하게도 분쟁을 막아보려는 필사적인 여성적 리더십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의 서막을 알리고 만다. 그들의 통솔력이 그 자체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발판의 근본적인 한계까지는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성애라는 왕비와 공주의 공통분모가 왕국을 절반으로 쪼갤 전쟁을 유발하는 결정적 원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알리센트는 라에니라가 공인된 후계자로서 왕위를 계승한다면 자신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정치적 이유로 죽거나 탄압받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라에니라에게는 이미 아들들이 있으니, 왕위 계승 구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라에니라가 배다른 동생들을 숙청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무조건 왕좌를 가져와야 한다.
라에니라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이미 자신의 아들들이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느끼던 그녀는 아에곤이 왕이 될 경우 곧장 숙청될 수 있다는 위협을 직감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능한 전쟁을 피하려고 애쓴다. 심지어 녹색파가 왕의 소협의회와 수도를 모두 장악하고, 아에곤을 일방적으로 왕위에 올린 후에도. 그녀는 가급적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지지 세력을 규합한 후 계승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하지만 사절로 떠났던 차남 루케리스가 녹색파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다음 시즌에서 본격화될 흑색파와 녹색파의 전면전을 예고하고 만다. 다혈질인 다에몬의 충동까지 이성적으로 자제시키는 데 성공했던 그녀였지만, 결국 그녀의 이성도 모성애를 통제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중요한 건 모성애가 결국 혈육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성애는 끝내 라에니라와 알리센트의 발목을 잡는 고질적인 문제다. 모성애는 결국 피로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들이 패망하는 근본적인 원인 바로 혈연이기 때문이다.
피에만 의존하는 이들의 사투
라에니라 개인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왕가의 일원이자 정치인으로서 라에니라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힘은 온전히 피에서 비롯된다. 장녀이자 공인된 후계자라는 명분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왕의 자격은 없다. 칠왕국에서 가장 힘이 강한 가문 중 하나인 발레리온 가문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도 타르가르옌과 발레리온 가문 간의 혈연관계에 기댄 바가 크다. 그녀가 다에몬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인 '얼음과 불의 노래'도 존재 자체로 핏줄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왕에 걸맞은 통치력, 지도력, 정치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른 대가문을 포섭할 때도 그녀는 혈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위로 만들어낸 과거의 맹세를 상기시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려 한다. 혼인을 통한 동맹이라는 녹색파의 열매에 비하면 결코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없다.
알리센트도 핏줄에 얽매어 상황에 끌려다닌다. 초반부에는 아버지 오토의 졸에 불과해 보인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에 충실한 딸이 되기 위해 아내와 사별한 비세리스 1세에게 접근한다. 한 번도 원한 적은 없지만 왕을 유혹해 왕비가 되고, 끝내 새로운 후계자가 될 왕자들을 낳는다. 알리센트는 왕가의 외척이 되어 자신의 피를 받은 왕을 만들고자 하는 오토의 도구에 불과하다. 또 비세리스 1세가 죽은 뒤 오토의 공작을 저지한 후에도 다르지 않다. 라에니스가 지적했듯이, 그녀는 핏줄 때문에 다시 주도자가 될 기회를 놓친다. 경쟁자를 제거하고 장남인 아에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결국 알리센트는 훌륭한 딸이자 엄마였을지는 몰라도 자신을 둘러싼 외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라에니라와 알리센트는 '왕좌의 게임'에서 처절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게임의 규칙은 두 개다. 왕좌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또 왕에게서 후계자로 넘어가야 한다. 라에니라는 후자에는 해당되더라도 전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신의 능력이나 힘 대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피의 권위에 의존해 왕좌를 요구한다. 알리센트도 마찬가지다. 아에곤은 전자에는 해당되나 후자의 조건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의 이유만을 앞세워 또 다른 정당성을 확보한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완전히 다른 판에서 새로운 규칙을 내세워야 할 이들이 누구보다도 혈통이라는 기존 규칙을 따르기에 급급하다. 결국 이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는 이상 두 여자는 원작대로 대부분의 아이를 잃고 죽거나 죽을 때까지 유폐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자신들을 파괴할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하다.
왕실의 비극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인상적이다. <왕좌의 게임>의 후반부 시즌에서 '하드홈 전투', '서자들의 전투', 바엘로르 대성소 폭파 장면 등을 연출한 바 있는 미겔 서포크닉 수석 감독의 역량이 온전히 발휘된 듯 보인다. 우선 설명이 아닌 묘사에 초점을 맞춘 연출이 두드러진다. <왕좌의 게임>과는 다른 시대적 환경과 인물 및 가문들의 관계를 내레이션 등을 활용해 읊지 않는다. 라에니라, 다에몬, 비세리스 1세에 집중하여 그들의 상호작용 안에서 타르가르옌 가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 기회가 나면 새 가지를 내어 하이타워 가문과 벨라리온 가문 등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도 하나하나 덧붙여 간다.
