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5-01-29 17:51:59
마치 우리의 과거처럼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리뷰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비슷한 비극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여겨야 할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죽음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보사노바를 마음껏 즐기면 되겠지! 하는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익숙한 비극을 마주하니 고통스러웠다. 마치 5월의 광주에서처럼, 제목에서 가리키는 ‘그들’이 피아노 연주자를 쏘아 죽인 데에는 아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피아노 연주자의 공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독재의 산물인 비극이다.
작가인 주인공은 우연히 한 보사노바 앨범을 발견하게 되고, 연주자를 찾아 나선다. 그는곧 피아노 연주자가 1960년대, 보사노바 장르의 인기 속에서 활동하던 테노리오 주니오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공연을 마친 어느 날 밤 실종되었고 지금까지 행적을 알 수 없다는 것까지. 관객에게 익숙할 만한 아티스트들, 엘라 피츠제럴드, 조빔, 빌 에반스 등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영화는 보사노바 장르를 설명하고, 홀연히 사라진 테노리오의 이야기로 옮겨 간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그의 이야기가 예술과 유행, 특이한 행보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까지 알려 준다.
실종 당일 그의 행적과 그를 찾으려 노력한 가족, 친구들의 증언을 듣고 또 들으면서 영화는 그의 실종이 당시 남미를 집어삼킨 독재 정치와 연관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증언하는 모두가 입을 모아 테노리오가 실종 이전에는 정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집과 피아노와 추구하는 장르가 있었고, 연인과 친구와 동료 예술가가 있었지만 독재자들이 경계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와는 무관한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관객은 독재 정치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단지 밤에 길거리를 걸어 다녀서, 예술가인 친구가 있어서 그들은 멋대로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그리고 끝내 책임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지만 숫자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테노리오가 실종되면서 그에게는 어쩌면 앞으로 있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공연과 찬사, 예술가로서의 세계가 통째로 사라졌다.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삶, 그 안의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도 전부 빼앗겼다. 영화는 그의 행적을 알아내려는 주인공의 여정과 여러 명의 증언,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한 화면을 통해서 관객이 그 사실에 천천히 당도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마치 한국의 과거를 처음 배웠을 때의 심정처럼 관객에게 다가선다. 그것을 직면하고 나서야 마침내 보사노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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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감의 무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가족, 직장, 사회에 대한 책임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 부모로서의 책임도 생기고, 직장에서는 팀을 이끌거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책임도 생긴다. 이런 책임감이 인생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책임감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의사나 비행기 조종사 같은 직업은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그들의 결정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최고의 판단을 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영화 <하이재킹>은 이러한 책임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부기장 태인(하정우)은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끝까지 지키며, 희생자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동료인 기장 규식(성동일)과 승무원 옥순(채수빈) 역시 마찬가지로 높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 역시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비행기를 납치하는 용대(여진구)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책임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게 비록 잘못된 에너지가 되어 발산되지만 결국에 그의 행동도 책임감에서 비롯된 죄책감이 원인이었다.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책임감이 어떻게 충돌하고, 그것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첫 번째 감정] 태인의 책임감
부기장 태인은 과거 공군에서 납치된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어긴 경험이 있다. 그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명령을 거부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비행기는 납북되었고 태인은 군에서 퇴출당했다. 이러한 과거가 그에게 큰 두려움을 안겼겠지만, 그에게 여객기 조종사라는 직업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그 일을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객기 조종사가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영화에서 태인은 매우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별히 실없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대처하는 그는 이 영화 안에서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다. 비행기가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감정적인 반응을 먼저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그 상황을 대처하며 승객들을 안전하게 내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납치범에게 위협을 당하고 총에 맞는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태인의 책임감은 단순한 의무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보이기도 하고, 과거에 다른 여객기를 납북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도 그에게 더욱 책임감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 그는 납북된 선배 조종사의 가족들까지 챙기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가는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영화 전반에 걸쳐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느 누구도 아닌 태인의 서사가 중심이 된다.
