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4-08 11:45:32
이렇게까지 해야 살아남는걸까
- <로비>(2025)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인 제도와 틀 안에서 목표를 추구하고, 노력과 도전으로 성취를 이루려 한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서는 순간, ‘정정당당’이라는 가치가 불리하게 작용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도권 밖의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아도, 주변에선 불법·탈법까지 종용하는 유혹이 강력하게 다가온다. 영화 <로비>는 바로 그 ‘유혹’에 휘말린 한 인물이, 회사와 동료를 살리고자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끝까지 알 수 없지만, 관객은 그가 맞닥뜨리는 부조리와 부패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과연 어디까지 해야 할까?'
영화는 주인공 창욱(하정우)이라는 사업가의 절망적 상황으로부터 시작한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나빠지고, 직원들을 해고해야 할 위기가 닥치는데, 그는 정정당당하게 정부 지원을 받거나 공무원을 설득하려 한다. 그런데 잘나가는 업체나 경쟁자들은 ‘로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고, 창욱은 자신이 너무 원칙에만 매달리고 있진 않은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배경음악이나 화려한 액션 없이도, 오직 사람들의 말과 행동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조여 오는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취한다.
[첫번째 감정] 창욱의 절박함
창욱은 나름 괜찮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는다. 정부 고위직에게 찾아가 장점을 설명해 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창욱의 모습은 '왜 이렇게까지 외면당해야 할까?'라는 물음을 관객에게 던진다. 그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주목해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까지 있나’ 하던 창욱도, 회사가 무너질 상황이 되자 결국 로비에 손을 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는 너무도 어색해한다. 사람들을 술자리나 골프장으로 초대해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전혀 몸에 붙지 않는다. 관객은 창욱이 습관적으로 '이건 아닌데…'라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그의 절박함과 윤리적 갈등을 동시에 본다. 그러나 사업이 살아나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계속 몰아붙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창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무리 절박해도, 결국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라는 시스템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생하며 로비를 벌이지만, 수많은 사람과 금전이 얽힌 현실은 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화 내내 창욱의 절박함은 더욱 커지고, 그럴수록 그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이게 옳은 길이었나?라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두번째 감정] 광우의 욕심
광우(박병은)는 창욱의 오랜 친구이자, 창욱이 만든 기술을 슬쩍 가져가 버려 다른 경쟁사를 만든다. 광우가 의도적으로 창욱을 배신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세상살이의 묘수라고 생각했는지는 애매하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는 비즈니스 사회에서 손쉬운 방법으로 성공해 가는 전형을 보여준다.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기보다, 로비와 인맥으로 모든 판을 뒤집어 버리는 인물이다.
광우의 방식은 지극히 능률적이고 노골적이다. 접대와 선물을 아끼지 않고, 고위직들을 하나씩 끌어들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그런 식으로 얻은 이익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광우에게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없다. 영화의 전개상 광우가 보여주는 사악함은,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비와 청탁 문화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러한 승리가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하고 의미가 있는지다. 친구의 것을 빼앗으면서까지 배를 불리는 모습을 보면, 관객은 뒷맛이 꽤나 쓰다.
영화는 광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기업들이 정부 결정권자의 눈에 들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겉치레 뒤에는 늘 접대와 뒷거래가 있고, 그것이 부서지지 않는 기업 생태계의 축이 되는 상황. 광우의 욕심은 극도로 노골적이고, 가끔은 코미디에 가깝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 장면들을 지켜보며, 어딘가에서 지금도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겠지라는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세번째 감정] 최실장과 조장관의 추악함
로비의 대상이 되는 최실장(김의성)과 조장관(강말금)은 처음에는 꽤나 그럴듯한 관료처럼 비친다.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좋은 기술을 고르고, 적합한 기업을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제도권 내에서 올바른 절차를 지키는 척한다. 그러나 로비가 본격화되자, 그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는 감독이 블랙코미디적으로 풀어내면서, 처음부터 대놓고 악역인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누구든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깔아놓는다.
