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샤2024-09-09 22:22:17
장하지 못한 장손들의 연대기
영화 <장손> 리뷰
둘 이상의 형제자매 관계에서 맏이란 무엇일까? 가장 먼저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동생(들)이 태어난 후에는 관심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 경쟁 상태에 내몰리는 것이 맏이다. 이것이 전 세계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맏이가 감내해야 하는 보편적 숙명이라고 한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맏이의 의미가 사뭇 더 엄중하다. 한국의 가족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맏이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학업을 포기한 맏딸이 남동생의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사태는 이제 거의 없겠지만 오늘날에도 맏딸이나 맏아들은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해 부모님께 효도하고 집안이 기울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맏이와 장손은 또 다르다. 맏이는 딸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지만 장손은 보통 아들만을 지칭한다. 장손은 부계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 중 하나다. 가족을 가장 중시하는 집안에서 장손은 자신이 누리는 혜택의 크기만큼 거대한 중압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영화 <장손>의 주인공 '성진(강승호 분)'처럼 3대 독자라면? 더군다나 성진의 할아버지 '승필(우상전 분)'이 가족주의의 전통이 강고한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두부 공장을 세워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성진은 부모님을 살뜰히 모시고 조상들의 제사를 챙기는 정도를 넘어서 가업을 승계하고 온 가족을 짊어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동력을 얻어 전진할 수 있다. 성진도 현재 아버지 '태근(오만석 분)'이 운영 중인 두부 회사 '대명'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성진은 두부 공장 사장보다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고, 장손 역할이 못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전날에 과음한 후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합동 제삿날에 최대한 늦게 할아버지 댁으로 내려온 성진에게 가족은 택시에서의 구토처럼 게워 내고 싶은 부담 덩어리일지 모른다.
영화 <장손>은 성진과 가족들이 증조부와 증조모의 합동 제사와 할머니 '말녀(손숙 분)'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발생하는 사건들을 두부처럼 담백하게 맛보게 해 준다.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비극과 상처가 불거지고 여느 가족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다투지만 관객은 차분한 성진의 시점을 따라가며 이 가족의 역사를 관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 승필과 아버지 태근이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스친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 <장손>은 장하지 못한 장손들의 연대기다.
뛰어난 앙상블을 보여 준 배우들 사이에서 아버지 태근 역을 맡은 오만석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정중동의 카메라워크로 한국 농촌의 사계를 아름답게 포착한 장면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끝)
* 9월 4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진행된 <장손> 시사회에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준수하지만, 류승완이라서 끝내 아쉽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화학 공장이 들어선 군천 앞바다. 바닷물이 더러워지자 해녀들은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고 만다. 이에 '춘자'(김혜수)는 리더 '진숙(염정아)'을 설득해 살 길을 찾아낸다. 바닷속에 던진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밀수의 세계가 바로 그것. 그러나 밀수 작업 도중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고, 둘도 없는 친구였던 진숙과 춘자는 불구대천 원수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춘자는 진숙 앞에 다시 나타난다.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가 군천에서 밀수판을 키우기로 했으니 다시 협업하자는 것. 사고 이후 생계가 막막했던 진숙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군천 밀수판의 주인 '장도리'(박정민)가 사업에 끼어들면서 춘자의 계획은 조금씩 꼬여 버리고, 군천 앞바다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류승완이라서 기대했다
대한민국에서 믿고 보는 흥행 감독 중 하나인 류승완. 그의 필모그래피는 퍽 흥미롭다.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부당거래>부터 그의 영화는 자기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욕구를 저격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군함도>로 실패를 겪은 뒤 담백하고 깔끔하게 스토리를 담아내는 데 집중한 <모가디슈>를 내놓은 것처럼.
그래서 류승완 감독의 <밀수>는 기대가 컸다. 본연의 색깔, 대중성, 새로운 시도가 한 데 어우러진 듯 싶었기 때문이다. 예고편은 짧게나마 감독 특유의 색깔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B급 액션 범죄영화 같은 분위기, 만화 같은 연출, 센스 있는 대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해봐야 입만 아픈 캐스팅은 케이퍼 무비에 최적화됐고, 해녀가 참여한 밀수라는 소재와 수중 액션은 익숙한 장르에 신선함과 계절감을 더할 듯 보였다.
결과물도 나쁘지는 않다. 여름 시장 텐트폴 무비의 첫 주자는 충분히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끝끝내 아쉬운 지점도 있다. 특히 아쉬움은 결말에 집중된다. 류승완의 각본은 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밀수>는 마지막 순간 과감함이 살짝 부족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김혜수와 염정아가 빛나는 이유
<밀수>의 스토리는 전반적으로 무난하다. 극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밀수>에서 의외로 가장 눈을 사로잡는 지점 역시 스토리다. 예고편에서 미처 드러나지 않은 짙은 우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혜수와 염정아의 얼굴을 한 채 스크린을 사로잡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영화는 1970년대 감성으로 가득하다. 단순히 레트로풍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산업화 시대의 감성이 짙다. 방법과 절차에 관계없이 생존이 최우선 되는 그 시대의 얼굴을 비춘다. 당장 해녀들은 굶어 죽을 위기다. 군천 바다 옆에 생긴 공장 때문에 전복이 다 폐사하는 지경이니. 그들이 밀수업에 가담하는 이유다.
