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27 15:02:10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리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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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조커'와 '아서'의 내면세계
<조커 : 폴리 아 되>와 <조커>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굉장하다. CGV의 에그지수는 진작 박살 난 지 오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예상외로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 안에서 아서가 취한 태도가 빌런 '조커'와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조커;를 인질 잡아 토드 필립스가 객기 부린 것에 불과하다는 유튜브 속 평론가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조커' 보러 왔으면 악랄하고 강력한 빌런을 보고 싶어 하지 이런 내용을 원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건 자신의 악함을 깨달은 조커가 사회를 뒤집어 1편과 유사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충격적인 플롯을 띄고 있다. 그 충격의 방향이 <조커> 1편의 형태가 아니다. 그 <조커> 1편의 위에서 아서의 뇌를 들여다보는 듯한 플롯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줄거리를 띄는 것이 이 <조커 : 폴리 아 되>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 대해 '1편의 후속작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조커가 된 아서 플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근거. 두 영화의 플롯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선 <조커>의 플롯부터. 아서 플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자다. 인생에 재미라곤 없다. 우울한 아서 플랙. 번듯한 직업이나 모아놓은 돈 같은 거 없다. 대신 있는 건 정신질환이다. 느닷없이 하하하하 웃는 아서 플랙. 뜬금없이, 그것도 기괴하게 웃는 터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아서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인기 스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동경하는 아서. 사실 아서는 머레이가 자기의 두 번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아버지는 누구냐고? 바로 고담 시의 실력자 토머스 웨인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서는 웨인 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꿈속에 사는 아서. 아니 꿈속에서 나오기 싫은 아서. 비참한 현실에 혹시?라는 희망이 점점 아서의 망상장애로 발전한다. 내가 대단한 코미디언이라는 망상. 도시의 실력자가 내 아버지라는 망상. 그리고 사랑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아서를 지배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의 망상에 대해 다룬 영화다. 망상이 끌고 가는 대로 도착하다 보면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엔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에 배치한 것은 아서의 자의식이다. 존재감이 없던 아서. 유리 자동문을 지나갈 때도 문에 부딪힐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서가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는 과정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자의식 과잉'과 '인정욕구'의 표출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 아서의 굽은 등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위축된 내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뒤의 라디오 방송에선 '청소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한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시각적으로 아서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면서 청각적으로는 이 사회가 노동권에 있어 약자를 존중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연이어 조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상담치료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사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사다. 앞 장면과 연이어 아서 플랙은 개인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구제받지 못한다. 그럼 희망을 품어야 한다. 뭐 같은 현실에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 아서가 생각한 해결책은 코미디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걸 목표로 삼은 아서. 혼자 일기장에 끄적이며 농담거리를 만든다. 공연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쌓다 보면 언젠가 성공해서 멘토인 머레이의 쇼에 나올 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가 웨인의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세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이 내면에 있던 분노를 세상 밖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굉장히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체화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다. 따지고 보면 아서 플랙이 코미디언 '조커'로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살인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 웃기다고 온갖 조롱을 다 듣고 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해고당한 공연에 비하면 홀가분한 마음에 춤까지 춘다. 조커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상승한 사건이다. 심지어 고담 시의 언론사에 보도도 되고 사회가 이 살인마를 칭송하기까지 한다. 조커의 퍼포먼스가 처음으로 먹힌 것이다. 이 춤은 후반부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아무 관객이 없는 야외무대다. 아니 모든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야외무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춘다. 이 춤의 리액션 중 하나는 경찰이다. (이후의 사건이지만) 어머니 페니 플랙을 살해해도 쫓아오지 않았던 경찰이 양아치 세 명 죽였다고 아서를 따라온다. 일부 시민들은 조커 가면을 쓰고 아서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제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들리는 소식. 머레이는 아서의 과거 스탠딩 코미디 이력을 보고 조롱한 바 있는데, 이 아-무도 웃지 않았던 영상을 보고 토크쇼에 초대한 것이다. 서서히 팽창하는 자의식. 바람만 맞췄던 첫 번째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는 다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토크쇼에 초대된다. 이후 토크쇼에서 광대 분장으로 나타나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라고 부탁한다. 이 질문에 읽히는 가장 강력한 의도는 '조커'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고, 나는 그런 굉장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이후 토크쇼가 진행된다. 아서는 머레이에게 "당신은 무례하군요"라며 머리에 총알을 겨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슈퍼스타 머레이의 바닥을 방송에 노출시키고 살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조커의 자의식이 폭발한다. 조커가 벌인 퍼포먼스에 세상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조커>는 재능 없는 예술가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줘 병든 사회를 담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이 1편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다. 2편의 초반부.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아서. 낮은 자존감이 사람 살인한다고 채워질 리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환경 문제도 크다. 아캄 수용소의 모든 교도관들이 아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도 그냥 주면 되는데 "오늘은 농담 없냐?"면서 강아지 손 내밀라고 하듯 사람을 아래로 깔본다. 감옥에는 화장실도 없다. 양동이 같은 곳에 볼일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비워야 한다.