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1-29 22:23:14
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만든 구원의 길
-<검은 수녀들>(2025)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처음엔 단순히 ‘불리기 위한 호칭’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름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될 모든 이야기와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렇기에 이름을 부르고, 또 불린다는 행위는 꽤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서로 다른 이름들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넌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관계를 맺는다. 이름이 없다면 나 자신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키기도 힘들다. 결국 이름이란, 우리 내면을 드러내고 서로를 구분 짓는 뿌리이자, 한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시가 된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우리는 유니아, 미카엘라, 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닌 세 인물을 만난다. 수녀이자 신부인 이들이 각각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후회는 그들의 이름 속 정체성을 흔들고 시험한다. 어둠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구마 의식을 둘러싼 제한과 의심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 걸린 책임과 소명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절망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을까, 죄책감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을까, 후회가 도움의 손길로 바뀔 수도 있을까? 다음부터 살펴볼 세 가지 감정은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는 출발점이다.
[첫 번째 감정]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유니아 수녀의 과거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깊은 절망감 속에 머물러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조금은 외로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니아 수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돕고 구하려고 애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절망감이 오히려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마주할 때조차, 그녀는 흥분하거나 극단으로 치닫기보다 담담하게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태도가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이유는, 유니아 수녀가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띠면서도, 막바지까지 타인을 위해 구마 의식에 나서는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상징한다. 절망감은 흔히 사람을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유니아 수녀는 그 절망 위에 일종의 ‘책임감’을 덧씌워,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된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이 ‘절망감’이 유니아 수녀에게서 연민이나 연약함이 아닌, 더욱 단단한 ‘투쟁심’을 끌어낸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그녀가 처한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구마 의식은 허가받은 신부만이 거행할 수 있는데, 유니아 수녀는 이 제약을 뛰어넘을만한 권한도, 신분도 갖고 있지 않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사람을 구하고, 악령을 막아내려 애쓰는 모습은, 절망을 극복하는 데 있어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감정]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영화 곳곳을 살펴보면, 미카엘라 수녀가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을 보아왔다는 암시가 있다. 친구가 자살한 듯한 과거가 엿보이는데, 그녀는 그 환영을 지금도 계속 목격한다. 이상한 기운이나 귀신 같은 존재가 주변을 맴돌면, 미카엘라 수녀도 금방 눈치채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질병’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려 든다.
아마도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현재 그녀를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묘한 부채감, 무엇인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바꾸지 못했다는 자책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다. 미카엘라 수녀는 그러한 마음의 짐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 하고, 수동적인 태도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유니아 수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죄책감은 사람의 행동을 옭아매는 강력한 감정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처벌하려는 듯한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이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만, 유니아 수녀를 통해 ‘죄책감이 나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면,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자각을 얻는다. 그제야 그녀는 더 이상 뒤로 숨지 않고, 마주보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미카엘라 수녀는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사실은 새로운 결심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 번째 감정] 바오로 신부의 후회

바오로 신부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인물임에도, 의외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정신병 같은 건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마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그는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존재가 바오로 신부다.
다만 흥미로운 건, 바오로 신부가 어느 순간 결단을 내린 뒤의 모습이다. 영화는 그 과정 자체를 상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구마를 돕는 인물로 바뀐다. 바오로 신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마 의식을 직접 행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위한 물품과 장소, 그리고 현실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후회’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진작 믿었다면, 아니, 적어도 무관심하지 않았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의 감정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후회라는 감정은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을 무력감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그 무력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게도 만든다. 바오로 신부가 보여주는 반전과 지원은, 여전히 죄의식과 후회를 품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유니아 수녀가 고립되지 않고 끝까지 악령에 맞설 수 있게 된다는 점은, 후회가 뒤늦은 도움일지언정 완전히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 속 논쟁거리
