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2 17:35:40
좋긴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초기 무성영화
<바이올렛 에버가든 오케스트라 콘서트 2021> REVIEW
필자가 영화지만 영화로 취급하기 싫은 영화가 몇가지 있다. 이 중에는 마블 영화, 에로 영화 등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뮤지컬 & 오케스트라 실황이다. 왜냐하면 본질을 따져보면, 단순히 기록의 성격이 컸던 1890~1910년대 무성영화들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초기 무성영화가 현재에 와서도 가치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당시의 기술력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기에, 현대 영화의 기틀이 되는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똑같이 카메라로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찍는다고, 1896년의 "열차의 도착"과 똑같은 평을 받을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음악과 중간에 실제 성우가 출연해 작품을 훑어보는 듯한 연출도 오케스트라의 연출일 뿐, 본 영화의 연출은 아니다. 원론적으로 따져보면 단순히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것을 찍은 "열차의 도착"이랑 다를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히 필자가 노래방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찍어 상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 그대로 기록해서 트는 것 뿐이니! 여기에 소리와 컬러가 추가된 것일 뿐. 다만 그나마 나은 점은, 화질이 일부 노이즈가 존재하지만, 사운드는 잘 기록되어 기록 영상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편이다. 이 영화의 최대 가치는 바로 "기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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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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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 매치업] <레토> VS <비긴 어게인>
- [무비 매치업 Movie Match-Up]:
[무비 매치업]에서는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비슷하지 않은 듯 비슷한 두 영화 혹은 어디를 하나 보더라도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비교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 영화가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여 그 속에 숨겨진 의미까지 낱낱히 파헤쳐 본다.어느 여름, 해가 지고 익숙한 도시를 거닐 때에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니 그 곳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누군가가 서 있다. 푸른 눈의 남자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장발의 한 남자, 오합지졸의 밴드 사이에서 웃고 있는 한 여자. 그 시간에 그 곳에 있어서 일까. 이들의 노래는 내가 평소에 들었던 무언가와는 유독 다르게 느껴진다. 이번 [무비 매치업]에서는 다른 시간과 다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그리고 영화에 담긴, 시간과 도시의 이야기. 그것을 하나로 이끌고 채우는 음악을 중심으로 글을 준비했다. 지금부터 완전히 달라 보이는 음악 영화 두 편 <레토>와 <비긴 어게인>에 담긴 특별한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레토 Лето>
#여름과 영화- 영화: 레토 (2018)
-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 출연진: 유태오, 로만 빌릭,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外1980년대 초 소련의 한 해변, 기타를 멘 두 남자가 즐거워 보이는 젊은 무리로 향한다. 두 남자의 이름은 ‘료나 (필리프 아브데예프 分)’와 ‘빅토르 (유태오 分)’. 그들은 ‘펑크’의 소개를 받고 왔다며 유명 락밴드 ‘주파르크’의 멤버 ‘마이크 (로만 빌릭 分)’와 그의 무리에게 자신들을 소개한다. 처음보는 그들에게 던져지는 조롱 섞인 농담들. 그러나 빅토르와 료나의 짧은 노래는 금새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어느덧 완전히 섞인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빅토르와 마이크의 아내 ‘나탈리야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分)’는 남다른 눈빛을 주고 받는다.새로운 밴드의 재능에 반한 마이크는 그들에게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그렇게 가린과 쌍곡선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된 마이크. 가린과 쌍곡선의 공연이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열리도록 담당자를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이크의 도움과는 별개로, 빅토르와 마이크가 갖는 음악적 지향점은 점점 더 극과 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나탈리야와 빅토르의 가까워진 관계는 마이크의 신경을 조금씩 건드린다.어느덧 공연 날, 주파르크의 무대 바로 다음 순서로 가린과 쌍곡선이 올라온다. 그러나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신생 밴드의 연주에 관객들의 반응은 좋지 못하다. 보다 못한 마이크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무대에 올라와 그들과 함께 연주한다. 그렇게 공연을 무사히 마쳤지만, 나탈리야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빅토르임을 알게 된 마이크는 약속이 있는 척, 그들을 두고 자리를 비킨다.그날 밤, 마이크와 나탈리아 부부의 아파트에는 마이크 대신, 빅토르가 머물게 된다. 그렇게 누구도 막지 않는 빅토르와 나탈리야의 관계는 점점 더 끝을 향해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으니, 죄책감도 쉽게 몰려온 것일까. 나탈리야는 빅토르를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힘들며 마이크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빅토르 역시 그녀의 이야기에 수긍하며 짧지 않았던 그들은 서로를 보내준다.시간이 지나, 가린과 쌍곡선은 레토가 되었고, 하락세인 마이크의 인기와 반대로 빅토르는 소련의 슈퍼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나탈리야를 찾아와 자신의 공연에 초대한다. 밤이 된 레닌그라드 록 클럽,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가득 찼다. 그러나 왜인지 노래를 시작하지 않는 빅토르. 그 순간, 손을 잡고 들어오는 마이크와 나탈리야. 그들을 본 빅토르는 노래를 시작하며, 영화는 끝난다.#억압과 자유"날 건드리지 마 폭발 직전이니까"<'Psycho Killer'>
- Alexander Gorchilin & GSH
-원곡: 토킹 헤즈 Talking Heads
https://www.youtube.com/watch?v=uN2s_aLQn28레토의 시간은 억압과 자유의 시간이다. 종교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만개하듯, 음악도 그러했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초 소련은 냉전 시기가 한창이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에게 록 음악은 자본주의에 찌든 부르주아적이고 부패한 적국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저물어가는 전세계적인 흐름에서도 여전히 피와 투쟁만을 외치는 사람들. 그 외침에 평생을 시달린 것은 소련의 젊은이들이었다.그런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의 록 음악이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노래하는 젊은 밴드들의 집에는 ‘AC/DC’, ‘데이비드 보위’, ‘티렉스 와 같은 록과 펑크 가수들의 LP판이 가득했고 이러한 흐름은 소련의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욕망에 대한 가감 없는 표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기존에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주제와 이야기는 ‘소비에트 록’ 더 나아가, ‘레닌그라드 록’을 탄생시켰다.#레닌그라드와 음악영화는 1980년 초, 소련의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록 음악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는 레닌그라드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등장한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레닌그라드 안에서 강하게 숨쉬며 살아간다."혜성이 오고 있다고, 여름"<바닷가- 'Summer'>