최실장은 유명 골프 선수나 연예인에게 집착하며, 은근슬쩍 성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처음엔 그저 점잖은 어른으로 비쳤던 그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아이처럼 떼를 쓰고 짜증 내는 모습은 당혹스럽다. 그가 점점 더 바닥을 드러내는 과정을 보면, 이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를 체감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최실장은 로비라는 것을 넘어, 자기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하려 드는 전형적 부패한 관료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장관(강말금) 역시 처음엔 골프나 경제정책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곧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나 인물을 함부로 대하고, 물건처럼 부리려 하는 장면은 혐오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녀는 정부 정책을 공정하게 다뤄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결정권을 남용한다. 이로써 최실장과 조장관이 단순 관료를 넘어, 권력을 쥐고 이익을 취하는 부조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정우 감독의 개성이 잘 드러난 블랙코미디
<로비>는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현재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기업 운영이 힘든 이유와 청탁 문화가 왜 근절되지 않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살아가면 결국 낙오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영화의 결말은 완전히 어둡지만은 않아, 마지막에는 일말의 통쾌함을 남긴다. 관객이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도록 하는 작은 장치가 깔려 있는 셈이다.
이번 작품은 하정우의 세 번째 연출작이기도 하다. <롤러코스터> 때 보여줬던 예측 불가의 병맛 코미디보다는 훨씬 절제돼 있지만, 군데군데 배치된 대사가 유쾌하고 날카롭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최실장 역의 김의성은 그가 잘하는 얄미운 악역을 제대로 소화하면서, 점점 망가지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조장관을 연기한 강말금 역시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고위직 관료가 가진 알 수 없는 권력욕과 사적 욕심을 한껏 표출한다. 이 밖에도 유명 배우들이 깜짝 출연해 다채로운 재미를 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왜 로비를 안 하면 불리해지는가다. 그리고 이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은 왜 그 안에서 발버둥칠 수밖에 없나라는 씁쓸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어두운 에피소드 속에서 엿보이는 인물들의 반전과 웃음 포인트가 중간중간 통쾌함을 선사한다.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톤이 <로비>만의 매력이다.
하정우 표 연출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작품도 충분히 흥미롭게 감상할 만하다. 웃음을 주면서도 뼈아픈 현실을 꼬집는 솜씨가 여전하고, 배우들의 열연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동시에, 기업의 생존 문제와 정치권력의 이면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지금 이 나라에선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만약 블랙코미디 장르를 즐기고, <롤러코스터>나 <허삼관>에서 하정우의 개성 넘치는 연출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면, <로비> 역시 한 번쯤 극장에서 관람해보길 권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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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 뚫고 금고터는 이야기, 반만 성공
중학교 때부터 동네 비디오 대여 가게를 자주 방문해 영화들을 빌려봤다. 우연히 조지 로메로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1978)을 빌려봤고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너무나 재미있게 봤다. 느릿느릿한 좀비가 사람들을 먹으려 다가오고 그것을 어느 정도는 피해 보지만, 주인공들은 엄청나게 많아진 좀비 무리로부터 다 도망가지는 못한다. 아마도 사람이 사람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사람끼리 싸우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내 머릿속에 강력하게 잡아둔 것 같다. 쇼핑몰에 모여 필요한 생필품을 얻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얻었지만 내부 싸움으로 외부의 좀비들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좀비 영화들을 빌려봤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들도 있지만, <죽음의 날>(1985), <랜드 오브 데드>(2005) 같은 조지 로메로의 후속작들을 봤고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바탈리언>(1993) 같은 영화도 보게 되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좀비 영화는 완전한 B급 장르였고, 그런 영화들을 본다고 하면 조금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꽤 잔인한 공포영화에 속했고, 각각의 영화들이 가진 스토리도 크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었기에 완전한 마이너 영화들로 취급되었다.
2003년에 등장한 영화 <28일 후>는 대니 보일이 연출한 일종의 좀비 영화다. 여기서부터 달리는 좀비가 등장해 꽤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4년 잭 스나이더 감독이 연출한 <새벽의 저주> 리메이크 영화가 개봉하며 좀비 영화가 많은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느렸던 좀비가 속도를 가지게 되면서 영화의 전개 속도도 빨라져 여름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 다른 주제, 다른 감독의 후속편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B급 영화라는 인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워 Z> (2013)가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고, 한국에선 <부산행>(2016) 이 개봉해 천만 관객을 넘겼다. 이런 좀비 영화들이 큰 규모로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데 각종 드라마들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니 좀비가 이제는 일반적인 소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는 좀비 영화를 본다고 해도 더 이상 이상하게 쳐다보니 않는 시대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했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만든 <새벽의 저주>의 속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프리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설정 자체가 다르고 좀비의 특성도 조금 다르게 묘사된다. 아마도 잭 스나이더는 과거 자신이 리메이크했던 조지 로메로의 세계관에서 좀 더 확장된 좀비 버전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아미 오브 더 데드>에는 알파라는 좀비의 왕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알파에게 직접 물려 좀비가 된 존재들은 일종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다. 알파가 아닌 일반 좀비들에게 물린 사람들은 과거 우리가 아는 느릿한 좀비가 된다.
