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22 07:36:55
〈타인의 삶〉에서 이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타인의 삶〉(2007)에서,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와 배우 커플을 도청하며 감시하다 어느새 그들의 예술에 감화되어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두 사람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영화에서, 비즐러가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시대의 지배적 담론과 그에 부착된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인간 내면을 완전히 잠식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된다. 비즐러가 반체제 인사를 감시하는, 사상이 투철한 인물이라는 점은 그 눈물 한 방울의 가치를 더욱 극화한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서 도청하던 그가 홀로 전율하며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은 체제에 속한 사람의 내면에조차 잠식당하지 않은 공간이 있음을 폭로하고, 우리가 ‘인간다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바로 그 공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비즐러의 눈물을 16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에게 헌사한다. 교황의 명령을 받은 한 남자가 있다. ‘그림자’로 불리는 그는 카라바조가 일으킨 파문을 객관적으로 조사할 임무를 명받는다. 난폭한 성격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다 사면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에서는 신성을 모독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카라바조를 빨리 처형하라는 요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카라바조의 재능을 알아본 몇몇 귀족, 심지어 추기경까지 교황에게 카라바조의 사면을 청하고 있다. 그림자는 이 상황에서 카라바조 사건을 면밀히 추적한다. ‘객관적’ 진실에 가 닿가 위해서다.


카라바조는 고통받는 자들에게서 예술을 길어왔다. 수감자, 가난하고 병든 자, 창녀를 종교화의 모델로 썼다. 그의 모델이 된 ‘비천한’ 사람들은 자신도 신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능성에 고무되고 여기에 자부심을 느낀다. 동시에 카라바조는 난폭하고 ‘저속’하다. 향락에 젖은 파티를 일삼고 소년과 남색을 벌인다는 혐의도 받는다. 반대자들은 카라바조를 ‘악마’라고 부르고, 그를 지지하는 추기경이 ‘타락’했다며 비난한다.
‘객관적’ 조사를 명받기는 했으나, 그림자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이다.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지엄해야 한다고 믿고, 도덕적 정결이 그 권위를 지탱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짐작 가능하듯,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메스꺼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메스꺼움은 카라바조가 예술로 묶어낸 ‘빈자들의 교회’라는 집단 감각이 로마 교회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본능적 위기감에서 나온다. 카라바조가 기존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소속 인물과 그들의 화풍에 반기를 드는 것도 카라바조의 반체제성에 대한 그림자의 의혹을 돋운다. 반면 매혹은 자기 신념과 반대될지라도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재능과 그 재능이 그림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나온다.
모든 조사를 마친 그림자는 카라바조와 대면한 최후의 장면에서, 자신의 신념과 마음을 저울질한 후 나름의 결단을 내리고, 이후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 후회의 눈물일까? 감동의 눈물일까? 그림자는 비즐러와 같은 것을 느꼈으나 다른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예술과 체제, 권력과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그럴듯한 드라마가 완성된다.

다른 한편, 카라바조가 예술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21세기가 아니라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예술가의 인품, 생활을 작품성과 깊이 연계하는 오늘날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를 둘러싼 스캔들은 더 뜨겁고 격렬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예술가로서 자격을 상실해 점화조차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은 대개 난폭한 난동꾼인 그가 밑바닥 사람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깃든 성령을 포착한 후, 모델로 세우기까지의 몇몇 과정에 대한 묘사였다. 바로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카라바조의 작품이 여전히 빛나는 것일 터다. 그래서 더더욱 헷갈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과거의 인물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고 그를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수 세기 전 그림자가 마주한 고민은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어 우리에게 나름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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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드가 아니라고