- Zveri춤추고 노래하는 젊은이들과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가. 이 곳은 아마 레닌그라드의 주변 도시인 ‘세스트로레츠’의 바닷가일 것이다. 이 해변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여름’이다. 영화의 테마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영화 초반, 빅토르를 만나기 전 바닷가에서 마이크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이다. 영화의 제목임과 동시에 노래의 제목, 그리고 여름을 의미하는 단어인 ‘레토’는 노래 내내 반복된다. 춤추는 젊은이들과 마이크의 웃음, 그리고 그의 연인 나탈리야까지. 빅토르는 분명 주인공이며 그의 삶은 아름다워 보인다.하지만 노래가 끝나고 빅토르가 등장하자마자, 영화와 인물들 모두의 초점은 빅토르에게 맞춰진다. 심지어 그녀의 연인 나탈리야까지도. 마이크의 삶에 빅토르는 친구이자 경쟁자가 되었고 마이크의 삶은 예전처럼 즐거울 수는 없게 된다. 바닷가와 노래 ‘여름’은 마이크의 뜨거웠던 마지막 행복을 의미한다. 아무런 걱정이나 불안 없이, 음악적으로나 사랑으로나 완벽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고 춤추며 노래하던 그의 자유롭고 즐거웠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나는 승객. 차를 타고 또 타고"<도로- 'Passenger'>
-Anton Sevidov
-원곡: Iggy Pop
https://youtu.be/yRfZ4hvI4DU?si=1PbD00qI7JfY6Kn4상점에서 유명 가수들의 앨범 그림을 팔고 있는 빅토르. 그리고 그를 찾아온 나탈리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탈리야는 마이크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줘야 한다며 자리를 떠나려고 한다. 그러자 함께 가자는 빅토르. 마이크가 좋아하는 커피를 가져다주기 위해 커피잔까지 구해, 마이크의 직장으로 가는 그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너무나 즐거워보인다. 이들의 목적이 마이크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그들을 위한 것인지 잠시 까먹을 정도이다. 빅토르와 나탈리야가 버스에 타자 ‘이기 팝’의 ‘Passenger’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옆에 있는 노신사가 노래를 부른다.빅토르와 나탈리야를 빼고 일제히 노래를 부르는 승객들. 정거장을 놓쳤다는 빅토르의 말에도 승객들은 차에서 내리지 말고, 우리는 승객이 되어야 한다며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버스의 윗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버리는 빅토르. 버스 위를 사뿐 사뿐 밟고, 다시 내려와 버스의 앞문을 열어버린다. 부끄러운 줄 알라는 시민의 말을 뒤로 한 채 빅토르와 나탈리야는 버스에서 내려, 자신들만의 길을 간다. 인형처럼 우리는 승객일 뿐이라고 노래하는 버스의 승객들. 그들은 그들만의 의지를 상실하고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승객들과는 대조적으로, 목표를 위해서라면 없던 길과 문까지 만드는 빅토르와 나탈리야. 금기의 사랑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자유와 주체성이 노래와 비교되며 강조된다."이렇게 완벽한 날, 계속 곁에 있어줘요"<거리- 'Perfect day'>
-Elena Koreneva, Anton Sevidov
-원곡: Lou Reed
https://youtu.be/sp9dFJlmgOI?si=SRN2K3gIsY-o36VA나탈리야가 가져온 커피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씁쓸함, 몰래 토마토를 나눠먹는 빅토르와 나탈리야의 웃음은 마이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점점 시려오는 마이크의 마음. 여름의 뜨거운 열기마저 마이크의 마음에 따뜻함을 가져오지 못했다. 가린과 쌍곡선의 첫 공연이 끝나고, 마이크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타샤에게 먼저 들어가라 말한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 빅토르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마이크는 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그저 비 오는 밤, 전화 부스에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그는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여인에게 자리를 내준다. 동전을 빌려달라는 여인의 말에 동전까지 건네주는 마이크. 여인에게 향한 그의 조건 없는 베풂은 마치, 빅토르에 대한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는 듯하다. 물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사랑하는 애인마저 빼앗겼지만 말이다. 노인은 마이크를 향해 노래한다. 이렇게 완벽한 날, 내 곁에 있어달라고, 그러나 마이크는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이 날은 완벽한 날도 아니었으며, 곁에 있어달라고 말할 누군가도 없기에."난 알아 내 나무가 이 도시에서 죽는다는 걸."<레닌그라드 록 클럽-‘ 'The Tree’>
-Petr Pogodaev, Petr Tishkov, Zveri
https://youtu.be/wNuBq5dmFVo?si=0MvK7yt3xaW1tY7V빅토르와 그의 밴드는 자신들이 처음 공연했던 그 곳, 자신들이 탄생했던 그 곳 ‘레닌그라드 록 클럽’으로 돌아온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키노 (Кино)’라는 이름을 달고 말이다. 그들의 인기는 레닌그라드를 넘어 소련 전체에서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의 잊지 않았다. 그를 있게 해준 그 도시, 그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도시, 레닌그라드를 말이다.수많은 도시와 휘황찬란한 공연장을 가봤을 그이지만, 초라해 보이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 갖는 의미는 그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관중들, 그러나 그가 찾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 마이크와 나탈리야. 결국 오지 않는 그들을 뒤로하고 노래를 시작하려는 그 때, 손을 맞잡은 마이크와 나탈리야가 들어온다. 세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야 빅토르는 노래한다. 그의 나무는 이 도시에서 죽을 것이라고.#다시 돌아올거야
"이 여름도 곧 끝이 나겠지"<'Summer Will Be Over Soon'>