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연히 위축된다. 글쓴이는 이 설정,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화의 배경이 1편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예 겹쳐지는 장면(마르고 굽은 등을 보여주는)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무기력한 아서는 어떤 계기를 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그 계기는 할리 퀸젤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서. 여기서부터 자존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담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서에게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글쓴이는 이 할리퀸(레이디 가가)이 안겨주는 희망이 1편의 코미디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아서에게 코미디는 미래다. 코미디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래에 코미디로 먹고사는 걸 꿈꾸고 있다. 이 코미디에 대한 사랑이 할리퀸에게 옮겨온 것이 2편이다. 이 공통점은 아서가 코미디와 사랑에 서투르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을 띤다. 또 결정적으로 아서가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커지는가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그건 바로 망상이다. <조커> 초반 머레이가 관객석에 앉아있는 아서를 불러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식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선 아서가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데 소피만 혼자 흐뭇하게 웃는 장면이나 갑자기 하하 호호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조커> 1편이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망상은 중요하다. 아서가 후반부까지 코미디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이유(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에 관한 망상은 후반부에 해체되면서 아서의 무리수로 이어진다. 코미디를 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던 소피라는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서는 코미디에 재능이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서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머레이를 살해한다. 이 부정적인 현실 - 망상과 사랑 - 부푼 자아를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구조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도 아서의 희망인 리와의 관계가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폴리 아 되'라 아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이다. 그 망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 이번엔 뮤지컬이다. 현실에서 뮤지컬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다. 뮤지컬 신은 전체적으로 영화 같은 상황이다. 감옥에 갇혀 한정적인 동선 때문에 나눌 수 없는 사랑을 음악과 춤으로 망상을 공유한다. 이미 전에 꿈꿔왔던 망상이 시간이 지나 더 영화적이고 깊어진다. 후반부 아서가 조커를 포기하자 그의 망상이 해체된다. 망상 속 공연에서 리는 아서를 쐈고 현실 속 할리퀸은 조커를 차버렸다. 조커로서의 이름도 잃고 자아까지 포기한 아서. 하지만 이 1편에서 이 과정을 겪고 아서 플랙의 조커가 탄생했던 것처럼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다. '넌 죽어도 싼 놈이야'라는 말과 함께 악의 축을 살해하는 남자가 영화 후반부를 마무리짓는다. <조커 : 폴리 아 되>의 후반부를 적어도 <조커>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가 진짜 <조커>의 후속작이 맞냐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플롯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니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뮤지컬이라는 비현실적인 시퀀스를 넣어서 망상의 깊이를 더 진득하게 뽑아냈다. 1편에서 작동했던 핵심 모티브 사랑과 망상 그리고 빌런의 탄생을 2편에서 그대로 이어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플롯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특성 역시 전작 1편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특성 중 첫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퀸이 등장한다. 첫 번째 할리퀸은 할리 퀸젤이다. 할리퀸은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며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리는 아서로 접근하지 않고 조커로 접근한다. "나 당신이 주제인 영화 20번은 봤어요"라는 말,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렸으면 했다"는 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리는 아서를 처음 만날 때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리는 아서를 만날 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나 당신 만나서 기뻐"라는 식의 감상만 드러내는 말만 한다. 심지어 몇 마디는 거짓말이다. 조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랑에 서툰 아서. 리의 존재 때문에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조커를 고른다. 후술 할 리와 메리언 사이의 대립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의 충돌이 서툰 사랑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는데, 이 요인에 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정체성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편의 할리 퀸이 등장한다. 바로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다. 메리앤이 직업인으로서 펼친 주장은 간단했다. 아서는 인격이 분리됐고, 조커로서의 자아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종의 심신 미약 논리다. 메리앤은 변호사로서만 아서를 돌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그를 위하기도 했다. 교도관들이 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 것을 보고 "우산 안 씌워주면 누가 죽냐"라고 핀잔 섞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다. 또 아서와 조커가 분리됐다는 논리에 근거를 덧붙이는 작업도 했었다. 인터뷰를 잡는다거나 의사와의 상담이 그랬다. 법정에서도 하비 덴트의 논리를 공박할 때 '당신이 아서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리가 아서를 버린 것과 반대로 매리앤은 진정성 있게 아서를 대한 것이다. 단지 아서는 리가 부풀린 조커로서의 자아 때문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가 현실적인 걸 고르지 않았나? 아니다. 매리언은 할리퀸이 극에 끼친 영향처럼 아서가 후반부에 선택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할리퀸이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고 말하듯 아서에게 '당신은 아서예요'라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던 셈이다. 이 두 할리퀸이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딜레마는 <조커> 전작이 가졌던 딜레마기도 하다. 아서 플렉, 그러니까 조커는 어떤 존재일까? "당신은 죽어도 싸!"라는 논리 하에 유명하면서도 무례한 사람만 골라 처단하는 인물일까? 아니다. 조커는 그냥 자의적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야 세상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커는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단지 후반부에 아서가 조커를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아버지를 경유한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조커>와의 유사성을 띤다. 두 명의 아버지가 조커와 아서 사이의 정체성을 널뛰기하다 1편의 아서로 귀결 짓듯 두 명의 할리퀸이 2편의 아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중 둘째.