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09 18:55:12
토대를 잃지 않기
영화 <총을 든 스님> 리뷰
SYNOPSIS.
2006년의 부탄 왕국.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도착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민주주의다. 국왕이 자진해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민주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정국가 부탄에서 역사상 첫 번째 선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투표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당국은 모의 선거를 마련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파란당, 빨간당, 노란당 선거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선거 감독관은 마을의 존경을 받는 큰 스님이 총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POINT.
✔️ 건재한 왕이 직접 전제 왕권을 내려놓고 도입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실화. "투표가 뭔데요? 우린 폐하가 좋은데?" 상태의 국민들 실화. 거기서 스님이 갑자기 총을 찾는다? 부탄이기에 가능한 매력적 시놉시스
✔️ 도르지 감독에게는 부탄 관광청이 상 줘야 하지 않을까? (어쩐지 부탄은 안 줄 것 같지만) 아름답게 펼쳐지는 부탄의 풍광에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이유.
✔️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묻는, 이 시국에 알맞은 작품
✔️ 중간중간 짤막하게 나오는 아이들이 그야말로 신스틸러.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 새해 당신의 마음을 맑게 해줄 작품. 1월 1일에 개봉했습니다!

행복한 부탄에 찾아온 변화
부탄은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국민행복지수'를 중요시하는 나라라고 오래 전 교과서 한귀퉁이에 소개된, 그래서 어쩐지 샴발라 같은 낙원의 이미지로 막연하게 그려질 만큼 잘 모르는 나라다. 나는 부탄 영화감독도 딱 한 명밖에 모른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몇 년 전 <교실 안의 야크>로 우리를 찾아왔던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이다.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진 부탄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부탄의 이미지처럼 맑고 청량했다. 루테인과 지아잔틴 섭취는 안 해도 될 것 같은,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과 거기 기대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부드럽게 그리기 때문이다. <교실 안의 야크>만 해도 야심만만하고 젊은 교사가 산간벽지 학교로 부임해 가면서 겪는 일들을 사랑스럽게 담았다. 그런데 차기작 제목에 총이 들어간다고요. 그것도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인 스님과 함께?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부탄은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당연스럽게 왕이 갖던 권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과연 선출은 무엇이고 투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 한다. 선거 사무원들은 전세계가 주목할 상황 앞에 그럴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거의 개념을 알리고 모의 선거를 치르고자 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넌센스한 상황들이 계속 펼쳐진다. 애초에 행정적인 이름과 생일이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선거 명부를 작성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이 사람들을 크게 옭아맨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그 권력을 억지로 쪼개 경쟁을 붙여야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이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투표를 하거나 말거나 자기 뱃속을 불리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가 뭔데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큰스님의 "총을 구해 오라"는 발언일 것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결합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어서 그런가 우리는 좀더 세속적인 상상을 하게 되지만... 흠흠. 아무튼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영화 속 인물들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이루었고, 지금도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과 상호 견제의 원리를 통해 우리를 지키는 중인 한국 사회는 영화 속 부탄과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도 유효타로 날아든다.
정치적인 의견 차이가 배신처럼 간주된다면,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제도를 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도 그 이상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남들이 목숨 걸고 갈구한 것이라면 여기서도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우리 손으로 어떻게 그려가야 할까?

자본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이 영화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하필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런 때에 숙고하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민주주의만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의 좋은 짝, 자본주의다. 영화에는 총을 둘러싼 대화가 영어-부탄어 통역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 문장들은 단순히 말뜻을 옮기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통역자 '밴지'는 단순하게 말을 비슷한 단어로 옮기는 게 아니라, 표현과 그 의도까지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분칠을 해서 성실하고 매끄럽게 내어 놓는다.