-KINO영화는 고려인 출신 소련의 슈퍼스타 록 가수 ‘빅토르 초이’의 전기영화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영화는 빅토르 한 명이 아닌, 두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 인물은 빅토르, 그리고 마이크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지지하는 동료 사이에서 갖는 그의 개인적 고뇌는 레토의 또 다른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마이크 (마이크 나우멘코)는 빅토르가 1991년 사망하고, 바로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그는 생애 후반, 빅토르에게 인기를 상당 부분 넘겨주게 되지만, 마이크 역시 훌륭한 재능이었고 당대를 빛낸 스타였다. 이처럼 짧은 시기, 두 재능을 잃은 소련의 음악계는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음악적 지향점이나, 사상적으로나, 그리고 사랑이나, 끊임없이 엇갈렸던 빅토르와 마이크의 대립은 영화 내내 흥미진진한 요소였다. 그들은 자유를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달랐다. 정면돌파를 통해 쟁취한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빅토르와, 주변을 챙기고 돌아보며 모두와 함께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던 마이크. 그들의 미묘한 차이는 작품에서 느껴진다.<레토>는 흑백영화이지만, 다양한 편집과 연출들로 보는 재미가 있다. 중요한 장면 속 노래들과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와 같은 연출. 거기서 오는 펑키한 편집과 흑백 배경과 대조되어 더욱 튀는 갖가지 색들. 꿈과 상상처럼 표현한 자유에 대한 욕구. 그리고 이러한 욕구가 불러일으킨 상상과 현실의 간극을 리마인드시키는 ‘회의론자’라는 이름의 관찰자 캐릭터. 이것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연극, 광고 아니면 또 다른 작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이처럼 레토에서만 볼 수 있는 재치 있고 세련된 요소들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눈부신 재능에서 온 것이다. 가진 것 없던 이방인이 거둔 꿈만 같은 성공과 짧지만 강렬했던 삶. 영화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키노’처럼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여름은 끝이 났지만, 다시 찾아온다. 뜨거웠던 그때 그 여름처럼 잊혀지지 않고 찾아올 영화 ‘레토’였다.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젊음과 희망- 영화 : 비긴 어게인 (2014)
- 감독 : 존 카니
- 출연진 :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애덤 르빈 外뉴욕의 한 바, 그 곳에서 ‘그레타 (키이라 나이틀리 分)’가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댄 (마크 러팔로 分)’만이 숨겨진 재능을 알아본다. 그레타에게 다가가 자신이 유명한 프로듀서라고 소개하는 댄. 그러나, 볼품 없고 허세 부리는 듯한 그의 모습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댄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레타는 결국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사실 그레타와 댄은 비슷한 처지였다.남자친구 ‘데이브 (에덤 르빈 分)’를 따라 뉴욕에 오게 된 그레타. 그레타처럼 무명 가수였던 데이브는 그의 노래가 영화에 삽입되며 한 순간에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행복할 것 같았던 그들. 그러나 데이브가 LA 출장을 다녀왔고 자신이 만든 노래 “A Higher Place”를 들려준다. 그 노래를 듣자마자, 그레타는 데이브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결국 그들은 이별한다. 성공한 음악 프로듀서였던 댄 역시도 아내 ‘미리엄 (캐서린 키너 分)’의 불륜으로 결국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 문제까지 앓고 있는 그야말로 나락에 떨어진 상태였다.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댄과 그레타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앨범의 컨셉은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뉴욕을 돌아다니며 야외녹음을 하는 것이었다. 앨범을 만들면서, 댄은 그의 딸 ‘바이올렛 (헤일리 스테인펠드 分)’와 화해했고, 그레타 역시 과거를 잊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다. 그들의 앨범은 뛰어난 완성도로 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댄과 그레타는 점점 가까워졌지만 더 나아가지 않고,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짧은 포옹을 끝으로 헤어진다.시간이 지나, 그레타의 노래를 들은 데이브. 그는 그녀에게 사과하며 공연장에 찾아와달라 부탁하게 된다. 고민을 하다 데이브의 공연장에 간 그녀. 공연에서 데이브는 그레타를 바라보며 그녀가 선물해준 ‘Lost Stars’를 원곡의 버전으로 부르지만, 이내 대중들이 좋아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그 모습을 지켜 본 그레타는 결국, 공연장을 떠난다. 그리고 그레타는 댄과 보낸 시간의 상징인 듀얼잭을 돌려주며 그동안의 시간을 정리한다. 댄은 이 듀얼잭을 통해 아내, 미리엄과 다시 화해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댄의 아파트에 찾아온 그레타. 그녀는 앨범을 인터넷에 올리고 싶다고 말하고, 그 결정을 댄은 존중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찬란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들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실패와 도전
"우린 길 잃은 별인가요"<'Lost Stars'>
-Keira Knightley
https://youtu.be/3RPkTAMNvSY?si=CdfSlP0DYHz84n6U<레토>의 시간이 억압과 자유의 시간이라면, <비긴 어게인>의 시간은 실패와 도전의 시간이다. 연인과 꿈 모두를 잃고 떠나려던 그레타에게 댄은 거칠지만 진심이 담긴 손을 내밀었다. 댄이 데이타에게 향했을 때, 그들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댄이 먼저 손을 건넸을 뿐, 그레타가 용기를 내어 그 손을 잡아주었기에 그들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고 누구보다 서로를 위했다. 가장 뜨거웠던 사랑을 잃어버렸던 그레타와 댄. 그들은 사랑과 함께, 꿈과 희망마저 잃어버렸다. 완전히 추락해버렸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도전은 불가능해 보였다.그러나 그들은 음악을 통해, 그리고 서로를 통해 위로 받았고 도전했다. 길 잃은 두 별은 어둠 속에서 다시 용기를 내었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른 별들과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가시밭길을 지나자, 새로운 길이 보였다.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주저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함께하는 별이 그 여정동안 함께 빛나주었기에 그들은 그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밝게 빛났다.#뉴욕과 음악
비긴 어게인은 음악 영화이기도 하지만, 음악과 함께 뉴욕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레타와 댄은 자연스러운 뉴욕의 소리를 앨범에 담기 위해, 골목과 차도, 건물 옥상 등 다양한 곳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뉴욕의 모든 것을 담은 앨범, 그리고 영화는 특별했다."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나."<바- 'A Step You Can’t Take Back'>
-Keira Knightley
https://youtu.be/--byHxoPRwQ?si=cclo6k6O9utkl2pp그레타와 댄이 처음 만난 뉴욕의 작은 바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댄. 그런 그에게 들려오는 그레타의 노래. 통기타 하나를연주하며 진솔하게 노래하는 그녀는 댄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댄에게는 그녀의 뒤에서 저절로 연주되는 악기들이 보였다. 그녀에게 조금의 도움만 있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도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함께 앨범을 만들자고.댄의 허름한 모습을 보고 프로듀서가 맞는지 의심하며, 무례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그레타. 하지만 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집착에 가까운 제안에 그레타는 결국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그들의 음악색은 영 맞지 않는다. 그레타는 음악성을, 댄은 대중성이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인연은 성사되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는 길만 달랐지, 결국 댄과 그레타의 진정성은 같았다.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정말 마지막이 될 한걸음을 내딛었다."내 인생도 이제 풀리기 시작했거든."<골목 -' Coming Up Roses'>