[두 번째 감정] 용대의 분노
납치범 용대는 사실 억울한 인물이다. 북으로 넘어간 형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어머니는 혼자 집을 지켰지만, 지병으로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그는 가족을 살필 기회도 없었고, 그저 감옥에서 출소해서 돌아온 집에 숨져있는 그의 어머니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상황과 슬픔은 그대로 큰 분노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의 납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용대의 분노는 그를 비행기 납치로 이끌었다. 그의 분노는 다른 무고한 승객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거나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는 부기장 태인을 보며 자신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조금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용대가 가지고 있는 분노가 그의 판단력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그런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용대는 극단적인 선택을 계속해나간다. 북으로 가자는 그의 외침은 후반부로 갈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단지 그의 분노만 화면 속에서 전달될 뿐이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점점 어두워지는 다른 승객들의 얼굴빛에 가려져간다. 그래서 그의 서사 안에서는 그의 행위에 정당성을 가지지만, 비행기 전체의 승무원과 승객들의 서사까지 확대하고 나면, 그 분노는 정당성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분노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규식의 믿음
기장 규식은 처음에는 태인을 믿지 않았다. 공군에서 쫓겨난 태인을 직접 평가하기 전까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담배를 피우며 태인과 규식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규식은 태인에게 이번 비행에서 착륙을 해보라고 이야기하면서, 태인의 실력을 살펴보려 한다. 외부의 평가는 이미 끝난 태인에겐 그 기회가 그의 경력에 꽤 중요한 기회였다.
이후 비행기가 납치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인은 차분함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 그의 태도를 본 규식은 부기장으로서의 태도를 먼저 인정하게 된다. 폭탄이 터지고, 비행기에 구멍이 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그 상황을 대처하고 승객안심시키는 모습은 충분히 규식에게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규식은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점차 태인에게 의지하게 되고, 결국 그를 전적으로 믿게 된다.
중반부에 규식은 눈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태인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규식은 마지막 순간에 태인에게 착륙을 맡긴다. 규식의 믿음은 태인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외부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은 규식의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다. 이 영화에서 기장으로서의 역할은 무척 제한적이었지만, 리더로서 가질 수 있는 품격은 충분히 보여준 규식이다.
영화 <하이재킹>은 과도하게 감동코드를 밀어 넣지 않으면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특히 부기장 태인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인데, 그의 우직한 모습이 끝까지 이 영화를 지탱한다. 그가 가진 책임감,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의 믿음이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든다.
비록 분노에 가득 찬 납치범이 벌인 일이지만, 그를 달래고 설득하면서 좋은 상황을 만들려 애쓰는 모습이 긴장감 있게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의 힘이 장점이 되는 영화다. 비행기 불시착한 모습도 실제와 똑같고, 납치범의 사연도 거의 비슷하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희생된 사람들의 구성도 실제와 동일하다. 실화가 좋았기 때문에 담백하지만 긴장감 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에는 유머가 전혀 없다. 성동일과 하정우라는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특유의 개그 연기가 전혀 없다. 또한 외부 비상 센터 같은 정부의 대처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이, 온전히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영화의 감정들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가 다루는 당시 시기에는 비행기 납치나 납북이 많았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누군가를 살리려는 책임감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언제나 그런 사람은 사회에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단지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 <하이재킹>에는 그런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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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과 상상, 그리고 대화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이야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우연과 상상>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살다보면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날 때도, 혹은 상상과 달리 우연하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도 있다.
영화 <우연과 상상>은 그런 일상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우연과 상상> 속의 총 3개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일들이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장면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마도 '영화 속의 일들이 내게 일어나면 과연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와 '츠구미(현리)'가 택시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둘의 대화는 츠구미가 최근에 만난 새로운 남자를 주제로 이어진다.
메이코는 츠구미와 헤어진 뒤 어느 회사로 향한다.
이 회사는 츠구미가 이야기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의 회사였다.
사실 카즈아키의 전여친이 메이코였던 것이다.
친구가 이야기해 준 남자가 알고보니 내 전남친이었다니. 그리고 최근에 호감 가진 남자가 내 친구의 전남친이었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정말 마법처럼 신기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메이코와 카즈아키는 회사에서 또 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화를 통해 아직 둘의 서로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구나, 미련이 남아 있구나, 등의 정보를 확인한다.
이후, 메이코와 츠구미는 카페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카즈아키를 발견한다.
아직 메이코와 카즈아키의 사이를 모르는 츠구미는 카즈아키를 불러 메이코에게 소개시킨다.
이때 메이코는 상상한다.
츠구미에게 사실 카즈아키가 자기의 전남친이며, 자신은 아직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상상.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츠구미는 도망치듯이 카페를 나가고, 카즈아키도 카페를 박차고 나가서 츠구미를 붙잡으러 가는 상상.
이 상황들은 그저 '상상'에 불과했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메이코는 대충 둘러대고 자리를 비켜준다.
메이코의 상상이 그녀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그녀가 내심 바라는 상황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메이코 개인의 심정은 많이 복잡하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친구 츠구미와 전남친 카즈아키 모두를 위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에피소드다.
메이코와 츠구미, 메이코와 카즈아키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들이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초반에 츠구미가 해주는 카즈아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내 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어서 더 재밌게 느껴진 것 같다.
