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27 15:02:10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리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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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탈 큐레이션
<애프터 양>을 여러 차례 보았다. 얼핏 잔잔해 보이는 이야기가 마음에 뭉클함을 남겼고, 릴리 슈슈의 흔적도 반가웠으며, 영화의 소리들을를 듣는 것도 즐거웠지만... 결국 여러 차례 볼 때마다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은 한 가지 질문으로 모여들었다. "기록의 큐레이션을 기억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질문은 결국 "양은 누구인가?" 로 이어졌다.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양'과 한 일가족의 이야기다. 영화는 먼 미래의 언젠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과시적이고 웅장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세계는 아니다. 현재 '문화권' 혹은 '인종'이라고 구분되는 것들이 생활 곳곳에 아무렇게나 섞여 있어, 양의 가족도 백인 남성 제이크와 흑인 여성 카이라 두 부부가 중국계 아이 미카를 입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생활 속에도 다양한 문화권의 특징들이 묻어난다. 특히 이 가족의 삶에는 차(茶)에 관심이 많은 제이크의 영향인지 특히나 '동양적'인 것들이 많이 어우러져 있다.
이 독특한 가족은 미카가 뿌리를 잘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중국계(로 인지할 수 있는 외양의) 안드로이드 '양'을 데려왔다. 미카는 양을 오빠라는 단어(哥哥)로 부르고 둘 사이에는 유대가 점점 쌓여 간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작동을 멈춘다. 이 영화는 양을 수리하기 위한 여정으로 시작되어, 양의 내부에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면서 양의 메모리를 들춰보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양은 3초 정도의 짧은 영상을 매일 남겼다. 사람이 일기를 쓰는 행위와 비슷하되, 3초라는 제한적 시간은 결국 양의 렌즈에 비추어진 모든 영상 중 큐레이션의 과정이 필요했다는 뜻이 된다. 어떠한 기준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양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어쩐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추억을 엿보는 기분이 드는, 애틋하고 뭉클한 영상들이 지나간다.
우드 소재와 초록 식물이 가득함에도 어쩐지 생명의 기운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인간들의 집에 비해, 양의 기억 속 장면들이 오히려 생동감 있고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벽에서 튀는 햇살, 널려 있는 빨래, 축복처럼 흩어지는 나뭇잎, 빙글빙글 춤추는 아이, 그리고 릴리 슈슈의 흔적. 더없이 '인간적'인 '기억'이, 인간이 아닌 존재의 '기록'에서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양의 메모리 뱅크는 숲의 형태로 시각화된다. 기록의 숲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일이 내 눈에는 마치 애도의 여정처럼 보였다. 수목장 형태의 납골당을 거닐며 그의 기억을 하나씩 함께 들추어 보는 것만 같은 기분. 다시 말해, 양의 메모리는 인간인 나의 눈에 기억으로 투사되어 들어왔다는 뜻이다.
기억의 큐레이션을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여기에 결국 YES를 택했다. 어디까지가 '인간적'인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결국 나는 이런 안드로이드를 만난다면 인간으로 인지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겠다는 대답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의 메모리 뱅크는 그 자체로는 그저 '기록'이겠지만, 기억을 가진 주체의 눈에 비추어 보이는 한, 기록의 큐레이션은 기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 없이는 챗GPT가 오천 번쯤 업그레이드된다 해도 기록의 큐레이션에 머무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제이크가 좋아하는 차와도 닮은 점이 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차 가게를 운영하는 제이크에게, 한 손님이 찾아와 '차 가루 tea crystal'는 없는지 묻는다. 결국 손님은 만족하지 못한 채로 가게를 떠났지만, 그 질문은 제이크에게 남아서 제이크를 이후로 차 가루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내려 보고 양과도 대화를 나눈다.
찻잎의 블렌딩도 결국은 큐레이션이 아닌가. 말린 잎 가루 하나하나가 모여 한 잔 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일정한 취향을 가진 양의 기록도 기억으로 보일 수밖에.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 속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춤을 추어야 하는 세상을 산다. 놀이를 빙자하고 있지만 이들이 추는 춤에는 무시무시한 전투의 도구들이 이름으로 붙어 있으며, 동작을 틀린 가족의 탈락은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VR 차단이라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신나는 음악이 흐르지만 자유롭게 몸을 흔들 수도 없는 세계, 어쩌면 이들이 사는 세계가 그토록 건조해 보이는 데에는 이 장면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의 세계는 건조하고 딱딱한 틀에 잡혀 있는 반면에,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에는 생명의 온기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거기에는 인간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릴리 슈슈로 대표되는, 과거 어느 동시대 함께 쭉쭉 마셨던 취향이.