사실 <새벽의 저주>의 스피디함과 박진감을 기대했다면 대부분 실망할 것이다. 최근에 나온 <부산행>, <반도>, <월드워 Z> 같은 영화들과 색깔이 다른 좀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속도감이 별로 없다. 그리고 잭 스나이더가 좋아하는 슬로우 모션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스콧(데이브 바티스타)이 팀을 조직하여 좀비 격리 구역인 라스베가스의 금고에서 돈을 가지고 오는 것이 내용인데, 팀을 조직하고 들어가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후반부 액션에서도 크게 속도감이 증가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영화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과거 B급으로 취급되던 좀비 영화와 블럭버스터 좀비 영화 중간 어딘가에 이 영화가 위치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느릿한 좀비들을 처치하고 피해 가지만 엄청난 숫자의 좀비들은 위압감을 주는 장애물이 되고, 더 위험한 좀비가 등장해 그와 대결을 벌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과거 좀비 영화의 감성과 최근 트렌드의 좀비 영화를 같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의 후반부에만 몰려있는 액션 장면들도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금고를 터는 이야기와 알파 좀비로부터 탈출하는 전개가 같이 이어진다. 물론 이런 어중간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 영화에 금고를 턴다는 하이스트 영화의 내용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하이스트 영화로서 그 구성이 깔끔하다고 할 수 없고, 좀비 영화로서의 매력이 완전히 돋보인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중간한 느낌이 있다.
잭 스나이더가 실제로 만들고 싶었던 건 <새벽의 저주>가 아니라 <아미 오브 더 데드> 버전의 좀비 영화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온전히 자신만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구성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가 만들어낸 약간은 다른 좀비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과거 B급 좀비 영화를 보던 그 감성과 최신 좀비 영화의 감성이 내게는 잘 통했던 것 같다. 알파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집단을 형성한 것을 보면 떠오르는 영화는 <나는 전설이다>(2007)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다. 그 영화에서도 흡혈귀들이 어떤 조직을 형성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의 결말을 좋아하는데, 인간들을 두려워한 흡혈귀가 주인공에게 죽음의 약을 주고 선택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아미 오브 더 데드>의 알파와 집단들도 인간들이 두려워 그렇게 집단생활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나만의 생각도 해보게 된다.
좀비 영화에는 좀비보다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새벽의 저주>에서 아무 생각 없는 좀비가 쇼핑몰 주변에 엄청나게 몰려온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미 좀비처럼 몰려다니며 세상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미 오브 더 데드>에는 잠자는 좀비가 나온다. 아주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건물 안에서 잠든 좀비들의 모습은 화려함 속에서도 회복에 힘써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도 떠올리게 한다.
아주 최신 감성을 가진 좀비 영화는 아니지만 조금 결이 다른 좀비 영화인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잭 스나이더의 영화다. 여느 좀비 영화가 그렇듯 감염자가 어디론가 가면서 끝이 나는데, 후속 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제작을 맡은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그들은 스나이더에게 전권을 줬고, 이번에 공개된 영화가 바로 감독판이라는 이야기도 스나이더가 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스나이더의 영화고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좀비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평을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너 장르였던 영화가 완전히 메이저 장르가 되었다. 나만의 좀비물이 모두가 이야기하는 좀비물이 되었으니, 그것이 혹평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된다는 그 자체가 참 좋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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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오브 더 데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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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져선 안될 원칙!
2018년 공개된 <어느 가족>은 '칸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고, 이내 "아카데미 국제 영화상"에 가장 강력한 후보작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쉽게도, 해당 부문의 수상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가져갔다)
이번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의 수상으로 전 국민이 기쁨을 나눴던 것처럼 일본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일본에 그런 가족은 없다!", 노부부의 죽음을 자녀들이 신고하지 않고서 연금을 받아 생활한 뉴스로 제작된 <어느 가족>이 받아든 일본 자국의 반응이다.이번 <브로커>가 건드는 "베이비 박스", '아이를 살리는 상자'로 좋게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1958년을 시작으로 지난 2015년까지 국내에서 국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약 17만명으로 특히, 2020년 "한국"은 "콜롬비아 - 우크라이나"에 이은 3위에 해당된다.