이 순간만큼은 관객이 아닌 츠구미의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문은 열어둔 채로」이다.
이 에피소드는 한 대학교에서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졸업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사키(카이 쇼마)'로 시작한다.
이때 교수실의 문을 닫으려는 사람에게 세가와 교수는 괜한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문을 열어두라고 한다.
이후 시간이 흘러, 결국 졸업요건을 못 채워 제때 졸업하지 못한 사사키는 최근에 세가와 교수가 책을 내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불만이 많은 상태이다.
사사키는 친구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미인계를 써서 그를 망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오는 결국 사사키의 부탁대로 세가와 교수를 찾아가 그의 소설 속 다소 민망한 구절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오직 책의 한 구절을 읽는 나오의 목소리만 들리는 이 장면은 꽤 길게 이어진다.
세가와 교수는 가만히 이 이야기를 듣는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절부절한 사람은 관객이다.
실제로 나는 교수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 혹시 지나가다가 이 소리를 유심히 듣는 사람은 없는지에 대해 계속 불안해했다.
그리고 이때 나오는 교수실의 문을 닫았지만, 세가와 교수가 바로 문을 열어둔다. 혹시나 오해를 살 만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매우 조심스럽고 철저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오의 낭독을 모두 듣고 둘은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세가와 교수는 나오의 의도와는 달리, 그녀의 낭독을 들으며 전혀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초반에는 그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나오는 세가와에게 사실 추문을 일으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사실 이 상황에서 나는 세가와 교수가 크게 화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가와 교수는 그러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상황들을 모두 이해한 뒤 오히려 그 녹음본을 보내줄 수 있냐고 말한다.
세가와 교수는 자신의 글을 좋은 목소리로 소리내어 읽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가와 교수는 나오의 고민상담을 해 준다.
결혼하고 애를 낳은 뒤 뒤늦게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른 여학생들과 친하지 않고,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자신이 미움받는다고 생각하던 나오는 세가와 교수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미움받을 수 있다' 등의 담백하지만 진심 어린 말을 통해 큰 위로를 받는다.
세가와 교수에게 뜻밖의 위로와 위안을 받은 나오는 그에게 감사해하며 그의 녹음본을 퍼뜨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세가와 교수와 나오의 긴 대화를 통해 나오는 위로를 받았고, 교수는 잘못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다.
이 사실에 나도 매우 안도하던 순간, 나오가 책 낭독 파일을 이메일로 전송할 때 '세'가와를 '사'가와로 잘못 입력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잘못 전송된 이메일로 녹음본이 퍼진 세가와 교수는 자취를 감추고, 나오는 이혼을 하게 된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오는 버스에서 우연히 사사키를 만난다.
사사키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며,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우연히 이메일을 잘못 보낸 상황으로 인해 나오와 사사키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연히 만났던 둘은 나오가 버스를 내리면서 그렇게 헤어진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우연하지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일들이 일어나서 제3자인 관객의 입장인 내 입에선 저절로 탄식이 나오곤 했다.
나오는 교수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교수는 자신의 소설을 처음으로 소리내어 읽어준 사람을 만나는 다행스러운 일들이 일어났지만, 뜻하지 않은 오타로 인해 부정적인 상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계속 상상하게끔 만든다'였다.
다른 에피소드들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더 자주 상상하곤 했다. 사사키가 나오에게 제안을 할 때는 세가와 교수가 사사키의 의도대로 오해를 받는 상상, 나오가 낭독을 할 때는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상상, 나오가 자신의 녹음 사실과 의도를 밝힐 때는 세가와 교수가 노발대발 화내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리고 나오가 이메일을 잘못 보냈을 때는 이후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상상.
또한, 이 에피소드는 '모든 우연이 상상한 것처럼 그리 영화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다시 한 번」이다.
이 에피소드는 '제론'이라는 소프트웨어 바이러스로 인해 인터넷 속 모든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상황을 알리며 시작한다.
결국 다시 '아날로그 시절'로 돌아간 세상 속에서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우연히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동창 친구를 만난다.
나츠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반가워하며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아야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사실 둘은 서로가 생각하는 친구가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사실 나츠코는 아야를 자신의 첫사랑인, 많이 사랑하는 여자친구(지금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인줄 알았고, 아야는 나츠코를 예전에 함께 학교에서 피아노를 쳤던, 자신이 동경하는 친구인줄 알았던 것이다.
서로가 기억하는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둘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 연기를 시작한다.
나츠코와 아야는 서로를 자신이 착각했던 친구로 생각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한다.
