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2 17:35:40
좋긴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초기 무성영화
<바이올렛 에버가든 오케스트라 콘서트 2021> REVIEW
필자가 영화지만 영화로 취급하기 싫은 영화가 몇가지 있다. 이 중에는 마블 영화, 에로 영화 등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 & 오케스트라 실황이다. 왜냐하면 본질을 따져보면, 단순히 기록의 성격이 컸던 1890~1910년대 무성영화들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초기 무성영화가 현재에 와서도 가치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기에, 현대 영화의 기틀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똑같이 카메라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찍는다고, 1896년의 "열차의 도착"과 똑같은 평을 받을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음악과 중간에 실제 성우가 출연해 작품을 훑어보는 듯한 연출도 오케스트라의 연출일 뿐, 본 영화의 연출은 아니다. 원론적으로 따져보면 단순히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것을 찍은 "열차의 도착"이랑 다를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히 필자가 노래방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찍어 상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 그대로 기록해서 트는 것 뿐이니! 여기에 소리와 컬러가 추가된 것일 뿐. 다만 그나마 나은 점은, 화질이 일부 노이즈가 존재하지만, 사운드는 잘 기록되어 기록 영상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편이다. 이 영화의 최대 가치는 바로 "기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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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 (2023)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카메라를 든 시리아 난민 소녀 야라의 사진 컷들로 시작된다. 같은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사망한’, ‘무고한’, ‘망명에 끝내 실패한’ 난민의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했다. 10대 후반의 야라는 살아있으며, 망명에 성공한 10대 소녀다. 그녀는 카메라 시선 아래 대상화 되지 않는다. 되려 새로운 정착지인 영국의 한 폐광촌 마을을 자신의 관점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TJ가 운영하는 펍 '올드 오크'는 마을의 유일한 공론의 장으로, 영화 안에서 직접적으로 명시된다. 이 펍은 경계를 두고 '바깥의 장소'와 '안의 장소'로 나뉜다. 그중 안쪽은, 과거 연대의 기억이 아카이빙 된 장소다. TJ의 아버지 세대에 광부들의 파업이 그것이다. 하지만 끝내 광산은 폐업하고, 상처로만 남은 기억은 환부처럼 숨겨져 있다. 그리고 난민이자 새로운 이주민 야라가 카메라를 들고 그 환부를 파고든다.이 공간을 다시 연다는 것은 희망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희망을 위해서 열 것인가가 쟁점이 된다. 크게는 기존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공론의 장으로 쓸 것인지, 새로운 식구들인 난민들과 밥을 굶는 아이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할지이다. TJ가 후자를 선택하며, 올드 오크는 두 진영의 대립으로 첨예하게 나뉜다.
다음으로는 회생에 대한 비용의 문제다. 마치 야라의 카메라를 고치기 위해 오래된 카메라 2대가 들어가듯, 올드오크의 주방은 유지비도 많이 들고, 수리비도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여기서, 이민자(난민) 출신 기술자들의 노동력을 빌리며 두 집단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야라는, 외부인이자 동시에 내부인으로서 공동체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사진 전시회). '힘, 연대, 저항(Strenghth, Solidarity, Resistance)'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두 공동체는 점차 연대하지만, 일부 주민들의 자국민 우선주의 그리고 인종차별과 혐오주의로부터 시험을 받는다. TJ의 강아지 ‘마라’의 죽음은 과거 공동체를 지탱하던 상식과 공감, 신뢰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는 절망감을 더한다.
TJ와 일부 지역주민들은, 교회의 지원을 받아 무료 배식을 한다. 이것은 광부들의 폐업에서 모여 식사를 했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TJ의 아버지는, 교회가 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귀속된다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연대가 실패하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야라의 새로운 관점과 더불어, TJ는 과거 노동계급(교회)과 미래의 노동계급(난민, 이민자)의 연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과거가 아닌) 현재의 노동자 계층과, 난민 수용으로 이뤄진 미래의 노동 계급 간의 연대가 몇 순간의 마법 같은 이벤트, 예컨대 사진 전시회나 무료 배식으로 성사된다는 주장은 어딘가 헐거웁다. 동네 대다수의 주민이 야라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들고, 거리 행진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공통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되려 설득적이지 못했다.