정신병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란거리다. 누군가는 의학적·과학적 치료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영적인 문제나 전통적 주술적 방식(무당, 굿 등)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은 구마 의식이라는 종교적 접근, 그리고 무당을 통한 민속적 접근, 의학적인 치료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각에 따라 대처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 문제나 질병을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런 복합적인 관점들을 끌어모았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 완벽하지 않은 구멍들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방식만이 옳다고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나 초자연적 현상에 접근하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질병’ 혹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다원성을 반영하는 사례일 것이다. 사람마다, 혹은 문화권마다 시각이 다르고, 그 다름이 때로는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게도 만든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
영화 <검은 수녀들>은 제목만 보면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오컬트 장르로 느껴지지만, 정작 핵심은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한다. 유니아 수녀의 절망감, 미카엘라 수녀의 죄책감, 그리고 바오로 신부의 후회를 통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상처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종종 절망, 죄책감, 후회 같은 감정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 감정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래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분명 영화상에서 아쉬운 구석이 없진 않다. 마치 급작스럽게 변하는 바오로 신부의 태도나, 미카엘라 수녀가 어떤 식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지 좀 더 구체적인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뚜렷하다. ‘결국 인간을 흔드는 건 외부의 악령이 아니라, 우리가 내부에서 품고 있는 절망,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아닐까?’라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진득하게 남는 여운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감독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큰 사건과 스펙터클에 집중하기보다는, 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다루는 데 공을 들인 영화라서, 한 편의 심리 드라마를 본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컬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절망감을 이겨내고, 과거의 죄책감을 짊어진 채라도 한 발씩 나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이 영화 <검은 수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일상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자, 내가 지닌 모든 감정의 집합체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자기만의 구원과 용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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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삶을 살 거야. 영화 <레이디 맥베스>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제작 : 영국, 드라마 │ 감독 : 윌리엄 올드로이드
출연 : 플로렌스 퓨(캐서린), 코스모 자비스(세바스찬), 나오미 아키에(안나)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러닝타임 89분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배경은 19세기 영국이다. 원작은 러시아의 소설 <므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이며, 젊고 예쁜 여성이 시아버지를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형사재판소의 실화 기록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 시절 치고는 특이한 살인사건이라 그럴까. 이 영화는, 젊고 예쁜 지주의 부인이, 대체 무슨 연유에서 시아버지를 그토록 처참히 살해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에 포커싱 된 듯하다.
신분사회의 최종 보스이던 영국의 19세기.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은 열일곱의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늙은 지주에게 팔리듯이 시집을 가게 된다. 괴팍하기 그지없는 시아버지, 어린 신부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나이 든 신랑. 캐서린의 결혼은, 그저 관습에 따라 맺어진 온기라곤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배곯을 일은 없는 집안이었지만, 쌀쌀맞은 시댁은 그녀에게 간단한 외출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그녀를 감옥 같은 저택에 가두어둔다. 그럼에도 캐서린은 매우 순종적으로 시댁 식구의 뜻에 따라, 집안에서 그저 창밖만 보며 무료한 나날을 지내는데.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도 남편과 시아버지가 동시에 멀리 출장을 떠나게 된다. 결혼 후 처음으로 캐서린에게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 봐야 그녀가 만끽한 자유라곤 그저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것, 소파에 맨발로 누워 낮잠을 자는 것 등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소소한 자유라도 즐기고 있던 캐서린. 하루는 우연히, 역시나 지금까지는 본 적도 없던 하인들의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다가 마님의 방문에 깜짝 놀란 하인들. 그런데 그중 한 하인이 유독 캐서린에게 대든다. 그는 이 저택에 얼마 전 새로 온 흑인 하인 '세바스찬'이다. 하인인 데다 흑인이라. 당시 영국의 신분제에 따르자면 세바스찬은 분명 마님의 눈도 못 마주쳐야 마땅한 최하위 계층이었다. 그런데 캐서린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건지 겁도 없이 마님에게 들이대는 세바스찬. 그를 계속 눈여겨보고 있던 캐서린은 세바스찬의 박력에 넘어가고, 결국 출타 중인 시댁 식구의 눈을 피해 하인과 정통으로 바람이 난다.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 알기에, 둘이 마음이 통했다는 걸 알면서도 흑인 하인이 안주인의 뽀얀 침대 시트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장면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회통념은 누구로부터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그 둘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된 흑인 하녀 '안나' 역시 몹시나 그 사실을 불편해한다. 어디 하인 주제에 안주인 마님과! 자신도 백인에게 종속된 몸이며, 괴팍한 주인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며 살았으면서도, 그나마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캐서린의 일탈을 이르고 싶어 안나는 똥줄이 탄다.
캐서린의 총애에 힘입어, 하인 세바스찬의 침상이 마구간에서 안주인 침대로 격상된 지 꽤 지났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 시아버지는, 하녀 안나의 밀고로 캐서린과 하인의 관계를 알게 된다. 시아버지는 정작 제 아들놈이 캐서린을 여자 취급하지 않는 데에는 무책임하면서, 집안 망신이라며 캐서린을 들들 볶는다. 온기도 낙도 없는 감옥 같은 저택에 자신을 가두는 결혼생활에 질려버린 캐서린은, 시아버지에게 독버섯을 먹이게 되는데.