이번 주에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개봉했다. 흑표당의 대표자로 활동하다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프레드 햄프턴(다니엘 칼루야 분)과 흑표당 내부의 스파이 이야기를 그린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농구선수를 꿈꾸는 부기의 이야기인 <부기>다. 두 영화 모두 미국 내에서 아직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는 흑인과 아시아인을 다뤘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떨떠름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소수인종들의 대표자는 늘 남성이어왔고 두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는 <헬프>나 <히든 피겨스> 등을 통해 조명된 적이 있지만 아시아계 여성의 이야기는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두 영화에서 특히나 답답했던 건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단순히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대상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아직까지 영화 제작에 여성의 비중이 크지도 않고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 등장하는 흑표당의 여성 당원들은 성희롱의 대상이거나 연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총을 들고 싸우는 여성 당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메인 타이틀롤인 프레드 햄프턴과 내부 스파이가 된 빌 오닐(러키스 스탠필드 분)의 존재감에 비하면 없어도 될 만한 캐릭터들이다. 유일하게 높은 비중을 자랑하는 데버라(도미닉 피시백 분)조차 등장부터 프레드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결국 프레드의 아이를 임신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프레드 햄프턴 주니어의 어머니로 서사를 마감한다. <부기>의 여성 캐릭터들은 더 심각하다. 엘레노어(테일러 페이지 분)는 운동을 하러 간 곳에서조차 부기(테일러 타카하시 분)의 성희롱 대상이 되고 이는 10대 소년의 치기로 묘사될 뿐 문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엘레노어의 운동 장면을 조명할 때 관음적인 시선으로 엘레노어를 훑는 카메라 자체가 남성들의 시각을 투영한 부기의 시선이다. 관심이 있으면 놀려도 되고 성희롱을 해도 된다는 20세기적 발상을 21세기 서구권 영화에서 봐야 한다니 관객으로서 그저 불쾌할 따름이다.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하거나 차별받는 입장에 놓인 남자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임신했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대화가 있다.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가 가족에 집중해주길 바라지만 남성 캐릭터는 그럴 여력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자연스럽게 여성 캐릭터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남성 캐릭터의 발목을 잡거나 여성 캐릭터가 사회적인 의제보다는 자신과 아이에 집중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영화 말미에는 데버라 또한 흑인 인권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었음을 드러내는 글귀가 등장하지만 정작 영화 서사에서 데버라는 프레드의 이상에 현실을 끼얹는 존재로 그려진다. 데버라는 스크린에서 프레드의 연애 상대이자 프레드의 아들의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서사의 절반 이상을 임신 상태로 소비당한다. 데버라 존슨이 흑인 인권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전혀 그려지지 않은 채 마지막 한 줄로 변명하듯 데버라의 서사를 남겨줄 뿐 영화는 데버라의 서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데버라와 프레드의 연애 서사는 흑표당의 역사에서 정녕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나?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연애 대상인 동시에 남성성을 재확인시켜주는 도구로 소비된다. 엘레노어가 자신의 숙적인 몽크(팝 스모크 분)와 연애한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기는 엘레노어와 대화하는 대신 분노한다. 엘레노어와 교감하는 시간에도 엘레노어를 기쁘게 해주기 보다는 자신의 남성성을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드는 부기는 엘레노어와의 대화에서 단 한번도 성인다운 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엘레노어뿐만 아니라 가족, 코치와도 이런 대화를 나누지 못하며 그게 부기의 캐릭터성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부기가 친구인 리치와 나누는 대화와 비교해 보면 엘레노어와의 대화가 더 극단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기는 리치와 농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지만 엘레노어와는 누가 더 비참한지 싸워 이기려 든다. 자신을 괴롭히는 5000년의 중국 역사를 들먹이는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자신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응수한다. 흑인이나 아시아계나 미국에서는 소수인종에 해당하는데 애초에 누가 더 바닥인지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한가 싶을 만큼 부기와 엘레노어의 언쟁은 소수인종 간의 논쟁으로서도, 연인의 애정 싸움으로서도 별 기능을 하지 못한다. 부기에게 엘레노어는 소수자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을 확립시켜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프레드 햄프턴에게 데버라 존슨은 결국 서사의 비극성을 극대화시켜주는 존재일 뿐이며 데버라 존슨 자신에게 임신이라는 상황은 약자의 상황에서 더한 약자로 치닫는 도구로 변질되어 버린다. 영화 말미 흑표당 당사에 들이닥친 경찰은 임산부가 있다는 말에 데버라를 향한 총질은 멈추는 대신 데버라의 배에 총구를 들이댄다. 데버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보호자로서 경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부기는 중국에 가느냐 미국에 남느냐의 상황에서 중국행을 택하고 엘레노어에게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엘레노어도 몽크와 교제한 과거를 말하지 않았으니 서로 거짓말한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변명한다. 엘레노어가 몽크와 연인이었던 것은 부기를 알기 전이었고 현재 부기와의 관계에 있어 영향이 없다. 하지만 부기는 미래에 대한 논의를 엘레노어와 하지 않음으로써 관계에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부분을 감추고 엘레노어를 자신과 동등하게 시간을 보낼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부기와 프레드 모두 자신의 연인을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비극 서사에 매몰되어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으로만 치부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실패했다.
