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2 17:35:40
좋긴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초기 무성영화
<바이올렛 에버가든 오케스트라 콘서트 2021> REVIEW
필자가 영화지만 영화로 취급하기 싫은 영화가 몇가지 있다. 이 중에는 마블 영화, 에로 영화 등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 & 오케스트라 실황이다. 왜냐하면 본질을 따져보면, 단순히 기록의 성격이 컸던 1890~1910년대 무성영화들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초기 무성영화가 현재에 와서도 가치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기에, 현대 영화의 기틀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똑같이 카메라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찍는다고, 1896년의 "열차의 도착"과 똑같은 평을 받을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음악과 중간에 실제 성우가 출연해 작품을 훑어보는 듯한 연출도 오케스트라의 연출일 뿐, 본 영화의 연출은 아니다. 원론적으로 따져보면 단순히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것을 찍은 "열차의 도착"이랑 다를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히 필자가 노래방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찍어 상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 그대로 기록해서 트는 것 뿐이니! 여기에 소리와 컬러가 추가된 것일 뿐. 다만 그나마 나은 점은, 화질이 일부 노이즈가 존재하지만, 사운드는 잘 기록되어 기록 영상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편이다. 이 영화의 최대 가치는 바로 "기록" 이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2019/미국, 중국)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선택의 자유>어렸을 때 AFKN-TV를 통해서였나, 미국에서 잠깐 살 때였나. 영어공부 삼아 프레드 로저스가 진행했던 TV 프로그램,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자극적인 배경 음악이나 음향효과 없이 고요하게 진행되던 차분한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다.톰 행크스가 연기한 프레드 로저스는 실제로 방송인이자 장로교 목사였다고 한다.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유능한 잡지사 기자 로이드 보걸(매튜 리즈)이 '영웅' 특집 인터뷰 기사를 쓰게 되어 프레드와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로이드는 냉정하고 매운 필치로 명성이 자자한 르포라이터였는데 갑자기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상관의 지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버지 뻘의 프레드와 거듭 만나게 되면서 로이드는 친절하고 자상하며 진심을 담아 커뮤니케이션하는 프레드를 위선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로이드 자신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의절하다시피 한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누나 결혼식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났지만 치고받았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그런 그에게 프레드라는 인물의 인품은 가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병석에 누운 어머니와 남매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야 나타나 화해를 바라며 접근을 하는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인물을 만나려니 로이드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함께 제작하는 출연자와 제작진들은 물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까지 진심을 다하고 그의 아내에게서도 존경받는 프레드의 여러 모습을 지켜보며 로이드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점차 녹는다.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다. 결국 프레드의 인품이 '가짜'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에서 비롯된 '진짜'임을 깨달은 로이드는 상관과 독자의 기억에 남을 '영웅' 특집을 완성한다.만나는 대상마다 한결같이 집중하고 상대방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듣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답하는 프레드의 모습은 타인의 말을 대충 듣고 설렁설렁 대답하며 섣불리 판단하였던 오랜 직장생활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로이드의 부자관계에 대해 묻고 답할 때 집중하던 프레드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십대 자녀들과 갈등을 겪어 방송을 중단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최근까지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분노했을 때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오로지 '선택'에 달려있다는 프레드의 말은 짧지만 여운이 긴 대사였다. 그의 인품을 쌓아올린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프레드의 인품에 영향을 받아 로이드의 강퍅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듯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한 힘을 지녔다. 비록 요즘 코로나19로 만남이 줄어들어 진심어린 인간관계를 만들 기회도 줄긴 했지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프레드처럼 아름다운 영향력을 갖게 되기를 소망한다.(©2020.최수형)
-
-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특정 공간으로 삶의 패배자들을 몰아넣고 벌어지는 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의 죽음은 곧 쇼가 끝나는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그 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1층부터 8층까지를 등장인물들이 무작위로 부여받으며 시작되는 이 쇼는 우리 사회에 관해 꽤나 많은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우린 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최대한 공평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등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 시스템이 한참 돌아가고 나서 보면, 어느새 각자가 가진 돈은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당 버는 돈의 양도 달라지고, 그 돈의 양에 따라 개개인이 가진 삶의 태도와 지위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는 점점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간다.