부유하고 어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죽였다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않은 채 시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온다. 그러자 이번엔 남편이 "나 너희 관계 다 알고 있어. 너 이제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성경이나 읽어"라고 일갈한다. 자신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억압하려고만 드는 남편에게 단단히 화가 난 캐서린. 남편 앞에 세바스찬을 끌고 와 당당히 몸짓으로 선포한다. 아니, 나 그렇게 살기 싫다고.
예상된 수순이었지만 남편과 세바스찬 간에 격한 몸싸움이 일어나고, 캐서린은 제 남친이 다칠까 둔기로 남편을 내리찍는다. 하인과는 겸상도 못하던 시절이었건만. 마님 캐서린의 선택은 이름 좋고 돈 있는 남편이 아닌, 쥐뿔도 없지만 사랑하는 세바스찬이었다. 지독한 관습의 사회에서 보자면 파격적인 동시에 참으로 순수한 선택이 아닐 수가 없다.
그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나니 남겨진 재산은 모두 캐서린의 몫이 되었다. 캐서린은 이제 자신의 저택이 된 그곳에서 세바스찬을 남편처럼 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 행복이 드리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이 밖에서 싸지른 어린 혼외자식과 그의 할머니가 찾아온다. 영문도 모르는 작은 꼬마 아이가 이 재산에 지분이 있다고 서류를 내미니, 캐서린은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을 거두는 수밖에는 없었고, 이로 인해 세바스찬은 그들의 눈을 피해 다시 마구간 신세로 돌아간다.
도대체 이 막장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려는 걸까 종잡을 수 없어지던 찰나. 설상가상으로 캐서린은 세바스찬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남편의 혼외자식에게도 캐서린이 모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이 모습에 세바스찬은 질투심에 휩싸인다. 그녀의 애정이 그리웠을지 아니면 자신의 지분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재산이 그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세바스찬은 어긋난 질투심으로 캐서린에게 매정하게 굴고, 세바스찬의 냉대에 불안해진 캐서린은 오로지 세바스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익숙한 묘안을 떠올리는데. 바로 세바스찬과 공모해 남편의 혼외자식 꼬맹이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
이리하여 이 커플은 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살인에도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으나, 시아버지와 남편을 처단한 것 까지는 보는 이가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작 6살이 됐을까 말까 한 꼬마 아이를 쿠션으로 짓누르는 장면은 왠지 보기가 불편했다. 그 살인에서, 둘의 순수한 사랑을 넘어선 욕망과 배신이 비쳤기 때문일까.
막상 어린아이를 죽이고 나니 세바스찬은 뒤늦게 눈물 콧물 쏟으며 죄책감에 휩싸인다. 뒤이어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세바스찬이, 아이의 죽음을 수사하러 온 경찰에게 '저 여자가 죽였다'고 고백해버리고 만 것이다. 세바스찬의 폭로에 캐서린은 엄청난 배신감에 휩싸인다.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뻣뻣한 표정에 담겨있던 모든 감정들. '네가 어떻게?'라는 소리 없는 물음. 죄 없는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세바스찬이 이해되면서도, 그녀 혼자가 아닌 함께 벌인 일에서 발을 빼려는 세바스찬이 역겹기도 했다.
온갖 악행을 저질러 그와 나의 자유를 꿈꿨는데 배신당한 캐서린은,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려는 사람들 앞에서 결심한다. 자신의 사랑 세바스찬에게 지금껏 한 번도 휘두른 적 없던 권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하기로. "내 하녀와 저 하인 놈이 죽인 거예요. 난 몰라요"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부유한 미망인인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결국 세바스찬 그리고 내내 캐서린의 심기를 거스르던 하녀 안나가 체포되어 끌려간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엔딩신이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저택에 홀로 남은 캐서린이 푸른 드레스를 차려입고 거실로 나와 앉아있는 장면.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이를 죽였다.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얼굴도 사연도 모르는 자식도 이미 처단한 지 오래다. 그녀의 배에는, 그녀가 원해서 그녀의 뜻으로 잉태된 세바스찬의 아이가 있다. 캐서린이 꿈꾸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세 번의 살인과 배신의 얼룩을 지워낸다면,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관습의 사회가 강제로 부여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삶 아니었을까.
거실 소파에 앉아 침묵의 눈을 한 캐서린을 오래도록 비추는 엔딩신은, 소름끼치기 보다는 슬프게 와 닿았다. 그 시절 여자의 삶이 어땠는지, 캐서린처럼 행동할 수 없었을 여인들이 어떤 결의 삶을 감내했을지가 그려져서.