자본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언어와 어찌 보면 그 대척점 비슷한 곳에 가 있는 언어를 옮기는 것은, 발화된 말 뒤에 있는 마음까지도 적절히 분칠을 해서 내어 놓아야만 하는 일이 된다. 밴지가 통역한 것은 영어와 부탄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부탄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절히 양념을 치고 거짓도 보태어, 화자와 청자 사이에 약간씩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작지만 흥미로웠는데, (이 영화에서는 작은 수준으로만 등장하지만) 이러한 괴리가 자라고 자라면 우리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되는 거구나 싶어서였다. 이미 죽어 있는 마음의 시체 비슷한 것에 분칠을 해봤자 악취를 가릴 수 없다. 가치를 상실한 말은 언어의 거죽을 뒤집어써도 언어를 파괴할 뿐이다. 아무리 주절주절 단어를 끌어 모아 가려봐도 기표 뒤의 기의는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작지만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두 제도. 잘 발휘될 때의 장점과 잘못 발휘될 때의 해악도 명확한 이 제도 앞에서, 시스템 이면의 가치를 잊지는 않았는지, 잃지는 않았는지. 제도 이전에 우리 마음의 토대에 놓여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마치 부처님의 미소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양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어쩐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이라는 백석의 시구가 떠올랐다. 우리 같이 쪼이고 싶은, 따뜻한 모닥불 같은 영화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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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가 꿈이었던 어떤 유망주의 다큐멘터리
어떤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예쁜 외모로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키도 컸다. 무슨 옷을 입던 태가 났다. 세상 사람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환호성을 받기 시작한 이 사람. 스타덤에 오른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예쁜 외모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예쁘긴 한가? 어렸을 때 찍었던 의문부호가 성인이 되자 확신으로 변했다. 아, 나 유명하구나. 유명한 이유는 내가 예뻐서구나. 하지만 이 사람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었다. 친한 언니들이 있었다. 이 언니들이 이 사람 곁에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이 꾸는 꿈은 달랐던 것 같다. 꿈을 꾸는 주인공. 동화 속 공주, 아니 자기 자신이 되어 마을을 유랑하고 싶었다.
공주가 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만큼 주인공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의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공을 따라 하는 사람도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다. 그녀를 지탱하는 사람들. 쏟아지는 관심의 결과다. 사랑? 받고 싶은 만큼 받지. 하지만 따라오던 그 많은 사랑이 그녀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 하고 싶던 게 있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외면한 채 그녀는 앞으로만 달렸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무시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 그녀에게 문득 삐져나오는 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마음에 그림자가 진다. 그늘이 질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림자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그녀 주위에는 사람들이 붐볐기 때문이다. 유달리 안으로 졌던 그림자. 오랜 시간 동안 기계처럼 일만 하고 나서야 그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최악이에요. 최악.”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된 그녀. 아니, 사실 유명한 사람 이전에 단지 ‘유명하기만 한’ 쪽에 가까웠다. 점점 통제하고 선택하는 것이의 요소들로 삶이 평가받는다. 답답하다. 그녀 역시 사람인데. 너무 어린 시절부터 유명해진 탓인지 자아가 만들어지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전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젠 점점 의심이 확신이 되어간다. 늦게 만들어진 자아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힐난하기에 이른다. 고통스럽다. 이게 인생인가. 아니지. 이게 인생이라고 배웠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내가 골랐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
눈물이 흐른다. 유명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붐비기 시작한다. 붐빈 사람들이 그녀를 지탱했던 만큼 손가락질하기 시작한다. “태도가 그게 뭐냐.” “쟤 왜 저래?” 비난이 쇄도한다. 그만큼 아프기도 했지만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속옷 좀 안 입고 나가면 어때.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질투심이 심한 인간들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더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무슨 떼인 돈 못 받은 사람처럼 그녀를 괴롭힌다. 남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거창한 근거를 댔지만, 사실 그녀가 온갖 소리를 심한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시선을 돌릴 때마다 상처받는 일 투성이었다. 유명해진 주인공의 인생에 헛소문을 내는 인간을 법적으로 고소했고, 1년 동안 셀럽으로서의 활동을 접어보기도 했다. 돌아본 지난한 삶. 생각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마음의 그림자가 점점 더 깊어진다. 상상에 빠졌다. 그림도 그려보고 음악도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어린 시절의 꿈이었으리라.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가 강했다. 장편영화 여러 편을 찍는다. 필모그래피 중 ‘조악한 퀄리티’라는 비판을 받는 영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 안에는 작은 것에도 공감할 수 있는 섬세함이 있었다. <메기> 좋았지. 당시 그렇게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던 구교환과 함께 GV(관객과의 대화)를 했던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게 재밌었어요. 연기가 재미있었던 그녀. 넷플릭스와 단편 영화 여러 편을 찍는 계약을 맺었다. 제목은 <페르소나>.