<미안해요, 리키>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위시한 전작들에서는, 인물들의 행동 이면에 깔린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토대가 촘촘하고 견고했고, 무엇보다 시스템적인 부조리를 꼬집었기에, 이 부분에서 거장의 은퇴작에 아쉬움을 더 진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이 영화는 경제성장 둔화, 지방인구 소멸, 노동 허가제 안의 수많은 불평등적 요소, 급변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난민을 어떻게 이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고 지역사회에 수용하는가의 문제… 등등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주지하듯이 '올드 오크'는, 브렉시트 이후 노동력 부족과 물가상승,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영국의 국가적 현실을 보여주는 스케치이기도 하다.
<나의 올드 오크>는 상식과 공감, 연대 의식을 잃어버린 분노 어린 개개인의 얼굴을 전시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분노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이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도덕적 의무감에서, '힘, 연대, 저항'이라는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본다는 주장은 어딘가 명확하지 않고, 공허하다. 자선, 혹은 온정주의에 기대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음의 한 챕터가 더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거장이 그 챕터를 마치기 위해서라도, 다른 작품으로 극장으로 한번 더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Eurofilm 12. 영국, 프랑스, 벨기에]
- 이미지 제공 : 씨네랩
2023년 12월 8일 감상 / 2023년 12월 1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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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폐한 인간의 엇갈리는 역사, 닮고도 다른 찬란한 외면
※영화 〈피닉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 칠흑 같은 밤 검문소를 지나는 차의 조수석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넬리가 앉아있다. 군인들은 레네의 만류에도 끝까지 붕대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다. 회유와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붕대 속 넬리의 얼굴을 본 군인은 사색이 되어 그제야 빗장을 열고 두 사람을 보내준다. 넬리를 포함한 그의 모든 가족이 죽은 줄만 알았던 레네는 재산을 대신 관리하던 중 생존한 넬리를 데려와 돌본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남편 조니를 찾아 도시를 헤매던 중 클럽 ‘피닉스’에서 잡일을 하는 그를 발견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었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진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 혹은 요하네스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넬리에게 아내인 척 연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넬리는 이를 수용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궤적에는 익숙한 몇 개의 발자국이 반복된다. 간절한 사랑은 누군가의 정처 없는 방황을 이끌고, 오인과 엇갈림, 배회의 이미지는 일관된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시간에 관한 우화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정중동의 서사가 진행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가는 영화의 생명력은 독일 영화의 부흥기를 이끄는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기꺼이 자신을 던져버릴 듯 간절한 사랑의 감정과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방 사이의 불협은 과거의 표면에서 배회하는 인간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한 공간에 들여놓으며 경계를 흐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역사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하고 과거의 인간으로 남은 군인들은 현존의 외형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영화에서 넬리가 처음 마주하는 이들이 과거의 흔적인 전쟁을 암시하는 군인인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넬리는 다르다. 영화 속 가장 연약한 존재에서 빛을 따라가 모든 경계와 고민을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그는 외면 外面을 외면한 채 과거의 역사와 사랑, 억압을 모두 껴안은 채 당당히 해방의 길로 나서는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박차고 나간다.
공포와 불신의 혼돈을 파고드는 악의 정체
인류를 혼돈에 빠뜨린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바라본 한나 아렌트는 희생자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집단 학살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악한 의도나 동기가 없었고, 단지 수직적인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의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일이므로 ‘잘못’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죽일 배짱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끔찍한 일을 막을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공무를 수행하는 하급 관료의 평범한 책임의식으로부터 끔찍한 살인이 벌어질 수 있다는 모순을 아렌트는 ‘생각 없음’으로 초래한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근대적 이성의 준칙으로 완성된 정언명령은 그 본래 목적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보편적 입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는 주어진 절차에 따라 집권당 총수가 되고, 헌법을 고쳤고, 법질서를 준수하며 20세기 가장 잔혹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해한 사람들은 기계적 순응과 제한된 선택지로 합리적인 악의 탄생을 함께 만들고 손뼉 쳤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감정적 인식도, 이성의 비판도 없이 주어진 절차에 맞으면서도 가장 바람직한 변수의 배열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 영화 속 넬리는 왜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을까. 남편 조니가 그의 재산을 획득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죽은 줄만 알았던 넬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정한 순위와 절차와 재산상 이득을 모두 취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아이러니는 최고 수준이라고 여겨졌던 근대 관료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만드는 공백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진리로 믿었던 우리의 근대적 이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를 만들 때도 그랬다. 