2004년 국회 보건복지위 고경화 의원에 따르면, '국내 입양은 219만 8천원 - 해외 입양은 961만 6천원'으로 입양기관이 입양 희망 부모로부터 요구하는 알선료의 차이는 5배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해외 입양으로 아이를 받는다면, 아이를 낳은 친모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다.1. 선의의 이중성
이야기가 시작되는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의 3자 대면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극 중. 베이비 박스에 들어온 아기 "우성"을 다른 이에게 파려는 "상현"과 "동수"는 자신들을 "사랑의 큐피드"로, 이를 경찰에 신고하는 생모 "소영"은 "브로커"로 바라본다.
신화에서 황금화살(사랑)과 납화살(거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끊어주는 "큐피드"와 사람들 간의 계약을 정리하는 "브로커"는 뭐가 다를까? - 이처럼 아이들을 파려는 매매범(상현- 동수)과 생모(소영)의 조합은 나를 비롯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나?혈연이 아닌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가족을 구성했던 감독의 전작 <어느 가족>처럼 영화 <브로커>는 그 궤를 따라간다.
극 중. "소영"이 "우성"을 버려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에피소드도 있겠지만, "비"를 시작해 "세차장"까지 "물"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장면들에 비결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내리는 비는 아이를 버리는 엄마의 눈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세차장에서 웃음꽃이 피어나도록 만든다.2. 그 마음, 알겠으나...
이런 이유에는 살인 현장에 있는 와인잔과 창문 바깥에 있는 바다로 판단할 수 있다.
분명히, 끔찍한 현장이지만 각자 담긴 것에 따라 마실 수 있고 볼 수 있듯이 "액체"란 담긴 용기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진다.
이처럼 승합차에서 탄 "상현"과 "동수", 그리고 "소영"은 가족의 모양을 갖춘다면,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이 탄 검은색 승용차는 이들의 어두운 이면(본성)을 말해 불안감을 키운다.영화 <라라랜드>에서 어두운 장면들이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면, 손을 잡고 키스를 하는 등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내 밝아지면, 잡았던 손들은 부끄럽다고 떨어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브로커> 역시, 어두운 화면에서 "우성"에 대한 생각과 "태어나줘서 고맙다"라는 "소영"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브로커>가 실망스러웠다.3. 금기를 깨버린 breaker
상담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것은 절대로 개입해선 안 되는 것이다.
법의 소관에 따라서, 사기죄로 처분을 받을 수도 있기에 환자 본인이 치료 방법을 선택하게 우리는 그 방법을 소개하고 안내해야 한다.
극 중. "소영"이 "엄마 혼자서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라며 "동수"와 갈등을 빚고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내비쳐 관객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며, "동수"의 용서를 받아낸다.
그런 점에서 <브로커>가 관객들에게 말하고 보여주는 "사정"은 위험하다.그렇다면, 이와 비슷하다던 <어느 가족>은 어땠을까?
친모에게 돌아온 "유리"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매달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있어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오빠 "쇼타"를 비롯해 그날 자신을 구해준 이들을 찾으려는 것으로 보였지만, 감독은 이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첫 장면에선 난간에 매달려있지 않았다면, 마지막 장면에선 자신이 나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이다. - 참고로, 상담이 잘될 수 있는 원동력에는 환자 본인이 개선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야만 한다.· tmi. 1 -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에겐 짝수 징크스가 존재한다. (짝수번째 영화는 어김없이 좋다! - 2번째 <원더풀 라이프1999>, 4번째 <아무도 모른다2004>, 6번째 <걸어도 걸어도2008>, 8번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10번째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이 있다)
· tmi. 1.1 -다만, 9번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시작으로 11번째 <태풍이 지나가고2016>, 13번째 <어느 가족2018>으로 이를 해결한 것으로 보였는데... (참고로, 이번 <브로커>는 15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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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뷰티풀 보이 / Beautiful Boy
/ 감상 /
영화 러닝타임 내내 약물 중독 극복과 실패가 반복된다.