안드로이드는 분명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인간처럼 투사되어 보일 수는 있다. 몸과 시선을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토록 감정을 이입하고, 인간과 로봇의 경계도 생각보다 쉽게 허물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의외로 취향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술을 무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를 규정하는 것들, 이를테면 우리의 성별, 인종, 소속, 지나온 이력들은 우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이따금 우리와 타인 사이에 경계의 벽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취향만큼은 경계의 벽을 세우지 않는다. 인종이 같고 소속이 같은 누군가보다, 취향이 같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더 '나와 잘 통한다'고 느낀다. 다른 차이들이 좀 있어도 다시 보게 되고, 한 번 더 귀를 기울여 듣고 싶어진다.
이 영화를 연출하고 편집한 코고나다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고, 이 영화에는 미국 사회에 사는 '아시안'으로서의 생각들도 묻어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동아시아에서 온 여자'로 보일 나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시선에서 아시아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걷어낼 수가 없다.
(오래도록 할리우드 아시아계 캐릭터의 외형 클리셰였던) 부분 탈색 헤어스타일이나, 중국계 캐릭터가 무슨 드레싱 만들듯 가벼운 손길로 고추장을 만들고 있는 점, 한 캐릭터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아역 배우들이 계속 바뀌는데 쌍꺼풀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캐스팅... 같은 것들을 만약 백인 감독이 했다면, 같잖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혀를 찼을 것이다. 편안하게 개량된 동양식 옷차림조차도 그래 보였을 것 같다. 혹시나 더 비하의 의미가 있지는 않은지, 거대한 아시아를 손쉽게 뭉개버리는 무지한 시선이 있다면 나는 그 영화를 좋다고 말하기 싫으니까, 가자미눈 뜨고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감독이 아시아계 디아스포라 당사자이기도 할 뿐 아니라, 그 경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있는 양의 맑은 눈빛을 보게 한다. 계속해서 구분 짓고 선을 긋는 세상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취향의 조각을 모아, 부드럽게 통합되고 이어지고 싶어진다. 그렇게 나만의 차 가루tea crystal를 큐레이션하여, 향긋한 한 잔을 블렌딩해 나누어 마시고 싶어진다.
양은 무(無)가 없다면 유(有)도 없다고 했다. 양의 외형은 멈추었지만, 형태 없는 양의 기억, 미카와 양이 함께한 시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스산하지만 자꾸 돌아보게 되는 멜로디로 남아 버린 릴리 슈슈 또한 버추얼 아티스트였다. 여러 차례 보았던 <애프터 양>을 이제는 덮는다. 당분간은 망막이 아닌 기억에 소중히 묻어 두고 싶은 영화를, 차 향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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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10월 3주 개봉영화!
블랙아담 Black Adam , 2022
액션 스타 ‘드웨인 존슨’의 슈퍼 히어로 첫 도전
영화 "블랙 아담"은 5000년 전 고대 국가 '칸다크'의 노예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불사신으로 깨어난
'블랙 아담'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일격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입니다.
'분노의 질주','쥬만지' 시리즈 등을 통해 독보적인 피지컬과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액션 연기를 선보여 온 드웨인 존슨이 처음으로 슈퍼 히어로에 도전합니다.
'블랙아담'은 DC 확장 유니버스 사상 가장 강력한 능력치를 보유한 히어로계의 끝판왕이죠
각기 다른 슈퍼 파워와 매력으로 무장한 DC 원조 히어로 군단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를 스크린에서 처음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블랙 아담"만의 특별한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DC 확장 유니버스 사상 최대 스펙과 최강 파워를 갖춘 가장 강력한 히어로 등장!
추천영화 "블랙아담" 입니다.
미혹 2021
가족의 관계와 심리 변화의 무서움을 마주한다!
영화 "미혹"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가족이 새로운 아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미스터리 공포 영화 입니다.
슬픔과 불안, 두려움 등 가족 간의 감정과 심리 변화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가 압권인 작품이죠.
