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09 12:17:36
1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이창동 감독, 2025년 신작 촬영 예정
2018년 <버닝> 개봉 이후, 차기작 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이창동 감독이 최근 ‘The New Yorker’와의 인터뷰에서 신작 촬영 계획을 밝혔습니다.
새로운 장편 영화 작업에 대해 묻는 질문에 현재 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 중이며, 2025년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외에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블랙 팬서 3>, 새로운 블랙 팬서 등장하나
‘The InSneider’에 의하면, 마블 스튜디오가 기존 시리즈에서 채드윅 보스만이 연기한 ‘티찰라’ 캐릭터를 새롭게 캐스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가을, 타 배우에게 티찰라 역을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마블은 여전히 적합한 배우를 찾고 있는 상황입니다.
해당 결정은 13억 달러를 벌어들였던 1편보다 낮은 성적인 8억 5,900만 달러를 기록한 속편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블랙 팬서 3> 역시 기존 시리즈를 연출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맡을 예정이며, 덴젤 워싱턴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진 바 있습니다.
톰 포드, <Cry to Heaven> 연출 예정
상징적인 패션 디자이너이자 <싱글맨>, <녹터널 애니멀스>를 연출해 영화감독으로도 성공을 거둔 톰 포드가 GQ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디자이너 경력을 마무리하고 영화 제작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차기작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앤 라이스의 소설 ‘Cry to Heaven’을 원작으로 현재 캐스팅 작업이 진행 중이며, 2025년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해당 작품은 18세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오페라 세계에서 성공을 꿈꾸는 베네치아 귀족과 칼라브리아 출신의 가수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피아노> 제인 캠피온 감독,
아카데미 시상식 위해 마우라 델페로의 <Vermiglio> 공개적 응원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을 받은 감독 제인 캠피온이 이탈리아의 국제 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인 마우라 델페로 감독의 <베르밀리오 Vermiglio>를 위해 지원 사격을 나섰습니다.
지난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해당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말 알프스의 한 마을에서 사는 세 자매가 한 병사의 등장으로 인해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입니다.
제인 캠피온은 관객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나는 그녀의 팬이다!”라며 극찬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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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만 없었어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9년, 전북 삼례 우리 슈퍼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책임 형사 '최우성(유준상)'의 지휘 하에서 무고한 소년 세 명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강압수사 덕분에 사건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그렇게 우성은 특진하고,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다음 해 '황준철'(설경구)이 부임하기 전까지는.
진범에 대한 제보를 받은 진철은 기존 수사 기록을 검토한 후 '미친개'라는 별명에 걸맞게 재수사를 결정한다. 용의자 세 명의 자백과 지인들의 진술이 모순됐기 때문. 그러나 우성과 담당 검사 '오재형'(조진웅)의 방해 때문에 재수사는 취소되고, 진철은 좌천되어 섬을 떠돈다. 그리고 16년이 지나 목격자였던 윤미숙'(진경)과 소년들이 진철을 찾아온다. 재심을 도와달라고.
여운과 잔상이 <소년들>에는 없다
한국 영화를 보다 보면 비슷한 인상이 남는다.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이다. 주인공은 클라이맥스에 모든 감정을 문자 그대로 '토해낸다.' 관객이 그 장면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지친 끝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려고 사력을 다한다. 혹자는 이를 한국인의 정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럴 수 있다. 나라마다 고유한 감동 코드가 있으니까. 실제로 근래 한국 영화를 접한 외국 관객이 한국 영화의 '감정 과다'를 인상적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감정 과다 상태의 부작용이다. 감정을 토해내는 데 집중하는 사이 많은 영화가 납작해진다. 이야기, 그 속에 숨은 메시지, 이야기를 감싼 사회적 맥락을 곱씹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 대신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강렬함, '사이다'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가 이 방식을 애용한다. 작가가 뱉고 싶은 사회적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므로.