다행이다. 그리고 참 감사하다.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세상, 내 신랑은 내가 고르는 세상, 남편의 혼외자식을 거둘 어떤 명분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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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잡하고 우아한 사랑에 대한 고찰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Les choses qu'on dit, les choses qu'on fait, Love Affair(s))
개봉일 : 2021.11.11. (한국 기준)
감독 : 엠마누엘 무레
출연 : 카멜리아 조다나, 니엘스 슈나이더, 빈센트 맥케인, 에밀리 드켄, 귀욤 고익스
난잡하고 우아한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배려는 곧 사랑일까. 배려보다 앞서는 소유욕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말한다면 어떠한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에 과연 답이 있을까?
사랑이 어그러지는 순간, 사랑에 걸려 무너지는 순간.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들을 겹겹이 쌓아올리며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프랑스 영화 특유의 감성과 색감, 그를 더욱 빛내주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 그리고 모든 것을 고고하게 감싸주는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퍽 매력적이다. 잔잔하고 조용한 시간 안에 맺혀버린 여러 인물들은 각자가 가진 감정의 파고에 부딪히며 고뇌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했던 이의 마음과 자신의 진짜 마음을 깨닫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나를 사랑했던가. 이 심도 있는 질문 아래 답을 내리지 못한 인물들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여러 감정을 담은 미소를 짓는다.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꽤 단순했다. '니엘스 슈나이더'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하트비트>와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통해 내 심장을 두드렸던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니. 나에겐 다소 낯선 이름들로 가득하더라도 그를 보기 위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니엘스 슈나이더뿐만이 아닌 새롭고 아름다운 얼굴들을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 받게 되었다.
특히 에밀리 드켄 배우의 연기가 눈에 들어왔었는데, 알고 보니 <로제타>의 주연을 맡은 배우였다. 내가 여러 번 보지 못해 잘 기억하지 못했을 뿐, 걸출한 연기력을 갖춘 멋진 배우였다. 씁쓸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평소에 믿었던 사랑의 본질을 진하게 느꼈다. 결국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순간도 있다는, 그 쓰디쓴 본질을 말이다.
<러브 어페어>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두가 믿고 싶어 하는 달콤한 사랑의 향을 느끼기엔 어려움이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사랑에 빠져 활활 타오르는 마음과 그 뒤에 널브러진 깨어진 조각들, 사랑에 대해 질문하고 소유를 포기하며 얻게 되는 가벼움, 그리고 100% 이해할 순 없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우습게 말하자면 끝없이 달리는 막장드라마, 진지하게 말하자면 난잡하고도 우아한 사랑의 드라마라고 정의하고 싶다.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시놉시스
네 이야기를 들려줘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소설가를 꿈꾸는 막심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촌 형의 여자친구 다프네에게 자신의 복잡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막심의 이야기를 듣던 다프네 역시 남몰래 간직했던 자신의 연애담을 슬그머니 꺼내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남편 프랑수아가 출장을 가고 다프네 혼자 남은 집에 프랑수아의 사촌 막심이 도착한다. 막연한 꿈과 사랑의 상처를 안고 도착한 막심은 다프네의 부드러운 말씨에 마음을 열고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안될 이유를 충분히 알면서도 이겨낼 수 없는 사랑을 했던 막심과 관심사, 감정으로 사랑을 만들어온 다프네. 새로운 이끌림을 따라 루이즈를 떠난 프랑수아, 사랑을 위해 소유를 포기한 루이즈. 이들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이끌리고, 버림받고 또다시 사랑한다. 지금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지금 느껴지는 사랑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이.
"근데 사랑에 규칙이란 게 있을까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다. 딱 정의할 수 없듯이, 이들이 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륜으로 엮인 사랑, 그것도 막장 불륜인데.. 그를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이게 '남들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역시 이런 사랑 이야기는 멀리서 듣는 게 가장 재밌다.