이로 인해 사실 자칫 호흡이 느려지거나 템포가 끊길 수도 있었다. 다만 애초에 왕실의 비극을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시대극다운 웅장함과 결연함, 비극으로 향하는 인물들의 우수를 세밀하게 담는 게 실보다 득이 클 것이라 판단한 듯 보인다. 또 단점을 상쇄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성과를 거두면서 우려는 기우에 그친다. 드래곤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타르가르옌 왕조의 전성기답게 수많은 드래곤이 개성적인 외양을 뽐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액션 시퀀스나 협상 장면 등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순간적으로 극의 흐름을 휘어잡기도 한다. 징검돌 군도 전쟁과 같은 이벤트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면서 정치극에 부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이미 제작이 확정됐다. 다음 시즌의 과제는 적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다음 시즌에서는 스타크 가문의 크레간 스타크를 비롯한 더 많은 캐릭터, 더 많은 전투 시퀀스와 액션씬이 등장해야 한다.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한층 더 복잡해지고 깊어질 예정이다. 하지만 시즌 1의 완성도를 보았을 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왕좌의 게임>의 전철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있다. 시대적 흐름을 담으려는 야심과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우수가 뒤섞인 웅장하고 결연한 사극 판타지를 거부할 팬들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적 변화를 담으려는 야심과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우수의 만남. 이보다 완벽한 출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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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닿는 거리, 언어로 넘는 경계
#스포일러 보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축인 '언어'
영화 컨텍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언어는 인간 문명을 나누고 결정하는데 가장 큰 축이 된다. 특정 대상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문화권을 파악할 수도 있으며 해당 문화권의 역사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언어는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키가 된다. 주인공 루이즈는 군사적으로 외계생명체를 해결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적(평화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즈는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해석을 넘어 그들의 사고방식과 시간 개념까지 체득하게 된다. 이는 언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사유의 구조이자 존재 방식임을 보여주는 요소이다. 루이즈가 언어를 통해 미지의 존재와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처럼, 언어는 결국 서로의 내면에 닿기 위한 가장 인간적인 수단이다. 이처럼 언어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체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과 낯선 존재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다리가 된다. 얼마 전 책 1984를 읽으면서 개인의 속마음은 당사자에게도 신비한 영역이며, 감정은 고귀한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비가시적이기에 신비한 감정을 가시적으로 하는 것이 언어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즈의 언어적 접근은 외계 생명체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내 인생의 미래를 미리 목격했다면,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할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이즈는 외계인들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음에도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 남편과의 만남-이혼, 딸의 탄생-죽음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그 장면의 도래를 회피하지 않는다. 이때, 이 태도는 수동적·수용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미래를 알게 되지만, 그 미래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 루이스 자신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 후 상실을 가늠하면서도 상실 전 사랑을 만끽하고자 루이스는 택했다.
영화 컨택트는 이처럼 인간 실존에 관하여 깊은 고찰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언어를 통해 시간의 비선형적 개념을 체감한다는 설정이 루이즈가 자신의 미래를 본다는 장면 하나로 귀결되는 점은 다소 서사적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언어가 사고와 감정, 나아가 존재방식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철학적 통찰을 시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과학적 상상력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 맺기와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이 영화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결국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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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단을 지연하여 도달하는 곳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는 서사를 부분적으로 감추거나, 결정적인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서 사건 자체보다 사건이 인물에게 실어나르는 감정에 주목한다. 일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청년이 소년에게 숨겨져 있던 성 정체성을 끌어올리는 동안, 소년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방해할 생각은커녕 그들의 사이를 관조하거나 응원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청년에게 시선을 할애하지 않아, 관객에게 성 정체성에 의해 고민하고 지연되는 갈등보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이는 궤도를 동행하게 만든다. 