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뮤지컬 파트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아서 플랙의 망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전작 조커에서 아서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며 아서 본인이 망상이 심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자신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실(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망상을 현실같이 표현할 필요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망상을 망상답고 더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폴리 아 되'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서가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아서가 여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다는 점을 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망상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아서가 허황된 꿈에 취해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관객도 처음부터 그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뮤지컬 장면이 아서의 캐릭터성을 설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는 이런 장치가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조커>에서 망상과 현실사이를 널뛰기하는 플롯으로 '뭐가 진짜지?'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 속 망상 장면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아서의 망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그 구분이 없는 아서의 내면을 관객이 더 직관적으로 체험하게끔 뮤지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이런 방식의 연출은 아서의 심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오히려 아서가 망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1편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아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가지중 둘째. 이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우선 영화 <조커>가 다룬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 있다. 전작 <조커>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흑화 하게 된 이유는 (행위의 악함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 페니의 학대로 인한 망상장애, 노동환경의 열악함, 사회구조적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처지, 그리고 조커를 조커로 만든 사람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아서가 '웨인 엔터프라이즈' 직원 세 명을 살해한 사건만 보도하고, 페니의 죽음 같은 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가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하는 사건인 '머레이 쇼'의 방송분 역시 미디어를 이용한 폭력이다. 셋째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안 치워서 쥐가 들끓는다"는 대사는 미디어가 노동 현장에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디어는 성실하지 못한 존재다. 페니의 죽음에 대해 취재하지도 못했고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의 악영향이 아서의 개인적인 불행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조커라는 캐릭터가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조커: 폴리 아 되에서도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아서, 조커 둘 다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매리언이 아서에게 '당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예요. 아서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이 과정을 카메라로 녹화한다. 아서를 진짜 위했던 매리언조차도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미디어를 통해 재판 승소를 노린 것이다. 법정 장면에서도 아서는 판사가 아닌 카메라를 의식한다. 굳이 따지자면 판사에게 '나는 조커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판결 내리는 건 판사니까. 그런데 아서는 카메라에 대고 굳이 말한다. 조커라는 존재가 인정받았던 계기가 미디어였다는 걸 아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다. 아서가 "난 할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할리 퀸이 TV를 보며 유리창을 깨고 TV를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서에게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TV를 가져가는 것이 할리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아서를 아끼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미디어의 존재에 따라 갈리는 인물들의 리액션은 극후반부의 폭탄 테러와 아서가 군중들에 의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아수라장이 됐다. 조커는 정신을 잃은 채로 길을 배회한다. 지나가던 조커 추종자가 차에 탑승해서 아서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아서는 조커로서 선택받게 된다. 하지만 아서가 내린 판단은 전적으로 아서의 것이다. 군중들이 원하는 조커라면 법정을 탈출해서 사람들을 조종해야 하는데 냅다 도망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것과 관객이 알고 있는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명확하게 그린다. 가짜 조커들이 아서에게 기대한 모습이 '폴리 아 되(망상)'이었더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리가 발생한 이유? 아서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세계관의 군중들은 아서를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인물들의 행보를 가른 걸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셋째. 전작을 승계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미지들이 <조커>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불어넣는다. 전작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조커의 추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면서, 그의 홀가분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되>에서의 계단(장소도 같은) 신은 다르다. 이번엔 계단 장면에서 더 이상 무겁거나 상징적인 춤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된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할리 퀸이 계단에 서 있고 아서는 할리퀸을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다. 이 영화처럼 조커 내면의 아서 플랙을 그리고 싶었다 하더라도 계단 신에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걸 거부한다. 전작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성공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전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조커의 추락과 흑화의 이유를 면밀하게 보여주는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했는데, 이번에는 상승에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아서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가 행복한 이유에는 그리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작의 이미지를 비튼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아서가 두들겨 맞았던 길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조커로서의 자아를 할리 퀸 앞에서 표출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서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에서 조커의 자아가 붕괴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 생방송 중에 조커 분장을 하고 "아캄의 돼지 같은 교도관들"이라고 외친 후 굳이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부정하는 요소다. 전작 <조커> 1편에서도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머레이를 공격했다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묘사했다. 이렇게 영화는 전작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굉장한 창의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커의 캐릭터성을 영화 안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조커가 미디어에 나온 경우를 생각해 본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지. 