사실 유교걸의 시선에 이들이 이어가는 사랑은 그다지 아름답진 않다. 그럼에도 불쾌감보다는 옅은 호기심을 느꼈다는 건 그만큼 인물들의 감정을 적절히 담아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규칙은 없지만 사랑이란 감정 하나에 기대 그렇게 2시간이 흘러간다. 누군가는 사랑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즉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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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의 고루한 예술론
5★/10★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이리스의 교수법은 독특하다. 단어장도, 문법책도 없다. 수업은 이런 식이다. 수강생이 피아노를 치고 나면 이리스가 무엇을 느꼈는지 묻는다. 처음에는 행복을 느낀다고 답한 수강생은 이리스가 또 무얼 느꼈느냐고 캐묻자 멜로디를 느꼈다고 말하고, 그다음에는 짜증이 났다고 말한다. 자기 생각만큼 연주가 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짜증 말이다. 산책을 하다가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빌라 근처 석비 앞에서도, 또 다른 수강생이 기타를 연주한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이리스는 계속 수강생에게 진짜로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그러고는 그 내용을 카드에 적고 상대에게 건네주며 지금의 감정을 말하는 법을 연습해오라 한다. 이렇게 해서 언어가 늘겠느냐는, 제대로 된 교수법이 맞느냐는 수강생의 질문에는 외국어로도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근 고안한 방법이라고 답한다. 검증된 적이 없는 교수법이라는 소리다. 자연스레 질문이 생긴다. 도대체 이리스는 누구이고, 무엇을 대변하는가?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가를 이리스 캐릭터에 구현한 듯하다. 이 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다. 중년의 프랑스 여자 이리스는 젊은 남성 시인인 인국의 집에서 살고 있다. 인국은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피리를 부는 이리스의 모습에 이끌려 그녀와 대화했고, 그녀에게 거처를 제공했다. 그러던 중 인국의 어머니가 급작스레 집을 방문하고 아들이 낯선 외국 여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장광설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는 아느냐, 네가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느냐 등등. 어머니의 말은 구구절절 합리적이다. 하지만 시인인 인국의 관점은 어머니와 다르다. 그는 벤치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모습만으로 이리스를 ‘안다’. 인국은 어머니에게 이리스가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 삶은 진지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인국은 곤란해하며 머뭇거리지만 하고 싶은 말을 감추지는 않는다. ‘엄마는 열심히 사는 것이고, 이리스는 진지하게 산다.’ 이것이 인국의 답이다.
이리스와 어머니는 각각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시민을 대변한다. 이리스의 프랑스어 교수법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표층이 아닌 심층의 진실이 궁금하다. 그래서 연주 후 ‘행복’했다는 수강생 마음속에 실은 ‘짜증’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끌어낸다. 즉 이리스는 자신조차 몰랐던 내면의 진실을 발굴하고 일깨워주는 사람,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에 접근하는 사람이다. 이리스의 교수법이 검증된 적 없는, 최근에 직접 고안한 방법이라는 점도 그녀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직감에 따라 행동하는 유형의 사람, 즉 예술가임을 알려준다.
이리스의 진실은 ‘열심히’ 삶을 사는 인국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인국을 거듭 다그치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리스와 인국의 어머니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즉, 예술가와 예술가가 아닌 시민의 거리는 서로 조금도 맞닿지 않을 만큼 멀다. 자기 어머니의 아들임에도 이리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인국이 ‘시인’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진지한 태도로 삶을 사는 예술가의 유대는 핏줄을 넘어선다.
홍상수 감독은 두 세계 사이를 균형 있게 다루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노골적, 편파적으로 예술가와 그의 세계를 옹호한다. 인국의 어머니는 이리스와 살며 ‘빵과 샐러드’를 주로 먹고 그 생활에 만족하는 인국에게 끝내 ‘김치찌개’를 끓여 먹인다. 그러고는 네가 어릴 때 매운 음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상기시키고, ‘빵과 샐러드’만 먹고서는 도저히 살기가 어렵다고 또 한 번 강조한다. 감독은 예술가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위협당하고 회유당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인국은 고뇌에 빠진다. 계속 이리스가 집에 머물도록 할 것인가(즉 예술가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리스의 삶 궤적을 캐묻고 심문할 것인가(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이 그려낸 예술가와 시민의 불화라는 구도가 과연 얼마나 적확한지는 따져볼 일이다. 동시대의 명망 있는 창작자 대부분은 영화가 그려내는 예술가와 같이 창작하지 않는다. 예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산업 기반 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시민의 구도로 단순화할 수 있을 만큼 예술가가 예술을 생산하는 조건이 단조롭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 자신이 집요하게 이리스의 길을 걸어와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예술/가 일반에 적용할 구도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창작하는 특정 예술가 부류만을 옹호하고자 했다고 변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영화가 이리스와 그녀가 놓인 상황을 재현하는 방식이 시종일관 단호하다. 즉, 우리는 이리스를 통해서 다른 예술/가 유형을 상상할 수 없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리스와 인국 어머니가 각각 대변하는 세계의 경계선이 더욱 깊고 짙어질 뿐이다. 이런 양자택일의 세계에서 관객은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이번에도 영화가 제시하는 정답은 정해져 있다).