소수자를 다루는 이야기는 언제고 필요하다. 흑표당의 역사에서 크게 부각되었던 많은 인물들과는 달리 프레드 햄프턴이 서사의 주체가 되어 주목받은 것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최초라고 한다. <부기>는 실화 기반 영화는 아니지만 미국 내 현재 아시아인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이민자 2세로서 두 문화 사이에서 겪는 고민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두 영화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서사에서 한 성별이 의도적으로 대상화되고 주변부에 머무른다면 결국 소수자가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탄생하고 만다. 관객의 절반이 데버라와 엘레노어의 성별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들려줄 필요가 있다. 단 어머니나 연인으로서의 서사가 아닌 데버라와 엘레노어 그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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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지 못한 장손들의 연대기
둘 이상의 형제자매 관계에서 맏이란 무엇일까? 가장 먼저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동생(들)이 태어난 후에는 관심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 경쟁 상태에 내몰리는 것이 맏이다. 이것이 전 세계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맏이가 감내해야 하는 보편적 숙명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맏이의 의미가 사뭇 더 엄중하다. 한국의 가족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맏이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학업을 포기한 맏딸이 남동생의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사태는 이제 거의 없겠지만 오늘날에도 맏딸이나 맏아들은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해 부모님께 효도하고 집안이 기울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맏이와 장손은 또 다르다. 맏이는 딸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지만 장손은 보통 아들만을 지칭한다. 장손은 부계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 중 하나다. 가족을 가장 중시하는 집안에서 장손은 자신이 누리는 혜택의 크기만큼 거대한 중압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영화 <장손>의 주인공 '성진(강승호 분)'처럼 3대 독자라면? 더군다나 성진의 할아버지 '승필(우상전 분)'이 가족주의의 전통이 강고한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두부 공장을 세워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성진은 부모님을 살뜰히 모시고 조상들의 제사를 챙기는 정도를 넘어서 가업을 승계하고 온 가족을 짊어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동력을 얻어 전진할 수 있다. 성진도 현재 아버지 '태근(오만석 분)'이 운영 중인 두부 회사 '대명'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성진은 두부 공장 사장보다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고, 장손 역할이 못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전날에 과음한 후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합동 제삿날에 최대한 늦게 할아버지 댁으로 내려온 성진에게 가족은 택시에서의 구토처럼 게워 내고 싶은 부담 덩어리일지 모른다.
영화 <장손>은 성진과 가족들이 증조부와 증조모의 합동 제사와 할머니 '말녀(손숙 분)'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발생하는 사건들을 두부처럼 담백하게 맛보게 해 준다.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비극과 상처가 불거지고 여느 가족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다투지만 관객은 차분한 성진의 시점을 따라가며 이 가족의 역사를 관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 승필과 아버지 태근이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스친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 <장손>은 장하지 못한 장손들의 연대기다.
뛰어난 앙상블을 보여 준 배우들 사이에서 아버지 태근 역을 맡은 오만석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정중동의 카메라워크로 한국 농촌의 사계를 아름답게 포착한 장면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끝)
* 9월 4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진행된 <장손>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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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익스펜더블(Expendable),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것. 미키는 죽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린 한 인간이다. 쫓기듯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제대로 읽지도 않고 지원해버린 미키. 그들은 인류 발전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하에 인간에게 해로운 온갖 인체 실험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똑같은 신체, 똑같은 기억으로 완벽하게 휴먼 프린트를 한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뺑이’, 그것이 미키의 운명이다.
하찮은 독재자
마크 러팔로는 자신의 역할인 케네스 마샬 역으로 하여금 3년 전 촬영할 때는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This is over the top), 이제 와보니 너무 약한 연기(It‘s totally underplayed)였단 걸 깨달았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성별은 오직 2개라며 정체성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없게 시행 중인 ‘트럼프’가 떠오르고, 한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지난 12월 3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언자가 되어버린 것. 어느 나라에서 보아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형태는 보편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권력 있는 자들의 하찮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의 멍청함. 필모그래피 초기 단편작 <지리멸렬>부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세팅이다.