-Keira Knightley
https://youtu.be/K6wiDpf5ogk?si=oPCbIWv3Tu41BNNf다양한 곳에서 밴드의 구성원들을 모아온 댄과 그레타. 그들은 뉴욕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잘 담기 위해, 여러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뉴욕의 한 골목, 쓰레기통과 낙서 가득한 벽 옆에 그들은 악기를 설치했다. 댄과 그레타의 절실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구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댄은 그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모두 음악에 사용하기로 한다. 이 모든 소음이 하나의 음악이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고함 소리 모두 음악에 고스란히 들려온다. 그러나 그레타가 노래를 시작하고,내 인생도 이제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하자, 걱정거리였던 소음들은 모두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순탄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레타와 댄을 괴롭히던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들. 이것들은 골목의 소음들과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했을 때의 소음은 그들을 무너지게 할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악기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하니, 소음은 그저 그레타와 댄이라는 사람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것들이 되었다."그대여, 돌아갈 건지 말해줘."<옥상-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Keira Knightley
https://youtu.be/Tk1G5DVWRp8?si=DjosSlx3JhPxaagX골목에서의 녹음을 끝낸 그들의 다음 장소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엠파이어 빌딩이 보이는 높은 건물. 밤이 되자 그들이 준비한 조명이 반짝였다. 이번 녹음에는 특별한 이가 함께했다. 바로 댄의 딸 바이올렛이다. 준비가 되면 시작하라며 긴장을 풀어주는 아빠, 댄. 댄도 이 날은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다. 노래가 시작되자, 천천히 일어나 무대로 나오는 바이올렛. 딸이 연주하는 리드 기타와 아빠가 연주하는 베이스 기타.오해와 갈등을 끝내고 완전히 하나가 된 이들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보아도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다시 돌아갈 것인지 말해달라는 노래 가사에, 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과 고통을 혼자만 감내했던 댄. 그는 이 슬픔과 고통을 넣어두고 딸 바이올렛과 화해했으며, 좋은 아빠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아내 미리엄과도 화해한다. 그렇게 가족과 집으로 돌아간 댄.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그레타. 아마 이 노래는 댄과 그레타의 관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있어 ‘끝’이라는 대답이다."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들었지."<공연장- 'Lost Stars'>
-Adam Levine
https://youtu.be/5U-JroWwFkw?si=TNdT4X1SK6yZ0QAY댄과의 인연을 끝내고, 데이브의 공연장에 찾아온 그레타. 그녀가 공연장에 찾아오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그녀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데이브. 데이브는 그레타가 선물했던 ‘Lost Stars’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레타가 선물한 그때 그 발라드 버전으로 부르는 노래. 그레타 역시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러나 2절이 시작되자 데이브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발라드가 아닌 자신만의 빠르고 신나는 버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의 곡과 변해버린 데이브. 결국, 그레타는 공연장을 떠나고, 데이브는 그레타가 떠난 자리를 허무하게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이 가득 찬 공연장. 모든 사람들이 데이브를 보기 위해 모였다.하지만 데이브는 그레타만이 신경 쓰인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처럼 수염 없는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브. 영화 속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나는 데이브의 수염은 점점 인기를 얻고 변해가는 그의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데이브가 마지막 장면이 되어서, 원래 모습처럼 깔끔하게 면도했다는 것은 그레타와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겉만 돌아왔지, 데이브는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레타와 데이브가 부른 완전히 다른 버전의 ‘Lost Stars’처럼 그들은 너무나 달라졌다. 그레타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데이브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그녀는 떠났다.#사랑을 말하지 않아도"그래도 난 널 사랑해왔어"
-Keira Knightley
https://youtu.be/KvZLvJc_ry8?si=8j6tSWjgSRZhzaP_영화는 결국, 음악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감독은 댄과 그레타에게 사랑의 정서를 입히지 않는다. 분명 둘 중 한명이라도 조금만 더 다가갔으면 그들은 연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그러지 않았다. 결국, 댄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그레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영화는 끝난다. 실제로 댄과 그레타의 키스신도 존재했으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사라졌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애틋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존 카니’ 감독이 직접 영화를 만들었던 누구도 그들의 키스신을 바라지 않았고, 이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둘이 이어지는 것은 작품의 의미와는 맞지 않았다. 댄과 그레타가 서로를 아꼈고 사랑했기에 더 나아가지 않고 멈췄다는 것이다. 댄은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그레타는 새로운 사랑을 하기를 그 둘은 바랬을 것이다.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첫사랑과 같은 둘의 관계는 바보 같지만 아름다웠다. <원스>와 <싱 스트리트>처럼 음악을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존 카니답게 <비긴 어게인>역시 음악 자체나 음악과 영화 속 장면의 조화는 더할 나위 없었다. 원스나 싱 스트리트보다 등장인물의 정서를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고 영화의 톤 역시도 어둡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던 영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주제마저 가벼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레타와 댄의 정서를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이야기의 흐름도 억지 없이 논리적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이를 통한 결말은 현실적이었고 이해도 갔다. ‘그래도 난 사랑해왔어’라는 노래 가사처럼 댄과 그레타는 말은 하지 않았도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할 가치가 있는 영화 ‘비긴어게인’이었다.