나츠코는 아야에게 자신에게는 아직 마음 속에 큰 구멍이 남아 있으며, 예전에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진심을 전한다.
아야는 나츠코에게 사실 너를 동경했었다는 말을 전한다.
둘의 이런 상상을 바탕으로 한 진심 어린 대화는 길게 이어졌고, 헤어지기 직전 서로를 꼭 안아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이 세 번째 에피소드였다.
온라인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우연히 매우 소중했던(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친구를 발견하고,
사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친구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그 친구인 척 기분 좋은 연극, 즐거운 연기를 하고,
이렇게 우연히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이런 시간들은 아마도 나츠코와 아야 둘에게 오래도록 남을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이 둘이 계속 만남을 이어갈지는 모른다.
따로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더욱 만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찰나의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우리네 인생을 보다 따뜻하게 살아가곤 한다.
나츠코와 아야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로에게 건넨 진심 어린 말들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로, 이 온기를 간직한 채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긴 대화로 전개된다.
장소나 사건이 휙휙 바뀌고, 극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 보다는 '인물들의 대화'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이 점이 이 영화의 매력을 배로 만들어준다.
인물들의 대사를 듣다보면 관객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내가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대화를 직접 듣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대화라는 파도를 통해 관객을 영화라는 바다 속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이 크다.
<우연과 상상>은 이렇게 소소하지만 꽤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기억들을 담아낸 영화이다.
그리고 '우연'과 '상상'이라는 것은 기분 좋은 일,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일 등 어떤 결과든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우연과 상상이 지닌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꼭 영화관에서 직접 마주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꼭! 세 번째 에피소드 속 상황을 다시금 떠올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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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램> 종교, 인간, 자연 사이를 경계 없이 넘나들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 폭풍이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날 밤 이후 '마리아(누미 라파스)'와 '잉그바르(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 부부는 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 '아다'를 선물 받는다. 새끼 양과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을 한 아다이지만, 이미 한 차례 아이를 잃은 바 있는 부부는 아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우연히 주어진 선물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리아는 점차 아다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착은 잉그바르의 형 '피에튀르(비욘 흘리뉘르 하랄드손)'의 등장과 함께 절정에 도달하면서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의 공포 영화 <램>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밤을 배경으로 하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목장을 찾아온 뒤 한 마리의 양이 임신을 하고, 반은 양이고 반은 인간인 아기 아다를 낳는다. 기독교 교리상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상이한 특성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다의 존재는 예수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예수가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인간의 죄를 씻어낸다는 점에서 예수가 흔히 어린양에 비유된다는 점, 아다를 입양한 여성 주인공의 이름이 다름 아닌 마리아인 점도 영화에 기독교적 색채를 더한다.
하지만 영화가 성경의 상징을 빌려왔을 뿐 내용까지 반복하지는 않기에 <램>은 종교적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우선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램>은 신의 섭리에 도전한 인간을 향한 징벌을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우연히 입양하게 된 아다가 본인들이 잃은 아이 대신 찾아온 축복이라고 생각해 극진한 사랑을 베푼다. 그런 그들에게, 특히 마리아에게 아이를 그리워하는 울음소리를 내는 어미 양의 존재는 자신의 모성애를 위협하는 존재라서 거슬릴 따름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미 양을 죽인다. 앞서 보았듯이 아다가 예수의 알레고리라면 어미 양은 마리아에게 예수를 보내준 신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런 마리아의 행동은 신이 정한 소명을 거부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마리아와 잉그바르가 잠시 아다를 잃어버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잠시 각자의 생업을 하느라 아다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아다는 사라지고, 아다를 찾아 헤매던 부부는 초원에서 어미 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다를 발견한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12살이 된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예수를 발견한 사건과 동일해 보인다. 특히 엄마 양과 함께 있는 아다의 모습은 신이 아버지(하느님)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느냐고 되묻는 어린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런데 그 직후 두 마리아의 행동은 정반대다. 성경 속 마리아가 이 모든 사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신에게 순응하는 반면, 영화 속 마리아는 어미 양이 아다를 뺏으려 했다고 여기며 화를 내고 내쫓으려고 한다. 그 외에도 간음과 같은 마리아의 다른 죄가 묘사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영화의 결말은 자신이 거부한 신에 의해 징벌 혹은 응징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램>은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성경의 이야기 구조를 뒤튼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에 오히려 자유의지와 욕구라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는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화면과 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춘 효과이기도 하다. 