그 중심에는 진숙과 춘자가 있다. 춘자 주도로 금괴를 담은 상자를 옮기다가 세관에 적발된 해녀들. 체포되는 과정에서 진숙은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반면, 춘자는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진숙은 춘자가 보상금을 챙기기 위해 밀고 했다고 오해하고, 춘자는 자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자책하며 오해를 풀지 않는다. 영화는 이처럼 오해가 쌓여 애정이 애증이 되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악을 쓰는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그러다 보니 전반부는 느슨한 듯 싶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감정선은 음악 덕분에 배가된다. 음악감독 장기하가 만든 70년대풍 신곡과 70년대 가요가 곳곳에서 흘러나오며 구슬픔과 애달픔을 강조해 준다. 미장센도 한몫한다. 다방과 나이트 등 당시 시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한 세트, 의상, 소품, 프로덕션 디자인 덕분에 진숙과 춘자의 삶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충분하지 못한 자맥질
다만 전반부 드라마가 주는 감흥에 비해 후반부의 장르적 쾌감은 다소 부족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짜임새가 문제다. 다이아몬드 밀수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는 분명 화려하다. 가이 리치의 범죄 영화 같다. 그는 한 편의 영화를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과 시간대로 분해한 뒤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짜 맞추는데 능한데, <밀수>도 마찬가지다. 하루 전과 하루 뒤, 몇 시간 전과 몇 시간 후를 넘나들며 관객을 현혹하려 한다.
정작 내실은 부족하다. 돈이나 보석을 쟁취하려는 이전투구가 없어서 케이퍼 무비 특유의 긴장감을 찾기 어렵다. 각자 목적이 다르다는 게 일찌감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목적의 무게감과 톤도 제각기 다르다. 일례로 진숙의 계획에 비해 장도리의 목적은 너무 가볍다. 진숙은 사무친 원한을 풀려고 하고, 장도리는 단순히 이익을 좇는다. 그러다 보니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각 캐릭터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문제의 금괴나 다이아몬드 모두 그저 장르의 논리에 따라오는 부속물에 불과하다.
물론 불협화음을 없애려는 시도는 있다. 먹먹한 서사와 장르를 엮는 역할을 춘자에게 맡긴다. 하지만 춘자에게도 이 임무는 벅차다. 그녀가 관객을 사로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녀가 숨긴 이야기도, 모든 사건의 전말도 클라이맥스 직전에서야 밝혀지기 때문이다. 결국 색깔도 온도도 다른 두 장르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유리되어 있다. 화려한 편집과 기막힌 선곡이 때로는 두서없이 느껴지고, 초반부터 쌓아온 빌드업에 비해 마지막 쾌감이 부족한 이유다.
장르의 관성에 잡아먹히다
쾌감이 부족한 다른 이유는 결말에서 찾을 수 있다. <밀수>는 더 과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몸을 아끼는 듯하다. 진숙은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다. 악인들을 처절히 징벌한다. 그런 그녀에게 다이아몬드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다이아몬드와 금괴는 그간의 고생을 전부 안다는 듯이 해녀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마무리다.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말의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결말이 뻔해서가 아니다. 씁쓸하기 때문이다. 춘자는 몰라도, 사실 진숙은 단 한 번도 다이아몬드가 목적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잃었던 우정을 되찾고, 가족의 복수를 하고, 빼앗겼던 아버지의 배도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에게 금괴와 다이아몬드는 값비싼 물건이기 이전에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그러니 아픔 가득한 다이아몬드가 그녀에게 과연 적절한 보상일지는 의문이다.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에서 뻔한 길을 가지 않은 전적이 있다. 남북한 사람들은 함께 부둥켜서 눈물을 흘리는 대신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에 비하면 <밀수>의 결말은 편의적이다. 케이퍼 무비이니 살아남은 이에게 전리품을 안긴 셈이다. 장르적 관습에 캐릭터 개개인의 서사가 종속된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텐트폴 무비로서 깔끔한 마무리인 것은 맞다. 다만 '류승완이니까' 아쉬움이 남는 끝맺음일 따름이다.
그래도 류승완은 류승완이다
하지만 유달리 영화에 생동감이 느껴지는 몇몇 장면 덕분에 호불호가 갈릴 단점 내지는 약점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는 고민시의 존재감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권 상사의 역할도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의 중심을 염정아 김혜수가 잡고 있다면, 조인성은 마치 액션을 향한 류승완 감독의 열망이 담긴 캐릭터 같다.
사실 권 상사는 전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판을 깔고, 판을 키우고, 퇴장한다. 하이스트 영화에서 꼭 있어야 할 캐릭터다. 그런데 이 전형성이 오히려 반갑다. 등장 자체는 많지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불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드라마는 권 상사가 칼을 빼 든 순간 갑자기 장르를 전환한다. 차분하다면 차분하고 답답하다면 답답한 전개가 그제야 본격적으로 풀린다.
언제나 류승완의 장기인 액션도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물론 액션 분량 자체가 많지는 않다. 전작인 <모가디슈>도 후반부 추격전을 제외하면 액션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적은 느낌이다. 스케일의 차이도 한몫한다. 그러다 보니 텐트폴 무비에 기대할 만큼 화끈한 임팩트를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퀄리티는 살아있다.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나이프 액션은 박진감과 타격감을 제대로 전달하며, 의외로 잔인한 면도 있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수중 액션도 인상적이다. 보통 한국 영화의 액션은 수평적인 경우가 많은데, 바닷속이라는 환경을 살린 수직적인 움직임이 특히 신선하다.
<밀수>가 류승완 감독의 정점은 아닐 것이다. 완성도 면에서는 전작인 <모가디슈>도 넘어서지 못했다. 상업적으로는 차기작인 <베테랑 2>를 기대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 본연의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력 포인트는 확실하다. 개성, 완성도, 대중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솜씨도 여전하다.