미키 17과 미키 18
크리퍼(Creeper)들에 의해 생존한 미키 17은 본부로 돌아와 미키18을 만난다. “I’m Fine.”을 말하던 미키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게 되는 계기이다. 크리퍼에게 구해진 미키 17과 그 사실을 모른 채 프린트된 미키 18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분리된’ 존재이기에 여기서 죽는다면 ‘REAL’ 미키는 죽는 것이란 두려움을 가진다.
“미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속 가장 많이 등장한 대사이다.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에 도대체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미키는 오직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 아닌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에게만 이 질문에 답한다. 항상 무섭다고. 영화 후반부, 마더 크리퍼(Creeper)는 ‘공평’을 말하며, 잡아둔 아이를 데려오고, 이전에 죽인 아이에 대한 공평함을 위해 한 명의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강인한 미키 18이 케네스 마샬과 함께 자폭하려는 순간, 수많은 죽음을 겪어왔던 미키지만 버튼 누르기를 주저한다. 케네스 마샬이 말한다.
“너도 죽는 게 두렵구나?”
“네가 인간이라는 거지.”
인간이기에 죽음은 두렵다. 미키를 실험체, 그저 고깃덩어리로 보았지만 그도 소중한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다.
소통과 사랑으로, 아이와 미확인 생명체 크리퍼(Creeper)
영화 속 도로시(팻시 패런)은 연구원 중 유일하게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녀는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소통의 고귀함’을 아는 인물이다. 미키에게 수명이 15분으로 연장되었다고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모두가 끔찍하게 여기는 미확인 생명체 크리퍼(Creeper)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미키에게 완성되지 않은 통역기를 건넨다. 이는 그저 실험체, 고깃덩어리로 인식하는 익스펜더블 미키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미확인된 생명체인 크리퍼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도로시’와 같은 존재가 현 시점 우리에게 꼭 필요하단 것을 표현한다. 좀처럼 로맨스 농도를 짙게 표현하지 않던 봉준호 감독이 나샤(나오미 애키)와 미키의 로맨스를 심도있게 그렸다. 어떤 성격의 미키든 간에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나샤, 같은 맥락이다. ‘대혐오의 시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갈라 치기가 만연한 세상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회의 반영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체험해 보려는 시도이다. 작금과 같은 시대에 더 넓은 세상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다정한 노력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통’과 ‘사랑’이라는 명확한 의미를 담은 <미키 17>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그리고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선언한다. 약간의 다정함 말이다.
미키 17에서 미키 반스로
미키는 한 마디로 ‘주관’이 없었다. 친구 (스티븐 연)에게 속아서 마카롱 가게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보증인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는 데 단 한 번도 싸우거나 원망도 않았다. 후반부, 미키가 휴먼 프린터를 터뜨리기 전 미키의 환상이 나온다. 휴먼 프린터 앞에 선 소스를 만드는 데 집착하던 일파 마샬(토니 콜렛)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치 강인한 미키 18과 같이 “꺼져.”라고 확실히 말한다. 파이아키아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17에서 18로 넘어가는 나이가 성인이 되는 나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미키 17> 영화 전체가 멍청하고 찌질할뿐더러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던 미키가 1부터 18까지의 다양한 성격을 경험하며 자신의 소중한 자아를 확립시키기까지의 성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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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약속을 지키고 자비롭지 않지
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사리타 초우드리, 랄프 이네슨, 케이트 딕키
러닝타임: 130분
국가: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영국
*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관람 후에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딱 기사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아서왕의 조카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아서왕과 여왕, 원탁의 기사들이 모인다. 아서왕은 평생에 조카를 자신의 옆에 앉힌 적이 없었으나 그날따라 누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카를 옆으로 불렀다. 마녀라고 불리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을 곁에 두기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리고 왕의 부부는 조카 가웨인을 부추긴다. 무릇 기사라면 무용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녹색 기사, 나무 기사가 나타난다. 아마도 어머니가 자식이 없는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만든 상황인 듯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나무 기사는 가장 용맹한 자 앞으로 나와서 자신과 대결을 하라고 한다. 자신의 목을 베든 뺨에 상처를 내든 이기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재물을 줄 것이나 대신 1년 뒤 북쪽의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가웨인은 아서왕은 그 성스러운 검을 하사 받고, 대결에 나섰다. 말리는 듯 말리지 않고 부추기는 아서왕 부부의 의중은 알 길이 없었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자세를 잡는 가웨인가 달리 녹색의 기사는 자신의 도끼를 내려놓고 목을 내밀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목을 내리칠 것이냐, 1년 뒤를 생각해서 살짝 상처만 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가웨인에게 달려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이 쏠린 적이 있었던가... 그는 아서왕에게 빌린 칼을 크게 휘둘러 녹색 기사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렸다. 가웨인의 승리였다. 하지만 잠시 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목이 잘린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을 가지고 떠났다.