<더 에이트 쇼>는 패배자 8명을 모아 특정 공간으로 넣는 순간부터 기존 사회에서의 직업, 계급, 자본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만약 기존에 부자였거나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도 그 쇼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무작위로 자신이 지낼 공간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마다 자리한다. 각 방은 1분이 지나면 특정 금액만큼 쌓인다. 그리고 쇼가 끝나면 그 금액을 현실로 받아갈 수 있다. 그 쇼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평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돈이 없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별다른 힘이 없는 이들이다. 쇼의 주최자들은 이들의 옷을 똑같이 입히고,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을 하게 만들었다. 단 각 층의 방에 차별점을 두었다. 1분이 지나면 1층은 1만 원, 2층은 2만 원, 3층은 3만 원, 4층은 5만 원씩 올라가고 8층은 34만 원이 1분당 더해진다. 파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규칙을 통해 각 층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한정했고, 방의 크기도 8층으로 갈수록 더 커지게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쇼의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작위로 정해져 있는 불평등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실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에 태어나 얻게 된 자신의 가족이 가진 지위나 자본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가지게 된 배경환경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걸 다시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규칙에 적응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더 에이트 쇼>가 보여주는 쇼는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커지는 불평등
다른 모든 것이 평등하지만, 그 공간에 처음 부여받은 부의 조건이 다르다. 모두가 신사 같은 젠틀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서로를 돌봐주지만, 맨꼭대기 층인 8층이 가진 힘이 그 평등함에 균열을 가한다. 8층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방이다.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제공되는 물과 도시락 10개가 그 방에 최초로 배달된다. 방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줘야 모두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의 설정처럼 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밑에 내려가는 구조다. 그래서 층이 높을수록 더 많은 걸 가지게 된다.
꼭대기 층의 주인인 8층(천우희)은 예측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층의 사람들은 생사를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해결하던 대변과 소변 봉투도 아래로 내려온다. 결국 최하층인 1층(배성우)이 그걸 도맡아 처리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부담을 아래층이 계속 나눠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지불해야 할 가격은 실제 금액의 100배 수준이다. 이건 결국 기존에 자본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8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8층은 여왕이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래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과 음식을 제공받는다. 이 쇼의 기본 룰에 누군가 죽음을 당하면 쇼가 끝난다. 그러니까 8층을 죽인다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사회의 우두머리를 끝장내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는 혼란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쇼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춤으로서 이미 만들어진 계층 사회가 계속 지속되게 만든다.
착취로 이어지는 쇼
이 쇼에서 시간은 꽤 중요하다. 공용공간에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시간이 0이 되면 쇼는 끝나고 각자 방에 있는 전광판에 적힌 금액만 가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려고 최대한 애쓴다. 맨 처음 하는 것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8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하자 시간이 늘어난다. 이후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늘리는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 과정도 재밌다. 매일 모두가 하기 힘드니 4명씩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1층을 도와 대신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힘든 과정 이후 분란이 생기고 팀이 갈라진다. 계단 노동 이후엔 시간을 늘리는 행위가 무언가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노동이 재미로 대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인데, 애초에 노동은 모두가 같이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누군가를 위해 1층에서 4층까지의 인원이 대신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착취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 행위가 게임이라는 행위로 대체되면서 재미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잔혹하거나 선정성을 높여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과 착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배신을 한다. 7층(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좋은 엘리트로 보였던 그가 8층과 6층(박해준)의 지배행위에 협력하면서 1층,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 속한 집단은 계속 가학적인 게임에 참여해 폭력을 당한다. 7층은 이 시리즈에서 강남 좌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7층은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하층인 1-4층의 편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리즈에서 7층이 누구 편에 서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돈과 판단력을 가진 7층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리즈 내내 이야기의 온도를 차갑게 하기도 하고 뜨겁게 하기도 한다.