관건은 흥행이다. 손익분기점은 관객 330만 명. 전통의 강자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간신히 300만 관객을 넘기는 극장 분위기를 고려하면 마냥 낙관적이지는 않다. 다행히도 개봉 타이밍은 잘 잡았다. 1주일 동안 온전히 극장가를 장악할 수 있다. 출발도 좋았다. '문화의 날' 덕분에 첫날 30만이 넘는 관객이 <밀수>를 선택했다. <더 문>과 <비공식작전>이 쫓아오기 전에 <밀수>가 과연 얼마나 도망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Acceptable 무난함
서사와 장르의 미묘한 엇갈림
-
- 나에게 확신이 없을 때, 정성을 담은 영화 한 편
*이 글은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때 참고해 주세요 : )
유난히 힘들고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다. 하루를 곱씹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파고든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까?'
'내일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누군가 슬퍼할까?'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피곤에 지친 눈은 초점을 잃는다. 애써 노력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의심이 해결될 때까지 질문하고 파헤치는 방법도 있다. 영화 <그대 너머에>는 꼬리를 무는 의심을 통해 답을 찾으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영화 <그대 너머에>
영화 <그대 너머에>는 무명의 영화감독 '경호(김권후)'가 첫사랑이자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인숙(오민애)'과 그녀의 딸 '지연(윤혜리)'을 만난 후, 기억의 미로에 빠지는 내용을 담았다. 기억과 망각을 소재로 세 명의 등장인물이 인간관계와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영화의 철학적 주제와 실험적인 연출을 인정받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영화는 자칫 신파로 흘러갈 법한 소재를 독특한 창의력으로 풀어낸다. 전체적인 구조부터 장면 하나에 이르기까지 허투루 만든 부분이 없다. 일단 영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전반부와 중반부가 '경호'의 기억이 되풀이되는 듯 반복된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전반부와 똑같이 행동하지만, 현재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기계처럼 움직인다. 마치 '경호'의 존재와 상관없다는 듯 잘 짜인 연극 같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의 대비는 장소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전반부는 모든 가능성이 열린 야외에서 시작해서 '경호'의 집인 실내에서 끝이 난다. 이야기가 중반부로 들어설 때, '경호'는 실내에서 다시 야외로 이동한다. 충격에 빠진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의'지연'을 따라가는 골목길은 주인공들의 복잡한 기억을 상징한다.
영화의 장면 하나에도 각각의 의미가 숨어있다. 특히 좁은 골목길에서 촬영된 롱테이크 장면과 360도 VR 촬영처럼 다양성 영화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연출이 돋보인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개미의 초근접 접사는 자연 다큐멘터리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섬세하게 묘사된 개미 장면은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특수렌즈로 살아있는 개미를 직접 촬영해서 만들어졌다.
영화 <그대 너머에>의 '박홍민' 감독은 개미 장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치던 개미를 관찰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영화 제작에 임했다.'라고 답했다.
감독의 말처럼 개미 장면은 <그대 너머에>라는 제목의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대'는 사전적 의미로 듣는 이를 높여 이르는 2인칭 대명사로, 세 명의 인물 중 누구를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 또한 제목에는 그들이 각자가 가진 슬픔과 답답함 너머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갔으면 하는 응원이 담겨 있다. 영화 속 개미는 장애물에 막히고 넘어지지만, 계속 앞으로 전진한다.
Q. 지금 당신의 모습에 의심이 생기나요?
영화 <그대 너머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 한 통 같다. 영화를 보게 될 평범한 존재들을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창작자의 고뇌와 순수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매 장면마다 담긴 정성스러운 질문을 보며 스스로의 답을 생각하게 된다.
영화 <그대 너머에>를 예고편으로 미리 만나보세요▼
영화 속 세 사람도 나름의 답을 내린다. 딸을 기억하지 못하던 '인숙'은 '딸'이라는 역할이 아니더라도 '지연'을 찾아낸다. 그들은 과거에 '경호'를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편안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는다.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경호'는 세상을 초월하여 영원히 시나리오를 쓰는 존재가 된다.
그들의 답이 꽉 막힌 해피엔딩이나 완벽한 답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의심 끝에 찾은 답도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답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을 가로막은 장애물 너머로 향할 수 있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잃을지라도 다시 전진할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렇게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다 보면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 당신이 너무 많이 울거나 자책하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좋겠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좌절과 버티기 위한 희망을 고민하는 밤은 생각보다 다정할 테니까.
* 제가 참석한 시사회에는 감독과 배우분들의 무대인사가 있었는데요.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걸 보고 정성스러운 영화라는 확신을 가진 것 같아요.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아 '박홍민 감독님의 인터뷰를 함께 올립니다!
-
- 서툴지만 그만큼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
초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친구’란 어떤 존재였을까? 어린 시절, 내게 ‘친구’는 때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느껴질만큼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꽤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 모습만큼은 자주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보다도 더 예민하고, 위태롭고, 흔들리기 쉬웠던 시기였기에 그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전전긍긍하곤 했다. 이러한 기억들의 색깔은 내가 커가면서 점점 흐릿해졌지만, 이 영화를 본 순간 다시금 선명한 원색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친구 사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항상 혼자이던 선에게 ‘전학생 지아’라는 새 친구가 생긴다. 둘은 금방 친해져서 여기저기 같이 돌아다니고, 서로의 집에도 놀러가며 행복한 여름의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선은 지아에게 밝게 인사하지만 지아는 그런 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방학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지아는 새 친구 ‘보라(이서연)’를 사귀었다. 보라와 보라의 친구들은 타인의 말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오해해서 듣고,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친구에게 함부로 말하곤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지아는 보라와 어울리며 선과 멀어진다. 하지만 이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라와 보라 친구들의 다음 괴롭힘 ‘타겟’은 지아였다. 무리에서 ‘낙오’된 지아는 선을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하였고, 결국 감정이 쌓이고 쌓인 지아와 선은 몸싸움까지 벌인다.