성 정체성을 다루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에 더 깊게 몰두하는 것을 두고, 미국 평론가 조너선 롬니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빛나고 완벽해서, 이건 인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장영엽, 「씨네21」 2018-03-21 재인용)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런 비판에도 구아다니노는 자신의 영화적 관심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왓챠를 통해 독점 공개된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2020)에서는 한술 더 떠 ‘다름’을 평범하게 제시하며 ‘구분’ 자체를 흐리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소년 프레이져(잭 딜런 그레이저)가 군인인 두 엄마를 따라 이탈리아에 있는 미군 주둔지로 오면서 시작한다. 프레이져는 손톱에 색을 칠하고, 미성년자임에도 맥주를 손에 쥐고, 지휘관의 아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주둔지를 활보한다. 그런데 두 엄마는 프레이저의 기행을 오히려 비범하다고 여기고, 특히 친모인 사라(클로에 세비니)는 미육군 대령이자 부대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아들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프레이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성장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 듯 보이는데, 일례로 생리를 시작한 다른 주인공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시먼)이 탐폰의 사용법을 몰라 혼자 애를 먹는 반면에, 프레이져는 엄마 매기(앨리스 브라가)를 통해 면도하는 법을 배운다. 케이틀린과 그의 가정도 평범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인 아빠, 나이지리아인 엄마, 친부가 따로 있는 이복오빠와 함께 사는 케이틀린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이다. 그는 아빠 포이트리스(스콧 메스쿠디)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에 서운해하고, ‘하퍼’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 주둔지 밖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가 ‘원래 다들 이렇지 않아?’라고 시치미를 떼듯 어딘가 어색한 인물들을 대수롭지 않게 담아낸다는 것이다. 구아다니노는 전작들에서 그랬듯, <위 아 후 위 아>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두 가정의 사연을 서사의 진행에 필요한 부분만 꺼내 보여준다. 레즈비언인 매기와 사라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 프레이져의 친부에 대한 정보, 그가 왜 임신한 사라와 헤어졌는지도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케이틀린의 오빠인 대니(스펜스 무어)의 친부 또한 드라마 내부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남편과 이별한 후에 제니(페이스 알라비)가 어떻게 미군 포이트리스의 만나게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드라마는 서사 바깥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극 안으로 가져오지 않아, 인물들의 특별한 사연이 극적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드라마가 ‘다름’과 ‘구분’에 관해 말을 아끼는 동안,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도 두 아이가 서로를 지탱하며 큰 문제 없이 유려하게 흐른다. 그러다 6화에서 포이트리스가 두 아이를 떼어놓기 위해 직접 학교 앞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의미를 알기 힘든 인서트씬이 막간처럼 틈입한다. 프레이져와 케이틀린은 열정적으로 춤추고 노래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심지어 두 아이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흥겨운 음악과 유쾌한 운동감이 있지만 서사와는 큰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이 씬은 레오 까락스의 영화 <홀리모터스>(2012)에서 드니 라방이 성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과 닮아있다. 영화비평가 허문영은 <홀리모터스>의 이 장면을 두고 “이 장면에 넋을 잃게 되는 이유는 연주와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위치에 있다. 비루하고 잔혹하며 고단한 가면 놀이의 틈에서 우리를 향해 이처럼 벼락같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음악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허문영, 「진실은 막간에 있다」)라고 평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이 가진 장력은 배치에 있다는 것이다. <위 아 후 위 아>의 유사한 장면도 구분이 개입하는 순간을 정확히 짚어내어 위치한다. 이 장면은 프레이져 때문에 케이틀린이 어긋나고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포이트리스가 물리적으로 두 아이를 가로막는 순간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다름과 올바름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인물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는 작위적인 장면의 의도적 배치를 통해 다름에 관한 판단을 영리한 방법으로 지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드라마 중간중간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트럼프와 관계있어 보인다. 드라마는 트럼프의 당선 소식(6화 결말)을 기점으로 앞선 회차들을 전복시키며 지연했던 판단을 하나둘 건져낸다. 크레이그(코리 나이트)의 죽음 이후 학생들은 토론을 벌이며 상대의 의견을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프레이져의 솔직함은 눈치 없음으로 바뀐다. 또한, 흠모하던 조나단(톰 메르시에)의 집을 방문한 프레이져는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조나단의 여자친구와 조나단 사이에 서게 되는데, 갑자기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두 엄마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와 조화 확인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들과는 다른 성적 지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 프레이져는 집으로 돌아가 두 엄마에게 이제껏 찾은 적 없던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4화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성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아무런 제약이 없던 러시아인의 저택에도 일탈이 주는 해방감과 역동성이 거둬진다. 술과 마약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들고, 대니와 아이들은 물건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일탈이 비행으로 바뀌면서 아이들만의 공간으로 어른인 매기와 사라가 찾아오게 된다.