독재에 이어지는 혁명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3층이다. 가장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면서, 겁도 많고 가진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독백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즉, 관객이 3층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야기 안에서 3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할 뿐이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인 8층을 시작으로 7층, 6층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그는 계속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3층이 끝까지 중심 화자인 건, 그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안다. 작은 욕심을 부릴 때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마치 밟아도 일어나는 민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리즈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달려가면 점점 독재의 경향성이 짙어진다. 8층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두에게 고문까지 하는 지경까지 간다. 이 잔혹무도한 독재는 결국 혁명을 부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3층과 같은 힘없는 민초, 그리고 그를 돕는 여러 사람들. 그들이 부른 혁명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 혁명은 화려하지 않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잔혹한 쇼를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낸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 나오고 같은 편을 배신하는 반전들은 쇼의 시간을 늘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쇼는 끝이 난다. 단지,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원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고 어쩌면 그 불평등함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나서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평등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미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고,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정치인들과 상위계층들은 표를 얻기 위해 좋은 말들로 나쁜 행위들을 포장한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고문은 계속 이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쇼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은 평범한 민초들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관상>, <더킹>, <비상선언> 연출 이후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잘 짜인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화면의 비율을 늘리고 줄이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쇼의 축소판을 만들어냈다.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청률에 매몰되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매체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시리즈다. 또한 설정뿐 아니라 각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8층 역할을 맡은 천우희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가 얼마나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민, 류준열, 박해준, 이주영, 이열음, 배성우, 문정희 배우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달려갈 수 있는 시리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담긴 메시지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최근 한국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회적이고,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미쳐있었기에 시대를 풍미했고, 사랑했기에 세계를 떠났던 이들의 이야기
미쳐있었기에 시대를 풍미했고, 사랑했기에 세계를 떠났던 이들의 이야기
영화 <바빌론> 리뷰감독] 데이먼 셔젤
출연]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시놉시스]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되는 곳ㅡ'바빌론' 황홀하면서도 위태로운 고대 도시, '바빌론'에 비유되던 할리우드. '꿈' 하나만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
지난 8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저스틴 허위츠가 내한을 해서 콘서트를 열였었다. 이 콘서트에서 현재 작업 중인 영화가 바빌론이고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개봉을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음악이 정말 잘나왔다고 자랑을 했었다. 그래서 그 작품이 어떻든 음악 하나는 좋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개봉을 기대했던 작품이었던 영화 <바빌론>. 바빌론은 기대했던 만큼 음악도 최고였고, 작품성도 정말 좋았던 수작이었다.
영화 산업을 이해한다면 극호일 작품
데이먼 셔젤과 저스틴 허위츠 조합의 영화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었다. 물론 그 둘의 작품을 다 본것은 아니지만 라라랜드와 위플래시는 그닥 내 취향은 아니었다. 물론 음악은 좋았지만 캐릭터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말 극호였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단 한번도 시계를 찾지 않을 정도로 지루한 장면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1920년대부터 무성영화가 발전하면서 이 시대를 호령했던 극 중 주인공 브래드피트와 떠오르는 신예 마고 로비. 이 둘이 점차 유성영화로 발전해 나가면서 무너져가는 그들의 영광을 굉장히 짜임새 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시대적 배경과 그 진입장벽이 얼마나 높았는지, 그 과정에서 노동력 착취와 인종차별과 같은 인권 문제, 대중예술로 치부되면서 고급 예술이라 칭송받던 연극과의 대립 등 영화가 발전해오면서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갈등들을 녹여내고 있어서 영화 그 자체를 넘어서 산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박수를 치고 나올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사랑하는 캐릭터들의 총집합
영화 바빌론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렇게까지 무엇인가를 좋아할 수 았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 속 캐릭터들은 영화에 대한 진심을 각자 나름대로 풀어낸다. 브래드 피트의 경우에는 1920년대 무성영화의 상징인 인물 잭 콘래드로 등장한다. 하지만 고전만 찍는 당시의 영화 산업을 보다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방탕해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영화의 다음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성영화로 빠르게 변화하는 영화 산업계에서 잭 콘레드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저버린 태양이라는 수식을 달자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마고 로비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고 로비는 무성영화의 전성기 시기 제작자의 눈에 들어 단번에 스터덤에 오른 신예 배우 넬리 라로이 역을 맡았다. 그녀 역시 무성영화 속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매력적이었을 뿐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오자 목소리의 한계와 싸보이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물이 되어버린다. 갖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그녀는 결국 다시 밑바닥 인생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그녀의 유일한 친구 매니 토레스에게 돌아가 행복한 말년 맞는가 싶더니만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녀는영화에게 버림받은 이상 더이상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지 그를 떠나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배역 하나는 따내기 위해 대사 한 줄을 더 얻기 위해 범죄행위를 하는 이물들까지. 영화 바빌론 속에는 영화엗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에 광기 어린 사랑을 보여주는 이들이 많다. 그런 그들은 결국 영화 산업계에 버림을 받으면서 다 죽음을 맞이한다. 오히려 영화 산업계와 멀어지고 이제 더이상 영화 작업을 하지 않는 매니 토레스만이 살아남아 바뀌어가는 영화사를 눈으로 지켜보며, 자신을 포함한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써 내려갔는지 확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왜 바빌론알까?