미스터리 공포 장르에서 더욱 빛나는 배우 박효주,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배우 김민재,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여온 배우 차선우와 함께 베테랑 아역배우들까지 합세해
완벽한 호흡으로 열연을 펼쳐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가족의 숨겨진 비밀, 진실과 믿음 사이에서 피어나는 두려움에 맞서는 미스터리 공포!
색다른 서스펜스와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번주 추천영화 "미혹" 입니다.
귀못 2021
가족의 관계와 심리 변화의 무서움을 마주한다!
영화 "귀못"은 수살귀가 살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가득한 저수지 근처,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저택에 숨겨진 보석을 훔치기 위해 치매에 걸린 왕할머니의 간병인으로 들어가게 된 보영의 이야기입니다.
KBS 드라마스페셜의 TV 시네마 작품으로 극장에서 먼저 개봉 후 12월 21일 TV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탁세웅 감독은 "귀못에 대해 수살귀가 콘셉트고 모티브다. 그걸 전면에 내세운 공포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연출하면서 축축하고 눅눅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하우스호러의 연출에 충실한 모습이 나오는데요
K-정통호러의 맛을 보실수 있을것입니다. 극강의 K-호러의 탄생!
이번주 추천영화 "귀못" 입니다.
나를 죽여줘 Kill me now , 2020
전 세계 영화제 7관왕 수상
영화 "나를 죽여줘"는 선천적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 ‘현재’와 유명 작가였지만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 ‘민석’이 서로에게 특별한 보호자가 되어주는 휴먼 힐링 드라마입니다.
개봉 전부터 전 세계 영화제 수상과 호평이 이어지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를 죽여줘"는 성(性)과 장애, 존엄사까지 한 영화에서 다루기 힘든 소재를 영화의 인물들을 통해 솔직하고 대범하면서도
사려 깊게 그려내 삶과 존엄의 묵직한 메시지와 질문을 던져주며 깊은 여운을 선사하는데요
전 세계에 깊은 울림과 질문을 던진 캐나다 극작가 브레드 프레이저의 웰메이드 연극 '킬 미 나우'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명품 카리스마 배우 장현성, 충무로 이끌 실력파 배우 안승균, 이일화, 김국희, 양희준까지!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줄
이번주 추천영화 "나를 죽여줘" 입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Soup and Ideology , 2021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재일교포 2세인 양영희감독이 어머니 강정희씨로부터
우연히 제주 4.3에 대해 들은 후 강씨의 기억을 기록하고 가족으로서 그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 입니다.
어머니 강씨가 사는 일본 오사카, 함께 방문한 제주의 여정 등이 담겨있습니다.
지난해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집행위원회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 6월 개봉하며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가 일본에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족과 비극의 폭력의 아픔을 준 국가, 뿌리박혀 쉽게 이해하기 힘든 각자의 이데올로기!
이번주 추천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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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니스 엔드
저니스 엔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내 느낌이 정확하게 맞아서 신기했다. 이 영화는 R. C. 셰리프가 1928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셰리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싸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이 기록을 깨지만, 불과 20년 사이 무기의 발달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은 4천3백만 명이 참전했고, 사망자와 실종자(사망으로 추정)를 합하면 1천만 명이 넘었다. 즉, 4명 가운데 한 명이 전사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가 1천2백만 명이었으니 사상자로 보면 4명 가운데 2명은 죽거나 다친 것이다.