아버지의 감정선이 영화의 주된 바이브이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약물에 중독 된 아들의 모습보다 아버지의 노력에 집중을 하며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반까지 부성애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누가 뭐라하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대단함이 후반부에 가서 미련함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이런 물심양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약물에 손을 대는 아들을 보니 내가 한숨이 절로 나왔고, 그런 아들을 말로 타이르는 아버지의 행동이 보는 내내 답답함을 자아냈다.
아들을 타이르는 것만이 답일까? 싶었다.
한번쯤은 큰소리를 내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니까 이게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조금 더 단호하게 대응을 하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영화의 결말때문이다.
이 영화는 결국 약물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아들과 그 아들을 포기해버린 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채 끝나기 때문이다.
결국 변한 건 하나 없는 결말이다.
약물중독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좋으나,
이런 힘빠지는 결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감정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타임 내내 극복과 실패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재를 뿌려버리니.. 뭐랄까 아버지가 그간 해온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남은건 조금 더 망가져버린 아들과 가족들 밖에 없으니까.. 상황이 더 악화 된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아버지마저 포기해버리는 모습을 보니
아들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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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깊은 대사가 있었다.
약물중독자 자식을 둔 부모들의 모임에서 한 엄마가 말한 대사 였다.
" 약물중독자의 가족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애도하며 살아간다. "
이 대사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아버지가 그렇게 노력했던 이유는 애도하는 마음에서 였던 것이다.
약물에 손을 대기 전의 해맑았던 아들의 영혼을 애도하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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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품. 폴란드 유대인 슈필만의 생존기를 다룬 영화이면서 독일군이 유대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했는가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있던 유대인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 가운데 수십만 명이 독일군이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사건 또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지금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거짓 논문을 써내는 램지어 같은 인간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학살 문제는 매우 신중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비유대인 유럽인들은 독일의 만행에 대한 공분과 함께 비유대인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를 보인다. 즉, 자기들(독일인이 아닌 비유대인 유럽인)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책임은 없으나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히틀러와 독일사회민주당과 결별하면서 독일의 역사적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피해자인 유대인에게 사죄한 바 있다. 또한 앞으로 히틀러의 나찌즘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극우 정당의 출현, 극우 집단의 발호를 근본에서 막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물론 다큐멘터리, 자서전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자본을 쥐고 흔드는 유대인 집단은 헐리우드에서 유대인이 박해당하는 내용의 영화를 주기적으로 생산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이스라엘'을 건립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폭력으로 차지하고, 자기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과 과거 유대인 박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 유대인 박해 사건은 그 자체로 심각한 전쟁범죄이며, 보편적 인류의 자유, 평등, 존중의 정신을 말살한 최악의 사태였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은 그렇게 박해당한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유대인의 의지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이 저지른 것보다 더 잔인한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박해, 집단 살해 사건을 상업영화로 만들거나 다큐멘터리, 자서전, 역사책 등으로 만들어 꾸준히 알리는 것은 유대인의 권리다. 하지만 그 권리를 남용하면서 마구 휘두르면 그건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우리(한국인)는 유대인을 바라볼 때, 양가 감정을 갖는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역사적 피해자라는 사실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유대인은 가해자인 독일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공식적, 역사적으로 사죄했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반면 한국인을 가해한 일본은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코스프레를 하며 피해국과 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헌법을 바꿔 침략전쟁을 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는데, 일본은 패전 이후 지금까지 극우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피해국에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유대인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국가'가 없었지만, 전쟁 끝나고 '국가'를 세웠다. 유럽과 다른 대륙을 떠돌던 유대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물적 공간을 마련한 것이니 그들로서는 전쟁과 박해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끔찍한 경험을 한 유대인들이 가까이 사는 다른 민족을 야만적으로 학살, 학대하기 시작한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당한 박해와 학살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세계 사람들은 유대인을 보면서 인지부조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유대인 '개인'이 당한 경험과 서사는 비극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써의 유대인이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학살은 피해자 '개인'으로의 유대인까지 혐오하게 만드는 범죄이자 만행이다. 유대인 가운데도 노엄 촘스키처럼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비판적, 합리적 유대인도 많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침략하며,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을 빼앗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서히 말려죽이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 지역에서 패권 국가로 행세하고 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즐거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마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을 수탈하고, 한국인을 학대하며, 농락했던 것과 똑같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대하고,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런 만행과 오만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폭력으로 흥한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진리도 있듯이, 이스라엘은 폭력을 기반으로 서 있는 국가이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그런 행동이 정신분석에서 '가해자와 동일시'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동 인근 국가들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만들고, 멀리 떨어진 미국과 유럽의 몇 나라들-그들이 지금은 가장 폭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마치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다.