조커가 전하는 가족 이야기는 매번 달랐고, 목표가 돈인 것도 아니라 악행을 펼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욕망이었다. 캐릭터를 규명하지 않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 조커의 본질이었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잭 니콜슨)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조된 인간이었다. 그저 자기가 재밌으니까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다. 죽을 때도 까르르 웃고 죽을 정도로 이상한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조커 역시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없다. 배트맨과의 대화 장면만 짧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핵심이 바로 규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조커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 '조커' 시리즈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서 플랙에게 명백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가 악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의 조커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치된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제목과 캐릭터에서 배트맨 세계관을 빌려온 근거가 성립된다.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글쓴이는 1편과 2편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기존 '조커'와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전통적인 조커의 특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의 조커가 그려왔던 2편의 망상이 원인을 뭉개버린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거부하는 '조커'의 전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야기 내적으로 망상에 빠져있는 아서 플랙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도 생동감을 부여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1편이 있어 2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상황이 망상이 되어 2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연속성을 처음부터 망상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이 기획의도라면 사실 굳이 조커의 캐릭터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기획의도에 충실할 것이라면 아서에 집중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할리퀸이 언급하는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심화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 굳이 필요 없다. 조커가 나온 뉴스 40번 읽었다고 해도 이야기상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였어야 했던 이유. 영화가 상상에서 그린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편에서 조커 추종자들이 그린 악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조커>라는 영화에서 그린 조커의 이미지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통렬하게 조롱한다는 단면이 여기서 읽힌다. 이 망상으로 1편과 2편을 이으면서 충돌시킨 선택은 영화가 악을 보여주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1편에서 꿈꿔온 2편, 1편에서 기억하는 대중들의 조커에 관한 이미지, 할리퀸에 대한 아서의 생각, '이렇게 하면 먹힐 거야'라는 법정에서의 안일함 등 1편에 근거한 2편의 판단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런 점에서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악이 조커라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가 죽는 건 명확한 결말 아닌가?"라고. 하지만 난 이 영화에서 조커가 의인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명할 수 없음 / 조커의 정체성 둘 다 동시에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아서를 살해하는 남자는 초반부부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아서와 공통점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면서 아서를 살해한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아서와 남자를 겹치게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이 남자가 아서 플랙의 후임, 즉 또 다른 조커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커 추종자가 아닌 아서 플랙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와의 토크쇼에서 자살을 시사하다가 결국 머레이를 살해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두 사람을 통해 "공유된 광기"를 조커라는 캐릭터로 보여줬다고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악을 의인화하기보다는, 조커라는 이름 아래 공유되는 광기와 혼란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방식은 전례를 따르지 않았고, 조커처럼 규명할 수 없는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것이다.
불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누군가는 진짜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전작의 장력을 스스로 거부했다면서 영화에게 야유를 보낸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현대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감정적인 폭이 넓고 조커의 캐릭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뮤지컬 시퀀스들이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보인다는 점과 난해한 플롯, 느린 템포가 대중영화로서 합격점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충분히 좋은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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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 청년상
언뜻 보면 자유로운 꿈을 지닌 청년이 대가족의 전통적 가치관과 갈등을 빚는 가족 코미디로 보이는 <장손>은 예측 가능한 마냥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이 기대했을 온가족이 밥상 앞에 모여 싸우는 장면을 싱겁게 끝내버리고, 영화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말녀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그 자신의 지향점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말하자면 <장손>과 더 가까운 영화는 가족 코미디 영화로서의 <이장>이 아니라 청년 영화로서의 <흐르다>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들은 청년을 어떻게 다루는가. <장손>과 <흐르다>가 그리는 2020년대의 청년들은 마냥 자유로운 반항아가 아니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곳을 버리지 않는다(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모두 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 세대와 갈등 빚을지언정 척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만큼의 기성세대에 대한 부양은 어떻게든 해낸다. <흐르다>의 주인공 진영은 대구에서 아버지의 공장 일을 도우며 살지만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고 싶어한다. 공장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진영은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부양하며 어떻게든 공장을 살리려고 애쓴다. 그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빚으며 결국 캐나다로 떠나지만 그곳에서 가끔씩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인물이다. <장손>의 성진은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배우로 활동한다. 보증금 문제를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해결하며 아직은 변변찮은 커리어를 지녔지만 나름 tv 드라마에 나온 적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진은 나름 승필을 비롯한 어른들을 챙기기도 하고 말녀가 죽었을 때는 서툴지만 장례 절차를 어떻게든 마무리짓는 책임감 있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인물이다.