영화 바빌론을 보러가기 전 영화 제목이 바빌론이어서 고대시대 공중정원을 만들었던 바빌론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바빌론은 비유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바빌론을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고대도시이자 환락의 세계, 그리고 존재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만나볼 수 없는 환상과도 같은 시대라는 이미지로 생각한다. 영화 바빌론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라는 산업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제는 만나볼 수 없지만 꿈만 같았던 1920년대의 영화 산업시대를 들여다보면서 그 세계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이 면에 얼마나 많은 타락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미쳐잇었기에 그 시대를 풍미해쏙, 사랑했기에 그 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고백을 담음 작품이었다. 영화 산업의 태동과 변화의 찬란함, 그리고 그 이면을 함께 보여주었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온다면 왜 바빌론이 제목이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올해 볼 작품이 많겠지만 아마 영화 바빌론은 2023년 손에 꼽히는 명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
-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
-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이 영화를 다 보고 상영관을 나올 때는 충격이였다.
내가 알던 소니의 애니에이션이 아닌, 픽사에서 만든 줄 알을 정도로 엄청난 퀄리티를 보장한다.
-줄거리-
우연히 방사능 거미에 물려 초능력자가 된 마일스는 어느 날 스파이더맨이 악당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고
피터는 자신과 같은 능력이 있음을 알고 도와주려 한다.
그 이후에 우연히 여러 개의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 개의 스파이더맨들이 모여 악당과의 싸움을 준비한다.
평가
사실 소니에서 만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썩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는다.
케이블용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하지만, 극장용은 우리의 뇌리에 박힌 유아용을 만드는데, 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정말 그런 나의 고정관념을 바꿔 주었다.
영화 자체의 때깔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도 정말 좋았으며, 시각 효과도 훌륭했고, 영상미도 뛰어났다.
영화의 구성이 지저분하지 않고 딱 우리가 원하는 정도만 들어있으며,
개인적으로 톰 홀랜드가 연기하는 스파이더맨 보다 더 만족했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직비디오같이 흘러가며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줄지가 아닌
어떻게 보여줄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을 영화로 안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은 최고로 잘 한 선택이였다고 장담한다.
-
- <건파우더 밀크셰이크> 확고한 주제를 망친 우스운 작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조직의 보스인 '네이선(폴 지아마티)'이 주는 살인 미션을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킬러 '샘(카렌 길런)'. 나날이 살인에 무뎌져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15년 전 홀연히 모습을 숨긴 엄마 '스칼렛(레나 헤디)'을 비난하면서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진 돈가방을 회수하라는 미션을 실패한 그녀 앞에 자신이 죽인 한 남성의 딸 '에밀리(클로이 콜먼)'가 나타나고, 샘은 오랜만에 느낀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에밀리를 보호해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내 돈을 잃어 분노한 네이선과 과거 샘에게 아들을 잃은 범죄조직의 수장 '매컬리스터(랠프 이네슨)'가 그들을 쫓기 시작하고, 샘은 도서관 사서로 위장한 세 명의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결전을 준비한다.
악역의 완성도는 액션이나 히어로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소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위압감, 그리고 탄탄한 철학적 논리로 무장한 악역이 있을 때 주인공이 겪는 역경과 성장, 그의 최종적인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값진 쾌감을 선사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의 타노스, <007 스카이폴>의 실바가 없었다면 배트맨, 어벤져스, 제임스 본드의 고난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승리 혹은 패배도 심드렁했을지 모른다. 최근 큰 화제가 되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예고편에서 가장 큰 환호를 자아낸 장면 역시 과거의 악역인 닥터 옥토퍼스의 재등장이었다.