이 영화에서도 유대인들이 독일군의 폭력으로 서서히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독일군의 만행은 끔찍하고, 말할 수 없이 잔인하며, 악랄했다. 유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스실로 끌려가야 했고,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을 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의 비참함에 감정이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까닭은, 현재의 유대인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하는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대인 슈필만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독일군을 이스라엘군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이 나온다.
이미 너무 많은 '피해자 유대인'을 그린 영화가 나왔고,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이제 '피해자 유대인'을 다룬 영화는 더 이상 관심을 끌기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유대인'은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은 '가해자 유대인'의 이미지가 뚜렷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그동안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고, 팔레스타인의 회복을 돕지 않는 이상, 유대인은 전쟁 때의 '독일군'과 같은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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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사는 진정으로 '존엄'한 것인가
글로벌 프로젝트인 10년 프로젝트를 아는가?
2015년 홍콩에서 시작되어 대만, 태국, 일본에서 진행된 글로벌 제작 프로젝트이며 10년 후의 각자의 나라를 감독들이 단편으로 만들어 엮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이 프로젝트 중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수입 및 개봉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플랜 75>는 이 중 동명의 단편을 동일한 감독이 장편화한 영화이다.
멀지않은 미래,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75세가 되면 국가에서 안락사를 권장 및 지원하는 "플랜 75"라는 제도가 생기게 된다.
플랜 75 제도를 활용해 안락사를 준비하는 노인들과 속에서 근무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안락사, 존엄사는 현재 일부 국가에서 불치병이나 말기 환자에 한해 실행되기도 하는 만큼 현실에 대입해 많은 고찰을 하게 만든다.
동시에 국가 체제에서 엄연한 죽음을 권장하고 지원하며, 그로 인해 무언으로 안락사를 떠미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공포영화 그 자체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존엄사가 진짜 존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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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위도우> - '히어로, 딸, 언니, 친구였던 나타샤의 삶'
블랙 위도우 (Black Widow)
개봉일 : 2021.07.07 (한국 기준)
감독 : 케이트 쇼트랜드
출연 : 스칼렛 요한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와이즈, 데이빗 하버, 레이 윈스턴, 윌리엄 허트
‘히어로, 딸, 언니, 친구였던 나타샤의 삶’
어벤져스가 처음 개봉한지 근 10년.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로 긴 시간을 함께하고 엔드 게임을 마지막으로 어벤져스를 떠나는 블랙 위도우, 나타샤를 위한 마지막 배웅 같은 영화 <블랙 위도우>가 드디어 개봉했다. 개봉한지 근 3주가 지나가고 있는.. 아주 늦은 시점이지만 나타샤를 보내는 마음으로 늦은 글을 써본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1년 넘게 늦춰지는 바람에 그동안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무사히 <블랙 위도우>가 개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큰 감동이었다.
<블랙 위도우>는 시빌 워와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어벤져스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고 로저스(캡틴 아메리카)가 잠적한 후, 남겨진 나타샤의 이야기다. 그동안에 깊이 언급되지 않았던 나타샤의 어린 시절과 ‘레드룸’에 대한 비밀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데, 지나치게 어둡거나 무겁게 다뤄지진 않는다.
이전 영화들에서는 나타샤가 레드룸에서의 기억과 그 안에서 잃어버린 것(어린 시절이나 가족, 여성으로서의 삶 등..)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는데, 어벤져스라는 새로운 동료이자 가족들을 만나며 그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난 가족이 없다.’고 말하던 그녀가 어벤져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갑자기 일어난 어벤져스의 내부 분열은 나타샤를 다시 한번 고민에 빠트린다.
<블랙 위도우>는 레드룸에 얽힌 음모와 그것을 전부 깨부수기 위한 여정이자 나타샤가 완벽하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죄책감을 덜어내는 과정, 지금껏 아팠던 만큼의 성장을 한 번에 이뤄내는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잠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나타샤는 아이언맨처럼 강철 슈트를 입은 것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실험을 받은 것도, 토르처럼 신도 아니다. <블랙 위도우>는 인간의 몸으로 몇 가지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도 전혀 ‘나약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던 그녀가 숨기고 있던 상처와 감정들을 밖으로 내놓으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슈퍼 히어로 블랙 위도우이기 전에 인간 나타샤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쩌면 나타샤가 어벤져스 내에서 신체적으론 가장 약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과 정신은 다른 히어로들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타임라인 이후에 인피니티 워, 엔드 게임에서 보여준 결단력과 용기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더 그런 확신이 든다.)