동맹국은 2천5백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망자와 실종자가 8백만 명이고, 부상자도 8백만 명 정도다. 사상자가 1천6백만 명이니 통계로 보면 동맹국 군인의 피해가 더 컸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지만, 2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전선을 따라 참호를 길게 파고,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과 대치한다.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상대 참호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게 병사들의 몸뚱이를 갈아넣으면서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다. 가장 유명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17' 그래픽노블 '1914-1918'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 가운데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을 보면, 이 전쟁이 '참호전'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대부분은 참호에서 생활한다. 전선을 따라 길고 복잡하게 만든 참호는 아군의 기지 역할을 하고, 안전한 방어진지이면서, 적을 공격할 때도 빠르게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적과 아군의 참호 거리는 불과 50미터여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심리전 - 음악, 방송 등 - 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적군이어도 임시 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참호는 안전하지만 매우 비좁고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발이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에 쥐가 들끓고, 미쳐 거두지 못한 아군 병사의 시신을 참호 바깥쪽에 땅을 파서 메워 벽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참호 생활의 어려움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개인적'이고 '연극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가 참호생활의 묘사였고, 다른 하나는 군인들 - 장교와 사병 - 특히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리 소위는 이제 막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앳된 소위다. 그는 전방 연대로 전입 인사를 하러 왔다가 사단장을 찾는다. 사단장은 롤리 소위의 삼촌(외삼촌)이다. 이 정도 빽이면 좋은 보직을 받아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롤리 소위는 최전방 대대로 배속해달라고 요청한다. 스탠호프 대위가 대대장으로 있는 그 대대로 꼭 배속을 해달라는 롤리 소위의 부탁에, 사단장도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롤리 소위와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 전에 함께 살던 사이였다. 롤리 소위의 집안은 명문가로 부유한 - 아마 귀족일 수도 있다 - 집안이었고, 그런 롤리의 저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사람이 스탠호프였다. 스탠호프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해 지금은 대위가 되었고, 사단에서 유명한 전설적인 대대장이 되었다.
반면 롤리 소위는 학군장교였다가 최근 8주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전방부대로 배속받은 신참이었다. 롤리 소위의 기억으로 스탠호프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롤리, 롤리의 누나와 함께 셋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었다.
프랑스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대대는 이제 막 직전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앞으로 6일 동안 참호에서 대기하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선은 벌써 몇달 째 교착상태에 있었고, 소문으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 이미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롤리 소위는 전쟁 전의 스탠호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참호에서 본 대대장 스탠호프는 롤리 소위의 기억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전입인사를 하러 온 롤리를 바라보는 스탠호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친동생 같은 롤리였지만, 최전선에서 만나는 롤리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의 내부에서 뒤섞이며 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설적인 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병사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승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잃은 스탠호프 대위는, 부하 병사들 한 명, 한 명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비통한 감정과 그 감정을 누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지휘관으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탠호프 대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을 억누르려 술을 마시게 되고, 거의 알콜중독에 이르게 된다. 롤리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를 만난 이후, 이야기는 스탠호프 대위를 둘러싸고 측근인 부하 장교들과 연대장의 대화, 갈등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군은 첩보를 통해 3월 21일, 독일군이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얻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기 위해 스탠호프 대대에 독일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스탠호프 대위는 더 어두워진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하지만, 연대장은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한다며 오후5시에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더 많이 죽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탠호프 대위는 연대장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두 명의 장교와 여덟 명의 병사로 침투조를 짜는데, 지휘장교로 스탠호프 대위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오스본 중위가 차출되고, 롤리 소위는 자원한다. 그렇게 독일군 생포작전이 시작되고, 열 명의 군인이 독일군 참호로 뛰어들어 독일군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살아돌아온 군인은 롤리 소위와 네 명의 병사였다.
전쟁에서 군인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이 유일했던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 잔혹한 전술 앞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스탠호프 대위의 심정은 갈갈이 찢겨나간다.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장교들의 갈등, 장교와 사병의 갈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스탠호프 대위는 마치 햄릿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전쟁에 끌려들어온 '개인'이며, 명분이라고는 오로지 '국가의 이익'인데,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애국심'만으로 명분을 찾기에는 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개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탠호프 대위의 대대가 참호로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날의 공격은 독일군의 '춘계 대공습'으로 기록되었고, 단 사흘의 전투로 양쪽에서 무려 7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롤리 소위는 등에 부상을 입고 스탠호프 대위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스탠호프 대위는 포탄이 어지럽게 터지는 참호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참호에 있던 영국군 대대는 전멸한다. 포연이 그치고, 전멸한 영국군 사이를 걷는 독일군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썼다는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쳐가듯 잠깐 독일군이 방독면을 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극한 상황이라 결코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군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대규모 살상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고 우연이라면, 전사한 병사 역시 그의 죽음은 우연일 뿐이다.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이런 불분명한 명분 때문에 도구로,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 개개인은 전쟁의 거대한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구조의 틀에 갇힌 개인은 자신의 삶,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며, 이런 모순과 갈등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인간의 존재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내면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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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명 밖에 죽지 않은 원전사고
이 글은 왓챠 [체르노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게일]의 스포도.