해외에서는 7월에 넷플릭스로 공개되었고 국내에서는 지난 8일에 극장에서 개봉한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악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영화다. 악역이야말로 강경한 여성 서사를 바탕으로 한 액션 영화인 <건파우더 밀크셰이크>의 완성도가 무너진 결정적 대목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부장제라고 하는 오래되고 거대한 악을 처단하기 위한 여성들의 사투를 담고 있는데, 정작 거악을 묘사하는 방식이 목적과 어울리지 않게 우습다 보니 가부장제를 처단한 여성들의 성취는 뜻대로 빛나지 못한다.
<건파우더 밀크셰이크>가 그려내고자 한 여성들의 사투는 제목을 구성한 두 가지 상징에 깃들어 있다. 우선 영화는 '밀크셰이크'라는 소재 안에 여성들 간의 연대감과 그 연대가 확장되는 모습을 담는다. 작중 밀크셰이크는 샘이 엄마와 이별하기 직전에 나눠마신 음료다. 그녀는 떨어져 지내면서도 엄마와 이별했던 그 식당에서 항상 밀크셰이크를 주문하며, 설사 혼자 있더라도 항상 두 개의 빨대를 꽂아 놓는다. 따라서 밀크셰이크는 그녀가 비록 겉으로는 엄마에게 분노와 실망을 쏟아내지만, 내심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마음 한쪽에 위치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장치다. 이처럼 끈끈한 여성, 모녀간의 관계는 긴 시간을 함께 했는데도 돈가방 하나에 와해되는 샘과 네이선의 유사 부녀 관계와 강력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밀크셰이크는 혈연관계로 묶여 있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시킨다. 미션 중에 무고한 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샘은 희생자의 딸인 에밀리의 목숨을 책임지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샘을 만난 이후로 에밀리의 앞에는 항상 밀크셰이크가 놓여 있다. 샘이 그녀를 은신처로 데리고 갔을 때도, 에밀리의 안전을 걸고 매컬리스터와 협상을 벌일 때도 에밀리 앞에는 밀크셰이크가 있다. 이때 밀크셰이크로 맺어진 연대가 피해자로서의 여성 간에 형성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에밀리 입장에서 샘은 아버지를 죽인 킬러다. 그러나 그녀는 샘이 그러한 선택을 내리게 된 뒷배경을 알게 된 후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이에는 이로 복수하는 대신 손을 맞잡고 연대하는 길을 택한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블랙 위도우>에서 나타샤 로마노프가 마지막 순간 빌런인 태스크마스터를 제압하는 대신 설득하고 회유한 것과 맞닿아 있다.
한편 제목의 나머지 반절을 구성하는 건파우더는 여성 연대의 지향점을 암시한다. 샘은 도움을 요청하러 간 도서관에서 새로운 총을 받는데, 그 총들은 제인 오스틴, 샬롯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 등 주요 여성 작가들의 저서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건파우더라는 상징은 자연히 밀크셰이크로 맺어진 여성 연대가 악으로 상정된 남성, 특히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을 공격해야 한다는 방향성으로 이어진다. 딸들과 달리 아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든 순간마다 말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라는 빌런의 대사도 전혀 접점이 없는 두 단어가 하나의 제목에 뭉쳐야 하는 데 당위성을 더해준다.
다만 영화가 처단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인물이나 집단을 묘사하는 방식은 어설프고, 작위적이다. 우선 남성 캐릭터들은 무능력하다. 샘과 치열하게 부딪히는 네이선의 세 부하만 해도 지능이 부족하고, 눈치도 없으며, 판단력과 격투 실력이 극도로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볼링장이나 병원에서 샘이 이들과 한바탕 싸움을 펼칠 때 이 싸움은 전혀 긴장이 되지 않고, 이런 이들의 상사인 네이선과 그의 조직 역시 주인공 일행을 코너로 몰만한 위압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남성들도 다르지 않다. 영화의 메인 빌런을 맡은 매컬리스터와 그의 조직은 돈 이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속물인 네이선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범죄조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첫 등장부터 끝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샘의 일행을 위기에 빠뜨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운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핸들과 페달을 각각 나누어 맡아 위기를 모면하는 샘과 에밀리에 비해 그들을 쫓는 남성들은 카 체이싱 장면에서 하나의 팀으로서 움직이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펼쳐지는 액션씬에서도 악역들은 숫자만 많을 뿐 샘과 스칼렛, 그리고 세 명의 사서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이처럼 작중 어떤 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여성과 항상 배신을 일삼고 무력하게 무너지는 남성들이라는 이분법은 확고하다. 그 결과, 지루한 확신만이 남아 여성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 결국 영화는 최소한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워 보인다.
