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5-02-02 22:31:58
아무도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벤지의 말
<리얼 페인> 스포일러 없는 리뷰
오랜만에 만난 너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평범한 직장인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다. 통화하느라 바쁜 데이비드. 아마 사촌 벤지와 이야기하는 중일 것이다. 벤지(키에런 컬킨)는 데이비드의 사촌으로,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지냈다. 태어난 지 3주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사람. 말이 친척이지 사실상 친구나 다름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폴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분주한 데이비드는 시간에 쫓기듯 공항으로 향하고, 오랜만에 벤지와 재회한다. 여행을 시작한 두 사람은 잊혀져 가던 수많은 추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길을 찾아 떠나가리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로드무비에 속한다.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순한 여행담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는 두 개의 여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데이비드와 벤지가 함께 할머니가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물리적 여정이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되짚는 내면의 여정이다.
로드무비에서 ‘왜 여행을 떠나는가?’는 중요한 질문이다. <본즈 앤 올>에서는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과정이 핵심이었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는 가족의 유대감이 여행의 주된 의미였다. <리얼 페인> 역시 여행의 이유와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특히 두 사람이 ‘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단순히 친척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인간관계에서 결함과 공감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 결함을 정면으로 다룬다. 여행 중 드러나는 두 사람의 결함과 주변 인물들의 공감이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또한, 영화는 역사적 배경을 중요한 장치로 활용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영화의 배경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할머니를 떠올릴 때의 애틋함에도 이 역사적 맥락이 작용한다. 할머니가 겪었던 상처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상처라는 모티브는 결국 벤지와 데이비드, 그리고 여행에 합류한 사람들의 내적 결함과 연결된다. 영화는 개인의 상처와 민족의 상처를 함께 조명하며, 공감이라는 영화의 핵심 주제를 더욱 강조한다.
공감의 화법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벤지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벤지는 자유롭고 유쾌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만큼 남들과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샤워 중에도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 피아노 연주도 할 줄 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그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벤지의 행동을 통해 그의 내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벤지는 샤워 중 음악을 듣기 위해 데이비드의 휴대전화를 빌린다. 이 장면은 영화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비극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벤지의 행동을 보며 ‘이 사람은 왜 2025년에도 휴대전화가 없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벤지의 개인사가 직접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도록 연출된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 후반부에서 음악이 벤지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영화의 러닝타임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이를 통해 벤지뿐만 아니라 관객도 그와 교감하도록 유도한다.
영화가 실제 역사와 교감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초반에 벤지와 데이비드가 어떤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곳에는 군인 동상이 있다. 벤지는 동상과 함께 포즈를 취하며 “실감 나?”라고 묻는다. 실감이 날 리가 없다. 하지만 벤지는 이러한 존재 양식의 차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현상의 이면에 깔린 무언가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인물이다. 이런 그의 섬세한 감성은 영화 내에서 여러 장면과 충돌하며 인상 깊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우울함을 체화하다
벤지를 연기한 키에런 컬킨의 연기는 대단했다. 벤지는 특이한 만큼 깊은 우물을 판 듯한 인물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4차원’ 캐릭터로,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단순한 기행으로 보이면 안 된다. 벤지는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벤지가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눈빛에 슬픔이 있더라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혼자이고 싶은 사람은 없어, 데이비드.” 이 대사는 각본의 뛰어남을 보여줌과 동시에, 배우가 극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컬킨은 이 대사를 단순히 감상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감정을 과하게 표출하지 않으면서도 벤지의 내면을 전달한다. 벤지는 때로는 생생하게 날뛰지만, 동시에 그 우울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애프터썬>의 캘럼(폴 메스칼)의 연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컬킨의 연기가 가진 깊은 울림을 더욱 강하게 느낄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이 유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롭다는 말
이 영화는 거울 같은 작품이다. 우리 내면의 벤지를 비추고, 데이비드를 확인하게 만든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만나거나 만날 ‘상처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교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한다. 엔딩은 관객에 따라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마무리였다.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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