영화 내에서는 특정 상황 또는 장면의 의미가 무엇이다라고 명확히 대사로 정의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관객의 생각과 상황, 선입견과 편견에 따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마리아의 모성애다. 이미 한 차례 상실을 겪은 바 있는 그녀는 뜻밖에 주어진 아다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여 그 상실감을 채우려고 한다. 이때 아다가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마리아에게는 그를 양으로 키울지 아니면 인간으로 키울지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모성애라는 감정과 욕구에 충실한 선택을 한다. 즉, 갓 태어난 아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고 깊이 슬퍼하는 것이 운명이었다면, 그녀가 아다를 입양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두드러진다.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저 신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닥친 비극 같던 영화의 결말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영화는 모든 사건이 끝나고 다소 허망해 보이는 표정을 짓던 마리아가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뱉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상실과 슬픔으로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 더 큰 상실이라는 비극으로 되돌아오더라도, 마냥 운명에 순응할 수는 없다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갑갑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아이슬란드의 자연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 방식은 마리와 아다의 이야기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보다 넓은 시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마리아와 잉그바르 부부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지닌 초자연성이 드러난다. 죽은 것이 부활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생명을 선사하며, 한 대상이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광활한 초원, 높은 산맥과 그 산마저 가려버리는 짙은 안갯속에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결과 자연이 지닌 초자연적 힘은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처럼 보인다. 제도 종교에서 정의하는 신의 모습이나 규율, 교리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광활하고 광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저항할 수 없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 수 있지만, 자신들의 선택이 낳은 자연의 결과와 반응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기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의 힘 앞에 압도되는 분위기는 <램>이 통상적인 호러 영화는 결이 다르더라도 결국 '호러' 영화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영화의 내용이나 구조, 주제와는 별개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램>은 실망스러운 작품일 수 있다. 좋게 말하면 관객들의 니즈를 잘 캐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낚시를 잘했기 때문이다. <램>의 포스터를 보면 미국의 독립영화제작사인 A24의 로고가 강조되어 있다. A24가 <유전>, <미드 소마>처럼 예술성과 독창성을 모두 인정받은 공포영화를 제작해 관객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실을 셀링포인트로 삼은 것이다. 문제는 A24가 <램>의 배급사이기는 하나 제작사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 결과 <램>은 여러모로 기대와는 다른 영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영화를 그 자체로 온전히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종교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관계를 넘나드는 영화이고, 영화의 형식도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보니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신중하게 끈기를 가진 채 이 기묘한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고, 한 번의 관람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해함과 고민 끝에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 <램>만의 매력임을 인정하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제74회 칸영화제서 독창성상을 수상하고 제54회 시체스영화제에서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신인감독상 3관왕을 차지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다.
A(Acceptable 무난함)
수없이 곱씹어야 느껴지는 결이 다른 공포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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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한 타임 쉬어가야 할 때
한국 영화에서 시리즈로 4편까지 나온다는 건 매우 드문데, 극장을 통해 개봉된 4편 모두 흥행률 100%를 달성한다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범죄도시4'의 훙행력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전 시리즈에 비해 '범죄도시4'의 새로운 점을 묻는다면,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괴물형사 마석도(마동석)는 '범죄도시4'에서 대규모 온라인 불법도박을 움직이는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고, 조직을 움직이는 백창기(김무열)와 그 뒤에 서 있는 CEO 장동철(이동휘) 두 명의 빌런을 상대해야 했다.
영화 주연이자 제작을 맡은 마동석은 '범죄도시'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진화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딱히 업그레이드됐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2편부터 4편까지 1년 간격으로 제작하고 개봉해서인지 새로운 스토리나 캐릭터, 액션, 유머도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범죄도시' 시리즈를 두어 편만 봤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그림으로 전개된다.
식상함을 주지 않기 위해 영화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다. 장첸(윤계상)에서 강해상(손석구), 잔혹한 빌런을 1명으로 모자랐는지 주성철(이준혁)과 리키(아오키 무네타카) 2명으로 늘리기까지 했다. 범죄 내용도 바꿔왔다. 해외 납치·협박·살인, 마약 유통 및 살인, 온라인 도박 조직 운영 및 살인까지 다양하다. 다만 극악무도함을 표현하는 건 똑같다는 점.
사실 '범죄도시4'에서 작품성을 운운하는 건 쓸데없는 논쟁일 것이다. 이 영화의 강점은 극악무도한 빌런을 강력한 원펀치로 때려눕히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래서 알고도 보게 만드는 '김치찌개맛', '된장찌개맛' 영화라는 평이 많은 것도 관객들의 입맛에 잘 맞아서다. 그러면서 마석도와 장이수(박지환) 등 일부 캐릭터의 말맛이 만들어내는 웃음펀치가 사이드킥처럼 작용한다.