<장손>의 또다른 미덕은 현대적인 청년 캐릭터를 그리는 그 성숙한 태도로 사건을 대하는 절묘한 균형감각에 있다. 이 영화에서 돈과 눈물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돈의 세속성과 눈물의 탈속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영화에는 장례식장에서의 대성통곡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성진이 말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장에 처음 들어설 때이고, 두 번째는 옥자와 동우가 딸을 데리고 들어올 때이다. 여기서 특이한 장면은 두 번째이다. 옥자네 가족이 장례식장에 들어오자 수희와 자매들은 대성통곡한다. 그러다가 혜숙이 ‘그렇게 우는 게 아니여’라며 통곡의 대열에 합류하고 고쳐 울기 시작한다. 이때 ‘그렇게 우는 게 아니여’라는 대사는 이 눈물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해당 대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는 성진이 장례식장에 입장할 때의 첫 번째 통곡을 진짜라고 믿었다. 그 대사가 등장했다고 해서 말녀의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눈물이 모두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눈물에는 진심의 슬픔과 일말의 세속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를 방증하는 듯 통곡 장면 바로 뒤에는 가족들이 부의금을 세는 장면이 이어진다. 장례식이 끝난 후 태근 부부와 혜숙이 사라진 돈을 두고 갈등을 빚을 때에도 영화는 이를 풍자적인 시선으로 담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충분히 담아내어 그린다. 그러니까 이 갈등은 돈으로부터 말미암은 온전히 세속적인 갈등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의 감정들, 일말의 탈속성이 담긴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손>은 돈과 눈물, 세속성과 탈속성, 코미디인 것과 코미디가 아닌 것 사이를 정확히 포착해내는 영화의 균형감과 자유로움과 책임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청년 캐릭터의 균형감을 연결짓는다. 성진은 태근 부부와 혜숙의 갈등을 탐색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 기저에는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졸업식과 관련된 고모부의 사고에 대한 성진의 부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브릿지 헤어를 한 채 크롭티를 입고 장례식장에 왔으나, 이해할 수 없는 통곡의 광경을 목격하고 피식 미소지을 뿐 그 자리를 망치지 않는 옥자의 딸은 또 하나의 성숙한 청년 캐릭터이다. 자유분방하되 그 자유로움이 무책임함이 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인간, 지금 시대와 이전 세대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균형 잡는 인간이 바로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들이 그리는 청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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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과생이 대입한 인생 공식
수학자, 과학자, 이공계열 천재들이 느낀 삶은 어떨까요?
자신의 삶 또한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인
수학 천재 ‘마거리트’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칠판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성장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가
오는 6월 27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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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7월 1주 개봉영화!
토르: 러브앤썬더 Thor: Love and Thunder , 2022
토르! 네 번째 솔로 무비!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천둥의 신 '토르'가 '킹 발키리', '코르그', 그리고 '마이티 토르'로 거듭난
전 여자친구 '제인'과 팀을 이뤄, 신 도살자 '고르'의 우주적 위협에 맞서는 이야기입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함께 우주로 떠나며 그 이후 행보에 궁금증을 자아냈던
토르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의 이야기가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드디어 공개됩니다.
천둥의 신 '토르'를 비롯해 강력한 NEW 히어로 '마이티 토르', 뉴 아스가르드의 왕 '킹 발키리', 우정과 의리의 검투사 '코르그',
그리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이 총출동하죠
마블 역사상 최고의 빌런으로 주목 받고 있는 신 도살자 '고르'의 등장에 맞서
'팀 토르'로 뭉친 MCU 대표 히어로들의 역대급 액션 스펙터클로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강력한 NEW 히어로 '마이티 토르'에 나탈리 포트만,
이름만으로도 기대를 높이는 크리스찬 베일은 신 도살자 '고르' 역,
러셀 크로우가 올림푸스의 왕 제우스 역으로 활약하고
전작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처음 등장해 유쾌한 매력으로 눈도장을 찍었던 '코르그' 역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연극 배우 로키' 역으로 깜짝 등장해 놀라움을 선사했던 맷 데이먼까지 출연해
다채로운 캐릭터의 등장으로 스크린을 풍성하게 채울 예정입니다.
전 우주를 누비는 역대급 스케일 속에서 짜릿한 액션은 물론 다채로운 세계관까지 담아낸
"토르: 러브앤썬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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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원 배우의 얼굴만 믿고 설계한 것 같은 '설계자'
모델 겸 저승사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검은색 옷 입고 다니는 남자 영일(강동원)이다. 키 크고 얼굴 조막만 하고 잘생겼다. 누가 보면 모델 지망생정도 되는 사람일 것 같지만 아니다. 영일의 직업은 설계자다. 살인처럼 보일 수 있는 사건을 사고로 위장시키는 게 영일의 일이다. 혼자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팀원이 있다. 중년의 여성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이다. 매번 찾아오는 의뢰에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영일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의뢰를 해결하는 영일의 팀. 모든 사건을 설계자로서 좌지우지한다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어느 날 영일의 팀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함과 동시에 우연한 사고로 꾸며달라는 요청이었다. 사건을 의뢰한 사람은 주영선(정은채)이다. 이 주영선이 누구인가?라는 점이 영일이 받았던 사건들과 의 특이점이다. 바로 주영선은 검찰총장 후보자의 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고위공직자가 되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사건인 걸 직감하는 영일. 하지만 시선이 많다는 걸 오히려 역이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영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일은 점점 꼬여간다. 설계자의 존재를 설계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드러나는 영일의 정체. 이 모든 악행을 기획한 사람은 누구일까?