약속이라는 게 이렇게나 피 말리는 일이었던가. 계절이 지나고 날이 지나고 그동안 술을 마시고 무용담도 아닌 무용담을 늘어놓고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수록 초조함은 늘어만 갔다. 아, 왜 목을 베었을까?
그리고 아서왕이 찾아온다. 그냥 게임일 뿐이라며 부추겼으면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면서 녹색 예배당을 찾아가라고 말이다. 가웨인은 안 가고 싶은 것이 분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등 떠밀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엄마가 메고 있으면 꼭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해준 허리띠를 멘 채로.
여행이라고는 모험이라고는 떠나본 적 없는 그의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겪는다고 했다지만 실제로 시련이 맞는지 싶었다. 시련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을 지나오다 보니 사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웅담들은 MSG를 팍팍 섞은 것이었다는 슬슬 깨닫게 된다.
중간에는 이미 데드 엔딩이 나왔다. 이것저것 빼앗기고 묶인 채로 시간이 흘러 가웨인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뼈다귀가 되어서!
하지만 시간은 거슬러 간다.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그 누군가가 아직은 이야기를 끝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거슬러 올라간 가웨인은 방법을 찾아낸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누가 누구에게 해주는 이야기인 걸까? 분명 화자가 있었는데 그 화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동행하던 이 여우가 가장 유력해 보이기는 하다. 여우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녹색 기사의 정체도 궁금하다. 여우가 녹색 기사는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엄마나 아서왕이 아닐까 싶다가도, 가웨인의 숨겨진 여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이런저런 시련을 겪은 가웨인은 결국 녹색 예배당을 찾았고, 기사를 만난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서 자연치유 중인 그의 곁에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잠에서 깨어난 녹색 기사는 가웨인에게 준 것을 그대로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다. 용감하게 자신의 목을 내주려던(사실 아닌 것 같지만) 잠시의 시간을 달라고 하고 달아난다.
달아난 시간 속에서 가웨인은 미래를 맞이한다. 배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전쟁도 하고, 자식을 잃고, 결국 패배의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정신을 차린 가웨인은 도망가는 선택을 버리고 당당하게 목이 잘리는 엔딩을 선택한다. 아마도 자신의 용감한 모습에 녹색 기사가 감명을 받아서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영웅의 서사가 그리했듯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약속을 지킨다. 가웨인이 선몽으로 미래를 본 것인지, 혹은 많은 것을 겪고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목을 자르면 목을 자르고, 작은 상처를 내면 상처를 낸 뒤 명예도 주고 친구도 되어주기로 했던 약속은 약속이었다. 엄청 자세하게 다 설명해 줬음에도 목을 딱! 내리친 가웨인이니 녹색 기사는 자비가 없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그것은 약속과 별개의 문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지만 지금 찾아온 위기처럼 자비롭지는 않다. 자연은 주는 대로 돌려준다. 지금 닥친 현실이 딱 그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크게 훼손하고 다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거나 약속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무두와 가웨인,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과 똑 닮아 있다. 그렇게 훼손했으면서 자연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도 매우 오만이다. 자연은 받은 그대로 돌려준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흔한 영웅 서사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환경 영화였다. 그것으로 좋았다.
영웅의 이야기이면서 장르에 액션이 없는지도 명확한 영화다. 그렇기에 '기사'라는 이름에 현혹되어서 액션을 기대하고 가서 본다면 아주아주 실망할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않길 바란다.