<진리에게>는 가수 겸 배우였던 최진리 씨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다. 글쓴이가 기억하는 고인은 슈퍼스타다. 항상 화제가 됐던 인물이었다. 무얼 하든 세상의 입방아에 올랐다. 항상 그녀가 보여주는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강인한 내면을 가진 인물일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2023년이다. 지금 돌아보건대 아이돌 설리에서 벗어난 배우 최진리는 우리와 전적으로 비슷한 사람이었다. 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난 후,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만약 내가 그녀 곁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누구보다 멋지다는 말을 했겠지. 하지만 난 어떤 방식으로도 그러지 못했다. 속상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남긴 온기와 고민,생각들은 여전히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곳곳에 그녀가 가진 문제가 전조증상처럼 나타나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왠지 모르게 감독의 공격적인 태도가 마음에 거슬린다. 하지만 아름답던 고인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이 영화만큼 좋은 것이 없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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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고립과 정박, 그러나 실재
DIRECTOR. 루루 헨드라(Loulou HENDRA)
CAST. 셰니나 시나몬(Shenina CINNAMON), 아르스웬디 베닝 스와라(Arswendy BENING SWARA), 앙가 유난다(Angga YUNANDA), 유수프 마하르디카(Yusuf MAHARDIKA) 외
PROGRAM NOTE.
마이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다 위에 부유하는 허름한 수상가옥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래전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다약 원주민인 그녀는 광산 개발로 인해 땅을 빼앗기고 한 노인에 의해 구조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도 잃고 친척들과의 연락도 끊기게 된다. 십 년 넘게 바다 위에서 생존하지만 뭍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땅에 발이 닿기만 해도 혼절해버리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불길한 장소가 돼버린 땅이지만 그녀는 땅과 그 위의 생명들을 그리워한다. 낡고 무너져가는 집이 언제까지 물 위에서 버텨줄지도 알 수 없다. 인도네시아의 신예 루루 헨드라 감독의 <생존자의 땅>은 트라우마에 갇힌 인간의 몸부림과 내면적 성장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다. (박성호)
감독은 탄광 지역 개발로 삶이 불안해진 인도네시아의 한 도시를 보며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불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해졌다. 영화는 소음에 가까운 거대한 기계음만 들어간 까만 화면으로 시작해, 이내 기울어진 물 위의 집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그 불안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힘을 세밀히 흘려 보낸다.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집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마이와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대다수의 한국인은 자신이 섬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한 면이 막힌 반도에서의 삶은 이따금 섬의 생활을 그려보게 하는 측면이 분명 있지만, 온전히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사는 삶과는 분명 감각이 다르다. 여기에 재해처럼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일들까지 더해지면 불안은 배가된다.
심지어 이 영화의 주인공 마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물러난 곳에 있다. 땅을 밟으면 코피를 쏟으며 기절하는 마이의 증세는 심리적 사유 외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영화는 이러한 증세가 찾아오기까지 마이의 삶에 있었던 굴곡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따금 대화에서 드러나는 할아버지의 삶과 마이 부모님의 죽음 이야기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게 할 뿐이다. 확실한 건 현재 마이가 거의 유령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인간들이 쉽고도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에 제약을 얻은 존재.
그 때문에 마이의 집은 물 위에 배로 떠올린 곳이다. 기본적으로 고립을 특성으로 하는 공간이다. 키우는 닭 또한 흙 없이 갑판 위에 뿌린 모이를 쪼는 것밖에 할 수 없고, 많지 않은 마이의 대사는 대부분 할아버지를 향해 집에 대한 불안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거칠고 짤막하게 구성된다. 마이의 세계는 말로 재구성되는 양이 많지 않다.
할아버지 친구의 손자이자 마이에게 계속해서 친절한 손을 뻗어 오는 유스, 인도네시아의 군사문화 잔재의 기운이 드러나는 제복을 입고 외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와, 두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마이의 욕구는 단순하다. 다친 물소를 돌보고 싶고, 땅을 밟고 싶다. 이외에 대사로 발화되지 못한 마이의 마음들은 배를 타고 나가서 만날 수 있는 고목에 속삭임으로 전달된다.