올해로 데뷔 40주년인 정지영 감독의 신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9년 발생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스크린에 옮긴 <소년들>은 검경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 법정 영화 <부러진 화살>, 금융당국의 문제점을 비판한 <블랙머니>와 비슷한 결이다.
의도는 스크린 위에 성공적으로 구현됐다. 17년이라는 시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했다. 의인의 사투와 악인의 악행도 명확히 전달됐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강박을 버리지 못했다. 목적과 메시지를 낱낱이 설명하기 위해서 사족을 붙인다. 그러다 보니 관객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소화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여운과 잔상이 없는 이야기인 셈이다.
구성과 배우의 힘
물론 노장의 저력은 느껴진다. 특히 세 시간대를 넘나드는 초중반부가 인상적이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신선하거나 흥미로운 소재라고 할 수 없다. 관객에게 많은 정보가 노출됐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스테디셀러였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필두로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같은 범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덕분이다.
정지영 감독은 편집으로써 이 한계를 극복했다. 영화는 세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준다. 황준철 시점에서 2000년 재수사 과정과 2016년 재심 과정이 무게를 잡은 가운데, 1999년 사건 당시 정황이 플래시 백으로 삽입된다. 이러한 구성은 감정폭을 극대화하는 데 용이하다. 재심을 포기하라고 세 소년을 설득하려던 황반장이 그들을 도와주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세 사람. 황반장은 그들의 어릴 적 물놀이 장면을 겹쳐 본다. 재수사 과정에서 품었던 의구심과 분노, 재심 과정에서 되살아난 죄책감과 희망이 응축되며 교차편집의 힘이 정점에 이른다. 페이드 아웃되는 화면 전환이 올드하고 투박하나 힘이 있는 이유다.
배우들도 한 몫한다. <소년들>은 등장인물이 많다. 주요 선역과 악역만 합쳐도 5명가량 되고, 진범이 3명, 누명을 쓴 소년들이 아역과 성인역 합쳐서 6명이다. 그 외 조연이 더해지면 20명 가까운 인물이 과거와 현재에 뒤엉켜 있다. 관객 입장에서 충분히 혼란스러울 상황이다. 하지만 조진웅, 진경, 허성태, 하도권, 서인국 등 설령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할 배우들이 곳곳에 포진한 덕분에 관객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화법과 메시지의 모순
다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서서히 힘을 잃는다. 황준철과 최우성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여러 이유가 있다. 악역만 등장하면 어두워지는 조명, 음영이 도드라지는 연출, 이마에 '나 악역이요'라고 쓰여 있는 배우들의 연기.
더 큰 문제는 악역 활용법이다. <소년들>은 입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경찰의 무책임한 수사, 검찰의 방관, 사회적 신뢰를 핑계 삼아 개인의 무고함을 짓밟는 치밀함. 결국 영화의 칼날은 수사기관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겨냥한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경찰과 검사는 아무도 없다는 자막을 마지막에 달아둔 이유다.
그러나 메시지의 중요도에 비해 경찰의 구조적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악역이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거짓 자백을 유도하려는 고문과 증거 인멸은 몇몇 경찰과 검찰의 일탈에 그친다. 묘사도 일차원적이다. 그들은 두 시간 내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협박하고 전전긍긍한다. 경찰서장이나 다른 이들이 옛 동료를 옹호하는 장면도 지나가듯 등장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마음껏 미워하고 비난하라고 설정한 표적에 불과한 셈이다.
자연히 메시지는 힘이 없다. 그나마 유준상이 경찰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대사를 내뱉기는 한다. 그가 경찰 행정력을 악용해 가족을 괴롭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황준철과 최우성의 개인적인 대립이 먼저 부각되다 보니 한계가 명확하다. 둘의 몸싸움도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변호인>이 되지 못한 <소년들>
법정 시퀀스에서는 모든 문제가 일거에 터져 나온다. <소년들>은 구조적으로 <변호인>과 유사하다. 앞서 피해자의 상황을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억울함을 해소한다. 국가 폭력에 대항해 정의를 지키려는 의인들의 용기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전환점이자 클라이맥스인 법정 시퀀스에서는 2시간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감정이 카타르시스로 승화돼야 한다.