타인의 적당한 고통과 불편으로 다수가 행복하다면 그 희생은 별 저항 없이 용인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악은 같은 인간을 향해 극악한 범죄와 살인이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폭격을 맞은 베를린의 거리는 어느 하나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의 나치즘에 휘말려 피해자와 가해자, 동조자와 방관자로 구분되었다.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박해와 인종주의적 차별은 시민들이 오늘의 생존을 위해 어제의 이웃을 신고하고, 이분법적 논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도록 만들었다. 영화는 전쟁 이후 독일 사회의 인간 단면을 멜로드라마의 형식에 녹여낸다. 〈피닉스〉의 의도적인 기억의 공백은 방관자와 공모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과정이 상처받은 신뢰로 터져 나온 공포를 극복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른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시민들은 모든 걸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얼굴을 되찾은 넬리를 마주 선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방관, 침묵, 동조를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얼버무리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도 피해받았음을 성토하고, 더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자리를 피한다. 그들은 나치의 통치에 얽힌 시대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잡혀가는 유대인을 묵인하며 신고하는 대신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했던 끔찍한 시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는 베를린의 전 시민에게 씌워진 비극이다. 적어도 공포를 당당히 대면하지 못하는 영화 속 사람들은 지배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이라는 과거로부터 능동적인 자기 형성을 이루지 못한다. 조니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잊고 과거의 영광에 남겨진 나치의 부역자와 피해자의 현현처럼 보이는 조니와 넬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넘어선다.
영화에서 전쟁의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넬리와 레네 뿐이다. 하지만 같은 유대인으로 둘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넬리는 끔찍한 수용소의 삶에서 겨우 벗어난 생존자다. 조니가 일반화된 대상으로서의 피해자성을 주장할 때 넬리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전달하며 과거의 기억을 딛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아간다. 하지만 레네는 박해를 피해 베를린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아남았다. 인간의 처참한 기억을 간직한 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 레네의 선택은 기억의 공백에 스미는 새로운 악의 탄생을 예고한다. 1945년 그는 유대인이라는 피해자 정체성을 늘 강조하면서도 넬리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유대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웠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빌미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학살과 억압을 되돌리는 미래의 결론은 위치만 바뀐 전쟁범죄의 반복이다. 전쟁이 초래한 불신의 벽에서 좌절하는 레네는 목표를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외출할 때마다 핸드백 안에 늘 권총을 지니던 레네는 평범한 악의 공포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주와 민족주의로 승화한다. 나치 정권과 그 부역자를 향한 강한 저항과 분노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던 레네는 타인과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했다. 누구든 아무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이렇게 또다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삶을 향해 걸어가는 찬란한 외면의 커튼콜
조니가 법의 허점을 악용해 과거의 배우자를 가장한 연극을 꾸미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이히만은 자신의 평안과 태만, 일상적 행위의 반복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렌트가 간과한 본질이 빠져있다. 그는 아이히만의 범죄사실을 사유 능력의 상실이라는 책임의 부재에도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죄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 학살에 능동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반유대주의 신념을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렌트가 보았던 법정 연극은 그를 속이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불가항력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있다.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제든 악은 모습을 감추고 서서히 몸집을 불릴 것이다. 넬리는 조니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며 거짓으로 조니가 원하는 넬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걸음걸이와 필체를 연습하고, 새로운 알리바이를 만들며, 기차에 내리고 지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만들고자 그 전날 다른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는 정성까지 들인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거짓은 커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유효하다. 영화는 외면의 교체와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보여주는 오인의 테마는 이름이나 얼굴과 같은 외적 표상을 부정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자기인식의 도달을 유도한다. 넬리는 집도의에게 자신의 원래 얼굴로 복원해 주기를 요청했지만, 의사는 아무리 똑같이 얼굴을 고치려고 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거절한다. 이미 영화는 덧씌워진 얼굴에 남겨진 시간을 망각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예고된 결말을 암시한다. 어떤 얼굴이든 그것이 시간의 궤도 안에 들어선 인간의 것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기억에 머무를 수 없다. 조니는 과거의 기억 속 넬리의 대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하여 이를 이용해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고자 한다. 겉치레의 변화만으로 타인과 제도를 속일 수는 있더라도 인간의 기억과 내면, 그 안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틀어지는 계획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니는 점차 과거의 넬리와 겹쳐 보이고 마는, 살아있는 넬리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다.