#흑백의 사실, 컬러의 픽션<레토>와 <비긴 어게인>은 흑백영화와 컬러영화라는 차이점에서 시작하여 사실과 픽션, 기존 명곡의 사용 여부 등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시대와 인물 중 어디에 초점을 맞췄는지도 다르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사상적/사회적으로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국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역시 달랐다. 공통점도 존재한다. 레닌그라드로 온 빅토르와 뉴욕으로 온 그레타라는 이방인. 마이크와 데이브라는 음악과 인생의 라이벌.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하게 된 두 뮤지션 ‘즈베리’의 ‘로만 빌릭’과 ‘마룬5’의 ‘에덤 르빈’. 빅토르와 마이크, 댄과 그레타라는 투톱 주인공 체제 등의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끝으로 두 영화 모두 인간의 의지와 자유,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다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영화와 음악을 사랑한다면, <레토>와 <비긴 어게인>을 한번쯤은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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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허먼 J. 맹키위츠의 대답
넷플릭스 영화 〈맹크〉(2020)에 따르면, 전설이 된 영화 〈시민 케인〉(1941)은 각본가를 쥐어짜는 할리우드의 '착즙'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거대 영화사는 영화를 공산품처럼 만들고 싶어 하며, 각본가가 그 과정에 기계처럼 녹아들길 바랐다. 한편, 영화는 공산품인 동시에 정치적 선전물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영화사 대표가 상대 후보의 당선이 이주자 유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은 영화와 정치의 구린내 나는 결탁이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착취와 질 낮은 정치와의 결합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영화판에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비단 〈시민 케인〉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영화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보다 더 깊게 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블록버스터 영화, 상업 영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 영화는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가능케 해준다.
〈맹크〉는 이러한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대답이다. 영화사 대표 윌리의 말처럼, 각본가는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 불과하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는 자신이 춤을 추면 사람들이 오르간 연주자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없으면 오르간 연주자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오르간 연주자의 ‘주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정작 원숭이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은 오르간 연주자다. 자신에게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즉 권력과 돈 앞에서 예술가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 각본가 맹크에게 윌리가 건네는 이야기다. 요컨대, 오르간 연주자는 영화사 대표인 자신이고, 맹크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원숭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컷 ⓒ넷플릭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 우화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오르간 연주자가 원숭이를 먹이고 예쁘게 꾸미려면, 춤추는 원숭이에 기꺼이 돈을 내는 관객들이 필요하다. 오르간 연주로만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지만, 춤추는 원숭이가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연주에 돈을 낸다. 결국 오르간 연주자가 계속 오르간 연주자일 수 있는 이유는 원숭이의 존재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저서 《유행의 시대》에서 예술가를 관리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바뀌었음을 비판하긴 하지만, 예술 활동에 있어서 관리행정은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작가 정신’이란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가난한 자유’에서 나온다는 전통적인 예술론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게도 자율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의 조건과 크기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원숭이가 어떤 춤을 추는지에 따라 오르간 연주자의 수입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맹크〉는 〈시민 케인〉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원숭이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영화의 아이러니로 돌아와 보자. 자본이 없으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맡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영화가 구린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산업이 이어질 수 있는 건, 빛나는 영화가 드물게나마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오르간 연주자의 돈으로 밥을 먹는, 춤추는 원숭이 덕분이다. 원숭이의 생존은 연주자에게 달려있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 순간, 원숭이는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 오르간 연주자가 통제할 수 없는 춤을.
원숭이의 자율성이나마 존재하는 한, 빛나는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영화 산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아이러니에 대한 〈맹크〉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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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 하나, 그 너머의 비명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새로운 획을 긋는 역할을 했다. 유대인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과정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필요한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좋은 지점을 남겼다.
대중은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인생은 아름다워> 등 기존의 영화들을 통해 유대인이 겪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극의 전개가 대부분 가해자보다 피해자 측면에서 몰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확히 반대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루돌프 회스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 가족의 일상이 주로 카메라에 담긴다. 그래서인지 집중하고 보지 않는 이상 유대인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계속 주인공인 회스 부부의 집안을 오가며 잡다한 일을 해내지만 영화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과 정원 그리고 주인공 가족들의 대화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무채색,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 장면들에 유대인들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건 다시 관람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운 초록빛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이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과 대조되는 섬뜩한 소리들은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오로지 청각적 요소로만 수용소가 정원 담벼락 바로 너머에 있음을 인지하게 만든다.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 부분은 정원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도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웃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쑥쑥 자라난 잔디와 풀, 여러 종류의 꽃,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들이 타는 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걷지도 못하는 그들의 막내 아이까지, 촘촘히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정을 이뤄낸 루돌프 회스 손에 의해서는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 나가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마치 회스 가족이 곧 다른 사람의 피로 쌓아 올린 부,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 사람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을까. 루돌프 회스는 영화 말미에 원인 모를 헛구역질을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아이들을 먹고 입히고 키우며 삶을 영위해 나갔다는 건 돌이킬 수 없다.