이에 더해 한 편의 액션 영화, 범죄 영화로서도 <건파우더 밀크셰이크>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측면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장 힘을 준 것으로 보이는 식당에서의 원테이크 학살극마저 <올드보이>부터 <킹스맨>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오마주한 바로 그 액션 시퀀스의 또 다른 변형 사례를 더하는 데 그친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카 체이싱 장면이 여성 간의 연대라는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주고, 모든 사람이 팔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병원 난투극이 비교적 참신해 보일 따름이다.
또한 당장 액션 영화인데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어벤져스>에서 네뷸라를 연기한 카렌 길런, <300>에서 고르고 왕비 역을 맡은 레나 헤디, 최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건재함을 보여준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여전사들의 역량이 살아나는 장면이 없다. 당장 샘의 액션만 봐도 액션 연출이 효과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긴 리듬으로 배우들의 액션을 보여주다 보니 오히려 박력이 다소 부족하고 어설픈 움직임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맥없이 당하는 악역들의 어설픔은 배가되며, 그들을 해치우는 샘의 모습도 시원하거나 짜릿한 쾌감을 안기지 않는다.이에 더해 영화의 여러 세부 내용이 이전까지의 범죄 액션 영화들, 특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와 유사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도서관에 위치하여 두꺼운 책으로 위장한 무기 보관함이나 범죄자들이 드나드는 병원과 식당이라는 설정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세계관도 마찬가지인데, 하나의 기업으로 위장한 범죄조직이 여러 사업들에 손을 뻗은 것이나 범죄조직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빠져나갈 정도로 사회를 장악한 모습 등은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는 같은 메시지를 공유하는 <블랙 위도우>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주요 인물들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꾼 데 그친다는 비판을 받은 것과도 유사한 성격의 단점이다.
<건파우더 밀크셰이크>가 말하려는 바는 간명하다. 영화의 제목부터 흐름과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다양한 여성주의, 페미니즘 사상이 공유하는 공통의 문제의식, 곧 가부장제의 타파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발산된다. 이는 <블랙 위도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능력과 생각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팀을 이뤄 남성 범죄자를 처단하며, 주인공이 자신을 조종하는 조커와 같은 남자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뜻을 함께할 제자 혹은 후계자를 두는 <버즈 오브 프레이> 같은 작품과 궤를 같이 한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위의 메시지가 갖는 힘과 설득력을 논하기 이전에 메시지 자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완성도는 악으로 상정한 대상을 충분히 악독하게 그려내지 못할 경우 선의 편에 서서 사투를 펼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고, 관객들을 몰입시키지도 못한다는 실패 공식을 다시 한번 증명해준다. 이렇게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여성 영화이기 이전에 한 편의 영화로서 실망스러움을 숨기지 못한다.
P(Poor, 형편없음)
같은 파리지옥에 빠져버린 또 다른 파리 한 마리
-
-
- 나는 여기에 있다 - 좋은 재료로 끓인 라면 같은 영화
-
*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4월 12일 개봉하는 작품
[나는 여기에 있다]의 개봉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과거, 살인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폐를 찔린 후 장기 이식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사 ‘선두’(조한선)
수사 일선에 복귀한 그는 연쇄 살인범 ‘규종’(정진운)을 쫓던 중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아승’(노수산나)을 통해
‘규종’이 자신과 같은 공여자의 장기를 이식받은 것은 물론,
공여자가 과거 자신이 검거했던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피 끓는 형사 VS 폭주하는 살인자
지독한 운명에 얽힌 두 남자의 극한 추격이 시작된다!
-
- 넷플릭스 <먹보와 털보> 공식 예고편
의외의 찐친 먹보(비) X 털보(노홍철) 전국을 누비며 릴랙스! 좌충우돌 찐우정 로드트립 버라이어티 《먹보와 털보》 12월 1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
-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 메인 예고편
"티모시 샬라메의 완벽한 변신" 밥 딜런의 인생을 노래하다 [컴플리트 언노운] 메인 예고편 공개! 2월 26일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