왓챠를 넷플릭스의 대항마(?)로 자리 잡게 한 시리즈 중 하나인 체르노빌은 총 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드라마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사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 사고에 대해서 제가 아는 지식이라고는 아직도 그 지역은 위험하다더라. 정도의 지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는 것을 기꺼이 미뤄왔던 이유는 다큐멘터리 식의 드라마는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화를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재미"를 떠나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가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극적이고 참혹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진실에 대해 받아들이게 된 순간을 저는 이번 일요일에 선물로 받아 든 느낌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책임자를 찾고 있네.
바보들이 권력을 가지면 일어나는 참사.
사진출처:구글 클리앙/보리스... 진짜 너 아니었으면 껐다.
권력은 자신의 힘이 파악될 때 발휘되는 법.
세 명을 죽일 허가가 필요합니다.
만약 스텔란이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정도의 마무리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었다.
체르노빌 사고가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했는지. 이 드라마는 너무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잘못된 초반 보고 및 소위 말하는 위 daegari들의 일처리 방식 역시 그렇지만. 제가 경악하며 눈물을 터뜨렸던 장면은 따로 있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그 불빛이 아름답다며 다리 위에서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아무 죄 없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것이었죠. 눈처럼 흩날리는 피폭의 증거들 아래서 그들은 웃고 있습니다. 아이를 들어 올려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난생처음이라는 추억을 나누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 속에서 신이 나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장면을 천천히. 그리고 골고루 보여줍니다. 정말 분통이 터지면서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장면이죠.
시민들은 가장 위험한 그 순간에, 그 어떤 통보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관계자들은 사고가 잘 대처되고 있다는 말을 믿고 싶어 믿었고, 사실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죠. 책임자가 누구냐는 폭탄 돌리기나 하고 있었습니다. 멍청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 경우 일어나는 참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떼 전문가 보리스 역시 처음에는 정말 전형적인 권력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자력에 대해서는 단어 스펠링 외엔 그 어떤 것도 모르면서 전문가인 발레리의 말을 가볍게 어깨 뒤로 던져버립니다.(참고 1) 현장에 갔을 때만 해도 여전히 자신보다 애송이인 발레리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죠. 하지만 점점 보리스는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유일하다고 해야 할 입체적인 인물의 등장에서부터 드라마, 혹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지치고 지는 것이 편한 전투를 우리는 이 드라마 내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진실로 우리를 인도한 가치 있는 싸움이었죠.
직업적 소명에 대하여.
어째서 늘 영웅들은 착한 시민들인가.
사진출처:브런치/진짜 이때 광부님들 간지 터짐.
동무도 나만큼 선택권이 없어 보이는군요. 문제가 주어졌으니 답을 찾을 때 까진 절대 멈추지 않겠죠. 과학자이니까.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두 과학자의 말에. 나는 정말 너무 부끄러워졌다.
늘 그렇듯. 이렇게 큰 사고가 일어나고 나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영웅들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름조차, 혹은 존재조차 감 잡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죠. 우리의 역사에서도 의병들.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체르노빌]에도 이름 없는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화재를 진압하려는 드라마의 초반에는 소방관들이 그랬고, 나중에는 광부들이 그랬으며, 마지막엔 바이오 로봇이라 불려야 했던 맨파워(Man power, 사람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들)가 그랬습니다.
특히 광부들이 장관의 말끔한 복장을 장난처럼 툭툭 치고 지나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임무를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는 어째서일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아무리 공산주의였고(소련) 따르지 않을 경우 총살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마치 원래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이를 받아들입니다. 정부가 제안했던 돈은 "목숨 값"으로는 정말 터무니없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죠.
광부들은 원자력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헬리콥터가 그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내리는 장면을 이미 본 우리들은 그것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죠. 피폭된 모든 것들의 파멸은 그렇게도 조용하고 처참했습니다.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참사 앞에서 그들은 두렵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용기가 있다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토록 덤덤하게 만들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라는 생각해 보면. 결국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진실, 그리고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직업적 소명을 버리지 않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발레리와 울라나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더 크고 친밀한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극 중에서 과학자이고 자신들의 생명과 모든 커리어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진 생각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소명.이라는 것을 받들어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 정도면 됐다.라는 생각으로 나는 얼마나 타협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나. 얼마나 좁은 의미의 일을 하며 그것이 다라고 생각했나.라는 반성을 할 수 있었죠. 퍼질러 앉아 현실 탓이나 하고 있었던 제가 너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실은 무엇인가.