영상은 정말 대단하다. 막 화려하다고도 할 수 없고, 밋밋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빠져드는 색감을 가지고 있다. 숲의 색과 마을의 색이 참 곱게 느껴졌다. 그리고 배경 음악은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배경 음악들은 <그린 나이트>의 세계관과 매우 잘 어울렸고,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구성이 정신산만한 느낌이 있었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좀 더 친절하게 알려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했을 때 나오는 영화의 설명이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영화를 한 번 본 것만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칭찬해 마다하지 않는 영상미와 음향(+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괜찮다고 소문난 원작)을 생각하면 조금은 더 친절해도 되지 않았을까?
배우 얘기를 조금 하면, 주연배우 '데브 파텔'은 정말 엄청 고생했겠다. 얼굴이 익숙해서 어디서 본 배우인가 했더니 <슬럼독 밀리네어리>에서 나온 배우였다. 다른 작품들도 많이 했는데 기억이 안 나니 임팩트 있는 작품은 이게 두 번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놀랐던 배우는 '케이트 딕키'였다. 아서왕이 왕일 때 여왕의 역할을 맡았는데 암만해도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익숙하다 못해 찰떡이어서, 보자마자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떠오른 그 여인, '리사 아린'이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미친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존 아린의 아내 그 리사 아린이 케이트 딕키였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에 중세시대의 의상은 그녀가 아서왕의 배우자인지 존 아린의 배우자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혹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왕좌의 게임> 인가 싶을 정도로. 그만큼 잠깐의 출연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내가 <왕좌의 게임>을 본 탓일 수도 있지만.
롯데시네마에서 받은 티켓은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을 벤치마킹한 것인지, <그린 나이트>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소장용 굿즈로는 안성맞춤이다. 티켓은 사진 말고 실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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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베 얀손 영화 후기 - 삶과 캐릭터란 자신의 Symbol을 보여주는 하나의 브랜드이다.
핀란드의 유명한 작가이자 무민이라는 캐릭터를 탄생 시킨 토베 얀손은 유명한 조각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토베 얀손은 아버지의 재능을 닮아서인지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화가이면서 삽화가이기도 했던 토베 얀손의 삶은 어땠을까? 영화 초반부에서 전쟁이 끝난 직후이자 1945년에 토베 얀손은 엄격한 예술가 아버지를 피해 새로운 거처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 비비카라는 시장의 딸이자 각본 연출가를 만나 동성애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토베 얀손과 비비카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그만큼 비비카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는 토베 얀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끊임없이 성적인 노출 장면이 영화 겹겹에 나오는데 무민이라는 캐릭터가 탄생되기까지에는 토베 얀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다.
토베 얀손이 비비카를 만나고 무민이라는 캐릭터를 그리면서 아동용 만화가가 되기 시작한다.
토베 얀손에게는 비비카라는 여성이 있었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없이 이 둘은 거침없이 사랑을 나누고 확인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서로 예술을 좋아하며 예술가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무민이라는 캐릭터가 지금까지 인기를 끌어온 것은 토베 얀손이 삶을 멋진 모험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어 담긴 토베 얀손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것 같다. 자신의 아버지는 토베 얀손이 그리는 무민이라는 만화가 예술이 아니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베 얀손을 인정하게 되고 각본 연출가인 비비카 덕분에 연극으로도 탄생하게 되어 아동들에게도 인기를 끌게 된다. 만약 자신의 그림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무민이라는 캐릭터는 없었을 것이다.
무민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고난이 있었다.
사회주의적인 분위기가 있는 핀란드에서는 신문에 아동용 만화를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자유로운 연애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에서도 성(SEX)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보수적인 것보다 진보적이다. 거침없이 사랑을 하고 거침없이 헤어지는 당시 핀란드 시대상의 분위기는 불륜을 매도하기보단 수용하는 사회였던 것 같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성적인 장면들과 노출은 자신의 신체 노출에 대한 개방적인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태도가 보인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관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수많은 박수갈채를 받은 토베 얀손의 무민 연극은 당시 자유로운 핀란드 시대상의 분위기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토베 얀손이 무민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킴으로써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동화 작가로서 그녀가 살아온 인생 경험과 철학은 무민이라는 캐릭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찌 보면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을 다르다고 억압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포용을 보여주는 게 맞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토베 얀손이 탄생시킨 무민이라는 캐릭터도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모험적인 삶을 좋아했던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표현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에게 무민은 어떻게 생각되고 각인되고 있을까?