<소년들>은 카타르시스를 터뜨리는 데 실패했다.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뽐내는 <변호인> 속 차동영(곽도원) 같은 캐릭터가 없다 보니 긴장감과 울분이 좀처럼 쌓이지 않는다. 차동영은 진심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믿는 공안 경찰이었다. 그 독특한 캐릭터성 덕분에 "국민이 국가"라는 상식적이고 헌법에 입각한 주장을 하는 송우석 변호사와의 대립이 불꽃 튀었다.
반면에 <소년들>은 일방적이다. 경찰도, 검찰도 신념이나 소신에 입각한 채 변론하지 않는다. 그저 능글맞게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만 보인다. 재판을 대하는 태도, 절실함에 있어서 피해자 측과의 균형이 잡힐 수가 없다. 검사 쪽이 억지를 부리면, 변호인 측에서 철저하게 논박하니 긴장감이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카타르시스를 토해내는 결말은 올드하다. 판에 박힌 전개와 연출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정적인 증인은 소란을 부리다가 법정에서 끌려 나간다. 세 피해자는 무죄를 주장하며 법정에서 울부짖는다. 슬로 모션과 구슬픈 음악이 이 장면을 장식한다. 그렇게 피해자의 절실한 항변마저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늘인 것처럼 느껴진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가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토리텔링을 하는 예술은 정보를 주지 않을 때, 서사적 긴장을 고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
<소년들>은 벤야민의 의견과 정확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사건의 전개와 의의까지 모든 과정을 설명한다. <소년들>이 <그것이 알고 싶다> 특별판처럼 보이는 이유다. 방점을 찍는 때 잠깐 힘을 뺄 줄 알았다면, 너무 잘 알려진 사건인만큼 의외의 순간을 몬들 수 있었다면 더 세련된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Poor 형편없음
여운과 잔상 대신 강박을 택한 또 한 편의 한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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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이것은 사랑 혹은 실패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잊는 것 같다. 가끔, 어쩌면 생각보다 더 자주.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인간사회에 포함되어 틀 안의 규칙을 배우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옳은 말과 행동엔 칭찬과 격려가, 어긋난 것들엔 꾸중과 질타를. 어린아이일 땐 ‘왜?’라는 물음을 일삼으며 그만의 이유를 찾아가지만, 언젠가부터 입 밖으로 물음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계기는 알 수 없으나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젓함, 성숙, 적응의 결과라고 여긴다. 사회에 있는 무수한 '어른'들이 그러하듯.
하지만 암묵 속에 묻힌 물음은 언젠가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규범과 정상성, 그 모든 것을 전복하려는 시도 또한. 혼란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다.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거다. 우리가 수용하는 옳음은 마치 송곳처럼 좁고 뾰족하기만 하다고. 송곳의 원래 의도는 무언가를 뚫거나 구멍을 내기 위함인데 우린 왜 그 도구 위에 발을 디디어 서고자 하느냐고. 그러면 다칠 텐데.
어느 누군가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송곳에 잘 적응해서 문제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송곳은 송곳이라서 살면서 한 번쯤은 삐끗할 일이 생긴다.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느낌,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 깊은 구덩이에 잘못 빠진 느낌. 내쳐지는 경험을 인간 모두가 경험한다는 건 참으로도 다행인 일이다. 상황은 다를지언정 괴로운 때의 감각은 아주 잘 아니까.