용기 있는 선택. 그리고 남는 씁쓸함.
사진 출처:구글 허핑턴 포스트/이때 정말 귀여움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은 쌓입니다.
발레리. 당신의 선택은 절대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5화에서는 체르노빌 원전에서 그때 일어났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 시간을 모두 할애합니다. 다른 드라마였거나 성격이 다른 영화에서의 법정신은 지루해서 조금 힘들어하기 일쑤인데 체르노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죠. 진실이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입니다.
체르노빌 사고는 누가 봐도 인재(人災)였고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들은 유야무야 덮이고 책임자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큰 벌을 받지 않았죠. 빗나가지 않는 또 다른 예상처럼 그들은 오히려 법정에서 더 큰 소리를 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문구는. 저의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소련의 공식적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 사망자 수는 31명. 그 수치는 사고 이후 지금까지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나라에서는 암 발병률이 치솟고 아직까지도 피폭된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데도 말이죠. 하긴 30만 원도 채 안 되는 금액으로 평생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발레리는 자살로 이 모든 사실을 알리기로 마음먹습니다. 마치 영화 [데이비드 게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잔인한 결말이지만 그 덕에 우리는 알게 되었죠. 고위층들이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니며. 진실은 이토록 처참하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했던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희생에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습니다.
좋은 마무리였다.
앞으로도 계속 꾸준히 하긴 해야겠다.
체르노빌을 끝으로 Golden week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아마도 잊고 있었던 공감대를 형성하는 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없다 혹은 시간 없다는 이유로 늘 미뤄왔던 매체들을 보면서. 여러분의 이야기와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행복해하는지를 느끼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 체르노빌이 되어 더더욱 기쁩니다. 자주 까먹고 또 자주 좌절하겠지만. 제게 많은 다짐과 의미를 부여해 준 작품이 되었습니다. 감히 평가를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사는 현시대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추천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고 1
보리스 진짜 처음에 헬리콥터에서는 정말 얄미웠는데 나중에 발레리 감싸줄 때 느꼈음. 역시 성격이 더러운 사람은 곁에 두고 싸움 닭으로 써야 한다는 걸. (응?)
[이 글의 TMI]
1. 책이 너무 많아서 울면서 짐 쌌음.
2. 미니멀리스트인데도 짐이 꽤 많았음. 우체국 박스 가장 큰 것으로 네 개나 나옴.
4. 햇빛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라 침실과 서재에 햇살이 얼마나 들어오느냐를 중점적으로 보았고 결과는 성공적. 새 집은 창문이 많아서 좋은데 이제 난방비랑 냉방비를 감당하느라 더 열심히 일해야겠지. 새드 엔딩.
5. 집에 들어가면 외출복을 벗고 홈 웨어 입고 돌아다니다가 잠들 때는 따로 잠옷을 입고 자는 사람인데 이불과 함께 새 잠옷도 오지 않음. 비닐에 들어가서 자야 할 판.
6. 샤워 가운도 오지 않았다. 온 것은 내 몸뚱어리뿐. 하....