고목 옹이에 입을 대고 마음을 전하는 마이는 결국 뭍의 존재들을 믿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손녀다. 조상을 향한 할아버지의 기도는 비록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된 적이 없지만, 조상들이 자신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현실에 손길도 미치고 있다고 믿는 마음 또한 실재(實在)를 중시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물소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야기할 때 사진을 보여주는 라와와 달리, 실재만을 믿고 증거로 채택하는 유스 또한 같은 할아버지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래서일까? 이들을 땅 너머로 몰아낸 자들의 존재는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탄광 회사는 두어 장면을 제외하면 말 속에서만 존재하고, 영화는 그들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실재를 믿는 사람들의 영화에 실재하지 않음으로써 탄광 회사의 위치는 명확해진다. 그리고 더더욱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감을 갖게 된다. 마이와 할아버지가 처한 답답한 고립과 정박의 상황을 그들은 알지도 못한다. 검은 화면에 기계음만 들어가 있던 첫 장면과, 바로 이어진 마이의 집 장면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사진으로 증거를 삼는 라와, '자기 인생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면서 할아버지의 결정은 들어주지 않는 삼촌의 존재는 마치 그 탄광 회사의 그림자 같다. 자기 이득을 위해 말을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고, 실재하는 것을 직면하기보다는 말이나 사진으로 재구성된 것들을 믿고 싶어 한다. 얼핏 보면 합리적이고 무고해 보이는 선택들이지만, 이 선택들이 누군가를 땅 끝으로, 땅 너머로 몰아내고 있음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탄을 가득 실은 거대한 콘테이너 배가 스크린을 가로지를 때, 그 앞에 작은 조각배를 띄우고 두 다리 단단하게 선 사람의 뒷모습이다. 마치 이 영화 자체 같은 장면이었다. 환상의 악기 연주와 아름다운 춤처럼, 이 영화처럼, 불안을 흩뿌리는 탐욕에 맞서 고립되고 정박된 존재들은 늘 유약하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고립되고 정박되었어도 이들은 두 다리로 여기에 실재한다. 현실 속의 마이와 같은 존재들이 어디 있는지, 나는 또 어디에 있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였다.
10/04 16: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상영코드 078)
10/05 10:00 CGV센텀시티 3관 (상영코드 157)
10/09 10:00 CGV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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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다.
김효은 감독의 <새벽의 Tango>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된 영화이다. 일상을 파고드는 과거의 사건들과 그 사건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입체적인 인물과 다양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연, 권소현, 박한솔 배우의 열연으로 특별함을 더하고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놉시스
친구에게 사기당한 뒤 숙식 제공 공장에 숨어들 듯 들어와 일자리를 잡은, 매사가 분명하고 직설적인 지원. 누구에게나 상냥하며 스스로도 언제나 낙관적인 지원의 룸메이트 주희.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 조장을 달게 된 꽤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한별. <새벽의 Tango>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공장 동료에게 사고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의 반응과 해법은 놀랄 만큼 다르다. 인물 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난감함 혹은 그 난감함을 넘어서는 감동은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과 유연한 감정 축적으로 점점 더 강력해진다. <새벽의 Tango>는 관계의 실패와 복구에 관한 신중한 질문이고, 성격과 운명에 관한 흥미로운 예시이며, 마침내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의 상실에 관한 애틋한 애도다. (정한석)
영화리뷰
친구에게 사기당한 지원은 급하게 일자리를 찾아 공장에 들어오게 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지원과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낙관적인 룸메이트 주희가 만난다. 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친절함에 어색해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들은 점차 가까워진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데...
소문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은 진실이 되고, 더욱 무성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소문이라는 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유머로 소비하고 행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손쉽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 말을 재미있게 소비하면서도 그 말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그 당사자를 욕하곤 한다. 그처럼 말과 잘못에 대해 책임지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진다. 유일하게 그 책임을 지는 주희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떳떳하지 못해서인 건 아닐까.