피구
이 영화는 피구 경기로 시작해서 피구 경기로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피구 경기를 위해 각자의 팀을 뽑는 상황 속에서의 선의 모습이다. 선은 자신이 뽑히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팀원을 뽑는 두 아이를 계속 번갈아 쳐다본다. 다른 친구들이 뽑히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자신이 마지막까지 뽑히지 않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입술을 뜯으며 초조해하면서 선은 조용히 기다린다. 그런 선을 향해 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선 못한단 말이야’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아이들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해도 초등학생의 아이에게 이 말은 마음 한 구석에 꽤 오래 남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예민하곤 했다. 이런 말 하나에도 금방 위축되곤 했다. 그렇게 피구 경기가 진행되던 중, 선은 갑자기 상대편으로부터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선은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너 아웃이야’, ‘빨리 나가’라는 등쌀을 견뎌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선이 금을 밟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에서 외톨이인 선의 상황과 선을 대하는 반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들은 선을 향한 심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피구 경기는 지아가 전학 오고 선과 멀어진 이후에 이루어진 경기이다. 지아는 상대편인 선을 주저없이 공으로 맞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보라는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의식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세 번째 피구 경기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지아와 보라가 멀어지고, 지아와 선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이루어진 경기이다. 첫 번째 피구 경기에서 아무도 자신의 팀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던 선의 상황이 이제는 지아에게 일어난다. 결국 맨 마지막으로 뽑힌 지아는 앞선 선의 상황과 똑같이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지아는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주변 아이들은 지아를 둘러싸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한다. 이런 지아를 향해 선은 ‘한지아 금 안 밟았어. 내가 봤어.’라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지아와 선은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서로를 바라본다. 날이 서 있는 눈빛이 아닌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피구’는 우리들 모두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빠짐없이 해 본 경기이다. 반 친구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경기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폭력적인 경기였다. 팀을 정할 때에는 자연스레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체력이 조금 약한 친구가 남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게 된 그 심정은 생각보다 더 속상하다. 경기를 진행할 때에도 선과 지아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게 대뜸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선과 지아의 상황에 처한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이렇듯 피구는 몇몇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곤 하는 폭력적인 경기였다.
김밥
자신의 집에 놀러온 지아를 위해 선은 지아가 좋아하는 오이김밥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를 재촉한다. 서로에게 장난도 치고, 다정해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우연히 지아가 목격한다. 지아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떠났다. 그래서 지아는 엄마를 보고 싶어도 당장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선과 선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약간 심술이 난 지아는 선이 권하는 오이김밥을 거절하고 옆에 있던 과자를 먹는다. 평소와 조금 다른 지아의 모습을 눈치챈 선은 더 이상 김밥을 권유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들은 자신을 대하는 친구의 미묘한 변화를 종종 쉽게 눈치채곤 했다. 어쩌면 성인이 된 지금보다도 더 쉽게 그런 상황들을 눈치챘고, 그래서 더 걱정하곤 했다.
한편, 방학이 끝나고 더 이상 자신과 놀지 않는 지아에게 선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이후 소풍날, 선은 혼자 있는 지아에게 다가가 엄마가 싸 주신 김밥을 함께 먹자고 한다. 김밥을 먹는 지아를 보며 선은 조금은 안심한다. 자신과 함께 놀지 않던 지아가 자신이 건넨 김밥을 먹는 모습을 본 지아는 약간의 희망도 얻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여기저기 놀러가며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희망. 그 시절의 예민했던 우리들은 이런 사소한 친구의 변화에 또 금세 행복해지곤 했다. 하지만 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날선 말이 오가고, 결국 흥분한 지아는 선에게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동시에 선이 가져온 김밥은 바닥에 떨어진다. 흙으로 더럽혀진 김밥처럼 친구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선의 마음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럼 언제 놀아?"
선의 동생 ‘윤(강민준)’은 친구 윤호와 놀다가 자주 맞곤 했다. 선은 이런 동생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너에게 상처를 주고 장난도 심하게 하는 친구랑 왜 계속 같이 노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선은 동생에게 ‘윤호가 너를 때린만큼 너도 똑같이 때려야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이를 들은 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또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이 상황이 선의 상황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선은 지아에게서 모진 말도 들었고, 지아에 대한 사실을 반 친구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지아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고, 친구라고 생각한 지아가 자신의 곁을 떠나 다시 홀로 지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아를 신경 쓰고 있다. 지아가 자꾸 눈에 밟히고, 지아에 대한 말들이 함부로 오고 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지아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함께 많은 추억을 쌓은 나의 친구이니까. 지아와 계속 갈등하던 선은 그냥 친구와 놀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들은 뒤, 피구 경기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봉숭아물과 매니큐어
여름방학 중에 선은 지아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준다. 봉숭아를 빻아서 손톱에 하나하나 올리고, 비닐로 묶은 뒤 물드는 동안 기다리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진하게 물든 손톱의 봉숭아물처럼 둘의 관계도 오래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방학이 끝난 뒤 보라와 친해진 지아는 그 손톱 위에 보라의 매니큐어를 칠한다. 그렇게 선과의 추억이 담긴 봉숭아물은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여름방학 동안 보냈던 선과의 추억들도, ‘선’이라는 소중한 친구도 잠시 잊혀졌다.
이후 학원에서 울고 있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넨 선은 보라의 매니큐어를 받게 된다. 선의 손톱에 남아 있던 봉숭아물도 보라의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선도 지아가 미웠다. 친구인 자신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는 지아가 미웠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 피구 경기를 하며 난감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 선의 손톱에는 어느덧 매니큐어가 모두 없어지고, 끝에 봉숭아물만 조금 남아 있다. 손톱 끝에 아주 조그맣게 남겨진 봉숭아물처럼 선과 지아의 관계는 거의 끝에 다다른 상태였다.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해 이 관계가 회복될 수도, 혹은 영영 틀어질 수도 있는 상태였다. 이때, 선이 지아를 도움으로써 먼저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지아가 이 용기에 화답해줄 차례다. 선이 먼저 지아의 손톱에 예쁜 빛깔을 선물해준 것처럼, 지아가 선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면 된다.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또다른 소중한 추억으로 그렇게 뒤덮으면 된다.