두루두루 잘 지내고 품앗이하며 서로를 챙기던 사회 분위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재 우리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때때로 함께 일했던 직장 상사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악독했고, 임원진은 부하직원들의 고혈을 짜내기 바빴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세상에는 여전히 회스 부부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생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수용소에서 고된 일로 힘겨워하는 유대인들이 조금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깊은 밤 몰래 찾아와 사과를 두고 가는 소녀. 이런 소녀의 모습을 띤 사람이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아직은 꽤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상황과 직면할 일이 잦아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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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실패한 아들'의 분노
7★/10★
갈비, 잡채, 각종 전, 김치…… 정성스레 요리한 맛깔스러운 요리가 하나둘 식탁에 오른다. 창래와 누나가 종일 요리한 음식이다. 가족들이 격식 있는 옷을 갖춰 입고 식탁에 앉아 있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창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한 해 마지막 날의 저녁 식사, 그리고 어쩌면 영영 마지막일지 모를 가족의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엄마는 감동한 표정으로 음식을 둘러보고는 창래가 가위로 잘게 자른 갈비를 입에 넣는다. 그러나 바로 뱉어낸다. 위암 투병과 항암 치료로 몸이 극도로 허약해진 엄마는 자식들이 준비한 음식을 넘기지 못한다. 창래는 자책한다. 갈비를 이렇게 달게 요리해서는 안 됐다고, 이건 실패한 요리라고. 엄마가 그런 창래를 나무란다. 그렇지 않다고, 정말 잘 만든 요리라고. 그러나 엄마는 끝내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다. 창래가 옳다. 그의 요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죽임이 임박한, 극도의 고통을 겪는 엄마 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창래는 간병을 위해 뉴욕의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를 위해 요리하고, 병간호하고, 청소하고, 갈라지고 떨어진 거실의 내벽을 새로 칠한다. 창래는 어린 시절 엄마가 수없이 해줬던 요리를 떠올린다. 부엌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엄마가 종종 차근히 설명해주었던 레시피를 천천히 복기한다.
엄마는 한국에서 실력 있는 농구선수였다. 아빠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그를 따라 미국으로 왔다. 창래가 엄마의 삶이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자 엄마는 부드럽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에게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아빠와 달리 엄마의 영어는 서툴다. 영어가 그녀의 모국어가 아님이 단번에 드러나는 발음이다. 그래서 엄마는 종종 창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카드사에 전화해 대금이 잘못 청구되었다고 묻는 일 같은 것들. 창래는 엄마가 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더 연습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어쩌면 게으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그 말에 북받친 듯 눈물을 보이고, 창래는 뒤돌아선 엄마에게 용서를 구한다.
같은 이민자지만 엄마와 아빠/누나/창래의 세계는 다르다. 학자인 아빠는 엄마가 겪는 문제를 겪지 않는다. 창래와 그의 누나 역시 엄마의 집요한 노력으로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다. 엄마는 자식들이 자신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상승’한 데에 크게 만족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가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죽을 걸 알았어도 아들을 기숙 학교에 보냈을까? 그 시기가 아들과 함께할 마지막 시간임을 알았더라도? 창래를 향한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창래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다. 아빠의 세계에 진입했으나 엄마와 그녀의 세계가 소외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창래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 대한 아빠의 무지로부터 그녀를 옹호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창래의 귀환은 실패했다. 어머니는 그가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창래는 엄마의 세계로 회귀하지 못한다. 실패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coming home again)’이 ‘엄마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데서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창래에게 엄마/집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고정된 장소다. 그러나 실재하는 엄마/집은 창래의 기대와는 다르다. 엄마와 그녀가 꾸리는 공간인 집은 그녀의 상황과 욕망에 따라 매 순간 재구성되는, 생동하는 무언가다. 창래의 성공을 기뻐하는 동시에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데 아쉬움을 느끼는 엄마의 모순적 애착이 보여주듯, 엄마의 욕망과 기대는 창래(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이되어왔다. 그녀의 욕망과 기대가 투영된 집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창래가 돌아가고자 하는 장소의 좌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창래가 자꾸 미끄러지는 이유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 요리의 맛과 자신이 직접 요리한 음식의 맛이 다르다는 데 분노하며 책상을 내리친다. 저녁 식사를 망친 후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나서는 엄마를 꽉 끌어안는데, 엄마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창래의 거친 포옹은 엄마에게 고통만 준다. 창래의 괴로움은 진짜다. 엄마를 향한 그의 마음도 진짜다. 문제는 창래의 진심이 젠더화된 가족의 의미망을 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엄마가 자기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듣지 않느냐는 누나의 말이 알려주듯, 창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수혜자다. 창래와 엄마가 오랫동안 기대온 이 관계망의 문법이 창래의 진심을 가로막는다. ‘엄마-아들’의 기존 관계망에서 아들은 엄마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할 때 발생하는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창래에게서,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개인에게 새기는 비참함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창래는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려는 ‘좋은 아들’이지만, 가부장적 가족주의 앞에서 번번이 가로막히는 ‘무능한 아들’이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 창래는 그녀가 쓰던 물건을 무심하고 거칠게 쓰레기통에 담는다. 그는 여전히 분노한 상태다. 창래는 왜 엄마/집으로 돌아오려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조차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다.
우리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아무리 애절한 진심이라도 그 진심이 전달되는 구조적 통로에 문제가 있다면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한다. 창래의 의도하지 않은 무능은 ‘효도’와 ‘돌봄’ 어딘가에 내재한 공허함을 보인다. 이 공허함을 직시하지 않고 ‘진심’만을 강조하는 한, 우리는 끝없이 실패할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밍 홈 어게인〉은 한국계 미국 작가인 이창래가 《뉴요커》에 기고한 동명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합니다. 아래는 에세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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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도 혼자서 싸울 순 없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재능의 명과 암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은 눈에 띄는 사람이다. 남자들로 가득한 체스의 세계에서 여성 선수인 것도 모자라 천재적인 체스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붉은 머리와 화려한 옷차림을 한 어린 여성에게 남자들은 승복해야만 했다. 엘리자베스(이하 베스)는 9살에 체스를 시작해 15살에 켄터키주 챔피언에 오른 천재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이 영웅의 이야기를 즐겨했듯 현대의 우리는 천재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천재가 성공해도, 몰락해도 어떤 쪽이든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을 두고 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선물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뛰어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끊임없는 평가와 판단에 시달린다. 심지어 이들은 삶조차 마음대로 재단 당해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선망, 동경, 부러움, 질투, 혐오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들을 덮쳐 온다.