이 영화는 참으로 씁쓸하다. 하지만 감정의 호수로 빠져드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는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사람이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그리고 특별함을 나눌 수 있는 시간대로 작용한다. 타인에게 휘둘릴 수 있는 낮과는 달리 낯선 땅고를 '새벽'에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조금씩 쌓아가는 미묘한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말에 더할 나위 없는 허망함을 느꼈지만 숨을 수 있는 새벽의 시간에 머물고 싶었던 지원이 낮의 시간대로 나아가게 만드는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이처럼 삶은 때론 지나치게 잔혹하면서도 희망을 주는 모순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가 겪는 감정의 복잡함과 순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며 성장해 나간다. 새벽의 고요함에서 시작된 지원의 여정은 낮의 복잡한 현실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상실에서 고귀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상영 시간
10월 5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10월 8일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월 9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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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톺아보기] 이정은 배우 출연작 파헤쳐 보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큐레이션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억척스럽고 성실한 생선가게 사장님부터 영화 감독 역할까지
드라마와 영화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배우가 있죠!
바로 배우 '이정은'입니다.
오늘의 톺아보기 주인공은 바로 배우 '이정은'입니다.
그럼, 이정은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러 가볼까요?!
ⓒ 윌엔터테인먼트
이정은 배우는 연극부터 시작해 뮤지컬, 영화 그리고 드라마까지 넘나들며 출연한 작품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요. 매 작품 현실감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줘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여주며 신스틸러로 활약했다.
배우 '이정은' 프로필
ⓒ 윌엔터테인먼트
이름 | 이정은
출생 | 1970년 1월 23일
소속사 | 윌엔터테인먼트
데뷔 |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
배우 '이정은' 데뷔 과정
ⓒ 윌엔터테인먼트
이정은 배우는 처음에는 연극 조연출로 시작하였다. 연기를 막 시작했을 때는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에서
간단한 대사도 NG를 숱하게 내 카메라 공포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연기보다는 연출 쪽에서 계속 활동을 하다 2013년에 드라마 데뷔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배우 '이정은' 대표작
미스터 션샤인 - 함안댁
ⓒ 윌엔터테인먼트
눈치가 없으며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자
애신의 유모인 '함안댁'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타인은 지옥이다 - 엄복순
ⓒ Tving
언뜻 보기엔 친절하고 푸근한 사람인 것 같지만 행동이 늘 어디간 의뭉스러운
고시원 주인인 '엄복순'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티빙, 시즌
내가 죽던 날 - 순천댁
ⓒ 네이버 영화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무언의 목격자인 '순천댁'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웨이브
기생충 - 문광
ⓒ 네이버 영화
글로벌 IT 기업의 젊은 CEO인 박 사장의 집에서 오랫동안
입주 가사 도우미로 일한 '문광'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로스쿨 - 김은숙
ⓒ Tving
개성 넘치며, 탈권위적인 성향에 털털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판사 출신 민법 교수이자 리걸클리닉 센터장인 '김은숙'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시즌
소년심판 - 나근희
ⓒ 윌엔터테인먼트
소년 범죄를 신속하게 처리하려는 인물로
완고한 성격을 가진 부장판사인 '나근희'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우리들의 블루스 - 정은희
ⓒ Tving
억척스럽고 성실하고 똑똑하며 자수성가한 인물로
현재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정은희'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OTT -------------
넷플릭스, 티빙
오마주 - 지완
ⓒ 네이버 영화
이정은 배우는 세 작품의 잇따른 흥행 실패로 슬럼프에 빠진
중년의 여성 감독인 '지완' 역을 맡았다.
------------- 시청 가능한 곳 -------------
극장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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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 휴가는 넷플릭스로!
공포, 스릴러 영화로 가득했던 넷플릭스 공개작! 다들 보셨나요?
저는 집에서 넷플릭스 공포 영화를 보며 피서를 즐겼답니다!
이번 8월 공개작은 7월 공개작에 비해 좀 더 다양한 장르로 돌아왔는데요.
이번엔 어떤 영화가 공개될지, 함께 보실까요?
1. 애프터매스 - 피터 윈더 (2021)
공포/스릴러 ㅣ114분 ㅣ 미국 ㅣ청소년 관람불가
21.08.04 공개 예정
"관계 회복을 위해 환경을 바꾸려는 젊은 부부가 저렴하게 나온 꿈의 집에 입주하면서
벌어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 영화."