라면, 제육볶음, 돈가스, 떡볶이 등이 대중의 소울푸드라고 해도 1년 365일 내내 먹다 보면 질리는 시점이 오듯, 영화 또한 마찬가지. 어차피 마석도가 범인들을 시원하게 때려잡을 것을 뻔히 알기에 긴장감은 자연스레 떨어지게 된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점인 액션이 4편에선 딱히 특별하거나 '오!'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신선하지 않다. 1편부터 줄곧 권투를 기반으로 한 타격감 최대치를 선사하는 핵펀치가 똑같이 나오고, 용병 출신 백창기가 빠르게 휘두르는 단검 액션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 영화만의 시그니처 액션도 아니다. 관객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마동석의 결과물이 실망스러울 뿐이다.
마동석이 기획한 '범죄도시'는 총 8편이며 이제 절반이 지났다. 4편까지 연달아 찍었던 것에 반해, 5편부터는 제작 및 개봉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예정이다. 이 점이 '범죄도시' 팀에게는 한 템포 쉬어가는 좋은 시점일 것이다. 매우 잘됐다. 다만 현재 틀에서 개선하지 않고 끝까지 고수한다면 관객들은 점점 멀리할 것이다. 의미 없이 시리즈를 늘려가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나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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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어야 산다!
반가웠다. 바디 호러와 로맨스의 만남, 그리고 결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 벌이는 현실적 공포가. 개봉 전부터 몸이 서로 붙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이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설정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현실적인 이야기에 녹여내 끝을 내는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호불호가 갈릴지라도 연인이라면 그것도 결혼을 앞둔 이들이라면 이 바디 호러 로맨스를 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팀(데이브 프랭코)과 밀리(앨리슨 브리)는 아주 오래된 연인이다. '척'하면 '탁'하는 사이를 넘어 권태기의 깊은 늪에 빠져 버린 10년 차 연인. 어느덧 30대 중반인 팀은 록스타를 꿈을 버리지 못하고, 교사인 밀리는 그런 그를 사랑하기는 한다. 하지만 연애 초때와는 온도차에 외롭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남친과 함께 교외 한적한 마을로 이사를 간다. 이들은 마을에 적응하기 위해 집 근처 숲을 산책하던 중 갑작스럽게 내린 비에 과거 예배당이었던 곳으로 추락하고, 그 안에 있는 우물을 마시며 하룻밤을 지샌다. 그게 문제였을까? 그 이후 두 사람은 접착제를 발라놓은것처럼 서로의 몸이 붙는 현상을 마주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자” 요즘 결혼식에도 쓰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영원을 약속하는 행사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나 공포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 되어 한뜻으로 살아가자는 그 말. 그 안에는 우리를 위해 각 개인의 욕망과 정체성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극 중 팀과 밀리는 오래된 연인에서 부부로 가는 여정의 딱 중간에 서 있다. 열정이 다소 식었지만 사랑하는 사이기는 한 이들은 선택에 갈림길에 서 있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밀리는 부부가 될 준비가 되어 있고, 아직도 록스타의 꿈을 버리지 못한 팀은 준비 전이다. 밀리와 팀이 생각하는 결혼은 온도차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서로 몸이 붙어버리는 콘셉트는 결혼은 운명이고, 결혼을 권장하는 사회의 압박처럼 보인다. 정체불명의 물을 마신 이후, 붙어버리는 건 기본이고, 언제나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고, 의존하고 의지해야 하는 이들의 운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감독은 밀리의 교사 동료인 제이미(데이먼 헤리먼)가 플라톤의 <향연> 속에 나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은 원래 머리가 둘, 팔이 넷, 다리가 넷이었는데, 제우스가 벼락을 쳐 인간이 둘로 나뉘어졌고, 지금의 형태가 됐다는 것. 말 그대로 부부로 연을 맺는 상대방은 제우스가 앗아간 운명의 반쪽이며, 결혼은 그 반쪽을 되찾는 공식적인 행사인 셈이다.
몸이 서로 붙는다는 설정 자체의 기괴함, 특히 과한 애정 표현으로 찰싹 붙어 버린 몸과 이를 떼어낼 때(때로는 전기톱을 사용함)의 저릿한 공포는 상상 초월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깨닫는 서로의 사랑은 눈물겹다. 마치 부부 예능 <이혼 숙려 캠프> <오은영 리포트 – 결혼 지옥>에 나오는 위기의 부부들이 뒤늦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독특한 설정을 배가시키는 건 팀과 밀리를 통해 보이는 척력과 인력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 붙는 인력과 어떻게든 떨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들의 척력이 대비가 시각적 재미를 전한다. 특히 2층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든 붙지 않기 위해 아크로바틱한 액션까지 구사하며 노력하는 팀과 밀리의 사투는 보는 재미를 더한다.