특히 크레이그의 죽음에 대한 사라의 태도가 눈에 띈다. 사라는 모니터에 비친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여기 군인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며 나체를 드러내고, 추모식에선 ‘평화를 위한 대가’라며 그들의 죽음을 군인으로서 숭고한 희생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을 미국을 위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며, 드라마 내내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던 포이트리스가 미군들이 이탈리아 피자 가게 파손시킨 사건을 “미국을 모욕했겠죠”라며 미국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이 장면에서도 트럼프 관련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즉 7화에선 이전 회차까지 선명한 구분이 없던 성 역할, 어른/아이, 군인/민간인, 미국/타국이 하나로 모이거나 둘로 나뉘며 그 경계가 선명해지는데, 이 갈등 양상은 트럼프 시대가 가져온 분리 정책과 미국 사회의 분열과 겹쳐진다. 드라마가 6회까지 미뤄뒀던 갈등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 7화에 일순 화면 위로 길어 올린다고 본다면, 드라마가 판단을 지연한 목적은 트럼프 시대의 사회 분열을 겨냥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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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뿌리는 여성을 휘감아 자라나고,
인도보리수는 독특한 일생을 보낸다.
새똥에 들어 있는 씨앗이 다른 나무에 떨어지고, 공중에 뿌리가 솟아나와 바닥까지 자라난다.
숙주였던 나무는 가지로 휘감아 죽이고 이 신성한 나무는 홀로 선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 오프닝 中
<신성한 나무의 씨앗> 메인 포스터는 굉장히 특이하다. 영화 타이틀이 인물을 강조하는 프레임을 넘어 다른 텍스트의 자리까지 침범하고 있다. 히잡을 쓴 여성의 눈을 가린 안대는 배경과 동일한 색깔을 띠며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화되어 있다. 경직되어 있는 듯한 여성은 채도가 높은 배경과 대조되는 회색빛 무채색으로 온통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을 둘러싼 것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신성한 나무, 인도보리수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총알의 모습으로 영화 오프닝이 시작된다. 손에서 책상으로 흩뿌려지는 총알들은 마치 씨앗의 모습과도 같다. 무력을 상징하는 총알은 대상 모를 개개인의 믿음을 낳는다. 그 직후 어두운 복도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이만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영화의 극이 어떻게 진행될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승진을 약속 받은 이만은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의 총을 하사받고, 이는 더 높은 지위와 커다란 권력은 무력을 동반하기 마련임을 드러낸다. 공과 사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평화가 지켜져야 할 가정 내에 총이 들어옴으로써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가족 사이에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며 관객의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인도보리수는 인간에게 발견되어 학명을 지니게 된 나무, 그런 단순한 생물의 개념을 넘어 ‘신’이 깨달음을 얻은 나무이자 인도 문화와 종교 내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하나의 표상으로 인식된다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는 자신으로부터 자라난 가지에게 죽임 당하고 삼켜지면서 '인도보리수'의 존재가 완성된다. 그 결과물은 보기만 해도 탐스러운 열매이다. 누구에게나 찬양 받는 신성함, 올곧음, 강직함을 맛본다.
그들의 종교란 그렇다. 여성을 짓밟고 무참히 자라난, 무결하고 고결한 신성을 만끽한다. 신은 말했다. 늘 약자를 보듬어야 하고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타이른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이해관계에 얽혀 본인이 스스로 만든 신념에 갇혀 살아간다. 누군가는 본인을 희생해가며 상대방을 위하지만 누군가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며 욕망을 채우고 만다. 그러나, 적어도 여성들은 각자의 뚜렷한 입장 속에서 옳고 그름을 아우르는 상식선을 지키며 돕고 도움을 받는다. 가족의 기둥인 엄마이자 현실에 안주하며 다른 이를 쉽게 비난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고 비합리적인 현실에 눈을 뜨는 복합적인 캐릭터, '나즈메'를 신과 같은 모습으로 연출하는 장면이 극중 딱 두 번 나온다. 두 장면은 첫 번째로 발발된 갈등 상황에서 비슷한 타이밍에 나오는데, 아주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나즈메는 딸 '레즈반'의 친구 '사다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국가의 통치에 반발하는 폭동 세력으로 인식하고 딸에게 가까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는 그저 나즈메 스스로 만든 불안감에서 비롯된 상황에 갇혀 자신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딸 레즈반까지 컨트롤하는 것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러나 교정을 걷고 있던 사다프가 우연히 시위대에 휩쓸리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고 급하게 레즈반의 집에 온다. 나즈메는 사다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별 말 없이 그의 눈에 박힌 산탄총 탄환을 아주 조심스럽게 뺀다. 이 장면은 매우 성스럽게 연출되었고, 거의 직후에 동일한 사운드와 연출이 나즈메가 이만의 면도를 해주는 장면에도 나온다. 하지만 나즈메는 피에 물든 탄환을 물에 흘려 보내고 신경질적으로 손을 닦는다. 남성의 폭력에 의해 여성에게 박힌 탄환들은 외면하고, 오로지 본인이 창조한 스트레스만 받으며 맘편히 자라난 남성은 여성 손에 의해 조심히 다뤄지고 깔끔하게 마감되고 있기에 국가적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반부에 둘째 딸 '사나'가 아빠 '이만'을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스피커로 가장 좋았던 시절의 가족들 목소리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이만은 분노에 휩싸여 스스로 그 스피커들을 망가뜨린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잔상까지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린 것이다. 어리석은 감정에 휩싸여 그가 직접 궁지로 몰아 넣었던 아내와 딸들이 살아 돌아오고, 자신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아꼈던 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흙에서 나온 손, 그리고 옆에 남겨진 총. 폭력을 양분삼아 여성을 희생하며 자라났던 나무의 최후였다.