★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앨리스 컬렌 역 애슐리 그린 주연!
2. 더 스웜 - 쥐스트 필리포 (2020)
판타지,공포,드라마 ㅣ101분 ㅣ 프랑스 ㅣ15세 관람가
21.08.06 공개 예정
" 식용 메뚜기 사육을 시작한 싱글맘 비르지니.
기대만큼 번식은 되지 않던 중에 메뚜기가 피에 광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 시체스 영화제에서, 스페셜 배심원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초 자연적 현상을 다룬 이야기!
3. 키싱 부스 3 - 빈스 마르셀로 (2021)
멜로/로맨스, 코미디 ㅣ113분 ㅣ 미국 ㅣ15세 관람가
21.08.11 공개 예정
"절친이 있는 버클리? 아님 남친이 있는 하버드?
둘 중 어디에 입학할지 못 정한 엘. 역대급 여름을 위한 버킷 리스트부터 세운다.
근데 구 썸남의 등장으로 묘해진 이 분위기, 어쩔거야?"
★ 많은 사랑을 받은 키싱 부스 시리즈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다!
4. 베킷 - 페르난도 치토 필로 마리노 (2021)
액션,드라마,스릴러 ㅣ108분 ㅣ 이탈리아,브라질,그리스,미국 ㅣ15세 관람가
21.08.13 공개 예정
"그리스에서 비극적인 사고를 겪은 미국인 관광객.
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암살의 표적이 된다.
남자를 조여오는 정치적 음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답과 생존을 향한 필사의 도주가 시작된다."
★ <테넷>의 존 데이비드 워싱턴, 오스카 상을 수상한 알리시아 비칸데르,<나르코스>의 보이드 홀브룩의 만남!
5. 스위트 걸 - 브라이언 앤드류 멘도자 (2021)
액션,스릴러,드라마 ㅣ96분 ㅣ 미국 ㅣ15세 관람가
21.08.20 공개 예정
" 대형 제약사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약을 구하지 못해아내를 잃은 레이 쿠퍼가 유일한 가족인 딸을 지키고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넷플릭스 영화."
★ <아쿠아맨>의 제이슨 모모아가 가족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로 등장!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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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존자다 | 때로는 지옥을 재현할 필요도 있다
같은데, 달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생존자다>가 다룬 4개의 사건은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정보가 이미 많았으니까. JMS 사건의 후일담은 재판 진행 과정이 꾸준히 보도된 상태였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지존파 살인 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도 이미 그 실상이 여러 차례 다른 프로그램에서 밝혀진 바 있었다. 유튜브만 검색해도 사건들의 발단, 책임 소재, 정치권의 결탁 문제 등을 다룬 수많은 관련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충격적이었다. 이미 아는 사건을 다시 보는데도 이전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이 뇌리에 각인됐다. 특히 부산 형제 복지원 사건을 다룬 첫 두 에피소드는 말로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당시 숙소를 재현한 공간에서 실제로 입었던 것과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생존자들의 인터뷰는 마치 <오징어 게임>의 실사판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연출은 과연 적절할까? 처음에는 의문이었다. <나는 신이다>가 지나치게 선정적인 묘사로 논란이 되었듯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2화까지만 봐도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옥이나 다름없던 광경을 재현하고 보여줄 때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와 반향을 직접 체감했기 때문이다.
재현된 지옥이 특별한 이유
상술한 세트나 복장 외에도 <나는 생존자다>의 사건 묘사 수위는 분명 충격적이다. 출연한 피해자들과 충분히 협의한 결과물이겠지만, 인터뷰 내용이 특히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다. 성폭행당한 순간, 강요를 이기지 못해 누나에게 쌍욕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려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대역 배우를 써서 재현하는 것과는 달리, 눌러 담은 회한이 느껴지기에 더 고통스럽다.