사람들에겐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론 똑같은 경험이 존재한다. 다만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고, 인정하려 들지 않고, 서로 다르다고 배척하기에 끝없는 경계를 만든 것이지. 이 영화를 보는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실험영화라고 한들 최소한 극영화의 틀은 갖춘 것인지, 레즈비언을 다뤘다고 할 수 있을지,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진 않은지. 취향이고 아니고의 관점에선 평이 갈리겠지만 스스로 되물어 볼 질문이 있지 않나.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찍은 거지?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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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 연출의 일부를 언급하지만,
영화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암전 된 화면에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그런데 러닝타임 내내 내레이션이 이어진다면? 낯설 게 자명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낯선 흐름들이 많아서, 장담컨대 대화는 없고 인물들의 내레이션만 나온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서야 깨달을 거다. 이처럼 비정형성을 띄고 있는 영화이긴 하나 '실험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선 지극히 전형적인 면모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 또한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어느 카테고리에서는 유별나도 또 다른 곳에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럼 결국, 차이랄 게 있나. 객체는 변함없다. 판단의 주체인 우리 개인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지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괴물이고, 마녀이고, 도깨비다.
영진과 재연이 서로를 꽁꽁 숨기며 살아야 하는 것, 함께 살 수 없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아니고. 대다수가 그들을 괴물과 마녀, 도깨비 같은 카테고리를 투과해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머릿수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견고하고도 암묵적인 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이 숨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사람이 이전보다 줄었다고 한들 그들은 여전히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으니까.
두 사람은 구체성을 지녔다. 영진, 이라는 이름과 재연, 이라는 이름. 그리고 둘의 외형으로. 흐릿하고 깨진 이미지들이 시각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해도 인물들이 지워질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끊임없이 발화한다. 자신을 주어로.
액자식 구성과 비슷하다고 할까. 주인공은 두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는 '겨우' 두 사람은 아니다. 이름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알 수 없어서 마치 비존재하는 것 같은 무수한 이들. 다소 남루한 모양새가 동정을 불러일으키질 않고 되레 기이함을 불러오는 이들. 그래. 마녀, 괴물, 도깨비. 그런 것들과 어울릴 것 같은 존재들. 이러한 비존재들은 아무리 모습을 드러내도 세상이 인지하기엔 턱없이 미미해서 구체적인 인물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모든 비존재를 대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건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이다. 일종의 환상이랄지. 모두가 비존재인 건 마찬가지인데 그중 몇몇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자유로이 드러내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어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을 일컫는 카테고리는 바뀌지 않았다. 정말, 이 둘이 자유로웠다면 낙원 찾기에 돌입할 리 없다.
낙원.
그건 어디인가. 유토피아의 다른 말이 아닌가. 상상하면 할수록 아득하게 멀어지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또 다른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주인공은 정체 모를 낙원을 향해 살던 곳을 떠나고 좌절한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꿈같은 공간은 말 그대로 꿈에 그쳤다. 이젠 어디로 향한단 말인가. 그는 습관처럼 어딘지도 모를 앞을 향하려 한다. 이미 거나하게 뒤통수를 맞아놓고도, 습관처럼.
하지만 낙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여길 벗어나 새로운 곳을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오히려 새롭게 무언가를 일구고 적응할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 게 분명하다.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곳으로. 그곳은 좋든 싫든 그가 여태껏 살아온 터전이고 집이니까. 낙원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선 몇 천 번의 부서짐을 만날 것이다. 굽이치는 물결이 부서지고, 다시 물결을 만들고, 순식간에 부서지고, 그럼에도 다시 물결을 이루듯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하나의 작은 원을 그리다 보면 또 다른 비존재가 모여들어 조금 더 큰 원을 그리고, 사회 안에 자연스럽게 속한 다른 이들도 손을 잡고. 끝나지 않을 물결이 요동친다.
바다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기엔 물결이 너무나도 큰 시점이 오면, 파도는 더 이상 부서질 일이 없겠지. 꿈에만 그리던 낙원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때를 기약하며 오늘도 파도는 망설임 없이 철썩대며 부딪힌다.