영화가 바디 호러로서 단순히 도파민 분출에 그치지 않는 건 실제 연인, 부부라면 충분히 공감하는 상황 설정에 있다. 인간에게 결혼이라는 공포감, 즉 그동안 고수했던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지고, 누군가와 자신의 삶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의 두려움을 장르적으로 잘 풀어냈다. 연출을 맡은 마이클 생크스가 각본도 담당했는데, 과거 오랜 연인과의 동거생활을 기반으로 글을 썼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 이 영화가 가진 현실적인 부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기에 실제 부부인 데이브 프랭코와 엘리슨 브리의 연기는 감독의 글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참고로 이 부부는 제작에도 참여했다.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한 관객들이라면,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극 중 팀과 밀리의 선택으로 인해 빚어진 이 믿기 힘든 광경은 그 자체로 충격이며, <서브스턴스> 등 그동안 우리가 봤던 바디 호러의 결말과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랑의 위기를 겪은 이들은 자신들만의 해결책으로 다시 사랑을 복원한다. 힌트를 달라고? 후반부 이들이 듣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스파이스 걸스의 ‘2 Become 1’이다.
사진출처: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3.5 / 5.0
한줄평: 결혼한다면 이들처럼, 붙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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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지켜온 침묵을 벗어나게 해 준 것
숲 속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분명히 자기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던 코오트. 그냥 무시할까 싶었지만 소녀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점점 더 굽어지는 허리. 집 안에 들어가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침대 밑 공간으로 들어가는 코오트. 유달리 말이 없는 소녀 코오트에게 가족이란 족쇄 같은 존재다. 사실 이 집에 엄청난 경사가 있다. 바로 코오트의 동생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래도 코오트는 영 기쁘지 않다. 어두운 낯빛. 가족 안에서 유달리 겉돌던 코오트.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코오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에게 뭔가를 빌려 뭔가를 마시고 싶었던 코오트. 음료수 마시려고 책상에 놨다. 남자 애들이 그 찰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책상을 퍽 치고 지나간 아이들. 잔에 동동 띄어놓은 음료수가 모두 옷으로 튀었다. 화가 난 코오트.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코오트에게 침묵은 익숙했으니까.
아버지에게로 향한 코오트. 차에 탔다. 누군가를 태우는 코오트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니다. 젊은 여자였다. 이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더라도 아버지의 내연녀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건 ‘경마 책 좀 읽으면 안 돼?’라는 말이다. 여전히 어두운 조명이 드는 집 안.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던 도중 부모님의 대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다. 바로 코오트의 동생이 나오기 전까지 주인공이 친척 집에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집 하나. 중년의 여자가 환한 표정으로 코오트를 반긴다. 그 순간, 메말랐던 코오트의 삶에 화사한 빛이 내려온다.
밝거나 어두운 집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부분은 조명이었다. 글쓴이는 집의 대비를 어떻게 줬는가? 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도입부. 코오트가 처해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두운 집. 가난한 집안이라는 경제적인 세팅이 있지만 한낮에 어두울리는 없다. 이야기에서 코오트의 원래 집이 언제 들어가는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 연출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두운데 사람에 물건에 화면에 온갖 것이 다 들어가니 안 그래도 갑갑한 기분이 더 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집에서 빛이 향하는 방향에 대해서 써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사촌 에블린에 집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다. 주인공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층계를 올라간다. 빛이 들어가는 방향은 환하지만 그 아랫부분은 어둡다. 이 색채 대비는 사실상 코오트의 내면세계와 대비된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공간에 왔기 때문에 빛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둡다. 또 다른 연출요소로는 ‘속박’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라는 점이다. 이는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왠지 모르게 자유로워지는 느낌에 임팩트를 준 연출 역량이 돋보인다. 이렇게 영화는 소담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꼼꼼하고 섬세하게 미장센에 힘을 줬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영화에서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화법이다. 영화는 디테일한 부분을 잘 살려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글쓴이는 이 근거로 코오트의 캐릭터 세팅을 꼽고 싶다. 말이 없다는 것. 그동안 코오트 가족이 주인공을 기죽게 키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이 유효하다. 이 속성은 주인공의 어떤 특징과 이어질까? 사회성과도 이어진다. 이 인물은 이야기를 전개하며 부족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영화 내내 노출한다. 이 부족한 사회성에 관한 인물들의 리액션이 아주 흥미롭다. 또 부족한 소통방식으로 인해 에블린 가족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어떻게 대비되는지를 봐도 역시 흥미롭다.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딱 갔다 붙여 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가족 설정 역시 이에 대한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 왜 말이 없을까? ‘어떤 것’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반대로 주인공을 향한 어떤 종류의 말은 많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것은 주인공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말과 ‘어떤 것’이 동격에 놓이는 연출에 유심히 집중하신다면 감상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또 소소하게 살리는 요소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바로 말과 소의 대비다. 