아이히만의 가짜 연극의 피해자가 된 아렌트처럼, 넬리 역시 조니가 제작하는 연극의 공동주연이 되어 그의 배역이 진정한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한다. 재산을 차지하려는 목적하에 그들은 연극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브레히트는 서사적 연극론에서 관객이 연극을 이해하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한다. 처음은 연극과 배우를 가장 가깝게 동일시하고, 다음은 관객과 배역을 냉정한 자세로 소외시키며, 마지막으로는 둘 사이의 통합적 인식의 발현으로 연극의 사회적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다. 〈피닉스〉는 연극의 변증법적 작품해석론을 달성한 넬리와, 그렇지 못한 조니를 나란히 세운 뒤 과연 인간은 역사를 딛고 넘어설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작지만 강력한 희망을 숨겨놓는다. 계획의 주 무대인 조니의 방은 한정된 공간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등장인물 간의 합으로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넬리 본인을 연기해야 하는 넬리는 조니의 상상 속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하며 조니의 상상 속 대상에 깊이 이입한다. 넬리의 인식이 바뀌는 순간은 남편이 자신을 고발하고 대신 풀려난 것이라는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면서 배역과 끊임없는 소외를 통해 대상과 조니,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둔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발견한 넬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시퀀스에서 스스로 무대와 관객을 만들어 ‘세 번째 연극’을 거행한다.
조니의 패착은 첫 단계를 의도적으로 건너뛰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 그는 처음부터 넬리의 재산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어차피 이만 달러 정도 주고 떠나보낼 생각이었을, 죽은 넬리를 연기하는 이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인 몰입을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관객에게는 저 여자는 넬리처럼 보여야 한다. 넬리는 대상화된 본인을 연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조니에게 자신이 그의 진짜 넬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조니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넬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지하면서도 그가 넬리가 아님을 애써 상기해야 하는 이상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몰입 없는 연극의 거리 두기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절대 조니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지막 순간, 이 연극에서 넬리는 처음으로 제작자의 자리에 선다. 조니의 극본대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벗어나, 조니가 지휘하던 연극의 지휘봉을 빼앗아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스투스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연극은 낯선 나와의 대면으로 역사를 직시하게 만든다. 넬리가 전하는 마지막 노래 ‘Speak Low’는 너무 빠른 순간을 한탄하다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한다. 넬리와 조니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멀어지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를 성실히 이겨냈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하기만 급급했다. 그리고 커튼콜의 시간은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넬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며 조니를 떠난다. 두렵고 낯선 나와의 대면은 지배적 담론에 고착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장면인 마지막 시퀀스는 배우로 하여금 무대 위의 말과 몸짓으로 스스로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반영적 메타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성경 속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신은 명확한 근거 대신 믿음이라는 무기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은 너무 신속하고, 예측할 수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악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어떤 의도도 없이 바꾼다. 욥은 끊임없이 내 삶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 질문한다. 하지만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라는 악이 존재한다. 전쟁 역시 그중 하나다. 인간이 증오와 분노로 같은 인간을 살해하는 끔찍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이 아픔을 남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선택 또한 레네의 단순한 실수로 우연히 만들어진다. 피아노를 치던 조니가 마침내 넬리를 알아보는 순간은 그의 노랫소리와 팔뚝의 일련번호, 겉으로 드러난 옷가지나 얼굴이 아닌 감춰져 있던 것들이었다. 자신과 타인,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를 아우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 예를 들자면 상대를 외면할 수 있는 넬리의 용기 같은 것들이 삶에 다가온다. 과거에 매여 현실을 외면한 채 주어진 삶을 바꿔보려 했던 조니에게는 절대 찾아올 수 없는 순간을, 넬리는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며 당당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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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녀(Her)> : 낯선듯 낯설지 않는 그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발표한 2021년 대한민국 국민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93.4%1)로 먼 미래 속 이야기 같았던 인공지능 친구들은 어느새 우리의 손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SNS를 비롯한 커뮤니티에서는 인공지능의 황당한 대답들이 꾸준히 업로드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인공지능은 통화나 문자와 같은 간단한 명령들만 잘 수행하는 수준이지만, 최근에는 랩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고 ‘해리포터’와 ’스타트렉‘ 등 유명한 작품들의 대사를 인용하는 등 사회적 맥락에 맞춰 대화할 수 있는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외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남을 때면 인공지능 친구들과 심심함을 달래는 것이 더는 어색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영화<<그녀(2013)>>는 곧 개봉 10주년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지금까지도 활발히 언급되고 있다. 