Schedule
2023. 04. 28 / 13:00 (2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3. 04. 30 / 13:30 (335) 메가박스 전주객사 6관
2023. 05. 02 / 21:00 (411) CGV전주고사 4관
2023. 05. 04 / 16:00 (822)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JIFF)- 2023.04.27(목) ~ 2023.05.0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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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조정석 주연의 영화 <파일럿>이 개봉 12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가 파격적인 변신을 거쳐 재취업에 성공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2024년 여름 개봉 영화 중 최단 시간 내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며, 올여름 최고의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한, 광복절 연휴 주간이 시작되는 다음 주에도 흥행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8월 14일 개봉하는 조정석 주연의 또 다른 영화 <행복의 나라>가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다음 주는 '조정석 주간'이 될 전망입니다.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으로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츄핑>은 누적 관객 수 40만 명을 돌파하며 2위를, <슈퍼배드 4>는
<데드풀과 울버린>을 제치고 3위에 올랐습니다.
국내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데드풀과 울버린>이 개봉 3주 만에 전 세계 매출 10억 달러를 돌파하며 올해 두 번째로 10억 달러를 넘긴 작품이 되었습니다.
데드풀의 실제 아내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주연한 <잇 엔드 위드 어스>가 2위를 차지했으며, <트위스터스>가 3위에 올랐습니다.
<행복의 나라> <빅토리> <트위스터스> <에이리언: 로물루스> 광복절 전날 기대작들이 줄줄이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순위는 어떻게 변할지! 씨네픽 박스오피스 분석 다음주에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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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사랑
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브리저튼>을 단순한 시대극 로맨스로 보지 않았다. 자신의 호감과는 상관없이 알맞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열성을 다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그 당시를 비판하게 되었고, 사랑에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되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녀주인공의 사랑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만약 남녀 주인공이 '결혼'이 삶의 목적인 사회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비혼 주의자였다면? 둘에게서 사랑의 스파크가 튈 수 있었을까?
뒤 이어 보게 된 영화 <더 랍스터>는 목적에 의한 사랑을 잘 보여줬다. <더 랍스터>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진 사람은 외진 숲 속 호텔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호텔 안에서 45일 안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이 정한 '동물'이 된다. 호텔에 갇힌 사람들은 하루에 해야 할 일정이 정해져 있는데 대표적으로 외톨이를 잡는 사냥 시간이 있다. 호텔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을 외톨이라 부르고 외톨이를 사냥해오면 외톨이의 수에 따라 호텔에 묵을 수 있는 날이 연장된다. 그래서 동물이 되고 싶지 않으나 짝은 없는 사람들은 맹렬하게 외톨이를 사냥한다. 그 외에 남자와 여자가 모여 춤을 추거나 수영을 하는 등의 만남의 시간이 있고 왜 짝이 있어야만 하는지 교육해주는 시간도 있다. 교육 내용은 정말 황당한데 여자가 성폭행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자가 있어야 하고 음식을 먹다 목에 걸렸을 때, 하임리임법을 해줄 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면 세상에 모든 위기에 맞서지 못한다고 공포를 조장하는 교육이었다. 그리고 호텔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규칙도 있는데 거짓으로 짝을 만들거나 자기 위로 하는 행위이다. 호텔에서는 절대 혼자서 성행위를 해선 안되는데 들킬 경우 토스트기에 손이 집어넣어 진다. 짝을 찾지 못하면 인권 따위 없는 사회이다.
기서 주인공 데이비드는 거짓으로 사랑에 빠진 척하다 들켜 동물이 될 뻔하다, 가까스로 호텔에 탈출해 외톨이 무리에 끼게 된다. 하지만 외톨이 무리도 호텔 못지않게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평생 혼자 살아도 되지만 사랑은 해선 안된다.' 호텔과 반대되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무리에서 자신의 아픈 등에 연고를 발라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사랑하고 싶던 둘은 외톨이 무리에서 도망칠 계획을 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을 눈치챈 무리의 대장이 데이비드 몰래 여자의 눈을 멀게 한다. 그때, 여자가 대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내 눈을 멀게 했지?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잖아"
흔히 사랑하면 목숨도 내놓는다는데, 사랑하는 남자의 눈이 아닌 왜 내 눈이냐 묻는 상황은 보편적으로 예상되는 대사와 달랐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은건가. 아니면 자신의 눈과 바꿀만큼은 아니였던건가.