우리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선의 눈빛은 마구 요동치고 있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고, 어정쩡하게 웃어보이고, 혹시 자신에게 화난 게 있는 거냐며 조심스레 물어보는 동안 계속 그 눈빛은 흔들리고 있다. 반면 방학 동안 지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참 밝고 맑다. 오랜만에 생긴 자신의 친구가 그저 좋다. 지아의 눈빛은 보라를 만나기 전과 후가 확연히 대비된다. 방학 동안은 선을 다정하게 바라보지만, 보라와 어울리면서부터는 선을 쌀쌀맞게 바라보곤 한다. 보라의 눈빛은 항상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 동시에 가장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다. 지아와 친해졌을 때는 마냥 다정하다가도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바라볼 때와 자신을 제치고 1등을 했다는 지아를 바라볼 때는 또 한없이 날카롭다. 이 영화는 이렇게 배우들의 눈빛을 따라가다보면 그 감정선을 매우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나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마주한 지아와 보라의 몇몇 모습들을 통해 나는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어른들의 세계보다 더 예민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때로는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했고, 때로는 새로 사귄 친구가 더 좋다는 이유로 불과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구와 거리를 두기도 했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영악해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이런 과거의 내가 계속 생각났고, 잠시는 잊고 지내던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띈 몇몇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워졌고, 슬퍼졌다.
선과 지아, 보라를 마냥 질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게 우리들의 모든 세상이었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서툰 우리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선이었고, 누군가는 지아였고, 또 누군가는 선과 지아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처럼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 이 영화는 서툴지만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다. 그리고 선, 지아, 보라의 이야기를 먼저 건넴으로써 자연스레 관객들이 어린 시절의 자신들을 기억해내고, 잠시 넣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남아있던 어릴 적 기억을 계속 쿡쿡 쑤셨고, 자칫 방심하면 그 기억을 금방이라도 끄집어낼 것 같아서, 그럼 바로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마주했을 때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다. 온 마음을 다 주고, 그로 인해 상처받아도 다시 또 내 마음을 주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너, 우리들이 생각났다. 이 영화를 보고 서툴고 간절했던 그 시간들을 보낸, 어쩌면 힘겹게 버텨냈던 우리들에게 그저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은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 이들은 꼭 안아주고 싶다.
-
- 뿌리라는 베이스 캠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브루노와 피에트로. 브루노는 주민이 14명뿐인 작은 산골 마을에 살며 어엿한 일꾼으로 성장하고 있고, 피에트로는 여름이면 도시와 학교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산골로 들어오곤 한다. 공교롭게도 동갑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브루노는 스스로를 “이 마을의 마지막 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흔하지 않은 소개의 말이다. 어떤 기분일까? 유일하다는 것은.
이내 브루노는 또 하나의 유일함을 찾는다. 브루노와 피에트로는 서로 유일한 존재로서 친구가 된다. 대단하게 각 잡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쉽게 친구가 된다. 뛰고, 움직이고, 물을 튀기고, 서로의 말을 배우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있는 것이다. 우정이란 본디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마음이니까.
피에트로는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배우는 사람이다. 산에 오르자마자 이름을 체크하고 바로 다음 장소로 넘어가려는 아빠에게 “이제 막 왔다”고 말하는 피에트로는, 어쩌면 봉우리의 이름을 나누어 부르지 않는 산 사람들과 더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세 사람은 산 위쪽의 빙하까지 올라가고, 피에트로는 빙하를 “산이 우릴 위해 간직한 과거 먼 겨울의 추억”이라고 여긴다. 햇빛이 그토록 강해도 녹지 않는 눈은, 정말 추억과 많이 닮은 것도 같다.
영화는 피에트로와 브루노의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긴 세월을 찬찬히 비춘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보였던 십대 시절, 눈이 마주쳐도 별스러운 인사 없이 서로를 스쳤던 시절. 자기 자신이 되어가기 바빴던 어린 날들. 실상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기 어려워, 내가 답습한 부모의 면에 화를 내기도 했던 날들.
그 끝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과거의 회한을 하나씩 제거하듯이, 어린 시절과 비슷한 몸짓으로 그때는 할 수 없던 육체 노동을 하면서, 집을 지어 올리기 시작한다. 앙금 녹듯 눈이 녹으면 그 자리에 지어 올려야 하는 것은 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다정해 보이는 산의 풍광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얼핏 다시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둘은 끊어진 적이 없었음을 우리는 이내 알게 된다. 피에트로는 아버지가 속해 있(다고 믿었)던, 공장으로 대표되는 차가운 세계를 거부했지만, 그 동안 피에트로가 풀지 못한 매듭을 대신 풀어주며 유사 가족처럼 관계를 맺은 것은 브루노였다. 브루노 또한 자신과 아버지 사이 관계에서 쌓인 회환을 푼 것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깍지 낀 손가락처럼 서로의 마음을 겹쳐 살고 있었다. 풀지 못한 매듭의 자리에 대신 서기도 하고, 못 다 전한 염원을 대신 전해주기도 하면서.
우정은 단순히 무료한 시간에 색깔을 더하는 정도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서로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관계는 얼핏 그 정도처럼 느껴지지만, 서로가 보일 때든 아니든 꾸준히 우정의 나무는 자라 오고 있었다. 서로의 회한이 회한으로만 남지 않게, 이따금 ‘금쪽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서로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손을 뻗기도 하고 그냥 이해하기도 하며… 존재 자체의 의의를 더하는 것이 우정이다.