*여성, 삶, 자유!
영화에서 보통 가로 화면과 세로 화면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기 마련인데,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서는 가로로 진행되는 스토리의 주춧돌로서 세로 화면이 활용된다. 이례적으로 두 가지의 구도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더 나아가, 세로 화면으로 드러나는 상황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편집 덕분에 관객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세로 화면은 다큐멘터리에서 주로 활용되는 자료화면 그 자체이기에, 사실전달이 주 역할임은 변하지 않으나 극에서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은 위치를 유지하는 독특한 연출 방식이 돋보인다. '사나'는 그러한 세로 화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극중 스토리에 녹여내는 주요 인물이다.
(왼쪽부터) 나즈메, 레즈반, 사나
중후반부의 극을 극도의 긴장 상태에 몰아넣은 '총'의 행방. 나는 오히려 사나가 총을 가지고 있어서 속이 시원했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듯 사나는 엄마아빠가 바라보는 어린아이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인스타그램 릴스를 확인하고, 언니인 레즈반에게 DM을 보내고,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듣는 등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모습이 강조되며 어린이 취급을 받지만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었다. 아빠는 옳지 않고 모든 걸 맘대로 하고 엄마는 항상 져준다. 설령 사나에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물리적인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간접적인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영향을 끝도 없이 받고 성장해왔으리라 예상된다. 가족간에 존재했던 그 모든 문제의 무게감을 오롯이 받아내다가, 히잡 시위를 이끌어낸 여성들처럼 타파하려고 일어선 것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외압을 두려워 하지 않고 행동한 사람들을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만. 개인정보가 만천하에 드러나서 두려워하는 그의 옆에 우연히 정차한 운전자는 히잡을 안 쓴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현대 여성의 모습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임팩트 있는 균열을 만드는 역할로서 활용된다. 이만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 창문을 열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한다. 악은 선을 마주하면 두려워하고 움츠러든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거 같다. 가장 차분하지만 극적인 연출, 그야말로 영화다운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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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극영화의 도구를 잘 빌려온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가정 스릴러의 소재를 빌려 굉장히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잘못에 저항하면 처벌 받는다는 영화 이후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한 배우들과 대부분이 실내인 제한된 장소에서 촬영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정신력과 사명감에 존경을 표한다. 극에서는 주요 사건의 스토리텔링에 집중하기 위해 히잡 시위에 대한 결과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실제 히잡 시위는 여성들에게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다만, 히잡에 대한 선택권과 자유도가 확연히 늘어났으나 아직까지도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여성 복장규정과 처벌은 굳건하다고 한다. 감독과 배우의 용기라는 씨앗으로 말미암아, 이란에 자유의 나무가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낸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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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라이 미 투 더 문> 메인 예고편
달 착륙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광고 마케터와 발사 책임자의 우주적 만남🔥 달 착륙 프로젝트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플라이 미 투 더 문] 7월 12일 극장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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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레치드: 악령의 저주> 메인 예고편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소년 ‘벤’.
방학을 맞아 아버지 ‘리암’이 있는 한적한 바닷마을에 찾아간 그는
매일 밤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옆집을 주시한다.
어느 날 옆집 꼬마 ‘딜런’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고
주변 사람들이 홀린 듯 기억을 잃은 사이, 아이들은 하나 둘씩 실종된다.
끊임없이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 마을.
그리고 사건의 행방을 쫓는 ‘벤’의 눈 앞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끔찍한 존재.
정체 모를 존재의 죽음의 손길을 느낀 ‘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협당하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