<설계자>를 설계하다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것은 아이디어다.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잘 구현됐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핵심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는 신선했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건을 조작하는 주인공(영일)에 관한 영화다. 그럼 1차적으로 사건을 조작할 수 있을까/그렇지 않을까에 대해 서로 대립하면서 서스펜스를 만들지 않을까? 영화는 이 1차적인 목적을 충분히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영화에서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많다. 이 선택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마무리되지 못할까 봐 초조해하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 영화가 인물의 욕망을 단순하게 짠 편이라 영일의 시점만 쫓아가도 이야기의 표면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영화의 리듬이라는 측면에서 쓸데없이 늘어지는 장면이 많음에도 대략적으로라도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까이 있고 그만큼 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재키(이미숙)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사실상 재키가 이 영화에 작동하는 모든 모티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티브? 바로 정서다. 이 영화에서 누가 설계자고 설계자 머리 위에 누가 있고 주인공 영일과 대결하는 흑막이 누구고 이런 거 별로 안 중요하다. 물론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본질이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재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 재키의 동선이 영일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사실상 영화의 플롯이 이것과 동일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월천의 동선도 이해가 된다. 월천만? 점막과 이치현의 행보까지 영화가 같은 모티브를 인물에게 반복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거 놓치고 영화 보시면 솔직히 이게 뭔가 싶으실 것이다(사실 안 놓치고 봐도 이게 뭔가 싶으실 것이다). 그냥 단지 이 캐릭터들이 이 결론에 도달하는 걸 보기 위해 이 영화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관점에서 관람하시는 걸 제안하는 바다.
설계자 맞아?
이 영화의 두 번째로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 구성 방식이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 치고 굉장히 불친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떻게? 어떤 관객들의 입장에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이게 뭐야?”라고 느낄 만큼 맥이 빠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일반적인 플롯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교훈극이 아니다. 여러 사건을 연이어 배치시켜서 이 일들이 만든 정서를 영화의 핵심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말이 좋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거지 이 단점은 이 영화의 기획의도에 근원적으로 결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첫 번째 이유.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전적으로 다른 길만 골랐다. 상업영화의 큰 덕목이 뭘까? 기-승-전-결의 쉬운 플롯과 이에 따른 간단한 결과물이다. <범죄도시 4>나 <파묘> 같은 영화들이 작가로서의 개성을 포기하고 상업성을 택했다는 걸 많은 팬들이 기억할 것이다(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기획하고 연출하고 각본을 쓰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염두하고 싶었다면 그대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반대다. 사건들만 연이어 보여줄 뿐 결론을 애매하게 지어 영화의 혼선을 스스로 만든다. 대표적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방식을 보면 후반부 전개와 아예 통으로 어긋난 것 같다. 한국사회의 수많은 단면을 보여준 다음 그 인물이 그렇게 말하면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에필로그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앞에서 한 인물이 했던 말이 의미가 없어진다. 사실 그 캐릭터도 똑같은 비판을 듣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 안에 관객들을 속이는 속임수도 너무 많다. 하우저 TV(이동휘) 같은 캐릭터가 들어간 이유를 관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왜? 이 인물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인물이 아니니까. 이 인물을 대표하는 집단은 앞에 이미 나왔다. 그리고 이야기 상에서 어떤 유효타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이 캐릭터의 악행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리액션이 없는 수준이다. 이 인물이 보여주는 병폐를 보여주기엔 연출이 생동감 넘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영화가 이런 할리우드식 전개를 쫓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상업영화라면 흔히 하는 말처럼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두 번째 이유. 설계자의 설계 치고 허점이 너무 많다. 이 허점을 하나하나 다 손꼽기엔 너무 많아 적기도 힘들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만 써보자면, 영일이 기획하는 모든 설계에는 3자가 개입해선 안 된다. 어떤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있는 시기도 새벽녘이 아니다(새벽녘이어도 그 근처에 사람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부 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냥 단지 거기에 그 사람이 단 한 명만 있단 이유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선 설계자라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이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일이 설계자라는 것 치고 인간관계성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부실하다. 그나마 재키와의 관계가 특별한 것 말고는 이 사람의 용인술은 극을 이끌기엔 터무니없다. 설정을 뒷받침할 만 당위성을 영화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유. 이 영화에서 현실을 다루는 방식은 굉장히 낡았다. 