과연 이런 주제 의식이 거장이 던질 만한 화두일까? 나는 부정적이다. 이 영화에는 동시대 예술 지형에 대한 통찰이나 물음이 담겨 있지 않다. 심지어는 그저 자기변호를 위한 영화라고도 보인다. 어느 모로 봐도 홍상수 감독이 ‘머물 집이 없는 예술가’는 아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이 이와 같은 예술가 자아상을 내비친다니 조금은 당혹스럽다. 준국과 이리스의 나이와 성별이 감독 개인사를 교묘히 뒤집은 듯 보이는 것도 이 영화가 자기변호의 수단이라는 의혹을 증폭시킨다. 어쩌다 보니 홍상수의 영화를 보지 못하다가/않다가 최근에야 〈물안에서〉(2023)를 보고 윤리적‧영화적으로 커다란(그리고 생산적인)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실망감은 더욱 크다.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천착한 주제를 조망하려면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찬찬히 읽어보는 게 훨씬 낫다. 100년도 더 전에 쓰인 이 책이 같은 주제를 훨씬 더 입체적이고 섬세하게 다룬다. 물론,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생존한 이 고전에서도 예술가와 시민의 불화라는 구도가 단조롭다는 느낌은 떨칠 수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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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이야기로 현재의 문제를 살펴보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논문을 쓰던 대학원생 무렵 논문 심사가 끝나고 보상으로 영화관에 가서 본 작품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었다. 여성 캐릭터 3명이 메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끌려서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기대가 조금 컸기에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눈물 흘리며 보고 나온 작품이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시놉시스
“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 1995년, 토익 600점만 넘기면 대리가 될 수 있다! 입사 8년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들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였다. 실무 능력 퍼펙트, 현실은 커피 타기 달인인 생산관리3부 오지랖 ‘이자영’과 추리소설 마니아로 뼈 때리는 멘트의 달인 마케팅부 돌직구 ‘정유나'. 그리고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 실체는 가짜 영수증 메꾸기 달인 회계부 수학왕 ‘심보람’은 대리가 되면 진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내부고발이라도 하게? 나서지 마. 우리만 다쳐. 잔심부름을 하러 간 공장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한 ‘자영’은 ‘유나’, ‘보람’과 함께 회사가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결정적 증거를 찾으려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 세 친구는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회사와 맞짱 뜨는 용감한 세 친구의 이야기다.
성장주의와 그림자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보다 성장했어!' 이다. 마케팅팀 부장이 팀원들을 독려할 때 자주 사용하는 대사였다. 이 대사처럼 영화는 성장과 발전만이 대한민국이 살 길이라는 신념 아래 경제 부흥을 일궜던 1980, 90년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는 칠흙같은 어둠도 같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우연하게, 한 순간의 실수로 페놀이 유출되었고, 이를 알아차렸지만 성장에 방해되는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덮어버리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장에 중동되어 점차 곪아가는 부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그래서 결국 절단을 할 지경이 되어서야 후회를 하고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통해 비뚤어진 성장주의를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연대의 힘을 보여주다1980, 90년대의 비뚤어진 성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이 영화는 현 시점에도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작품이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를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연대의 힘을 굉장히 강조하는 작품이다. 힘이 잆는 말단 직원 한 사람이 회사를 구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여러명 모여서 힘을 합치면 권력과 자본 앞에서도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어쩌면 조금은 판타지적이지만 연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이러한 연대 속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연대의 힘을 활용해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워라벨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대사가 있었다. '내가 일하는 회사가 조금 더 좋은 일을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이자영이 사람들을 규합하는 장면에서 했던 대사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어떤 사람도 나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이자영은 그래서 자신이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회사와 함께 이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이 장면을 통해서 워라벨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조금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직장과 일상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워라벨은 그 이면에 직장은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일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직장에서 번 돈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을 의미한다. 워라벨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으면서 필자 역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이자영의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 최소 8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삶의 풍요를 느낄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라벨이라는 이분법적인 분리 때문에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더욱 조성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내 삶의 풍요를 직장에서도 일상에서도 같이 일궈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학천재 보람에게 부장에 항상 하는 말이었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는 말이 회사 때려치우고 너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회사든 일상이든 내가 위치한 소속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살라는 말로 필자에게는 다가왔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유쾌하게 웃으러 영화관에 갔다가 감동을 받고, 사회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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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선택은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인생을 살며 다양한 선택을 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을 버리거나 두고 온다. 때때로 미련이라는 게 남아 스스로 제쳐놨던 것들을 떠올리고, ‘만약’이라는 마법을 통해 상상으로 그 삶을 소환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소재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인물과 관계를 마주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중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민자들을 마음을 대변한다.