묵묵히 할 일을 하다가도 이름 불러주는 친구 하나 있다면 산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다. 지금 가라고 등 떠밀어주는 사람이 그때 있었더라면, 어쩌면 마음의 어떤 골짜기가 그리 깊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에라도, 어린 시절과 비슷한 옷을 허리에 꾹 졸라매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영화 도입부에는 키가 크고 이파리가 없는 두 그루 나무가 나온다. 우정이 나의 뿌리 내릴 곳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피에트로의 내레이션과 함께. 이 영화는 두 그루 마른 나무 같은 사람이, 서로에게 뿌리를 내리고, 회한을 무너뜨린 자리에 우정으로 베이스 캠프를 짓고, 각자의 산을 오르는 이야기이다. 나무 같은 존재가 산을 오른다니 이상한 비유 같지만, 결과적으로 나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소는 산이다.
브루노는 산에서 옮겨 심어질 마음이 없는 나무, 피에트로는 잘 옮겨져 심기고 싶었던 나무였다. 그러나 같은 베이스 캠프에서 시작한 둘의 인생 여정은 너무나 달라 보인다. 너는 너의 산에, 나는 나의 산에. 그러나 산이라는 점에서 일견으로는 닮아 있다. 어쩌면 인생이 다 그런 것도 같다. 지도를 들고 길을 떠나는 순간, 등 뒤에 두고 온 자리는 자동으로 베이스 캠프가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등이 되어주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평생 우정의 빚을 진다. 이런 빚이라면 아무리 많아도 파산하지 않는다.
언젠가 오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내가 느끼던, 아주 유약하고 섬세한 불안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돌아선 길이었고, 집 방향이 같은 친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친구는 몰랐다고 말했다. 그냥 즐겁게 이것저것 하면서 잘 지내니까, 그런 마음들이 있는지 몰랐다고.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내면 깊은 곳에 있던 감정이니 주변에서는 당연히 몰랐을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몰랐음을, 알게 되어 안심임을 말하는 친구의 다정한 말투에 고마움이 울컥 치솟았다.
오랜 친구라는 거, 참 좋구나. 구구절절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나를 너무 잘 아니까, 내가 어떤 변화를 휘청휘청 거쳐 왔는지도 다 보았으니까, 지금의 마음도 솔직히 말할 수 있고 그냥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포용될 수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한 일이구나. 그건 정말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이어서, 앞으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오랜 세월 다정하게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친구들을 많이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짤막한 편지를 썼다. 낯간지러워 부치지 않겠지만, 나 또한 그들의 베이스 캠프가 되어 그들의 삶에 뿌리가 되고 싶단 마음을 담아서.
살다 보면 우리 멀어질 날도 올지 몰라. 내가 나를 찾아가는 길이 너와 물리적으로 먼 곳에 있을 때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그 길에 나는 너에게 아주 많은 걸 빚졌어. 너는 나의 뿌리야. 서로 아름다운 안식처라는 기억을 뒤에 두고 걸음을 다시 걷자. 지도 위에 새로운 걸음을 덧그리자. 각자의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감정이 들 때에는 방향을 틀어 다시 네게로 갈게. 어떻게든, 우리 같은 지도에서 만나자.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2023년 9월 개봉합니다. 산의 풍광이 많이 아름답고, 가본 적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음악도 하나 같이 다 좋으며, 무엇보다 14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 섬세하게 연출된 작품이니, 스크린 환경이 좋은 영화관에서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
- 영화 <3000년의 기다림(2022)> 리뷰
이야기는 매혹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체 없는 것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가 없다. 변형되고, 반복되며, 이따금 자신의 꼬리를 잃더라도 이야기는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과학이 없던 시절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신화이든, 자신의 지혜를 전할 방법이 없어 구전으로 이어져 온 민담이든 간에. 오죽하면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하지만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기록이고, 공동의 기억이자 역사라고. 기록할 수 없었던 자들이 해낼 수 있던 최후의 반향이자 상실에의 저항이라고 말이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로 유명한 조지 밀러 감독의 2022년 작품이다. <옥자(2017)>, <설국열차(2013)>로도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자,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 <콘스탄틴(2005)> 등을 통해 20여 년 전부터 판타지에 자주 얼굴을 비친 바 있는 근사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어벤저스> 시리즈의 헤임달, BBC 드라마 <루터> 등을 통해 우아한 카리스마를 내비친 배우 이드리스 엘바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A.S. 바이엇이 199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집 <나이팅게일의 눈 속의 정령>을 원작으로 삼는다. 생소한 제목이더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알라딘’에 등장하는 지니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니’에 대한 언급을 했으니, 3,000년 동안 자유를 갈망한 정령 진(이드리스 엘바)과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면면히 흩어진 인류의 이야기를 채집하며 살아온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의 첫 만남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다. 알리테아는 유리병을 닦아내며 거대한 정령을 마주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불의 정령 진. 그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알리테아는 열망하던 것을 손쉽게 이루고, 진은 오랜 세월 바라 마지않던 자유를 이룰 수 있으니 너무도 완벽한 윈윈의 거래일 게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하나 있다. 알리테아가 자신은 현재에 더없이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한 까닭이다. 심지어 알리테아는 이렇게 지적하기까지 한다. 소원을 비는 이야기의 교훈은 언제나 경고로 끝난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진은 이러한 알리테아를 이해하지 못한다. 살아있음과 욕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진은, 열망하는 것이 없다는 관조적 자세는 개인의 본성 혹은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행위이며 삶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알리테아가 특별한 추진력 없이 관성적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가 학자로 살며 쌓아온 시간이 멈춰있었다고 말하는 건 틀림없이 실례일 터다. 다만 알리테아는 개인의 삶에서 일정 부분을 단념한 인물이라고 묘사된다. 아이를 잃은 이후 슬픔을 비롯한 그의 감정은 전반적으로 정지한 상태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절제의 미덕(진은 어리석음이라 일갈하는)을 언급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초조함은 분명하게 표시된다. 그러하므로 진과 영화 내 카메라의 시선에 따르면, 알리테아가 마땅히 지녀야 하는 생(生)에의 원초적 욕구는 체념과 같은 그 어드매의 방향으로 휩쓸려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빠르게 공감하지 못한다. 둘의 몰이해는 불에서 태어난 정령과 흙으로 빚어진 인간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만, 어쨌든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좁히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단순한 두 인간 사이의 갈등이었다면 헤어지고 끝났을 텐데 3,000여 년의 구속에서 벗어나고픈 진은 절박하다. 그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알리테아의 허락을 구하고자 애쓴다. 자신이 갇히게 된 사연과 자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을 볼 수 있었으나 보지 못한 자,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려는 만남이었으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기꺼이 풀어내는 이유는 그래서다.