때문에 천재는 고립되기 쉽다. 이해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베스는 당연하게도 또래 친구들과 유행하는 노래를 함께 부를 수도 없고, 남자에 대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베스에게 의미가 있는 건 체스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별과 나이가 다르더라도 체스를 하는 사람이 베스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베스가 첫 상금으로 산 것은 옷과 체스판이다. 자신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르며 현실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은 베스의 콤플렉스다. 베스가 불건강한 상태가 될수록 유행하는 모습으로 치장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악역, 자신
베스는 9살에 눈앞에서 엄마를 잃었다.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베스는 머슈언 보육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보육원의 지하실에서 홀로 체스를 두고 잇는 관리인 샤이벌(빌 캠프)씨를 마주하게 된다. 64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은 베스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으며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온전히 자신의 책임 아래에 있는 체스라는 게임에 베스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베스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공격수였으며 쉽게 화를 냈다. 샤이벌의 말대로 베스의 '화'는 너무나 깊었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베스는 체스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안정제의 도움을 받는다. 체스에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체스는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체스를 알아가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겠지만 베스에게는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그리고 고독함과 패배감이 동시에 몰려오자 약과 술로 자신을 마비시킨다.
이 <퀸스 갬빗>이라는 드라마에는 이렇다 할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베스를 비웃는 같은 학교 학생들도 악당이라고 할 수는 없고, 세계 챔피언 '보르고프(마르친 도로신스키)'도 굉장히 진중한 체스 선수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스가 넘어야 할 벽은 자기 자신뿐이다.
<퀸스 갬빗>은 그 고독과 압박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일어서는 천재의 치유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앨리스와 앨마, 두 엄마가 남긴 것
친엄마 앨리스의 죽음과 양엄마 앨마의 죽음은 베스의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 된다. 극 중에서 앨리스와 함께 보낸 시간을 많이 보여주지는 않지만 앨리스의 말들이 베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강한 사람은 혼자인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앨리스의 이런 양육법은 베스를 독립적인 아이로 만들어주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앨리스의 마지막은 심각할 정도로 자기희생적이며 회피적인 태도다. 앨리스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재능과 독립적인 정신을 준 동시에 베스를 고독하고 자기 파괴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베스의 양엄마인 앨마(마리엘 헬러)는 체스에 재능을 보이는 베스를 전적으로 밀어준다.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료한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얻는 베스를 보며 앨마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행복해한다. 베스의 성취와 성장은 앨마에게도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앨마는 베스가 체스에만 매몰될 것을 걱정한다. 엄마와 딸 그리고 매니저와 선수로서 둘의 유대는 특별했다. 베스를 조금이나마 쉬거나 걷게 만드는 것은 앨마였다. 앨마가 원하는 것은 베스가 '삶을 살며 성장하는 것'이다. '인생에 체스가 전부는 아니니까'
베스는 멕시코 시티에서 만난 '조르지 기레브'라는 소년에게 '세계 챔피언이 된 후 어떻게 살고 싶느냐'라고 묻는다. 소년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베스는 이미 그 후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체스의 자리를 어느 정도로 설정해야 할지를 체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앨마의 말처럼, 인생에 체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앨마가 베스에게 남긴 것은 '체스 외의 삶'이다.
외로운 '폰'이 '퀸'이 되기까지
외로움의 구덩이에서 베스를 건져 올려준 사람은 보육원 친구 '졸린(모세스 잉그람)'과 샤이벌씨다. 관리인 샤이벌씨의 부고로 다시 찾게 된 머슈언 보육원은 체스와의 첫 만남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든다. 실제 장례식이 치러지는 교회보다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찬송가가 울려 퍼지던 시간의 지하실은 베스에게 큰 울림을 준다. 9살이던 베스와 찍은 사진과 돈을 빌리려 쓴 편지, 그리고 베스의 온갖 기사와 사진들이 붙어있는 그 벽면을 보며 베스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베스에 대한 샤이벌씨의 자부심과 애정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치유였다.
사람을 일으키는 건 주위 사람들의 끈질긴 애정과 믿음이다. 오래도록 너를 지켜봐 왔다고, 당신이 걱정된다고 말해주는 것. 네가 필요할 때 내가, 내가 필요할 때 네가 달려와줄 거라는 확신.
자신을 향한 타인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마주한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까. 애정과 믿음의 힘은 한낱 약물과 술이 주는 쾌락과 마비의 감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덕분에 베스는 맑은 정신으로 러시아로 향한다. 하지만 러시아 선수들은 한 팀으로 움직인다. 바르고프와의 대결에서 베스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동안 베스가 겨뤄왔던 선수들은 한 팀이 되어 러시아에 대항한다.
그러나 아무리 도움을 준다 한들 결국은 홀로 싸워야만 하는 때가 온다. 그 순간 베스는 안정제 없이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다시 수를 어림한다.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전력으로 상대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승부를 겨뤘고 마침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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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체스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온 백인도 훌륭한 체스 선수이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세계 챔피언이 된 후 러시아의 거리를 백색 '퀸'과 같은 모습으로 활보하는 베스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자신다워 보인다. 대통령과의 만찬, 인터뷰 같은 것들이 아닌 거리에서 이름 모를 할아버지와 체스를 두는 것이 베스가 선택한 챔피언 이후의 삶이다.