당연히 코오트가 시골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농장 묘사가 들어가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것은 도박을 묘사하는 방식이 되고 다른 것은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기능하게 한다는 점이 대비된다. 이는 후반부에서 비슷하게 대비된다. 두 가족의 입장? 후반부에 드러난다. 이 가족이 처해있는 상황이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극 중에서 물을 활용한 방식도 마찬가지다. 가장 결정적인 대비는 엔딩에서 드러나는데 이 부분까지 집중한 채로 보신다면 영화의 연출이 얼마나 꼼꼼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영관 좀 늘려줘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다. 이 부분은 역시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 장면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짜여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확히 의/식/주의 요소를 영화에서 다 품고 있다. 우선 옷의 관점. 이 옷에 관한 연출은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하고 강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식과 주에 관한 부분이다. 먹는 것. 초반부 카이트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에서 가족들이 뭔가 먹고 있다. 여기서 어두운 조명 탓에 뭐 먹는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초중반부를 넘어서 보면 숀이 카이트에게 주는 것들이 화면비에 비해 두드러지게 촬영한 부분이 이에 대한 예시다. 촬영으로 카이트의 내면 묘사를 구성한 것이다. 다음은 집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에서 카이트는 어떤 일을 벌인다. 당황하는 에블린. 이 사건에 대해 잘 생각해 본다면 역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어떤 집에서는 이런 행동을 벌이지만 자기 집에서는 침대 밑에 숨는다. 심지어 자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대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의식주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펼쳤는가? 주인공의 위치로 인한 대비(집)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전적으로 카메라의 방향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은 말이 없다. 왜 말이 없을까? 자기를 둘러싼 폭력은 잦지만 반대측면에서 부족했던 뭔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이 없으면 어떻게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지? 주인공의 시점 쇼트다. 주인공이 어느 것을 바라보는가. 주인공의 표정은 어떤 형태인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주인공은 어떤 모습인가. 친절하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코오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 것이다. 이는 각자가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와도 관련이 있다. 왜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전달이 이뤄지는가?를 보여준 이 영화가 수작으로 뽑힐 만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이렇게 우리가 그 감정에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영관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작품이지만 마석도의 주먹 한 방에 묻히기엔 아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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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가 애니를 잘 못만든다고?
#애니메이션 #한국 #리뷰
#떠돌이 까치
1987/KBS1#아기공룡 둘리
1987/KBS1#달려라 하니
1988/KBS2#2020 우주의 원더키디
1989/KBS2#옛날 옛적에1
1990/KBS2#영심이
1991/KBS2#옛날 옛적에2
1991/KBS2#날아라 슈퍼보드
1991/KBS2#마법사의 아들 코리
1993/KBS2#초롱이의 옛날 여행
1993/KBS2#리뷰문의
adonai0919@gmail.com#트위치
https://www.twitch.tv/sura_chtr#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writerTrack: Syn Cole - Gizmo [NCS Release]
Music provided by NoCopyrightSounds.
Watch: https://youtu.be/pZzSq8WfsKo
Free Download / Stream: http://ncs.io/Gizmo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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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리뷰ㅣ정말로 찢을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ㅣ자살닦이랑 다른 4가지 이유 (*더 수스쿼 리뷰 스포약간)
?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영화리뷰(*스포약간)
더수스쿼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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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2차 예고편
"삶은 모든 선택의 결과야" 한계를 뛰어넘는 액션과 단 하나의 미션!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5월 극장 대개봉 💥 #미션임파서블_파이널레코닝 #미션임파서블8 #톰크루즈 #5월극장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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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표류단지> 공식 예고편
《펭귄 하이웨이》로 제42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를 연이어 제작했던 스튜디오 콜로리도. 이들의 세 번째 장편 영화가 찾아온다. 초등학교 6학년인 코스케와 나츠메는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소꿉친구. 여름방학 중이던 어느 날, 철거를 앞둔 아파트 단지에서 놀던 두 아이는 어떤 신비한 현상에 휘말리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둘은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과연 코스케와 나츠메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 한여름의 이별 여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