7. 한 끼 먹고 2.5만 보 걸어도 살 안 빠져요. 머리만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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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틀 곡 없는 네 번째 디스토피아 앨범처럼
<러브, 데스 + 로봇> 시리즈는 넷플릭스에 간헐적으로 발매하는 컴필레이션 앨범과도 같다. 사랑, 죽음 그리고 로봇(테크놀로지)이란 세 가지 주제를 갖고 다양한 감독이 만들어낸 이 작품들을 보고 듣는 재미는 그 자체로 쏠쏠하다. 이런 의미에서 <블랙 미러> 시리즈와 함께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사하는 <러브, 데스 + 로봇> 시즌4를 향한 기대감은 컸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아쉬움도 큰 법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 실황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CAN'T STOP>이나 <미지와의 조우>의 매운맛 버전처럼 느껴진 <미니와의 조우>, 독특한 색채와 화풍을 선보인 <400 보이즈> <지크는 어떻게 종교를 갖게 되었나> <기어갈 수 있으니>, 고퀄리티의 수려한 그래픽으로 구현한 <스파이더 로즈> <티라노사우르스의 비명>, 그리고 블랙코미디 스타일 짙었던 <또 다른 커다란 것> <골고다> <똑똑한 가전제품 멍청한 주인> 등 제목에 기인한 주제로 탄생한 10편의 이야기들은 완성도를 떠나 각기 다른 개성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전 작품들에서 봤던 기시감은 벗어나지 못했다. 다수의 작품은 이전 시리즈에서 본 스타일과 세계관, 또는 콘셉트와 겹치면서 신선함은 떨어졌고, 일보 후퇴한 측면도 있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생길 수밖에 없는 거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팬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건 시즌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부재하다는 것. 시즌1에서는 <굿 헌팅> 시즌3에서는 <히바로>를 꼽을 수 있는데, 이번 시즌에는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폭망했던 시즌2가 생각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4를 계속 볼 수 있었던 건 실존적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시리즈의 중점을 어떻게든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개성은 다르지만, 다른 존재(로봇, 동물, 로봇, 외계인, 악마 등)를 통해 인간이 가진 나약함과 이기심, 배타성 등을 들춰내고, 반성하게 만드는 부분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로봇은 물론, 고양이, 돌고래,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 타락한 천사 등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곧바로 객관화된다. 우리도 지구 안에서는 작은 개체일 뿐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현 인류의 혼란과 불안을 각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로봇에게 의존하면서 점점 멍청해지는 인간, 인간성 말살 상황에서 실존에 대한 고민, 전쟁, 종말 등의 소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중심마저 흔들렸다면 제작을 맡은 팀 밀러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데이빗 핀처 감독이 미웠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시즌4를 보면 이전 시즌에서 봤던 좋은 작품을 찾아볼 것 같다.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한 이들이라면 시즌 1부터 정주행할 수도 있다. 왜 넷플릭스 구독자들이 이 시리즈를 기다렸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때문.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시즌 5를 기다린다. 왠지 짝수 시즌보다 홀수 시즌의 완성도가 좋다는 가설이 세워졌다고나 할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 CAN'T STOP이나 들어야겠다.
개인 추천 에피소드 3| <지크는 어떻게 종교를 갖게 되었나>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군이 깨운 타락천사와 사투를 벌이는 미 공군들의 이야기.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피칠갑 고어 액션과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모습은 박진감 넘치게 연출된다. 특히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액션 시퀀스와 이를 구현하는 작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에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신과 종교, 믿음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은 힘든 상황 속에 놓인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한다. 참고로 해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다. 연출은 시즌 3 <킬 팀 킬>의 디에고 포랄이 맡았다.
| <티라노사우루스의 비명>시각적으로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 경기장, 검투사, 공룡 등이 등장하는 작품인 만큼 호쾌하고도 잔인한 액션이 볼거리. 액션보다 잔인한 건 검투사들과 공룡의 죽음을 유희로 즐기는 군주와 상류 지배층들의 모습이다. 결국 폭군을 향한 피지배층과 동물(또는 자연)의 복수가 벌어진다. 극 중 자연을 무참히 짓밟은 인간, 유색인종을 노예로 부려 먹은 백인들의 추악한 과거 등을 잘 녹인 이야기. 다만 세계관의 설명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출은 팀 밀러가 맡았다.
| <스파이더 로즈>
브루스 스털링의 동명 단편을 영상화한 단편. <쿵푸팬더>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니퍼 여 넬슨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남편을 떠나보낸 후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여성, 외계 애완동물, 그리고 복수라는 주제를 잘 융합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면서 감정이 메말라갔던 스파이더 로즈와 귀여운 애완동물로 그 공허를 채우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여기에 SF 장르에 걸맞은 우주 전쟁과 액션 장면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도 있다. 반전의 힌트는 초반에 나오니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타이틀 곡 없는 네 번째 디스토피아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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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줄거리
자신이 사이코패스라고 믿는 17살 소년 제임스.
수많은 실험 끝에 이번엔 사람을 죽여보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분노로 가득 찬 소녀 앨리사.
그녀는 지긋지긋한 엄마와 새아빠에게서 벗어나고자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가출에 일단 동참한 제임스.
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숨은 의미 찾
제임스와 앨리사 모두 자신을 억누르는 인생의 압박감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간에 말이다. 지독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원래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이니까.