체스에서 가장 강한 말은 '퀸'이지만 혼자서 모든 말들을 잡을 수는 없다. 다른 말들이 있기에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넘어 상대방 진영의 끝까지 다다른 '폰'은 '퀸'이 될 수 있다. 베스는 이기기 위해 자신을 거침없이 내던지는 '퀸'이 아닌 한 걸음씩 전진하여 끝에 다다른 '폰'처럼 마침내 '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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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세계를 엿보는 즐거움, 그리고 씁쓸함
경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낯선 세계와 그 속의 자신감으로 비롯된 즐거움
분명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다. 그러나 영화가 포르노 세계에 투신해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남자를 다루고 있단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왜 굳이 이 영화를 봐야 하나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부기 나이트>는 단순히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한 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매력은 영화 속 배우들의 육체적 매력이 아니라 디스코 음악과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1970년대 ~ 1980년대 미국의 분위기, 그리고 그에 편승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모인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이자 성공한 포르노 배우였던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다. 그는 평범한 소년 '에디'로서 어떤 식당에서 알바를 하고 있을 때에도 길다란 물건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었다. 마침 식당에 있었던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는 에디의 소문을 듣고 포르노 배우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마침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에디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더크 디글러'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에 걸맞게 에디, 아니 더크에게는 새로운 삶과 잭을 포함한 스태프, 포르노 배우로 이뤄진 새로운 공동체가 찾아온다.
더크의 기대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 공동체는 더크에게는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그 공동체의 리더 역할도 겸임했던 감독 잭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포르노도 예술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말에 감화된 배우들은 더크처럼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잭뿐만 아니라 잭의 파트너였던 엠마(줄리안 무어)는 더크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그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더크는 다양한 상을 휩쓰는 대스타로 거듭난다. 비록 그 속에서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의식을 잃어버린 미성년자 여배우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 공동체 속의 밝은 분위기를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기 나이트>는 낯선 세계를 엿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다. 복고적이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과 네온사인도 그렇지만, <부기 나이트>는 주인공 더크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고 포르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에 부응하듯 더크 역할을 맡았던 마크 월버그는 말 그대로 더크 그 자체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마음껏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까 이야기했던 포르노 감독 잭, 프로 포르노 배우 엠마,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롤러걸(헤더 그레이엄) 등 포르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잭의 매력에 기대지 않고 영화 속에서 각자만의 매력을 뽐낸다.
그곳도 현실과 별반 다른 게 없다는 씁쓸함
그런데 이 즐거움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화려한 분위기 속에 숨은 어둠을 끄집어내면서 씁쓸한 감정으로 바뀌게 된다. 잭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리틀빌이라는 스태프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된 뒤, 그 어둠은 마침내 더크를 포함한 '가족'들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잭은 비디오의 대량 생산 시대가 찾아옴에 따라 점차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성인 영화를 제작하는 게 손해가 되는 상황에 직면했고, 더크는 조니라는 젊은 배우의 합류로 인해 자신이 퇴물이 되어서 포르노 세계에서 버려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성공을 자신감 넘치게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이 시류에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끝내 잭의 곁을 떠나게 된 더크는 음반을 내려고 하는 등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간다. 더크가 떠난 뒤 잭은 종종 외로움에 빠진다. 사실 남겨둔 가족이 있었던 엠마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려고 하지만 포르노 배우라는 직업적인 한계에 부딪쳐 끝내 가족과 같이 살지 못하게 된다. 롤러걸은 우연히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던 남자를 만나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져서 홧김에 폭력을 행사한다.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들이 다시 공동체를 이루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 결말은 표면적으로는 잭을 머리로 하는 가족의 회복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훗날 결말에서 개구리비가 내리는 이적을 통해 묘한 뜨거움을 자아내게 했던 <매그놀리아>와는 달리, 이 재결합은 불완전해 보인다. 가족 내부의 문제가 계속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촬영 준비를 마친 더크가 거울을 보고 되뇌이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 거울은 더크의 얼굴 대신 그의 물건만 비칠 뿐이다.
더크의 재빠른 부침은 어마어마한 육체적 능력만 있으면 큰 성공을 거두는 포르노 세계의 특성을 반영한다. 그만큼 화려하지만 세대 교체도 빠르고, 시대에 밀려 버려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 그것 때문에 피해자든 가해자든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비극이 비단 포르노 세계와 1970년대 ~ 1980년대 미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리라. 결국 <부기 나이트>를 통해 느꼈던 씁쓸함은 즐거움마저도 덮어버리지 못한 익숙한 비극성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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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흑인 보스는 눈부신 사람 / 영화 그린 북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
-대여, 소장 https://serieson.naver.com/search/sea...
-Music Midorii(미도리) - 野芥(노케) N04
Artist : Midorii(미도리)
Album : 七隈線 (나나쿠마선)
Song : 野芥(노케) N04
Link : https://youtu.be/jazSBo2r9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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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재 감독의 헌트, 올 여름 가장 재미있는 영화
?Rabbitgumi 입니다!
올 여름 그동안 개봉하지 못했던 큰 영화들이 극장에 공개되었는데요.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그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작품이었습니다.
이정재 배우가 감독으로서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이기도 했죠.
25년 지기 친구 정우성과 같이 공동 주연을 맡았는데요.
이 영화 흥미진진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첩보 장르의 특성도 잘 담겨 있구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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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뤼팽 파트 2> 공식 예고편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내몬 펠레그리니.
그를 향해 복수를 시작했던 아산이 또다시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역전을 위한 계획, 그리고 목숨을 건 트릭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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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컨트랙터> 티저 예고편
국가를 위해 극비 작전에 뛰어든 남자 특수부대 중사 출신 ‘제임스 하퍼’는 전역을 명 받고 법의 테두리 밖에서 국가에 충성하는 극비 조직에 합류한다. 그에게 주어진 첫번째 미션은,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바이러스 테러를 막는 것. 그러나, 미션 수행 도중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되고 충격과 위기를 겪게 되는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모든 것을 건, 새로운 미션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