예를 들어보자면,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와 관련된 내용은 이 고위직의 후보로 임명되는 과정을 다 담았다고 보기엔 어렵다. 대통령은 뭐 하고 여, 야 정치인들은 무얼 하는 걸까? 법무부장관은? 이 인물은 본인의 직업인 검사를 잘 활용하고 볼 수 있는 걸까? 그냥 단지 영화가 1차원적으로 줄거리를 전개하기 위해 해당 직업만 가져오니 인물의 개성도 납작해지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재키도 마찬가지고 월천도 마찬가지고 이치현도 마찬가지다. 이 인물들을 둘러싼 가장 핵심 설정이 이 영화의 사건들과 계속 대치되는 감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약간 갈길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을 담고 싶은 건지. 장르적으로 재미있고 싶은 건지. 아니면 둘 다인건지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채로 기능적인 전개만 돋보인다. 각본 상에 있는 설정들이 상호 간에 충돌하며 '서로 틀렸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뭐라는지 모르겠어요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 음향 믹싱이다. 플롯이 친절한 것도 아니고. 어떤 캐릭터는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이물감이 심한 영화에 음향까지 안 들리는 건 영화를 더 조악하게 만드는 요소다. 대표적으로 글쓴이는 탕준상 배우가 말하는 거 못 알아들었다. 이 인물 입에서 중요한 대사가 몇 있는데도, 그걸 강조하는데도 못 알아들었다. 탕준상 배우가 비교적 신인이라? 글쓴이는 강동원, 이미숙, 이종석 배우 같은 베테랑의 입에 나오는 대사도 못 알아들었다. 특히 강동원 배우가 맡은 영일 캐릭터는 감정선이 납작한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저음으로 대사를 전달한다. 믹싱 상태가 좋았어도 안 들린다는 사람 많을 텐데 그마저도 안 좋으니 잘 안 들린다. 그래서 글쓴이가 세 사람을 돌이킬 때 후반부 이미숙 배우의 개인기를 보여주는 장면 말고는 “두두두두”만 생각난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지고 싶고 장력이 팽팽하려고 해도 영화가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가 불친절하고 사건마다 개연성이 얼마나 헐렁한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설계자>의 가장 큰 단점은 영화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헐렁한 이야기 틀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배우가 있다. 바로 김신록 배우다. 이 영화의 조악한 믹싱에도 이 인물이 어떤 캐릭터인지 스스로 보여준다. 가령 이치현(이무생)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이 인물은 별다른 연출이 필요 없다. 그냥 말투와 눈빛처리만으로도 이 영화가 기획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대 역인 이무생 배우가 광기를 숨기는 캐릭터라면 이 인물은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런데 사회화된 광기여야 적합하다. 그럼 목소리 톤을 높이는 대신 눈을 이용해서 몰아붙이는듯한 연기가 좋겠지? 이 배우는 그걸 그대로 구현한다. 우리가 알던 김신록 배우의 퍼포먼스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모습은 또 아니지만 영화에서 유일하게 빛난다는 점에선 기록할 만하다.
여전히 4번 타자
이 <설계자>가 개봉하는 현재까지 강동원 배우는 계속해서 패전 투수를 자처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한국영화의 팬인 글쓴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비슷한 정도의 잘생김을 가지고 있는 누구는 광고모델로 전직했는데, 이 분은 아직도 영화배우잖아? 그래서 글쓴이는 현재 강동원이라는 배우가 처한 입장이 궁금하다. 과연 좋은 시나리오가 오는데도 이런 선택만 하는 걸까 싶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대참패를 기록한다 하더라도 강동원 배우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강동원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쉽지도 않았다. 강동원 배우는 자기의 색을 깔끔하게 소화한다. 영화가 괴작이더라도 강동원 배우는 제 몫을 다 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강동원 배우가 흐름을 바꾸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를 표하고 싶다. 강동원이라는 이름 하에 <천박사 퇴마 연구소>나 <인랑>, <골든 슬럼버> 같은 영화들은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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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천천히 찾아오는 것
Director] 아누파마 스리니바산Anupama Srinivasan, 아니르반 두타Anirban Dutta
Program note]
인도-미얀마 국경 근처의 외딴 마을 토라에는 도로가 없고 수도가 없고 학교나 병원도 없다. 인도 독립 70주년이 훌쩍 지났지만 오랜 반란의 역사 탓에 세상에서 밀려나 잊혀진 마을 토라에 어느 날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환한 불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장밋빛 희망에 들뜬다.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냉장고를 들여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 생각에 마음이 들썩이고, 마을 남자들은 땅을 파고 전봇대를 세우느라 진땀을 흘린다. <깜빡이는 불빛>은 온 마을에 첫 전구가 켜지는 날까지 토라 사람들의 이상과 현실, 희망과 좌절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타고난 유머러스한 낙관과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열망이 깜빡이다가 환히 켜지는 불빛 마냥 눈부시다. (강소원)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예상했던 질문이 바로 나왔다. “영화 속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인도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과 가까워 보인다. 혹시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이해를 위해 ‘인도-미얀마 국경 근처’라고 표현된 지역은 마니푸르(Manipur) 주, 더 넓게 말하면 인도의 북동부 지역이다. 이쪽 사람들은 확실히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지하는 인도 사람들의 얼굴, 터번과 멋진 수염과 큰 덩치로 흔히 표현되는 북인도 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더 진한 갈색 피부와 둥근 눈을 한 남부 인도의 얼굴과는 다르다. 외려 흔히 생각하는 동아시아 쪽의 얼굴에 가깝다. 실제로 인도 북동부의 토착 부족민들은 티베트 혹은 미얀마 쪽과 더 가까운 혈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담은 나가(Naga) 족의 경우에도 나갈랜드(Nagaland)와 마니푸르 주에 주로 거주하지만, 미얀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다. 옛날에는 외부 교류가 많지 않았다가 영국인 선교사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인도 타 지역에 비해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는 것 또한 독특한 특징이다.