여자의 눈은 멀었지만 무리에서 꼭 탈출하고 싶었던 데이비드는 대장을 제압하고 여자와 도망간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도시에 한 레스토랑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그녀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금방 끝내고 올게."
스테이크 칼을 들고 한참을 세면대 앞에 서있던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 짝을 찾지 못하면 무슨 동물이 되고 싶죠?
- 랍스터요. 랍스터는 100년 넘게 살아요. 귀족들처럼 푸른 피를 가지고 있고 평생 번식을 해요. 그리고 제가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동물이 돼서도 아주 오래,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던 바다에서 살고 싶어 했던 데이비드는 사랑한다 믿었던 여자와 눈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머는 것쯤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탈출에 성공해 자유가 된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더 랍스터>처럼 사랑을 해야만 하는 곳에서 피어오른 사랑은 사랑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는 목적, 구체적으로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브리저튼>과 <더 랍스터> 모두 사랑해야만 하는 목적이 있던 사회였다. 그리고 <더 랍스터>는 살기 위해선 사랑을 해야 한다는 생존사랑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게 했다. 과연 목적이 있는 사랑은 사랑일까 본능일까? 아니 애초에 사랑은 본능일까 이성일까?
분명한 건 <더 랍스터> 속 데이비드의 사랑은 탈출을 위해 사랑을 이용한 이성처럼 보였다.
‘노처녀. 노총각’ 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우린 이렇게 불렀다. 지금은 비혼주의가 완연한 사회이기에 저런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나이가 들면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 생각했던 사회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생존사랑'을 해오지 않았을까? 당연히 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알맞은 누군가를 찾아 사랑한다고 세뇌하며 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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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의 황홀함 속으로
재즈의 황홀함 속으로
영화 리뷰 <블루 자이언트>
감독] 타치카와 유즈루
출연] 야마다 유키, 마미야 쇼타로, 오카야마 아마네
시놉시스] “세계 최고가 될 거야, 반드시” 언제나 강가에서 홀로 색소폰을 불던 고등학생 ‘다이’는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에 도전하기 위해 도쿄로 향한다. “실력이 안 되면 같이 안 할 거니까” 우연히 재즈 클럽에서 엄청난 연주 실력을 뽐내는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를 만나 밴드 결성을 제안하고, “나도 드럼을 칠 수 있을까?” ‘다이’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평범한 대학생이던 ‘슌지’가 열정 가득한 초보 드러머로 합류하면서 밴드 ‘JASS 재스’가 탄생한다. “전력을 다해 연주하자! 분명 전해질 거야” 목표는 최고의 재즈 클럽 ‘쏘 블루’! 10대의 마지막 챕터를 바친 JASS 재스의 격렬하고 치열한 연주가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스포일러 유의#
선이 강조되는 작화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3D 애니메이션이 주름잡는 이 영화 세계에서 2D의 매력을 아주 강하게 내뿜고 있는 작품이다.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생동감 넘치는 재즈의 모습을 만화 속에서 볼법한 날카로운 작화로 그 쨍한 재즈의 느낌이 더욱 배가 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3D로 제작됐다면 이런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어서 그 뚜렷함이 2D인 만화적인 작화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감과 양, 질감이 잘 드러나는 3D였다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날카로움’이 강력하게 관객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선이 강조되는 만화적인 작화를 통해서만 용인이 되는 그 감성이 마지막 클라이막스 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고, 피아노와 색포폰, 드럼의 활기와 리듬감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전율을 주는 재즈라니
재즈는 사실 클래식과 달리 정박에 박자를 맞추지 않아서 실제 치는 사람의 곡 해석과 즉흥연주에 따라 많이 갈리는 편이다. 그래서 세부 장르도 너무 다양하고 마이너한 취향으로 대변되고는 한다. 하지만 영화 블루 자이언트 속 주인공 JASS는 그런 어려운 재즈가 아닌 사람들이 그저 좋아하고 열광할 수 있는 재즈 그 자체를 살리기 위해 연주를 한다. 어려운 기교, 세부 장르에 갇히지 않고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장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앞으로 재즈 연주가가 가져야할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재즈 연주가를 꿈꾸는 다이는 세계 치고의 의미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연주가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열정이 전해져서 일까. 엘리트주의였던 유키노리와 음악의 음도 모르던 슌지의 마음을 움직이며 JASS라는 한 팀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연주하는 재즈는 날서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적어도 열정의 불씨를 마음에 새겨주는 연주를 한다. 