박인근 원장의 가족들과 피해자가 대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를 웃으며 무시하고, 피해자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광경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포착된다. 머리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적나라해야만 하는가 싶은 순간이 적지 않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생존자다>는 차별화된다. 고통의 기억을 돌려 말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는 힘을 획득한다. 단순히 선정성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고통의 경험을 재현할 때 형성되는 종교 문화적 효과 덕분이다. 문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에 따르면 "종교적 관점에서 고통의 문제는 모순되게도 어떻게 그것을 피하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당하냐"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종교적 승화
기어츠는 ‘당할 만큼 의미 있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to make suffering sufferable)이 종교적 고통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경험과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고통을 감내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면 종교라는 일종의 문화적 시스템이 탄생한다는 것. 실제로 세계적인 대형 종교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식을 채택하곤 한다.
국민의 80%가량이 천주교 신자인 필리핀의 경우에는 부활절을 앞두고 독특한 의식이 진행된다. 부활절을 앞둔 목요일은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인데, 이날 빨간색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성들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속죄 의식을 치르곤 한다. 이는 예수가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메고 가서 못 박힌 것을 재현하고 체험하면서 그 고통을 부활의 환희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아파 무슬림도 '아슈라' 날에 유사한 의식을 진행한다. 아슈라는 시아파의 세 번째 이맘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이 수니파 무슬림의 습격으로 죽은 참극을 애도하는 날이다. 이날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거리 행진을 하며 가슴을 주먹으로 치거나 채찍이나 칼로 자해한다. 최근에는 헌혈 행사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 역시 고통의 기억을 재현 및 전시하여 다른 의미로 승화하는 의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통의 재현과 전시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는 예술가들을 목격할 수 있다. 세르비아의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고통을 통해서 내면을 변화시키고, 몸의 경계를 초월하며, 터부를 무너뜨리려는 예술적 지향을 추구한다. 자신을 극한의 신체적 고통의 상황에 놓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종교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나라해서 달랐다
<나는 생존자다>도 마찬가지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저 자극적으로 범죄 사건을 소비하는 상품이 아니다. 생존자들이 직접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공유하는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주면서 종교적 영성을 획득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을 거친다. 이 의례의 끝에서 그들의 아픔은 트라우마로 남는 대신, 사회 정의를 위한 고발의 증거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시청자들도 피해자들의 증언을 매개로 삼아 일종의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이 다치는 것처럼 간접적으로 고통을 경험한다. 단순히 과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 이상으로 분노하기도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행위 자체가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공동체의 아픔으로 변화시키는 일종의 시청각적 자해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현황에 대한 관심과 보도가 늘어나는 현상은 이를 방증한다. 2023년 12월 서울중앙지법은 국가 책임을 처음 인정하며 피해자들에게 145억 8,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 뒤로도 국가 배상 판결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법원에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652명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111건 재판이 접수돼 있다. 모두 <나는 생존자다>가 공개 전까지는 대중의 이목에서 벗어나 있었던 소식들이다.
<나는 생존자다>를 향한 바람
한 가지 지점은 아쉽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에피소드는 피해자들이 피해 보상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정부에서 항소했다는 자막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법무부는 지난 5일 상소취하 결정을 내렸다. 물론 공개 직전에 이뤄진 방침 변화를 즉각 작품에 반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뉴스까지 같이 보여줬다면 분노와 충격을 안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정의를 향한 한 가닥 희망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다. 이 사건과 동시에 화제가 된 JMS 사건 모두 사이비 종교인들이 가해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종교의 의미와 가르침을 왜곡한 이들로 인해 피해자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는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나는 생존자다>는 그들이 가장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방식으로써 고통의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주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묘하게 대조한다.
이 시리즈는 시즌 3, 4로 이어질 수도 있어 보인다. 다룰 사건이 없는 게 최선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새로운 시즌이 나올 때마다 선정성과 잔혹성 논란이 일더라도, 초심을 유지했으면 한다. 비록 보고 듣기조차 힘들어도, 그 정도로 고통스러운 묘사가 없이는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지금처럼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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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폭군> 티저 예고편
차지할 것인가, 제거할 것인가 마지막 샘플을 향한 쫓고 쫓기는 추격전💥 [신세계] [마녀] 박훈정 감독 작품 [폭군] 8월 14일 디즈니+ 단독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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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십개월의 미래> 메인 예고편
만성 숙취를 의심하던 미래는 자신이 임신 10주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변수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가족과 연인, 국가는 각기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의 십개월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