나영이자 노라(그레타 리)는 12살에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한국에서의 삶, 그 안에서 꽃피울 미래, 그리고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 해성(유태오)을 놔두고. 12년 후, 노라는 연극 극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중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화상채팅으로 재회한 이들은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각자 처한 상황과 꿈이 달랐기에 이들은 잠시 연락을 멈춘다. 이후 노라는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남자 아서(존 마가로)와 가까워지고, 해성은 상하이 어학연수 중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서와 결혼을 한 노라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해성을 만난다.| 선택하지 않은 삶을 마주하다!
12살 때 그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지 않았더라면, 꿈을 잠시 멈추고 해성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갔더라면, 해성에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노라가 선택한 삶보다 선택하지 않은 삶에 더 집중한다. 감독은 ‘만약’을 대동한 가능성의 문을 여는데, 이 의도는 첫 장면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어느 바에 앉은 한 커플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라와 해성, 그리고 아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노라와 해성을 남매로 보거나, 이들이 부부고 아서가 현지 가이드라고 말하는 등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마치 노라가 가지 않은 길을 대신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모습은 달라지는데, 영화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동양 사상을 가져와 느슨하지만 운명적인 관계를 만든다. 인연은 꼭 다시 만난다는 말처럼 24년 만에 만난 첫사랑 노라와 해성은 그 자체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미국으로 와 극작가의 꿈을 키우고 결혼을 선택한 노라에게 지금은 잊힌 ‘나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12살 시절의 순수한 감정을 지닌 해성은 그 자체로 순수했던 자신의 감정이자 과거를 향한 향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기에 더 궁금하고 가까이하고 싶을 터. 감독은 자연스럽게 이 감정을 사랑의 동력으로 치환해 둘의 감정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키고, 선택에 따른 관계에 대한 생각을 깊게 가져간다.| 인연이 불러온 이별, 성숙한 성장
통속적인 멜로를 거부하듯 극 중 인연이란 카테고리는 노라와 해성은 물론 아서까지 확장한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그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서는 해성과의 만남 또한 몇백, 몇천 겁(劫,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의 선한 인연이 쌓였기에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고, 노라와 해성의 해후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연’이라는 개념은 기존 멜로 장르와의 차별화 포인트인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관계를 이해시키는 신비로운 힘으로 작용한다.
노라와 해성의 관계는 닿을 듯 말 듯한 이들의 거리만큼이나 절제와 담백, 여백의 미가 담겨 있다. 서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한 발은 자신의 세계에 걸쳐놓는 것처럼,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절제하고, 많은 말을 뱉기보다는 침묵이란 여백을 택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밀려오는데, 특히 마지막 이별 장면은 극에 달한다. 그동안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지지 않는 장면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현재의 삶을 위해 아름다운 과거의 시간을 부여잡지 않고 떠나보내는 그 순간의 감정은 나라와 인종을 넘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경험했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성숙한 성장을 꾀한 세 사람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중 정체성을 갖는 이민자의 고민
<패스트 라이브즈>는 심심하면서도 담백한 멜로 드라마이지만, 그 안엔 매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자의 삶이 녹아져 있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셀린 송은 <넘버 3>의 송능한 감독 친딸로,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실제 이민자의 삶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이 작품에 녹여낸 감독은 노라로 하여금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미나리> 시리즈 <파친코> <성난 사람들> 등 다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이 나온 상황에서, 셀린 송은 이 작품들보다 이민자 개인의 깊은 내면적 고민을 다룬다.
한국이자 캐나다인, 그리고 미국인인 노라의 경우, 현재의 삶은 미국인이다. 한국, 캐나다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놓고 온 인생(또는 전생)이다. 노라가 해성을 만나 겪는 일련의 내면적 갈등은 자신이 미국인의 삶을 살기로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서양 문화권에서 아웃사이더로 사는 한국인, 더 나아가 동양인들의 정체성 고민과 아픔이 녹아 있다.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셀린 송 감독은 해성에게 말하는 노라의 이 대사에 그 복잡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리고 슬프고도 힘겹게 해성과의 성숙한 이별로 마음속 존재했던 나영이와 작별을 고한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자신은 캐나다인이라고 밝힌 것처럼, 노라 또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생의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문어체 대사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하며, 섬세한 연기와 감정선이 종종 일탈하지만, 그럼에도 인연으로 묶인 이들의 관계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가슴에 묻고 각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들.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은 재회할 것이다. 이번 생은 선한 인연 중 하나였으니까.