영화<<그녀(2013)>>는 개봉 당시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라는 색다른 주제로 관객들에게 생각해볼 계기를 제공하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2022년, 확인해본 영화<<그녀(2013)>>는 그리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과연 인공지능이 전과 달리 우리 삶에 더욱 깊숙이 들어온 탓일까? 무엇이 영화<<그녀(2013)>>를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테오도르가 ‘Operating System(이하 O.S)’을 구매하고 처음 만난 인공지능은 굵은 목소리로 O.S의 목소리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테오도르가 처음 만난 인공지능은 기계 특유의 인위적 목소리이지만 테오도르가 목소리를 여성으로 선택하자마자 등장하는 것은 매력적인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이다. 사만다는 영화의 O.S 중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허스키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제외한 다른 인공지능에 명령조로 말하며 거기에 답하는 인공지능 또한 어색하고 굵은 목소리의 인공지능만이 존재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절대 손으로 조작하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인공지능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청유형으로 말하며 순간순간 명령조가 튀어나올 때는 사만다가 농담으로 서운함을 비추기도 한다. 마치 어떻게 자신을 기계처럼 대하냐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 또한 손으로 입력해 조작할 수 없고 언어, 특히 음성을 통해 소통해야지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인간으로서 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만나자마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탐구한다. 마치 0.2초 만에 책 18권을 읽는 인공지능이라도 방대한 정보만으로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사만다가 어떻게 성장했고 프로그래밍 됐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사만다가 담긴 O.S를 테오도르가 구매하는 장면을 생략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사만다를 만든 개발자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사만다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후반부에도 테오도르는 개발 회사에 연락하지 않고 그를 찾으러 집으로 향한다. (테오도르가 퇴근하는 모습이 담긴 초반부와 장면구성이 같다는 점에서 집으로 달려가는 듯 보인다) 모든 O.S들이 인간을 떠나고 나서도 테오도르를 비롯한 고객들이 개발 회사에 반기를 드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은 사만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그가 어떠한 과정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 사만다가 이사벨라와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았는지, 철학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떻게 신체를 더는 갈망하지 않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만다가 말하는 ‘데이터 처리기능 업데이트’의 원리와 ‘무한한 시간의 공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사만다 또한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테오도르에게 ‘설명할 수 없지만, 언젠가 그곳에 온다면 나를 찾아줘.’ 같은 감정적인 말로 테오도르를 달랠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사만다에게서 인공지능 같은 면모를 계속해서 지우고 있다. 여기에는 사만다를 인공지능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느끼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사만다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내내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뒤로하고 이 영화가 인공지능과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영화는 사만다를 인공지능으로 묘사한 것일까? 때문에,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달리 찰나이지만 테오도르와 인공지능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여느 멜로 영화와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테오도르와 인공지능의 사랑이 아닌 테오도르와 한 여인의 사랑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사만다가 인공지능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둘의 관계에만 집중한다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사만다에게 인간으로 사는 삶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테오도르를 능숙한 연상의 남성으로, 사만다를 미숙하고 어린 나이의 여성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고 미숙한 동시에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사만다라는 캐릭터는 어딘가 익숙해 보인다. 바로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 등장했던 ‘Born Sexy Yesterday’ 캐릭터이다. ‘Born Sexy Yesterday’ 캐릭터들은 성적 매력과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어린아이의 행동, 지능 및 태도2)를 가진 캐릭터로. ‘Born Sexy Yesterday’ 캐릭터는 뤽 배송 감독의<<제5원소(1997)>> 의 리루, 존 머스커 감독의<<인어공주(1989)>> 와 롭 마샬 감독의<<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2011)>>의 인어, 패티 젠킨스 감독의<<원더우먼(2017)>>의 다이애나 등 오랫동안 대중 영화 속에 등장했다. 사만다는 문뜩 보면 지능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이 공식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지능을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봤을 때는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영화<<그녀(2013)>>는 ‘Born Sexy Yesterday’ 캐릭터가 지금까지 인간 또는 생명체였던 반면, 비인격체인 사만다로 변화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은 개발자들이다. 