필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저렇게 열정적인 다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재즈에 그들의 노력과 감정이 다 드러나다 보니 2시간 내내 재즈를 들으며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재즈를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는 사람이더라도 재즈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재즈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영화 블루 자이언트에서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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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환상 사이
캐스팅과 뮤지컬이라는 장르만을 놓고 볼 때 <아네트>는 레오 카락스가 만드는 상업영화처럼 보인다. 예술영화에도 얼굴을 비추지만 이제는 상업영화 배우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와 특히 헐리웃에서 영어 연기를 할 때 상업영화 출연 빈도가 높은 마리옹 꼬띠아르는 <아네트>가 일반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잘 알려진 배우들과 노래가 함께 하는데도 <아네트>는 상업영화라고 보기에는 난해한 구석이 있는데 특히 액자구성과 무대와 현실을 오가는 영화의 형식에서 더욱 난해함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시작할 때 레오 카락스는 직접 등장해서 이제 시작하자고 속삭인다. 그리고 영화의 캐스트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제 시작할까요(May we start?)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라라랜드>를 연상시킬 정도지만 오프닝에 비해 영화가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등장인물이 소개되면 관객은 제목이기도 한 아네트가 언제 등장하는지를 기다리느라 더욱 혼란에 빠진다. 서사를 시작하는 건 아네트가 아닌 안(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헨리(아담 드라이버 분)이고 아네트는 이들 사이에 태어난 딸인데 무대 소품처럼 보이는 인형으로 등장하는 신이 훨씬 더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레오 카락스 감독이 이런 난해한 구성을 취했는가다. 연극과 영화를 오가는 건 아네트 뿐만이 아니라 안이 헨리와 싸우는 장소인 배에서도 나타나는 연출이다. 흥미로운 건 안과 헨리 모두 무대가 주된 삶의 터전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오페라 가수로 등장하는 안은 무대에서 유사 죽음을 수도 없이 경험하고 관객을 구원한다. 코미디언인 헨리는 무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바로 부활하며 관객에게도 죽음을 선사한다. 이는 안과 헨리가 나누는 대화에서 두드러지는데, 오늘 무대가 어땠냐는 질문에 헨리는 '죽여줬어(I killed them)'라고 대답하는 반면 안은 '관객을 구원했어(I saved them)'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결혼해 부부가 된 이들은 정 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관객에게 죽음을 선사하던 헨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무대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안은 점점 더 잘나가는 오페라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헨리는 그 이유를 자신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 단정짓지만 관객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냉정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즉 무대라는 극중 장치는 영화의 형식을 서사에 그대로 반영하면서 헨리의 사고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인기없는 코미디언이 되고 공연이 취소된 헨리는 태어난 아네트를 키우며 점점 현실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를 보다가 아이 위에 앉는 장면이 대표적인데(babysitting을 이용한 언어유희)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해 보인다(실제라면 아네트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또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보여주는데 공연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헨리의 전 연인들이 헨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안은 차에서 잠들었다가 이 뉴스를 보게 되는데 뉴스가 끝나고 안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장면 또한 관객에게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데 헨리와 안의 환상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장면들이 암시하는 것은 안과 헨리가 서로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태어난 아네트와 힘든 육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승승장구하는 안에 대한 헨리의 열등감과 질투다. 공연이 취소되기 전 헨리가 야유를 받았던 공연의 내용은 자신이 안을 죽였다는 것이다. 극중극에서 헨리의 살해 방법은 놀랍게도 간지럼 태우기인데 관객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 헨리가 안을 그 때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아내를 죽여 스스로의 부활을 꾀했던 헨리는 도리어 그 공연으로 야유를 받고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고, 이는 이후 서사의 복선으로 활용된다.