사진제공: CJ ENM
평점: 3.5 / 5.0
한줄평: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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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토반>으로 보는 1995년 vs 2020년 세대 공감 직장 생활!
1995년 을지로, 회사 토익반을 같이 듣는 말단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그들의 우정과 연대 속 뿌듯한 성장을 공감과 재미, 감동으로 그려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배우들의 기대 이상의 만점 케미로 호평을 자아내고 있다.
일주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꾸준한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통해 1995년을 살아간 직장인과, 2020년을 살고 있는 직장인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찐" 직장 생활을 탐구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직장 생활!
입사 8년차 말단 사원인 세 친구가 거대 기업에 맞서 싸워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90년대 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회사 생활을 리얼하게 담아내 1995년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공감을, 2020년 현실 청춘들에게는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삼진그룹’의 말단 사원 세 친구,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뭉친다. 자신들만의 아지트인 옥상에 올라가 과자를 먹으며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퇴근 후에는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푼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세 친구의 스트레스 극복 방법은 2020년 직장인들에게도 현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동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직장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다.
그땐 그랬지~! 이젠 볼 수 없는 직장 생활!
한편, 2020년에는 볼 수 없었던 1995년 회사 생활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먼저, 1995년에는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사무실이나 회의실 테이블 위에 담배와 재떨이가 필수품처럼 비치되어 있었던 90년대를 그대로 재현해낸 ‘삼진그룹’ 사무실은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살려냈다. 마케팅부 회의 중 담배를 피우는 반은경(배해선) 부장과 페놀 유출 사건으로 ‘삼진그룹’을 취조하는 검사(김태훈) 등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 꽤 낯설다. 담배의 유해성과 간접흡연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2012년부터 공중이용시설의 흡연이 전면 금지되어, 지금은 보지 못하는 풍경이 되었다.
두 번째로 90년대에는 팀원들의 커피를 타는 일을 누군가 전담하는 것이 당연했다. ‘삼진그룹’ 말단 사원들은 상사와 팀원들의 취향에 맞게 알아서 탁탁 커피를 타는 일이 출근해서 아침에 하는 중요한 업무이다. 유니폼을 입은, 전 부서의 말단 직원들이 탕비실에 모여 커피, 설탕, 프림을 비율에 맞게 타는 모습은 1995년 직장 생활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격한 공감을 모으고 있다. 특히, 자영이 각자의 취향에 맞게 커피 10잔을 12초 만에 타내는 신기록 보유자인 만큼 얼마나 많은 커피를 탔을지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 점심 식사 후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캡슐 커피나 믹스 커피를 취향별로 각자 알아서 마시는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과 20여 년 전의 회사 풍경과 문화다.
세번째, 90년대 말단 사원들은 상사의 지시라면 뭐든 해내야만 했다. ‘삼진그룹’ 말단 사원들은 구두닦이 배달, 담배 심부름, 재떨이 비우기, 짐 옮기기 등 회사 내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한다. 전날 야근하며 부원들이 먹었던 야식을 치우고, 담배까지 사서 책상 위에 놓는 말단 사원들은 언젠가 진짜 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며 버틴다. 직급과 무관하게 누군가의 서포트를 넘어, 각자의 고유한 업무를 하는 현실 청춘들과는 다른 낯선 모습을 보인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서로 달라 더 눈에 띄는 개성과 매력. 그리고 탄탄한 연기력으로 뭉친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입사 8년차 말단 사원들이자 회사와 맞짱 뜨는 세 친구로 분해 전 세대, 남녀노소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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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액션 / 역시 퓨리오사 / 안야 테일러 조이의 강렬한 카리스마 / 아역 배우의 독기어린 눈빛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으로 엔드크레딧 전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영상이 잠시 나옵니다.
엔드크레딧 후에는 있나 싶은 허무한 영상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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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남산의 부장들'과 관련된 3가지 이야기/예고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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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재규는 누구인가
2.코리아 게이트에 대하여
3.그는 왜 방아쇠를 당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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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 메인 예고편
3년 전 엄마가 살해된 후, 소녀 ‘자허’와 아빠의 삶은 엉망이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아빠와도 마음 속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소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엄마를 죽인 소년 ‘유레이’와 마주치게 된다.
예상보다 빨리 석방된 그를 보고 소녀는 분노에 휩싸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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