나타샤가 인피니티 워에서 짧은 금발머리를 하고 다시 등장했을 때, “그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었구나” 하고 짐작하긴 했으나, 그때는 그저 그녀의 외적 변신에 더욱 크게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항상 아프고 씁쓸해 보였던 그녀가 새로운 머리, 새로운 옷을 입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갈라섰던 동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킬러로서 살아온 세월을 속죄하며 세상을 위해 싸우던 그녀가 더욱 강한 사명감을 갖게 된 이유가 이 영화 <블랙 위도우>에 담겨있다. 모든 게 가짜라고 생각했던 나타샤의 삶에 ‘진짜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녀가 마지막으로 몸을 내던져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이제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블랙 위도우 시놉시스
어벤져스의 히어로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 (스칼렛 요한슨)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레드룸의 거대한 음모와 실체를 깨닫게 된다.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의 위협에 맞서 목숨을 건 반격을 시작하는 ‘나타샤’는 스파이로 활약했던 자신의 과거 뿐 아니라, 어벤져스가 되기 전 함께했던 동료들을 마주해야만 하는데… 폭발하는 리얼 액션 카타르시스! MCU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할 첫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끽하라!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나타샤는 오하이오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확히는 3년간 러시아 스파이인 가짜 엄마 아빠와 피를 나누지 않은 동생 엘레나와 함께 ‘위장 가족’으로 살았다. 나타샤는 자신에게 진짜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가 아닌 ‘킬러’라는 물건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 레드룸에서의 어린 날들과, 킬러가 되어 살아온 시간들을 지나, 모든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어벤져스가 되어 세상을 위해 싸우던 나타샤는 ‘이제 진짜 가족이 생겼나’싶었지만 어벤져스가 와해되고 다시 혼자가 된다.
“이제 떠날 거예요.”라고 말하며 수트를 놓고 추적을 피해 달아난 나타샤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아픈 어린 시절의 흔적을 마주한다. 그건 바로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는 ‘레드룸’과 여전히 소녀들을 세뇌시켜 위도우로 키우고 있는 드레이코프. 끝났을 거라 생각했던 드레이코프의 악행은 계속되고 있었고 지켜주는 어른이 없었던 소녀들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을 해방시켜줘.”
나타샤가 레드룸을 벗어난 후 남겨졌던 동생 엘레나는 다른 위도우의 도움으로 해독제를 맞고 탈출에 성공해 나타샤에게로 향한다. 나타샤는 레드룸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음을 알고 엘레나와 함께 해독제를 들고 가짜 엄마 아빠였던 멜리나와 알렉세이를 찾아간다.
“내게도 진짜 가족이었어.”
나타샤, 엘레나, 멜리나와 알렉세이가 한 식탁에 모이고, 그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칭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3년의 시간 동안 쌓아왔던 습관과 작은 추억들을 나눈다. 레드룸의 계획으로 이뤄진 ‘위장 가족’이었다는 비밀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에 ‘가족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정과 사랑은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타샤는 멜리나가 건넨 “절대 너 자신을 잃지마.” 라는 한마디로 자신을 붙잡고 살아왔고, 멜리나는 나타샤, 엘레나와 함께 찍은 사진첩을 간직하고 있었고, 알렉세이는 엘레나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타샤에 등에 들어있던 멍과 이들의 행동을 보며 슈트를 입은 히어로나 킬러, 대단한 작전을 행한 스파이이기 이전에 이들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널 두고 갈 순 없었어.”
“그 안에 너 있는 거 알아. 널 두곤 안 갈게.”
나타샤는 다시 한번 드레이코프와 레드룸에 맞서며 지금껏 자신을 심하게도 아프게 했던 시절들을 털어낸다. 그리고 그만큼 강해진다.