그들을 짓누르는 것은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무료함을 느끼는 정도였다면 급식실을 오가는 수많은 또래 학생들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소소하고 짤막한 일탈로 하루하루를 달래고 다시 제 발로 무료함 속에 걸어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것은 '일탈'이라는 단어로 퉁치기에는 과한 감이 있다.
제임스는 아빠를 쥐어패고(폭행), 무작정 차를 타고 도망쳐서(절도), 그 차를 개박살 내는 등(손괴) 일탈의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죄를 나열한다. 게다가 살인 시도를 위한 가출이었으니 그 목적마저도 심각한 범죄에 해당된다. 이것은 일탈이 아니라 그야말로 '폭발'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는 여러 동물들은 죽이며 자신을 억눌러왔지만, 결국 앨리사를 만나며 모든 것을 폭발시켜 버린다.
앨리사의 사정도 그다지 다르진 않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는 인간에겐 가차 없이 쌍욕을 박고 휴대폰을 집어던지지만 정작 불만의 근원지인 집에서는 말 한마디 뻥긋하지 못하고 산다. 늘 남들에게 막 대하는 자신의 성정을 속으로는 매 순간 후회한다. 자신이 엉뚱한 방향에 대고 화풀이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반항적이고 조금은 이상한 아이로 살아오며 자신을 억눌렀지만, 마찬가지로 제임스를 만나고 더 이상 참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막상 시시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에서 빠져나오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뼈져리게 깨닫는다. 뭐든지 쿨하게 행동하며 아무하고나 하룻밤을 보내려던 앨리사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어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이코패스라고 확신하던 제임스는 진짜 사이코패스를 죽인 뒤 역겨움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그런 착각을 하곤 한다. 일상을 빠져나오면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왜냐하면 어디에 있든 우리는 여전히 '빌어먹을 세상' 속에 있으니까.
모순적이게도 제임스와 앨리사 모두 가식적으로 자신을 감싸던 평화를 깨뜨리고 다른 평화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들의 발이 가닿는 곳 어디에도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딜 가든 자신들을 옥죄는 어른들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두 아이는 그 사실을 세상 끝에 다다라서야 깨닫는다.
마음속에 아직 아물지 않은 아픔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평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열일곱, 혼자서는 감내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상처였다. 드라마는 제임스와 앨리사가 서로에게 작은 위안을 얻으며 조금씩 조금씩 생채기 난 가슴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끝끝내 어른들의 욕심이 그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처참하게 민낯을 드러낸다.
묘하게 소년 심판이 생각났다. 아이들의 아픔과 어른들의 욕심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달랐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아이들의 행동을 볼 때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축약된다. 마치 뉴스에 제임스와 앨리사가 '빈집에 무단 침입해 집주인을 무참히 살해하고 도망치다가 주유소를 습격한 아이들'로 현상수배되는 것처럼.
아이들은 '가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쳤다.
자신들을 상처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고 외면하는 어른들로부터. 그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너무나도 과장된 행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속시원함이 슬픔으로 다가오는
감상평
시즌 1을 다 본 후의 감상은, 그냥 슬펐다.
눈물을 질질 짤 정도로 사무치게 슬펐다는 건 아니다. 그저 왜 제임스와 앨리사가 매 순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원치 않았던 선택을 등 떠밀려 해왔다는 점이 서글펐다. 말마따나 이 빌어먹을 세상은 도무지 어린애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없다. 왜 항상 어른의 잘못이나 어른의 아픔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제임스와 앨리사가 도망칠 땐 부러웠다. 그런 선택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더 이상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증명하는 건 마지막에 두 사람이 바닷가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아이는 도망치는 것 밖에는 택할 수 없다. 세상은 자꾸만 그 아이들의 등을 떠민다. 그렇게 떠밀려서 땅 끝으로 내몰려, 이젠 더 갈 곳이 없는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뻐근했다. 어쩐지 나의 유년 시절을 보는 것도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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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영화 후기 / 명불허전의 액션 블록버스터 / 한(성강)이 살아 돌아왔다!! / 이제는 우주로 나아갈 때?!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캐스팅 소개 후에 제대로 있습니다.
블록버스터답게 엔드크레딧이 제법 긴데, 엔드크레딧 후에는 쿠키가 없으니 편하게 나오셔도 될 듯합니다.#분노의질주, #빈디젤, #성강, #샤를리즈테론, #블록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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