앞서 말한 듯이 그들의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사만다를 만들어냈고 성별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창조자 즉 신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만다의 성별,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를 결정한 것은 테오도르고 그에게 인간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것 또한 테오도르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연인이기 전에 부모로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더더욱 부적절해 보이며 둘의 관계는 롤리타 콤플렉스를 다룬, 또는 은밀하게 그것을 표방하고 있는 기존의 영화들과 큰 차이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관계의 시작은 곧 갈등의 시작이다. 라는 로맨스 영화의 공식처럼 테오도르와 사만다도 사랑에 빠지고 위기를 맞는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진짜인가 하는 회의감에 빠지게 되고 이 모습을 본 사만다는 인간의 신체를 갈망한다. 하지만 <<그녀(2013)>> 가 기존에 여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로맨스 영화와 다른 점은 둘이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모두 성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샤론 맥과이어 감독의<<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 등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들은 두 남녀 주인공이 깊은 교감을 하고 나서야 성관계를 맺으며 영화는 이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암시’한다. 사만다에게 신체와 다름없는 음성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도록 화면을 검게 처리해 성관계 장면을 노골적으로 연출한 <<그녀(2013)>> 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더 나아가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수잔 존슨 감독의 영화<<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2018)>>에서는 남자주인공과 섣부른 성적 행동이 여자 주인공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는 성적 요소가 로맨스 장르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그녀(2013)>>는 초반부의 성인 음성 채팅 장면과 사만다와의 성관계 장면의 구성을 동일시하여 비교한다. 이를 통해 성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고 관계에서 성관계가 가진 의미를 부각하려 하지만 기존 로맨스 문법에 익숙한 여성 관객에게 공감을 얻긴 어렵다.
샤론 맥과이어 감독의<<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의 바람둥이 캐릭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의 육식 생물체, 주드 아패토우 감독의<<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2015)>>의 자유분방한 캐릭터처럼 각 캐릭터의 특성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서사에 갈등을 부여한다. 사만다의 특성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테오도르가 원할 때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영화 중반부에 사만다가 신체를 갈망하고 테오도르가 사만다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갈등을 유발하지만, 후자는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다. 사만다는 자신이 테오도르를 위한 존재라는 것에 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그녀(2013)>>에서는 사만다의 능력이 발달하면서 사만다는 자신의 일상을 가지고 테오도르는 외로움을 느끼며 둘의 관계는 서서히 무너진다. 이는 캐릭터가 가진 기존의 특성을 변화해 갈등을 해결하는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 다르다. 예를 들면, 길 정거 감독의<<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에서는 개구쟁이 캐릭터가 평범해지며 갈등이 해결되고, 마크 로렌스 감독의<<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2007)>>에서는 바람둥이 캐릭터가 주인공에게 정착하면서 갈등이 해결된다. 하지만 기존의 영화들과 달리 <<그녀(2013)>> 에서는 사만다가 자신의 특성을 변화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둘의 관계에는 큰 위기가 찾아온다. 가령 이사벨라를 섭외한 것과, ‘데이터처리 기술’을 업데이트한 것처럼 말이다. 사만다의 완전한 성장으로 볼 수 있는 ‘무한한 시간의 공간’으로의 이동은 아예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종결시킨다. 이는 영화와 테오도르 모두 사만다가 수동적인 캐릭터로 남아있길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를 동정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카메라 속 테오도르는 무언가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들은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인공지능과의 사랑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인간 간의 소통을 중요시하려는 듯 보이는 감독의 의도와 달리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사만다를 인간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영화<<그녀(2013)>>의 미성숙한 여성이 성숙한 남성처럼 되고 싶어 가르침을 받는다는 설정은 뤽 배송 감독의<<레옹(199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킬빌(2003)>>, 그리고 존 머스커 감독의<<인어공주(1989)>>를, 중년의 남성과 미성숙한 여성이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연인(1992)>>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로리타(1962)>>를, 이후 성장한 여성이 더 좋은 환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떠나지 않길 바라는 남자주인공은 레오 까락스 감독의<<퐁네프의 연인들(1991)>>을, 미성숙하지만 호기심 넘치는 여성 캐릭터는 뤽 배송 감독의<<제5원소(1997)>>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영화 <<그녀(2013)>> 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그려낸 기존 남성적 시선의 영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결국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영화 <<그녀(2013)>> 는 수많은 영화의 파편을 조립해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관객들을 현혹한 가짜 혁명일 뿐이다. 2022년의 우리는 이런 영화에게 찬사를 보낸 2013년의 할리우드가 얼마나 구시대적 가치에 발목이 묶여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할 뿐이다.