아네트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대에서 퇴장하면 편안한 집에서 휴식을 취했던 이들은 아네트가 태어나고 부부관계가 불안정해지자 불안정을 상징하는 태풍이 부는 배로 무대를 옮겨간다. 이 배는 앞서 말한 연극의 공간이다. 누가 봐도 배경은 태풍이 치는 바다를 스크린으로 띄운 것이며 흔들리는 배와 쏟아지는 물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부터 안 없이 살아남은 헨리가 목격하는 것들은 대부분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아네트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네트는 여전히 목각인형이기에 불쾌한 골짜기와 같은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데 아네트가 노래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아네트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입술을 목각인형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방식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네트의 노래가 헨리의 환상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나마 헨리의 환상인 것처럼 보이던 아네트의 노래는 안을 사랑했던 지휘자가 이를 함께 듣고 놀라는 장면과 더불어 전세계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리면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노래하는 아네트가 헨리의 환상이라면 아네트의 노래를 듣고 놀라는 지휘자와 관객 또한 헨리의 환상이 된다. 아네트는 극이 끝날 때까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이는 헨리의 생각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헨리가 자신의 무대를 잃은 것이 안과 아네트 때문이라는 착각은 안이 죽은 이후에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헨리뿐이다. 기실 헨리의 무대는 안과 결혼하기 전에도 그닥 재미있지 않았다. 이를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처럼 헨리는 무대에서 자신이 안을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매 무대마다 새로운 농담을 생각해내어 관객을 '웃겨 죽여야' 하는 헨리와는 달리 안은 같은 무대를 여러번 반복한다. 죽여야 하는 상대가 자신뿐이고, 무대에서 스스로 낙하함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안과는 달리 헨리는 매일 죽여야 하는 상대가 바뀌는 데다 그 수도 많다. 심지어 무대에서 자신이 죽는 시늉을 하더라도 관객이 반드시 웃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헨리가 진행하는 코미디쇼의 질이 낮아진 것은 헨리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코미디쇼라는 형식에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자신마저 죽었던 헨리는 이제 무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영화의 형식이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것은 헨리의 이런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헨리는 분명히 배에서 안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 자신조차도 정말 그랬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극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아네트를 현실로 받아들일 때 그 현실은 파도처럼 한꺼번에 덮쳐온다. 아네트를 월드투어로 혹사시키는 것이 아동학대라는 것을 받아들인 헨리는 최후의 공연을 기획하고 그 곳에서 공연자로서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네트가 목각인형이 아닌 현실의 아이가 되어 헨리에게 노래할 때 헨리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서 아네트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인 헨리 앞에서 환상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네트다. 헨리는 아네트에게 널 사랑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지만 아네트는 헨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네트와 헤어질 때 헨리는 마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목각인형이 된 아네트를 목격하는데 이는 이 모든 것이 헨리의 환상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던 아네트는 존재했던 것인가? 아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헨리가 죽인 이들은 왜 죽었는가? 결국 <아네트>는 자신의 쇠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상을 헤맨 코미디언의 최후인 셈이다.
헨리는 자신의 코미디쇼에서 자기 자신에게 끝도 없이 묻지만 결코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되뇌인다. 왜 헨리는 코미디언이 되었는가? 서사 전체에서 보듯이 헨리는 코미디에 소질이 없다. <아네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애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이 <아네트>인 이유는 아네트야말로 헨리가 만들어낸 환상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정말 존재했는지조차 영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불분명한 아네트는 헨리와 안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환상으로 만들어낸 헨리가 자신을 없애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뮤지컬의 선율을 기반으로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호연을 볼 수 있는 <아네트>는 현실에 기반한 위험한 환상을 조금은 기괴하게, 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해당 글은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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