삶이 모험이라면 캐릭터는 나 자신을 표현하는 심볼(Symbol)이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한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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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마른 마을, 메마르지 않은 사건
- 저는 미스터리와 스릴러 장르에 환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장르의 것이라면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소설, 만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죠. 그런 제게 웰메이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한 편이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설렘으로 양껏 부푼 마음을 안고 헐레벌떡 영화를 감상하고 돌아왔습니다. 과연 <드라이>는 진성 미스터리 스릴러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3월 16일(수)에 진행된 <드라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드라이>는 2022년 3월 23일 국내 개봉했습니다.드라이The Dry<드라이>는 호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연방 요원 '에런'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친구였던 '루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온 '에런'은 일가족을 살해한 후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루크'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머무르며 사건을 조사하는 '에런'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삭막하기만 합니다. 일 년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말라버린 땅처럼 말이죠.그도 그럴 것이 '에런'은 과거 여자친구 '엘리'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아 마을을 떠난 인물입니다. '엘리'의 유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요. '에런'은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의 유가족이 일가족 살인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발견되고,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하나로 연결됩니다.가뭄으로 황폐하게 메말라가는 마을과 달리 과거의 사건은 메마르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에런'이 마을에 남아 사건을 조사하는 이유도 죽은 '엘리'를 향한 마르지 않은 죄의식 때문이죠. 영화는 계속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보여주는데요. 황폐하게 말라버린 마을의 현재 모습은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생기 넘치던 과거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 ⊙영화 <드라이>는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윤영천 작가의 책 <미스터리 가이드북>에 따르면, 미스터리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고, 스릴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집중하는 장르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증거를 되짚어가며 일가족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조사하는 현재 시퀀스가 미스터리, 필히 '엘리'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엘리'의 죽음 이전에 벌어진 일을 묘사하는 과거 시퀀스가 스릴러에 해당합니다.그러나 이 영화는 장르의 전형성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드라이>에는 미스터리 장르의 재미인 사건의 통쾌한 해결이나 스릴러 장르 특유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긴장감 따위가 없습니다. 촬영 기법, 편집 효과, 사운드 등으로 그런 감정들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잔잔하게 현재와 과거의 사건을 짚어가며 인물의 감정과 인물 간의 갈등을 고스란히 표현할 뿐이죠.⊙ ⊙ ⊙이러한 시도가 어떤 관객에게는 색다름으로, 어떤 관객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후자였습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의 가장 핵심 요소는 이야기와 플롯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르의 전형성을 탈피한 이 영화의 도전 정신이 빛나기엔 이야기는 개연성이 부족했고, 플롯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일례로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두 사건(일가족 살인사건과 '엘리'의 죽음)이 실은 연관된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지만 두 사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개별적인 사건이었죠. 앞서 이야기했던 '엘리'의 유가족이 일가족 살인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 역시 단어의 중의적 의미로 인한 오해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두 사건의 연관성을 억지로 만들어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또 '에런'은 영화 포스터에 쓰인 카피처럼 '살인자에서 경찰로 돌아'온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날의 행적을 의심받았을 뿐이죠. 장르의 매력을 어필하고자 과장한 카피로 관객을 유인한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기만을 정말 싫어합니다.⊙ ⊙ ⊙영화 <드라이>는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큰 작품이었습니다. 저처럼 장르적 매력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택하신다면 기대 만큼의 만족감은 느끼실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죠. 두 장르를 혼합해내는 색다른 방식을 경험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Summary불미스러운 일로 고향을 떠났던 '에런'은 친구 '루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루크'. 유가족의 요청으로 사건을 파헤치던 '에런'은 여자친구였던 '엘리'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묻혀있던 두 개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출처: 씨네21)Cast감독: 로버트 코놀리출연: 에릭 바나, 제네비에브 오렐리, 키어 오도넬, 존 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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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사제들의 뒤를 잇는 "검은 수녀들" / 단순하지만 독특한 설정 / 크게 무섭지 않은 순한 맛 호러 /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검은 수녀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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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엔 괴도 키드가 주인공? / 명탐정 코난 극장판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 핫토리와 카즈하의 연애사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후기입니다.
*평소 코난 극장판처럼 쿠키영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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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씽2게더> 1차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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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소년심판> 티저 예고편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그 나이에. 감히.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소년심판》 2월 25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