이야기 속 이야기가 주요한 축인 영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진을 거쳐간 이들이 아무도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을 만났던 이들이 모두 특권 계층이어서 여유로운 삶이 가능했던 게 아니었음에도. 이 이야기의 원형일 『천일야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조차 우리는 결핍에서 비롯된 인간의 욕망을 찾아낼 수 있다. 끊이지 않는 파티, 무한할 것만 같은 부와 명예, 갖가지 음식과 사치품. 비현실적인 것을 넘어 때로는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장면이, 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선 모조리 생략된다. 진에게 소원을 빈 여성들은 각기 다른 것을 원하는 듯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한계점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필멸자가 바라는 초월에의 의지는 다양하게 나타나며 인물이 있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노예로 살던 귈텐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초월을 소망하여 아이를 임신했고, 여성으로서 사회적 진출에 한계를 절감했던 제페토는 지식을 끝없이 흡수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명예와 공적을 원했다.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둘은 신분의 벽과 성별의 벽에 막혀 갇혀 있었으니 병 밖에 있더라도 병 안에 갇힌 진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신세였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알리테아, 진실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그는 무얼 갈망하는가?
인간은 사회적으로 촘촘하게 이어진 존재이니 타자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개인이 바로 서도 사회가 그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탈취한다면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테아는 이전의 여성들과 다른 세상에서 삶을 살고 있으니 그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며 들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역사이다. 사회가 관심 없지만 자신만큼은 들었어야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써야 한다. 그러하므로 알리테아가 발견한 자신의 소망은 고독에의 초월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3000년은 언뜻 진의 시간처럼 보이지만 내겐 보다 알리테아의 것, 아니 알리테아로 대표되는 인간 여성 전체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진의 시간은 추후의 인간들이 발명한 시간에 따라 계산된 것이지 그가 타인과 교류하며 쌓아온 역사의 시간이 아니다. 그가 소비한 대부분의 시간은 신에게 자신의 자유를 갈구하며 기도했던 것으로, 홀로 있어 셈하기조차 어려웠던 공백 그 자체이다. (환상으로 구성되었고 타자의 계산으로 보충된 그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 시간 간의 간극을 생각한다면, 사실 진이 경험한 시간은 3,000년이 아니라 30,000년, 혹은 3억 년에 조응할지도 모른다.) 반면 그가 병 밖에서 만나던 여성들의 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회와 시간은 3천여 년의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삶 속에서 구르고 변화해 왔다.
알리테아와 진이라는 두 존재가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예정된 만남 –한 단어로 줄여야 한다면 운명-처럼 보인다. 끝내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 인간, 종말이 예정된 인간이 욕망 없음의 상태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야기가 끝을 맞이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 역사,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정령의 종막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립과 고독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과 정령을 다시 잇는다. 신비를 지우고 합리에 의지해 지어진 현대사회다. 이곳에서 순식간에 멸종될 뻔한 정령은 이따금 나타나 개인의 감성과 마음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힘을 다시금 얻는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지혜이며 예술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이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 <3000년의 기다림>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우화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굳이 ‘초월’이라는 단어와 함께 읽어내고자 한 건, 여성 주안공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께 붙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고집 때문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영화를 읽는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매끄러울 것이다. 다만 알리테아의 서사가 아이를 잃은 여성에서 출발하여 진과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영화의 짜임새가 구시대적이라고 느끼게 될 수밖에 없고, 전체적인 이야기가 납작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2022년에 나온 영화를 2023년의 시청자가 독해하는 자세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어떠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사랑이란 기실, 가장 값지고 쟁취하기 어려운 가치인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국 락밴드 퀸Queen이 자신들의 노래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에서 “사랑이란 구시대적 단어이기 때문에Because love's such an old-fashioned word”라고 노래했듯 나는 이 단어의 오용, 사랑 앞에서 수동적으로 변해버리는 여성의 태도를 반성 없이 관습적으로 찍어내는 미디어에 반대하기보단 그저 단어 자체를 거부하는, 더없이 손쉬운 방향을 선택해 버린 것은 아닐까 우려한다. 사랑을 대체하거나 다양하게 소화할 수 있는 단어를 발명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선함과 다정함의 가치를 잊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한 명의 작은 개인일 뿐이지만, 이런 고민을 가진 인간의 발버둥이 쌓인다면 3,000년 후의 사람들에겐 내 고민이 모조리 옛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감히 가져 보겠다.