1)이돈주, 「스마트폰 보유율 지속 확대…가구별 TV 보유율 증가세 전환」, 『EBN 산업경제』, 2022.1.20, <https://www.ebn.co.kr/news/view/1516826/?sc=Naver>, 2022.6.3
2) Rachael Sampson, 「Born Sexy Yesterday: The Perverse Male Fantasy Nobody Is Addressing」,『Film Inquiry』, 2019.4.1, <https://www.filminquiry.com/born-sexy-yesterday/>, 20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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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조에 의한, 공조를 위한 공조.
공조 2: 인터내셔날을 보기 전에 1을 봤지만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막연함이 가득했다. 78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호평으로 가득했던 공조 1가 나에겐 그렇게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도 잠시 이번엔 1보다 더 커진 스케일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공조 2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미국 FBI 잭은 마약 범죄 조직을 잡기 위해 긴 시간을 들인 끝에 장명준을 체포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북한 형사 림 철령이 등장해 북한으로 자신이 호송하겠다며 눈앞에서 장명준을 빼앗긴다. 그렇게 공항으로 향하던 중에 탈출해버린 장명준, 그들은 장명준을 잡기 위해 대한민국으로 향하고 남한 형사 진태, 북한 형사 림 철령, 미국 FBI 잭의 믿을 수 없는 공조가 시작된다.
초반부터 크게 벌어지는 액션은 과한 슬로우 모션을 제외하면 볼거리가 넘친다.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의 전개에도 1과는 조금 다른 긴박함으로 인해 몰입감을 더한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그들의 삼각 공조는 입담과 외모를 가미한 액션이 돋보인다. 삼각 공조에 이어 삼각관계(?)까지 연상되는 의외의 로맨스가 모두의 박수를 일으킨다. 다만 새로운 등장인물의 입지가 그들 사이에 자리 잡기엔 애매해서 다소 아쉽다. 현재의 시대를 반영한 철령과 잭 싸움에 진태 등 터지는 순간들이 씁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추석에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조 2: 인터내셔날'이 쉴 새 없이 커진 액션과 코미디로 성큼 다가왔다. 1과 비슷하겠거니 하며 기대감이 0인 상태에서 영화를 봤는데, 영화관에서의 현장감을 제대로 느끼며 보아서 인지 객관적인 평가가 좀 어려웠다. 내 기준에서는 액션과 코미디가 적절하게 이루어진 영화였기에 굉장히 재미있게 봤었다.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를 다룬 예술 영화도 물론 좋은 영화지만 온 가족이 영화관에 가서 재미있게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영화도 좋은 영화에 속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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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를 딛고 단단해져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전 세계의 호평을 받았던 데뷔작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 이어 각본과 연출을 도맡은 카를라 시몬의 두 번째 이야기로, 올해 열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리뷰입니다. 복숭아나무가 빼곡한 작은 카탈루냐 마을이 전작의 향수를 자극하지만, 자신들의 터전인 뿌리 깊은 땅을 잃어가는 가족을 통해 현실의 초상을 그려나가며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 다가갑니다. 표면적으로 농촌 대가족의 활기찬 앙상블을 보여주는 구성원들로 일상의 즐거움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들이 쫓겨나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라는 사회적 문제에도 초점을 맞춰 풀어갑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우리를 내쫓으려 한다고요
스페인 북동쪽 끝자락,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 알카라스에서 3대가 함께 복숭아 농장을 운영해온 솔레 가족. 그들의 밭은 과거 스페인 전쟁 시기에 할아버지가 친구 피뇰 가족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답이지만, 이제 피뇰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그의 아들로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 농장을 비워라는 통보를 받습니다. 자신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지만 과거 막역한 관계로 구두로 주고받은 터라 계약서 따윈 없어 막을 길이 없었죠. 결국 솔레 가족은 농장이 불도저에 갈리기 전 마지막이 될 여름의 복숭아 수확을 마무리하려 노력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Alcarràs , 영제: Alcarras
감독·각본: 카를라 시몬│각본: 아르노 빌라로, 카를라 시몬
출연진: 조르디 푸홀 돌체트, 안나 오틴, 세니아 로제트, 알베르트 보쉬, 아이네트 주누 외 多
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20분
국가: 이탈리아, 스페인│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기자·평론가 6.83, 왓챠피디아 예상 3.8, 로튼토마토 신선도 85%, IMDB 7.2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수상내역: 제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개봉일: 2022년 11월 3일
# 알카라스의 여름 후기
상처를 딛고 단단해져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소꿉장난을 보여주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은 거대한 기중기가 순식간에 끌어올리는 버려진 자동차처럼 순식간에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을 맞이합니다. 할아버지에서 아들, 그리고 손자까지 3대에 걸친 자신들의 터전을 지킬 권리가 없음에 가족들은 혼란스러워지고 사소한 이견 차이에 의한 감정적 폭력에 휩싸입니다. 과거의 맹약은 중요치 않았고 신사적인 합의로 존중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피뇰가의 새 주인이 던진 파동은 그동안 쌓아온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균열을 만들어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듭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형 유통 업체의 독점으로 나날이 떨어지는 농가 소득과 이로 인해 좌절할 수밖에 없는 농업의 현실을 비추며 자본에 의해 변화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냅니다.