1940년대 말 인도라는 국가가 세워진 이후로도 이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독립국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또 인도 국내에서의 차별로 이어졌고, 이 영화 <반짝이는 불빛>은 그 중에서도 아주 외딴 지역의 ‘토라’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전기도 수도도 학교도 일자리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달밤에 손전등에 의지해서도 춤과 노래를 멈추지 않는 마을. 태양열 전지를 동원해 한밤중에도 농작물 정리하는 바지런한 손길을 멈추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부 소식에 촉각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정직하게 담겨 있어, 영화는 얼핏 TV프로그램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고된 농사 중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침,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로 멀거니 차를 마시다 말고 남편에게 촬영 팀 바나나라도 갖다 드리라고 말하는 구멍가게 아주머니 ‘자스민’의 얼굴은, 그야말로 우리가 아는 똑똑하고 적극적인 아주머니의 모습 그 자체다. 15년 가량 주민들과 관계를 쌓았다는, 실제로 전기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의 옆 방에서 먹고 자고 발전기를 돌리면서 촬영하고 무려 7년을 녹여 영화 작업을 했다는 감독들의 접근이 이 거리감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는 이들이 사는 현실에 언제라도 서늘한 긴장감이 서릴 수 있는 곳임을 살짝살짝 표현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독립군 생활을 하고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는 노인 ‘캄랑’은 여전히 라디오로 평화 협정 진전 소식을 들으며 “끝이야…”하고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지난 투쟁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이따금 뉴스에서 전해지는 특정 지역 통행 금지령이나 심상치 않은 연기나 총 소리는 여전히 이들의 삶이 언제든 긴장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거기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에는 자유와 주체성이 또렷하다. 없는 불빛에 의지해서 합창 연습을 하는 찬송가 가사 또한, “나가 지역 젊은이는 특출하고 공부도 잘한다”거나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가 부러워한다”면서 지역의 색깔과 자부심을 톡톡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자의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이전에도 몇 번 불발되었던 전기 연결이 과연 이번에는 될까 의구심을 품은 시선으로 느리작느리작 진행되는 공사 과정을 지켜본다. 특히나 독립 운동을 오랜 기간 해온 캄랑 노인은 전기 공급도, 평화 협정 임박 소식도 온전히 믿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소식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진짜 올 때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오랜 기간 피부로 체득한 감각일 것이다.
마침내 전기는 아주 천천히 주민들을 찾아온다. 수풀을 헤치고 나무를 베고 전봇대를 하나씩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전봇대가 마을 한복판으로 다가오고, 지연 끝에 자재가 도착해서, 집집마다 두꺼비집 판과 전구 자리를 설치하고… 그러다 마침내 마을 첫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나라 옛날 모습처럼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서 다 같이 영화를 보고, 냉장고를 들인 기념으로 구멍가게에서는 주스를 얼린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바란 바로 그 크리스마스에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몇 해 지연되어서나마 그들은 비로소 불 밝힐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그러나 평화 협정은 여전히 저 멀리 있다. 전기뿐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의 미래 또한 자연스럽게, 이내 도래하기를 바라게 되는 영화였다. 이들의 단단한 자의식이 무너지지 않고도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기를. 깜빡깜빡 서서히 들어오는 백열등처럼 찾아와 주기를. 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캄랑 노인의 말대로 “어둠과 빛은 같지 않”으니까.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2023.10.04-13) 상영시간표]
10월 05일 19: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상영코드 055)
10월 07일 16:30 CGV 센텀시티 2관 (상영코드 160)
10월 10일 14:00 CGV 센텀시티 1관 (상영코드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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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2] (브런치작가/영화리뷰/결말x) 진짜 저스티스리그가 찾아왔다!
잭 스나이더가 하차하면서 자신의 버전을 완성하지 못했던 저스티스 리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2017년 조스웨던이 완성한 버전은 여러모로 평가가 좋지 못했죠.
이번 HBO max에서 공개된 영화는 한국에서는 Vod로 공개 되었어요.
4시간의 상영시간이 아깝지 않을만큼 완성도 자체는 조금 올라갔어요.
여전히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전 버전에 비해서는 캐릭터 서사가 나아졌고, 액션 장면도 좋아졌어요.
또한 음악감독을 맡은 정키XL의 음악도 영화에 힘을 줍니다.
마지막 전투도 조금 바뀌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 합니다.
잭 스나이더의 다음 편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래도 좀 더 나은 저스티스 리그를 볼 수 있어 좋네요.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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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 메인 예고편
남편의 실수로 아이를 잃은 ‘여정’은
우연히 만난 ‘명자’가 남편의 외도로
억울하게 이혼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비밀과 진실을 알고 있는 ‘여정’은
‘명자’와 치밀한 계획 아래
서로 상대방의 남편을 살해한다는 범죄를 공모한다.
독을 품은 두 여자의 광기 어린 복수극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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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세티 킬즈> 메인 예고편
전 세계를 폭파시킬 미사일 테러를 계획하는
억만장자 무기상인 ‘루더 보즈’(멜 깁슨)
정보를 입수한 미국 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해
마성의 살인 병기 ‘마세티’(대니 트레조)를 고용하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멕시코로 건너간 그는
예상치 못한 적들과 마주하는데…
과연, 마세티는 전 세계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웃겨주게 죽여줄 Z급 킬링 액션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