★★☆
-
- 부모가 자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개봉전 시사에서 영화 관람 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살면서 가까운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듣는다. 나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전달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가늠해 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감정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킨다. 어쩌면 인간은 평생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자식을 이해하려 애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가 무엇을 원해서 우는지 이해하려 애쓰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뱉는 말에 따라 아이가 원하는 것을 추측한다. 아이가 크면 더 이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가 10대가 되면서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서로 대화는 적어지고 그에 따라 서로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간다. 부모는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도 어렵고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자식을 이해하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영화 <더 썬>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주인공 피터(휴 잭맨)는 전처인 케이트(로라 던)와 이혼 후 베스(바네사 커비)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케이트가 피터의 집에 찾아와 두 사람의 아들인 니콜라스(젠 맥그라스)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엄마인 케이트와 살고 있는 니콜라스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케이트는 자신이 니콜라스를 바로잡으려 애쓰다 잘 되지 않아 전남편인 피터를 찾아간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전아내를 보는 피터의 모습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난다. 마치 착한 아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초반에 등장한 피터와 케이트의 모습을 보면 케이트의 육아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고, 피터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피터는 자신의 집으로 아들 니콜라스를 데려와 생활하게 한다. 새로운 학교에 등록도 해주고 최선을 다해 새로운 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현재 아내인 베스를 설득하기도 한다.
피터가 아들을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가 아버지로서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모든 면에서 피터는 아들 니콜라스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 준다. 그리고 니콜라스도 그런 아버지의 노력에 따라 학교도 다시 다니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모습 속에서 니콜라스는 왠지 불안해 보인다. 그가 지금 정말 안정이 된 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를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야기 내내 한편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찝찝함을 준다. 그러니까 아버지 피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무언가 해결된다는 느낌을 주지만, 니콜라스가 혼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불확실한 느낌을 준다.
불안해 보이는 아들 옆 좋은 아버지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기억 중 가장 부정적인 일은 바로 피터와 케이트의 이혼일 것이다. 부모의 이혼을 직접적으로 겪은 아들 니콜라스도 그 과정에서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니콜라스는 아버지가 없을 때, 아버지와 재혼한 베스에게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도 한다. 부모의 입장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 가까운 베스에겐 그런 니콜라스의 모습에서 불안과 긴장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니콜라스는 아버지 피터 앞에서는 안정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타인인 베스 앞에서는 조금씩 진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부모 피터와 케이트가 진짜 니콜라스를 이해하고 있는지 영화 내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는 아버지 피터를 중심인물로 내세우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위험함을 훌륭하게 화면에 담고 있다. 실제로 처음 케이트가 등장했을 때 그는 부모 노릇을 잘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아들의 입장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보호자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피터의 모습은 점점 케이트와 비슷해진다. 피터가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피터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피터는 그 자신도 권위적이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아들 니콜라스를 이해하고 지원해주려 하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지금 어떤 감정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한 해결방법을 니콜라스에게 강요할 뿐이다. 니콜라스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 근원적인 상처는 하나도 치유되지 못한다.
피터는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려 애쓴다. 제 3자인 관객이 보기에 그는 다른 어떤 부모보다 좋은 아버지다. 단지 그가 전처와 사이가 멀어지고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준 과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한순간의 상처를 좋은 아버지가, 좋은 어머니가 모두 치유해 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 니콜라스가 피터의 집으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 영화는 케이트와 니콜라스, 피터의 얼굴을 클로즈업을 통해 교차로 보여준다. 세 사람의 얼굴에 담긴 고민은 하나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의 도착점은 모두 다르다. 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와 생각은 영화 내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영화 속 피터는 재혼 한 이후 갓 태어난 아들이 하나 더 있다. 그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이지만 니콜라스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두 번째 아들과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다. 너무나 좋은 아버지가 되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결과는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의 비극
우리는 니콜라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부모님 피터와 케이트는 니콜라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에 대한 표현도 하지만 니콜라스는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그런 예측불가능한 니콜라스가 이해가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당장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과 관심보다는 전문적인 치료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연출한 직전작인 <더 파더>에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번 <더 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자식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사랑만으로 심리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치유될 수 있는지를 긴장감 있게 담고 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훌륭하다. 피터 역을 맡은 휴 잭맨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의도하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게 가면서 아들을 이해할 기회를 놓쳐 무너지는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 이미 무너진 어머니 케이트를 연기한 로라 던의 연기도 훌륭하고, 어떤 심리 상태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니콜라스 역의 젠 맥그라스의 연기가 특히 눈에 띈다.
영화 <더 썬>은 자식이 가진 트라우마를 부모가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부모가 그런 자식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진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과연 진짜 좋은 부모가 무엇인지, 아이를 위한 좋은 육아가 정말 아이의 심리에 도움이 되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던져준다는 측면에서 무척 훌륭하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
- 엔드게임 시간여행의 종지부를 찍어준 로키! 인피니티 스톤을 돌덩이로 만드는 절대적 힘, TVA (스포주의)
#로키드라마 #로키1화 #TVA
2021. 06. 10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로키 1화 보고 왔지?
00:45 진정한 힘, TVA&타임키퍼
03:11 드디어 풀린 시간여행
04:55 무용지물 스톤들
06:07 가장 임펙트 있는 드라마
-
-
- 영화 <육사오> 캐릭터 예고편
속보] 세계최초 로또(?) 비정상 회담 성사! 57억 당첨금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 로또 주운 팀 VS 다시 주운 팀 당첨금 GET할 팀 궁예하고 예매권 받자?
-
- 영화 <플립> 30초 예고편 ?
새로 이사 온 미소년 브라이스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직감한 7살 소녀 줄리.
솔직하고 용감한 줄리는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브라이스는 그런 줄리가 마냥 부담스럽다.
줄리의 러브빔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를 6년!
브라이스는 줄리에게 받은 달걀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들키고,
화가 난 줄리는 그날부터 브라이스를 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가신 그녀가 사라지자 브라이스는 오히려 전 같지 않게 줄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