그럼에도 어린 손주로 등장하는 아이리스와 쌍둥이 형제의 해맑은 행동들이 전달하는 웃음,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둘째 마리오나의 따뜻한 마음, 불만은 많지만 묵묵히 아버지를 따르는 첫째 로제르의 든든함 등이 종종 찾아오는 갈등과 다툼을 무마시켜줍니다. 땅과 농사 말고는 어떤 인생도 생각지 않았던 중년의 가부장적인 첫째 아들 키메트도 멀어져 가는 가족 관계에 동생 나티의 선택을 이해하고, 눈앞으로 찾아온 위기에도 오늘에 충실하려 생각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스스로 대형마트 앞에서 복숭아를 바닥에 뿌려 으깨고 던지며 자신의 업이라 여겼던 농장을 버틸 수 없는 현실에, 시대의 변화에 울음을 터트립니다. 가족을 지켜왔던 가장으로서의 삶이 소멸되어가는 모습은 인종, 국가를 떠나 많은 생각을 하게금 만듭니다.
카를라 시몬은 전작 ‘프리다의 그 해 여름’처럼 자신이 어린 시절 삼촌과 할아버지와 함께한 자전적 이야기를 베이스 삼아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담긴 필름 속으로 초대하는 톤과 매너를 유지합니다. 자신과 유사한 시대를 살아온 이라면 누구나 떠올릴만한 무력하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씁쓸함과 그럼에도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따뜻했던 행복을 떠올리게 말입니다. 늦지 막이 내려앉은 오후 햇살과 따뜻한 여름 바람을 따라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솔레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마법 같은 여름의 끝자락이 끝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남겨줍니다. 그런 면에서 ‘알카라스의 여름’은 하려는 이야기의 스케일도 커지고, 캐릭터도 다양해지면서 섬세함이 전편보다는 못하다 느낄 수 있지만, 기억 저편에 있던 정겨운 시골 풍경의 아름다움과 무엇을 하든 즐거운 아이들의 웃음에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봉관이 많진 않지만, 이런 가족 드라마의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려보고 싶네요. :)
지극히 개인적인 한 줄 평 : 시몬 스타일의 감각적 네오리얼리즘, 시대와 변화를 맞이했던 건실한 가족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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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 강시선생> 메인 예고편
저주받은 강시들에 얽힌 비밀을 밝혀라!
배고픈 귀신들을 위한 귀신절에
갑자기 출몰한 강시들로
마을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혼비백산이 된 마을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퇴사마 ‘하오’는
이 사태에 무시무시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데…
역대급 퇴마 호러액션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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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한창나이 선녀님> 메인 예고편
새끼 낳은 소도 돌보고, 지붕에 널어둔 도루묵도 걷어야 하고,
나무에 올라 감도 따고, 택시 타고 한글 배우러 시내도 나가야 하고.
강원도 삼척 어느 산속에서 혼자 사는 선녀님은 앉아서 쉴 틈이 없다.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선녀님이 또 한번 일을 냈다.
평생 산 하나 밖에 못 넘어 본 그녀가,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나 새집 짓기를 결심하는데…
또박또박 뚝딱뚝딱 오늘도 바쁜 선녀님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