힘없는 여자아이들을 세뇌시키며 차고 넘치는 자원이자 재활용품이라고 칭하는 드레이코프. 그의 앞에 선 나타샤는 스스로 자신의 후각 신경을 손상시키며 드레이코프가 남겨둔 마지막 세뇌의 흔적을 제거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을 끊으면 드레이코프를 공격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기다려 그의 계획을 캐내는데 성공한다. 나타샤는 먼저 레드룸을 탈출하며 구하지 못했던 위도우들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탈출하기 위해 무너지는 레드룸에서 늦게까지 머물며 해독제와 정보를 챙긴다. 이번엔 ‘구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레드룸이 내려앉을 때, 대부분의 위도우들은 해독제를 맞고 탈출에 성공한다. 위도우 네트워크 정보를 들고 탈출하던 나타샤는 감옥에 갇혀있던 안토니오를 꺼내고 지상에서 다시 한번 격돌한다. 안토니오는 드레이코프의 딸이자 그가 세뇌를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1급 무기’다. 안토니오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어 마치 거울과 싸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적이자 나타샤의 오랜 죄책감의 중심이다. 나타샤는 자신의 거울처럼 움직이는 안토니오에게 해독제를 투여하는데 성공하고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나타샤의 진심 어린 사과는 자신이 탈출한 후에도 갇혀있었던 여러 위도우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전 세계에 퍼져있는 세뇌당한 위도우들, 그리고 괴로웠다며 무조건 부정하려 했던 위도우 시절의 나, 자신의 과오에 희생된 이들에게 건네는 말일 것이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겪고 있는, 거울 속 나와 같은 소녀들, 그리고 과오를 저지르던 그때의 나. 나타샤는 안토니오의 해독을 마지막으로 오래 묵은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젠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
“절대 너 자신을 잃지 마.”
레드룸의 파괴와 나타샤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가족들과의 만남은 나타샤가 자신도 행복한 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준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타샤를 지배했던 세뇌의 흔적들은 사라졌고,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던 위도우들도 해독제를 통해 자유를 되찾았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가족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엘레나는 여전히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동생이었다.
“난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이나 있더라고.”
모든 게 가짜고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음을 조금 더 뻗어보니 그들의 손이 있었고, 손을 내밀자 그들은 나타샤의 손을 잡아줬다. 위도우들도 알렉세이도. 그리고 어벤져스도.
“난 선물상자가 빈 통인걸 알면서도 다 열어보고 싶었어.
그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
가짜인 걸 알면서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아이’의 기분을 궁금해하며 빈 상자를 열었던 어린아이는 무사히 자신을 잃지 않고 어른이 되어 세상과 다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킨다. <인피니티 워>에서 만난 나타샤가 입고 있던 엘레나의 조끼와 어린 그녀의 모습과 같은 짧은 금발머리는 그녀가 가장 큰 결핍이라 느꼈던 어린 시절과 가족을 새롭게 정의했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엔드게임>에서 나타샤가 내렸던 결정은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 그에 대한 사죄와 사명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 지켜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나를 위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된 나타샤가 내린 가장 큰 결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슬픔과 함께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나타샤는 해독제를 맞은 위도우들에게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항상 자신이 행한 과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레드룸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나타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는걸, 그녀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빼앗긴 한 명의 위도우였다는 걸, 그녀의 희생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나타샤가 멜리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라고 위로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아쉬운 만큼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된 느낌이다. 그렇기에 그 뜻을 이해하며 이제 나타샤를 보내주고 새로운 세대를, 엘레나의 등장을 반겨줄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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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삼칠 리뷰 - 이름을 빼앗긴 소녀, 지옥에서 희망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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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발견한 가장 빛나는 만남”
열아홉 윤영은 엄마와 단 둘이 살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기도 하지만, 얼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장에서 일하는 청각 장애가 있는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뿐.
착한 마음과 성실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뜻밖의 사고는
윤영을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돌변시켜 교도소에 몰아넣고
‘윤영’이라는 이름대신 ‘이.공.삼.칠.’이라는 수감번호로 불리게 만든다.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10호실 동료들은 윤영을 지켜주기 위해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데…
반드시 돌려줄게 너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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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풍운3> 예고편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격돌!
가문의 해방을 위해 무술대회에 나선 임가의 ‘임동’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임동’을 찾아온 광도무관의 ‘오운’
두 영웅의 엇갈린 운명이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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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피버 드림> 공식 예고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아만다. 다비드라는 소년이 그녀에게 기억을 떠올리도록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아만다는 소년의 엄마가 아니고 소년은 아만다의 아들이 아니다. 점점 사그라지는 아만다의 시간. 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도록 강렬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강박적인 질투와 숨겨진 위험,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